지우개 / 김응숙
책상 서랍이 왈칵 쏟아진다. 투명 테이프를 찾는 중이었는데, 너무 세게 당겼는지 서랍이 쑥 빠진 것이다. 자잘한 문방용품들 사이로 허옇고 뭉툭한 지우가 히나가 눈에 띈다.
지우개에는 2334라는 숫자가 파란색 볼펜으로 적혀 있다. 2학년 3반 34번이라는 뜻이다. 커다란 미술품 지우개인 것으로 보아 딸아이가 중학교 시절 사용했던 지우개 같다. 한쪽이 심하게 닿은 지우개는 고분에서 출토된 오래된 유물처럼 윤기를 잃은 채 굳어져 있다. 집어 들고 보니 자잘한 금이 가득하다.
딸아이가 그림에 소질이 있다는 말은 학교 미술 선생님으로부터 들었다. 다른 일로 담임선생님을 찾아갔던 길이었는데, 교실로 찾아온 미술 선생님은 "제 딸이라면, 집을 팔아서라도 미술 공부를 시키겠어요."라며 딱 분질러 말했다. 먹고살기에 급급해 중학교에 보내놓고도 이 년이나 지나 처음으로 학교를 방문한 때였다. 차림새로 보나 모양새로 보나 대놓고 자식 교육에 투자할 형편이 아니라는 것이 빤히 보이는 모양이었다. 미술 선생님은 도내 학생 미술대회를 위해 시간이 날 때마다 방과 후에 아이를 지도해 왔노라 했다.
솔직히 그 뒤 딸아이가 얼마 동안이나 미술을 공부했는지 알지 못한다. 미술대회에서 두 번이나 상장을 받아 왔지만, 그것조차도 하루하루 쌓이는 생활이라는 퇴적층에 묻히고 말았다. 아마도 딸아이는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공부야말로 가장 저렴하게 학업을 이어갈 수 있는 계열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미술용 지우개는 서랍 깊숙이 치워졌으리라.
딱히 타고나게 머리가 좋은 것이 아니어서, 딸아이는 밤늦게까지 책상에 앉아있어야만 겨우 중상위권 성적을 유지했다. 아침이면 문제집들로 어지러운 책상 위에 지우개 똥이 가득하곤 했다. 정답을 찾기 위해 수많은 오답을 지운 탓이다. 작고 부드러운 공부용 지우개를 문질러가며 딸아이는 대학에 진학을 했고, 석사를 거쳐 박사과정까지 수료를 했지만 그것도 정답은 아닌 모양이었다. 박사논문 심사를 얼마 남겨놓지 않고 포기를 해버린 것이다.
이제 딸아이에게는 또 다른 지우개가 필요해졌다. 결실을 보지 못하고 흘려버린 이십 대의 황금 같은 시간들을 문질러 지워버릴 지우개가 말이다. 도대체 한 사람의 일생에는 얼마나 많은 지우개가 필요한 것일까.
나는 소녀 시절에 많은 시간을 상상으로 보냈다. 그 상상 속에는 빨간 벽돌집이 빠지지 않았는데, 하얀 나무 울타리에는 빨간 장미 넝쿨이 늘어진 집이었다. 어떤 날은 대문에서부터 현관, 거실 그리고 다락방인 내 방의 구조까지 세세하게 그리곤 했다. 비록 머릿속에서 그린 집이었지만 너무나 선명해서 언제라도 조감도쯤은 능히 그려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좁고 누추한 슬레이트집을 벗어날 수 없었던 현실이 지우개가 되어 서서히 벽돌집을 지워버렸다.
아나운서가 되겠다던 꿈은 중학교 중퇴로 일찌감치 지워졌고, 독학으로 사시를 보아 변호사가 되겠다던 가당찮은 꿈도 어머니의 병환으로 말끔히 지워졌다. 결혼해서 좋은 아내가 되고 싶었던 그림은 친정 걱정으로 마르지 않는 눈물에 번져 지워졌고, 좋은 엄마가 되었어야 했지만, 그것 또한 생활에 떠밀려 지워졌다.
누군가는 살아가는 것을 쌓아가는 것이라 한다지만, 나는 살아가는 것은 지워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어쩌면 현실은 커다란 지우개를 앞세우며 다가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기껏 써낸 답을 오답이라며 사정없이 지우면서 말이다.
그러나 살다 보면 지우고 지운 뒤에 단 하나의 답만이 남는 때가 오기도 한다. 탁류가 지나간 뒤에도 쓸려가지 않고 맑아진 시냇물 위로 내비치는 조약돌처럼 말이다. 그 조약돌은 유난히 반짝인다. 현실이라는 지우개도 그 하나의 답만을 지우지 않는 듯하다.
언젠가 지인과 함께 조그마한 빵 가게에 갔던 일이 떠오른다. 손수 꾸민 예쁜 가게에는 마흔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아가씨가 수제 빵을 팔고 있었다. 대학에서 일본어를 전공해 강단에 서기도 했지만, 빵 만드는 것이 좋아 지금은 빵 가게를 하고 있다고 같이 간 지인이 소개했다. 이렇듯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고 있으니 참 행복해 보인다는 말과 함께.
그런데 내 눈에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빵집 아가씨가 지워야만 했던 꿈의 목록들이 두루마리를 펼친 것처럼 보였다. 아니 느껴졌다. 이 답을 남기기까지 수많은 답들을 지워내며 아파했으리라. 지금의 행복은 제 몸을 지우개 삼아 그 무수한 꿈들을 지워낸 결과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들 들었었다.
지난 주말에 집에 들른 딸아이의 손에는 물집이 잡혀 있었다. 클라이밍이라는 실내 암벽 타기를 시작했다고 했다. 얼마 전부터 도자기 만들기를 배운다고 하더니, 어찌 된 일이냐고 물었다. 딸아이의 답은 도자기 만들기와 암벽 타기를 모두 한다는 것이었다. 밤늦게까지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겨우 휴식해야 할 오전의 몇 시간을 매일 그렇게 보낸다는 것이다.
둘 다 육체적 소모가 심한 취미들이 아닌가. 사진을 쉴 새 없이 몰아붙이는 모양새가 그냥 취미를 즐기는 것만으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딸아이에게 본격적인 지우기가 시작된 것은 아닐까. 가뜩이나 작은 아이가 살이 쏙 빠지고 핼쑥한 것이 닳고 닳아 작아진 지우개 같아 마음이 짠했다.
인생에 무슨 정답이 있으랴. 그러나 하나의 답에 정착하기까지 우리는 무수한 답들을 지워나간다. 그러나 답이 지워진다고 해서 답을 잃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답을 완성해 가고 있는 중인 것이다. 지우는 것이 답을 찾아가는 길임을 알기에 나는 딸아이를 믿고 지켜보기로 한다. 언젠가는 조약돌같이 단단하고 반짝이는 하나의 답이 딸아이의 마음을 사로잡을 것이다. 그때까지 이 지우개는 서랍 속에 다시 넣어두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