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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rl Barth(1886-1968)
칼 바르트의 생애와 업적
1886: 5월 10일, 스위스 바젤(Basel) 그렐링가(Grellingstr.) 42번지에서 아버지 요한 프릿츠 바르트 (Johann Friedrich Fritz Barth)와 어머니 안나 카타리나(Anna Katharina)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
1889: 아버지(Fritz Barth)가 스위스 베른(Bern) 대학 신약신학 및 교회사 교수로 취임.
1892-1904: 베른의 기독교 계통의 고등학교(Greies Gymnasium)에서 공부.
1904: 9월 17일 고등학교 졸업 국가시험(Abitur)에 합격하고, 베른 대학에서 신학공부 시작.
1906: 베를린(Berlin) 대학으로 옮겨서 공부함
1907: 마부르크(Marburg) 대학 및 튀빙엔(Tuebingen) 대학으로 옮겨감.
1908-1909: 마부르크에서〈기독교 세계: Die Christliche Welt>의 편집 조교로 일하면서, 신학사 (Diplom) 시험에 합격.
1909-1911: 제네바에서 사강사(Privatdozent)로 활동.
1911-1912: 자펜빌(Safenwil)에서 목회.
1912: 아버지 프릿츠 바르트 사망(칼 바르트 나이 26세 때).
1913: 부인 넬리 호프만(Nelly Hoffmann)과 결혼.
1914: 첫 딸 프란체스카(Franziska)를 낳음.
1915: 스위스 사회민주당 입당(Kanton주 Aargau), 첫 아들 마르쿠스(Markus)를 낳음
1917: 둘째 아들 크리스토프(Christoph)를 낳음.
1919: 9월 22-24일 탐바하(Tambach)에서 개최된 종교사회주의 전당대회에서 “사회 속의 그리스 도인(Der Christ in der Gesellschaft)”이란 제목으로 강연. /《로마서강해》 Roemerbrief 제1판 출판
1921: 셋째 아들 마티아스(Matthias)를 낳음.
1921-1925: 괴팅엔(Goetingen) 대학에서 개혁주의신학 담당 교수로 봉직.
1922: 《로마서 강해》 제2판 개정판 출판.
뮨스터(Muenster) 대학으로부터 명예 신학박사 학위 취득(1939년 취소되었다가, 1946년 다시 수여함). / 격 월간지 〈Zwischen den Zeiten〉 발행.
1925: 넷째 아들 한스 야곱(Hans Jakob)을 낳음.
1925-1929: 뮨스터 대학에서 교의학 및 신약신학 교수로 봉직
1927: 《기독교 교의학 개설》 Die christliche Dogmatik im Entwurf 1권 “하나님의 말씀론” 출간.
1930-1935: 본(Bonn) 대학의 조직신학 교수로 봉직.
1930: 영국 글래스고우(Glasgow) 대학으로부터 명예 신학박사 학위 취득. / 항가리 사로스파탁 대학의 명예교수로 추대 받음.
1932: 《교회 교의학》 Kirchliche Dogmatik I/1 (하나님의 말씀론) 출간.
1933: 6월, 《오늘의 신학적 실존》 Theologische Existenz Heute 출간 / 11월부터 투르나이젠(E. Thurneysen)과 함께 〈Zwischen den Zeiten〉에 실렸던 논문을 편집-수록함.
1934: 1월 4일, 바르멘(Barmen)에서 개최된 복음주의 개혁교회 자유총회(Die Freie Synode)에서 현재의 개혁파 신앙 고백 선언문 작성을 제안하는 등 교회 투쟁을 시작함. / 5월 16일, 고백교회 총회에 대비한 “신학분과 위원회”에 참석하여 “신학선언”을 기초 함. / 5월 31일, 바르멘에서 모인 독일 복음주의교회(DEK) 제1차 총회에서 “신학 선언” 채 택. / 10월 19-20일, 베를린-달렘에서 제2회 총회모임 - 바르트가 ‘형제단’ 회원으로 가입. / 11월 22일, ‘형제단’ 탈퇴 / 11월 26일, 바르트의 교수직(敎授職) 유보 통보 - 징계위원회 회부. / 12월 20일, 교수직 박탈(지방법원).
1935: 6월 14일, 베를린 고등법원이 지법의 선고를 파기하고 년간 봉급액의 1/5에 해당하는 액수 의 벌금형 선고. / 6월 25일, 스위스 바젤(Basel) 대학 교수로 취임.
1936: 우트레히트(Utrecht) 대학에서 명예 박사학위 취득.
1937: 성 앤드류(St. Andrew, Scotlans, Aberdeen) 대학에서 명예 박사학위 취득.
1938: 《교회 교의학》 Kirchliche Dogmatik I/2 출간. / 옥스포드(Oxford)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 취득. / 바르트의 저술집 독일 내에서 출판을 금지당함. / 바르트의 어머니 사망. / 9월 19일, 체코 프라하에 있는 로마드카(Josef Hromadka, 1889-1969)에게 편지를 씀.
1939: 뮨스터 대학은 1922년 바르트에게 수여한 명예 박사학위 취소.
1940: 《교회 교의학》 Kirchliche Dogmatik II/1 (신론) 출간.
1941: 6월 신학생인 셋째 아들 마티아스(Matthias)가 등산 중 추락 사망함.
1942: 《교회 교의학》 Kirchliche Dogmatik II/2 (예정론) 출간.
1945: 8월 21-24일, 프랑크푸르트(Frankfurt)에서 열린 ‘형제단 총회’에 참석. / 8월 27-31일, 트라이자에서 열린 ‘교회 지도자 회의’ 참가. / 《교회 교의학》 Kirchliche Dogmatik III/1 (창조론) 출간.
1946: 여름 학기에 본(Bonn) 대학의 초빙 교수로 특강. / 뮨스터 대학에서 명예 신학박사 학위 다시 수여 받음.
1947: 여름 학기에 본 대학에서 초빙 교수로 재차 특강. 베를린, 드레스덴(Dresden) 여행 방문.
1948: 8월 22-9월 4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Amsterdam)에서 열린 WCC 총회에 참석하여 “인간 의 무질서와 하나님의 구원계획(Die Unordnung der Menschen und Gottes Heilsplan)”이란 제목 으로 주제강연. / 헝가리 여행. / 《교회 교의학》 Kirchliche Dogmatik III/2 출간.
1950: 《교회 교의학》 Kirchliche Dogmatik III/3 출간.
1951: 《교회 교의학》 Kirchliche Dogmatik III/4 출간.
1952: 영국에서 평화훈장 수여받음.
1953: 《교회 교의학》 Kirchliche Dogmatik IV/1 (화해론) 출간.
1954: 헝가리 부다페스트(Budapest) 대학에서 명예 박사학위 취득.
1955: 《교회 교의학》 Kirchliche Dogmatik IV/2 출간.
1956: 영국 에딘버러(Edinburgh)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 취득.
1959: 《교회 교의학》 Kirchliche Dogmatik IV/3, 1-2 출간. / 프랑스 슈트라스부르크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 취득.
1961: 스위스 바젤(Basel) 대학에서 여름 학기를 마치고 명예교수로 추대 받음. 그러나 후임자가 결정되지 않아 그 해 겨울 학기도 2시간 강의함: 제목: “개신교신학입 문(Einfuerung in die evangelische Theologie)”.
1962: 3월 1일, 마지막 강의를 한 후 총장에게 작별인사 / 미국(美國)여행, 시카고(Chicago)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 취득.
1962-1965: 병원에 입원하여 수술받고 요양 생활
1963: 4월 19일, 덴마크 코펜하겐(Kopenhagen)의 Sonnig-Preis(유럽의 문화창달에 공헌한 공으로) 받음(지금까지 이 상(像)을 받은 사람은 Winston Churchil - Albert Schweitzer - Igor Stravinsky - Niels Bohr - Bertrand Russel - Alvar Aalto 등이다). / 프랑스 파리(Paris)의 소르본느 대학에서 명예 박사 학위 취득.
1966: 5월 10일(80회 생신), 본(Bonn) 대학 평의회 명예회원으로 추대 받음. / 9월 이탈리아 바티칸(Vatican) 예방.
1967: 마지막 세미나를 가짐, 교재: 《바티칸 교리 칙령》 Die Constitutio Dogmatica des Vaticanums Ⅱ(66-67년 겨 울 학기); 《칼뱅의 기독교 강요》 Calvins Institutio(67년 여름 학기). / 《교회 교의학》 Kirchliche Dogmatik IV/4 (세례론) 출간.
1968: 4-5월, 슐라이어마허(Schleiermacher) 《종교론》 Reden에 대한 강좌. /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으로 추대 받음./ 독일 다름슈타트(Darmstadt)의 아카데미에서 프로이드(Freud) 상(償) 받음
12월 9일 밤 스위스 바젤(Basel)에서 영면(永眠)함.
1886: 5월 10일, 스위스 바젤(Basel) 그렐링가(Grellingstr.) 42번지에서 아버지 요한 프릿츠 바르트 (Johann Friedrich Fritz Barth)와 어머니 안나 카타리나(Anna Katharina)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
1889: 아버지(Fritz Barth)가 스위스 베른(Bern) 대학 신약신학 및 교회사 교수로 취임.
1892-1904: 베른의 기독교 계통의 고등학교(Greies Gymnasium)에서 공부.
1904: 9월 17일 고등학교 졸업 국가시험(Abitur)에 합격하고, 베른 대학에서 신학공부 시작.
1906: 베를린(Berlin) 대학으로 옮겨서 공부함
1907: 마부르크(Marburg) 대학 및 튀빙엔(Tuebingen) 대학으로 옮겨감.
1908-1909: 마부르크에서〈기독교 세계: Die Christliche Welt>의 편집 조교로 일하면서, 신학사 (Diplom) 시험에 합격.
1909-1911: 제네바에서 사강사(Privatdozent)로 활동.
1911-1912: 자펜빌(Safenwil)에서 목회.
1912: 아버지 프릿츠 바르트 사망(칼 바르트 나이 26세 때).
1913: 부인 넬리 호프만(Nelly Hoffmann)과 결혼.
1914: 첫 딸 프란체스카(Franziska)를 낳음.
1915: 스위스 사회민주당 입당(Kanton주 Aargau), 첫 아들 마르쿠스(Markus)를 낳음
1917: 둘째 아들 크리스토프(Christoph)를 낳음.
1919: 9월 22-24일 탐바하(Tambach)에서 개최된 종교사회주의 전당대회에서 “사회 속의 그리스 도인(Der Christ in der Gesellschaft)”이란 제목으로 강연. /《로마서강해》 Roemerbrief 제1판 출판
1921: 셋째 아들 마티아스(Matthias)를 낳음.
1921-1925: 괴팅엔(Goetingen) 대학에서 개혁주의신학 담당 교수로 봉직.
1922: 《로마서 강해》 제2판 개정판 출판.
뮨스터(Muenster) 대학으로부터 명예 신학박사 학위 취득(1939년 취소되었다가, 1946년 다시 수여함). / 격 월간지 〈Zwischen den Zeiten〉 발행.
1925: 넷째 아들 한스 야곱(Hans Jakob)을 낳음.
1925-1929: 뮨스터 대학에서 교의학 및 신약신학 교수로 봉직
1927: 《기독교 교의학 개설》 Die christliche Dogmatik im Entwurf 1권 “하나님의 말씀론” 출간.
1930-1935: 본(Bonn) 대학의 조직신학 교수로 봉직.
1930: 영국 글래스고우(Glasgow) 대학으로부터 명예 신학박사 학위 취득. / 항가리 사로스파탁 대학의 명예교수로 추대 받음.
1932: 《교회 교의학》 Kirchliche Dogmatik I/1 (하나님의 말씀론) 출간.
1933: 6월, 《오늘의 신학적 실존》 Theologische Existenz Heute 출간 / 11월부터 투르나이젠(E. Thurneysen)과 함께 〈Zwischen den Zeiten〉에 실렸던 논문을 편집-수록함.
1934: 1월 4일, 바르멘(Barmen)에서 개최된 복음주의 개혁교회 자유총회(Die Freie Synode)에서 현재의 개혁파 신앙 고백 선언문 작성을 제안하는 등 교회 투쟁을 시작함. / 5월 16일, 고백교회 총회에 대비한 “신학분과 위원회”에 참석하여 “신학선언”을 기초 함. / 5월 31일, 바르멘에서 모인 독일 복음주의교회(DEK) 제1차 총회에서 “신학 선언” 채 택. / 10월 19-20일, 베를린-달렘에서 제2회 총회모임 - 바르트가 ‘형제단’ 회원으로 가입. / 11월 22일, ‘형제단’ 탈퇴 / 11월 26일, 바르트의 교수직(敎授職) 유보 통보 - 징계위원회 회부. / 12월 20일, 교수직 박탈(지방법원).
1935: 6월 14일, 베를린 고등법원이 지법의 선고를 파기하고 년간 봉급액의 1/5에 해당하는 액수 의 벌금형 선고. / 6월 25일, 스위스 바젤(Basel) 대학 교수로 취임.
1936: 우트레히트(Utrecht) 대학에서 명예 박사학위 취득.
1937: 성 앤드류(St. Andrew, Scotlans, Aberdeen) 대학에서 명예 박사학위 취득.
1938: 《교회 교의학》 Kirchliche Dogmatik I/2 출간. / 옥스포드(Oxford)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 취득. / 바르트의 저술집 독일 내에서 출판을 금지당함. / 바르트의 어머니 사망. / 9월 19일, 체코 프라하에 있는 로마드카(Josef Hromadka, 1889-1969)에게 편지를 씀.
1939: 뮨스터 대학은 1922년 바르트에게 수여한 명예 박사학위 취소.
1940: 《교회 교의학》 Kirchliche Dogmatik II/1 (신론) 출간.
1941: 6월 신학생인 셋째 아들 마티아스(Matthias)가 등산 중 추락 사망함.
1942: 《교회 교의학》 Kirchliche Dogmatik II/2 (예정론) 출간.
1945: 8월 21-24일, 프랑크푸르트(Frankfurt)에서 열린 ‘형제단 총회’에 참석. / 8월 27-31일, 트라이자에서 열린 ‘교회 지도자 회의’ 참가. / 《교회 교의학》 Kirchliche Dogmatik III/1 (창조론) 출간.
1946: 여름 학기에 본(Bonn) 대학의 초빙 교수로 특강. / 뮨스터 대학에서 명예 신학박사 학위 다시 수여 받음.
1947: 여름 학기에 본 대학에서 초빙 교수로 재차 특강. 베를린, 드레스덴(Dresden) 여행 방문.
1948: 8월 22-9월 4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Amsterdam)에서 열린 WCC 총회에 참석하여 “인간 의 무질서와 하나님의 구원계획(Die Unordnung der Menschen und Gottes Heilsplan)”이란 제목 으로 주제강연. / 헝가리 여행. / 《교회 교의학》 Kirchliche Dogmatik III/2 출간.
1950: 《교회 교의학》 Kirchliche Dogmatik III/3 출간.
1951: 《교회 교의학》 Kirchliche Dogmatik III/4 출간.
1952: 영국에서 평화훈장 수여받음.
1953: 《교회 교의학》 Kirchliche Dogmatik IV/1 (화해론) 출간.
1954: 헝가리 부다페스트(Budapest) 대학에서 명예 박사학위 취득.
1955: 《교회 교의학》 Kirchliche Dogmatik IV/2 출간.
1956: 영국 에딘버러(Edinburgh)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 취득.
1959: 《교회 교의학》 Kirchliche Dogmatik IV/3, 1-2 출간. / 프랑스 슈트라스부르크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 취득.
1961: 스위스 바젤(Basel) 대학에서 여름 학기를 마치고 명예교수로 추대 받음. 그러나 후임자가 결정되지 않아 그 해 겨울 학기도 2시간 강의함: 제목: “개신교신학입 문(Einfuerung in die evangelische Theologie)”.
1962: 3월 1일, 마지막 강의를 한 후 총장에게 작별인사 / 미국(美國)여행, 시카고(Chicago)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 취득.
1962-1965: 병원에 입원하여 수술받고 요양 생활
1963: 4월 19일, 덴마크 코펜하겐(Kopenhagen)의 Sonnig-Preis(유럽의 문화창달에 공헌한 공으로) 받음(지금까지 이 상(像)을 받은 사람은 Winston Churchil - Albert Schweitzer - Igor Stravinsky - Niels Bohr - Bertrand Russel - Alvar Aalto 등이다). / 프랑스 파리(Paris)의 소르본느 대학에서 명예 박사 학위 취득.
1966: 5월 10일(80회 생신), 본(Bonn) 대학 평의회 명예회원으로 추대 받음. / 9월 이탈리아 바티칸(Vatican) 예방.
1967: 마지막 세미나를 가짐, 교재: 《바티칸 교리 칙령》 Die Constitutio Dogmatica des Vaticanums Ⅱ(66-67년 겨 울 학기); 《칼뱅의 기독교 강요》 Calvins Institutio(67년 여름 학기). / 《교회 교의학》 Kirchliche Dogmatik IV/4 (세례론) 출간.
1968: 4-5월, 슐라이어마허(Schleiermacher) 《종교론》 Reden에 대한 강좌. /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으로 추대 받음./ 독일 다름슈타트(Darmstadt)의 아카데미에서 프로이드(Freud) 상(償) 받음
12월 9일 밤 스위스 바젤(Basel)에서 사망.
스위스의 개혁파 신학자, 개혁파란 것은 칼빈의 정신을 이어받은, 곧 우리 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을 이어받은 개혁파의 대표적 신학자이다. 루터파나 기타 개신교계 모든 교파를 망라해서 어머 어마한 영향을 끼친 신학자이다. 가톨릭 교회에 굉장한 영향을 미쳤다. 20세기 가톨릭신학의 아버지는 칼 라너(Karl Rahner)라는 사람인데, 20세기 그 어떤 교황보다 가톨릭 교회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쳤던, 가톨릭정신에 일대 혁명적인 변화를 일으킨 신학자였다. 20세기는 두명의 칼 대제가 지배를 했다고 혹자가 말한다. 신학 공부를 했다는 사람들이 신대원을 졸업하고도 칼 바르트나 칼 라너의 사상에 무지해서는 곤란하다. 그것은 기적같은 일이다. 20세기 신학은 이 두 사람을 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칼 라너는 칼 바르트보다 나이가 어리고, 라너가 신학 공부를 하고 있을 때 칼 바르트의 신학 정신을 깊이 배웠다. 바르트의 신학을 가톨릭 신학적으로 응용을 해서 일약 세계적인 신학자가 된 것이다. 바르트는 라너가 등장할 수 있는 기초를 만들어 주신 분이다. 두분 사이의 신학적 연계성을 강의중에 배우게 될 것인데, 어쨌든, 과정 전체를 볼 때 20세기의 단 한분의 신학자를 꼽으라고 하면 칼 바르트를 꼽을 수 밖에 없는 신학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학자이다. 이분이 우리 개혁파 신학자라는 것을 우리는 기쁘게 생각할 수 밖에 없다. 개혁신학을 가르칠 때 제가 볼 때는, 개혁 신학의 시작은 칼빈에서 시작된다고 보아야 하는데, 칼 바르트를 빼고 개혁신학을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특별히 20세기 개혁신학은 바르트를 빼고는 말 조차 할 수 없다. 유감스럽게도 대한민국에서는 개혁신학을 하는 학자들에게 칼바르트를 찾을 수가 없으며, 그것은 기적적인 이야기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공부를 하면서 알아갈 사항이다. 특별히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비극과 관련이 있는 문제이다. 독일은 루터파 신학의 왕국이다. 독일은 거의 압도적으로 대다수의 교회가 루터파이다. 독일안에는 개혁파가 있기는 있으나 대단히 소수파이다. 따라서 개혁파 신학자들이 독일의 신학교에서 자리를 얻는 것이 어렵다. 그런데, 모든 신학교에서 칼 바르트를 가르칠 교수가 필요하다. 칼 바르트는 반드시 가려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바로 그 자리가 개혁파 계통의 신학자들이 교수 자리를 얻는 자리이다. 개혁파 교수들이 가르치는 영역이 주로 칼 바르트이다. 어찌보면 칼 바르트는 독일 개혁파 신학자들의 속된 말로 밥줄이다 이렇게 볼 수 있다. 독일의 거의 모든 신학교에서 칼바르트에 대한 강의는 인산인해를 이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칼바르트를 배우려고 한다.
21세기 신학이 20세기 신학과 달라야 하고 더 발전한 새로운 신학이 등장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데, 새로운 신학이 등장하기 위해서도 20세기의 산맥은 일단 넘어가야 한다고 볼 수 있다. 칼 바르트는 어머어마하게 많은 글을 쓰고, 어마어마 하게 많은 사상을 자신의 가슴속에 두고 발전시켰던 사람이다. 무엇인가를 발표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먼저 칼바르트가 그 주제에 대해서 무엇을 말했는지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바르트의 글을 읽고나면 발표할 용기가 없어진다. 대다수의 학자들이 느낀 경험이다. 바르트를 넘지 못하면 절대로 새로운 신학이 안된다.
20세기 후반에 몰트만이란 대단한 신학자가 등장을 했다. 몰트만 교수는 우리학교 개교기념일에 초청을 해서 오신다. 개교기념 특별강연을 하도록 계획이 되어있다. 몰트만도 연세가 75세쯤 되셨다. 몰트만이 칼 바르트를 자신의 선생이신 오토베버(O. Weber)란 분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오토 베버는 칼 바르트의 직제자인데, 조교로 일한 적도 있고, 칼바르트가 특별히 많이 칭찬했던, 사랑을 받았던 제자였다. 오토베버가 칼바르트의 교회 교의학을 요약한 책을 썼는데, 그 책을 바르트가 읽고 마음에 흡족해했다. 바르트의 사상을 그런식으로 표현하려고 했던 제자가 있었는데 골빗츠라고 하는 사람이다. 그도 조교를 한적이 있고 바르트의 신학을 이어가는 대표적인 학자인데, 그의 작품을 보고는 바르트가 화를 냈다. 잘못했다고. 칼바르트의 엄청난 정수인 교회교의학을 배우면서 몰트만은 이제 더 이상 신학책을 쓸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단지 우리는 바르트가 이야기한 것을 그대로 외워서 전하는 일만 남았을 뿐이다. 한동안 그렇게 생각을 했다. 바르트를 읽을 때 일반적으로 누구나 느끼는 느낌이다. 몰트만은 한동안 바르트의 신학에서 헤어나지를 못했다.
이런 몰트만이 어느날 바르트 신학의 어떤 결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종말론에 대한 것인데, 특히 역사와 관련된 종말론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어느날 몰트만이 발견하게되었다. 마침내 몰트만이 써내려갔는데, 그것이 20세기 후반의 가장 뛰어난 저술로 알려진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Theologie "이란 것이다. 희망의 신학으로 몰트만은 일약 세계적인 신학자로 등장하게되었다. 세계적인 신학자가 되는 방법은 간단하다. 이 위대한 신학자인 칼 바르트 그 분의 신학의 결정적인 문제점을 결함을 밝혀내고 그것을 극복하면 틀림없이 세계적인 신학자가 된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독일의 조직신학은 아직도 칼바르트의 신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거의 대다수가 그 그늘 속에서 존재하고 있다. 그 그늘이 어디에 결함이 있는 지를 밝혀낸다면 그것이 21세기의 신학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는 유럽에서 그런 작업을 했는데, 21세기에는 대한민국에서 그런 사람들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이것이 말 같이 쉬운 일이 아니다. 바르트에게 문제가 많다고 욕을 많이 한 학자가 있는데 그 분이 벤틸(Van Til)이라는 학자다. 세계 학계에서 별로 알아주지 않는 사람이다. 그냥 입이 험하구나! 그렇게 비난하지 않고 진짜 문제를 찾아내는 것이 21세기의 신학이 되는 것이다. 20세기의 신학은 전체적으로 바르트, 부분적으로 몰트만, 20세기 신학은 바르트와 몰트만의 신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을 하려면 한동안 그속에 들어가서 헤메어야 한다. 한동안 이분의 말씀이 주님의 말씀처럼 생각이 되어서 지내다가 ... 그러다가, 어떤 천재적인 분이 뭔가를 알게되는 것이다. 그것이 새로운 신학이 시작되는 장소이다. 그러니까 칼바르티 신학연구는 상당한 중요성을 가진 것이고 한학기로 배우기에는 너무나도 많다. 유럽에서는 바르트의 인간론, 창조론, 바르트의 삼위일체론 이런식으로 주제별로 다루게된다. 수박 겉 핧기는 대단히 위험하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공부가 많이 필요하다.
TERM PAPER를 하나씩 써야하는데, 한 주제에 대해서 나름대로 깊이 연구를 해서 바르트의 신학의 진정한 깊이를 맛보시고 페이퍼를 써주시기 바랍니다.
-바르트의 중요한 책들 소개
칼바르트의 저서
Kirchliche Dogmatik I,1 -IV,4 - 칼바르트의 연구를 위해서는 독일어가 상당히 필요하다. 영어로 하게되면 아무래도 약점이 있고, 우리말로만 연구를 하려면 정말 약점이 많다. 아직도 세계신학을 이끌어 가는 중심 무대는 역시 독일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미국도 신학이 최근에는 많이 발전을 해가지고 독일 신학에 근접해 있다는 느낌은 주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직도 한단계 뒤떨어져 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 목회할 사람은 독일어 학습이 상당한 시간을 요구하므로 그럴 필요가 없지만 - 독일어를 잘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바르트 신학연구에 독일어는 매우 중요하다.
바르트의 가장 중요한 저서로 총13권이다. 약 9000페이지에 달하는 거대한 신학대전이다. KD I/1 약어로 이렇게 쓴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교회 교의학 1의 1권이란 의미다. 영어로 번역해서 쓸 경우에는 CD I/1. 유감스럽게도 우리말로는 번역이 안되어 있다. 한국 칼 바르트 학회가 이것을 번역하기위해서 8년전에 작업을 시작했다. 모교회에서 2억 정도의 지원금을 받아서 - 박봉남 박사, 지금 돌아가시려고 합니다. 마지막 작업으로 생각하시고 자신의 목회를 하는 제자에게 간곡한 부탁을 하셔서 그 교회에서 2억에 가까운 돈을 출연 받아 - 번역에 착수를 했는데, 보통 힘든 작업이 아니다. 다행히 13권 중 4권이 번역이 완료되었다. 기독교서회에서 순차적으로 나오게 될 것이다. 앞으로 5년 이내에 완간이 될 것이다.
Der Romerbrief 로마서 강해, 제1판이 1919, 제2판이 1922 에 나왔다. 로마서 강해가 바로 칼 바르트의 이름을 전세계에 알리게 만든 결정적인 책이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놀고 있는 놀이터에 떨어진 폭탄이라고 알려진 유명한 책이다. 로마서 강해는 제2판이 번역이 되어있다. 번역문을 읽은 분들의 한결같은 이야기가 무슨 이야긴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게 큰 문제다. 그런 난점이 있다. 제일 좋은 것은 독일어 원어로 읽는 것이며, 정확한 개념을 잡는 것이다. 최소한 우리말과 영문판을 같이 읽어 들어가야 개념을 정확하게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번역이 어려운 이유는 칼바르트가 원래 글을 어렵게 쓰기 때문이다. 난해하기도 하고 문장도 어렵다. 독일 사람들은 바르트의 글을 읽고 그렇게 감동을 받는다. 어머어마하게 우렁찬 메시지로 들려진다.
Die Christliche Dogmatik 1927년에 나온 책. 교회 교의학을 쓰기 전에 기독교 교의학을 먼저 썼다. 유명한 책이다.
Credo 1935 바르트의 대단히 중요한 책이다.
Rechtfertigund ??? 1938 '칭의와 법'으로 번역할 수 있는 것으로 번역이 되어 있다. 교회와 국가에 대한 바르트의 견해를 잘 알 수 있는 글이다.
Christengemeinde und B ??? 1946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와 시민공동체' 교회와 국가 사이에 관한 대단히 중요한 글이다. 번역되어 있다.
Die protestische Theologie im 19. Jahrhunter 1946 '19세기 개신교 신학' 바르트의 유명한 저술이나 번역이 안되어 있다.
Die Menschlichkeit Gottes 1956 '하나님의 인간성' 또 한 번 세계를 놀라게 만들었던 대단히 유명한 글입니다. 번역서가 있습니다.
Die Einfiihrung in die evangeliche Theologie 1962년 만년 칼바르트가 노인이 되었을 때 쓴 글로 '개신교 신학 입문'으로 번역되는 글인데, 이형기교수가 복음주의 신학 입문으로 번역을 해 두었다. 복음주의란 개념과는 조금 다른 특성이 있다. 가톡릭과 개신교를 구분할 때 사용하는 것으로, 가톨릭과 대립되는 복음적인 신학을 하는 곧 개신교를 의미하는 것이다. 정확하게 하면 개신교 신학 입문이라고 하는 것이 좋다.
바르트에 관한 책들 대표적인 것 몇 가지
-칼 바르트의 생애에 대한 유명한 책들
E. Busch. Karl Barths Lebenslauf 칼바르트의 전기, 대단히 두꺼운 대단히 유명한 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K. Kupisch 쓰고, 박종화 교수가 번역한 '칼 바르트' 란 번역책이 있다. 한국신학 연구소에서 출판했다.
G. Casalis 쓰고 번역한 기독교서회에서 93년 출간
-칼바르트의 신학에 대한 유명한 책들
E. Jungel Barth - Studie 바르트 연구라는 유명한 책, 번역 안됨
독일에서 몰트만, 판넨버그와 더불어 세명의 유명한 학자중의 한 사람이 융겔이다.
H. U. von Balthasar, Karl Barth
발타잘은 칼 라너와 더불어 20세기 가톨릭신학의 쌍두마차, 가톨릭의 2인자라고 할 수 있다. 바르트에 대한 불후의 저서를 남긴 것이다.
H. Kung, Rechtfertigung 칭의 라고 번역할 수 있는데, 교회론으로 20세기 후반에 강력한 영향을 끼친 학자인데, 바르트 연구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학자이다. 한스 큉
G. C. Berkouwer, The Triumph of Grace in the Theology of K. Barth 벌카우의 '칼바르트의 신학에 있어서 은총의 승리', 화란에 있는 화란에서 가장 유명한 학자로 개혁파 신학자로 그 명성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대단히 유명한 분인데 바르트 연구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분이다.
F. W. Marquwart, Theologie und Socialisimus '신학과 사회주의' 엄청난 논쟁을 불러일으킨 책이다. 마르크바르트는 박동현 교수가 공부한 베를린 신학대학에서 논문을 썼는데, 선생이 골비츠였는데, 통과가 되지 않았다. 대단히 철저하게 연구한 것은 틀림 없으나 바르트를 잘 못 해석했다. 바르트를 좌파로 해석한, 바르트를 일종의 좌익으로 해석한 대단히 유명한 책인데, 골비츠란 교수가 베를린 자유대학과 신학대학의 양쪽에 교수직을 하고 있어서,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통과를 시켜 주었다. 찬반에 대한 거센 논쟁이 있었다. 마르크바르트에게 큰 영향을 받은 한국의 칼 바르트 신학자는 이화여대의 박순?? 교수이다. 그의 제자들도 바르트를 좌파적으로 해석해 가고 있다.
E. Busch, Die groBe Leidenschaft 1999 '그 거대한 정열'
토렌스 저, 최영 번역
제프리 브롬물리 저, 신옥수 역, 우리 학교 대학원에서 칼 바르트 석사학위 논문을 쓰고 풀러에서 신학박사를 하고 있는 사람으로, ' 칼 바르트 신학 개론 ' 바르트 신학 입문서로 괜찮음
헌징거 저, 번역안됨, 프린스톤 조직신학교수, "How to read Karl Barth"
I. 자유주의 신학과 신정통주의 신학
칼바르트의 신학을 신정통주의 신학이라고 하는데, 자유주의신학과의 관계속에서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으며, 나아가서는 17세기 정통주의신학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종교개혁시대부터 신학사조를 개관해 볼 필요가 있다.
당시에 여러 가지 흐름의 신학전통이 있었으나 그 중에 대표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던 신학정신을 정리해 놓은 것은 16세기는 종교개혁의 시대로 볼 수 있다. 주로 루터의 신학과 칼빈의 신학이 지배하고 있었다. 한세기가 흘러서 17세기는 소위 개신교 정통주의 신학의 시대라고 일반적으로 이야기한다. 루터파에서는 루터파 정통주의가 형성되었고 칼빈파 교회에서는 칼빈주의 정통주의가 만들어졌다. 종교개혁신학과 17세기 정통주의 신학은 대단히 유사하다. 정통주의가 종교개혁 신학을 모체로 해서 발전해 온 종교개혁정신의 후예들이기 때문에 당연히 둘 사이에는 깊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두 신학을 거의 같이 취급하고 있는 현상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개의 신학은 대단히 유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과할 수 없는 어떤 차이점들이 존재하고 있다. 이 차이점은 앞으로 신정통주의신학을 이해하는데도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한가지 예를 들어서 이야기하면, 장로교인들에게 중요한 예정론을 이야기하면, 예정론은 정말 복잡한 이야기다. 신대원 졸업하기까지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칼바르트 신학을 한 주도 안 빠지고 계속해서 듣다보면 어느 날 갑자기 각을 하게되는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 우리 신학의 큰 난제중의 하나가 예정과 인간의 자유 사이에 놓여 있는 논제이다. 인간의 자유가 들어갈 수 있는 자리가 어디에 있는가? 인간의 자유를 강조하면 하나님의 절대주권, 하나님의 예정에 대한 모든 교리가 실질적으로 무의미해지는 그런 문제가 발생한다. 인간의 자유와 하나님의 예정사이에 놓여있는 신학의 난제는 2천년 기독교가 해결하지 못했던 신학의 난제이다.
또 고약한 난제가 하나있는데 삼위일체론이다. 하나님은 세분이신데 한분이시다. 하난데 셋이다. 칼빈 시대때부터 복잡했다. 세르베투스란 사람이 아무리 생각해도 삼위일체론이 이해가 안되었다. 하나님이 셋인데 하나다. 몸뚱아리가 아니고 머리가 셋달린 괴물을 믿으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세르베투스는 삼위일체론을 반대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칼빈이 잡아서 감옥에 투옥했다. 그러나, 끝까지 자기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칼빈이 세르베투스를 화형을 시켰다. 왜 화형을 시켰을까? 마귀가 들어 있다고 생각하고 화형을 시킨 모양이다. 불에 태우면 마귀가 죽을까 안죽을까? 사실 화형을 시키면 마귀가 좋아하는 것이다. 화형의 역사는 마귀에 의해서 주도된 역사이다. 사실 악한 것이다.
신대원 졸업할 때까지 수많은 각을 해야 훌륭한 목사가 될 수 있다. 신대원 입학때와 졸업 때 굉장한 수준의 차이가 있어야 하는데, 순간 순간 각을 하는 고비를 넘어야 하는 것이다. 각을 하는 때는 성령의 은혜가 임하는 순간이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는 순간이다. 성령께서 쓰실만한 일군으로 바뀌어지는 순간이다. 세르베투스는 화형을 당하는 순간에서도 의연했다. 순교자들처럼 그렇게 죽었다. 칼빈의 이 행위가 잘 된 일일까? 잘 못된 일일까? 칼빈의 후예들이 세르베투스를 화평시킨 그 자리에 그 때일을 참회하는 비석을 세웠다. 칼빈은 위대한 신앙의 조상인 것은 틀림없지만, 이 일은 잘 못된 것이었다. 참회의 비석을 세웠다. 루터파들이 칼빈주의자들을 공격하는 창 중의 몇 가지가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세르베투스의 화형을 거론한다. 살인자라고 비난한다. 문제는 하나님이 세분이고 한분이다. 이것이 납득이 안되는 것이다. 신대원을 졸업하기 전까지 이것을 알고 졸업해야 하는데.....
예정론, 삼위일체론 잘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에 대한 칼빈 선생의 답은 그것은 우리의 이성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신비라는 것이다. 네 좁은 머리로 어떻게 하나님의 신비를 다 알 수 있겠는가? 너의 이성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신비라는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이 삼위일체냐? 성경이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어떻게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가? 성경이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성경이 하나님의 예정을 분명히하고 있으면서도, 인간이 멸망하는 것은 자기의 죄악 때문이라고 명백하게 말하고 있다.
칼빈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조직신학자일까 하는데 대한 논쟁도 있다. 진정한 신학자는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의지 사이에 놓여있는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붙들고 씨름하고 그것을 해결하는 시각을 우리에게 전해주는, 해결하는 분이 진정한 신학자다. 칼빈은 성경에 적혀 있는 것만 나열하다가 서로 엊갈리면 이것은 인간의 이성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신비다라고 이야기하고 도망을 가버린다. 그것을 탐구하려고 하는 사람은 오히려 비난하는 태도를 일반적으로 취하고 있다. 어떻게 진정한 신학자의 자세라고 할 수 있을까? 결국 칼빈은 성경을 나열하고 있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 아닐까? 개혁파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처럼 칼빈을 높이지 않는다.
칼빈에게 있어서 그런 문제들이 다 하나님의 신비로 치부됐고, 말을 뒤집으면 나는 모른다는 말이 아니냐는 것이다. (모르면 복잡해지고 말이 어려워진다.) 칼빈이 그래서 많은 비판을 받기는 하지만, 그래서, 칼빈이 많이 칭찬을 받기도 한다.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해 할 줄 아는 신학자였다는 것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존중할 줄 아는 신학자였다. 그래서, 자기 머리로서 이해가 안되었을 때 그것을 잘라내 버리는 역할을 하지 않고 그것을 그 대로 두었다는 것이다. 이해가 안되더라도 그 말씀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칼빈을 이해하는 방향에 따라서 평가가 달라질 수밖에 없는 분이다.
그러나, 17세기 정통주의 시대에 접어들면은 칼빈의 성경앞에서 겸손해 하는 이런 태도가 무너진다. 합리적인 방향으로 흐르게된다. 질문에 대답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교회가 몰려가고 교회 주변에서 논쟁과 공격이 일어나고, 그래서, 뭔가 논리적으로 거기에 답을 해야하는 상황에 몰려든 것이다. 정통주의 신학은 대단히 논리적인 특징을 가진 신학이다. 합리적인 방향으로 교리를 정비를 하는데, 예정론과 자유의지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합리적인 방향으로 가닥이 잡힌다.
결국은 T. Beza 라는 사람이 있는데, 칼빈의 제자라고 볼 수 있는데, 칼빈의 정신을 이어받아 합리적인 17세기 정통주의 신학의 기초를 잡은 유명한 신학자인데,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이라는 기본틀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해석하는 방향으로 나간다. 제1원인자, 제2원인자란 말을 쓰기시작한다. 인간의 자유의지로 행해지는 것의 배후에는 제1원인자로서의 하나님의 작용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로 무엇인가를 하지만, 그 배후의 하나님의 작용을 생각하는 이런 형태로 문제를 정의를 해 버린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제1원인자인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에 종속되는 결과를 얻게된다.
사실상 인간의 자유의지가 희생당하는 문제점을 남기게 되었다. 논리적으로 대단히 합리적으로 전개가 되었으나 결과적으로 보면 성경의 상당부분이 잘려나가 희생당하는 그런 문제가 발생되었다. 이런 것은 예정론에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신학전반에 걸쳐서 일어났는데, 특별히 유념해야 할 것은 성서관에 어떤 변화가 있었다는 것이다. 성서관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 나중에 좀 더 자세히 다루겠다.
17세기 정통주의신학이 강조했던 신학의 정신을 핵심적인 것을 언급을 하면 첫째로,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강조했다. 인간의 이성도, 인간의 양심도 완벽하게 다 부패했다는 것이다. 인간의 양심과 이성은 죄를 만드는 공장이다. 이렇게 이해했다. 생각하는 것, 행하는 것이 다 죄뿐이다. 이런 인간의 전적 타락이론은 그 배경에 종교개혁자들의 오직 은총으로, 오직 믿음으로라는 교리가 들어있다. 종교개혁자들이 우리의 구원은 오직 은총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을 강조했는데 그것의 뒷면이 인간의 전적 타락에 대한 이론이다.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물려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17세기 칼빈주의 정통주의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이론과도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구원에 이르는 것은 오직 은총으로, 오직 믿음으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17세기 정통주의가 특별히 강조한 것은 성경의 절대 무오의 교리를 발전시켰다. 성경은 일점일획도 오류가 없다. 성경은 성령께서 불러주시는 대로 성경기자들이 기계적으로 기록을 했다.
기계적 영감론이라고 한다. 불러주는 대로 그냥 기계적으로 적었다. 축자영감, 글자 한 자 한 자, 단 한 곳도 오류가 없다. 무엇이 옳은가 그른가를 판단하는 최후의 재판소는 성경이다. 성경에 맞으면 그것은 옳은 것이고, 성경에 맞지 않으면 그것은 틀린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끝까지 맞았으면 아무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데, 그런데 그 다음부터 전개되는 문제가 단순하지 않고 복잡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한 세기가 흘러가면서 유럽에는 계몽주의 사상이 넓게 영향을 끼친다.
한 세기가 더 흐르면 개신교 자유주의 신학의 시대가 흐르게된다. 정통주의는 허물어지고 정통주의와 전혀 다른 자유주의신학이란 것이 유럽을 지배하게된다. 정통주의 신학교는 다 쫓겨나고 유럽의 모든 신학교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에 의해서 지배된다. 불과 2세기 동안에 어떻게 이런 어마어마한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는가? 한마디로 정통주의의 붕괴가 일어났다. 왜 유럽땅에서 정통주의가 붕괴되었는가? 철학자들이나 사상가들의 영향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역사가 바뀌는 것은 한 두 사람에 의한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어떤 경험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18,19세기에 접어들면서 사람들이 새로운 경험을 하게된 것이다. 과거에 없었던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과거에는 질병은 마귀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고, 하나님께서 고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병든 사람은 목사나 신부를 찾아갔다. 17세기까지는 그런 생각이 지배했다. 그런데, 계몽사상이 발전되면서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이 다른 경험을 하게된다. 병이 병원에서 낫는다는 것을 알게된 것이다. 병균들이 발견되기 시작했다. 교회에서 낫지 않던 것들이 병원에서 약품을 통해서 치료되는 것이다. 인류역사에 있어서 충격적인 일이었다.
처음에는 일부가 경험을 했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많은 사람들의 경험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과학이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생물학과 의학이 발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과학을 발전시키는 도구가 무엇이냐? 인간의 이성이란 사실을 알게된 것이다. 계몽주의와 자유주의 시대의 두더러진 특징은 인간을 신뢰하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을 신뢰하고 인간의 양심을 신뢰하는 것이다. 영국에서는 이신론이란 것이 발전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셨지만 질서를 만들어 주심으로 세상은 그 질서에 따라서 움직이게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과학적인 질서만 제대로 알게되면 모든 것을 해결하게되는 것이다. 이런 역사적인 경험을 배경으로 해서 데카르트, 칸트와 같은 이성을 중요시하는 철학자들이 우후죽순처럼 출현하며, 자유주의 신학이 발전하게되는 것이다. 과거에는 저 하늘을 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날개를 주지 않으면 절대로 날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느날 비행기를 만들어서 하늘을 나는 충격적인 역사가 일어났다.
이게 20세기로 들어오면서 사람들이 더 절대적으로 이성을 신뢰하게되는 하이라이트와 같은 사건이다. 사람들이 이 이성을 잘 활용하면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하늘까지 날아갈 수 있다. 인간의 이성은 죄나 만드는 공장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이 인간의 이성을 통해서 역사하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게되었다. 하나님의 영이 인간의 이성과 양심을 사용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려고 하신다. 불과 200년 흐르는 사이에 인간의 생각이 바뀐 것이다. 과거에는 인간의 이성은 죄나 만드는 공장이었는데 그렇게 인간을 부정적으로 비관적으로 본 것은 정통주의자들의 잘못이다..... 이렇게 되면서 17세기 예정통주의자들의 인간의 전적부패의 이론은 붕괴되어버렸다. 사람들은 더 이상 그 이론을 믿지 않게되었다.
사실 초기 칼바르트도 한동안 자유주의자였다. 칼바르트의 설교를 분석해보면 하나님의 영이 인간의 이성을 통해서 찬란한 역사를 만들어가고 계신다는 설교를 하고 있다. 젊은 시절의 설교의 내용이다.
사람들이 이성을 점점 더 신뢰하면서 당시까지 절대권위를 가지고 있던 성경에 그 이성을 적용하는 "불경한 일"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고전비평이 시작되었다. 희랍의 옛 영웅들에 대한 고전을 이성을 가지고 비평을 해보니까 그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가 절대 다수가 허구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이렇게 고전 비평을 하던 사람들이 마침내 성경은 어떠할까? 성경의 이야기는 과연 절대적인 진리일까? 그 자를 성경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성경의 문제들이 이상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하늘과 땅이 바뀌는 문제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성경의 모순이라고 하는, 성경의 오류라고 하는 것들이 막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더 많이 수도 없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여기서 사람들은 17세기의 가르침에 대해서 근본적인 회의를 갖기 시작했다. 성경은 성령의 가르침을 기계적으로 불러 적은 것이 아닌 것이 틀림없다. 성경안에 이런 수많은 오류와 모순이 있는 것은 정통주의자들의 성경에 대한 가르침이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성경은 위에서부터 떨어진 책이 아니고 인간의 종교적인 체험을 기록한 체험의 문서라는 결론을 내리게되었다. 성경의 절대 무오의 교리가 붕괴되었다. 과거에는 진리와 비진리의 최종 재판소는 성경이었으나 계몽주의 시대를 지나면서 이성으로 바뀌어져 갔다. 이성에 맞는 것은 진리고, 이성에 틀린 것은 비진리다.
19세기 부터는 정통주의가 완전히 무너지고 본격적인 개신교 자유주의 신학으로 접어든다. 슐라이에르마허(Schleiermacher), 리츨(Ritschl), 트렐치(Traeltsch), 헤르만(Herrmann), 하르낙(Harnack)에 이르기까지... 유럽은 전역이 이런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사상에 잠기게되었다.
-성경에 나타나고 있는 오류의 예들
창세기 6장 19절 이하와 7장 3절 이하 방주에 넣은 짐승 한 쌍, 일곱 쌍
마가복음 14:3 요12:3 향유를 머리에, 발에...
막15:32 눅23:39-43 두 강도가 욕함, 한 강도가 욕함
열왕기와 역대상하도 서로가 많이 엇갈리고 있다.
이런 보도의 차이가 굉장히 많다.
창세기 첫머리부터 보면, 1장부터 2:4까지 보통 비평학자들은 P 문서라고 하는데, 엿새동안 천지를 창조하고 마지막에 인간을 창조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2:4 이하 J 문서라고 하는 것을 보면 창세기 1장과 순서가 다르다. 처음 이 세상에는 아무 것도 없는, 초목도 없고 안개만 있는 그런 상황속에서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먼저 창조한다. 그리고, 에덴을 창설하시고 나무를 나게하고 동물들을 데려오시는 순서로 창조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다. 창세기 1장과 창세기 2장 4절 이하의 창조 이야기의 내용이, 순서만 살펴보아도 상당한 차이가 나타나는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다.
처음부터 이런 문제에 직면해서 해결해 가는 것이 좋다. 1차 적으로 우리는 무엇이 진리인가? 를 탐구해야 한다. 이런 탐구의 과정에서 잘 못 가는 수도 있다. 그러나, 신학 사조의 발전 과정은 무엇이 진리인가를 탐구해가는 과정이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이와 같은 것들을 수 없이 밝혀내고, 결론을 내린 것은 성경은 성령께서 불러주신 것을 기계적으로 받아 적은 것은 절대로 아니며, 위대한 종교적 인물들이 위대한 신적인 종교적인 책임을 기록한 글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뢰가 굉장히 높아지게되었다. 자유주의 신학은 인간을 신뢰하는 특징을 지닌 신학인데, 인간의 이성을 신뢰하고 인간의 양심과 도덕을 신뢰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럼, 이 자유주의신학은 어떤 신학적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 다섯가지로 설명을 하려고 한다.
첫째로, 성경에 대한 새로운 이해 -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성경을 아래로부터 솟아난,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쓴 책이 성경이라고 생각한다. 자유주의 신학자들도 성경을 굉장히 존중히 여긴다. 그들이 성경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들을 곡해한 것이다. 그들은 성경을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기본적인 정신이 정통주의와 다르다.
정통주의는 방향이 위에서부터 하나님이 말씀하신다고 보는 것이고, 자유주의신학자들은 방향이 아래로부터다. 인간의 글이기 때문에 오류가 있고 제한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기독교의 조상들만 신체험을 했겠는가? 다른 종교의 조상들도 하나님에 대한 체험을 했을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히 존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주의신학은 종교신학이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 특징은 20세기가 끝나는 시점까지 영향을 끼쳤다. 20세기 신정통주의 신학이 등장하면서 자유주의신학이 대단히 많이 붕괴된 것은 사실이지만, 자유주의신학은 없어지지 않았다. 20세기를 관통해서 오늘에까지 자유주의는 대단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20세기에 종교신학이 발전했는데, 자유주의 신학의 새로운 부흥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로 자유주의 신학은 이성의 신학이다. 이성에 맞지 않는 것은 비진리로 간주했다. 성경에 적혀 있기 때문에 진리라는 것은 정통주의자들의 사고방식이지만, 성경에 적혀 있더라도 이성과 맞지 않다면 그것은 잘 못된 것으로 간주된다. 기독교의 초자연적인 교리들이 전부 잘려져 나가는 일이 발생하게되었다. 예수님의 부활이라든지, 동정녀 탄생, 물위를 걸으심, 마귀를 쫓으시고 병을 고치셨다. 예수님의 선재, 삼위일체 교리등이 잘려 나갔다. 이것은 이성에 맞지 않는 잘못된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슐라이에르마허에 의하면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사상은 포기해야만 마땅하다. 우리는 어디에서도 그것을 믿으라는 요청을 받고 있지 않다. 이 슐라이에러마허는 헤겔과는 다른 특징의 자유주의를 발전시켰다. 자유주의도 헤겔적인 것과 슐라이에르마허 적인 것이 있다. 헤겔적인 것은 인간의 이성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신다는 역사적인 측면이 강하고, 그런가 하면 슐라이에르마허는 종교의 본질을 인간의 내적 본성에 있다고 보았다.
절대의존의 감정을 신앙의 근원으로 생각했고, 인간의 내부, 마음 깊숙한 곳에는 신과 교류하는 어떤 장조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슐라에르마허에 의하면 계시는 우주에 대한 근원적이며 새로운 직관이다. 우주에 대한 직관이 신에 대한 이념보다 더 가치가 있다. 이런 사고방식은 일종의 범신론적 사고와 가깝게 가 있는, 우주 만물을 바라보면서 직관을 얻고, 인간의 내적인 종교성을 찾고, 그 속에 신의 본질적인 계시가 있다고 보는 자유주의다. 두 개의 흐름의 자유주의가 공유하고 있는 것은 이성에 맞지 않는 것은 거부하는 그 점에 있어서는 양쪽이 똑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세 번째로 인간 예수를 강조하는 기독론.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예수께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2위인 성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삼위일체론을 반대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예수에 대한 이해도 다를 수밖에 없다. 예수는 누구냐? 하나의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슐라이에르마허에 의하면, 신성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모범적인 최초의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완벽하게 실현해 나간 그런 특징의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성경의 표현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뜻을 너무나도 정확하게 받들어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당신의 아들로 삼으셨다. 즉 양자론이다.
자유주의 신학의 기독론은 양자론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리츨에 의한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 안에서 온 사람이지 역사 밖에서 온 사람은 아니다. 역사 안에서 온 사람이란 것은 우리와 똑 같은 역사의 흐름속에서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하나의 인간이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선재하셨다가 역사안으로 뚫고 들어왔다는 정통주의자들의 사고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었을 때 가장 큰 문제는, 속죄론이 희생되는 문제가 가장 큰 문제이다.
속죄론이란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에 만민의 죄를 짊어지고 만민의 죄를 속량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것이 속죄론이며,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의 핵심인 형벌대속의 이론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한국 장로교회의 가르침의 기둥중의 기둥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보통 전도한다고 할 때, 그 전도의 핵심이 이 속죄론이다. 자유주의 신학속에는 이 속죄론이 존재하지 않는다. 왜 존재할 수 없느냐? 예수께서 우리와 동일한 인간이기 때문에 속죄론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게 되어있다. 속죄론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신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 한다. 만민의 죄를 짊어질 수 있기 위해서는 그 분이 신이어야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2위인 성자가 되어야 속죄가 성립한다.
그런데, 그것을 부정하기 때문에 속죄론이 근원적으로 불가능하게된다. 그렇다면, 자유주의는 무엇을 믿으라는 것인가? 예수의 인격성, 예수님을 모범으로하는 그런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 분의 삶, 인격 그것을 모범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 '작은 예수 전태일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이런 신학생도 있었다. 부활은 육체의 부활이 아니라 예수님의 민중 운동의 정신이 부활한 것이다. 민중신학자 안병무 교수가 가르친 가르침이다. 안병무 교수의 가르침에도 속죄론이 없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정신을 이어받았다고 볼 수 있는데, 속죄론이란 것은 바울이 원시 종교의 제의적인 신화를 받아들여서 예수의 죽음을 제의적인 신화적인 시각에서 발전시킨 이론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원시종교로 다시 들어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원시 종교의 신화를 걷어내야 한다. 예수와 바울을 극단적으로 많이 구별한다. 예수와 바울을 철저하게 구별해 내는 대가 중의 한 분이 하르낙이란 사람이다.
예수의 정신과 바울의 정신은 엄청나게 차이가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했는데, 바울은 예수를 믿으라고 예수의 복음을 전했다. 어떻게 보면 예수에 대한 우상화가 생겨난 것이다. 그 흐름에서 보면. 그러니, 이런 원시 종교의 이런 제의적인 신화, 거기에 기반을 두고 있는 속죄론, 이천년 기독교회는 그것을 기반으로 자라났는데 그것이 잘못이다. 이런 흐름이 안병무교수를 통해서, 홍근수 목사에게로 전달된 것이다. 예수께서 갈릴리 민중운동을 하시다가 억울하게 죽으시고, 그분의 정신이 갈릴리 민중들에게 부활한 것과 마찬가지로, 전태일이 노동운동을 하다가 억울하게 죽었는데, 그분의 정신이 한국의 노동자들에게 부활을 해서 노동운동으로 부활했다. 전태일은 한국의 위대한 예수이다.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데 꼭 유대인의 이름을 넣을 필요가 뭐있나? 우리 나라의 더 위대한 사람도 많이 있는데, 작은 예수 전태일이 이름으로 기도한다........
무엇이고 정통주의이고 무엇이 자유주의인가? 이것을 나누는 시금석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간단하게 볼 수 있는데, 예수의 피가 너의 죄를 속량했다고 믿느냐? 예라고 하면 그것은 별 수 없이 정통주의자다. 정통주의 가운데도 여러형태가 있을 것이다. 폭이 넓은 사람과 외골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쨋건 정통주의자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속죄론을 믿지 않는다.
네 번째로 자유주의 신학의 핵은 무엇이냐? 사랑의 윤리다. 도덕주의라고도 표현하는데, 사랑의 윤리가 더 가까운 말이 아닐까 생각한다. 자유주의의 핵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는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다. 자유주의자들은 예수를 배우려고 하는데, 예수의 인격을 닮으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예수의 인격이란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정신이고, 인간을 사랑하는 정신이다.
자유주의자들의 유명한 말이 있다. '교의는 분리하나 봉사는 연합한다. ' 교리를 강조하면 싸움 밖에 안되는데, 봉사를 하면, 사랑을 하면 하나가 된다. 자유주의자들이 사랑을 강조한 것은 대단히 위대한 점이다. 자유주의자들이 십자가의 속죄를 제거한 것은 대단한 신학적인 실수지만, 사랑을 강조한 것은 대단한 신학적 공헌이라고 생각한다. 속죄론과 사랑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슈바이쳐 박사도 자유주의신학자였다. 그도 예수님을 삼위일체중 제2위인 성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생명을 사랑하는 정신을 배웠다. 생명경외의 정신, 그래서, 일생동안 생명을 건지기 위해서 아프리카에서 살았다.
정통주의자들은 노상 싸움만 하고, 싸워서 분리하고 분열만했다. 분열의 명수들은 근본주의자들이었다. 모든 것이 다 맞아도 한가지만 틀려도 기어코 박치기를 하고, 서로 원수가 되어서 나가버리는 그런 특징들을 볼 수 있다. 자유주의자들의 가슴속에는 사랑이 있었다.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이 사랑이시다. 어떤 사람들은 자유주의자들이 다 지옥에 갔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상당수가 천국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든다. 우리가 정확게 잘 모르는 것들이 많이 있다. 우리가 잘 못 알고, 틀리게 알 고 있다고 하더라도 사랑의 신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 주시지 아니하시겠는가? 좀 틀리더라도 너무 저주하지 말고, 서로 대화를 해서 바른 진리에 이르도록 서로 협력하고 진리를 찾아가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고, 그것 너머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빛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유주의자들은 이점이 위대한 사람들이다.
정통주의자들은 신앙은 좋은데 인간성이 더럽고, 자유주의자들은 신앙은 좀 그런데, 인간성이 좋다. 그런 이야기가 있다. 만남의 경험 속에서 느낀 것이다. 보편적으로 그런 경험을 많이 한다. 교리는 좋지 못하지만 사랑을 많이 배워서 그런 것이다. 반드시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다섯 번째, 자유주의자들은 역사의 진보에 대한 신앙, 헤겔의 영향, 역사가 발전한다고 믿었다. 인간의 자신의 이성과 양심을 잘 사용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잘 발전시킬 수 있고, 마침내 이 땅에 유토피아, 하나님의 나라가 올 것이다. 그렇게 믿고 있었다. 하르낙의 말에 역사 앞에서의 경외라는 말이 있다. 슈바이쳐는 생명 앞에서의 경외인데, 역사 앞에 서면 하나님앞에서 가지는 것과 마찬가지의 경외심을 느끼게 되는데, 이유는 이 역사속에 신의 영이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를 보면 경외심을 가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역사 앞에서의 경외이다. 자유주의신학은 역사적 범신론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역사를 거의 신적인 운동과 동일시 해 버리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역사적 범신론이라고 한다.
이런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이 자유주의 신학인데, 평가를 해보면, 자유주의 신학의 큰 오류는 기적이나 초자연적인 것을 부정해 버리는, 너무 인간의 이성을 지나치게 신뢰한데서 일어난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이 부활과 같은 것은 그리스도교의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결정적 복음의 핵인데 그것까지 다 날려버리는 인간 기독론을 강조하면서 속죄론, 복음의 핵중의 핵인 속죄론을 날려 버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다 날려버리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켰다. 반면에 사랑을 강조한 측면이라든지, 역사에 대한 이해 - 범신론적으로 빠진 것은 문제가 있지만 -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역사를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훌륭한 점이다. 이와같은 자유주의 신학의 가르침으로 19세기는 완전히 점령을 당했고, 20세기 초까지 유럽은 완전히 자유주의 신학의 전성기에 접어들어 있었다.
그런데, 20세기에 들어와서 칼 바르트(Safermil K. Barth)라는 한 젊은 목사가 200년전에 무너진 정통주의를 회복하는 엄청나게 놀라운 일을 행하기 시작했다. 헤르만과 하르낙이란 자유주의의 대가들의 사상에 맞서서 - 이 두분은 칼 바르트의 신학적 스승들이다 - 정통주의를 세우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그래서, 이것을 신정통주의라고 한다. / 신신학 = 자유주의 /
칼바르트는 자유주의를 대항해서 자유주의를 무너뜨리고, 200년 무너진 정통주의를 회복시킨, 독일 교회에서 가장 존경하는 신학자(칼 바르트와 본 회퍼 목사), 보수적인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신학자중의 한사람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두 분을 다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유럽에서 가장 복음적이고 정통적인 신학자로 알려진 칼 바르트가 왜 한국에서는 신신학, 자유주의자의 대변인으로 알려 졌을까? 그것은 그렇게 만드신 분이 계시기 때문이다.
신정통 주의의 특징
1. 성서의 신언성을 강조. 성경은 계시의 책이고, 위로부터의 책이다. 당시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바르트는 "말씀의 신학자"란 별명을 가졌다. 그의 스승인 하르낙과 논쟁을 하면서도 바르트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했다. 모순이 많은 성경을 학문적으로 신학계에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아주 큰 신학적인 문제였다. 어떻게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수 있는가?
칼바르트가 실질적으로 사람들을 설명하는데 성공을 했다. 이것이 신정통주의 신학의 역사적 큰 의의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성공을 했는가? 칼 바르트는 성경의 본질은 하나님의 말씀인데. 이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적 도구를 통해서 전달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성경은 두가지 차원이 있는데, 한편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적인 증언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인간적인 증언인 책이다. 성경에는 이 두가지 특징이 존재하고 있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의 역사 말씀 자체는 영원한 말씀이고 하나님의 말씀인데 그것을 사도들이 또는 사도들과 가까운 목격자들을 통해서 전달되었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는 구전의 역사도 있고 편집의 역사도 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을 통해서 전달되다 보니 성경 안에는 인간적인 약점이 존재하게되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인가? 발인가? 이 사건은 분명하게 있었는데, 일반적으로 머리에 부었을 것으로 생각을 한다. 마가복음의 기록의 역사적 신빙성이 더 있을 것으로 생각을 하는데...성경 전승의 과정은 애매하고 불분명할수록 더 신빙성이 있는 것이다. 어떻게 여자가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을 수 있는가? 라는 생각들로 어느 시점에선가 슬거머니 발로 바뀌었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은 인간의 증언의 과정속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인간적인 약점이다. 그런데,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이런 성경에 내재된 인간적인 약점을 발견하고서는 이내 성경의 본질을 뒤 엎어 버린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한 것을 기록한 것이라고 뒤집어 버린 것이다. 이렇게 자유주의 신학자들에 의해서 성경의 본질이 뒤집어져 버렸다. 칼바르트에 의하면 성경은 인간적인 약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또 어떤 것은, 그 당시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던 증언을 하는 성서 기자들이 그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을 때 언제나 자기의 세계관 속에서 그것을 이해했다. 그러므로, 당시의 원시적 세계관에 성경이 부분적으로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원시적인 세계관이 노출된다고 해서 그것을 인간의 책이라고 생각한 것이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근본적인 오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바르트는 성서비평학은 나름대로 가치가 있고 권위가 있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성서비평학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말씀되게 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복원하는데 성서비평학의 가치가 있다고 가치를 인정했다. 그러나, 성서 비평학이 오만하고 불손하게도 인간적인 차원을 넘어서 하나님의 말씀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자격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는 복종하는 것 밖에 다른 것이 없다. 성서비평학은 인간적인 한계를 극복하고 원래의 계시를 드러내는데까지만 필요한 학문이다. 17세기 정통주의자의 성서영감론과 19세기 자유주의자의 성서관중 하나를 택하라고 한다면, 바르트는 17세기 정통주의자들의 성서관을 택하겠다고 단언했다. 두 관 모두 오류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정통주의자들은 성서의 본질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성경의 본질은 하나님의 말씀 즉 계시의 책이라는 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결정적인 것이다. 근데, 옛 정통주의자들은 성경의 인간적인 측면을 간과해버렸다는 것이다. 바르트는 루터가 가르쳤던 성경은 아기 예수가 누워있는 구유와 같다는 비유를 훌륭한 비유라고 생각했다. 성경의 본질은 아기 예수라는 것이다. 결정적인 계시인 예수그리스도, 그런데, 그 구유에 보면 지푸라기 같은 것도 있다. 루터는 그 지푸라기로 야고보서를 이야기했지만, 바르트도 성경안에는 지푸라기, 계시가 아닌 인간적인 요소들이 내재해 있다고 생각을 했다. 바르트의 성서관과 루터의 성서관은 대단히 닮았다고, 거의 차이가 없다고 하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다. 우리가 루터의 성서관을 좀 더 잘알기 위해서 몇가지를 언급하면, 루터는 성경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이 제법 강했다.
예를 들자면,
"모세가 모세오경을 기록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모세 오경에 모세가 죽고 난 뒤의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늘 문제가 되었다. 자기가 죽고 난 뒤의 이야기를 어떻게 기록할 수 있는가? 축자 영감설을 믿는 사람들은 억지 주장을 하지만, 루터는 저자에 개의치 않았다는 것이다.
열왕기는 민수기에 비해서 엄청나게 좋은 책이다.
요한복음과 바울서신 베드로의 편지들은 모든 책들가운데 알맹이요 골수이다.
사도 바울의 편지들과 사도 베드로의 편지들은 마태 마가 누가의 복음서들보다도 훨씬 더 위에 있다. 루터가 성경을 똑 같은 가치의 책으로 보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복음을 더 훌륭하게 잘 증언하는 책도 있고 그렇지 못한 책도 있다는 것이다. 성경안에 더 위대한 성경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히브리서는 세례받은 다음에 죄인의 회개를 부정하고 금하기 때문에 복음서와 사도바울의 편지와 서로 반하고 있다.
야고보서는 복음서와 바울의 편지에 비하면 지푸라기 같은 서신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복음의 본질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요한 계시록은 예언의 책이나 사도의 책이 아니다. 이 책은 그리스도를 가르치지 않고 그리스도를 알리지도 않는다.
루터의 시각으로서는 야고보서나 요한 계시록과 같은 책들은 성경의 가치에 미달된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성서관을 분명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루터가 바로 오직 성경으로 하는 그 정신을 만들어내게 한 인물인데, 솔라 스크립투라 하는 개념이 무엇인가? 오직 성경으로 하는 뜻이 무엇인지 우리가 잘 알아야 한다. "오직 성경으로"와 17세기와 기계적 영감론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오직 성경으로의 기본적인 성격은 권위의 중심을 교황에게서 성경으로 옮기려고 하는데 초점이 있다. 종교 개혁정신의 핵은 절대적인 권위가 교황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려는데 잇다.
권위의 축을 교황에게서 성경으로 옮기는데 초점이 있었던 운동이다. 유념해야 할 것은 종교개혁자들이 기계적 영감론이나 성경의 절대무오를 가르치지 않았다. 칼빈과 루터 두 분 다 성경안에 오류가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이분들의 핵심적인 가르침은 우리가 따르고 믿고 언제나 표준으로 생각해야 할 절대적인 권위는 교황, 교회의 가르침, 전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결정적인 통로가 성경이라는 것을 강조했던 분들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의 "솔라 스크립투라"이다. 근데, 이것이 한 세기가 흐르면서 성경의 절대무오의 교리로 발전을 하게된다. 소위 성겨은 성령께서 불러주시는대로 기계적으로 적었다는 기계적 영감론이 등장하게되었다.
이런 것이 칼빈의 글에 부분적으로 나온다. 그러나, 칼빈이 이런 말을 할 때는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기 위해서 썼던 표현이다. 성경의 신언성, 하나님의 말씀됨을 강조하려고 칼빈은 그런 개념을 사용했는데, 그것이 한 세기가 지나면서 성경의 축자적 무오를 의미하는 것으로 변질이 되게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의 정신이 강화되면서 종교개혁자들이 가지고 있지 않았던 정신이 17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참고로 칼빈의 성경관을 보자면, 풍만 출판사 "칼빈의 성서관"이란 책이 있다. 거기에 보면, 유명한 학자들의 글들이 정리되어있는데,
행7:16절에서 누가는 창세기 23:9절에 비추어 보면 명백한 실수를 했다. 이 부분은 수정되어야 한다.
엡4:8주석, 바울이 시편 68:18을 언급하면서 자기의 주장을 뒷받침하기위해 그 본래의 의미로부터 적지 않게 벗어났다. 심지어 선물을 인간에게서 받으시니 라는 구절은 완전히 정반대의 의미로 바꾸어 놓았다. - 칼빈이 비평학적인 작업을 이미 하고 있었다.
벧후, 나는 베드로의 말이라고 도저히 인지할 수 없다.
행4:6 예루살렘 대제사장의 연대기에 대한 언급 본문인데, 누가의 견해보다는 요세푸스의 견해를 더 선호하는 발언을 함.
누가는 여기서 안나스를 대제사장이라고 하고 있는데, 이것은 대단히 이상한 일이다. 왜냐하면 요세푸스의 글에는 그렇게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칼빈 자신이 '성경은 성령께서 불러 주시는대로 적었다'는 말을 하기도 하지만, 성경 안에 이런 모순이 있다는 것도 언급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전체 가르침의 총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단어 하나 하나에 오류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문자를 강요하는 사람들이라고 비난했다. 말 한마디에 덫을 놓는 나쁜 인간들이다고 비난했다. 오히려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이 천한 문체의 옷을 입고 인간에게 전달된 것에 최고의 신비가 있다고 말했다. 이런 표현은 칼바르트의 표현과 굉장히 닮았다. 더듬거리는 인간의 말속에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이 숨어 있다고 했다. 이런 특징들 때문에 일반적으로 유럽에서는 바르트의 성서관은 종교개혁자들의 성서관의 부활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루터나 칼빈은 성서의 비평학이 존재하기 이전의 사람이었고, 칼바르트는 그 이후의 사람이기 때문에 차이가 있으나, 성경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종교개혁자들과 칼바르트 사이에는 거의 차이가 없다. 그런데, 왜 칼바르트가 신신학자가 되었을까? 갈수록 더 이상한 일이다.
두 번째로, 신정통주의 신학은 예수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한 신학이다. 바르트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를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역사로 인식했다. Selbstoffenbarung Gottes 하나님이 자기 자신의 모습을 완벽하게 드러낸 역사라는 것이다. 하나님에 관한 어떤 것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드러낸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라는 것이다. 성경의 절대적 권위가 여기서 나온다.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를 그대로 담고 있는 책이 성경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아가서 삼위일체론을 강조했다. 자유주의신학자에 의해서 완전히 파괴된 삼위일체론이 칼바르트에 의해서 다시 복구되었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오면 삼위일체론을 강조하는 신학자들이 많이 나온다. 전부 바르트의 신학적 도움에 크게 힘입었다고 볼 수 있다.
세 번째로 계시와 종교의 구분과 질적 차이를 강조했다. 19세기의 신학이 종교신학적인 특징을 가진데 반하여, 바르트는 종교는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것인데, 결국 이것은 인간적인 어떤 것으로 보았다. 계시라는 것은 세상속에 감추어져 있던 어떤 것이 드러나는 것이다. 전적으로 새로운 어떤 것, 알지 못했던 어떤 것, "성경 안에 있는 새로운 세계"라는 강연을 하게되는데, 과거에 알지 못했던, 지금까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던 놀랍고도 새로운 세계가 성경안에 있다는 것이다.
타종교에 대한 대단히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 타종교는 우상숭배다. 대개 종교다윈주위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칼바르트를 언급하면서 바르트가 타종교를 우상숭배의 집단으로 주장했는데 이 주장이 얼마나 잘못됬는가를 입증을 하면서 바르트를 심각하게 욕하고 비판하면서 일반적으로 종교다원주의 신학을 시작한다. 바르트는 종교다원주의 신학자들의 최대의 적이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는 가톨릭에 대해서도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가톨릭을 적그리스도라는 말도 종종했다. 나중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손님으로 초청을 받아서 참석하고 난 뒤에, 늙어서 한 뒤에 한 말씀은, 거기서 가톨릭의 중심부에서 모든 것을 살피신 후에 남기신 말씀은 "가톨릭이 적그리스도는 아니다"라고 했다. 그렇다고 높게 평가한 것은 아니다.
적그리스도의 카테고리에 들어가지는 않는다는 이야기다. 왜 타종교를 이렇게 부정적으로 생각을 했을까? 그 핵심은 계시를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놀랍고도 놀라운 계시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 계시의 핵은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다. 그 측량할길 없는 망극하신 하나님의 사랑, 그 극단적인 하나님의 사랑, 일반적으로 종교는 다 율법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일부 은총적인 특징을 가진 종교가 있기는 하지만 - 아미타 불교, 박티 요가와 같은 - 일반적으로 종교는 율법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은총 - 일흔번씩 일곱 번을 용서하시는, 율법학자들 보다 세리와 창기가 천국에 먼저들어가는 - 그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가톨릭을 비난한 것은 가톨릭의 자연신학으로는 제대로 안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짜 모습을 보는 것에 실패한다는 것이다. 가톨릭은 그리스도의 영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교황의 영이 지배하는 곳이라는 것이다. 바르트의 극단적인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의 강조 때문에 수많은 개신교 사람들도 거기에 실족을 하게된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실족을 하게된다. 도저히 받아 들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바르트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율법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바르트가 "내 신학에 문제가 있다는 사람은 틀림없이 심술 사나운 율법주의자다"라는 말을 남겼다. 우리 심성속에 있는 율법주의적인 심성이 바르트의 신학을 받아들이는데 장애로 작용하게된다. 바르트가 만년에 질문을 받았다. 당신의 그 많은 글을 요약해서 한 마디로 말할 수 없겠는가? 당신의 신학이 뭐냐? '예수 사랑하심을 성경에서 배웠네, 이 찬송이 나의 신학이다. 나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신학이다. 예수님의 사랑의 넒이와 깊이를 이야기하려는 신학이다. 나는 이 예수님의 사랑의 넓이와 깊이를 성경에서 알았다. 다른데서 알 수 없다.'
네 번째로 속죄론의 회복과 하나님의 은총의 신학. 바르트 신학의 중심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중심이고, 그분의 대속의 죽음이 신학의 중심이다. 만민의 죄를 짊어지고 죽었다는 것이다. 바르트가 만인구원론자가 아니냐라는 문제가 발생한다. 화해론에서 다룰 것이다. 이점에 있어서도 루터와 바르트가 너무나도 닮았다고 생각된다. 루터도 복음을 이야기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복음과 은총 그것이 종교개혁의 내적 동인이었다. 율법적인 성향의 기독교 운동에 의해서 이런 복음과 은총이 침식을 당한다. 칼바르트의 일생의 적 가운데 경건주의자가 등장한다.
경건주의자들의 지옥이란 말도 나온다. 경건주의자들은 진정한 의미의 복음을 모른다고 생각했다. 바르트는 경건주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바르트는 어려서부터 경건주의의 교육을 받았다. 피부로 경건주의를 알았다. 복음을 발견하고 경건주의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경건주의 안에는 복음이 숨쉬고 있지 않다고 보았다. 바로 루터가 발견했던 위대했던 복음을 20세기의 칼바르트가 다시 복구했다. 그래서, 독일 교회가 바르트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바르트는 개혁파 신학자지만, 개혁파라는 교파의 굴레를 넘어서 모든 교파에 영향을 크게 미쳤는데, 특별히 루터파 교회에 영향을 크게 끼친다. 바르트를 자기 신학의 아버지로 생각을 하게된다. 성서관, 복음과 은총에 대한 이해 등이 루터가 가진 폭발적인 그런 특징이 바르트에게 그대로 연결되고 있다.
다섯 번째로는 하나님의 중심의 신학이다. 신정통주의는 신학의 주제를 인간에서 하나님으로 옮긴 신학이다. 자유주의 신학의 주제는 인간이었다. 그야 말로 신학은 신학이지, 인간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강조가 등장한다. Lordship. 하나님이 행하시는 곳에 구원이 있고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희망이 없다는 것을 가르치는 신학이 신정통주의 신학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오직 거기에만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기도의 중요성이 동시에 등장한다. 왜? 하나님께서 행하셔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행하지 않으시면 그것은 결국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기도의 중요성이 등장한다. 기도가 신학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자리를 잡게된다.
여섯 번째로, 만남과 사건으로서의 진리.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은 만남(Begegnung-만남, Ereignis-사건, Akt-사건, 행위/ 신정통주의를 대표하는 용어)이란 말을 많이 사용한다. 진리는 만남 속에 있다고 한결같이 말한다. 부활을 누가 아느냐 하면 부활한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이다. 부활을 객관적으로 이성적으로 따져서 부활을 알기 어렵다. 자유주의자들은 이성적으로 납득이 안되기 때문에 부활을 없애 버렸는데, 영원한 진리는 특별히 만남 속에서 우리에게 계시가 된다는 것이다. 성령과 우리가 만나는 만남의 사건이 일어나야 한다. 진리는 이 만남속에 있다. 사건이란 것은 그 만남이 일어나는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 속에 진정한 진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일면 자유주의의 공격에서 신학을 보호하고 기독교의 초자연적인 진리를 되살려내는데는 성공하고 기여했다. 그러나, 문제점은 실존주의적인 특징을 많이 가지고 있는데, 진리가 인간의 실존의 영역속으로 갇혀 버리는, 객관적인 측면, 역사적 측면이 희생될 소지가 내재하고 있다. 그래서, 만남으로서의 진리는 긍정적인 측면도 지니고 있는 반면에 부정적인 측면도 지니고 있는 신학적 개념이다.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은 당시 대단히 유행하고 있던 실존주의 철학의 영향을 다 받았다.
전체적으로 보면, 신통주의 신학이란 것은 옛 정통주의 신학의 부활, 더 넓게는 종교개혁 정신이 20세기에 토양을 배경으로 해서 다시 등장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대개 세계의 신학자들이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다.
한국교회에서 칼바르트를 자유주의와 동일하게 보게된 배경 -
유럽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미국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이다.
미국으로간 청교도들은 정통주의 신학을 가지고 미국에 도착하게된다. 정착하는 과정에서 신학적 논의가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19세기 말엽까지 옛 정통주의 신학이 영향을 끼치게된다. 우리에게 특별히 중요한 것은 19세기 말엽에 미국의 유니온 신학교에서 Briggs 사건이란 것이 발생한다. 브릭스라는 교수가 성경 비평학을 가르쳐서 문제가 발생하게된다. 유럽에서 만개한 자유주의신학이 미국에 건너와서 처음에는 영향을 못미쳤다. 19세기 말엽에 제법 영향이 나타나기 시작되었는데, 그것이 특별히 장로교회안에서 문제가 된 사건이 브릭스 사건이다. 브릭스가 총회로부터 책벌을 당하게되고, 유니온 신학교는 이 때 미국 북장로교회와 단절되게 된다.
1895년 성경고등비평학에 위기감을 느낀 미국 보수주의 종교인들이 모여서, 미국보수주의 대연합을 결성하게되는데, 이들은 근본주의라고 부른다. 근본주의 신학은 1895년에 태동하게된 것으로 유럽의 것이 아니고 미국에서 생겨난 것이다. 근본주의 운동의 주축이 된 두 그룹이 있는데, 첫째는 구파 칼빈주의자이고 또 한 그룹은 세대주의자들이다. 한국에는 특별히 종말론에서 세대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엄청난 혼란이 있다. 세대주의는 영국 사람 Darby 다비에 의해서 시작된 것인데, 세대주의 특징은 인류 역사를 일곱세대로 나누는 것인데, 세대마다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이 달랐다고 생각하는 특징이 있는 사상이다. 노아시대는 양심으로 구원받고, 모세이후는 율법으로, 성령강림 이후로는 은혜로, 세대마다 구원경륜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상이다.
종말론에서 예수님의 공중재림, 7년 대환란, 아마겟돈, 지상강림, 천년왕국 전개, 곡과 마곡의 반란, 백보좌 심판, 신천신지 건설된다. 종말론의 시나리오를 만들어 두었다. 세대주의는 침례교계통, 부흥집회, 오순절주의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한국 대다수 교회가 세대주의 종말론을 정통 종말론으로 믿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이것은 쓰레기통으로 빨리 가야하는 종말론인데 한국교회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조용기 목사가 세대주의 종말론을 신봉하고 있는 사람이다. 한국교회가 신학을 멸시했기 때문에 한국교회에 바른 신학이 자리잡지 못하고 괴상한 신학이 자리잡고 있으며, 이 괴상한 신학을 몰아내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세대주의가 정통으로 자리잡는 이유도 근본주의 운동과 무관하지 않다.
두 그룹이 연대하여 근본주의 5대 신학강령이란 것을 발표한다. 첫째가 성경의 절대무오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셋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 넷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 다섯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재림. 실제 핵심은 제1항에 있다. 제1항만 파수되면 나머지는 자동적으로 파수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근본주의는 성경의 절대무오를 파수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신학운동이며 신학이론이다. 이 근본주의 운동의 칼빈주의 계통의 학자로는 B. B. Warfield 라는 분이 주역으로 활동을 했다. 이 분은 근본주의 신학의 신학적 지주중의 한 분이다. 성경의 절대무오론을 강조하기 위하여 피나는 노력을 경주한 분이다. 기상천외의 이론을 만들었다.
최초의 성경 원본의 무오이론을 만들어 내었다. 최초의 원본은 어디에 있는가? 물론 없다. 그러니까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기발한 억지다. 원래 원본이 오류가 없었다면 사본에 꼭 같은 오류가 나오기 어렵다. 각각 다른 지역에서 꼭 같은 오류가 드러내고 있을 때는 역으로 추정할 때 원본의 오류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1910년대까지는 교리를 파수하는데 성공한다. 미국장로교회를 지배하는 신학이었다. 1910년에 미북장로교회가 제5항만 일부 변경시키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적으로 대체) 근본주의 5대 강령을 미북장로교회의 신조로 채택을 했다. 1920년대 들어서면서 아주 복잡해진다. 자유주의와 정통주의가 서로 싸우게되면, 역사적으로 결국 자유주의가 다 이겼다. 한 번도 옛 정통주의가 이기지 못했다. 미국에서도 결국 붕괴되고 있다.
1922년 포스딕 Fosdick 목사, 근본주의자들을 이길 것인가? 란 설교를 하여 출판하여 베스트 셀러가된다. 근본주의자들은 자유를 억제하고, 관용성이 없고, 몇 몇 교리를 절대화시키고 있는 데 교회의 수 많은 사회적 책임을 도외시하고 사소한 문제로 싸움만 일삼고 있다는 내용의 설교로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다. 맥카트니 라는 목사가 너무 흥분하여 "불신앙을 이길 것인가?"라는 설교를 하여 출판을 했다. 신학논쟁이 일어났으며, 신학논쟁으로만 끝난 것이 아니고 총회에 고소를 했다. 이 싸움에서 포스딕 목사가 목사직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이 사건으로 뉴욕 노회가 총회와 맞서는 일이 생긴다. 여기에 세기의 재판으로 알려진 스콥스 사건이 일어나게된다.
스콥스란 분은 공립학교 교사였는데, 진화론을 가르치면 안된다는 법을 어기고 진화론을 가르쳤다. 이 사실을 알고 흥분한 근본주의 목사님 브라이언 목사님이 고소를 했다. 미국의 전역에 생중계가 될 정도로 엄청난 싸움이 일어나서 스콥스 진영의 데로(Derrow)라는 변호사가 날카로운 질문을 했는데, 브라이언 목사님은 시종일관 그냥 우겼다. 재판결과는 당시 100불의 벌금형으로 스콥스에게 판결이 났다. 둘 다 결국 법적으로는 근본주의자들이 이겼다. 근데, 여론이 정반대로 불기시작한다. 근본주의는 인간의 자유를 박탈하고, 학문의 자유를 억압하는 구나, 근본주의 정신은 대체로 폐쇄적이구나... 많은 사람들이 근본주의에 대한 혐오감을 느끼기 시작하게된다.
1924년 장로교회에서 어번(Auburn) 선언이란 것이 등장한다. 미국 북장로교회 안의 1200여명의 목사가 싸인 한 것인데, 진보적인 학자들에게 관용을 베풀어야 하고 1910년에 미국북장로교회가 채택한 다섯가지 교리는 하나의 학설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1925년 총회에 어드만 이란 분을 총회장으로 선출하는데, 이 분이 바로 관용성을 강조했던 학자였다. 극우적인 근본주의를 대단히 싫어했던 진보적인 성향의 관용을 주장했던 분이 총회장으로 당선되면서 미국 북장로교회의 방향이 바뀌어지게된다.
1926년 매이첸(Machen)이라는 교수가 프린스톤 신학교 교수였는데 근본주의자였다. 워필드를 가장 존경했던 사람으로, 워필드가 죽었을 때 통곡을 했던 사람이 매이첸이다. 이 분이 미국 북장로교회 총회에서 정교수 인준을 받아야 하는데, 프린스톤 안에서의 싸움꾼이었다. 바뀐 총회의 분위기로 정교수 승인을 보류시켰다. 결국은 정교수 승인을 얻지 못하였다. 매이첸이 1929년에 프린스톤을 떠나서 필라델피아로 가서 웨스터민스터 신학교를 만든다. 이 때 밴틸이란 신학자도 함께 간다. 1936년에 정통장로교회라는 새로운 교단을 하나 만든다. 프린스톤 신학교의 분열의 역사다. 일부 교수와 일부 학생이 따라간 사건이 웨스터민스터 신학교가 만들어진 사건이다. 이 사건이 대한민국에는 핵폭풍으로 다가온 것이다. 이것이 영향을 끼쳐서 1959년 한국의 어마어마한 대분열이 일어나게 된다.
이 시기에 한경직 목사, 김재준 목사, 박형룡 박사가 이 때 프린스톤에 유학을 하고 계셨다. 박형룡 박사가 매이첸의 사랑을 받았다. 박형룡을 한국의 매이첸이라고 한다. 박형룡은 웨스터민스터에서 박사과정이 없어 루이빌의 침례교 계통의 신학교에서 학위를 하게되며, 여기서 세대주의의 영향도 많이 받게된다. 박형룡은 개혁주의 신학의 정통이 아니다. 극단적인 한 가지의 출신이다. 당시 프린스턴에 칼바르트신학이 상륙하고, 1920년대 말엽부터 신정통주의로 신학의 방향을 잡게된다.
미국 북장로교회는 신정통주의 신학을 중심으로 1960년대까지 지속적인 성장을 하게된다. 매이첸이 자기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프린스톤을 비난하면서 신정통주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신정통주의는 사실상 성서비평학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겉으로만 정통주의지 실질적으로는 자유주의라고 공격을 하게되었다. 매이첸이 죽고 난 뒤에 밴틸이란 사람이 계속해서 신정통주의를 공격하고 비난하는 글을 많이 남겼다. 매이첸과 밴틸을 중심으로 해서, 바르트와 신정통주의신학은 신신학, 사실상의 자유주의 신학으로 비난을 받게되었다. 이 신학을 박형룡이 그대로 한국에 가져들어와서 성경비평학을 무차별 공격하고, 신정통주의를 신신학 자유주의로 비난하게된다.
1953년 김재준 박사 책벌, 기장이 만들어지는 장로교회 분열이 이루어진다. 김재준 박사는 신정통주의 신학자였다. 프린스톤의 주류적인 성향을 그대로 이어받아서 신정통주의 신학을 하셨다. 한경직 목사님과 가까운 친구사이였다. 이미 이전에 아빙돈 주석사건으로 한경직 목사님이 총회에 반성문을 낸 사건이 있다. 따라서, 김재준 박사의 책벌시 김재준 박사를 돕지 못했으며, 이로 인해 김재준 박사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다. 박형룡은 남산 장로교신학교의 교장으로 있으면서 한국교회의 정통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1959년의 분열은 결국 박형룡과 한경직 사이의 갈등이라고 볼 수 있다.
박봉남 박사의 "신학의 해방" 기독교서회에서 나온 책, 1953년의 논쟁에 대한 자세한 보도가 나온다. 기가 막히는 논쟁이다. 학문적으로 열등한자가 학문적으로 앞선 자를 공격하는 논쟁이다. 당시의 한국교회가 그것을 이해할 만큼 성숙하지 못하여 결국 김재준 목사를 책벌하는데 한국교회가 동의하는 일이 일어나게된다. 김재준 목사님은 학문적으로는 존경할만한 분이시다. 신학적으로 당시에 선진적인 신학을 이미 잘 배우셨고 한국에 잘 소개한 특징을 가지고 계시고, 한편으로 한국 땅에서 역사책임적 신학의 아버지가 되었다.
사실 당시의 한국교회는 예수 믿고 천당가는 것 밖에 모르는 교회였다. 이런 한국교회에서 역사를 새롭게 하는 것이 교회의 가장 중요한 과제라는 것을 인식했던 학자가 김재준 목사였다. 그분의 역사 책임적 신학, 그 가르침이 결국 유신체제 아래서 기장의 저항운동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김재준 목사님이 없었다면, 우리 개신교회의 저항운동은 없었을 가능성도 있다. 개신교회의 저항운동이 일어나게되는 신학 정신을 거꾸로 올라가보면 제일 먼저 가르친 분이 김재준 목사님이셨다. 칼바르트를 잘 알고 계셨고, 칼바르트가 히틀러 시절 바르멘 신학선언을 기초하고 저항운동에 앞장서셨다는 것을 잘 알고계신 학자였다. 김재준 목사님은 대단히 훌륭한 점을 많이 가지고 계셨던 학자라고 평가할 수 있다. 목회자로는 한경직 목사님이 훌륭하셨다. 당시의 한국 장로교회가 그 분들을 이해할 만큼 신학적으로 성숙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박형룡 박사의 압도적인 영향을 받게되는.... 기장에서 지금도 예장을 비난하는 것이 있다. 지금 우리 교단은 김재준 목사님을 책벌할 때의 상황에서는 많이 달라졋고 신학적으로는 많이 개화가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에큐메니칼 운동을 같이 하고 있고, NCC를 이끌어 가는 형제교단으로 협력을 하고 있는데, 기장분들이 그들의 정신적인 신학적인 아버지인 김재준 목사를 이단으로 책벌하고서 아직 해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직도 우리 교단에서는 해벌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모양이다. 일부에서 해벌 운동이 조금 일어나다가도 아직도 그게 안되고 있다. 세기가 바뀌는 마당에 아직도 신학적 비극이 그대로 남아있다.
프린스톤 분열 30년 만에 1959년 우리 예장이 전국적으로 분열되는 비극이 또 발생하게된다. 53년은 서곡 같은 그런 싸움이었고, 59년 대대적인 싸움이 일어나게된다. 목사장로가 멱살잡고 두들겨 팬일이 전국 도시에 없는 데가 없었다. 대구의 모 교회에서는 오물투척사건이 있었다. 화장실에서 그걸 퍼와가지고 강대상에 목사님께서 설교를 하시려고 하는데 그걸 부은 대단한 사건이 일어나고, 일반신문에 대서특필 보도가 되고 이런 비극이 59년부터 몇해에 결쳐서 싸움이 계속되어 한국 장로교회가 시골 작은 교회까지 분열되는 어마어마한 사건이 일어났으며, 아직 극복되지 못하고 지금에 까지 왔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는 그 안에서 또 싸움이 붙어서, 왜 싸웠냐 하면, 그 안에 세대주의자들이 같이 잇었는데, 이 세대주의의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고 잇엇다. 세대주의를 용인할 수 있다, 없다사이의 갈등. 서로 논쟁을 하다가 웨스터민스터 신학교가 분열을 해서, 그 근처에 Faith Theological Seminary 라는 것이 만들어 진다. 페이스 신학교의 주인물이 칼 McIntire 매킨타이어라는 인물이다. 이 사람도 한국교회에는 대단히 잘 알려진 사람이다. 이 쪽에서는 세대주의를 받아들이고 싶어 하였다. 웨스트민스터는 세대주의를 배척하려고 했다. 그것과 더불어 천년왕국 문제가 붉어져 나왔는데. 웨스터 민스터는 무천년설을 주장하고 매킨타이어는 전천년설을 주장했다. 세대주의자들이 전천년설을 믿고 있다. 주초문제도 싸움의 핵심인데, 웨스터쪽은 주초문제와 극장 출입은 개인의 신앙에 해당하므로 개인에게 맡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매킨타이어는 철저하게 규제를 해야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사소한 문제로 혈압을 있는대로 올려서 싸운 것이다. 매킨타이어 그룹은 1937년 미국성경장로교회를 만든다. 1936년 웨스터민스터를 중심으로 정통장로교회가 만들어졌는데, 그 다음에 성경장로교회를 만들어 작은 그 교단을 분열시키게된다.
매킨타이어는 1941년 미국기독교협의회 A.C.C.C. 를 만들어서 1948년에 국제적으로 확대를 해서 국제기독교 협의회 ICCC 를 만든다. International Counsel of Cristian Churches. I.C.C.C.라는 것도 외워두는 것이 좋다. 당시대의 책들을 살펴보면 ICCC라는 것이 많이 나온다. 조그만 단체인데, 한국에서는 굉장히 큰 문제다. 이들은 한결같이 WCC를 험악하게 비난한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바로 이 매킨타이어 그룹을 지칭해서 신근본주의라고 한다. 페이스 신학교가 얼마안되어 또 분열하는데, 버스웰이라는 사람이 세인트루이스로 가서 카비넌트 신학교를 만든다. Covenant , Buswell . 이들의 교단을 미국 복음 장로교회라고 한다. 작은 교단이 계속해서 분열하는 것이다. 1930년대 접어들면서 근본주의가 이런 과정에서 일반 성도들에게 인기가 없어져 버린다. 사람들이 다 지겨워하게 되었다. 지금은 근본주의라는 말이 나쁜 말이다. 1930년대부터 근본주의는 부정적인 의미를 많이 갖게되었다. 지금은 근본주의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웨스터민스터 신학교도 자신들을 근본주의라고 안부르고 개혁주의라고 부른다. 웨스터민스터 신학교에서는 자기들의 신학적 입장을 개혁주의라고 주장하는데, 개혁주의라는 말에 속아넘어가면 안된다. 한국에서도 개혁주의에 대한 혼선이 심각하게 있다. reformed tradition을 이야기하게되면 칼빈 이후 우리 장로교회의 신학정신을 이야기하게된다. 20세기 reformed tradition의 인물을 보면 단연코 칼바르트와 에밀부루너와 같은 사람들이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오면 몰트만, 스위스의 로흐만, 루카스 피셔, 네들란드의 벌카우어, 미국의 프린스톤의 밀리오르, 거스트리 같은 학자들이 개혁신학을 대표하는 학자들이다. 20세기 개혁신학의 중심은 칼바르트에게 존재하고 있고 칼바르트의 정신을 이어 받은 20세기 후반의 신학자들 속에서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개혁신학이라고 하면 당연히 그런 것으로 유럽에서는 알고 있다. 그런데, 저분들의 개혁주의는 20세기에 들어와서 워필드와 매이첸을 중심으로 해서 밴틸로 연결되는 소위 근본주의를 자기들의 20세기의 개혁주의의 기본 흐름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20세기 후반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로 연결되는 이것이 개혁주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저분들의 개혁주의는 개혁주의의 넓은 흐름가운데 극단적으로 보수적인 한 가지를 얘기하는 것이다. 칼빈을 이어 받은 개혁주의는 개혁주인데 극단적인 이상한 한 가지를 저 양반들이 개혁주의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한국 안에서는 이것이 해결이 안되어 있다. 한국의 보수적인 학자들을 보면, 약력을 한 번 보면, 거의 대다수가 웨스트민스터 혹은 페이스 두 학교를 반드시 거친 것을 볼 수 있다. 장로교 학자들의 절반정도가 두 학교 출신이다. 전투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근본주의는 관용심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 신학적 약점이고, 성경의 권위를 주장하고 싶어했던 것 자체는 문제가 없지만, 축자영감주의를 주장하는 것이 큰 오류이다. 세 번째로는 사회적 관심이 없다. 소위 하나님 나라에 관한 문제가 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인데,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인식이 없다. 그래서, 사회적 문제에 대처할 수 있는 신학적 기둥이 전혀 없는 신학이다. 네 번째로, 타계적 신앙을 가르치는 신학이다. 신학적 이원론이 깊이 들어있다. 천당 가는데 주로 집중하는.
근본주의가 영향력을 상실하고 인기가 떨어지면서 미국의 많은 보수적인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학적 정체성을 상실하게된다. 근본주의가 비웃음의 대상이되면서 그것을 그대로 밀고 나가면서 자신을 동일시 하기가 어렵게되면서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의 상당수는 자신들의 신학적 정체성을 신정통주의에서 찾게되었다. 미국 북장로교회의 일반적인 흐름이라고 볼 수 잇는데, 그러나, 신정통주의에서 자신의 신학적 정통성을 찾기가 어려웠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다고 근본주의를 그대로 고수할 수 없었던 상당수의 사람들이, 이런 공백상태를 뚫고 새로 만들어 진 것이 신복음주의다. 신복음주의는 1947년 풀러신학교가 만들어지면서 그 설립자 (Ockenga, Henry, Harrison, Ramm) 가 자신들의 신학적 입장을 신복음주의라고 천명을 한다. Christianity Today 라는 유명한 잡지를 만들어낸다. 이 잡지는 신복음주의 정신을 전세계에 알리는데 아주 공헌을 한 잡지다. 지금 이 운동은 복음주의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신'자를 안붙인다. 70년대말 80년대 초 합동측 신학교가 분리되면서 여러 교파들이 생겼는데, 핵심적 신학적 논쟁이 신복음주의라는 것이었다. 신복음주의자들이 합동측 신학교에서 쫓겨 나게된 것이다. 현재 신복음주의는 규모가 굉장히 커지게 되었다. 빌리그래함목사가 여기에 가담이 되었고, 독일에서는 프랑크푸르트 성명이 발표되었고, 1974년에는 로잔복음화대회가 열렸다. 그런데, 신정통주의에 가담을 못했던 많은 보수적인 사람들이 이 복음주의에 가담을 하게되었다. 보수신학이 크게 두 갈래로 나누어졌다고 할 수 있는데 신정통주의적인 흐름과 복음주의적인 흐름 둘로 나누어지게되었다.
신복음주의는 크게보면 근본주의보다는 조금 진보적인 특징이 있다. 조금 더 개방적이고, 근본주의를 비판하면서 만들어진 신학운동이다. 반면에 신복음주의는 신정통주의 만큼 그렇게 진보적이지는 않다. 신정통주의보다는 보수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현재 전세계적으로 볼 때는 신정통주의까지는 WCC에 가담을 하고 있다. WCC에는 자유주의적인 흐름과 신정통주의적인 흐름이 공존하고 있다. WCC안에서 가장 보수적인 사람은 신정통주의자다. 신정통주의보다 더 보수적인 사람들은 WCC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세계에서 가장 큰 기독교 기구가 WCC다. WCC 운동은 크게 목소리가 두 개가 있다. 자유주의적이고 라디칼한 목소리가 있으며, 대단히 보수적인 목소리가 있다. 보수적인 목소리는 신정통주의자들이 내는 것이다.
한국의 신학교를 분석해보면, 감리교는 자유주의와 많이 가깝다. 종교다원주의자들 감신대에 제일 많다. 총신은 물론 자기들 스스로 개혁주의라고 한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한국에 옮겨놓은 것 같은 근본주의 성향의 개혁주의다. 양평의 아시아 연합 신학대학은 크게 보면 복음주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한국에서 복음주의를 확산시키는 온상이 ACTS라고 할만큼 복음주의 성향이 강한 학교다. 합동신학교는 복음주의 학자와 근본주의 성향의 학자들이 섞여 있다. 합신의 대표적인 김명협 교수는 복음주의자로 보는 것이 가장 맞지 않을까 생각한다. 기장은 신학적으로 보면 자유주의와 신정통주의가 혼재한다. 김재준 목사님은 신정통주의자였는데, 밑으로 내려오면서 복잡해졌다. 크게 역사 책임적 신학을 이어받아 민중신학을 발전 시키는 그룹은 김재준 목사님의 역사책임적 정신은 이어받았는데 신학적으로는 신정통주의를 이어받지 않고 자유주의를 이어받은 느낌이다. 박봉남 박사나 전경연 박사와 같은 분들은 신학적으로는 신정통주의를 철저하게 이어받는다. 그러나, 사회참여는 소극적이다. 기장에는 우리와 비슷한 사람이 절반쯤 있고 우리와 다른 사람들이 절반쯤 된다. 우리학교는 뭘까? 우리학교를 정의하기가 복잡하다. 정의를 안하는 것이 더 좋을지도 모른다. 신학적으로는 복음주의와 신정통주의가 혼재한다. 우리 학교의 보수적인 분들은 복음주의의 성향을 제일 많이 띄고 있다. 근본주의를 우리학교에서 찾을 수 없다고 본다. 어떤 면에서 근본주의를 나타내는 분들이 있기는 하다. 한두가지 항목이 그런 것이고, 전체적인 경향에서 보면 신정통주의적인 성향과 복음주의적인 성향이 혼재하는 것 같다. 우리 학교에 자유주의자는 없는 것 같다.
이종성 박사가 학장으로 있을 때 총회에서 심문을 여러 차례 받았다. 당신의 신학을 정의해서 이야기 해봐라! 이 분이 마침내 정의하시기를 "나는 성서적 복음주의자다."라고 대답했다. 그것으로 끝났다. 아무도 공격을 할 수가 없었다. 명답은 명답인데, 정치적인 명답이다. 신학적으로는 그런 흐름은 사실상 없는 것이다.
신복음주의는 구체적으로 어떤 특징이 있는가?
첫째는 근본주의를 비판한다. 이유는 비신학적이고 비학문적이다. 문화와 사회와의 관련성이 결여되어 있으며, 역사성이 결여되어 잇다. 복음주의는 세상과 문화를 변혁시키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한다. 근본주의와 다른 점이다. 그래서, 기독교 문화관, 특별히 문화적 영역에서 노력이 많이 나타난다. 정치적인 영역에서 개혁적인 관심이 있는 것 같지 않다. 복음주의자들이 뭘 바꾼다고 할 때 정치, 경제, 인권 이런데 초점이 잇는 것 같지는 않다. 주로, 그분들의 관심의 영역은 문화적인 것이다. 기독교적인 음악을 보급하려고 하고, 세속 노래속에 있는 마귀적인 특징을 찾아내려고 하고 뭔가 바꾸려고하는 특징의 운동이 많이 잇다.
두 번째로 성경 무오에 대한 신앙이 있다. 바로 이점 때문에 복음주의가 신정통주의와 구별되는 장소이다. 신정통주의자들은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생각한다. 신복음주의자들은 성경무오를 파수하려고 한다. 근본주의와 일치한다. 따라서, 성경의 고등비평학을 일반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분들은 근본주의를 비판하면서 근본주의 정신의 핵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신학적으로 보면 신정통주의보다는 근본주의에 더 가깝다. 사회적인 또는 다른 교파나 교회정치적인 문제에 있어서 경향성을 보면 신정통주의에 상당히 근접해 오는 모습을 나타내는 데, 외형은 신정통주의와 비슷하나, 알맹이, 신학적 핵은 근본주의에 더 가까운 측면이 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성경무오를 주장할 수 있는가? 성경무오를 주장하다가 다 망했는데.... 여기에 신복음주의자들의 독특한 성경해석방법으로 세 번째 특징이다.
세 번째 과학과 성경을 조화시키려는 특징이 있다. 과학적으로 분석해서 성경의 오류가 드러났는데 성경을 다르게 해석해서 과학과 일치시키려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근본주의자들이 상상도 못한 방법을 과감하게 개발했다. 예를 들자면, 창세기1장부터 문제가 있다. 천지를 하나님께서 육일만에 창조하셨다. 지구의 역사만 과학자들은 45억-50억의 역사가 있다고 본다. 우주의 역사는 훨씬 더 길게 본다. 6일과 45억년을 어떻게 조화시키는가? 근본주의자들은 이런 경우 '너는 말씀을 믿는가? 인간의 이성을 믿느냐?'라고 묻는다. 단연코 인간의 이성을 정죄했다. 과학적 탐구가 틀렸다는 것이다. 아무리 자연과학적인 증거가 나왔다고 하더라도 그 증거를 믿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믿기 때문이다.
복음주의자들은 6일 창조설을 6시대 창조설로 바꾸어버린 것이다. 날이 24시간 하루를 의미할까? 생각해보라. 24시간의 개념은 해와 달이 만들어지고 난 뒤에 가능한 것인데 해와 날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날의 개념이 나온다. 그러므로, 이 날의 개념은 24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으로서의 하루를 의미한다. 천년이 하루같고 천년이 하루같은 그 하루다. 이 하루는 천년일 수도 10억년 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난 뒤 과학과 창조의 순서를 비교해 보면 거의 조화가 된다는 것이다. 성경도 버리지 아니하고 과학도 버리지 아니하고 양쪽을 다 가질 수 있는 너무도 좋은 방법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해석을 좋아하게되었다. 많은 보수적인 사람들이 이것을 따르게되었고 이 신복음주의가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널리 퍼져가게된 것이다. 근본주의자들이 보기에는 말도 안되는 것이다. 신복음주의자들을 과학에 아첨하는 자들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과학에 팔아먹는 자들이라고 비판을 했다. 반면 복음주의자들은 근본주의자들이 생각이 꽉 막힌 사람들이라고 비난한다.... 복음주의자와 근본주의자들 사이가 좋지 않다. 세월이 흐르면서 복음주의 해석이 많은 사람들에게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
성서비평학적인 시각에서 보면 어떨까? 창세기1장을 일반적으로 P 문서라고 하는데, 바벨론에서 포로기에 기록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근데 문제는, 바벨론의 창조신화가 있다. 길가메쉬 서사시를 읽어보면 바벨론 창세기가 나오는데, 거기에는 마르둑이란 신이 나오는데, 마르둑이 천지를 창조한다. 6일만에 창조한다. 첫째날부터 여섯째날까지 창조의 내용이 성경과 일치한다. 순서와 날짜와 내용이 같고, 마지막으로 인간을 창조한 것까지 같다. 그래서, 복잡하다. 어떻게 마르둑의 창조와 창세기 1장이 닮을 수가 있는가? 창세기 1장 정도가 아니라 노아 홍수 이야기도 똑 같다. 그래서, 구약성서 연구가 당시의 문헌들을 연구하지 아니하고 해석하게되면 아전인수격 해석이 나올 가능성이 많다. 갖다 놓고 같이 보면서 연구를 안하면 안된다. 결론은 어떻게 나든지 비교연구를 해야한다. 왜냐하면 세계의 제대로 된 신학교에서는 전부 그렇게 하고 있다. 그래서, 자유주의를 극복하는 것이 쉽지 않다. 자유주의를 반대한다고 말하기는 쉬운데 학문적으로 자유주의를 극복하기는 쉽지 않다. 엄청난 과제다. 공부를 안하면 극복하기 쉬운데, 할수록 쉽지가 않다. 자유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분은 서로 주거니 받거니 했다고 생각한다. 성경만 독특하다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서로 발전한 것이 거의 확실한데, 다른 종교의 문헌은 땅에서 인간이 만든것이고 성경은 위에서 떨어졌다. 이것이 그분들에게는 납득이 안된다. 율법들 십계명까지 비슷한 것이 너무 많아 정신이 없다. 창세기 1장도 결국 영향을 받은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닮았을까? 여기에 대한 해결가능성은 크게 세가지가 있다. 첫째 가능성은 그냥 무조건 우연히 닮은 것이다. 두 번째는 길가메쉬 서사시에 나오는 마르둑 창조 이야기가 성경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닐까? 세 번째 가능성은 말하기가 너무나도 곤란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것 자체가 불경 그 자체일수도 있는데, 혹시, 성경이 마르둑 창조 이야기의 영향을 받아서 기록된 것이 아닐까? 어쨋든 이 세가지가 가능한 경우이며, 어느 것이 맞을 것인가를 연구해야 하는데, 첫 번째 가능성은 이론적으로만 가능하다. 현실적으로 그렇다고 믿기가 어려운 점이 있다. 그래도, 무대보적인 신앙으로 그러하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신다. 그런데, 많은 분들에 의해서 그 가능성은 납득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문제는 둘째 아니면 셋째일 가능성이 많은데... 가장 핵심적인 잣대는 두 개 이야기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오래되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질문이 여기까지 가면 불경한 짓을 해야한다. 이 두 개의 문헌은 비교가 안될 정도로 바벨론의 창세기가 오래된 글이다. 결국 가능성은 성경이 바벨론 창세기의 영향을 받았다 그 가능성 밖에 안남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사학파에 속해 있는 학자들은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그 영향권 아래서 기록된 것이 명백하다. 바벨론 창세기 뿐만 아니라 애굽의 창조설화까지 영향을 끼쳤으나 바벨론의 것의 영향이 압도적이다. 이 정도 되면, 성경의 계시적인 측면이 없어진다. 유럽의 신학자들의 가운데 다수는 여전히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는 바르트적인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렇게 완벽하게 답을 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계시의 책으로 생각할 수 있는가? 소위 구약학의 중심을 형성하고 있는 폰나트를 비롯한 구원사학파에 속한 일반적인 학자들은 바벨론 창세기의 영향을 받았는 것은 인정한다. 그것은 틀림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세기를 자세히 연구하고, 마르룩 창조설화와 자세히 비교해 보면, 그 근본적인 정신에 혁명적인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우선 외형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마르둑이란 단어를 빼버리고 하나님이란 이름을 넣었다. 여기서 첫 번째 등장하는 메시지는 이 우주 세상을 창조하신 분은 마르이 아니라고 하나님이란 것을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근데, 이것은 역사적 컨텍스트에서 보면 엄청난 일이다. 포로로 잡혀 있는 한복판에서 마르둑을 빼버리고 하나님이 창조했다고 하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옛날의 종교세계의 일반적인 원칙은 한나라가 지고 한나라가 이기게되면 이긴 국가의 신이 참신이 되고 진국가의 신은 가짜 신이 되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전쟁에서 져서 포로로 잡힌 상황에서 누가봐도 마르둑이 진짜 신인 것이다. 애국가의 글자를 빼서 다른 것을 집어 넣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으로 이름을 바꾼 것이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란 것을 천명했다는 것은 독특한 것이다. 한걸음더 나아가서 이 역사를 주관하는 주관자가 하나님이란 것을 선언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두 번째 중요한 것은 소위 엣날에 종교세계에서 일반적으로 신으로 추앙받고 있던 해, 달, 별, 바다의 큰 괴물을 전부다 피조물로 격하시키고 있는 것이 독특한 것이다. 애굽에서도 태양은 태양신이었다. 그런데, 소위 신적인 특징을 가지고 잇는 것들이 한결 같이 다 피조물로 기록되어 잇다. 이것은 하나님외에 다른 신이 없다는 것과 깊이 결부되어 있다. 다른 신적인 존재가 하나님외에 없다는 것이다.
세 번째로 인간창조에서 굉장한 차이를 나타내는 데, 마르둑 창세기에서 인간은 마르둑의 종으로 창조된다. 마르둑 창세기는 일종의 정치적인 배경이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학자들이 엣날에 종교의 창조 신화는 거의 다 정치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정치적인 배경이란 사람이 마르둑의 종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바벨론의 왕은 바벨론의 신의 아들이다. 바벨론의 신을 섬기는 것은 그 신의 아들인 왕을 섬기는 것과 일치한다. 사람을 종교적으로 묶어 버리면 엄청난 정신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영원토록 그 왕을 섬겨야 하는 반란이나 저항의 가능성이 없어지는 것이다. 고대의 신화들은 정치적인 배경을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다. 집권자의 권력을 강화하고 영속화시키려는 의도가 종교의 신화속에 다 투영되어 있다.
그런데, 인간 창조 부분에 와서 굉장히 많이 바뀌는데, 창세기는 인간을 마르둑의 종으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되어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것은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과 하나님을 대신하는 대리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인간은 이땅위에 하나님의 대리자로 창조되었다. 이것은 엄청난 말이다. 인간은 종이 아니고 신의 대리자라는 것은 신학자들이 인간 해방의 복음, 인간의 존엄성, 인간의 위엄이 이미 창세기 1장에서 선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 자체를 신적인 어떤 존재로 규명하고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창세기 1장은 길가메쉬 서사시의 마르둑 서사시와 외형적으로 닮은 점이 있지만 그 정신 자체는 전혀다르다는 것이다. 얼른 볼 때 닮았다는 느낌을 주는 것 뿐이지 전혀 다른 정신에 의해서 기술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로 이 다른 정신 자체가 계시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폰나트 이후에 구약에서 강조되었던 것은 구약성경에서 메시지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구약 본문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예컨데, 창세기 1장에서 육일이란 틀, 창조의 순서, 여기에 묶이게 되면 바벨론의 종교로 돌아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 틀은 바벨론의 종교에서 가져온 것이기 때문이다.
창세기 1,2장의 틀이 틀려도 문제가 안되는 것은 틀 자체가 원시종교, 바벨론의 종교에서 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포하고 있는 메시지 자체,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신 창조주시며, 그분이 우주를 지배하고 있는 진정한 신이시며, 해든 달이든 다 피조물에 불과한 것이다. 참 신은 한분 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종이 아니라 신의 형상으로 창조받은 신의 대리자요 하나님 앞에서 이 우주 만물을 책임지고 있는 그런 존재로 창조된 것이다. 대개 구원사학파의 학자들이나 신정통주의적인 성향을 이어받은 분들은 성경안의 창조와 관계된 메시지를 연구할 때 그 당시의 종교의 틀이라든지 세계관 거기에 너무 많이 묶이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성경은 과학적인 정보를 주려는데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근본적인 정신은 우리의 구원에 관련된 메시지 자체를 전달하려는데 그 초점이 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땅의 기초를 세우실 때에 이런 표현은 과거 사람들의 세계관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세상은 평평하고, 바다로 나가면 낭떠러지가 있고, 대지 위에 밑에 기둥을 세워 놓고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기둥인데 개역성경에는 기초라고 애매하게 번역되어 잇다. 이런 것을 원시적인 세계관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원시적인 세계관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정신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그런 세계관 위에 그렇게 표현된 것 뿐이다. 이것을 그대로 가져오면 원시인들의 세계관과 과학을 가져오는 것이고, 여기서 그 정신을 가져온다면 이 세상 모든 것을 하나님이 그 능력으로 만드셨다는 것이며, 여기에 성경의 근본적인 정신이 있는 것이다. 성경비평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분들은 자유주의자든 신정통주의자든 6일만에 창조된 개념은 빌어온 개념이고 성경의 메시지가 거기에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성경을 해석하는 방식에 많은 차이가 있다. 복음주의적, 근본주의적, 자유주의적, 구원사학파적, 신정통주의적 시각에서 해석하는 방법이 다 다르다.
신복음주의는 이런 비평학적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과학과 성경을 조화시키기 위해서 날이란 개념에 새로운 뭔가를 불어넣어서 어쨋던 과학과 조화를 시켜보려고 한다.
버나드 램이 노아 홍수에 대해서 쓴 글을 보면 재미있다. 방주안에 모든 생물들이 암수 한쌍씩 들어갔다. 램이 방주의 크기를 계산해 보았는데 아무리 해도 안되겠다는 것이다. 코끼리, 코뿔소가 몇마리 들어가서 움직일 공간을 생각하면 아무리 생각해도 합리적으로 안되는 것이다. 이분이 고민을 많이했다. 북극곰도 들어가야 할텐데 북극에서부터 그 먼길을 여행을 해서 들어왔을까? 남극에 사는 펭귄은 어떻게 됐을까? 도저히 과학적으로 안맞아 들어가는 것이다. 홍수가 내려서 온 지면을 덮었다고 할 때 온을 에베레스트 산 꼭대기까지 덮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다. 그래서, 지역 홍수설로 바꾼다. 메소포타미아 지역 전체를 덮었다는 개념으로 바꾸었다. 하여간 이런 식으로 과학과 성경을 조화시키려고 했는데, 어떤 것은 억지가 많이 들어간다. 기본적인 의도는 분명하다. 성경도 하나님의 계시고, 자연을 통해서 나타난 것도 하나님의 계시인데 엇갈릴 리가 없다. 어떤 방식으로든 일치하게되어 있다는 것이 대전제이다. 설명하는 방법이 중간이 좀 잘못될 수 있지만, 어떤 형태로든 조화를 이룰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을 자기들의 방법으로 설득했다.
네 번째로 정치적 문제에 대해서는 중립을 취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사회복음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회변화를 개인을 전도해서 변화된 개인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본적인 방향이다. 구조가 회개를 하느냐? 구조를 회개를 못하는 것이다. 개인이 회개를 하는 것이며, 변화된 개인이 사회를 바꾸는 것이다.
다섯 번째로, 협력적 전도와 선교에 우선권을 둔다. 이분들은 선교에 굉장한 중요성을 두었던 사람들이다. 근본주의자들과 다른 점이고 어떤 면에서 근본주의자들보다 나은 점이다. 근본주의자들은 교리의 순수성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복음주의자들은 교리의 순수성보다는 전도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복음전하는데 도움이 되면 어지간하면 협력을 하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교리가 서로 조금 달라도, 복음 전하기 위해서 협력을 하는데 이것이 협력적 전도라는 말이다. 이것은 대단히 성경적인 것이다. 사람이 서로 다를 수 있다. 주장이나 이해는 다양할 수 있다. 복음전하기 위해서 우리가 다 한 형제니까 힘들 합치자는 것이 복음주의자들을 휩쓸고 있는 정신이다. 정신자체는 훌륭한 정신이다. 순복음교회 - 하나님의 성회 사람들과도 연대를 한다. 근본주의자들 교회에서는 오순절 주의자들이 다 쫓겨난다. 오순절 교단이 생긴 것도 근본주의 교회에서 성령 체험이 있는 사람들을 이런 저런 방법으로 다 쫓아 내어버려서 갈데가 없어서 자기들끼리 모인 것이 오늘의 오순절 교파를 만들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성회에서 대거 복음주의에 흡수되었고, 이로 인해서 복음주의가 범세계적인 운동으로 확장되는 동인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전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전도를 먼저하고 다른 것을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이런 정신이 복음주의 정신이다. 복음주의가 가진 전도에 대한 뜨거운 정신, 협력적으로 전도하려는 정신은 긍정적인 것이다. 그러나, 협력도 어느정도 한계는 있는데, 복음주의자들이 자유주의자들과는 협력이 불가하다. 어느정도 보수적인 성향이 있는 사람들끼리 협력하는 정도이다.
제5강
II. 칼바르트의 생애와 주요사건들
K. Barth의 생애와 중요한 사건
1. 칼 바르트의 생애
▶ 1886년 출생 ~스위스 바젤에서
1904 ~1911 : 신학수업 기간 --전도사(제네바)
초기: 베른(Bern), 후기 : 베를린에서 수업(궁켈, 하르낙의 수업을 들음)
튀빙겐에서 Schlatter(보수적)로부터 배움.
(아버지가 보수적인 사람이어서 바르트에게 보수적 신학을 배우길 원해서 튀빙겐으로 권유, 바르트는 숨이 막혀 못 견디고.....)
Marburg에서 공부한 후 졸업. →자유주의 신학자 헤르만을 만남(수업 시간마다 감격, 눈물까지 흘릴정도 심히)
"증명되어지는 신은 신이 아니다."라는 명제←칸트영향(인간성, 자유성 배움)
1909년, 제네바 개혁교회 전도사.
▶ 1911 ~ 1921년, Safenwil에서 목사 (이시기는 1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이 때만 하더라도 그는 철저한 자유주의자였다.)
* 1918~로마서 강해 완성, 1919년 출판, 제 1 판.
* Tambach에서 "사회 속의 예수 그리스도" 라는 강연- 이 강연은 종교사회주의자들이 주최했었다.
→ 사람들에게 알려짐.
* 1921년 쾨팅겐 대학 교수.
▶ 1921~30년, 괴팅겐, 뮌스터 교수 시절.
* 괴팅겐 대학의 교수가 된 후 『Zwixchen den Zeiten』(시간들 사이에)라는 잡지발간
→ 트루나이젠, 고가르텐과 같이 만듬, 이 잡지로 변증법적 신학자로 불려짐.
*1925년 뮌스터 대학으로 옮김
▶ 1930~35년, 히틀러와의 투쟁기(초기, 히틀러 대항에 불붙인 사람이 바르트다)
* 1930년 본 대학으로 교수자리 옮김
* 본격적으로 히틀러와 투쟁 위의 잡지는 중단되고, "오늘의 신학적 실존"이라는 잡지 발간
→ 히틀러와 투쟁
* 1934, 5, 30~31 『Barmen 신학선언』발표됨.←고백교회 신학선언(칼바르트가 작성)
Bohn 대학 교수직에서 해직당함.
*자기 고향인 바젤로 돌아감. -이 시기, 히틀러의 강권정치 강해짐.
cf) 이때부터 고백교회운동의 신학적 지도자로서 본회퍼가 등장하기 시작함
▶ 1935~1962년, 바젤(Basel) 대학 교수 - 바르트 신학의 완숙기.『교회교의학』저술
1962년, 은퇴.
1968. 12. 10. 사망
2. 중요한 사건
1) 1915년 스위스 사회 민주당에 가입
자펜빌의 붉은 목사라는 별명을 듣게됨 -- 그는 사회주의자인가?가 중요한 신학적 문제로 대두 (1970년)
2) 1923년, 베를린의 하르낙 교수와 논쟁벌임
쾨팅겐 대학 교수 시절임, 하르낙은 헤르만과 독일 신학의 최대의 원로로 있었음.
이 논쟁으로 칼 바르트가 유명해짐.
1920년 『성서적 질문. 관점. 조망』이라는 강연을 함, 하르낙이 이것을 읽고 자극 받음.
1923년, 하르낙이 『신학하는 자 중에 학문적 신학을 조소하는 사람에게 보내는 15개의 질문』이라는 문서를 공개적으로 발표
바르트 - 신학의 과제는 설교다. 역사 비판학의 한계 강조.
反 하르낙 -- 신학교 교직을 설교직으로 바꾸는 자다.
바르트 - 교회의 신학자: 신학은 교회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교회의 현실을 생각하며 사랑하는 신학자.
하르낙 -- 아카데믹한 신학자: 신학함에 있어 어떤 전제도 있어서는 안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설교하기 이전에 그 예수가 어떠했는가를 알아야 함.
(역사적 예수의 모습) 그렇지 않은 신학자는 교회에 아첨하는 신학자다.
-- "우리가 설교하는 예수와 역사적 예수는 다르다는 것을 의미"
3) 나찌 히틀러와의 투쟁.
1934년 바르멘 신학선언 기초 →독일 고백교회의 신학적 아버지가 됨,
칼바르트의 신학이 독일 교회에 영향끼치며, 그이 신학적 권위가 높아짐
골비쳐가 이시기에 그의 조교였음. 바르트와 함께 해직당함, 이후 계속 히틀러에 대항.
나치 수용소에 갇힘. 후에, 베를린 자유대학 교수가 됨
-반핵평화운동에 앞장섬
골비쳐, 바르크 바르트(박순경교수가 영향받음)등이 바르트 신학을 좌파적으로 해석.
1938년, 체코 프라하 신학자 로마트카에게 나찌에 저항할 것을 요구하는 편지 보냄.
중간에 나치에게 빼앗겨 나치 기관지에 실리는 등 문제 발생.
현실에 민감했던, 현실의 문제를 신학적으로 해석하려 했던 역사적 문제에 민감했던 신학자.
나의 신학은 전체가 구체적으로 표현했던 안했던 간에 정치적 문제에 민감했다."
신학은 가장 남성다운 학문 - 신학을 안했다면, 정치했을 것임.
4) 1935~1962년 교회 교의학 출판 (9,000페이지): 말씀, 신, 창조, 화해, 구원 (종말론)
*kirschbaum 이라는 여비서가 바르트를 도왔기에 가능, 1924년부터 알게됨. 1930년부터 도와줌, 칼바르트 보다 먼저 죽었다. 그 뒤 바르트의 글이 나오지 않음.
5) 바르트가 사랑했던 사람.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의 사진, 유명한 음악가 모짜르트의 사진이 그의 방에(서재) 걸려있음
바르트 신학의 핵심 :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 → 하나님의 은총 깨달음.
"알프스의 산길을 걸으며 하나님의 은총을 찬양하는 것이 나의 신학이다."
* 9천여 페이지에 달하는 교회 교의학은 하나님의 은총을 찬양하는 찬양의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 하나님 은총의 승리가 바르트의 신학이다.
* H.Vogel: "(하나님의 은총에 기인된)웃는 바르트"라는 제목으로 바르트 논문집의 한 단원을 정함
모짜르트의 음악이 하나님의 은총을 찬양하는 음악이라고 생각함
* "모짜르트 음악에서 나는 자유와 희열을 느꼈다"
* 만년에, 모짜르트에 관한 책도 씀.
* "하나님나라에서 하나님의 칭찬받는 천사는 바하의 음악 아닌, 모짜르트의 음악을 연주하는 천사일 것이다."
* 나는 카톨릭 신자가 되기는 원치 않지만 적어도 14일 동안 교황이 되어 모짜르트 음악을 축복해 주고 싶다.
6) 칼 바르트의 신학은 변천하고 있었다.
신론 중심으로 6번의 신학변천이 있음 --김명용 교수 학위 논문
초기와 후기신학이 다름, 분명히 시기 구별을 해야 함.
바르트 자신의 신학과 관계가 있다.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대전제임
나의 모든 업적은 물거품 같은 것이라고 생각.
7) 칼 바르트의 적 : 그의 일생에 3부류의 적이 있었음.
문화기독교*(19c, 자유주의) --인간적인 것을 신적인 영광으로 옷입힌 것임.
경건주의자와 율법주의자.
* 바르트는 경건주의의 영향 받으며 삶--경건주의 왕국지역에서 자람→경건주의 비판
: 경건주의의 지옥, 경건주의는 사탄을 만든다고 함.
하고자 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이들은 롬 7장에 스스로 빠져 있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의를 이루려고 하나 이루지 못함.
* 바르트의 신학 : 은총의 신학 --"나의 신학에 대해 문제가 있다고 하는 사람은 100%, 심술사나 율법주의자다"라고 말함
* 자학, 비판, 용서없는 경건, 율법주의자.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율법주의자.
하나님의 은총을 발견 못하는 율법주의자.
* 진정한 경건은 율법주의의 올무에 매여있지 않고 사랑하는 것에 있다.(자비, 사랑, 긍휼이 경건의 핵심이다.)
* 율법주의자 - 용서를 알지 못함←하나님의 비판의 대상이 되는 자.
(약 2: 13 긍휼없는 심판, 약 1: 27 고아, 과부를 돌아봄)
* 하나님의 은총을 헛되이 하는 자들이라고 비난.
로마 카톨릭
* 교황이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므로 - "예수 그리스도의 영과 교황의 영은 한 지붕 아래 동거할 수 없다.
←교황이 적그리스도의 역할을 하게됨
*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중요하게 여김 →교황에 반대로 나타남
: 개혁교회 기본정신이 되기도 함.
* 전기: 카톨릭을 적그리스도의 집단으로 봄.
그러나 1962~65년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 초청을 받아 교황과 만남,
바르트의 생각이 달라짐 →로마 카톨릭 새로운 카톨릭으로 출발. ←교회는 적그리스도는 아니다"라고 말함.
: 카톨릭 신학에 대한 오해, 부정확한 이해가 바르트에게 있었음 →카톨릭 신학자들이 바르트를 연구한 후 얻은 결론.
: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가 전적으로 교회를 지배되어야 한다는 기본정신 때문에 교황제도를 거부하고, 카톨릭과의 관계도 좋지 못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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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바르트의 하나님나라 이해
이신건
Ⅰ. 들어가는 말
칼 바르트는 1909년에 쓴 그의 짧은 논문 '현대신학과 하나님 나라의 일'(Moderne Theologie und Reichgottesarbeit)에서 현대신학 즉 그 당대의 이른바 문화개신교주의, 신개신교주의, 혹은 자유주의 신학의 주요특징을 요약하고(종교적 개인주의, 역사적 상대주의), 이 신학이 갖는 문제점으로서 인식의 상대성, 신앙표상의 복수주의 및 실천관련성의 결핍, 다시 말하자면 공동적이고도 일관적인 실천능력의 부재를 지적한 적이 있다. 이 논문에서 바르트는 그 당대의 신학의 이론적?실천적 한계성을 통찰하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이론을 암중모색하려고 고민했음을 엿볼 수 있다.
본인도 여기서 바르트가 자유주의 신학을 이론적?실천적으로 분석하고 검증한 방식대로 그의 하나님의 나라 이해를 그 이론적?실천적 관점 아래서 규명해 보고자 한다. 그는 과연 그 이전의 신학이 갖는 이론적 문제점들을 극복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데 성공했는가? 그는 과연 그의 신학을 통하여 교회가 다함께 일관된 행동을 할 수 있도록 든든한 실천적 토대를 마련해 주었는가? 여기서 우리는 바르트의 '하나님의 나라 신학과 그 일'의 상관성을 추적하는 데 촛점을 맞추기로 하자.
Ⅱ. 신학사적 분기점
바르트의 하나님의 나라 신학과 그 이전의 하나님이 나라 신학을 확연히 구분하는 분기점은 무엇이며, 무엇이 바르트로 하여금 그의 스승의 하나님의 나라 이해로부터 갈라서게 만들었는가? 이 문제의 해명은 바르트와 그의 동료들에 의해 기획된 새로운 정통주의(Neo-Orthodoxie) 신학을 이해하는 데 필요불가결한 조건이 될 뿐만 아니라, 바르트 자신의 신학 전체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관건이 된다. 특히 '하나님의 나라'는 종교적-신학적 개념(표상,상징)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신학적 개념이기도 하기 때문에, 바르트의 하나님의 나라 이해를 규명하기 이해서는 그의 신학을 새롭게 태동시키게 만든 신학사적 분기점을 확인하는 일은 필수적이다.
⑴ 이른바 '철저한 종말론'(Konsequente Eschatologie)에 의한 종래의 하나님의 나라 신학의 철저한 해체
이른바 자유주의 신학이 구상한 하나님 나라의 꿈과 이상은 중세기의 천년왕국 사상의 지원을 받으면서도 레씽(Lessing) 이래로 특히 독일남부 쉬바벤 지방의 성서주의(Biblizismus)의 구원사 신학으로부터도 간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인데, 이 새로운 신학적?철학적 천년왕국의 인류사적 구상에 따르면, 인류사의 목표는 완성된 인간성, 도덕성, 이성의 목적을 보편적으로 실현하는 데 있었다. 신학이 철학과 손을 맞잡고 만들어 놓은 '범종말론적 꿈'(Paneschatologischer Traum)은 역사에 대한 진보적?낙관적 이해를 바탕으로 삼고 있었으며, 비록 하나님의 초월성과 하나님 나라의 피안성을 인정하고는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 실현의 가능성을 전적으로 세계 내의 인간의 가능성에 두고 있었다(낙관적 인간이해). 칸트(I. Kant)가 '최고선'의 이상을 하나님의 나라와 분명히 동일시한 이래로 철학과 신학의 공생(共生)을 위한 전제조건이 마련되었으며, 양자 간의 돈독한 연대 관계는 특히 하나님 나라의 보편적인 궁극적 목표를 바라보면서 시민계급의 직업윤리를 세우려고 한 리츨(A. Ritschl)의 시도 안에서 최종적으로 완성된 것 같이 보였다.
철학과 신학, 종교와 문화, 신과 인간의 종합(Synthese) 위에 세워진 천년 왕국적 이상은 리츨의 사위인 바이쓰(1865-1914)에 의해 철저히 문제시되었다. 신학사의 지축을 뒤흔든 바이쓰의 연구(Die Predigt Jesu vom Reich Gottes, 1892)는 비록 67페이지라는 작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신학사에서 매우 의미심장한 저서가 되었고, 옛것의 종말과 새것의 시작을 가져왔다. 바이쓰의 주장에 따르면, "예수가 이해한 하나님의 나라는 절대적으로 초세계적 실재로서... 이 세계와 배타적으로 대립관계에 있다... 예수의 사고 범주 안에는 하나님 나라의 세계 내재적 진보에 관한 말이 전혀 존재할 수가 없다.
이로써 종말론적?묵시적 하나님 나라 이해는 종교적-윤리적 욕구와 철저히 대립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초월적 표상은 세계내재적 진보의 목표와는 오로지 대립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이 세상과 공통되는 것이라곤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고, 그의 한 발은 이미 미래적인 것 속에 서 있다. 이로써 예수는 산상설교의 도덕교사로 등장한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 메시지를 가진 묵시문학적 열광주의자가 되었다.
쉬바이쳐(A. Schweitzer)에게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그에게서 예수는 더이상 단지 당대의 종말론의 대변자가 된 것만이 아니라, 종말론적?묵시문학적 각본의 배우로서 심리적으로 이해되었다 :
"사방이 고요했다. 거기에 세례요한이 나타나서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외친다. 곧 그 뒤를 이어 스스로 와야 할 인자로 자각한 예수가 세계의 수레바퀴의 살에 끼워져서 그것을 움직이며 마지막 회전을 시키고 일반 세계사의 종말을 가져 오려고 한다. 그러나 바퀴가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그는 거기에 몸을 던졌다. 그래서 바퀴는 그대로 돌고 그는 갈기갈기 찢겨졌다. 그는 종말을 가져오는 대신에 그것을 파괴했다. 그런데 세계라고 하는 수레 바퀴는 계속 돌아가고, 자신이 인류의 영적 지배자이며 인류역사를 자기의 목적대로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강하고 측량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한 사람의 갈기갈기 찢겨진 시체의 조각들이 아직도 그 수레바퀴에 매달려 있다. 이것이 바로 그의 승리이며 통치이다."
바이쓰와 쉬바이쳐가 주창한 소위 '철저한 종말론(Konsequente Eschatologie)은, 비록 참으로 철저하지 못했지만, 즉 철저히 종말론을 붙들고 나가지 못하고 이를 결정적으로 극복, 폐기하고 다시금 자유주의의 예수상으로 돌아갔지만, 기독교에 대한 종말론의 중심적 의미의 발견은 최근의 개신교 신학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사건 중의 하나로서 충격적인 결과를 가져다 주었고, 기독교에 위기의식을 가져다 주었다. 그것은 신학, 교회와 경건, 신앙의 터전을 흔드는 지진과 같았고, "홍수가 나고 제방이 무너지는 것"(M. 켈러)과 같았다.
⑵ 제1차 세계대전에 의한 자유주의적?이상주의적 문화의 결정적 붕괴(윤리적 실패)
자유주의 신학의 진보적?낙관적 천년왕국의 지축을 뒤흔든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이었다. 칼 바르트는 그 당시의 경험을 스승들의 신학으로부터 결정적으로 결별하게 된 계기로서 술회했다:
"그 해(1914년) 8월 초순은 적어도 나에게는 암흑의 날이었다. 93명의 독일 지식인들이 빌헬름 2세의 전쟁선포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지지서명을 발표했는데, 이 지식인들 중에는 이제까지 숭앙해 왔던 신학스승들의 이름(필자주:하르낙,제베르크, 헤르만 등)이 함께 있었다는 사실은 나를 더욱 경악케 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이들의 윤리학과 교의학, 성서해석과 역사관을 따르지 않기로 결심했고, 더우기 19세기의 신학은 더 이상 장래를 기약할 수 없다는 점을 절감했다."
바르트의 스승의 하나님 나라의 신학은 결국엔 독일의 이기주의적 영토확장을 뒷받침해주는 세상 나라의 전쟁신학으로 귀착되었다. 이것은 그들의 신학의 필연적 귀결이요, 그 이론적?실천적 실패의 징후였다. "자유주의의 역사는 미로였고 사도(邪道)와 미궁의 역사였다. 그 힘은 모순과 상호파괴에 이르기까지 자유로이 뛰놀았다."
이 날 이후로 바르트는 자유주의 신학의 허구적 자유의 체계와 그 이데올로기의 내적 모순, 붕괴와 더불어 절대적인 하나님, 철저히 이 세계에 대하여 낯설고 초월적인 하나님의 나라에로의 새로운 부름의 소리를 들었다. 이 하나님, 하나님의 나라를 그는 성서 안에서 발견했는데, 이것은 그의 스승들이 가르쳐 주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진기하고 새로운 세계'였다. 이것은 인간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였다. 이로부터 바르트는 자유주의 신학의 상대적?주관적 입각점(도덕의식, 종교체험, 역사의식)으로부터 절대적?객관적 입각점(인간과 세계에 대해 주체로서 자유로이 대면해 있는 하나님과 그의 나라)으로 돌파함으로써, 옛 신학의 잔해를 딛고 새 신학의 장을 열게 되었다.
⑶ 블룸하르트 부자(父子)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돌입
앞의 두 사건 만큼 그렇게 떠들석하게 대지각 변동을 일으킨 사건으로서 주목받지는 못했지만, 서서히 한 곳에서 지각균열을 일으키면서 마침내는 온 지각을 뒤엎었던 사건의 하나는 바로 블룸하르트 부자가 일으킨 하나님 나라의 운동이다. 소위 자유주의 신학의 붕괴를 딛고, 아니 그 붕괴에 가속력을 주면서 등장한 이른바 변증법(혹은 신정통주의) 신학의 대변자들 중에서 그들의 영향을 직접?간접적으로 받지 않은 자들은 드물다. 마트뮐러는 말했다:
"종교사회주의와 변증법 신학이라는 20세기의 스위스에 탄생한 저 위대한 신학운동은 그 공통의 뿌리를 받 볼(Bad Boll)에 가지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변증법 신학운동을 흔히 "하나의 블룸하르트 운동"(Eine Blumhardtsbewegung)이라고 부른다. 블룸하르트 부자가 찾고 구하고 증언한 하나님은 새로운 행위와 능력과 계시를 기대할 수 있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었다. 또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단순히 개개의 인간의 영혼 속이나 먼 하늘에만이 아니라 무엇보다고 그리고 우선적으로 인간의 생활 속에, 바로 이 지상의 인간의 실생활 속에서 찾고 기대하려고 했다.
아버지 블룸하르트(J. Chr. Blumhardt)는 뜻하지 않는 악귀 추방의 경험을 겪은 이후로 카리스마적 목사가 되었는데, 그 이후로 그는 계속되는 회개와 치유의 역사의 한 복판에서 살아계신 하나님, 악의 나라와 하나님 나라 간의 투쟁, 승리자인 예수를 생생하게 증거하고 실천했다. 그의 목회를 이어받은 아들 블룸하르트(Chr. Blumhardt)는 점차 부친의 수직적 하나님 나라 이해에 수평적 하나님 나라 이해를 결부시켰고,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의 희망을 이 땅 위의 이상(사회주의적 삶의 방식)과 결합시켰다. 그의 메시지와 활동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철저한 기다림과 적극적인 서두름, 초월적인 하나님 나라의 돌입과 이를 준비하고 촉진하며 이에 협력하는 인간의 역사변혁적 행동, 하나님 인식과 하나님 나라의 희망이 묘하게 결합되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 세상의 전적인 갱신자로서의 하나님, 이 세계를 위한 희망으로서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그의 메시지는 바르트에게(그를 비롯하여 투르나이젠, 브룬너, 쿠터, 라가츠 등에게도) 심원한 자극과 영향을 주었다.
Ⅲ. 바르트의 하나님의 나라 이해
⑴ 로마서 주석 제1판(1919)
로마서 주석 제1판에서 바르트는 특히 블룸하르트와 튀빙엔 대학의 천년왕국적 종말론자 토비아스 벡(T. Beck) 등의 영향 아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유기적인 새 창조로 이해했다. 이 나라는 지금까지 존재해 온 제 가능성들 안에서 이루어지는 전진이나 발전이 아니라(자유주의 신학의 진보적?낙관적 하나님의 나라 이해에 대한 부정!), 모든 시대들을 관통하며 모든 시대들의 신적 가능성을 출현시키면서 유기적으로 성장한다. 이 나라는 기존의 것을 유지하거나 거기에서 안정적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며(부르즈아적?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부정!), 또 그렇다고해서 기존의 것을 파국적으로 제거하지도 않는다(레닌주의적?공산주의적 혁명에 대한 부정!). 하나님의 나라는 완전히 다른 하나님 자신의 나라로서 모든 기존 현실을 관통하며 모든 신적 성향과 가능성을 실현시키면서 성장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되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창조이다. 그 나라는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인해 가능해졌고 그의 부활로 인해 현실화되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 안에서 가까이 왔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가 그리스도 안에서 현실화되었는가?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의 씨앗, 변혁된 자연 법칙의 원리, 새로운 세계의 결정핵, 새로운 인간과 사물의 유기체의 시초와 머리, 새로운 창조의 배아(씨앗)로서 죽음을 통하여 낡은 요소를 받아서 새로운 갱신된 세계를 조성해 낸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과 세상 및 인간 사이에서 상실된 유기적 일치 관계를 회복하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재건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혁명으로서 모든 혁명의 혁명이다. 그리고 혁명의 능력은 하나님의 영이다. 이 영은 기존 현실을 파괴하지도 않고 보존하지도 않으면서 그것을 철저히 변혁시킨다.
여기에서 바르트는 하나님의 나라를 모든 종류의 인간적 혁명 혹은 개혁의 시도의 가능성을 부정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저항운동으로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혁명은 아무리 새로운 형태로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낡은 나라를 대변할 뿐이지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오지는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바르트가 로마서 주석 제1판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혁명을 위한 인간의 협력이나 참여조차 완전히 배제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혁명은 물론 우리 밖에서(extra nos) 시작하지만, 우리 안에서(in nobis) 우리와 함께(cum nobis) 일어난다. 하나님은 아래로부터 활동하시기 시작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아래로부터의 운동이다. 하나님은 지배구조 아래서 고통당하는 하층민들의 편을 들면서 억압받는 자들에게 활약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인간소외, 인간의 우상생산(국가, 맘몬, 인물, 예술, 학문, 교회, 미덕 등의 우상화), 인간의 물화(物化)와 주인없는 권세들(자본, 국가, 군국주의)의 지배에 맞선 하나님 나라의 혁명에 길들여짐으로써, 하나님의 혁명에 참여할 수 있다. 이것은 특히 사회민주주의 안의 정치적 참여 속에서 이루어진다.
⑵ 로마서 주석 제2판(1921)
로마서 주석 제2판은 완전히 새롭게 쓰여지고 철저히 논리적으로 구성된 것으로서, 바르트를 하루 아침에 유명하게 만드는 계기를 마련했다. 로마서 주석을 다시 개작하게 된 동기는 특히 여러 사상가들의 저작들을 접한 것에 있다. 오버벡(F. Overbeck)의 원역사(Ur-geschichte)의 개념으로부터 바르트는 역사적 회의주의를 배웠고(역사에는 무상과 타락의 법이 존재한다. 기독교는 초시간적이다), 도스토예프스키(Dostoyewski)의 소설들에서 바르트는 인간의 악마성, 진리의 파라독스적 성격, 기존 현실에 대한 철저한 회의 등을 수용했다. 그리고 키에르케고르(S. Kierkegaard)로부터 바르트는 많은 상징적 표현문구들만이 아니라 진리의 실존적?역설적 성격, 하나님과 인간의 철저한 구분, 계시의 순간적?사건적 성격 등을 배웠다. 그 밖에도 바르트는 플라톤(Platon), 칸트(Kant) 및 종교개혁자들(Luther, Calvin) 등으로부터도 새로운 통찰을 획득했다.
그리하여 바르트는 하나님, 하나님의 나라의 철저한 초월성, 이질성, 배타성을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과 인간의 혼합, 인간적인 것의 신적인 고양(高揚), 인간 존재 안의 신적 존재의 개입(介入)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나라는 비시간적인 시간, 비공간적인 영역, 불가능한 가능성, 부정 속의 긍정, 시간 속의 영원, 죽음 속의 생명이다. 이 나라는 그리스도 안에서 가까왔다. 그는 역사의 의미이며 시간의 종말이고 오로지 역설(Kierkegaard), 승리자(Blumhardt), 원역사(Overbeck)로서만 이해될 수 있는 자이다.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위로부터 수직적으로" 단절시키는 미지의 차원이다. 그러므로 그는 역사의 가시성 내에서는 문제꺼리, 신화로서만 이해될 뿐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숨겨진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나라는 가장 작은 입자 속에서도 땅에 도래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나라는 가장 고상한 형태 속에서도 오지 않았다. 그것은 가까이 왔을 뿐이다. 그것은 선포되고 신앙될 수 있을 뿐, 낡은 것의 연속으로서 가까이 온 것은 아니다. 새로운 세계는 가까이 왔지만 어디까지나 영원한 세계로 머물러 있을 뿐이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 그것의 반사(反射) 안에 있을 뿐이다. 이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부정적, 불가시적이고 은폐된 것이다. 그것은 이 세계의 소멸, 만물의 종말, 차안의 동요와 소요, 파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유기적으로 성장하거나 건설되어지지 않는다. 그처럼 볼 수 있는 나라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바벨탑일 뿐이다. 우리는 두렵고 떨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 나름대로 이룩하려고 노력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머리카락의 넓이 만큼도 접촉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영원한 순간은 모든 순간들과 비교할 수 없이 대립하고 있고,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시간들과 비교할 수 없이 대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순간들의 초월적 의미, 모든 시간들의 성취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철저히 배타적으로 하나님 자신만의 일이라고 간주된다. 물론 그것은 우리들을 위해(pro nobis) 일어나지만, 더 이상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맞서서(contra nobis) 일어난다.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혁명, 하나님 나라의 일에 협력하지 못한다. 가장 철저한 혁명조차도 하나님의 나라를 앞당겨 오기는 커녕, 단지 기존적인 것을 기존적인 것으로 대체할 뿐이고, 새로운 형태의 악을 불러 들인다.(레닌혁명 비판!).
그렇다고 해서 바르트가 여기서 전적인 체념, 윤리적 행동의 상대화, 부르즈와 계급적 반동, 종말론적 비관주의를 장려하자고 한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는 세상에 대해 절대적으로 다른 하나님을 통하여 세상을 절대적으로 다르게(새롭게)하는 하나님의 활동을 긍정하려고 했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활동할 수는 없지만, 기존질서 내에서 사회적 긍정, 억압, 독재에 맞선 개혁정치를 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준비하고 시위할 수 있다. 이러한 행위는 로마서주석 제1판에서와 같이 온갖 경직된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 속에서 이루어지며, 사회민주주의적 정치 안에서 실천된다.
⑶ 교의학 시대(1932-1968)
로마서 주석 제2판은 신학과 철학, 하나님과 인간을 종합하려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작업마당을 폭파한 효력을 끼쳤다. 인간이 생산해 내는 온갖 우상을 파괴하고 성전을 더럽히는 온갖 혼합주의를 축출하는 데 큰 공로를 세운 이 책은 잠자는 뭇 그리스도인들을 깨우는 닭소리, 종소리가 되었고, 인간으로 하여금 무상한 것을 절대화하려는 시도로부터 결별하여 절대적으로 자유롭고 은혜로운 하나님 앞에서 전율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이 책은 로마서 주석 제1판과는 달리 하나님의 나라의 위기에 촛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폐허, 진공을 남기는 듯 하였고, 시간-영원의 변증법이 하나님의 나라의 희망에 대한 기대를 채워 주기에는 너무 인색한 것 같았다. 머지 않아 바르트는 괴팅 대학의 교수로 부임하게 되었고, 여기서 종교개혁자들의 유산을 더욱 더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자신의 이전 체계를 심화?수정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변증법적?수직적 종말론의 체계는 다시금 그리스도 중심적 관점 아래서 성서적?수평적 종말론의 체계에 의해 대체?수정되어 나가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전환은 '바르멘 신학선언'의 제3항("... 교회는 그분의 오심을 기다리면서 …살고 있고…")과 자신의 고백(KDⅡ/1, 716 이하: "...나는 도래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피안성을 진지하게 여기느라 하나님의 오심 그 자체를 소홀히 여겼다... 어떻게 내가... 시간에 속하는 목적론(Teleologie), 진정한 종국을 향한 그 출발을 온갖 기교와 능변을 부려서 간과했는지 사람들은 알고 있다... 그 종말론적 전환 자체가... 반동으로서는 너무 강했다. 즉 독단적이고 전제적이었다.")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이전의 체계에서도 그러했지만, 특히 화해론에서는 더욱 분명하고도 의식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구상되고 설명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워진 지배, 그분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통치이다. 그분 자신이 곧 하나님의 나라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인격 안에서 온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리고 바르트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화해를 하나님의 혁명이라고 부르는데, 이 혁명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현존하는 하나님 나라의 돌입이다. 이 하나님 나라의 돌입, 하나님의 혁명은 인간과 세계의 급진적?전체적?보편적 변혁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한 참 혁명가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 나라의 혁명은 사회집단과 관습에 맞선 충돌 안에서 일어나서 모든 인간들의 상황변혁을 목표로 삼는다. 그렇지만 이 혁명은 율법적 강요의 전체주의 속에서가 아니라 은총의 전체주의 속에서 일어난다. 이 혁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지만 인간도 변혁의 주체가 되도록, 하나님의 투쟁에 참여하도록 부름받는다. 이 투쟁은 특히 인간의 소외, 물화, 관료주의화, 억압에 맞선 행동 속에서 구체화되며, 이 행동은 사회주의적이고 민주적인 사회, 화해된 사회를 위한 실천 속에서 이루어진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선행적 형태, 비유, 반영, 복사로서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지시하고 이의 도래를 위해 기도하기 때문에,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혁명인 화해의 인식으로부터 유래했기 때문에, 사회의 부정적 요소들에 대한 비판적 역할과 더 나은 사회질서의 수립을 위한 건설적인 역할을 통하여 사회변혁을 위한 적합성을 실증할 수 있다. 교회는 이론적?실천적으로 더 나은 화해된 질서를 향해 진군하는 전위대, 선구자로서 자신을 입증할 수 있고 또 입증해야 한다. 그렇지만 바르트에 의하면 교회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적합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 비록 주관적으로 인식하고 있지는 못하더라도, 세속적인 휴매니티, 우주의 빛들과 진리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매개하며, 사회민주주의는 인간적?정치적 세속성의 진정한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의 반사로 입증된다. 왜냐하면 사회민주주의는 그리스도교의 신앙고백의 정치적 차원과 내용적인 공통성을 갖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르트에게서 하나님 나라의 혁명에의 인간참여는 특히 사회민주주의 안에서의 영속적 체제변혁, 영속적 개혁정치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Ⅳ. 맺는 말
바르트는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일평생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려고 힘썼고, 예수의 실천에 따라 하나님의 나라 신학을 실천영역에 옮겨 놓고 스스로 실천해 보려고 애썼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사망 직전에도 그의 친구 투르나이젠과의 마지막 통화에서도 "...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렇지만 바르트는 자신을 결코 절대화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복음을 새로이 가리키는 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세례요한의 손 이상이 되길 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그가 하나님과 이웃의 영광을 위하여 자기 나름대로 노력한 것을 나중의 사람들이 훨씬 더 잘해 주길 바랬다.
만약 그가 더 오래 살았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나라 신학을 어떻게 더 수정?심화할 수 있었을런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그는 다른 내용으로 이를 채우려고 애썼을 것이다. 그러므로 바르트의 하나님의 나라 이해는 마지막 해답이 아니라 새로운 질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 우리 시대에서 하나님의 나라 신학은 무엇이고, 하나님 나라의 일은 무엇인가? 바르트는 그의 대답을 통해서 보다는 오히려 이런 질문을 통하여 훨씬 더 가까이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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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바르트의 화해론의 계약신학적 배경
I. 문제제기 및 칼 바르트 화해론의 교리사적 位相
1. 그 당시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가 곧 오늘날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인가? (Christus pro nobis tunc et nunc)?
교회에서 매 주일 선포되는 說敎나 기독교 神學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우리를 위한 것으로, 즉 우리의 죄 용서와 영생을 위한 것으로, 證言합니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즉각적으로 질문이 제기 될 수 있습니다: 어떻게 2000 여년전 팔레스틴의 한 목수의 아들 나사렛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오늘날 21 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를 위한 사건이 될 수 있을까? 다시 말해서, 어떻게 한 유대 청년의 죽음과 부활이 모든 인류의 죄 용서와 永生을 위한 和解의 사건이 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사도 바울 以來로 교부시대, 중세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신학은, 사람들이 충분히 납득할 만한 답변을, 하지 못하였읍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와 오늘 (tunc et nunc)" 그리고 팔레스틴의 유대인 (Juden) 청년과 온 인류 (alle Menschen) 사이의 時間的 그리고 空間的 間隔을 초월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온인류 혹은 오늘의 우리를 위한 사건으로 설명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것만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당시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는 곧 오늘날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라는 것을 辨證하는 것은 여전히 組織神學의 중요한 신학적 主題로 남아 있읍니다.
그런데 이러한 신학적 질문에 답변을 試圖하고자 할 때에, 기독교 신학은 또 다른 啓發的인 질문에 부딪치게 됩니다. 그것은 기독교 公義會가 결정하고 신앙하는 信條 (특히 칼케돈 신조)에 대한 逆 질문이 생깁니다: 즉 "예수가 참 신이며, 참 인간 (vere Deus et vere Homo)"이라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 더나아가 참 하나님이신, 예수가 죽을 수 있겠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十字架 上에서의 예수의 죽음은 두 본성 (zwei Naturen) 중 "인간성"만의 죽음인가, 아니면 神性과 人性의 총체적인 죽음인가? 예수의 죽음이 두 본성의 죽음, 즉 "참 하나님과 참 인간"으로서 죽음이라면, 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만 했는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십자가에 죽어야 만 했던 理由 내지는 根據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들이 惹起됩니다.
이러한 일련의 질문들에 대하여 초대교회 이래로 수 많은 신학자들이 답변을 시도해 보았읍니다. 그러나 그 답변들은, 성서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는 바를 부분적으로 수용함으로써 편파적인 이단적 교리를 주장하게 되었읍니다. 그 대표적인 일례로, 가현설론자들은 (Doketismus) 神의 죽음을 收容 할 수 없는 나머지, 영지주의자들의 (Gnostiker) 宇宙論的 二元論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그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그의 人性마저도 否認하였읍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절대적 존재는 유한한 존재와 진정한 결합을 이룰 수 없다. 물질은 악하고 영적세계는 항상 물질과 충돌된다" 고 하였읍니다. 그런가 하면 이레니우스 (Irenaeus) 이래로 Ebjonitismus는 유대적 율법주의에로 復歸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Gottheit) 否認하였읍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관련된 그의 두 본성 내지는 존재 (Sein)에 대한 논쟁은 451 년 칼케톤 (Chalkedon) 宗敎會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으로 일단락 지워졌읍니다
그런데 다시금 예수의 죽음은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느냐는 질문이 제기 되었읍니다: 어떻게 예수의 죽음이 우리의 죄 용서를 위한 구속의 사건이 될 수 있겠는가? 어떠한 성서적 근거에서 예수의 죽음이 죄로 인하여 분리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다시금 결합시키는 和解의 사건이 될 수 있겠는가? 왜 하나님은 그러한 화해를 스스로 행하여야만 했는가?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Werk)에 대한 질문은 敎理史에서 화해론 (Versoehnungslehre) 혹은 구속론이란 主題아래 論議 되어 왔읍니다. 우리가 잘 알고있는 바대로, 일찌기 이레니우스 (Irenaeus)는 "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는가? (Cur Deus homo?)"하는 질문에 대하여 답변하기를, "인간들이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상실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이 되셨다"고 하였읍니다. 所謂 아나케오라이오시스 (ανακεωλαιωσιs), 곧 회복설 (Recapitulationstheorie), 이라고도 불리워지는 이레니우스의 신적인 救援經綸 (Goettliche Heilsoekonomie) "하나님의 형상 회복"이라는 존재론적 반 노스틱 주의에 머물고 말았읍니다. 결국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에 담겨 있는 적극적인 의미, 곧 "인간을 죄로부터의 해방"시킨 구속사건과 "하나님의 救援意志"을, 看過 할 수 밖에 없었읍니다. 그 후 중세때 칸타베리의 안셀름 (Anselm von Canterbury, 1033/34-1109)은 그의 책 Cur Deus Homo (왜 하나님은 인간이 되었는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化肉의 目的을 和解로 보고, 예수의 죽음은 하나님의 義를 만족시키기 위한 Satisfaktion으로 보았읍니다. 그는 이책 제 1 권 11 장에서: "Sic ergo debet omnis qui peccat, honorem deo quem rapuit solvere; et haec est `satisfactio', quam omnis peccator deo debet facere (그래서 죄지은 자는 하나님께 빼앗긴 영광을 돌려드려야 한다. 이것이 모든 죄인이 하나님께 돌려야하는 `만족'이다.)"라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판넨베르그는 이러한 안셀름의 기독론을 "대리적 만족으로서의 기독론 (Die Christologie der stellvertretenden Satisfation)" 이라고 命名하고 있읍니다. 그런데 이러한 안셀름의 "대리적 만족설"은 사실상 종교개혁 이후의 모든 신학자들에 의해서 전형적인 화해론으로 받아들여졌읍니다. 그러나 안셀름의 "대리적 만족설"은 사실상 종교적 二元論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주장한 바, "인간을 예수그리스도께서 대리적으로 사탄으로부터 속량 한다"는 "속량이론 (die Theorie der Loskaufung des Menschen)" 내지는 "속임 이론 (Taeschungstheorie)"은 실제적으로 사탄 혹은 마귀를 하나님의 대립세력 (Gegenmacht)로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2. 왜 칼 바르트 (Karl Barth)인가?
앞에서 간단히 언급한 화해론의 교리사적 논쟁과 진술들의 문제점을 칼 바르트은 그의 교회 교의학 (Kirchliche Domgatik) 에서 극복하고, 화해론 곧 기독론에 관한 정통적-신앙고백적 교리를 다시금 재정립 합니다. 그는 이미 1931 년 Fides quaerens intellectum (지식을 추구하는 신앙)에서 새로운 화해론 연구의 길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1932-1967까지 출판된 13 권으로 구성된 그의 교회 교의학 (Kirchliche Dogmatik) 에서 바르트는 예수의 존재와 사역을 (Sein und Werk) 한데 묶어서 그의 화해론적 교회 교리학을 전개 시킵니다. 그는 예수의 대속적 죽음 이해에 머물렀던 당시까지의 화해론을 성서의 진술에 근거하여 기독론적으로 새롭게 전개 했습니다. 따라서 바르트에게 있어서 화해론은 곧 기독론이고, 기독론은 곧 화해론입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단지 신앙고백적 신조로 머물러 있었던 기독론, 자세히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계약신학적으로 새롭게 변증 함으로서 계약신학적 기독론을 정립합니다. 바로 이러한 점에 칼 바르트의 화해론을 연구하는 신학적 동기 내지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바르트의 신학이 언제나 끊임없이 논의 되어져야 하는 것은, 그가 한때 유명한 신학자였다든지, 혹은 방대한 저술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앞에서 말씀 드린바 대로 그의 신학적 특징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바르트가 과연 실제로 자기의 교회 교의학을 기독론적 期待 (Anliegen)를 갖고 계약신학적으로 전개 했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 되어집니다.
3. 계약신학적 화해론은 교회 교의학의 총체개념
앞에서 제기된 질문에 대한 답변은 바르트 자신의 글에 분명히 나타나 있읍니다. 그는 강조하여 말하기를: "전체 교의학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교의학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계셨고, 세상을 자기 자신과 화해 하셨다 (고후 5,19)는 것으로 얘기 되어지는 것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이러한 진술 그리고 이와 상응하는 바르트의 진술들을 근거로 해서 아래와 같이 주장 될 수 있습니다: 바르트의 화해론은 그 자신이 전개한 교회 교의학의 "총체개념 (Gesamtkonzept)"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화해론을 그의 교회 교의학의 가장 내적인 중심 (das innerste Zentrum)이라고 볼 수 있읍니다. 그래서 바르트는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다 (Immanuel, Gott mit uns)" (vgl. $ 57,1)하는 말로 아주 간단하게 요약하고 있읍니다. 그리고 이 이름을 그는 인간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계약공동체를 표시해 주는 말로 이해하고도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교회 교의학은 기독론적으로 그리고 계약신학적으로 개념화한 和解思想 안에서 전개되었다고 우리는 단호하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르트는 그의 화해론에서 계약을 하나님과 인간과의 화해의 전제로 규정합니다. 자세히 말씀드려서, 그는 "계약을 화해의 전제" ($ 57,2)로 그리고 "화해는 깨어진 계약의 성취" ($ 57,3)라고 그의 화해론 전면에서 기술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화해론은 기독론적 계약론이라고 특징지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계약신학적 전망은 단지 화해론에 국한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칼 바르트의 교회 교의학 전반에 걸쳐 지배적으로 나타납니다. 이는 마치 기독론적 화해론이 그의 전 교회 교의학의 신학적 중심사상인 것과 같이, 그의 계약신학은 그의 교회 교의학의 전체를 관통하는 그의 성서 신학적 근거입니다.
계약신학이 바르트의 교회 교의학의 중심적인 신학적 방법이며, 사상이라는 것은, 그가 창조론에서 표제를 "창조와 계약" 이라고 붙이는 데에서 쉽게 인식 할 수 있읍니다. 그는 "창조를 계약의 외적 근거" ($ 41,2)라 하고, "계약은 창조의 내적 근거" ($41,3)라고 말합니다. 또한 바르트의 신론에도 계약신학은 신학적 기초가 됩니다. 그는 아래와 같이 아주 분명하게 말합니다:
"이러한 계약의 개념 안에서만 하나님 자신에 대한 개념은 비로서 온전하여진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인식 되어지지 않고, 또 인식 되어 되어 질 수도 없고, 그리고 실제로 그 분은 바로 그렇게 그 분안에 존재 하셨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그 분은 이 이름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체결되었고, 온전히 수행된 인간과의 계약을 떠나서는 인식되지도 않고, 인식 될 수도 없다. 만일 우리가 그를 즉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이러한 계약의 설립자 (Stifter)요, 주님으로 인식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인식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진술과 상응하게 바르트는 계약개념을 자신의 교회 교의학을 두루 관통하는 중심사상으로 체택합니다. 그래서 그는 $41 에 "창조와 계약"이라는 표제를, $45 에 "하나님의 계약의 파트너로 규정된 인간"이라는 표제를, $57,2 에 "화해의 전제로서의 계약"란 표제를 그리고 $57,3 에 "깨어진 계약의 완성으로서의 화해" 라는 표제를 붙칩니다.
이러한 바르트의 교회 교의학에 있는 표제들을 고려해 볼 때, 그의 계약 개념은 전통적인 구약성서적 계약 개념과 일치 하지 않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계약을 이스라엘의 契約史가 채 시작되지도 않았을 때에 일어난 創造를 "계약의 외적 근거"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한 일반적으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혹은 인간과의 계약은, 계약을 체결하는 자가 누구이며, 그 계약의 의무를 누가 지느냐에 따라서 두 개의 계약관계로 분리되기 때문입니다. 이미 베그리히는 (J. Begrich) 구약 성서에 있는 계약들을 두 가지 형태로 (Typen) 분리 하였습니다. 하나는 보다 힘이 센자가 힘이 약한 자에게 계약을 체결하는 "일방적인 계약"이고, 다른 하나는 힘이 동등한 자들 사이에 체결되는 "쌍무계약"입니다. 이러한 베그리히의 분리와 나란히 헴펠 (J. Hempel)은 Mari Text에 근거해서 제 3 자에 의한 계약체결 형태와 힛타이트 국제 계약의 형태를 받아드려 종주권계약 내지는 봉신계약 (Souveraenitaetsvertrag und Vasallensvertrag)을 더 추가 시켰읍니다. 뮬러 (H.-P. Mueller)는 구약성서적 계약을 동등한 자격을 갖은자들 간의 계약과, 차등한 자격을 갖은 자들 간의 계약으로 나누고, 전자를 다시 강자가 약자에 대하여 맺는 계약과 약자가 강자에 대하여 맺는 계약으로 나누었읍니다. 전자에는 노아계약 (창 9,1-17)과 아브라함 계약 (창 15; 17,1-14), 다윗에 대한 약속 (삼하 7; 23,1-7, 참 시 89,4하 그리고 또)등을 포함시켰읍니다. 그리고 후자에는 시내산계약 (출 19; 24; 34)과 시겜에서 여호수아의 중재로 맺어진 12 지파의 동맹 (수 24) 그리고 모합 땅에서의 계약 (신 26,16-19; 17,9)등을 포함시켰읍니다. 최근에 엘랑엔 대학 신학부의 구약학 교수인 쿠취 (E. Kutsch)는 이러한 계약의 형태들을 "야웨 하나님의 확언 (Zusage) 혹은 자기의무지심 (Selbstverpflichtung)" 그리고 "상호의무짐 (Wechselseitige Verpflichtung)"으로 전형화 했읍니다. 따라서 구약성서적 계약개념만도 아주 다양합니다. 그러나 바르트에 의해서 받아들여진 계약개념은 구약성서적 계약 개념들과 곧바로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계약 개념을 그의 조직신학적 관점에서 규정하였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그에 의하여 규정된 계약개념은 아주 다양합니다.
계약개념의 다양성은 신약성서적 계약개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신약성서에서 "계약" 곧 "διαθηκη"란 신학적 용어는 바울에게서는 "약속", "구원규정 (Heilsverfuegung)" 그리고 "의지고지 (Willenskundgebung)" (참. 갈 3,15; 롬 11,27; 엡 2,12)으로 나타나고, 히브리서에서는 "하나님의 지시 혹은 규정 (Verfuegung Gottes)" (참 히 8,6; 9,20) 그리고 공관 복음에서는 "하나님의 의지고지 (Gottes Willenskundgebung)" 내지는 "스스로 의무지심 (Selbstverpflich- tung)" (참 눅 1,72; 마 26,28 병행)으로 파악됩니다. 그러나 바르트에 의해서 체택된 계약개념들은 역시 이러한 신약성서적 계약개념과 곧바로 일치 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바르트가 어떠한 성서적 계약개념을 갖고 자신의 화해론 그리고 전 교회 교의학을 계약신학적으로 전개 했는가, 하는 신학적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바르트의 교회 교의학이 자리잡고 있는 성서-신학적 근거를 분석함 없이 지금까지 많은 바르트 연구가들은 그의 신학을 혹자는 "신프라톤이즘 (Neoplationismus)" 으로 그리고 혹자는 바르트의 신학은 "헤겔식-변증법적" 신학으로 이해 했읍니다. 그리고 "나와 너"의 대화신학이라고 해석해 왔읍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바르트의 성서신학적 배경을 看過한데서 비롯된 결과라고 생각 됩니다. 왜냐하면 바르트는 상당한 지면의 각주에서 자신의 교리사적 진술을 성서의 증언 속에서 끌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의 성서신학적 근거에서 由來한 결론적 진술들을 사회학적 혹은 철학적 관점을 갖고 해석한다는 것은 적지 않은 무리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들면 바르트가 창조론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계약신학적으로 남자와 여자의 "나와 너의 관계"로 해석하고 있는 점을 注視하지 않고 단지 "나와 너"라는 통상적인 개념을 사회학적으로 해석하여 바르트의 신학을 "나와 너의"의 對話신학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하의 짧은 강연회에서 부분적으로나마 이러한 해석의 문제점이 밝혀 질 것입니다. 오늘 저는 제 학위논문의 1-2 장만 간단히 소개하고, 끝으로 바르트의 계약신학의 長, 短點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 강연회를 끝맺고자 합니다. 많은 성구를 열거하는 일이나, 복잡한 성서해석은 생략하고 해석의 결과에 근거한 진술만 말씀드리겠읍니다.
II. 칼 바르트의 교회 교의학 화해론에 (KD IV,1-4) 있는 계약의 개념들
A. 구약 성서적 계약 개념들
1.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스스로 의무를 지신 계약 (Der Bund als die einseitige Selbstverpflichtung Gottes)
a) 자기대화 속에서 하나님이 스스로 의무를 지신 계약 (Der Bund als die Selbstverpflichtung Gottes im Selbstgespraech)
바르트는 자기의 계약개념을 전개하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먼저 노아계약 (창 8,20-22; 9,1-17) 전승을 수용합니다. 그는 야웨스트의 (J) 진술 창 8,20-22과 제사문서의 (P) 진술 창 9,1-17 절 말씀을 한데 묶어서 생각 합니다. 자세히 말씀드리면, 창 8,20-22: "여호와께서 ...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因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惡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명을 滅하지 아니하리라..."에 나타난 바, 야웨 하나님의 자기대화 (Selbstgespraech)와 노아와의 계약체결을 한데 묵어서 생각합니다. 즉 창 9,1-7에서 기술하고 있는 바, 노아와 그의 자손과의 계약은 8 장 20-22에 이르는 하나님의 자기대화 내지는 자기 결단에 起因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따라서 바르트는 두 본문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께서 노아를 통하여 인간과 맺은 계약을 하나님께서 스스로 의무를 지신 (Selbstverpflichtung) 계약으로 해석 합니다.
바르트는 노아 계약을 넘어서서 새 계약에 대한 예언, 예레미아 31,31-34 절의 말씀을 계약개념을 위한 본문으로 취합니다. 그리고는 이 본문 속에 나타난 소위 "계약의 형식문 (Bundesformel)": 곧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될 것이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어야한다" (예 31,31 참 7,23; 11,4; 30,22; 32,38)의 말씀을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언급"으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 예언을 "다시 세워질 새 계약, 곧 죄 용서와 자유로운 인간의 결단에 따른 순종에, 관한 예언"으로 해석합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그는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예레미아의 예언을 다음과 같이 이해 합니다: "자기의 의지와 계획을 두루 관철시키고 있는 이러한 하나님의 주체적인 행위은 (Souveraenitaetsakt) 바로 예레미아 예언의 요지 (Skopus)이다. 이 중심 사상에서 하나님은 동시에 자기 자신과 인간에게 자기의 권한을 찿도록 돕고 계시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옵니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계약은 본래부터 하나님의 의지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일방적 스스로 의무를 지신 계약 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에 상응하게 바르트는 큐엘의 (G. Quell) 계약개념으로 되돌아 갑니다. 즉 계약은 "수동적인 편에 대한 능동적인 쪽의 의지표현 (Willensdiktat)"이라는 개념을 수용합니다. 그는 이 계약개념 아래서 노아계약, 아브라함계약 그리고 더나아가 이스라엘과 맺은 모든계약을 포괄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요한 콩체우스의 (Joh. Coccejus) 도움을 빌어 이 계약개념을 예정론 (Praedestination) 내지는 事前規定 (Vorherbestimmung)으로 부터 이해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요약하면: 바르트에 있어서 하나님의 예정에 기초한 계약입니다. 그리고 계약의 체결, 갱신, 그리고 성취에 있어서 하나님은 자유롭고, 일방적이며 우선권적인 주도권을 갖으십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르트의 구약성서적 계약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스스로 의무를 지신 계약"이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는 요한 벰 (Joh Behm)의 신약성서적 계약개념을 받아드립니다. 자세히 말씀드리면, "계약은 총괄적으로 말해서 하나님의 규정이다. 곧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주체적인 의지를 강력하게 알리는 것이다."
b) 하나님의 "일차적"인 사랑 속에 있는 계약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위에서 언급한 "하나님이 스스로 의무를 지신 계약"에 근거한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의 서약에 (Eidesschwur) 근거한 것이라고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서 그는 신명기 7,8 이하: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因하여,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급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을 收容합니다. 이 本文에 근거하여 그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은 이스라엘의 족장들과 맺은 계약에 근거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다시 말해서 야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계약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시고, 그 사랑은 출애급의 사건으로 수행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의 성서적 근거로서 바르트는 호세아 11,1: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급에서 불러 내었거늘 ..."을 비롯하여 수 많은 성서 귀절들을 引用합니다.
따라서 바르트는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거나, 이웃을 사랑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그는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심이 바로 기독교인들이 하는 하나님 사랑이나, 이웃사랑의 근거라고 합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선적인 혹은 1차적인 사랑"이라고 하고, 인간의 사랑을 "2차적인 사랑"이라고 합니다. 이를 그는 요한 1서 4,19: "우리가 사람함은 그가 먼저 (πρωτοS) 우리를 사랑 하셨음이라."을 비롯하여 많은 신약성서 귀절로 뒷받침합니다. 그래서 그는 요한 복음 3,16 을 고후 5,19절과 더불어 그의 화해론의 중심 성구로 수용합니다.
2. 쌍무계약의 형태 (Der Bund als Foedus διπλευρον - Die Gestalt der Gegenseitigkeit)
바르트는 구약성서적 계약의 상호성 (Gegenseitigkeit)을 看過하지 않습니다. 그는 노아의 계약에서도 하나님과 인간의 相互成이 인식 되어질 수 있다고 합니다. 그는 말하기를: "두 본문 즉 창 8,20-22과 창 9,1-17은 한편 하나님의 자기 의무에 관한, 그리고 다른 한편은 그에 상응하는 인간의 의무에 관한 언급"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노아의 계약을 구약성서적 계약 즉 이스라엘과의 계약의 역사이전의 原形으로 본다면, 그 계약은 상호성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서, 원역사는 (Urgeschichte) 구약성서적 계약사의 (Bundesgeschichte) 원형적 前提 (Typologische Voraussetzung)라는 것입니다. 이 말이 뜻하는 바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은 계약은 소급하면 원역사 속에서 맺어진 노아의 계약으로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원초적인 결의 (Ratschluss) 내지는 사전결의 (Vorherbestimmung)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구약성서적 계약을, 노아를 통하여 전 인류와의 맺은 계약의 連續으로 봅니다.
계약체결의 연속성 속에서 바르트는 예레미아의 예언, 즉 소위 "계약형식문" (Jer 7,23; 11,4; 30,22; 31,33; 32,38; Hes 36,28), 속에서도 역시 계약의 상호성을 파악해 냅니다. 그는 아래와 같이 말합니다: "저 예레미아적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어야한다'는 상호성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지에 관하여 그리고 그에 의해서 예속된 당위(Sollen) 내지는 되어짐(Werden) 그리고 이스라엘의 존재에 (Sein) 대한 언급이다." 그리고 신 26,16-19을 근거로 계약체결은 법적행위로서 상호 의무를 지는 것이라고 파악합니다.
그러나 바르트 계약의 상호성을 단순히 수평적인 차원에서 do ut des의 의미 혹은 주고 받기식 (give and take)의 意味로 이해 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 상호성의 의미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자기규정 내지는 주도적인 주권 (der initiativen Souveraenitaet Gottes)의 의미로 이해 합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는 契約義務의 상호성을 수직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順從으로 파악합니다. 이러한 사실에 근거해서 우리는 바르트에게서 계약은 단지 상호성의 형태 (Die Gestalt der Gegenseitigkeit) 속에 있는 계약으로 이해 할 수 있읍니다. 바로 이러한 계약의 상호성에 근거하여 그는 화해를 한편에는 계약을 파괴한 죄된 인간에 대한 義認,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그러한 죄인인 인간에 대한 심판으로 해석합니다.
3. 선행적 그리고 모형적 계약으로서의 구약의 계약
구약성서 속에 있는 계약체결들은 (창 8,20-22; 9,1-17; 12,1이하.6; 출 19-34; 삼하 7,14 등등) 바르트에 있어서 결코 화해의 前提가 아닙니다. 그것들은 그 근본에 있어서 단지 예증적 (exemplarischer)이고 잠정적인 (vorlaeufiger) 계약에 불과 합니다. - 이것은 어디까지나 바르트의 독특한 관점입니다. - 예증적이고, 선행적 혹은 잠정적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종말론적으로 세워진 새 계약을 보다 가치있는 것으로보는 전승모형적인 (Ueberbietungstypologie) 의미에서 주어진 표현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화해사건으로 안에서 세워진 새계약은, 본래 창조전부터 하나님께서 의도하고 계획하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계약이 성취된 (Performanz: konkret Realisierung) 것으로 봅니다. 이러한 해석에는 아래와 같은 이해가 전제 됩니다. 즉 바르트는 원역사 (Urgeschichte)을 구약성서적 계약의 역사의 모형 (Vorbild)로 보고, 동시에 구약성서적 계약사를 신약성서적 계약사 내지는 화해사의 모형으로 봅니다. 따라서 그는 수평적인 차원에서 구약성서적 계약사 안에서 일어난 모든 사건들은 신약성서적 계약사을 위한 하나의 예증적이고, 잠정적인 사건으로 간주 합니다. 그러나 그는 구약과 신약을 단지 "전제와 결과" (Voraussetzung und Erfolge) 라는 수평적 차원에서의 연속성을 얘기하지 않습니다. 그에 의하면 예수 안에서 모든 인류와 세워진 새 계약은 옛 계약의 연속도 아니고, 옛 계약에 대한 첨부도 아닙니다. 그야말고 말 그대로 아주 전적으로 새로운 계약 ("der ganz und gar neue Bund") 입니다.
그렇지만 구약성서적 옛 계약 속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새 계약과 그 내용상 전혀 연관성이 없는 단지 범례적 (paradimatische) 사건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사건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워진 온 인류와의 보편적 계약사의 과정 속에서 일어난 예증적이고, 선행적인 사건들이라는 것입니다. 즉 구약성서적 계약사 안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이러한 기독론적 사건의 유보 (Vorbehalt) 없이 일어난 사건으로 결코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4. 보편적 계약의 빛 속에 있는 옛 계약
a) 계약파트너의 두개구룹 (Die zwei Kreise der Bundespartner)
바르트는 계약의 파느너를 두개 구룹으로 나눕니다. 첫번째 구룹은 족장과 그의 자손들입니다. 그는 계약체결 문에 나타난 두개의 피대화자 (Adressaten)에 주목합니다. 그는 노아계약, 아브라함 계약의 피 대화자를 노아와 그 자손으로 봅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한 아들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 (창 9,8-9); 아브라함 계약에서는: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네 대대 후손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으로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창 17,7). 이와같이 피 대화자가 계약을 체결하는 당사자와 그의 후손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바르트는 간과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구룹은 바로 이방인과 모든 사람들 그리고 모든 생물체입니다: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너희와 함께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한 새와 육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 (창 9,9-10) 이러한 성서의 질술에서 바르트는 계약의 파트너를 두구룹으로 구별 합니다.
그런데 이 두 구룹은 결코 예리하게 분리되지 않고, 외부구룹 (이방인, 이방민족)은 내부구룹 (이스라엘 백성)으로 영입된다. 다시 말해서 내부구룹은 외부구룹의 영입으로 확산된다. 그래서 바르트는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이방인이 하나님의 계약백성이 된 실례를 열거한다. 따라서 바르트에 있어서 이방민족 혹은 이방인은 하나님의 영원한 결의안에서 계약백성이 되기로 예정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나다. 이러한 의미에서 구약성서적 계약은 그에게 있어서 보편적 계약의 빛아래 있는 것이다.
b) 계약파트너 이스라엘의 종말론적-선교적 과제
그런데 바르트에 의하면 첫번째 구릅은 결코 단지 계약 파트너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종말론적인 선교을 고려해 볼 때에 계약의 증인자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해서, 내적인 구룹은 외부 구룹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전해야 하는 과제를 갖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각 개인은 그의 이웃 들에게,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은 이방 민족에게 야웨 하나님의 은헤를 전하고 증언해야 할 과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르트는 시내산 계약에 대한 언급인 출 19장 5절 이하 말씀 즉: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를 이스라엘의 선택특권으로 해석하지 않고, 오히려 제사장적인 증인역활 내지는 선교의 사명으로 해석합니다. 결과적으로 그에게 있어서 계약 파트너의 과제는 곧 종말론적 선교을 위한 증인 (Zeugenschaft)의 과제인 것입니다.
이러한 계약파트너의 과제와 증인의 과제의 일치을 주장하기 위하여, 바르트는 구약과 신약에 나타난 아들관계 (Sohnschaft)에 대한 성서적 증언을 가져옵니다. 그는 구약성서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야웨 하나님의 아들"로 (참 롬 8,15-16) 표현된 구절들을 주목합니다. 따라서 그는 계약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계약의 요청: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를 "너희는 나에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어야 한다"와 동일한 차원에서 봅니다. 동시에 그는 야웨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선교의 과제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선교명령 곧: "너희는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나의 증인이 되라" (행 1,8 참 마 28,20)는 선교명령을 동일한 차원에서 봅니다.
이상 "계약파트너의 두 구룹"과 (참. 4.,a) "계약 파트너인 이스라엘의 종말론적-선교적 과제" (참. 4,b)을 고려해 볼 때에, 결국 바르트에 있어서 구약성서적 옛 계약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세워진 새 계약 즉 보편적 계약의 빛 아래 있다고 하겠읍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스스로 의무를 지신 계약"과 "쌍무계약의 형태 속에 있는 계약"이라는 구약성서적 옛 계약 사이에 있는 차이점에 대한 분명한 해명을 필요로 느낍니다. 바르트 이것 대한 설명으로서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갱신된 계약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c) 계약갱신을 통하여 하나님이 계약의 의무를 자기것으로 하다.
바르트는 예레미아 31,31이하; 32,40을 근거로: "이스라엘의 계약은 그 자체가 전적인 구조 변형이 가능하였으며, 그 변형은 바로 종말론적으로 일어날 계약갱신과 관계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는 예레미아 31,31 곧: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새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 하노라 이 언약은 내기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 할 것은 ..."이란 말씀에서 바르트는 옛 계약 즉 전형적인 조건적인 쌍무계약이 하나님에 의해서 새롭게 갱신 될 것에 대한 약속을 읽어 냅니다. 그리고 그는 예레미아 31,32 곧: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새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의 말씀을 근거로 계약의 의무가 하나님 자신의 것으로 변형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바르트는 이러한 성서의 진술을 근거로 구약의 상호의무적 쌍무계약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의무지심의 계약으로 바뀌는 것을 통찰합니다. 이러한 해석은 그가 구약성서적 옛 계약을 개별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총괄적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구약성서적 옛 계약은 그 계약의 대상자을 고려해 볼 때에 하나의 계약이라는 것입니다. 즉 아브라함 계약이나, 시내산 계약이나, 모압 땅에서의 계약이나, 시켐에서의 계약이나 그리고 다윗에 대한 약속이 결코 별개의 계약상대자에 대한 계약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 신 5,2; 29,14-16). 바르트는 이러한 계약 갱신을 통하여 구약의 계약은 오히려 본래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구원의 계획에 상응하게 바뀐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구약의 옛 계약이 파기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도 했던 바의 수준으로 高揚하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B. 신약성서적 계약개념들
바르트의 신약성서적 계약개념은 성만찬 전승 (마 26,26-28; 막 14,22-25; 고전11,23-25)과 아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들을 그는 우선적으로 두개의 주요 동기아래서 해석 합니다. 하나는 계약의 동기 (Bundesmotiv) 그리고 다른 하나는 속죄동기 (Suehnemotiv)입니다. 그는 고전 11 장 25절 (병행 눅 22,20) 곧 "τουτο το ποτηριον η καινη διαθηκη εστιν εν τω εμω αιματι" vgl. "το αιμα μου τησ διαθηκη" in Mk 14,24 Par Mt 26,28)을 예레미아 31,31절 새 계약에 대한 예언과 연관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계약의 갱신으로 규정합니다. 또한 로마서 5,1이하. 10; 고후 5,18이하; 골 1,20.22 그리고 그 밖의 많은 귀절들을 인용하여 속죄 혹은 화해를 위한, 곧 죄 용서를 위한, 예수님의 자기희생의 의미로 해석 합니다. 그래서 그는 출 24,8절에 나오는 시내산 계약의 피와 성만찬 본문에 나오는 언약의 피를 동일한 차원에서 전형적으로 (typologisch) 해석합니다. 그리고 세례요한의 예수에 대한 증언: "이는 세상 죄를 지고가는 어린양이로다" (요 1,29)을 근거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다른 한편 구약의 어린양 속죄의 피로 해석합니다. 이러한 두개의 동기을 (Motiv) 갖고 바르트는 성만찬 전승을 계약의 요소들 즉 계약 체결자, 파트너, 의무, 방식 그리고 적용을 빌어서 해석합니다.
1. 영원하고 보편적인 계약 (Der ewige und universale Bund)
a) 영원하고 종말론적인 계약
바르트에 있어서 신약성서적 계약 개념은 영원하고 보편적인 개념을 갖습니다. 앞에서 간단히 언급한 바와 같이 바르트는 성만찬 전승을 계약동기와 속죄동기로 해석함으로서 성만찬 제정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온 인류와의 새로운 계약체결로 봅니다. 이를 위해서 그는 우선 새 계명에 대한 예레미아의 예언: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될것이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 (예 31,31)을 하나님의 약속 (Verheissung)과 계명 (Gebot)로 구별합니다. 즉 전자: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될 것이다"을 하나님의 약속으로, 그리고 후자: "너희는 나의 백서이 되어야 한다"을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게명으로 봅니다. 그래서 전자를 인간이 되시고자는 하나님의 영원한 결단의 계시로 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 안에서 인간이 되신 것을 (Die Menschwerdung Gottes in Jesus Christus)을 바로 이 영원한 결의의 성취로 봅니다. 따라서 "화해는 계약의 성취" ($ 57,1)란 그의 진술을 고려해 볼 때에,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될 것이다"란 약속은 바르트에 있어서 "하나님의 원초적의지 내지는 근본의지" (Die Offenbarung des Ur- und Grundwillen"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는 이 약속을 "계약의지"로 바꾸어 쓰고, 화해는 이러한 계약으니 관철로 봅니다. 직접 그의 말을 빌리면: "하나님 의지에 따른 모든 사건들은 계약의지에 따른 사건이다."
이러한 전제 하에서 바르트는 이제 성만찬 전승에 관한 본문들을 분석합니다. 그는 두가지 전제 속에서 새 계약을 영원하고 종말론적인 계약으로 규정합니다. 그는 언약의 잔 곧 "το αιμα μου τησ διαθηκη το εκχουννομενον" (막 14,24 참 마 26,28)이란 제정 말씀을, 예수가 자신의 죽음을 암시한 것으로 해석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종말론적으로 ein fuer allemal (απαξ, εφαπαξ) 일어났다고 해서 그 죽음을 지시하는 새 계약을 영원하고 종말론적인 계약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의 십자가 상의 말씀 τετελεσται (요 19,28.30)을 주목합니다. 즉 "다 이루었다"는 예수의 말씀을 "모든 것을 위해서 단 한번 (ein fuer allemal)"을 결정적으로 확증해 주는 말로 해석합니다.
그런데 새 계약의 영원성과 종말론적인 의미는 단지 "일회적"이라는 말에 국한 되지 않습니다. 바르트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될 것이다"는 약속이 우리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종말론적으로 실현되었다는 의미에서, 새 계약을 영원하고 종말론적인 것으로 봅니다. 왜냐하면 "내가 너희 하나님이 되겠다"는 계약의 약속은 영원한 하나님의 의지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즉 영원한 하나님의 의지 내지는 "근본적인 의지"는 곧 인간의 하나님이 되시고자 하는 "계약의 의지"라는 것입니다.
b) 보편적 계약 - 보편적 화해
영원한 계약에 의해서 종말론적으로 일어난 화해의 사건, 곧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바르트에게서 보편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그는 hepaks oder epakpaks란 "유일회성"이 갖는 종말론적 보편성 뿐만아니라, 신약성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적용을 나타내는 전치사가 지니고 있는 적용의 보편성에 주목합니다. 그는 신약성서에서 전치사 αντι υπερ περι 의 술어가 보편적임을 주지합니다. 다시말해서 그 술어가 πολλοι 혹은 πολλων임을 강조 합니다. 그래서 그는 성만찬 제정 말씀 곧 새 계약의 제정 말씀도 바로 peri pollon으로 표현되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만일 어떤 한 사람이 자기의 생명은 많은 사람들을 위한 속전으로 (막 10,45)으로 준다면, 이러한 사람은 어쨋든 모든 사람을 대표하여 그들을 위하여 속전을 지불하는 것이다. 그가 자기의 피를 많은 사람을 위하여 (마 26,28) 붓느다는 것은 바로 모든 사람을 위해서 붓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바르트는 마가복음 10,45절: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는 말씀과 성만찬 제정 말씀 마태복음 26,28: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는 말씀을 peri 란 전치사을 도움으로 묶고, 그 적용을 보편적인 것으로 해석 합니다. 그래서 그는 아담의 타락으로 인한 보편적 죄와 예수 그리스도을 통한 보편적 화해의 일치를 주지시킵니다.
2. 은혜와 평화의 계약 (Der Gnaden- und Friedensbund)
a) 은혜의 계약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암시하는 성만찬 제정이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 주목합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의 "죄 용서"를 위한 것으로 해석 합니다. 그는 "피 뿌림이 없이는 죄 용서도 없다"는 히브리서 9,22절을 수용 합니다. 그래서 그는 죄 용서을 새 계약의 중심사상으로 해석 합니다. 그런데 그 피 뿌림은 인간의 그 어떠한 협력 (Mitwirkung)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곧 예수의 독자적인 사역에 의해서 이루졌다고 해서 새 계약을 "은혜의 계약"으로 규정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죽음은 죄된 인간을 위한 대리적 죽음으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그는 롬 8,34과 고전 11,24을 인용합니다.
바르트는 또한, 예수의 죽음이 갖고있는 효용이 "모든 인간 즉 우리"을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새 계약을 "은혜의 계약"으로 봅니다. 이를 위해서 그는 요 1,29; 11,50; 롬 5,6하 등을 증거로 제시합니다. 이러한 해석을 그는 앞서 논술한 바와 같이 전치사 peri, hueper anti의 술어가 바로 "모든 사람"이라는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지시하는 새 계약을 보편적 은혜의 계약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새 계약은 인간의 그 어떤 상응한 행위를 요청하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일방적인 계약체결이며, 동시에 하나님 자신에 의한 계약 수행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b) 평화의 계약
"은혜의 계약"으로서의 새 계약은 바르트에게 있어서 또한 평화의 계약으로 나타납니다. 그는 롬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祭物로 세우셨으니"; 요한 1서 2,2; 4,10을 근거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화해를 위한 "속죄희생"으로 이해 합니다. 그리고 또한 마가복음 14,25: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을, 예수께서 인간의 죄 용서를 위한 자신의 대속적 죽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성만찬의 잔에 대한 제정의 말씀은 마태복음 26,28절과의 연관성 속에서 볼 때에, 계약의 피에 대한 언급 ... 곧 만인의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 뿌리는 피에 대한 언급이다." 그리고는 이 두전승을, 즉 화해전승과 계약전승, 결합하여 바르트는 예수의 죽음을 인간을 죄로 부터 해방하기 위한 속전 (λυτρον)으로 봅니다. 이러한 결합을 그는 출애급기 24,8절로 뒷바침 합니다. 그는 계약의 중개자 모세에 의해서 뿌려진 계약의 피를 다른 한편 "화해의 피"로 해석합니다.따라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를 위한 속죄의 죽음, 동시에 죄된 인간과 화해하기 위한 화해의 죽음으로 봅니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죽음을 암시하는 성만찬제정의 "계약의 피"를 동시에 "화해의 피"로 이해 합니다.이러한 근거에서 결과적으로 새 계약는 바르트에 있어서 "평화의 계약"으로 특징 지울 수 있읍니다. 그래서 그는 고후 5,19절을 그의 화해론의 주된 성서 본문으로 채택합니다.
3. 구원확언으로서의 용서와 영적계약
바르트는 새 계약에 대한 예레미아의 예언과 더불어 에스겔 36,26이하 그리고 예레미아 32,40하반절을 새 계약의 개념을 위해서 수용합니다. 그는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지켜 행할지라. ... 너희가 ... 내 백성이 되며,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 (겔 36,26하)을 근거로 새 계약이 "영적 계약"임을 암시 받습니다. 이것을 고후 3,6절 곧: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고후3,6)란 말씀으로 보충합니다. 이러한 성서적 근거 위에서 그는 새 계약을 "용서의 그리고 영적 계약"이라고 표명하고 이를 교회론적으로 그리고 구원론적으로 이해 합니다.
a) 인간과의 교제 내지는 하나됨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규정으로서의 계약 (Der Bund als die Selbstbestimmung Jesu Christi zur Gemeinschaft bzw. Vereinigung mit dem Menschen)
새 계약은 바르트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과 갖는 하나됨을 위한 자기규정으로 나타납니다. 그는 성만찬 제정 말씀에 있는 기념명령을 (Namamnesisbefehl: 곧 "εισ την εμην αναμνησιν; 너희는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눅 22,19 참. 고전 11,24하) 주목합니다. 그는 이와 연관해서 소위 의미단어을 (Deuteworte: "이 떡은 내 살이다, 이 잔은 내 피다") 함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초대 교회 이레로 행하여진 성만찬을 새 계약의 기념이며, 동시에 그 성찬을 통하여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 곧 교회공동체 안에서의 임재을, 얘기 합니다. 따라서 새 계약은 바르트에 있어서 현존하는 교회 공동체와 함게하고자 하는 당신의 역사적 존재규정 (geschichtliche Seinsbestimmung)으로 해석합니다. 그는 루터의 실재설 (Realpraesnz)을 떡과 포도주 안에서의 실재가 아니라, 성찬을 함께 나누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실재로 변형시킵니다. 이를 그는 고전 10,16으로 뒷바침 합니다: 즉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 (고전 10,16하). 이러한 진술에 근거해서 바르트는 성만찬을 "κυριακη ημερα" (계 1,10) 혹은 "κυριακον δειπνον" (고전 26,26)로 단정합니다. 즉 하나됨을 위한 공동체식사 내지는 주님의 만찬으로 규정짓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성만찬 제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몸된 교회에서 자기의백성들, 즉 새 계약의 공동체와, 함게하실 것에 대한 자기규정인 것입니다.
더나아가 이를 바르트는 요한복음의 "하늘에서 내려운 산 떡" (요 6,22-65)에 대한 예수의 증언으로 보충합니다. 그는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 (요 6,51)의 말씀을 요한복음 1 장 14절 "ο λοζοσ σαρξ εζενετο: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과 결합합니다. 즉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은 바로 성만찬의 "의미단어": "이 떡은 내 살이고", 그분은 바로 "화육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근거에서 이제 새 언약은 바르트에 있어서 인간과 하나가 되고자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규정이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b) 인간을 위한 구원의 확언으로서의 계약
바르트는 요한복음 6 장 22-65의 말씀을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 합니다. 그는 예수의 살과 피가 인간에게 생명을 가져다 주는 "참 음식이요, 참 음료"라는 요한의 神學을 받아 드립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目的을 기술하고 있는 모든 신약성서의 증언을 성서적 증거로 (참. 막 10,45 등) 제시 합니다. 그리고 그 전체의 뜻을 "인간의 영생 곧 생명"을 위한 것으로 종합 합니다. 그래서 그는 요한복음 6장 47절 이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 ...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다."를 새 계약 제정말씀과 예수께서 이땅에 오신 목적을 綜合하여 전한 말씀으로 이해 합니다.
이러한 종합으로부터 우리는, 바르트에게 있어서 성만찬은 바로 우리들에게 "구원을 확증해 주는 계약"의 음식임을, 알 수 있읍니다. 이를 뒷 받침해 주고 있는 것은 그가 술어일치 (praedikativen Koinzidenz) 진술들을 그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증언 가운데 많은 "이다" 진술 (εγο ειμι)을 이곳에 가져 옵니다. 그는 예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부활이요, 문이요, 떡이요, 포도나무요, 목자요, 빛이요, 말씀이요 등"을 비롯하여 많은 귀절들을 증거로 제시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바르트는 새 계약제정 말씀 속에 있는 의미단어: "이떡은 내 살이다"라는 말을 "술어일치"을 빌어서 인간의 생명을 위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그는 이 성만찬의 떡을 "세상의 생명을 위한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 (요 6,51) 그리고 이를 또 다시 "생명의 말씀"과 결합합니다. 즉 그는, "생명의 떡에 대한 논쟁" 다음에 베드로의 고백이: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요 6,68) 덧 붙혀짐을 주목합니다. 이러한 근거에서 볼 때, 바르트에 있어서 새 계약은 인간의 구원을 확언하는 계약 입니다.
III. 신학적 공리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계약
A.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를 설명하기 위한 내용적 그리고 형식적 원리로서의 계약
1. 구약성서적 계약개념의 기독론적 결합
말시온 (Marcion) 이후에 기독교 신학에서 도외시 되어온 구약성서가 381 년 얌니아 (Jamnia) 회의에서 기독교의 정경으로 인정되었지만,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 내지는 통일성에 대한 문제는 쉽게 합의를 보지 못했읍니다. 특히 19세기에 와서 성서비평학이 대두된 이레 구약의 예언이 신약에서 성취 되었다는 성서 신학적 근거를 찿을 수 없다고 주장하게 되었읍니다. 구-신약의 통일성 내지는 연속성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공관복음 안에 있는 구약의 인용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구약과 신약의 일치성은 편집자들의 신학으로 일축 해 버렸읍니다. 그러나 칼 바르트는 위에서 상론 한 바와 같이 계약의 개념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그의 사역을 구약성서적 계약 신학에 근거하여 전개 함으로서 구약과 신약의 통일성 내지는 연속성을 주장하게 되었읍니다.
바르트는 "하나님이 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인간이 되셨는가? (Cur Deus homo?)"란 질문에 대하여 하나님의 계약의지의 관철 혹은 성취로 답변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인간과 맺으신 계약을 성취하기 위하여 나사렛 예수 안에서 인간이 되셨다고, 해석함으로서 계약신학을 그의 교회교의학 전개에서 부각시켰읍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인간이 되신것을 하나님의 영원한 결의 (Ratschluss) 내지는 언약 (Verheissung):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겠다"을 성취시키기 위한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예수가 부활하여 승천한 것은 인간의 계약의무 내지는 인간에게 주어진 계명: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을 죽기까지 순종함으로 충실히 실행한 결과로 봅니다. 따라서 바르트에 있어서 구약성서적 계약은 예수를 통한 계약 성취를 영원하고 종말론적이며 보편적인 계약을 위하여 예증적으로 계시된 것으로 봅니다. 결과적으로 그에게 있어서 옛-새 계약 (Altes Testament und Neues Testament)는 약속과 성취의 구조에서가 아니라 옛 계약에서 새 계약에로의 수렴 (Kovergrenz)의 의미에서 통일성과 연속성을 갖게 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사역을 구약성서의 계약신학에 근거하여 변증하였읍니다.
바르트는 또한, 예수가 그의 제자들과 세운 새 계약 혹은 성만찬 제정을 옛 계약의 완성이며, 동시에 만인과 새롭게 체결한 영원하고 보편적인 계약으로 해석함으로서, 구약의 중심이 되는 계약사상의 화해론 내지는 기독론적으로 해석하는 길을 열어 놓았읍니다. 그는 성만찬 전승을 예레미아의 새 계약에 대한 예언과 시내산 계약과의 연결성 속에서 이해 함으로써 구약을 신약으로 부터 재 해석 합니다. 특히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兩性論, 즉 "예수 그리스도는 참 신 이며, 참 인간이다 vere deus, ver homo"을, 예수가 계약의 두 파트너의 (인간과 하나님) 대표자 (Stellvertreter)라는 계약의 중개자신분 (Mittlerschaft)에서 변증해 냅니다. 즉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계약중개자의 혹을 화해자의 존재론적 전제로 제시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의 화해자 사역 (Werk)에서 귀납적으로 변증해 냅니다. 따라서 그에 있어서 계약은 예수그리스도의 양성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바르트는 예수의 양성론에 대한 전통적 견해를 극복하고, 이를 계약 신학적으로 변증하였읍니다.
2. 신약성서적 계약개념을 도움으로 계약동기와 화해동기를 기독론적으로 결합함
구약성서를 구성하고 있는 대표적인 두 전승을 화해전승과 계약전승이라고 할 수 있다면, 바르트는 이 두 전승을 역시 기독론적으로 결합합니다. 그는 새 계약의 제정 말씀에 함축적으로 나타난 속죄에 대한 말씀을, 더 자세히 말하면 "의미단어: 피로 세운 새 언약의 잔", 예수 그리스도가 행하실 화해의 사역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그는 성만찬 제정 말씀 속에 있는 "언약의 피 혹은 새 계약의 피"을 인간의 죄 용서를 위한 속죄의 피와 연결시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을 성만찬 전승 아래에서 해석합니다. 그리고 역으로 화해전승을 계약전승에서 이해 합니다.
바르트에 의하면 인간과 하나님의 화해사건은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즉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화해를 계획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에 있어서 화해는 이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 영원전 부터 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맺으신 계약에 기인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견해는 전통적 화해론, 자세히 말해서 "창조-죄-화해"의 변증법적 화해이론을, 벗어납니다. 그는 화해를 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인간과 하나가 되고자 하는 "원초적인 하나님의 의지"의 성취로 해석 합니다. 이러한 기대로 인하여 바르트는 계약을 화해의 전제로 내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화해를 단순히 하나님과 인간의 "의무규정"의 완성 내지는 성취로 보지 않고, 보다 적극적으로 영원한 하나님 決意의 관철로 봅니다. 따라서 바르트는 화해를 하나님의 구원의지 (Heilsplan) 아래서 해석합니다. 결과적으로 이 구원의지에 역행하는 인간의 죄는 화해의 전재가 아니라, 단지 奇緣일 뿐입니다. 그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죄 용서를 통한 화해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갖고 있던던 "공동체의 의지 (Der Wille Gottes zur Gemeinschaft)"을 관철입니다. 그래서 그는 계약의 개념과 화해의 개념을 화해자이며, 동시에 계약의 성취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다"로 종합 합니다.
3. "위로부터 혹은 아래로부터"의 기독론과 "약속과 성취"의 구원사적 구조에 관한 두 가르침들의 계약신학적 결합
바르트의 화해론 혹은 기독론이 갖고 있는 가장 탁월한 신학적 공헌은 그가 전통적인 구속사 (Heilsgeschichte) 개념을 예수 그리스도의 양위론 (Status exinanitionis, status exaltationis)와 결합 한 것입니다. 그는 수직적인 차원에서 일어난 사건,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사건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 예수가 들림을 받은 사건을 계약신학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는 나사렛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것을 (Menschwerdung Gottes in Jesus Christus)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 내지는 계약의: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될 것이다", 수행으로 봅니다.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Status exinanitionis는 하나님의 영원한 결의 내지는 계약상항에 상응합니다. 즉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空間的 상위 (上位)을 시간적 約束상태로 보았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계약은 이미 內在的 三位一體 안에서 즉 영원한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워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그는 인간의 아들의 들리심을 (Vgl. $ 64 "Die Erhoehung des Menschensohnes") 계약의 의무: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대표해서 대리적으로 수행한 것으로 이해 합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Status exaltationis는 계약의 성취상태에 상응합니다. 왜냐하면 바르트에 있어서 하나님과 인간의 하나됨은 (Union von Gott und Mensch) 계약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수직적 운동이 실제적으로 구약성서적 계약을 통하여 암시 되었고, 바르트는 해석합니다. 그는 잠정적으로 계시된 계약이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 사건에서 종말론적으로 (endzeitlich) 성취되었다고 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수직적 두 운돋을 수평적인 것으로 "계약을 통한 약속과 성취" 구조 속에서 해석 합니다. 그는 지금까지의 수평적 역사적 차원에서 "약속과 성취"라는 사고 구조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일어난 인간과 하나님과의 화해 사건을 수직적 구조를 빌어 설명하였읍니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 예수의 양성 (zwei Naturen) 이나, 양위는 (zwei Staende) 결과적으로 주어질 수 밖에 없는 구속자적 전제입니다. 다시말해서 예수가 참 하나님이고, 인간이기 때문에 이러한 계약의 두 파트터의 대리인 (Stellvertreter)가 된 것이 아니라 - 그것은 인식될 수 없기 때문에 - 그가 이 두 파트너의 중개자가 (Mittlelr) 되었다는 그 사실 자체, 곧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예수의 양성은 필요 불가결한 전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양성론에서 양위론을 창출해 내지 않고, 계약의 두 파트너의 대리자, 그리고 그 계약을 수행하는 과정 속에서 생긴 양위에서 예수의 양성론 (兩性論)을 전개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서 수평적인 것과, 즉 구속사적인 것과, 수직적인 것, 즉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들리우심을, 계약신학적으로 종합한 것입니다.
맺는말
지금까지 우리는 칼 바르트가 쓴 교회 교의학 화해론 내지는 기독론의 성서적 근거,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계약신학적 근거,을 간단히 살펴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탐구을 통하여 바르트의 교의학적 전개 속에있는 몇 가지 문제점과 신학적 공헌이 주어진다. 첫째 그는 하나의 계약말씀 안에 있는 두개의 말씀형태를 (Gestalt des Wortes), 즉 복음과 율법, 계약신학적으로 통일시켰다. 그는 계약의 말씀 안에 복음과 율법의 두 국면이 있음을 주지한다. 그는 마틴 루터의 "율법과 복음"의 순서를 "복음과 율법"으로 대치시키고, 더나아가 엘러트의 "융해 속에서 복음에 대항하는 율법 (Gesetz contra Evangelium in Diastase)"을 넘어서서 "복음과 율법을" 하나의 계약 말씀 안에서 기독론적으로 종합 하였다. 자세히 말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될 것이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계약의 말씀으로 복음과 율법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고 실현된 하나의 하나님 말씀 속에서 종합 합니다."복음과 율법"의 종합은 바르트에게 있어서 구-신약의 통일성 내지는 연속성에 대한 학문적 공헌으로 귀결되었습니다. 이를 통하여 그는 계약신학적 "말씀의 신학"을 재 정립하였읍니다. 이러한 바르트의 "말씀신학"은 "구약의 중심이 무엇이냐?"는 구약성서적 논쟁에 새로운 대답을 준것이라고 할 수 있읍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구약의 중심이 계약"이라는 전제 하에 자기의 구약신학 신학을 전개한 발터 아이히로트의 (Walter Eichdrodt) 관점을 보충해 주는 역활을 했읍니다.
바르트의 계약신학적 화해론 내지는 기독론의 신학적 공헌은 -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 예수 그리스도의 兩性論 내지 兩位論를 하나님의 계약신학적 구원경륜 속에서 전개한 것입니다. 그는 기독론을 계약신학적으로 전개함으로서 화해전승과 계약전승을 구속사적으로 종합하였읍니다. 그러나 이러한 종합의 밑바닥에는 하나의 교리사적 논제를 남겨 놓았읍니다. 그것은 영원한 아들안에 "인간성"의 선재 (Praeexistenz)에 대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소위 "화육되진 않은 말씀 (Logos- asarkos- Theorie)"론을 강력히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창조 이전 영원한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성의 선재"가 수용 될 수 없다면, 화해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이 되신 사건은 하나님의 영원한 계약 내지는 결의의 인격화 (Personifiisierung)와 무엇이 다른가, 하는 질문이 제기 됩니다. "하나님의 인간되심 (Gottes Menschwerdung)"이 하나님의 영원한 결의의 인격화에 상응하다면, 결국 Hypostase 논쟁을 그대로 남겨둔 결과가 된다. 그리고 화해의 전제가 인간의 죄가 아니라면, 바르트에 있어서 화해는 한편 저 유명한 이레니우스의 회복설 내지 반복설 (Rekapitulationstheorie)과 몰트만 (J. Moltmann)의 종말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에서 선취되었다는 소위 선취설 (Antizipations- theorie)과의 구별이 없어지게 된다. 비록 이러한 교리사적인 논점을 남겨 놓기는 하였지만, 그는 기독론에 관계된 전통적 신앙고백을: "예수는 참 신이시고, 참 인간으로서 우리의 주님이시요, 화해자이시고 그리스도이시다." 성서신학적, 더 자세히 말하면 계약신학적으로, 규명한 현대의 대 교리학자임이 분명하다.
출처: 김재진의 케리그마 신학연구원(http://www.kerygm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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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바르트의 변증법
조성노 박사 (현대신학연구소 소장)
1. 첫번째 단계(1919 - 1927)
바르트 신학의 첫번째 단계를 우리는 통상 '위기 신학' 혹은 변증
법적 신학이라고 한다. 그럼 먼저 '위기 신학'이라는 관점에서 그
의 신학적 사고를 살펴보자.
이 시기의 바르트의 사상은 한 마디로 기성 그리스도교에 대한 격
렬한 항의에서 시작하여 한결같은 항의로 계속된다. 그리고 바르트
가 휘둘렸던 그 반동의 유일한 무기는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그가
새롭게 발견한 하나님의 말씀은 19C 자유주의 신학자들과는 달리
인간을 철두철미한 죄인으로 파악했다. 인간은 결코 본래적으로 선
한 존재일 수 없다. 하나님에 대해 올바른 사고를 할 능력도 없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을 어떤 접촉점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따라
서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그리고 하나님이 인간과 갖는 관계
가 무엇인가에 대한 모든 인간적 사상은 필연적으로 오류에 빠질
수 밖에 없다. 또한 바르트가 이해한 성서 메시지는 인간이 철저한
죄인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인간과 하나님간의 절대적 차이를 강조
한다. 하나님은 인간에 대해 "전적인 타자"(der ganz Andere)이며,
"절대적 초월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 신학이 인간의
경험 혹은 이성적 사고 혹은 도덕적 가치추구를 통해 하나님께 이
룰 수 있다고 가르친 것은 엄청남 과오 였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치명적인 간극은 여하한 경우에도 인간 쪽에서는 그
가교가 마련될 수 없다. 따라서 인간 편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려는
노력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인간이 스스로 알 수 있는 하나님이란 언제나 자기가 만들어 놓은
우상일 뿐이다. 하나님은 전적으로 초월적 분이시기 때문에 인간이
그에 관한 바른 관념을 가질 가능성을 훨씬 넘어서 계신다. 성서는
이것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위치라고 말한다. 그러나 인간
은 도저히 건널 수 없는 이 엄청난 간극을 하나님은 건널 수 있고,
또 건너셨다.
즉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당신의 말씀 안에서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하셨다. 따라서 이제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알려면
인간을 향해 선포된 그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바로 이 대목에서
바르트의 사상은 '위기 신학'이 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에게 발해지는 순간 인간의 삶에는 일생일
대의 최대의 위기 상황이 초래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택의 결
단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자신을 죄인으로 규정하는 그
계시의 말씀을 거부하고 자신을 의존하는 길을 계속할 것이냐, 아
니면 그 말씀 앞에서 자신을 개방함으로써 자기가 죄인임을 시인하
고 구원의 유일한 주체이신 하나님께 의존할 것이냐의 기로에 서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인간에게 닥
친 최대의 위기이다.
그럼 이번에는 좀 더 다른 관점 즉 '변증법적 신학'이라는 측면에
서 접근해 보기로 한다.
첫번째 단계의 바르트의 신학을 '변증법적 신학'이라고 성격화 하
는 것은 그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기본적으로 부정과 긍
정이라는 구도에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계시를 서로
상반되는 것의 긴장으로 파악한다. 즉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인간의
죄됨, 하나님의 인간 심판과 하나님의 인간 용서,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 등의 도식이 다 그렇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됨에 대하여 언제나 "부정"하신다. 그러나 그럼
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의 죄됨에 대하여 언제나 인간에게 "
긍정"을 말씀하시며 죄악에서 인간을 구출하여 받아들이신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그러므로"가 아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로서
인간을 대하신다.
계시의 메시지란 인간이 무가치하므로 하나님이 인간을 거부하신다
가 아니라 인간이 무가치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
을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바르트의 이러한 변증법적 논조들은 그의
십자가에 대한 논의에서 아주 집약적으로 나타난다. 바르트에 의하
면 십자가에서 바로 하나님의 긍정과 부정이 만난다. 하나님은 십
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의 죄를 정죄하고 동시에 인간의
죄를 용서하는 당신의 말씀을 전하셨다.
또한 십자가에서 신앙과 종교가 만난다. 예수의 죽음에 대해 책임
져야 할 사람들은 당시의 종교인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누구신
지,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대
표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길들여 그들의 신으로, 아니 보다 더 정
확히 말하면 그들 스스로 창조한 우상으로 전락 시켜버린 사람들이
었다. 그래서 바르트에 의하면 종교란 인간을 하나님으로 부터 멀
어지게 하고 인간을 죄인으로 만드는 원흉이다. 따라서 종교는 신
앙의 적이다. 종교는 인간이 자기의 재주로써 하나님과 관계하려는
노력인데 반해 신앙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므로써
하나님이 누구시고 인간이 누군지에 관해 안다. 또 신앙은 예수 그
리스도를 하나님의 성육신으로, 스스로를 계시한 하나님의 자기계
시로 이해한다. 또 신앙은 종교의 정체도 정확하게 인식한다. 곧
종교는 인간이 만든 형식과 구조, 인간의 신념과 태도, 인간에게
스스로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믿게 만드는 교만과 허위의식의 체
계라는 것이다.
바르트의 초기 신학의 방법을 이렇게 간략하게 요약을 해봤는데 이
시기의 바르트의 사고에서 드러나는 두가지 중요한 관념을 지적한
다면, 첫째는 신의 초월성 개념이고 다음은 그에 따른 게시의 필요
성이라는 개념이다.
(1) 신의 초월성
바르트의 판단에 의하면 19C 자유주의 신학은 계시의 참다운 의미
를 역전시켰다. 적어도 바르트가 이해한 계시란 하나님에 관한 인
간의 지식이나 경험 따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신학자들
은 그리스도교가 그 시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 질 수 있게 하기 위
해 하나님의 초월성을 파괴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고, 하나님을 인
간에게 너무 가까이 접근시켜서 인간이 하나님 상을 철학과 과학과
역사적 방법을 통해 자유롭게 바꾸어 놓을 수도 있다고 믿게끔 착
각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바르트는 하나님은 인간과 전적으로 다른
존재이며 따라서 하나님은 그가 스스로를 계시해 주시는 만큼만 인
식될 수 있다는 성서의 주장을 되풀이하여 지적함으로써 하나님을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관념으로부터 구해내려고 노력했다.
신의 초월성이라는 관념은 바르트 신학의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확실하게 밝혀두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바르트에게서의 초월이란 공간적 개념이 아니다. 하나님이 "전적인
타자"(derganz Andere)라는 말은 하나님이 타계적 존재라든가 이
세상과 역사 밖의 어떤 곳에 존재한다는 뜻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은 누구신가, 그를 어디서 발견할 수 있는가, 그와의 관계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등의 온갖 인간적 노력으로부터 전
적으로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인간이 설정한 거룩한 장소나 거룩한 시간으로부터 자유
롭다. 하나님은 형이상학적인 사색, 사변에 의해 포착되지 않는다.
그는 자연신학, 곧 독자적인 인간의 사고에 의해 도달하고자 하는
하나님 인식에의 노력에 포착되지 않는다. 바르트는 우리가 하나님
에 관하여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여하한 경우에도 인간은 하나님
을 알 수 없다는 사실 하난 뿐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
자신이 선택하는 시간과 장소와 방식을 통해 인간에게 접근한다.
하나님은 그가 원하는 때와 원하는 방식으로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
하신다. 다시 말하면 초월이란 하나님은 그를 파악하고 알려하고
만나려하는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 계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초월
은 공간적 초월이 아니라 존재론적 초월이시다.
(2) 계 시
초월과 계시는 상호관련이 있는 개념이다. 초월은 인간이 하나님을
인식하는 방식, 또 인간이 종교와 도덕과 경건과 문화 속에 표현한
하나님에 관한 관념들이 실은 모두 우상숭배라는 점을 명백히 가르
쳐 준다. 그런데 인간은 게시에 의해서만, 즉 하나님 스스로 당신
이 누구시고, 당신에게 이르는 길이 무엇인가를 말씀해 주실 때만
인간은 그 왜곡된 현실로부터 구원될 수 있다. 결국 이렇게 하여
인간은 계시를 필요로 하게 된다. 하나님이 그에 대한 인간의 인식
능력을 초월하여 계신다는 것은 곧 하나님 스스로가 자기를 계시하
지 않는 한 인간들로서는 도무지 하나님을 알 길이 없다는 뜻 이외
에 다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어떤 관계가 존재하려
면 초월은 반드시 계시를 필요로 하게 된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
도가 하나님의 계시임을, 인간에게 준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을 때
비로소 시작된다. 하나님의 계시가 인간에게 받아들여지게 되면 인
간의 모든 자기 의존성, 자력구원에 대한 신념이 포기되고, 인간은
결코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깨달아지게 된다는 것이
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인 그리스도 안에서만 인간과 만
나고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2. 두번째 단계 (기독교 교의학, 교회 교의학 시대)
1920년 중반에 이르러 바르트는 자신이 아직도 하나님의 말씀을 자
기 사고의 유일한 근원과 기준으로 삼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
닫는다. 이때까지도 자신이 어떤 철학적 사고형식들, 특히 키에르
케고르의 실존주의를 하나님의 말씀의 설명과 해석을 위한 도구로
크게 이용해 왔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자, 이런 자각과 함께 1932
년 그의 유명한 교회 교의학 제 1권이 출간되는데 이 저작은 바르
트가 하나님의 말씀을 설명하기 위해 지금가지 알게 모르게 의존해
온 모든 인간적 도구들로부터의 단호한 결별을 상징하는 기념비적
작품이다. 이때부터 바르트의 사고는 오로지 하나님 자신의 말씀에
담겨있는 계시,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해명에만 관심을 갖기로 노
력하게 된다. 이 당시의 바르트는 하나님 말씀의 해명을 위한 수단
으로서 어떠한 철학적, 문화적 또는 인간학적 요소에도 의존하려
하지 않는다. 특히 실존주의가 냉혹하게 거부된다. 까닭은 실존주
의란 그리스도교에 대한 자유주의 신학의 인간학적 접근법의 또 다
른 한 형식이라고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는 오로지 신앙인
식만으로 작업하는 일이 바르트의 신학방법론의 전부가 되었다. 즉
바르트는 신학을 그가 신앙으로 받아들인 전제, 곧 하나님이 그리
스도 안에서 인간에게 말씀하셨다는 대 전제로부터 시작한다. 그리
고 이 "하나님의 자기계시를 말씀에 대한 신앙적 순종 가운데서 해
명하는 것"을 자신의 최대의 과제로 삼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
리에 사로잡힌 신앙은 반드시 그 진리를 이해 할 수 있는 길을 찾
게 되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그리스도교 계시가 참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라는
변호는 불필요하다고 보았다. 하나님의 계시는 스스로 진리요 참이
라는 사실을 증언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제1권 이후에 계속
출간된 전 14권의 그의 교회 교의학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앙
적 해명이라는 전제에 철저하게 의존하여 저작된 조직신학 체계이
다. 그러면 교회 교의학 전반을 살피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고 제
2기에 나타나는 바르트의 사고의 근본구조 가운데서 핵심을 이루는
개념 몇 가지를 정리해 보고 마지막으로는 바르트 신학의 윤리적
측면을 잠시 살핀 다음 결론을 맺도록 하겠다.
(1) 신의 자기계시
제 1기에서는 '계시의 필요성'이라는 주제가 신의 초월성이라는 개
념과 함께 바르트 신학 체계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었는데 제2기
에서도 역시 '계시' 개념이 대단히 심각하게 취급된다. 계시의 의
미에 관한 바르트의 이해는 계시에 대한 정의로부터가 아니라 오히
려 계시의 구체적인 현실에서부터 출발한다. 여기에서 계시의 구체
적 현실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역사에 개입한 사건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하나님은 행동하심으로 계시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그 구
체적인 계시 행위는 인간과 더불어서도 아니고,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도 아니다. 그 주도권은 전적으로 하나님
에게 있다. 하나님은 인간과 만나는 시간과 장소와 환경을 스스로
결정하신다. 이처럼 계시에 대한 바르트의 첫번째 명제는 '신의 주
권과 자유'이다.
하나님이 당신의 주권을 일방적으로 행사하지 않는 한 인간이 하나
님을 알 도리는 없다. 계시란 하나님 자신의 결정에만 전적으로 의
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2기에서의 바르트는 이렇게 계시에서의
신의 역할의 절대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그 계시에 대해 응답해야
하는 인간의 상대적 역할도 잊지 않고 언급한다.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에 직면하여 책임적인 자유 속에서 응답해야 하는 것은 역시
인간이다.
다음으로 바르트는 계시의 본질을 파악하는데 이 경우도 역시 인간
의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의 본질을 탐색한다. 계시란 인간
이 지적으로 동의해야 할 하나님에 대한 어떤 관념들이 아니다. 오
히려 하나님은 행위로서 자신을 계시 하신다. 따라서 하나님의 계
시는 말로된 것이 아니라 사건으로 된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누
구신지를 인간에게 보여주는 데 관심이 있지 자신에 대한 명제들이
나 사변들을 전달하는데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의 본성을 계시 하시지는 않는다. 단지 인간을 위해 취하는 행동
을 자신으로 계시하실 뿐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의 객
관적인 사실일 뿐만 아니라, 그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라고
했을 때는 유일하다고도 말 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자신
을 확연하게 보여준 하나뿐인 계시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삶은
역사 안에서 이루어진 일련의 객관적인 사건들이다. 그런데 바르트
의 관심의 배반은 바로 이 사건들의 함축적 의미를 탐구하는데 집
중되고 있다.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은 언제나 하나님이 스스로
를 나타내신 일차적 계시, 원색적 계시, 아니 유일한 계시로 존재
한다.
그러나 계시란 언제나 최종적 의미에서는 주관적이다. 그것은 하나
님이 성령의 활동을 통하여 인간을 신앙의 자유로운 결단에 이르게
하기 전까지는 자신을 진정으로 계시한 것이 못된다는 점에서 그렇
다. 이제 바르트는 계시를 다루면서 마지막으로 신의 주체에 대해
강조한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사건들 속에서 언제나 절
대적 중요성을 차지하는 것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다. 그럼에도 문
제는 하나님이 자신을 대상으로 계시하시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
는 자신을 객체로서가 아니라 주체로 계시 하신다. 인격으로 계시
하신다. 그는 자신을 주시고자 하지 자신에 대한 지식을 주시고자
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계시에서 중요한 것은 계시되는 것이 아니
라 인간과의 모든 만남 속에서 자신을 계시하시며, 현존하시는 하
나님이다.
계시란 하나님이 인간을 심판하시고, 용서하시고, 구원하신다는 사
실을 가리켜주는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스스로가 인간을 심
판하시는 분으로, 인간을 용서하시는 분으로, 인간을 구원하시는
분으로 계시 가운데 현존하시는 사건이다. 그러므로 엄밀하게 말하
면 신의 계시구조에는 객체가 없다. 스스로를 계시하는 주체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을 두고 소위 신의 '자기 계시'라고 한다.
2. 예수 그리스도 = 하나님의 말씀
그리스도교 계시의 본질적인 주장은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
의 말씀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이 자
신을 나타내신 유일한 계시가 담겨져 있다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
을 알려고 하는 사람은 예수를 알아야 한다. 이렇게 볼 때 바르트
는 그 어떤 것도 그리스도의 관점을 떠나서는 이해하려 하지 않는
다. 까닭은 그리스도의 존재와 행동이 곧 계시며, 따라서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와 그리스도를 통해서가 아니면 하나님에 대해 아
무것도 알 수 가 없기 때문이다. 바르트의 초기 사상(특히 로마서
주석 2판)에 대한 가장 격렬한 비판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타자
성과 초월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과 인간간의 어떠한
관계의 여지도 남겨놓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하나
님이 인간과 가깝다는 사실을 강조하는데 반해 바르트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엄청난 분리를 조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비판을
바르트는 우선 인정한다. 그리고 자기가 특히 신의 초월성을 강변
했던 것은 자유주의 신학이 하나님에게서 일체의 타자성을 빼앗아
버리고, 하나님을 거의 인간의 경험과 문화 속에 전적으로 내재한
분으로 만들어 버린데 대한 반발 때문이었다고 한다.
"복음주의 신학은 그 노선의 전체 면에 있어서 분명히 종교적인 것
이 되고, 인간 중심적이 되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인본주의적인 것
이 되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문의 여지가 없다. 여기서
바로 인간은 하나님을 희생시킨 대가로 위대하게 된 것이다"(하나
님의 인간성).
바르트는 하나님이 인간과는 전적으로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충분
히 강조했다고 느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인간성", 인간을 향하
시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
게 관심을 돌렸다. 그리고 그의 초기의 관점이 일방적이었음을 스
스로 시인하면서 후기에 와서는 자신의 사상의 균형을 회복시키고
자 한다. 하나님은 전적 타자이시다. 그러나 그는 인간과 함께 있
는 길을 택하셨다. 하나님은 인간 및 세계와 다른 분이심이 사실이
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인간과 그의 세계를 긍정하
신다. 하나님은 초월자이시면서도 그 자신의 선택에 의해 인간의
세계에 근본적으로 현존하신다. 바르트에게서의 하나님의 말씀은
계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선행적인 개념적 정의를 허용하지 않는
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과 마주침으
로써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게 된다. 여기서 바로 두 인격
간의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 진다. 그리고 그 만남 가운데서 하나님
의 말씀(예수 그리스도)은 자신을 계시하고, 그럼으로써 하나님이
누구신지와 그가 자유롭게 선택하신 인간과의 관계의 본질이 무엇
인가를 계시하신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말을 삼중적 의미로 사용한다. 일차
적으로는 예수의 인격을 말하며, 이차적으로는 성서의 증언, 그 다
음은 교회의 선포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이 삼자는 모두 그것
이 인간에게 전달되고 인간으로부터 응답되어질 때 비로소 말씀이
된다. 여기에 덧붙여서 한가지 지적할 사항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
간이 소화하는 일이란 한꺼번에 완전히 이루어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느 한 시점에 주어져서
그 순간 동의를 요구하는 어떤 명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
하여 하나님이 인간과 관계하시는 일련의 행위들이기 때문이다. 따
라서 문제는 한 순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느냐가 아니고, 선
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계속 거기에 응답하는 과정 속에 있
느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말씀하시는데, 그 말씀하
심에는 세가지 요소가 있다. 즉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그 분 안에
서만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이르고 인간이 하나님에게 이르는 분인
예수가 있다. 예수의 이야기 곧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의 이야기
는 하나님을 말하되 인간을 죄인으로 아시는 분으로, 그러나 그리
스도 안에서 인간을 심판하시고, 벌하시고 그런 후에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분으로 얘기한다. 이렇듯 예수의 삶이 말하는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예수는 인간의 정체에 관해서도
죄인이면서 동시에 용서함을 받은 자로, 교만 하나 동시에 순종에
로 부름 받은 자로, 정죄 당했으나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의 선택받은 자로, 타락하였으나 동시에 하나님과 더불어 영생하도
록 의도된 자로 계시한다. 요컨대 인간은 피조물이고, 죄인임에도
은총으로 구원함을 받은 존재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그가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에 대해 가장 권위 있게 말한다. 예수 그리스
도는 양자의 본성을 같이 나누고 있기 때문에 그의 말과 존재와 행
동 속에는 그 양자의 본질이 반영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종이
되어 인간의 천한 자리에까지 자신을 낮추신 하나님이다. 또한 예
수 그리스도는 '주로서 종'이며, 하나님이 되신 인간이다. 예수 그
리스도는 참인간이다. 예수에 비할 때 다른 모든 인간들은 인간됨
의 수준에 못 미친다. 예수 그리스도는 또한 진실하신 하나님이시
다. 그 안에서 신의 모든 경륜이 드러났다. 신의 속성이 드러났고,
참다운 하나님의 모습, 곧 인간을 위하신 하나님, 인간과 함께 하
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알려졌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계시하면
서 동시에 인간이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를 결정하시는 분이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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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바르트의 부활관
감신대: 홍정수 교수
기독교가 2천년 동안 신앙고백을 해왔지만, 그 신앙고백 속에는 아주
불분명한 것, 서로 모순되는 것들이 그냥 남아 있다. 그 중에서도 "부
활"에 대한 우리들의 고백은 특히 그러하다.
오늘의 한국교회들은 기독교 역사상 그 유례가 없는 높은 성장율을 보
이고 있기에 그 자산에게는 마치 아무 문제도 없는 양 착각하고 있는것
같다. 그러나 앞으로는 이같이 안일한 자세가 통용되지 않을 것이다.일
반사회와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서도 '생각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날
것이며, 그렇게 되면 맹목적인 복종이니 무모한 광신은 점차 사라지고
말 것이다.
* 환란의 본산지 - '부활' 신앙
한국교회의 부황신앙이 불분명한 점, 모순되는 점을 그대로 간직하고있
다는 사실은 단적으로 다음과 같이 입증할 수 있다. 각 교회들이 사용하
고 있는 장례식 예문은 중세교회의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복사해 놓은 것
들에 불과하다는 점이다.그래서 이교도들의 사상인 영혼불멸괴 기독교의
독특한 사상인 몸의 부활이 나란히 고백되고 있는 실정이다. 영혼불멸이
란, 인간의 영혼은 선하고 영원하며 육체는 악하고 유한하다고 생각하는
헬라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아주 평안히
맞이할 수가 있었다. 즉 죽음이란 유한한 육체의 감옥으로부터 무한한영
혼이 해방됨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영왁 육이 하
나의 인격체라고 믿으며, 그 인격체가 통째로 죽었다가 통째로 다시 살
아남을 믿는다.
그런데 이렇게 전혀 다른 두 사상이 혼란스럽게 공존함으로써 지금의한
국 교인들은 '부활'을 대체로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믿는다. 우리가 죽
으면 썩어지나 영혼은 직접 하나님께 가거나 낙원으로 간다. 그리하여육
체에서 분리된 영혼은 거기서 수억년(?)을 지내다가 어느날 주님께서 재
림하실때 비로소(그러니까 그 영혼은 '주님'과는 떨어져 있는 모양이다)
공중이나 지상으로 되돌아와 새로운 육체를 덧입게 된다. 이것은 중세교
회의 일반적 신앙형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성서신
학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형태의 신앙은 전혀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적인 부활 신앙은 어떠한 것일까.
* 부활 신앙의 무신론적인 오해
이제부터는 스위스의 개혁파 신학자 바르트의 사상을 중심으로 기독교의
부활 신앙을 재검토해보자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바르트를 내세우는 것
은 그가 기독교를 대표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가장 평범하기
에 그를 다룬다. 그의 부활 사상에는 독특한 것이 거의 없다. 나아가 이
미 한 세대 전의 신학자이기에 비판할 점도 많이 있지만, 여기서는 지극
히 중도적인 그의 사상을 소개한다).
그러면 바르트가 거부하고 있는 잘못된 형태의 부활신앙부터 생각해 보
자. 부활신앙이 인간의 생물학적인 죽음의 극복이라거나 죽음 다음의 저
세상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믿는 것이라면, 바르트의 생각으로는 그것을
이교도적인 신앙일 뿐이다. 필자는 그런 신앙을 가리켜 '무신론적인 부
활 신앙'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면 인간의 생물학적인 죽음의 극복과
내세를 믿는 것이 어째서 무신론적인 것인지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하자.
지금 우리나라에는 이미 죽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다고 한다.
그래서 세계에서 자살율이 가장 높은 나라 중의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그
러나 물론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아직도 살기를 원하고 영원히 살기를 원
한다.그래서 건강에 좋다는 것은 무엇이든 하려한다. 의를 위해서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너 순교자들의 시대와 지금은 엄청나게 달라서 마치 전
혀 다른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는 듯 해졌다.
우리는 살고 싶어하며 그것도 무한히 사고 싶어한다. 영원한 삶에 대한
이같은 인간의 꿈은 오래되었으며 또 집요하다. 진시황제도 불로초를 찾
아오라고 동방으로 사람들을 보냈다고 전해지며, 지금 미국에는 여러 구
의 시체들이 어느날엔가 동면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리며 냉동실에 보존되
어 있다고 한다. 모든 피조물들이 지니고 있는 공통운명, 시간 속의 존
재, 그 자체를 극복하려는 것은 인간의 욕심들이다.
그러나 아직은 아무도 인간의 시간성을 초극하는 비법을 발견해 내지못
하였다. 단지 무수히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믿는 것"이 바로 그 해
답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들도 기독교의 부활이어
떻게 이 시간성의 문제의 해답이 되는지는 구체적으로 모른다. 즉 수억
년의 후의 나의 영혼이 무엇을 근거로 여전히 '나' 인지 그들은 모른다.
수억년 후 내가 지구로 돌아와 새로운 육체를 입느다고 치자, 그때의 새
로와진 나를 어떻게 지금의 나와 동일시 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육체는 전혀 다른 것인데, 의식만은 동일하다는 것인지? 마치 전쟁을 기
억한다는 사람들처럼, 혹은 아기가 어머니 뱃속에서의 생활을 기억하지
못하듯이 부활하고 나면 기억도 달라지는 것인지... (그러나 아기의 경
우에는 육체가 동일성을 보장해 주지만, 부활의 경우는 아무것도 우리의
동일성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
어떤 식으로 이든 부활이 우리의 생물학적 죽음을 극복해 주고 내세를
보장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 부활을 믿는 것은 "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 (<죽은 자의 부활>,154쪽)을 구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사고
방식은 우리의 존재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이기적인 '나' 중
심으로 생각하는 데서 비로소 가능한 엄청난 불신앙의 소산이다. 이같은
신앙은 얼핏보기에 대단히 훌륭해 보이나 하나님이야 어찌 되었든 '나'
만의 영원을 꿈구는 욕심에 불과하다.
그래서 이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일수록 겉으로는 내세와 부활을 믿는다
고 말하나 사실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다가 죽기보다는 이 세상에
서 하루라도 더 살려고 발버둥치기가 일쑤이다. 내세가 없다고 믿는 사
람들이야 물론 '이 세상' 밖에 없으니 죽기를 두려워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내세를 믿는다고 말하면서 이 세상에서 죄(타협의 죄)짓기
를 두려워 하지 않으니, 그것을 어찌 생각해야 할까 . 이런 신앙에 대하
여도 하나님 중심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 실증주의 부활의 오해
한국교회의 부활신앙 속에는 또 다른 무신론적 요소가 들어 있다. 그것
을 필자는 '실증주의'라고 부른다. 실증주의적으로 부활을 믿는 사람들
은 사흘 전에 매장된 어느 청년의 시체가 망우리의 공동묘지에서 무덤을
젖히고 현세로 되돌아온 것이 바로 부활사건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목
격자들이 그 장면을 하나하나 기술할 수도 있다고 상상한다. 즉 성서학
자들이 소생이라고 칭하는 사건을 부활이라고 크게 잘못 생각한다.
이러한 의미의 부활의 '실증성'을 부정하였다. 하여 바르트를 가리켜부
활의 '기적'을 믿지 않는다고 오해를 한다. 그러나 이같은 비판이야 말
로 무신론자들이나 할 수 있는 어리석은 소리이다. 성서를 자세히 읽어
보라. 성서는 그 어느 대복에서도 부활 사건 자체의 목격담을 싣고 있지
않다. 심지어는 바울 사도의 경험을 제외하면 이미 신앙인이 아니었던사
람들에게는 '부활하신'예수께서 '나타나시지' 않으셨다고 보도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성서 어디에도 무덤에서 살아나오신 부활의 예수를 (소위과
학자나 자연인의 눈으로)보고, 그를 처형한 로마인들이나 유대인들이 회
개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래서 바르트는 "부활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실
제로 발생한 사건이지만 신앙이 없는 역사들의 비디오 카메라로는 찍을
수 없는 성격의 사건이었다"고 단호히 말한다 (Church Dogmatics,IV.2,
143-149쪽).
즉 부활 사건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행동하신 사건 (그런 의미에서
'절대기적'이다)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감춰어진 비밀
이다. 그렇지 않다면 부활신앙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단지 부활 사실에
대한 객관적 보도와 그것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가능했을 뿐이다. 결국
바르트는 부활 사건은 하나님의 행위이기 때문에 철저히 하나님 중심으
의 생각할 때에만 그 진의를 파악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면 하나님중
심으로 생각할 때는 부활이 무엇을 의미할지를 생각해 보자.
* 기독교의 부활신앙
기독교의 부활신앙은 인간들이 지니고 있는 일반적인 소망이나 일반적
인 잠재력의 성취에 근거해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바르트는 크게 강조한다
그는 신학자 불트만이 부활을 인간 실존이 지니고 있는 보편적인 잠재력
으로 환원시킬 위험을 범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과거에 얽매인 인간인미
래를 향하여 자기 자신을 개방하고 자기의 삶의 주인이 되는 경험이 소
중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그런 경험은 역사적인 예수 그리스도 사
건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 바르트의 요점이다. 인간의 부활이 무엇
인지 알고자 원한다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으로부터만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의 부활이 보여준 인간의 부활이란 삶의 가리키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영광으로 가득찬 생'이며,'완성된 삶'이며,'
하나님이 지배하시는 삶'이다 (Dogmatics on Outline,164쪽, Learning J
esus Christ Through the Heidelberg Catechism,76쪽)
즉 우리의 몸의 부활이란 우리가 다시는 시간에 종속되지 않는 무시간
적 세계 (저세상)로 돌입해 가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우리의 전체
삶이 전체적으로 부활하신, '영화로운신 그리스도의 삶과 일치'하게 됨
을 뜻한다 (상동,89쪽)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부활신앙을 참으로 갖게
되면 이 세상에서 이미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속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
도께서 속하게 된다'(상동,30쪽)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점은 '그리스도의 삶과 일치하는 삶'의완
전한 모습이 어떠할 것인지는 아직 우리에게는 다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
이다. 그것에 대한 부질없는 사변을 신앙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다음
과 같은 바르트의 생각은 이 점을 아주 분명히 말해 준다. 즉 "죽은 자
의 부활"이라는 바울 사도의 말은 '하나님'이라는 말을 달리 표현한 것
에 불과하다고까지 바르트는 말한다 (<죽은 자의 부활>,146쪽). 바로 여
기에 바르트의 부활 사상의 핵심이 있다. 하나님을 믿음, 죽은 자의 부
활을 믿음, 예수의 부활을 믿음 이 세가지는 사실상 동일한 것이다.
예수의 부활없이도 가능한, 영혼불멸과 내세를 믿는 믿음은 기독교와 아
무 상관이 없다. 또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함과 그리스도의 중심으로 생
각함은 동일하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부활시켰다는 것을 믿는 것은 예수
의 삶의빛에서 세상을 보고 또 살아감을 뜻한다.
결코 이기적인 자기의 욕심충족을 생각하면서 기뻐하는 그런 일이 아니
다. 진정한 부활의 빛에서 본다면 그분 삶은 아직 죽음의 권세에 얽매인
삶일 뿐이다.
성경을 보면 부활의 메시지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다시 살리셨다
는 것과 예수께서 지금 우리와 함께 현존해 계시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
을 오늘날의 언어로 표현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의 생
이 한 개인으로 서의 私的인 생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바로 그의 생이
이제는 이 세상을 심판하실 하나님의 의가 되었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이
다.
그래서 바르트는 부활을 승천과 재림과 더불어 생각하기를 원한다.사도
신경에도 있듯이 부활하신 예수는 '끝날'에 세상을 심판하러 다시오신다
고 했다. 예수의 부활 사건은 이 세상에 대한 최후의 심판에서 비로소마
무리될 커다란 사건의 서곡이었다. 그래서 제자들 중 어느 누구도 예수
의 부활을 선뜻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이 예수의 부활을 믿으려 하지
않았던 것은, 현대인들처럼 이 세상의 삶에 대해 매력을 못 느껴서가 아
니라, 자기들이 버린 예수가 '하나님의 의'로 인정되었다는 것을 인정하
고 싶지 않아서였던 것이다.
자기들이 버린 예수가 하나님에 의하여 되살아났다고 하는 것은 자기들의
행위가 전적으로 죽을 짓이었음이 폭로됨과 동일했기 때문이었다. 제자들
은 스승의 부활 소식을 전해 주는 여인들을 가리켜 '정신이 나갔다'고 말
하며 믿으려 들지 않았다.
이렇듯 성경이 말하고 있는 부활사건은 사람들이 즐거이 기다리던 사건
이 아니라 원치 않았던 '심판'의 사건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결코 인간의
부질없는 욕심을 충족시키는 사이비 과학, 마술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의
오늘날의 삶이 십자가에서 처형된 예수의 삶과 일치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살아 있으나 이미 죽은 자들임을 알아야 한다. 반대로 우리가 비록 세상
에서 죽은 자처럼 지내게 되고 또 순교를 당한다고 할찌라도 우리의 삶이
예수의 삶과 일치하기만 한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 있거나 또 죽게된
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을 믿어야 한다.
* 바르트의 교훈
무신론적으로 생각한다면 부활이란 인간의 유한성, 곧 생물학적인 죽음
을 극복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어쩌면 미래의 과학은 그런 부활에
준하는 것을 인간에게 선사할지도 모른다. 타임머신이나 노화방지의 기
술, 또는 세포 하나로 인간을 복제, 재생시키는 기술 등이다. 그렇게 되
면 인간은 불멸의 시대에 돌입하게 될 것이다. 그런 날이 온다고 하더라
도 그것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부활의 삶과는 전혀 다르다.
성경이 염려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 없는 삶'이다. 하나님을 사실상 더
이상 믿지 아니하는 현대인들은 하나님없는 삶이 無보다 더욱 치욕스럽
고 고통스러운 삶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른다. 그런데 성경은 바로 그것
이 죄지은 인간에게 내려지는 하나님의 형벌이라 했으며 '죽음'도 죄의
삯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래서 바르트는 부활이란 바로 하나님에 의한우
리의 생의 완성을 뜻한다고 과감하게 말했던 것이다.
이같은 부활 이해가 무수히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커다란 실망을 줄 것
은 뻔하다. 그러나 그들이 실망을 하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그들이 하나
님을 전혀 하찮은 존재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
께서 함께 계심' (임마누엘)이 아니라 단지 더러운 '자기 육체의 만수무
강과 불로장생'일 뿐이다. 그래서 더 좋은 것을 준다해도 굳이 ( 하나님
은 없어도 좋으니) '불로 장생'이나 달라는 것이다. 이들에 대해서 성경
과 기독교가 무슨 말을 하리요 즉 무신론자들에게 예수의 부활이 어찌'
기쁜 소식'이 될 수 있으리요?
그래서 결국 바르트는 한국의기독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라고 생
각된다.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시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성경을 주의
깊게 읽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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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트와 타자의 해석학
-종교신학과의 비판적 대화를 위해-
정승훈
센프란 시스코 신학대학원, 영성연구소
1. 시작하는 글
기독교의 '타자'를 인정하고 그 성숙성에 관한 다원주의적 논쟁들은 특히 북미의 신학계에서 영성, 해석학, 포스트 모던주의 이론과 엮어져 복잡하게 나타나고 있다. 논쟁들을 주의 깊게 살펴볼 때, 흔히 언급되는 것처럼 배타주의적 주장이나 포용주의적 입장 또는 다원주의적 입장으로 명쾌하게 갈려나가지 않는다. 이러한 이론적 상황 때문에 '혼란'으로 또는 '절충'으로 그런가하면 '반격'으로 신학의 입장들이 드러난다. 그런가하면 종래의 신중심(Theocentric)신학을 근거로 타종교의 차별성을 보편성으로 묶었던- 예를 들어 '통전자로서의 하나님'- 그룹들은 뒤늦게 세계의 고난의 현실에 눈을 돌리기 시작하고 종교간의 대화의 문제에 이데올로기 비판적인 해석학을 보충하기 시작한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어째든 포스트모던 사유가 근대성에 관한 '계몽의 기획'에 대해 일사불란하게 해체적인 태도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그 동안 에큐메니칼 대화들을 통해 북미의 신학계에 나름대로의 영향을 미쳐왔던 유럽의 신학들, 예를 들어 칼 라너나 몰트만의 신학은 급진적인 종교다원주의들이 벌이는 논쟁에서 뒷전으로 밀리는 추세를 보이기도 한다. 종교신학자들이 주장하는 급진적인 기독교의 상대화(Relativization of Christianity)- 대표적으로 쟌 힉(John Hick)이나 폴 니터(Paul Knitter)- 시도들은 아시아 신학자들에 의해 새롭게 비판적으로 조명된다.
하버마스는 프랑스의 포스트모던 철학을 요약하면서 니체 철학을 근대성의 품질상표인 이성의 껍데기를 분쇄하고 "이성의 타자인 신화" 속에 안주하는데 있다고 진단한다. 여기서 주체 중심적 이성은 이성의 타자인 신화의 세계와 부딪치게되고, 주체중심의 이성과 권력의지와의 연계가 폭로된다. 니체의 길을 통해 회의와 해체의 대가로 변신한 일군의 프랑스철학자들은 근대성의 기획인 '주체=이성'의 허위에 찬 등식을 공격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포스트모던 상황에서 이성은 절대적이거나 선험적이라기보다는 상황적이며 상대적이다. 지식과 권력은 서로 연계되어 있으며 이제 계보학(Geneology)이 비판을 대체한다. 정치적 실천은 쉽게 정당화되지 않고, "일상생활의 마크로 파시즘"에 대항하는 게릴라전의 성격이 포스트모던주의의 실천으로 드러난다.
그런가하면 쟈크 데리다에 의해 붙여진 '현존의 형이상학'(A Methaphysics of Presence)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칸트와 헤겔 그리고 하이데거에 이르기까지 서구사상이란 은폐된 진리를 명증한 언어로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해왔고, 여기서 이성중심적(logocentric)추구가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음을 파헤친다. 결국 이성 중심주의는 항상 '불확실한 것', '적합하지 않은 것', 이성과는 '다른 것'을 배제한다. 다시 말해 이성은 '다름'에 대해 무차별하며 결국 자유와 해방이라는 '거대담론'아래 근대성은 축소되고 왜곡된 자유와 해방을 부여해왔을 뿐이다. 그런가하면 주체의 종언을 부르짖는 포스트모던주의의 반격에 대해 해석학적 사유는 포스트모던주의의 '의심과 해체전략'을 '해석들의 갈등'(Conflict of Interpretations)으로 수용하면서 타자의 문제를 새롭게 독해해나간다. 가다머의 영향사적 개념에 근거된 지평융합론은 료타르(Lyotard)의 불가공약성(Incommensurability)에 병행하는 해석학적 제한성을 말한다. 다시 말해 각각의 다른 역사와 문화적 지평에 서있는 해석자들은 같은 텍스트를 해석하더라도 다른 해석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즉, 다른 것은 다른 것으로 그 고유성이 인정되어야 한다.
철학과 사회과학에서 벌어지는 해석학과 포스트모던주의의 논쟁들이 신학의 영역으로 들어올 때, 그것은 종교다원주의 상황과 맞물려 한층 더 복잡하고 급진적으로 전개된다. 거대담론에 속하는 '하나님', '세계사적 구원', '그리스도의 중심성'은 해체되든 재해석되든지 간에, 지금까지 투명한 것으로 제시되어왔던 모든 교리적 진술들은 포스트모던 주의자들의 총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런가하면 종교신학자들의 근대적 기획- 예를 들어 통전자(Integrator)로서의 하나님 또는 신중심적(Theocentric)인 시도들을 통해 종교간의 차별성을 급진적으로 상대주의화하고, 이러한 상대화를 보편적으로 넘어서려는 시도들- 에 대한 포스트모던 신학자들의 날카로운 공격과 이에 대한 종교신학자들의 반격 역시 21세기 문화와 종교의 이론적 다원성을 풍부하게 한다.
이 글에서 시도하는 것은 칼 바르트에 대한 하나의 해석이다. 바르트를 해석학이나 종교다원주의와 연관시켜 다룬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이고, 별 다른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바르트의 초기저작들이나 교회 교의학의 문제를 검토해볼 때 바르트 신학은 하나님, 인간, 세계의 문제들을 해석학적으로 깊게 연관시킨다. 초기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과 후기의 교회 교의학의 이론적인 연계는 이미 유럽의 신학계에서 바르트 신학을 좌파적으로 해석하는데 수장의 역할을 해온 헬무트 골비처(Helmut Gollwitzer)나 마르크바르트(F.W Marquardt) 또는 그의 동료들에 의해서, 그런가하면 종교사회주의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단네만(U. Dannemann)에 의해 주목되고 해명되었다. 이들의 주된 관심은 바르트 신학의 중심문제로 등장하는 신학과 정치 사회적 연관성의 문제에 있는데, 특히 '하나님 나라의 현실성'이라는 전망을 통해 초기 로마서 주석과 교회 교의학과의 이론적 연속성을 정치 사회적 성격에서 해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은 바르트가 '하나님의 인간성'과 '사회적 존재로의 인간의 인간성'의 문제를 어떻게 해석학적으로 반성하는가 하는 문제에는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 지점은 사실 바르트가 문화와 타 종교들의 성숙성에 대해 어떤 해석학적 반성을 했는지 알게 하는 중요한 영역에 속한다. 이 분야가 명쾌하게 해명될 때- 물론 바르트는 이 영역을 하나의 숙제로 남겨놓았고, 해석을 필요로 한다- 포스트모던주의 길목에 서 있는 바르트의 신학은 종교다원주의 신학에 건설적인 비판의 파트너가 될 수 있다.
2. 바르트의 해석학
해석학은 인간을 의미부여하는 주체로 파악함으로써 사회적 실제와 문학적 텍스트에 주체로서의 인간을 위치시키며, 의미를 보존하려고 한다. 하이데거의 과제는 존재의 물음을 복권하고, 보편 해석학의 신 칸트적 틀인 주객도식의 이원론을 무너뜨리는데 있었다. 칸트의 선험적 구상력의 철학에 대한 창조적 수용을 통해 하이데거는 이해를 존재방식으로 재 정의한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주체성과 객관성에 앞서 '세계-내-존재'의 우위성을 확보한다. 이러한 존재론적 해석학은 슐라이에르마허나 딜타이의 해석에 깔려있는 심리적인 한계를 극복한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딜타이에 의해 규정된 생의 표현으로서 비판과 방법에 대한 해석학적 정당성의 문제를 무시해버렸다. 하이데거가 무전제적 출발점을 전이해적인 상황으로 대체할 때, 니체, 프로이드, 마르크스는 '전이해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비판적인 물음을 제시하고 있었다. 이들은 '의심의 대가들'이었고, 권력의 왜곡에 대한 분석들을 통해 세계와 인간의 사회적 조건에 대한 의심의 해석학적 지평을 열고 있었다.
신학적 해석학의 영역에서 에벨링은 해석의 중심문제가 말씀사건을 동반하는 이해론(Lehre vom Verstehen mit dem Wortgeschehen)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말씀사건의 이해는 언어자체에 관한 이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통한 이해'가 중요하게 부각된다. 말씀은 이해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이해를 열어주고 매개시킨다. 그러므로 말씀이 사건화 되는 곳에서 이해가 가능해진다. 해석학은 말씀과 관계함으로써 사회적 현실에 관계된다. 그리고 이 현실은 말씀을 통해서 이해된다. 여기서 우리는 슐라이에르마허 이후 신학적 해석학에서 잊혀져 온 해석학의 '사회적 기반'(Soziale Basis der Hermeneutik)을 에벨링의 시도를 통해 얻게된다.
해석학이 하이데거에 의해 칸트 이후 주객도식의 형이상학적 이원론의 극복이라는 과제를 가지고 시작되었을 때, 불트만은 특히 이 개념을 자신의 실존주의 신학에 유용화 하면서 핵심적인 의미를 갖게 했다. 또한 하이데거의 인간 현존재 분석은 성서가 말하는 죄와 죽음아래 서 있는 인간에 대한 기술과 상응한다. '나의 실존의 비본래성에서 어떻게 본래성으로 결단' 하는가 하는 불트만의 물음은 하이데거의 현존재 해석에 대한 신학의 반향이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인간 실존이해에 가장 적합한 개념을 불트만에게 제공한다. 실존철학은 자기자신을 잃어버린 인간의 비본래성(Uneigentlichkeit)을 깨우치게 하며 여기서부터 자기실존을 책임 있게 결단함으로서 그의 본래성(Eigentlichkeit)에 이르도록 요구한다. 불트만은 해석학의 문제(Das Probelm der Hermeneutik)에서 인간실존의 전이해는 해석학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임을 밝힌다. 본문에 대한 질문은 인간존재의 잠정적인 이해 다시 말해 실존이해에 의해 유도되며 이러한 전이해와 여기에 동반되는 질문 없이 본문은 침묵할 수밖에 없다. 실증주의 역사주의와는 달리 실존론적 해석학은 역사를 실존의 역사성에서 파악하는 점에서 주객도식관계의 이원론적 세계관을 극복한다. 역사의 원천 속에는 인간실존의 결단과 자유로운 가능성들이 표현되어있다. 결국 역사의 중심테마는 인간실존의 가능성으로 파악되며 여기서 우리는 포이에르바하의 종교비판- '신학의 비밀은 인간학'- 이나 인간의 전이해에 이미 정치 사회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이데올로기(종교)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하나님의 인간성'이나 또는 '인간의 인간성'이 아니라 불트만에게는 인간의 '실존론적 역사성'이 그의 해석학의 중심으로 등장한다. 바르트는 불트만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인간의 문제가 함께 설정되어 있음을 본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하나님의 인간성'과 '인간의 인간성'의 문제를 사회적으로 연관지음으로써 그의 신학의 성격을 사회 해석학 적으로 전개해간다.
지금까지 해석학이 내용적 사실(Sache)에 관한 '이해방식'을 중요과제로 삼았다면, 바르트의 관심은 자유주의 신학과 문화 개신교와는 달리 '신학의 내용적 사실'(Sache)로 되돌아가길 원했다. 다시 말해 역사나 심리학과는 구분되는 신학의 특수한 것-이것이 바르트가 말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신학의 사실적 내용 내지 사실성(Sachlichkeit)에 관한 논쟁은 역시 해석학적 프로그램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 칼 바르트는 '오늘의 신학적 실존'(1933)에서 '(사회적) 상황을 향한 말씀'(Zur Lage)과 '내용을 향한 말씀'(Zur Sache)을 구분 짖고 신학의 실존은 모든 정치 사회적 상황에 필연적으로 연관되어 있으며, 이 연관성을 신학의 사실적 내용에 해석학적으로 매개하려고 했다. 다시 말해 성서적 진술은 일차적으로 성서적인 상황과 연관시켜 주석적으로 취급되지만,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성서와 우리의 시간적 간격을 뛰어넘는' 해석학적 매개(Hermeneutische Vermittlung)와 실천을 통해 시대적 상황을 위한 말씀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여기서 바르트는 신학의 사실적 내용, 예를 들어 계시와 같은 개념은 단순히 객관적이며 무시간적으로 주어진 형이상학과는 상관없는 것임을 밝힌다. 신학의 사회사적인 실존 속에서 바르트는 모든 교의학적 진술들- 예컨대 신론, 그리스도론, 교회론 등- 을 역사, 사회적인 것으로 파악했고, 동시에 교회에 위임된 실천적인 과제로 이해했다. 이런 관점에서 바르트는 해석학적 신학에 필수 불가결한 실존개념을 포기하지 않는다. 신학의 정치사회적 실존을 통해 바르트는 하이데거- 불트만의 개인주의적 실존론적 신학과는 다른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인간성문제'를 해석학적으로 해명함으로써 그의 교의학적 진술들을 히틀러에 대한 저항과 정치해방의 운동에 연관지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바르트의 해석학적 관심은 불트만과는 달리 그의 초점을 인간의 정치 사회적 조건에 맞춘다. 이 조건은 사회적, 역사적, 문화적, 종교적인 총체적 인간의 삶의 자리를 의미한다. 인간의 본성에는 거룩한 것을 단순한 객체로 고정시키고 우상으로 변조해버리는 악의 경향 즉 신화론적인 경향(Mytholoische Tendenz)이 있다. 틸리히의 언어로 언급한다면 이러한 경향은 종교의 성례전적 차원의 타락을 말하는데, 이 차원이 마술적인 것으로 전락해버릴 때 이에 대한 비판으로 신비주의적 운동과 윤리- 예언자적 운동이 발생하게 된다. 틸리히가 종교의 세 가지 차원 즉 성례전적 기반, 신비적 및 예언자적 차원을 통합하는 "구체적인 정신의 종교"- 이 차원에서 신율적 요소가 발생한다- 를 그의 문화 해석학의 중요한 방법으로 고려한다면, 바르트는 초기에 신화와 우상을 만들어 가는 인간의 사회 문화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바르트에게 의미 있는 것은 살아있는 것을 죽어버린 객체로 만들어버리는 악마적인 경향을 폭로하고, 그 비판을 통해 새로운 의미로 회복시키는데 있다. 이 과제를 위해 의심의 대가들이었던 니체, 포이에르바하, 마르크스의 해석방식이 바르트에게 중요한 이론의 도구로 등장한다. 의심의 대가들의 해체와 기존질서에 대한 파괴는 현실성의 새로운 구축을 향한 지평을 개방한다. 이런 점에서 니체, 포이에르바하, 마르크스는 바르트에게 해석학의 사회적 차원과, 이미 실존의 전이해에 영향을 주는 신화론적인 이데올로기에 주목하게 한다.
불트만의 실존론적 해석학은 바르트에 의해서 사회, 역사적 지평으로 수정되고 확대된다. 하나님은 만유 안에 계시며(Alles in Allem), 인간존재의 총체성에 관심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존재는 현실을 새롭게 조명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세계에 속한 모든 것들을 변혁하신다(CDII/1, 258). 하나님의 존재는 개인의 내적 종교성에 대한 단순한 갱신이 아니라 현실세계의 변혁을 의미한다. 정치, 문화, 자연은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변혁의 대상이 되며, 동시에 화해의 대상이 된다. 이것은 바르트가 표현하려는 사회에 대한 신율성의 차원이다. 적어도 인간은 하나님을 떠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버리지 않는다. 이른바 바르트에게서 본래적 사실로서 임마누엘의 현실(Urfaktum Immanuel)은- 일본의 뛰어난 바르트 학자인 다키자와(K. Takizawa)는 이 내용을 근거로 바르트 신학과 선불교의 대화의 출발로 삼은 적이 있다- 타종교와의 만남에서 중요한 출발점을 제공한다. 마르크스의 포이에르바하의 11테제가 바르트의 하나님의 이해에 수용되며, 마르크스의 유물론 안에 육체의 부활의 메시지가 숨겨져 있다고 마르크바르트가 진단할 때, 그것은 본래적 사실인 임마누엘이 바르트에게서 '하나님의 혁명'과의 연관시켜 이해되고 있음을 말한다. 바르트의 전적타자는 몰트만이나 융엘이 오해하는 것처럼 인간의 경험적 현실과 무관한 형이상학적 은유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인간의 모든 불의한 상황을 변혁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이며, 동시에 역사의 악과 사회의 불의에 전적인 타자로 존재하시는 분임을 말한다. 그리고 이 타자인 하나님은 만유 안에 계시며 만유 안에서 일하시는 분이다. 이 하나님에 대한 사회적 실존경험과 해석학적 이해는 바르트 신학의 특징에 속한다.
3. '하나님의 혁명론': 해석학과 사회분석의 통합개념
바르트의 가난한 자의 해석학은 로마서주석을 쓰던 정치 사회적 상황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바르트의 종교사회주의 비판은 그가 노동자의 상황을 종교적으로 해석하지 않은데서 나타난다. 그것은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변혁의 문제였고, 노동자의 사회적 상황을 성서해석의 중요한 대상으로 파악한다. 불트만과 바르트는 자유주의 신학의 배경에서 출발했지만, 불트만이 성서를 개인의 실존과 그 존재론적 구조(존재와 시간)에서 해석했다면, 바르트는 역사적 실존과 그 사회적 구조(인류의 사회사의 관점에서)에서 해석한다. 여기서 바르트 사고의 이해는 마크부르트학파에서 포이에르바하로 그리고 마르크스로 이어지는 헤겔 좌파적 선회를 그린다. 바르트와 불트만이 갈라서는 것은 이들이 역사와 사회적 현실성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학적 관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19년 탐바하 강연(Tambach Vortrag)에서 종교사회주의자들과의 결별이 예고된다. 여기서 바르트는 사회안에 있는 기독교인들의 과제를 정치사회적으로 어떻게 사회현실과 중재할 것인가 대해 관심 한다.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인류를 포함하며 세계와 사회 속에 있는 인간의 존재를 포함한다. 불름하르트와 더불어 바르트는 하나님을 믿는 것은 인간성을 믿는 것이며, 그리고 인간성을 믿는다는 것은 세계의 실제적 변혁과 갱신으로 인도한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사회는 자체의 중심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규칙이 하나님의 빛 안에서 상대화된다고 할지라도 사회적 삶을 지배하고 규제한다. 그러나 인간의 업적과 인간의 사회는 바르트가 부른 "운동"내지 "근원" 즉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만난다. 이 하나님의 역사가 인간의 역사로 개입해 들어오며, 세계와 사회를 변혁한다. 사회 속의 기독교인은 하나님 나라의 빛 속에서 사회의 비영속성(Impermanence)을 인식해야하며, 동시에 하나님의 개입은 인간의 전체적인 삶에 대한 비판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의 사회적 항거와 비판은 하나님 나라운동을 향해 통전적인 부분이 되어야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저항과 비판을 넘어서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인간의 혁명을 넘어서 있는 진정한 혁명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성격이 강하게 부각된다. 사회는 이제 미래의 희망의 삶의 전망가운데 서 있게 되며 전적인 타자(totaliter aliter)로서의 하나님의 현실은 교회와 사회와 문화에 대한 변혁의 근거가 된다. 하나님나라의 운동의 근원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불트만 처럼 실존론적 이해를 위해 비신화화 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변혁적으로 비신화화된다. 이 '전적 타자'는 하나님의 현실성과 세속화된 사회현실을 매개하며, 기존의 부르주아 사회와 문화의 전복을 의도하는 인간의 새로운 세계로 이해된다. 바르트의 해석학적 전이해는 개인주의적 실존론적 전이해가 아니라 변혁의 시기에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이 갖는 급진적인 '하나님의 혁명'에 대한 전이해를 말한다.
로마서 1판에서 수행되는 레닌 혁명과의 비판적 대결은 그리스도안에서 열려지는 '자유의 저항운동'(Gegenbewegung der Freiheit)을 통해 일체의 인간적 실존의 소외와 물화에 대항하는 하나님의 혁명으로 독해된다. 그리스도안에서 제기되는 것은 도덕적 윤리의식이 아니라 사회적 토대에 대한 인식과 거기서 산출되는 실천에 상응하는 '하나님의 운동'이다. 여기서 바르트는 이론과 실천의 통합을 하나님의 운동의 관점에서 파악한다(롬1.392). 특히 골비처는 이것을 이후 바르트신학의 정치신학적 전개를 해명하는 중요한 해석학적 전제로 파악하며, 존재와 당위, 사회적 현실성과 인간의 실천의 모든 이분법이 바르트에게서 지양되고 있음을 밝힌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행동은 '은총의 고유한 능력'을 근거로 하나님의 행동과 함께 고려된다. 은총의 고유한 능력은 자유롭고 선하며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며, 하나님을 향해 지향된 인간의 의지이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행동과 우리의 하나님을 향한 행동사이에는 어떠한 동요가 있을 수가 없다. "은총아래 서있는 인간은 스스로 만들어 가는 존재와 같다"(롬1.169). 여기서 마르크스주의에 의해 비판적으로 제기되어온 '은총과 인간의 자기창조의 반립'은 바르트에 의해 신학적으로 극복된다. '인간은 자신이 스스로 실천을 통해 창조해나가는 존재'라는 마르크스의 인간의 자기창조의 테제는 바르트에게 은총의 근본적 사유로 수용된다. 그리고 이 은총은 타종교와 문화 속에 여전히 그 영향력을 행사한다. 적어도 바르트의 은총신학은 보편적인 문화구조를 갖는다.
'하나님의 혁명 운동'은 사회 문화적 대립들 속에서 근본적으로 '밑으로부터의 운동'(eine Bewegung von unten her)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열악한 자, 비천한 자의 하나님이지 부유한 자들의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이다(롬1.367). 가난한 자를 위한 하나님의 당파성에 대한 해석학적 이해를 통해 바르트는 급진적인 사회민주당과의 협력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는 레닌의 혁명론에 접근해간다. 일차적으로 바르트는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레닌의 급진적 비판과 자신의 비판사이에 일정한 친화력이 있음을 본다. 그러나 바르트는 레닌의 프롤레타리아 독재개념을 거절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국가를 또 다른 국가기구로, 그런가하면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독재'로 대체하기 때문에 보수적일 수가 있다. '레닌주의 이상으로'(Mehr als Leninismus),(롬1.379)- 이것은 바르트가 견지하고 있던 정치적 이해이며, 하나님의 혁명은 기존의 국가를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대체하는 것이며, 정의의 힘을 통해 부정의 폭력을 위에서부터 밑에까지 해체하는 것을 말한다(롬I.377).
마르크바르트 해석에서 바르트의 신론이 레닌의 혁명개념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리고 바르트의 정치적 입장을 레닌의 관점에서 '무정부주의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마르크바르트가 바르트의 정치적 입장을 2차 인터내셔날과 3차 인터내셔널의 이론적, 실천적 방황의 기로에 서 있었던 스위스 사회민주당에 자리 매김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마서 주석 1판에서 바르트는 오히려 레닌을 무정부주의자로 역 규정하고 있으며, 바르트의 개혁과 혁명의 변증법적 역동성을 고려해볼 때 바르트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급진적 사회주의와 흐름을 같이한다. 특히 클라라 제트킨의 불름하르트에 대한 존경, 불름하르트의 급진적 사회주의적 입장 그런가하면 로버트 그림(Robert Grimm)이 이끌던 스위스 사회민주당의 급진적 강령들은 무정부주의적으로 이해되기는 무리다.
로마서 주석 2판에서 바르트는 하나님의 혁명을 '비판적 초월'(Kritische Transcendenz)로 자리 매김 한다. 로마서1판 주석에서 하나님의 혁명과 연관되는 인간의 해방실천은 '은총의 고유한 능력'을 통해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갖지만, 이제 그는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파렴치한 동일성"(Unverschamte Indenfikation)을 경고하기 시작한다.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무한한 질적 차이'(키엘케고르)는 러시아의 혁명에서 벌어지는 백군파와 적군파들 간의 참상, 혁명가들의 보수화, 여전히 가난한 자들과 소외된 자들의 억압의 현실을 보면서 정치적으로 수행된다. 여기서 바르트는 그의 유명한 위기신학(Theologie der Krisis)의 길로 들어선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위기로 몰아넣으시는 분이다. 전적타자(동시에 모든 것을 전적으로 새롭게 변혁시키시는 분)인 하나님은 인간에 대해 긍정과 부정의 양 계기를 갖는다. 바르트는 위기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부정에서 하나님의 긍정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여전히 로마서주석 2판에서 바르트는 그리스도안에 존재하는 혁명(롬2.180)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 혁명은 도처에서 사슬에 매여있는 모든 존재들을 해방하는 자유의 회복을 의미한다. 로마서 주석2판에서 바르트의 정치해석학은 1)이데올로기비판 2)개혁정치 3)저항윤리로 요약된다. 심판자(II.1-3)의 항목에서 바르트는 주장하길, 인간은 중심의 자리에 서기 위해 하나님을 이데올로기로 만들어버린다고 분석한다(롬2.73-74). 하나님과 인간을 혼동하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은 인간의 허위의식에 대한 공격으로 드러난다. 물신숭배를 통한(롬2. 50) 우상작업은 인간을 진리가 아니라 거짓으로 이끌어간다. 여기서 역사는 권력과 지성을 소유한 자들이 연약한 자들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각축장이요, 생존투쟁(Kampf ums Dasein)의 장이 되어버린다. 비록 혁명가들은 정의와 자유를 실현한다고 했지만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왔다. 여기서 기독교인의 정치윤리는 현존하는 모든 것에 대한 의심과 부정의 시선에서 움직인다.
비판적 초월로서 '하나님의 혁명'은 여타의 혁명적인 이데올로기뿐만 아니라 체제 옹호적인 보수적인 견해를 단죄한다. 바르트의 견해에 따르면 교회와 국가, 법과 사회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유하는 자들은 부르주아들이다(롬2.477). 이들은 자신들의 권력, 소유, 출세를 향유하기 위해 생존투쟁을 전개한다. 이것은 적어도 "위로부터 시작되는 계급투쟁"의 측면을 말한다(롬2.433). 위로부터 행해지는 계급투쟁의 상황에서 동료인간들은 적이 돼버린다. 이것은 계급의 적대감을 유발하며, 권력과 지성의 이익을 얻어내기 위한 부르주아들의 투쟁이다(롬2. 77). 계급사회는 가난한자들을 위한 인권과 자유와 평화를 창출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혁명을 낳게 하는 사회적 원인이다. 혁명의 탄생은 모든 기존의 질서 속에서 악이 있음을 간파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롬2.480). 혁명가들은 적어도 이러한 악을 근절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람들이며, 새로운 질서와 권리를 수립하려고 한다(480). 그러나 혁명의 결과들을 분석해볼 때 혁명가들은 오히려 보수적인 부르주아들보다 더 위험한 경향을 보인다.
러시아에서 벌어지는 계급사회의 혁명적 전복은 반혁명의 길이 아니라 개혁정치의 길을 고려해야한다. 적어도 바르트에게서 혁명과 개혁은 로자 룩셈부르크처럼 대립적인 관계가 아니라 서로 보완적이다(롬2 .455-475). 혁명과 개혁은 변증법적인 관계에 있다. 아무리 급진적인 혁명일지라도 기존체제를 승인하고 정당화해주는 우를 범할 수 있다. 혁명과 개혁은 하나님의 혁명의 빛에서 조명될 때 그 보수성이나 또는 절대화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 혁명가들은 이제 러시아에서 새로운 권력 엘리트들로 변신해버렸고, 인권과 자유라는 허울좋은 이데올로기로 사회의 독재를 강화한다. 러시아의 혁명에서 여전히 가난한자와 비특권층들은 새로운 권력 엘리트들에게 억압당한다. 여기서 바르트는 러시아혁명을 사회적으로 분석하고 해석하면서, 하나님의 혁명과 종교개혁의 은총론을 결합한다. 하나님의 은총은 혁명적이다. 로마서 1판 주석과는 달리 하나님의 혁명은 우리의 외부에서(extra nos) 그러나 우리에게 저항해서(contra nos) 일어난다. 로마서 주석 1판과는 달리 인간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혁명의 동역자들이 아니다(롬1. 145,151,286). 바르트는 혁명비판을 통해 볼셰비키스트들을 자기반성과 자기비판으로 안내한다. 그들은 보다 많은 사회정의와 민주주의적 평등함을 위해 개혁정치를 진지하게 고려해야한다.
결론적으로 바르트의 로마서주석 1판과 2판에서 드러나는 가난한 자의 해석학은 이후 바르트 전체신학의 중심에 자리하게된다. 하나님문제와 변혁과 사회적 빈곤의 문제는 사회 분석적으로 그리고 동시에 해석학적으로 통합되어 나타난다. 바르트의 로마서주석 2판은 일약 바르트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문제는 로마서 주석1판과의 관련에서 읽혀지지 않았다. 하나님의 절대성, 위기, 개인의 실존등의 개념들이 바르트의 신학을 19세기 신학으로부터 갈라놓는 소위 변증법적 신학으로 파악하게 했다. 바르트는 자펜빌에서 여전히 정치 사회적 투쟁에 관여하고 있었고, 러시아의 혁명상황에 주목하고 있었다. 신학적으로 바르트는 가난한 자를 위한 정치실천과 그 해석학적 토대를 위해 씨름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르트를 괴팅엔의 대학교수의 길로 가게 한다. 그는 신학의 해방적 실천과 교의학적 진술에 대한 사회 해석학적 접근을 통해 교회 교의학의 정치적 길을 예비하고 있었다.
3.1. 바르트의 비신화화론?
주지하는 대로 불트만의 실존론적 해석학은 특히 성서의 신화적 세계상을 어떻게 현대의 사고에 이해시킬 것인가 하는 데로 초점이 맞춰진다. 모든 성서는 신화적 세계상에 기초되어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십자가 사건, 부활, 심판, 새 하늘과 새 땅의 모티브들은 영지주의적 구속신화와 후기 유대교적 묵시문학의 동시대적 신화론에 연관되어 있다. 더 이상 현대인은 신, 천사, 사탄이라는 삼층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종말 때의 재난, 죽은 자의 부활 등과 같은 영지주의적 구속신화나 후기 유대교적 묵시문학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
불트만에 의하면 신화의 본래적 의미란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세계상을 제시한다기보다는 세계에 대한 인간의 자기이해 다시 말해 신화는 우주론적이 아니라 실존론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신화 안에 어떤 실존이해가 표현되어있는가를 묻는 것이 중요하다. 이미 신약성서 안에 우주론적 표상과 실존론적 표상들이 혼합되어 있다. 그러므로 비신화화론에서 중요한 것은 신화의 제거가 아니라 신화에 대한 실존론적 이해이다. 이 실존론적 해석을 위해 불트만은 사실적인 것(Historisch)과 역사적인 것(Geschichtlich)을 구별한다. 불트만은 예수의 구속사건이 지니는 사실성을 신화론적 표상으로, 역사성을 실존론적 의미성으로 파악한다. 신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역사하셨다는 구속사건은 사실적인 의미에서 객관적으로 확정될 수 있는 그런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이것은 신화론적으로 기술되어 있기 때문에 신의 종말론적 사건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불트만의 실존론적 해석에서 십자가와 부활사건은 그 객관적인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실존의 의미를 개방하는 종말론적 사건이다. 이 종말은 역사의 종말이 아니라 매순간 결단하는 실존의 종말성을 말한다.
불트만의 비신화이론은 리케르나 엘리아데(M. Eliade)또는 융(K. Jung)등의 신화연구와 비교해볼 때 정반대의 방향이 드러난다. 신화란 헤겔적인 의미에서 개념으로부터 표상을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표상과 실재의 일치를 고대적 존재론 자체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 불트만의 비신화작업은 신화의 해석이라기보다는 신화론적 사고에 대한 비판으로 환원되며, 그 비판기준은 합리주의적 실존론적 개념이다. 비신화화의 문제로서 신화와 문화, 말씀과 예배의 관련성은 불트만에게서 결코 통전적인 부분으로 취급되지 않는다.
불트만의 비신화화 프로그램을 주목하면서 바르트는 불트만과는 다른 비신화화의 작업을 수행한다. 불트만이 신화의 문제를 실존론적 해석학으로 이끌어가지만, 바르트는 신화의 문제가 신학적으로 특수한 영역에 속하는 것이며 단순히 실존론적인 방법으로 다룰 수 없음을 본다. 불트만은 종교사적인 연구에 의거해 비 세상적인것, 신적인 것이 세상적인 것으로, 또는 인간적인 것으로 그런가하면 저 세상적인 것이 이 세상적인 것으로 나타내는 표상방식(Vorstellungsweise)을 신화론적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현대적인 의미에서 신화를 이데올로기의 관점에서 고려하지는 않는다.
칼 바르트의 로마서주석(1판/2판)은 종래의 자유주의 신학의 방향과는 전혀 다른 해석학적 문제를 보여준다. 물론 바르트는 역사비판적 방법자체를 포기하지는 않지만, 이 해석의 방법을 상대화시키고 성서본문의 고유한 이해를 위한 예비단계로 파악한다. 바르트 자신은 비록 해석학적 문제를 본격적으로 취급하지는 않지만, 교의학의 내용적 전개를 통해 실존론적 해석학의 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본다. 바르트는 신학이 일반 이해론에 의존되는 것을 비판적으로 다루었고, 오히려 해석학 일반은 계시의 증언으로서 성서를 통해 배울 수 있어야함을 역설한다(KDI/2, 515). 로마서주석 2판이 실존론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다면, 1판은 사회 문화적 의미를 갖는다. 불트만은 바르트의 로마서주석 2판을 중요하게 취급했지만, 그러나 실존주의를 넘어서는 로마서주석 1판의 사회집단적 개념들은 불트만에게는 낯 설은 것이었으며, 그의 실존론적 해석학에는 수용될 수 없는 것이었다. 로마서주석 1판의 사회적 개념들과 언어들은 이미 바르트의 사회적 실존의 전이해 속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교의학적 차원으로 전개된다. 두 개의 로마서 주석은 이러한 신화적 현상들에 대한 신학적 분석으로 볼 수 있다.
앞서 살펴본 대로 로마서주석 1판에서 바르트는 사회 정치적 실천에 접근하는 신학적 해석학을 '하나님의 혁명'의 개념으로 독해한다. 자유주의 신학의 실패는 역사적 우연이라기보다는 그 신학의 본질 때문이다. 자유주의신학의 인간학적 의도를 바르트는 인간의 우상을 만들어내는 신화론적 사고에서(롬1.18) 그리고 하나님을 인간의 이해관계에 묶어버리는 시도에서 본다. 자유주의에 대한 신학적 비판을 통해 바르트가 의도하는 것은 동시에 자유주의가 근거하고 있는 부르주아와 정치와 이데올로기비판을 포함한다. 이 비판은 특히 자본주의, 국가, 군국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분명해진다. 자본주의, 국가, 군국주의비판은 우상을 만들어 내는 인간의 신화론적 사고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비판의 계기를 포함한다. 더욱이 자본주의 비판은 후기 바르트에게서 특히 중요한 지점을 갖는데, 교회 교의학 III/4에서 자본주의 경제질서에 대한 분석과 비판에서 잘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바르트의 역사-비판방법에 대한 비판을 이해 할 수 있다. 여기서 로마서주석 1판의 유명한 선언, "내가 보기에 역사- 비판방법은 보다 더 비판적이라야 한다"는 의미를 이해하게 된다. 바르트의 역사개념은 관념론적이거나 개인주의에 함몰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경제적 영역을 통해 드러나는 역동적인 유물론적인 역사개념을 견지한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갖는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원하기 때문에 갖는다(롬1, 11). 종교적 인간은 신과의 관계를 성취하며 산다기보다는 '신적인 것에 대한 영원한 동경'(롬I, 12)속에서 살아간다. 왜냐하면 신을 추구하는 인간은 신의 저 세상성, 처분할 수 없음에 부딪치기 때문이다. 트렐취(E. Troeltsch)의 종교적 아프리오리(reigiose Apriori)는 바르트에 의해 부인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종교분석의 출발로 인정된다. 신에 대한 인간의 종교적 관계에서 종교가 생겨난다. 인간은 신과 진리를 알지만 그것이 현실적으로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인간은 신을 자신의 인격으로 연관시키며, 신에 관한 생각은 자신에 관한 생각으로 대체해버린다. 이러한 불의한 행동에서 인간의 교만이 생겨나며 여기서 인간은 스스로 신으로 고양된다. 인간 스스로가 신이 됨으로써 그의 주인 없는 세계는 우상들로 가득 차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신과 실존적 관계를 맺는 종교적 과정이 발생한다. 이것이 신으로부터 도피에 대한 실존적 이해이며 그 자체상 모든 신화론의 원천이 된다. 바르트의 비신화론은 이러한 우상의 폭로에 있다.
4. 그리스도와 종교다원주의
제2 바티칸 공의회를 거치면서 칼 라너의 '익명의 그리스도인'은 비판과 수용을 통해 로마 카톨릭의 진영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물론 이에 대한 저항으로 파니카나 피에리스는 '익명의 기독교'를 말하는 자들은 '익명의 힌두교', '익명의 불교'를 함께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비판한다. 그런가하면 판넨베르크는 틸리히의 문제의식을 수용하면서, 종교현상학과 역사의 문제를 자신의 종교신학의 중요한 과제로 설정하기 시작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하나님의 미래에 연관된 사건이며, 하나님의 보편적 활동은 타종교와 문화에서 언제든지 만날 수가 있다. 죤 캅(John Cobb)이 종교다원주의 시대에서 그리스도론(Christ in a Pluralistic Age)의 문제를 고려하고 있을 때, '예수=그리스도'의 등식을 넘어서는 '그리스도 > 예수'의 문제의식은 그에게 배타주의와 상대주의를 넘어서게 하는 중요한 사고로 등장한다. 특히 역사적 예수의 육체성의 외부에 존재하는 로고스의 씨앗은 타종교와 문화에서 발견된다. 70년대 들어오면서 세계교회협의회의 공식적인 주장인 '우주적 그리스도론'(The cosmic Christ)은 인도의 신학자들 예를 들어 토마스(M. M. Thomas)나 사마르타나에게 특히 종교다원주의 상황을 고려하면서 수용되기 시작했다. 70년대 이후 세계교회협의회가 제시한 '우주적 그리스도론'이 여전히 역사적 예수의 절대적인 규범에 매여있다면- 대표적으로 몰트만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The Crucified God)이후 유럽의 신학계에서 호평을 받았던 '예수 그리스도의 길'(Der Weg Jesus Christi)에서 우주적 그리스도론을 제시하는데, 전형적으로 이러한 입장을 대변한다- 토마스(N. M. Thomas)는 바르트의 계시를 통한 종교비판을 탁월한 신학의 통찰로 받아들이면서, 계시를 동시에 종교로서의 기독교에 대립시켜나갔다. 니터는 이러한 입장을 바르트에 대한 왜곡으로 설명하지만 바르트를 왜곡하는 것은 니터 자신의 바르트 해석처럼 보인다.
사마르타는 우주적 그리스도론이 예수 그리스도 중심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타종교에 여전히 로고스로서의 그리스도가 있음을 간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그리스도론적 중심은 신 중심을 향해 일종의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과 혁명을 맞이하기 시작한다. 힉(J. Hick)은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과의 삼위일체론적인 등식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긴 하지만, 완전한 하나님일 수가 없다. 통전자로서의 하나님은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구원의 매개자들은 그가 예수든 부처든 마호멧이든 절대 초월적인 하나님 앞에서 급진적으로 상대화될 수밖에 없다. 힉이나 또는 신 중심적인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을 시도하는 종교신학자들 안에서 영성신학의 전통적인 흐름인 부정의 신학(Aphophatic Theology)의 새로운 수용을 보게 된다.
그러나 파니카는 이러한 힉의 무차별한 상대주의와 하나님의 보편성으로 모든 종교를 통합하려는 시도를 은폐된 제국주의적 사고의 연장으로 비판한다. 종교는 서로 다르다. 서로 다름의 불가공약성(Incommensurability)은 포스트모던주의의 핵심적인 사유에 속하는데, 이것은 동시에 근대성의 기획에 사로 잡혀있는 종교신학의 논리에 하나의 비판으로 제시된다. 적어도 파니카에 의하면 익명의 그리스도론은 익명의 제국주의를 암시할 수밖에 없다. 파니카의 신인일치적 (Theandric)관계는- 동방교회교부들의 구원론의 핵심인 신화(Theosis)의 새로운 표현으로 제시되는데- 하나님과 인간과 우주를 통전적으로 포함하면서, 힌두교 안에 알려지지 않는 "미지의 그리스도"(Unknown Christ)를 향해 개방한다. 힌두교에 대한 파니카의 탁월한 그리스도론적 해석은 힉이나 폴 니터의 보편적 우주신학과는 달리 각각의 종교의 다름을 보존하면서 동시에 삼위일체 신학 속에 있는 성부 하나님의 근원성과, 성자와 성령을 앞서가는 성부 하나님의 부정적 측면(Darkness of Godhead),(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을 불교와 힌두교와의 대화 속에서 심화시켜 나간다. 하나님은 많은 이름을 가질 필요가 없다. 여기서 기독교에 대한 나의 신앙고백은 상대화되거나 무력화되지 않는다. 개인의 영적이며 고백적인 기독교의 이해(christic understanding)는 오히려 불교나 힌두교 속에 있는 미지의 그리스도이해를 통해 더욱 깊게 강화되거나 변혁될 수가 있다.
종교다원주의 상황 속에서 지금까지 바르트의 신학은 계시실증주의의 깃발아래 여타의 타종교에 대한 배타적 거절로 이해되어왔다. 그러나 토마스가 통찰한 것처럼 바르트에게서 계시는 종교와 불가공약성을 갖는다. 계시와 종교는 근본적으로 서로 다르다. 그리고 이 계시는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넘어서 있다. 적어도 바르트는 타자를 통합하거나 기독교의 깃발아래 모든 종교를 끌어 모으려는 여타의 종교 제국주의적 발상을 끊임없이 경고하고 있었다. 파니카처럼 바르트의 관심은 문화현상으로서의 기독교(Christendom)나 종교적인 기독교(Christianity)보다는 그리스도와 나와의 만남이라는 경험적 의식(christic consciousness)이 대화와 증언에 중요하다. 기독교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Der Name Jesus Christi)의 현실 안에서 타종교와 마찬가지로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특히 이러한 태도는 그가 유대교의 문제를 다루는데서 명쾌하게 드러난다. 유대교와의 만남에서 개종은 불필요하다. 역사적 예수가 없는 유대교는 자체상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의 약속에 서있는 백성들이다. 그렇다면 타종교에 서있는 사람들에게 기독교와 유대교와의 대화는 역사적 예수를 어떻게 넘어설 수 있는가 하는 중요한 패러다임을 제공할 수 있다.
4.1. 바르트의 종교다원주의
바르트는 후기 교회교의학의 화해론에서 로마서주석에서 나타나는 해석학과 사회분석의 통합개념인 하나님의 혁명론을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의 현실 안에 보다 깊이 있게 해석학적으로 독해한다. 바르트 자신이 1956년 강연에서 시인하듯이 자신의 초기적 관심을 붙들고 있었던 전적 타자로서의 하나님은 너무 지나치게 절대화됐고, 추상화되었으며, 그의 하나님이해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보다는 철학의 초월적 하나님에 보다 더 근접하지 않았었는지 우려한다. 하나님의 신성을 말하는 것은 그의 인간성을 말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인간성을 말하는 것은 기독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의 화해론적 회복은 하나님과 인간의 '자리바꿈' (Austausch)에서 발생한다. 고후 5:18-21에 의해 이러한 '자리바꿈'은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받아들였으며, 죄인과 완전한 연대를 이루었다는 데 근거한다. (IV/1. 72-73) 자리바꿈의 또 다른 측면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담당했다는 의미에서 이제 인간은 하나님과 의로운 관계에 놓여졌다는데 근거한다. 인간의 세계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에게 방향전환 되었다(IV/1.,76). 바르트는 이러한 '자리바꿈'의 역동성과 하나님과 인간, 세계와의 파트너쉽의 관계를 세가지 주제 아래서 다루어 나간다: 1)종으로서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IV/1, 157-642) 2)주님으로서 종이신 예수 그리스도(IV/2,3-613) 3)참된 증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IV/3.1, IV/3.2, 481-680).
종이 되신 그리스도에 관한 신학적 언급에서 인간의 죄악된 세상에 나갔던 하나님의 여정을 설명하기 위해 탕자의 비유를 은유로 사용한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인류를 위해 순종의 길을 취했다. 이 순종의 길은 신약성서의 표현을 빌어 "자기를 비우심" "종이 되심"(빌 2:7), "겸허하심" "십자가에 달리심"(빌2:8), "고난"(히 5:8)등으로 표현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의 수납은 스스로 하나님의 진노아래 서 있는 죄인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르트에 의하면 이것은 '그리스도의 신성'이다. 이 그리스도의 신성은 아들의 순종이며 겸허를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전히 주권적인 하나님으로 계신다. 이런 관점에서 바르트는 "성부의 수난설"로 인도할 수 있는 케노시스(kenosis) 기독론을 승인하지 않는다. 바르트의 표현을 빌면 하나님은 스스로에 대항하여 존재하셨다(Gott gegen Gott),(IV/I184). 여기서 우리는 바르트에게 미친 루터의 십자가신학을 만나게된다.
인간의 죄를 담당한 하나님의 겸허를 다루는데 비해 주님으로서 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항목에서 바르트는 하나님과 참된 관계로 고양된 인간을 다룬다. 예수 그리스도가 화해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모델이라면 그는 또한 화해된 인간에 대한 모델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인간성'과 더불어 '인간의 인간성'이 매우 역동적으로 다루어진다. 하나님과 인간의 계약의 갱신과 회복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낮아지심(exinanitio)과 인간의 고양됨(exaltatio)이라는 '자리바꿈'에서 가능하다(IV/2,21).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일어난 인성과 신성의 역동적 연합은 칼케돈 신조에서 드러나는 알렉산드리아 신학의 과도함에 대해 자기방어를 한다. 이 연합은 모든 인간의 본질과 모든 인간성에 영향을 미친다. 그런가하면 안디옥학파의 신학에 대항하여 바르트는 인간본질의 어떠한 요소도 이러한 연합에서 배제되거나 영향을 벗어날 수가 없다고 밝힌다. 인간성의 고양(Exaltation)은 인간성의 파괴나 변경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심지어 우리와 같이 되었다는 점에서도 여전히 우리와는 여전히 다른 차원을 말한다. 여기서 바르트는 기독론적인 anhypostasis와 인간학적 enhypostasis를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역동적인 사랑의 행동으로 파악하길 원한다. Enhypostasis-Anhypostasis를 근거로 하는 바르트의 해석학적 입장은 그의 신학을 둘러싼 격렬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바르트의 신학적 문화해석학에 접근할 때 중요한 것은 그의 기독론적 포괄주의를 구성하는 교의학적 이해이다. 루터파와 개혁파들의 성찬 논쟁에서 두드러지게 등장했던 속성의 교류(communicatio Idiomatum)와 급진적인 칼빈주의 교리(Extra Calvinisticum)에서 루터파들은 그리스도의 인간성이 그리스도의 신성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인간적 고난에 그리스도의 신성이 직접적으로 참여한다고 보았다. 물론 이것은 루터의 십자가 신학에 근거되어 있으며, 그리스도의 편재설을 옹호한다. 그러나 개혁파들은 그리스도의 인간성과 신적 주권성은 간접적으로만 관계되며, 그리스도의 신성은 그리스도의 인간적 고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늘에 무한하고 영원하게 주권적으로 머문다고 본다. 성찬이해를 둘러싼 논쟁에서 루터파들은 실재적 임재(Real Presence)를 편재설에 근거하여 주장했지만, 개혁파들은 그리스도의 신적 주권성을 근거로 성찬에 임재하는 그리스도의 실재적 임재를 영적 임재 내지 기념설로 받아들인다.
마르크바르트는 "신학과 사회주의"(Theologie und Sozialismus)에서 "육체의 수납과 유적(類的)인간"을 다루면서 바르트의 기독론적 해석학 (Enhypostasis-Anhypostasis)을 자연신학의 관점에서 재해석한다. 물론 그의 주장은 바르트 학자들에 의해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지만, 그의 논지는 다음처럼 요약될 수 있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가 지닌 인간본성의 존재(enhypostasis)를 통해 모든 인류가 예수 그리스도안에 수납되고 있음을 밝히고, 이것을 통해 확장되고 완성된다고 본다. 간단히 말하면 유적 존재(Gattungswesen)로서 집단적인 인류는 예수 그리스도의 화육된 말씀의 인간성안에 그 존재양식(enhypostasis)을 갖는다. 여기서 Extra Calvinisticum(유한은 무한을 포용할 수 없다)에 대한 바르트의 해석은 히틀러 투쟁기간동안에 완고하게 계시중심주의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인 동기로 사용된 신학의 개념인데, 역설적으로 마르크바르트는 이 교의학적 개념을 인류를 향한 기독론적 포괄주의로 해석한다. 그리스도의 신성이 계시신학을 가능하게 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보편적 인간성은 자연신학의 내용에 의미를 부여한다. 영원한 말씀의 화육은 바르트에게서 단순히 역사적 인물인 예수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을 포함한다. 사실 이러한 도발적인 기독론적 주장은 바르트 제자들을 좌파와 우파로 나누어 놓았고, 좌파들의 시도는 바르트를 유대교와의 대화속에서 그런가하면 종교다원주의와의 대화를 위해 바르트를 여전히 중요한 전거점으로 파악한다. 그러나 좌파들의 해석의 최대의 난점은 바르트의 신학을 삼위일체론적으로 전개하지 못한다는데 있다. 에버하르트 융엘(E. J ngel)은 헤르베르트 브라운(H. Braun)과 논쟁을 벌였던 골비처의 입장이 지나치게 유신론적인 잔재를 극복하지 못했고,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적인 하나님 이해를 간과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골비처는 마르크바르트를 옹호하면서 쓴 서문에서 바르트의 삼위일체신학은 스콜라주의적이거나 단지 계시 중심적으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 사회적인 실천과의 연관성에서 하나님의 혁명론으로 독해되어야 한다고 응수한다. 그런가하면 미국의 신학계에서 몰트만의 제자인 헌싱거(G. Hunsinger)는 마르크바르트의 논쟁을 소개 한 적이 있다. 그러나 헌싱거는 마르크바르트에 대해 감정적으로 편향된 헤르만 디엠의 비판점을 지지한다. 최근에 들어 북미의 신학계에서 이 논쟁에 대한 보다 학문적인 평가는 골비처 문하에서 교수논문을 쓴 훗(Robert Hood)인데, 그의 책을 통해 미국에서 바르트의 좌파적 해석과 종교다원주의와의 연관성이 활기차게 토론되고 있다. 이 논쟁을 위해 다소간의 교의학적인 부연설명이 필요하겠다.
칼케톤 신조의 기독론(참된 하나님, 참된 인간)을 변호하기 위해 비잔틴의 레온티우스(Leontius of Byzantium)는 안디옥 학파의 수장격인 네스토리우스를 정죄했던 알렉산드리아의 시릴 (Cyril of Alexandria)의 입장을 지지하면서, 가현설(Docetism)과 에비온주의(Ebionitism)의 양극단을 피해가기 위해 두가지 용어(anhypostasis와 enhypostasis)를 사용했다. 그에 의하면 예수그리스도의 인간성(Enhypostasis of Jesus Christ)은 (영원한 말씀인 로고스로서) 그분의 신성에 독립하여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인간성은 영원한 말씀인 로고스에서만 존재하는데, 만일 그리스도의 인간성이 영원하신 말씀과의 일치 에서 존재하는 한, 그것은 동시에 참된 인간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가현설과 에비온주의는 설자리가 없다. 왜냐하면 영원한 말씀의 신성과 떨어진 채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그리스도의 인간성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에비온주의). 그런가하면 그리스도의 인간성과 떨어진 채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그리스도의 신성도 불가능하다(가현론). 그러므로 (영원한 신성)안에 거하는 존재로서 그리스도의 인간성(Enhypostasis)은 이와는 다른 존재의 유형을 갖지 않는다 (anhypostasis). 참된 하나님, 참된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칼케톤의 규정을 레온티우스는 그리스도의 신성에 우위성을 주면서(이것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전형적인 방법이다), 안디옥 학파의 강조점인 예수의 인간적 본성을 수용한다.
바르트에게 미친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영향은 그의 복잡한 기독론과 삼위일체이해를 둘러싸고 잘 드러난다. 바르트는 초기에 예수의 인간성 외부에 존재하는 그리스도론(Logos Asarkos)에 몰두한 적이 있었다. 다시 말해 영원한 로고스는 역사적인 한 개인 나사렛 예수에게 한정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고난의 십자가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의 의미는 어떻게 받아들여져야 하는가? 적어도 바르트는 히틀러와의 투쟁을 거치면서 Extra Calvinisticum을 육체 외부에 존재하는 그리스도론에 연결시킴으로써 개혁교회의 입장을 넘어서 사고한 적이 있다, 이것이 마르크바르트로 하여금 바르트가 계시신학 안에서 자연신학의 가능성을 개방했다고 해석하게 한다. 그러나 마르크바르트 해석의 문제는 두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그는 바르트의 십자가 신학의 성격을 오해한다. 적어도 바르트의 십자가의 신학은 루터 이후 하나님의 고통의 문제(God's passibility)를 기타모리- 기타모리는 하나님의 고통의 신학을 전후 일본의 상황에서 토착화 시킨 적이 있다- 나 몰트만에 앞서 매우 진지하게 취급했다. 여기서 바르트는 개혁교리인 Extra Calvinisticum이 아니라, 루터의 속성의 교리를(Communicatio Idiomatum) 하나님의 활동의 교류(Communicatio operationis)의 관점에서 역동화 시킨다. 적어도 바르트가 보기에 칼케톤 신조의 두 본성의 기독론은 여전히 예수의 인간성과 신성의 교류를 추상적으로(communicatio indiomatum in abstracto) 파악하며 가현론의 위험을 피해갈 수 가 없다. 예수의 인간성이 이미 그리스도의 신성과 구체적으로 연합되고 교류된다면 인간성을 자체 안에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을 삼위일체적으로 말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Extra Calvinisticum은 인간성을 내재적으로 수용하시는 하나님이해에 부적합하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둘째로 마르크바르트는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을 피해갈 수밖에 없었다. 바르트는 후기에 들어오면서 마르크바르트가 강조하는 것처럼 육체의 외부에 존재하는 그리스도론을 일관성 있게 견지한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론적으로, 그리고 성령론적으로 통합한다. 예수의 인간성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어떤 연관을 갖는가? 인간 예수는 내적 삼위일체의 관계 속에 이미 포함된다. 내재적으로 성부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인류를 위해 선택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은 경륜적인 의미에서 역사적인 계시사건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포함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인류를 향한 보편적인 선택을 말한다. 이런 점에서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은 초기 교회 교의학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은 주님으로서 자신을 계시했다"는데 한정되지 않는다.
몰트만은 성급하게 여기에 초점을 맞춰 바르트에 대한 비판을 시도한다. 몰트만에 의하면 하나님이 자신을 주님으로 계시할 경우,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삼위일체론적 이해가 아니라 군주론적인 이해에 불과하게 되며, 더욱이 한 하나님이 세 가지 존재양식(Seinswesise)을 통해 '자기반복'으로 드러날 경우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은 필연적으로 양태론(Modalism)이나 사벨리안주의로 막을 내리게 된다. 이것은 칼 라너의 세 가지 본질방식 (distict manner of subsisting)에 대해서도 무차별하게 적용된다. 몰트만은 자신의 사회적 삼위일체론을 위해 동방교회의 교부인 요한의 다마스커스에게서 차용한 페레코레시스(Perechoresis)를 역사적으로, 종말론적으로 전개함으로써 삼위일체의 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본다. 몰트만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인류를 위한 구원론적인 맥락에서가 아니라(물론 구원론적인 맥락을 무시하지는 않지만),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연관에서 다룬 적이 있다. 그러나 칼 라너의 삼위일체의 유명한 규칙- 내재적 하나님은 경륜적 하나님이며, 그 역도 마찬가지다- 을 받아들임으로써, 몰트만은 우주와 세계와 인류의 인간성을 포함하는 내재적 하나님의 삼위일체론을 바르트처럼 전개하지 못했다. 결국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에 대한 구상은 동방교회의 교부로부터 빌려온 삼위의 개념- 몰트만은 이 개념을 Person으로 과감하게 사용한다- 을 공동체적인 친교와 사귐, 그리고 사랑으로 해석함으로써, 삼위-일체(Tri-Unity)의 하나님의 사회성과 인간의 사회적 공동체와의 연관성을 역사적으로 그리고 종말론적으로 전개한다. 그러므로 몰트만은 칼 라너의 익명의 그리스도론을 하이데거의 영향 아래, 타종교의 진리주장과 문화를 유럽중심의 존재론으로 함몰시키려는 부르주아 이론으로 비판했지만, 자기자신 역시도 삼위일체론에서 타자를 위한 해석학적인 이해나 개방을 봉쇄한다. 왜냐하면 몰트만은 하나님의 '고통받을 수 없음'(Aparteia)만 제외하고는, 희랍의 존재 철학에 함몰되어있던 교부들의 전통을 충실히 답습하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말해 그의 삼위일체론은 몰트만이 그토록 주장하고 싶은 것처럼 타문화와 종교를 향해 열려있는 '개방의 삼위일체론'(Open Trinity))이 아니라 구원에 관한 역사적 예수중심을 심화하는 자기 폐쇄적인 전통의 삼위일체론의 연장에 불과하다.
4.2. 삼위일체와 종교다원주의
바르트는 주권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강조와 켄터버리 안셀름을 근거로 "하나님의 영원한 자기 반복"을 그의 신론에서 다음과 같이 수정한다. 즉 하나님은 "자유 안에서 사랑하는" 존재(God who loves in freedom)이다. 이 하나님의 존재는 '만유 안에서 모든 것을 변혁하시는 하나님'의 행동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그런가 하면 바르트는 레온티우스의 입장을 수용하면서 화육은 항상 역사적 예수 이전에 '선재하는 영원하신 말씀의 화육'이며, 화육하신 말씀은 인간이 된(Enhypostasis)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임을 말한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인간으로서의 예수는 항상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었다(anhypostasis). 그러므로 화육은 한 개인 예수의 인간성에 국한되기 전에 내재적으로 전 인류를 향해 개방된다. 삼위일체 안에 선재적으로 수용된 인간성은 한 개인의 육체가 아니라 부정의와 불의 속에서 고통받는 인간의 인간성을 말한다. 이것이 바르트가 십자가의 신학을 진지하게 고려하는 이유이다. 하나님의 존재는 처음부터 인간성을 수납함으로써 인류와 우주의 고통과 내재적으로 연대하는 '사랑 가운데 고통받으시는 하나님'이셨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인간성'과 '인간의 인간성'을 해석학적으로 중재함으로써 기독교의 타자의 성숙성을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바르트 신학의 깊은 통찰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인간성안에 인류의 집단적인 인간성이 포함되어있다면, 육체의 수납은 마르크바르트처럼 Extra Calvisticum과 육체외부에 존재하는 그리스도론과의 연관에서 다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타종교와 타문화를 위해 이미 선재적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의 내재적 삼위일체론에서 파악되어야한다. 만일 타키자와가 그의 "신인간학적인 일치"를 바르트의 삼위일체론과 십자가 신학에서 추구했다면 선불교와의 대화는 불교의 가장 핵심적인 통찰에 속하는 우주적인 두카(dukkhar)와- 여기서 불교의 두카는 우주적인 고난의 맥락을 갖는다- 만나게 되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다키자와는 기타모리의 "하나님의 고통신학"에 심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일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바르트에게서 역사적인 예수 안에 드러난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기계시는 상대화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많은 이름을 가질 필요도 없으며(힉), 그렇다고 해서 많은 구원의 중개자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파니카).
유적본질로서 집단적 인간존재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삼위일체론적으로 관련되어 있다면, 바르트의 보편주의(Universalismus)는 구체적인 역사 사회적 차원을 향해 개방할 뿐 만 아니라 자연과 문화 그리고 타종교들을 향해 역사적 예수에 한정되지 않는 삼위일체론적인 보편신학을 개방한다. 그러나 이 보편성은 근대성의 보편적 이성을 지지하지 않고, 고난의 특수성을 지지한다. 적어도 기독교의 거대담론은 근본적으로 '적은 이야기'를 통해 표현되어야 한다. 인류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안에 관련되어있다는 Enhypostasis에 대한 바르트의 입장은 한 인간 개인이 아니라(homo), 인간성에 육체를 수용했다는 그의 주장에서 잘 드러난다. 화육 하신 분은 역사적인 한 인물 예수의 특수성과 유일성을 구체화 할 뿐 만 아니라, 이것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말씀은 인류의 인간성을 이미 수납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인류의 고통의 문제를 진지하게 취급하는 이데올로기나, 타종교의 진리 속에서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만나게 된다. 초기로마서주석에서 가난한자의 해석학은 후기에 이르러 삼위일체론적인 전개 속에서 타종교와 문화를 향해 심화되고 확장된다.
여기서 예수는 인류 안에 드러난 하나님의 화육에 대한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자들에게 절대적인 구원과 진리의 가치를 갖는다. 그러나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는 고난받는 인류의 인간성을 자신의 존재 안에 포함으로써, 계시는 더 이상 역사적 예수의 계시의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화해의 한 부분이 된다. 다시 말해 인류와의 화해 속에서 이제 더 이상 하나님과 낯 설은 존재와 영역은 없게 된다. 설령 그 영역이 아무리 악한 기원을 갖는다고 할지라도, 때론 그것이 무신론적이며 반(anti) 기독교적인 형식을 갖는다고 해도, 내재적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화해된 인류의 인간성은 역사적인 예수의 계시 사건을 통해- 적어도 기독교인에게는- 그리고 이것을 넘어서서 모든 타종교와 문화의 종교성안에 수납되고 화육 된다.
여기서- 마르크바르트의 좌파적 해석의 운명이 달려있는- 바르트의 자연신학의 기독론은- 바르트가 그토록 강조했던 내재적 삼위일체론적으로(God beforehand in himself)- 타 종교와 문화, 그리고 역사 사회적 현실을 변혁하는 하나님의 행동과 더불어 이 세계의 고통의 문제를 진지하게 취급할 때 한층 더 의미가 있게 된다. 적어도 삼위일체론에서 종교다원주의를 향한 바르트의 문화 해석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편적 인간성을- 단순한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넘어서서- 확정하려고 한다. 모든 인류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간성안에 존재- 인격적으로(anhypostically and enhypostatically, CD IV/2,60)연계 된다는 바르트의 주장은 전통적인 기독론이 갖는 서구 문화 우월주의나 배타주의적인 은폐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존재를 타종교와 문화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성의 고난의 문제를 향해 확장하고 심화시키는 탁월한 시도로 볼 수 있다.
바르트는 동방교회의 신화론(Theosis)에 중요한 근거가 되는 이레니우스의 명제,-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인간이 되셨다"- 를 다음처럼 받아들이면서 수정한다. "인간이 하나님에게 다가가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인간이 되셨다"(IV/2.106). 이것은 바르트적인 의미에서 '밑에서 위를 향한'(unten nach oben) 기독론적 표현이며, 영성의 표현이다. 그리스교부들에게서 발견되는 구원론의 핵심개념인 신화는 신학의 영성을 명료하게 밝혀준다. 종교개혁의 의인론의 지나친 법정론적 주장 때문에, 신화의 역동성과 영성의 깊이는 종교개혁신학의 전통에서 종종 간과되거나 오해되었다. 그러나 바르트는 여기서 하나님처럼 되어 가는 과정을 동방교회처럼 단순히 개인적인 측면에서 고찰하지 않고, 정치사회적으로 그리고 종말론적 지평에서 하나님의 화해를 향해 움직여나가는 인간의 해방의 실천으로 파악한다. 하나님이 고통받으시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처럼 고양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 세계의 고난의 현실 가운데 연대하시는 하나님의 고통에 대한 예언자적인 제자직을 의미한다. 그의 해석학적 모티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에 대한 인간의 자기실존이해보다는 바르트가 서 있었던 정치사회적 현실의 전 이해에 있고,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밑으로부터의 인간학적-영성적(Anthropologisch-spiritual)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바르트는 예수의 삶과 사역을 칼빈의 삼중 직분론에 근거해서 기술한다. 왕의 직무는 왕적 인간(the royal man)에서, 제사장의 직무는 '종 되심'이라는 항목에서 그리고 예언자적 직무는 참된 증언자라는 항목에서 다룬다. 무엇보다도 바르트는 제사장직무와 왕적 직무에서 정치사회적 연관성을 다루고 난 후 예언자적 직무에서 일반계시와 특수계시를 진지하게 다룬다(IV.3.1.12).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은 '생명의 빛'이라는 관점에서 다루어진다.
바르트는 예수그리스도의 사역과 예언자의 사역을 비교 검토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계의 빛으로 동일시한다. 물론 그는 이러한 주장이 새로운 빛들을 제공해줄 수 있는 타종교들의 영역에 대해 너무 제한적인 것임을 인정한다. 더욱이 도덕적으로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간의 의사소통을 단절할 수 있으며, 정치적으로 볼 때 이러한 주장은 비관용으로 흐를 수도 있으며, 다른 종교적 견해와 양심의 문제를 다룰 때 문제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바르트가 이 주장을 하는 것은 기독교의 승리주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론과 타종교의 불가공약성 때문에 그러하다. 다른 것은 다른 것이다. 계시와 종교는 서로 다르다. 이 불가공약성은 종교신학자들처럼 상대화되거나 폐기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각자 자기신앙에 대한 성숙한 고백을 가지지 않는 사람과는 서로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기독교인이나 비기독교인이든지 상관없이 연대관계에 서 있다(IV/3/1.81). 더 나아가 이 그리스도는 기독교 외부의 타종교에서 그 진리의 빛들을 통해 언제든지 만날 수가 있다.
그러나 바르트의 계시와 종교에 관한 불가공약성은 다른 종교나 문화 속에 주목할 만한 진리의 주장들이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성서나 교회밖에 있는 다른 진리주장이나 종교적 계시들은 오류나 거짓 예언들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유일하신 말씀으로 인정하면서 동시에 종교 다원주의의 사회 속에서 다른 진리주장들을 어떻게 인정할 수 있는가? 바르트의 해석학적 접근은 이들의 진리주장들이 내재적인 삼위일체 하나님의 빛에서 인정될 때 유의미하다. 역사적 예수 없이도 타종교와 문화의 진리주장들은 신인간학적인 일치(Theanthropoogische Einheit)가운데 서 있다. 이 진리 주장 속에서 역사적 예수의 한계를 넘어서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본래적인 임마누엘의 사실- 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다키자와(K. Takizawa)의 해석은 뛰어난 바르트의 해석으로 평가될 수 있다. 다키자와는 일본의 경도학파에서 선불교의 철학에서 자란 사람이었다. 그의 선생인 니시다의 소개로 그는 본(Bonn)에서 바르트의 강의를 들었고, 이후 아시아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바르트의 총애를 받던 제자가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임마누엘의 본래적 사실(Urfatum Immanneul)-에 대한 그의 탁월한 해석은 바르트 신학안에 있는 신일치론적인(theoanthropologisch)관계를 해명할 뿐 만 아니라 선불교의 소쿠(Soku)사상- 신은 언제나 인간과 함께 한다- 과의 종교간의 대화를 가능하게 한다. 다키자와의 이러한 입장은 바르트 좌파들에게 중요하게 수용되었고, 마르크바르트에 의해 집단적인 인류의 인간성을 포함하는 기독론적인 보편주의로 심화되었다. 그러나 다키자와는 모든 이름을 넘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임마누엘의 본래적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묻지 못한다. 여기서 기독교인들에 대한 역사적 예수의 신앙 고백과 그 정치 사회적 중요성은 간과 되어버린다.
종교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세속주의 한 형태로서 하나님과 그 복음을 거절하는 무신적 진리주장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이 세계는 하나님과 화해가 되었기 때문에 세계는 하나님에 의해 거절되는 여타의 세속의 영역을 갖지 않는다(IV/3.1.119). 그런가하면 다른 형식의 세속주의가 있다. 그것은 복음에 의해 질문되도록 자신을 개방하며, 복음과의 상관성에 서 있을 수 있다. 바르트의 주장에 의하면 이러한 형식의 세속주의는 기독교인에 의해 낯 설은 영역이 아니라 복음의 내용을 심화시키고 확장해주는 안내판과 지침으로 간주되어야한다. 이러한 진리주장들은 복음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해석학적으로 제공해줄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세계적 사건들과의 상호연관성을 갖는다. 그리고 교회와 사회적 삶에 중요성을 갖는다. 그러므로 제도화된 교회는 세계의 사건들 속에서 그리고 다른 종교나 문화를 통해 중요한 영적 통찰들과 그 조명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세계는 자체상 자신의 진리의 빛들을 정당하게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IV/3.1.132,139). 인간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증언들은 여전히 살아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 인간의 삶에 유익한 빛으로 해명될 수 있다. 화해의 사역이 창조의 사역을 부정하지 않듯이, 화해는 창조의 빛들과 언어들을 파괴하지 않는다(IV/3/1,139). 하나님의 말씀은 다른 세계의 말씀들과의 관련에서 해방의 기능을 갖는다. 하나님 말씀은 이 세계를 공격해 들어오면서 인간의 죄는 해결되었고, 세계의 미래는 하나님 안에서 실현되었음을 가르쳐준다. 이러한 해방의 기능을 통해 인간은 이 세계 속에서 자유하며, 다른 사람들과의 사랑과 연대 안에 존재하게 된다. 이제 비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성취된 계약 안에서 형제와 자매로서 그리고 화해의 파트너쉽 안에서 이웃동료들로서 이해된다. 이것이 바르트가 의미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양식 안에서 전 인류가 연관되어있다는 내용이며, 기독론적 존재양식(Christological anhypostasis)이 인류학적 존재양식(Anthropological enhypostasis)을 통해 확장되고 완성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독론적 이해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혁명론과 깊은 연관 속에 있는 그의 내재적인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이다. 그러므로 바르트는 여타의 이데올로기나 문화를 기독교화 하는 시도에 혐의를 둔다.
5. 나가는 글
몰트만은 그의 새로운 성령론을 전개하면서 지금까지 무시되어왔던 인간의 경험과 특히 신비주의 문제에 주목한다. 그에 의하면 신학의 영역에서 영성과 경험의 문제를 불구화로 만들어 버린 개혁신학의 딜레마가 바로 바르트에게 출발하고 있음을 진단한다. 예를 들어 신학의 출발점이 바르트처럼 '전적인 타자' (totaliter aliter)로서 하나님에게 있다면 인간과의 질적인 차이 때문에 이 하나님은 인간에게 경험되거나 체험될 수가 없다. 그런가하면 신학의 출발이 슐라이에르마허처럼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절대의존적 감정'에 주어진다면 하나님의 존재의 객관성은 실종 되어버릴 수 있다. 몰트만은 자신의 성령론을 '하나님의 계시와 인간의 경험의 양자택일'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나라와 종말론의 빛에서 새롭게 해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몰트만은 바르트 자신이 서 있던 사회 현실적 상황과 이 상황에 깊숙이 연계된 그의 신학의 해석학적 성격을 종종 오해한다.
흔히 바르트의 경험-실천신학은 이른바 바르트 좌파라로 불려지는 골비처와 마르크바르트 그리고 이들의 후계자들의 노선에서 해명되어왔다. 이들은 특히 바르트의 신학을 그의 정치적 실천과 사회역사적 현실과의 연관시켜 해명했다. 이들의 해석에서 '의심의 대가'로서 포이에르바하와 마르크스는 바르트로 하여금 신학적 진술 속에 숨겨져 있는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폭로하고 해체하도록 고무한다. 바르트 좌파적 해석의 대표급적 신학자인 베를린대학의 마르크바르트 교수는 바르트 전체신학에 미친 사회주의적 영향을 분석하면서 바르트의 초기와 후기의 사상의 연속성을 메워 나간다. 마르크바르트에게서 하나님나라와 사회주의와의 연관성은 해석적 원리에 속한다. 그러나 그의 해석의 문제점들은 바르트의 십자가 신학과 삼위일체론을 간과한데 있다.
그런가하면 좌파적 시도에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융엘의 해석은 바르트 신학에서 나타나는 실천적 개념이나 혁명적 표현들을 하나의 은유(Methaphor)로 파악함으로써 바르트 신학에서 정치적 이론과의 연관성을 배제한다. 이외에도 수 없는 바르트 신학에 대한 해석이 있을 수 있지만 나름대로의 정당성과 비판점을 공유한다. 우리가 여기서 언급하고 싶은 것은 융엘의 바르트 해석이나 골비처- 마르크바르트적 해석 또는 몰트만적 바르트 해석은 나름의 가치를 지니지만 하나의 해석의 시론들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6세기의 어거스틴 해석과 중세의 어거스틴주의 그런가하면 20세기 어거스틴주의에 대한 해석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처럼 텍스트가 자신의 세계를 독자들 앞에서 펼쳐나갈 때 이미 '저자의 죽음 (미셀푸코)은 예견될 수밖에 없다. 해석자 역시 그의 언어나 삶 그리고 역사, 사회적인 '해석학적 제한성'(가다머) 때문에, 항상 해석은 텍스트와의 끊임없는 지평융합을 통해 특수하거나 상황적일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시도해온 나의 바르트 해석은 여기에 근거한다.
바르트의 화해론에서 우리는 종교다원주의 모티브들을 삼위일체론적으로 그리고 기독론적으로 전개하는 것을 본다. 이미 본회퍼에 의해 비판되었던 '계시실증주의'(Offenbarungspositivismus)는 바르트에 의해 '하나님의 인간성'에서 성인이 된 세계의 문제를 수용한다. 그리고 세례론(Tauflehre KD IV/4, S.X(Vorwort))에서 '성숙해야만 하는 인간'에 대한 강조를 만나게된다. 더욱이 화해론의 전망에서 전개되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세계의 말씀들, 그리스도의 빛과 세상의 빛들과의 상관관계는 유대인과의 대화를 새로운 해석학적 지반에서 열어줄 뿐 만 아니라 동시에 타문화와 종교들에 대한 해석학적 통찰을 제공해준다. 그러나 이러한 과제는 바르트가 아니라 바르트의 제자들에게 속하는 새로운 신학적 과제에 속한다. 그리스도의 화해의 현실에서 하나님에게 낯 설은 세속성(Profanitat)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는 자체상 진리의 말씀들을 가지고 있으며, 설령 그것이 하나님의 복음에 도전하는 무신론적 사회주의의 진리주장일지라도 교회는 귀를 기울려야 한다. 정치사회 이론이나 그 보편적 주장뿐 만 아니라 타종교나 문화 속에 있는 우주론적 통찰과 진리주장들 역시 성서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그 해석학적 통찰들을 담고 있다. 에른스트 푹스(E. Fuchs)의 말처럼 바르트의 교의학이 그 제자들에 의해 반드시 평가되고 새로운 전망으로 전개되어야 한다면, 문화에 대한 해석학적 통찰은 새로운 과제에 속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신학의 담대성(Verwegenheit)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 우리는 바르트가 그의 신학에서 정치적으로 소외된 '타자'들을 어떻게 해석학적으로 독해해내며, 이러한 정치적 해석학이 그의 후기 화해론에서 어떻게 문화 해석학적인 통찰로,- 다시 말해 타종교와 문화의 성숙성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전개되는지를 살펴보았다. 틸리히의 문화 해석학이 그의 유명한 상관방법(The Methode of Correlation)을 근거로 편협한 교회지상주의의 타율성(Heteronomy)을 벗어나 타문화와 종교의 영역 안에서 드러나는 자율성(autonomy)으로 그리고 이 두 가지의 차원을 지양하는 종말론적 신율성(theonomy)을 향해 변증법적으로 움직여 나간다면, 바르트의 해석학은 역사로 들어오는 하나님의 현실성이 (교회를 넘어서서) 어떻게 세계의 현실과 문화 종교적 영역에 연관되는 가를 제시하는 정 반대의 방향을 취한다. 마크 테일러는 틸리히를 기독교의 진리에 대한 헌신(Commitment)과 종교 다원성 (Plurality)에 대한 급진적인 개방성(Openness)을 지닌 경계에 서있는 신학자로 평한 적이 있다. 김경재 교수는 이미 '해석학과 종교신학'에 대한 탁월한 이론적인 통찰을 통해 틸리히 신학방법의 해석학적 함의를 해명해 놓았다. 여기서 김경재 교수는 틸리히와 더불어 종교에 대한 바르트 비판의 정치사회적 성격을 정당하게 취급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 우리는 바르트의 종교비판을 넘어서서, 그의 후기신학에서 나타나는 문화 해석학의 종교다원주의적 성격을 평가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바르트는 틸리히 신학의- 복음에 대한- 헌신과- 타문화와 종교에 대한- 급진적인 개방성의 내적 긴장을, 기독교의 외부에서 찾으려고 한다. 다시 말해 타종교와 사회 문화운동(대표적으로 사회주의 운동)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우주론적인 진리의 빛들을 해석학적인 순환을 통해 자신의 신학에 통합하는 경향을 보인다. 하나님의 진리의 빛은 교회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의 영역 즉 교회의 밖에 존재하는 타종교나 문화에서 찾아 질 수 있고, 이것을 통해 교회는 새롭게 변혁될 수 있어야한다. 적어도 교회는 타자를 통해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겸손히 경청할 수 있어야한다.
바르트가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한계를 오버벡의 종말론을 통해 예리하게 비판하면서 담대하게(mit Verwegenheit) 20세기의 신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듯이, 개혁교회의 신학과 교회는 새로운 밀레니움 앞에서 타자의 성숙성의 요구와 도전들 앞에서 움츠려들거나 계시실증주의적으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일 필요는 없다. '논쟁은 사랑'이기 때문에, 타자의 성숙성에 대한 종교신학이나 포스트모던사유와의 논쟁은 바르트 신학의 새로운 전개와 심화를 위해 진지하게 취급될 필요가 있다. 바르트의 말처럼 인간은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을 수 있지만, 화해의 사건을 통해 인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하나님은 종교다원주의와 포스트모던 상황가운데서 계시며 자유와 고난 속에서 모든 인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며, 자기 겸허를 통해 세계와 문화와 타종교의 종교성안에 '육체의 수납'(Asumptio carnis)을 허락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타자의 세계는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의 희망의 약속에 서 있고, 그 거절은 성숙성으로 인정될 수 있어야한다. 메시야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유대교적인 부정이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성숙성의 귀결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비종교적인 세계나 또는 타종교와 문화의 성숙성들, 말하자면 무신론적 진리주장이나 타종교와 문화의 보편적 진리주장들은 더 이상 인간의 교만이 아니라 교회를 향한 의미 있는 도전과 새로운 통찰로 인정되어야한다. "악인들이 극락에서 받아들여지는데 하물며 선량한 사람이야" "심지어 선인들이 극락에서 받아들여지는데 하물며 악한 사람이랴"(신란) 기독교의 타자의 성숙성을 인정하는 시도는 이론의 문제를 넘어선다. 그것은 하나님의 신비와 사랑에 대한 영적 나눔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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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바르트의 하나님의 나라 이해
이신건
Ⅰ. 들어가는 말
칼 바르트는 1909년에 쓴 그의 짧은 논문 '현대신학과 하나님 나라의 일'(Moderne Theologie und Reichgottesarbeit)에서 현대신학 즉 그 당대의 이른바 문화개신교주의, 신개신교주의, 혹은 자유주의 신학의 주요특징을 요약하고(종교적 개인주의, 역사적 상대주의), 이 신학이 갖는 문제점으로서 인식의 상대성, 신앙표상의 복수주의 및 실천관련성의 결핍, 다시 말하자면 공동적이고도 일관적인 실천능력의 부재를 지적한 적이 있다. 이 논문에서 바르트는 그 당대의 신학의 이론적?실천적 한계성을 통찰하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이론을 암중모색하려고 고민했음을 엿볼 수 있다.
본인도 여기서 바르트가 자유주의 신학을 이론적?실천적으로 분석하고 검증한 방식대로 그의 하나님의 나라 이해를 그 이론적?실천적 관점 아래서 규명해 보고자 한다. 그는 과연 그 이전의 신학이 갖는 이론적 문제점들을 극복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데 성공했는가? 그는 과연 그의 신학을 통하여 교회가 다함께 일관된 행동을 할 수 있도록 든든한 실천적 토대를 마련해 주었는가? 여기서 우리는 바르트의 '하나님의 나라 신학과 그 일'의 상관성을 추적하는 데 촛점을 맞추기로 하자.
Ⅱ. 신학사적 분기점
바르트의 하나님의 나라 신학과 그 이전의 하나님이 나라 신학을 확연히 구분하는 분기점은 무엇이며, 무엇이 바르트로 하여금 그의 스승의 하나님의 나라 이해로부터 갈라서게 만들었는가? 이 문제의 해명은 바르트와 그의 동료들에 의해 기획된 새로운 정통주의(Neo-Orthodoxie) 신학을 이해하는 데 필요불가결한 조건이 될 뿐만 아니라, 바르트 자신의 신학 전체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관건이 된다. 특히 '하나님의 나라'는 종교적-신학적 개념(표상,상징)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신학적 개념이기도 하기 때문에, 바르트의 하나님의 나라 이해를 규명하기 이해서는 그의 신학을 새롭게 태동시키게 만든 신학사적 분기점을 확인하는 일은 필수적이다.
⑴ 이른바 '철저한 종말론'(Konsequente Eschatologie)에 의한 종래의 하나님의 나라 신학의 철저한 해체
이른바 자유주의 신학이 구상한 하나님 나라의 꿈과 이상은 중세기의 천년왕국 사상의 지원을 받으면서도 레씽(Lessing) 이래로 특히 독일남부 쉬바벤 지방의 성서주의(Biblizismus)의 구원사 신학으로부터도 간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인데, 이 새로운 신학적?철학적 천년왕국의 인류사적 구상에 따르면, 인류사의 목표는 완성된 인간성, 도덕성, 이성의 목적을 보편적으로 실현하는 데 있었다. 신학이 철학과 손을 맞잡고 만들어 놓은 '범종말론적 꿈'(Paneschatologischer Traum)은 역사에 대한 진보적?낙관적 이해를 바탕으로 삼고 있었으며, 비록 하나님의 초월성과 하나님 나라의 피안성을 인정하고는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 실현의 가능성을 전적으로 세계 내의 인간의 가능성에 두고 있었다(낙관적 인간이해). 칸트(I. Kant)가 '최고선'의 이상을 하나님의 나라와 분명히 동일시한 이래로 철학과 신학의 공생(共生)을 위한 전제조건이 마련되었으며, 양자 간의 돈독한 연대 관계는 특히 하나님 나라의 보편적인 궁극적 목표를 바라보면서 시민계급의 직업윤리를 세우려고 한 리츨(A. Ritschl)의 시도 안에서 최종적으로 완성된 것 같이 보였다.
철학과 신학, 종교와 문화, 신과 인간의 종합(Synthese) 위에 세워진 천년 왕국적 이상은 리츨의 사위인 바이쓰(1865-1914)에 의해 철저히 문제시되었다. 신학사의 지축을 뒤흔든 바이쓰의 연구(Die Predigt Jesu vom Reich Gottes, 1892)는 비록 67페이지라는 작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신학사에서 매우 의미심장한 저서가 되었고, 옛것의 종말과 새것의 시작을 가져왔다. 바이쓰의 주장에 따르면, "예수가 이해한 하나님의 나라는 절대적으로 초세계적 실재로서... 이 세계와 배타적으로 대립관계에 있다... 예수의 사고 범주 안에는 하나님 나라의 세계 내재적 진보에 관한 말이 전혀 존재할 수가 없다.
이로써 종말론적?묵시적 하나님 나라 이해는 종교적-윤리적 욕구와 철저히 대립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초월적 표상은 세계내재적 진보의 목표와는 오로지 대립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이 세상과 공통되는 것이라곤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고, 그의 한 발은 이미 미래적인 것 속에 서 있다. 이로써 예수는 산상설교의 도덕교사로 등장한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 메시지를 가진 묵시문학적 열광주의자가 되었다.
쉬바이쳐(A. Schweitzer)에게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그에게서 예수는 더이상 단지 당대의 종말론의 대변자가 된 것만이 아니라, 종말론적?묵시문학적 각본의 배우로서 심리적으로 이해되었다 :
"사방이 고요했다. 거기에 세례요한이 나타나서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외친다. 곧 그 뒤를 이어 스스로 와야 할 인자로 자각한 예수가 세계의 수레바퀴의 살에 끼워져서 그것을 움직이며 마지막 회전을 시키고 일반 세계사의 종말을 가져 오려고 한다. 그러나 바퀴가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그는 거기에 몸을 던졌다. 그래서 바퀴는 그대로 돌고 그는 갈기갈기 찢겨졌다. 그는 종말을 가져오는 대신에 그것을 파괴했다. 그런데 세계라고 하는 수레 바퀴는 계속 돌아가고, 자신이 인류의 영적 지배자이며 인류역사를 자기의 목적대로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강하고 측량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한 사람의 갈기갈기 찢겨진 시체의 조각들이 아직도 그 수레바퀴에 매달려 있다. 이것이 바로 그의 승리이며 통치이다."
바이쓰와 쉬바이쳐가 주창한 소위 '철저한 종말론(Konsequente Eschatologie)은, 비록 참으로 철저하지 못했지만, 즉 철저히 종말론을 붙들고 나가지 못하고 이를 결정적으로 극복, 폐기하고 다시금 자유주의의 예수상으로 돌아갔지만, 기독교에 대한 종말론의 중심적 의미의 발견은 최근의 개신교 신학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사건 중의 하나로서 충격적인 결과를 가져다 주었고, 기독교에 위기의식을 가져다 주었다. 그것은 신학, 교회와 경건, 신앙의 터전을 흔드는 지진과 같았고, "홍수가 나고 제방이 무너지는 것"(M. 켈러)과 같았다.
⑵ 제1차 세계대전에 의한 자유주의적?이상주의적 문화의 결정적 붕괴(윤리적 실패)
자유주의 신학의 진보적?낙관적 천년왕국의 지축을 뒤흔든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이었다. 칼 바르트는 그 당시의 경험을 스승들의 신학으로부터 결정적으로 결별하게 된 계기로서 술회했다:
"그 해(1914년) 8월 초순은 적어도 나에게는 암흑의 날이었다. 93명의 독일 지식인들이 빌헬름 2세의 전쟁선포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지지서명을 발표했는데, 이 지식인들 중에는 이제까지 숭앙해 왔던 신학스승들의 이름(필자주:하르낙,제베르크, 헤르만 등)이 함께 있었다는 사실은 나를 더욱 경악케 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이들의 윤리학과 교의학, 성서해석과 역사관을 따르지 않기로 결심했고, 더우기 19세기의 신학은 더 이상 장래를 기약할 수 없다는 점을 절감했다."
바르트의 스승의 하나님 나라의 신학은 결국엔 독일의 이기주의적 영토확장을 뒷받침해주는 세상 나라의 전쟁신학으로 귀착되었다. 이것은 그들의 신학의 필연적 귀결이요, 그 이론적?실천적 실패의 징후였다. "자유주의의 역사는 미로였고 사도(邪道)와 미궁의 역사였다. 그 힘은 모순과 상호파괴에 이르기까지 자유로이 뛰놀았다."
이 날 이후로 바르트는 자유주의 신학의 허구적 자유의 체계와 그 이데올로기의 내적 모순, 붕괴와 더불어 절대적인 하나님, 철저히 이 세계에 대하여 낯설고 초월적인 하나님의 나라에로의 새로운 부름의 소리를 들었다. 이 하나님, 하나님의 나라를 그는 성서 안에서 발견했는데, 이것은 그의 스승들이 가르쳐 주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진기하고 새로운 세계'였다. 이것은 인간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였다. 이로부터 바르트는 자유주의 신학의 상대적?주관적 입각점(도덕의식, 종교체험, 역사의식)으로부터 절대적?객관적 입각점(인간과 세계에 대해 주체로서 자유로이 대면해 있는 하나님과 그의 나라)으로 돌파함으로써, 옛 신학의 잔해를 딛고 새 신학의 장을 열게 되었다.
⑶ 블룸하르트 부자(父子)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돌입
앞의 두 사건 만큼 그렇게 떠들석하게 대지각 변동을 일으킨 사건으로서 주목받지는 못했지만, 서서히 한 곳에서 지각균열을 일으키면서 마침내는 온 지각을 뒤엎었던 사건의 하나는 바로 블룸하르트 부자가 일으킨 하나님 나라의 운동이다. 소위 자유주의 신학의 붕괴를 딛고, 아니 그 붕괴에 가속력을 주면서 등장한 이른바 변증법(혹은 신정통주의) 신학의 대변자들 중에서 그들의 영향을 직접?간접적으로 받지 않은 자들은 드물다. 마트뮐러는 말했다:
"종교사회주의와 변증법 신학이라는 20세기의 스위스에 탄생한 저 위대한 신학운동은 그 공통의 뿌리를 받 볼(Bad Boll)에 가지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변증법 신학운동을 흔히 "하나의 블룸하르트 운동"(Eine Blumhardtsbewegung)이라고 부른다. 블룸하르트 부자가 찾고 구하고 증언한 하나님은 새로운 행위와 능력과 계시를 기대할 수 있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었다. 또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단순히 개개의 인간의 영혼 속이나 먼 하늘에만이 아니라 무엇보다고 그리고 우선적으로 인간의 생활 속에, 바로 이 지상의 인간의 실생활 속에서 찾고 기대하려고 했다.
아버지 블룸하르트(J. Chr. Blumhardt)는 뜻하지 않는 악귀 추방의 경험을 겪은 이후로 카리스마적 목사가 되었는데, 그 이후로 그는 계속되는 회개와 치유의 역사의 한 복판에서 살아계신 하나님, 악의 나라와 하나님 나라 간의 투쟁, 승리자인 예수를 생생하게 증거하고 실천했다. 그의 목회를 이어받은 아들 블룸하르트(Chr. Blumhardt)는 점차 부친의 수직적 하나님 나라 이해에 수평적 하나님 나라 이해를 결부시켰고,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의 희망을 이 땅 위의 이상(사회주의적 삶의 방식)과 결합시켰다. 그의 메시지와 활동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철저한 기다림과 적극적인 서두름, 초월적인 하나님 나라의 돌입과 이를 준비하고 촉진하며 이에 협력하는 인간의 역사변혁적 행동, 하나님 인식과 하나님 나라의 희망이 묘하게 결합되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 세상의 전적인 갱신자로서의 하나님, 이 세계를 위한 희망으로서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그의 메시지는 바르트에게(그를 비롯하여 투르나이젠, 브룬너, 쿠터, 라가츠 등에게도) 심원한 자극과 영향을 주었다.
Ⅲ. 바르트의 하나님의 나라 이해
⑴ 로마서 주석 제1판(1919)
로마서 주석 제1판에서 바르트는 특히 블룸하르트와 튀빙엔 대학의 천년왕국적 종말론자 토비아스 벡(T. Beck) 등의 영향 아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유기적인 새 창조로 이해했다. 이 나라는 지금까지 존재해 온 제 가능성들 안에서 이루어지는 전진이나 발전이 아니라(자유주의 신학의 진보적?낙관적 하나님의 나라 이해에 대한 부정!), 모든 시대들을 관통하며 모든 시대들의 신적 가능성을 출현시키면서 유기적으로 성장한다. 이 나라는 기존의 것을 유지하거나 거기에서 안정적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며(부르즈아적?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부정!), 또 그렇다고해서 기존의 것을 파국적으로 제거하지도 않는다(레닌주의적?공산주의적 혁명에 대한 부정!). 하나님의 나라는 완전히 다른 하나님 자신의 나라로서 모든 기존 현실을 관통하며 모든 신적 성향과 가능성을 실현시키면서 성장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되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창조이다. 그 나라는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인해 가능해졌고 그의 부활로 인해 현실화되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 안에서 가까이 왔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가 그리스도 안에서 현실화되었는가?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의 씨앗, 변혁된 자연 법칙의 원리, 새로운 세계의 결정핵, 새로운 인간과 사물의 유기체의 시초와 머리, 새로운 창조의 배아(씨앗)로서 죽음을 통하여 낡은 요소를 받아서 새로운 갱신된 세계를 조성해 낸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과 세상 및 인간 사이에서 상실된 유기적 일치 관계를 회복하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재건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혁명으로서 모든 혁명의 혁명이다. 그리고 혁명의 능력은 하나님의 영이다. 이 영은 기존 현실을 파괴하지도 않고 보존하지도 않으면서 그것을 철저히 변혁시킨다.
여기에서 바르트는 하나님의 나라를 모든 종류의 인간적 혁명 혹은 개혁의 시도의 가능성을 부정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저항운동으로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혁명은 아무리 새로운 형태로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낡은 나라를 대변할 뿐이지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오지는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바르트가 로마서 주석 제1판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혁명을 위한 인간의 협력이나 참여조차 완전히 배제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혁명은 물론 우리 밖에서(extra nos) 시작하지만, 우리 안에서(in nobis) 우리와 함께(cum nobis) 일어난다. 하나님은 아래로부터 활동하시기 시작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아래로부터의 운동이다. 하나님은 지배구조 아래서 고통당하는 하층민들의 편을 들면서 억압받는 자들에게 활약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인간소외, 인간의 우상생산(국가, 맘몬, 인물, 예술, 학문, 교회, 미덕 등의 우상화), 인간의 물화(物化)와 주인없는 권세들(자본, 국가, 군국주의)의 지배에 맞선 하나님 나라의 혁명에 길들여짐으로써, 하나님의 혁명에 참여할 수 있다. 이것은 특히 사회민주주의 안의 정치적 참여 속에서 이루어진다.
⑵ 로마서 주석 제2판(1921)
로마서 주석 제2판은 완전히 새롭게 쓰여지고 철저히 논리적으로 구성된 것으로서, 바르트를 하루 아침에 유명하게 만드는 계기를 마련했다. 로마서 주석을 다시 개작하게 된 동기는 특히 여러 사상가들의 저작들을 접한 것에 있다. 오버벡(F. Overbeck)의 원역사(Ur-geschichte)의 개념으로부터 바르트는 역사적 회의주의를 배웠고(역사에는 무상과 타락의 법이 존재한다. 기독교는 초시간적이다), 도스토예프스키(Dostoyewski)의 소설들에서 바르트는 인간의 악마성, 진리의 파라독스적 성격, 기존 현실에 대한 철저한 회의 등을 수용했다. 그리고 키에르케고르(S. Kierkegaard)로부터 바르트는 많은 상징적 표현문구들만이 아니라 진리의 실존적?역설적 성격, 하나님과 인간의 철저한 구분, 계시의 순간적?사건적 성격 등을 배웠다. 그 밖에도 바르트는 플라톤(Platon), 칸트(Kant) 및 종교개혁자들(Luther, Calvin) 등으로부터도 새로운 통찰을 획득했다.
그리하여 바르트는 하나님, 하나님의 나라의 철저한 초월성, 이질성, 배타성을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과 인간의 혼합, 인간적인 것의 신적인 고양(高揚), 인간 존재 안의 신적 존재의 개입(介入)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나라는 비시간적인 시간, 비공간적인 영역, 불가능한 가능성, 부정 속의 긍정, 시간 속의 영원, 죽음 속의 생명이다. 이 나라는 그리스도 안에서 가까왔다. 그는 역사의 의미이며 시간의 종말이고 오로지 역설(Kierkegaard), 승리자(Blumhardt), 원역사(Overbeck)로서만 이해될 수 있는 자이다.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위로부터 수직적으로" 단절시키는 미지의 차원이다. 그러므로 그는 역사의 가시성 내에서는 문제꺼리, 신화로서만 이해될 뿐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숨겨진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나라는 가장 작은 입자 속에서도 땅에 도래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나라는 가장 고상한 형태 속에서도 오지 않았다. 그것은 가까이 왔을 뿐이다. 그것은 선포되고 신앙될 수 있을 뿐, 낡은 것의 연속으로서 가까이 온 것은 아니다. 새로운 세계는 가까이 왔지만 어디까지나 영원한 세계로 머물러 있을 뿐이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 그것의 반사(反射) 안에 있을 뿐이다. 이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부정적, 불가시적이고 은폐된 것이다. 그것은 이 세계의 소멸, 만물의 종말, 차안의 동요와 소요, 파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유기적으로 성장하거나 건설되어지지 않는다. 그처럼 볼 수 있는 나라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바벨탑일 뿐이다. 우리는 두렵고 떨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 나름대로 이룩하려고 노력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머리카락의 넓이 만큼도 접촉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영원한 순간은 모든 순간들과 비교할 수 없이 대립하고 있고,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시간들과 비교할 수 없이 대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순간들의 초월적 의미, 모든 시간들의 성취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철저히 배타적으로 하나님 자신만의 일이라고 간주된다. 물론 그것은 우리들을 위해(pro nobis) 일어나지만, 더 이상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맞서서(contra nobis) 일어난다.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혁명, 하나님 나라의 일에 협력하지 못한다. 가장 철저한 혁명조차도 하나님의 나라를 앞당겨 오기는 커녕, 단지 기존적인 것을 기존적인 것으로 대체할 뿐이고, 새로운 형태의 악을 불러 들인다.(레닌혁명 비판!).
그렇다고 해서 바르트가 여기서 전적인 체념, 윤리적 행동의 상대화, 부르즈와 계급적 반동, 종말론적 비관주의를 장려하자고 한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는 세상에 대해 절대적으로 다른 하나님을 통하여 세상을 절대적으로 다르게(새롭게)하는 하나님의 활동을 긍정하려고 했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활동할 수는 없지만, 기존질서 내에서 사회적 긍정, 억압, 독재에 맞선 개혁정치를 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준비하고 시위할 수 있다. 이러한 행위는 로마서주석 제1판에서와 같이 온갖 경직된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 속에서 이루어지며, 사회민주주의적 정치 안에서 실천된다.
⑶ 교의학 시대(1932-1968)
로마서 주석 제2판은 신학과 철학, 하나님과 인간을 종합하려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작업마당을 폭파한 효력을 끼쳤다. 인간이 생산해 내는 온갖 우상을 파괴하고 성전을 더럽히는 온갖 혼합주의를 축출하는 데 큰 공로를 세운 이 책은 잠자는 뭇 그리스도인들을 깨우는 닭소리, 종소리가 되었고, 인간으로 하여금 무상한 것을 절대화하려는 시도로부터 결별하여 절대적으로 자유롭고 은혜로운 하나님 앞에서 전율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이 책은 로마서 주석 제1판과는 달리 하나님의 나라의 위기에 촛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폐허, 진공을 남기는 듯 하였고, 시간-영원의 변증법이 하나님의 나라의 희망에 대한 기대를 채워 주기에는 너무 인색한 것 같았다. 머지 않아 바르트는 괴팅 대학의 교수로 부임하게 되었고, 여기서 종교개혁자들의 유산을 더욱 더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자신의 이전 체계를 심화?수정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변증법적?수직적 종말론의 체계는 다시금 그리스도 중심적 관점 아래서 성서적?수평적 종말론의 체계에 의해 대체?수정되어 나가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전환은 '바르멘 신학선언'의 제3항("... 교회는 그분의 오심을 기다리면서 …살고 있고…")과 자신의 고백(KDⅡ/1, 716 이하: "...나는 도래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피안성을 진지하게 여기느라 하나님의 오심 그 자체를 소홀히 여겼다... 어떻게 내가... 시간에 속하는 목적론(Teleologie), 진정한 종국을 향한 그 출발을 온갖 기교와 능변을 부려서 간과했는지 사람들은 알고 있다... 그 종말론적 전환 자체가... 반동으로서는 너무 강했다. 즉 독단적이고 전제적이었다.")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이전의 체계에서도 그러했지만, 특히 화해론에서는 더욱 분명하고도 의식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구상되고 설명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워진 지배, 그분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통치이다. 그분 자신이 곧 하나님의 나라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인격 안에서 온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리고 바르트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화해를 하나님의 혁명이라고 부르는데, 이 혁명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현존하는 하나님 나라의 돌입이다. 이 하나님 나라의 돌입, 하나님의 혁명은 인간과 세계의 급진적?전체적?보편적 변혁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한 참 혁명가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 나라의 혁명은 사회집단과 관습에 맞선 충돌 안에서 일어나서 모든 인간들의 상황변혁을 목표로 삼는다. 그렇지만 이 혁명은 율법적 강요의 전체주의 속에서가 아니라 은총의 전체주의 속에서 일어난다. 이 혁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지만 인간도 변혁의 주체가 되도록, 하나님의 투쟁에 참여하도록 부름받는다. 이 투쟁은 특히 인간의 소외, 물화, 관료주의화, 억압에 맞선 행동 속에서 구체화되며, 이 행동은 사회주의적이고 민주적인 사회, 화해된 사회를 위한 실천 속에서 이루어진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선행적 형태, 비유, 반영, 복사로서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지시하고 이의 도래를 위해 기도하기 때문에,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혁명인 화해의 인식으로부터 유래했기 때문에, 사회의 부정적 요소들에 대한 비판적 역할과 더 나은 사회질서의 수립을 위한 건설적인 역할을 통하여 사회변혁을 위한 적합성을 실증할 수 있다. 교회는 이론적?실천적으로 더 나은 화해된 질서를 향해 진군하는 전위대, 선구자로서 자신을 입증할 수 있고 또 입증해야 한다. 그렇지만 바르트에 의하면 교회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적합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 비록 주관적으로 인식하고 있지는 못하더라도, 세속적인 휴매니티, 우주의 빛들과 진리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매개하며, 사회민주주의는 인간적?정치적 세속성의 진정한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의 반사로 입증된다. 왜냐하면 사회민주주의는 그리스도교의 신앙고백의 정치적 차원과 내용적인 공통성을 갖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르트에게서 하나님 나라의 혁명에의 인간참여는 특히 사회민주주의 안에서의 영속적 체제변혁, 영속적 개혁정치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Ⅳ. 맺는 말
바르트는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일평생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려고 힘썼고, 예수의 실천에 따라 하나님의 나라 신학을 실천영역에 옮겨 놓고 스스로 실천해 보려고 애썼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사망 직전에도 그의 친구 투르나이젠과의 마지막 통화에서도 "...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렇지만 바르트는 자신을 결코 절대화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복음을 새로이 가리키는 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세례요한의 손 이상이 되길 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그가 하나님과 이웃의 영광을 위하여 자기 나름대로 노력한 것을 나중의 사람들이 훨씬 더 잘해 주길 바랬다.
만약 그가 더 오래 살았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나라 신학을 어떻게 더 수정?심화할 수 있었을런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그는 다른 내용으로 이를 채우려고 애썼을 것이다. 그러므로 바르트의 하나님의 나라 이해는 마지막 해답이 아니라 새로운 질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 우리 시대에서 하나님의 나라 신학은 무엇이고, 하나님 나라의 일은 무엇인가? 바르트는 그의 대답을 통해서 보다는 오히려 이런 질문을 통하여 훨씬 더 가까이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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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바르트의 교회론 -요약
목차
서론
제1부: 초기의 교회이해(1913-1920년)
제2부: 변증법적 교회이해(1921-1931년)
제3부: 기독론적 교회이해(1932-1968년)
제4부: 칼 바르트와 카톨릭 교회(비교와 평가)
결론(요약과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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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1. 바르트의 교회론의 의의
본서는 칼 바르트의 교회론을 그 결정적인 변천 속에서 기술하고 해석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그의 신학은 조직적 체계라기 보다는 오히려 그가 처한 시대적 정황 속에서 사색하는 예언자로서 분출해 놓은 외침이라고 해야 더 알맞다. 그의 교회론은 그의 신학의 기본적 통찰의 변화 속에서 해석되어야 하며, 또 그의 신학은 그가 처했던 시대적 정황과의 상관성 속에서 고찰되어야 한다. 실로 바르트의 신학은 그가 자신과 세계 및 삶의 문제와 더불어 씨름한 투쟁의 소산임을 알아야 하며 그렇기 때문에 그의 신학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단지 이론적 관시에서만이 아니라 그를 움직이고 감격시켰던 실제적인 물음에 참여하려는 관심에서 출발해야 한다.
2. 바르트의 신학의 교회성-교회의 신학성
"교의학은 자유로운 학문이 아니라 교회에 매여 있으므로써 의미있고 가능한 학문이다." 라고 했다. 그에 의하면 교회야말로 신학의 실존근거이며 그 주체이다. 그는 개혁교회의 일원으로 태어났으며, 이러한 근본적 소여성은 가족, 학교 및 교회 속의 교육을 통하여 강화되었다. 개혁교회에서 형성된 젊은 시절의 경험이 바르트의 생애와 신학을 계속 규정지었다는 사실이다. 개혁교회의 첫 번 째 특징은 '말씀'에 대한 강조, 즉 경험적으로는 '설교의 교회'가 되고 신학적으로는'말씀의 교회'가 되려는 꾸준한 관심에 있다. 개혁교회의 두 번째 특징은 '항상 개혁되어야 할 교회에 있다. 개혁이란 성서로부터 단순히 선험적으로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현존하는 교회의 상태와 성서본문을 서로 비교함으로써 성찰의 결과로 얻어진다. "교회가 더 이상 개혁 중에 있지 않다면, 그것은 곧 교회가 시련 속에 빠지고 비교회(非敎會) 속으로 추락하되 정말 구제 받을 가망 없이 빠져버린 것을 의미한다. " 바르트의 신학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꾸준한 특징은 그가 시종일관 교회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신학적 실존은 '교회 안'의 신학적 실존일 뿐만 아니라, 때로는 교회를 신랄히 비판하고 교회 파괴적인 발언을 토로한 경우에라도 항상 '교회를 위한' 신학적 실존이었다. 그의 교회론은 '위로부터' 획득되는 그러한 '신학성'에, 엄밀히 말하자면 '그리스도론'에 종속되어 있다.
3. 본서의 개괄적 맥락(바르트의 신학과 교회론의 변천)
젊은 시절의 바르트의 신학에서는 다분히 인간중심적 사고가 지배했다. 그는 '교회'를 기독교적 경건을 도야하려는 관심에 의해 세워진, 본질적으로 교육적인 기관으로 이해했다.
제 I부에서 교회를 유기적으로 성장하는 그리스도의 공동체, 하나님의 나라의 공동체라고 정의했다.
제 II부에서는 소위 '변증법적 신학' 시기에 나타난 바르트의 교회관이 다루어진다. 하나님의 불가시성, 피안성, 상이성. 소원성 및 은폐성, 인간과 교회에 대면해 있는 질문과 부정으로서의 하나님의 의미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교회는 불가시적·초월적인 실체로 이해되었고, 신개신교주의의 가시적 교회는 위기 속에 있다고 선언되었다. '성도들의 교제'마저도 가시적 친교가 아니라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 안에서 인간이 초월적·불가시적으로 통일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로마서 주석 제 2판이 출판된 지 얼마되지 않아 바르트에게 또 하나의 결정적인 전환이 일어났다. 그의 신학의 척도와 동기였던 '하나님과 세계 간의 변증법적 원리' 대신에 이제 소위 '말씀의 신학'이 등장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하게 됨으로써 이제 그는 교회를 하나님의 말씀 아래에 두게 되고, 이 '하나님의 말씀 아래에 있는 교회'는 동시에 '십자가 아래에 있는 교회', '죄인들의 교회'로 정의된다. 바르트는 1926년부터 교회의 본질을 이전보다 더 긍정적으로 정의하여, 이를' 하나님이 설립하신 것'으로 정당화하기 시작한다. 그는 점차로 변증법적 교회관으로부터 결별하고 교회의 긍정적인 측면을 계약개념을 통하여 해명한다.
제 III부는 그리스도론적으로 규정되는 바르트의 교회관을 다룬다(1932-1968년). 제 1장은 교회관과 관련지어서 '기독교 교의학 개요'와 '교회 교의학'사이에 일어난 기본통찰을 고찰한다. 제 2장은 바르트가 독일의 제 3제국의 시절에 교회를 위해 투쟁하던 기간(1933년-1945년)에 나타난 교회관을 다룬다. 제3장에서는 '교회와 성서'의 관계에 관한 바르트의 견해가 다루어진다. 제 4장은 바르트의 '선택론' 내에서 다루어진 그의 교회관을 고찰한다. 제 5장에서 본인은 바르트의 화해론 속에서 다루어진 그의 교회관을 해명하려고 시도했다. 여기서 그는 교회가 화해하시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행동 속에 정초되어 있음을 보았다.
제 IV부는 바르트의 교회론을 로마 카톨릭 교회론과 비교하고자 한다.
제I부 초기의 교회이해(1913년-1920년)
1. '거짓된 교회들'에 대한 항거
1) 로마 카톨릭 교회에 대한 비판
그의 지배적이고 특징적인 관심은 무엇보다도 매우 진지하게 로마 카톨릭 교회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한 사실에 있었다. 바르트는 베드로 수위권을 공박했다. 바르트는 교황계승에 관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주장도 반박했다. 1913년 11월 2일데 행한 설교에서 바르트는 로마 카톨릭 교회를 문자의 기독교, 과거의 기독교라고 표현하고, 그것은 영의 기독교의 진정한 계승자인 종교개혁 신앙과 지금까지 대립하고 있다고 말했다.
로마 카톨릭 교회에 대한 바르트의 비판은 다음과 같이 첨예화된다 : 그리스도가 카톨릭교인들에게 있어서는 기껏해야 제 2인자이지만, 우리 개신교인들에게 있어서는 제 1인자라고 하는 사실이다.
2) 신개신교주의에 대한 비판
세계 제 1차 대전의 발발은 바르트로 하여금 그를 심취시켰던 모든 종류의 자유주의의 경향으로부터 결별하게 만들었다. 그를 경악하게 만든 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존경했던 스승들이 모두 시대정신에 굴복하여 전쟁신학에 동조한 사실이었다. 로마서 주석 제1판에는 낭만주의, 이상주의, 경건주의 및 종교사회주의와도 투쟁한 그의 내면적 고심이 드러나 있고, 그 시대와 교회에로 향한 날카로운 비판이 번득거린다. 왜 교회가 궁지에 빠졌는가? 바르트에 의하면 한때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이 이젠 교회를 버리셨기 때문이다. 교회의 궁지는 그의 숙명이 아니라 잘못 때문이다. 그 잘못은 교회가 하나님께 주목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만이 그의 사역 속에서 유일한 통치자가 되길 원하신다는 사실을 간과하였고, 그 결과로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했다는 사실에 놓여있다. 바르트는 괴테의 유명한 말 - "교회는 참 좋은 위(胃)를 가리고 있다." -을 인용하여 현실교회를 비판했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뜻과 일을 인간의 목적에 유익하게 변형시키고,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 안전한 길을 가려고 복음의 모든 거리끼는 요소를 제거하려는 당대의 교회, 하나님을 하나님되게 하지 않고 인간적 복리에 맞게 그의 일을 뜯어고치려는 당대의 교회, 하나님의 일보다 자신의 일에 몰두하려는 당대의 교회에 맞서서 맹렬히 항거했다.
3) 경건주의에 대한 비판
겔처에게 쓴 1917년 5월 26일의 편지에서 그는 경건주의자들을 '사탄의 교회'라고 혹평하고, 이 사탄은 이미 신약성서 안에서 결국 비틀거리고 있음을 본다고 말했다. 그의 비판은 대체로 두 가지 이유, 즉 개인주의와 기계주의에 근거를 둔 것이다.
⑴ 개인주의 : 바르트는 경건주의를 세상에 주어진 하나님의 대답으로부터 살지 않고 개인의 성취, 개인의 회심, 개인의 성화, 개인의 구원, 개인의 축복을 추구하는 개인주의라고 보았다. 바르트는 교회를 철두철미 유기적인 관계, 살아있는 친교와 공존으로 이해했다. 그러므로 경건주의의 개인주의는 철저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⑵ 기계주의 : 여기서 '기계적'이란 말은 구원을 자신의 행동으로 스스로 이루려는 태도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유기적'인 것에 대한 반대의미로서 사용된 용어이다. 바르트는 로마서 주석 제 1판에서 하나님과 인간 및 세계 사이의 유기적 일치관계를 특히 강조했다. 그래서 그는 자력적인 구원의 노력을 기계주의라는 표현아래서 공격했다.
2. 그리스도의 공동체로서의 교회
바르트의 관심은 무엇보다도 교회를 '공동체'로 이해하고 방어하려는 데 있었다. 교권계급적인 로마 카톨릭 교회, 인본주의적인 신개신교주의 교회 그리고 개인주의적인 경건주의 교회에 대항하여 그는 공동체로서의 교회상을 부각시켰고, 이것을 '그리스도의 몸' 사상과 '하나님의 나라'사상에 접맥시켰다.
1) 그리스도의 몸
바르트의 의하면 교회란 더 높은 뜻에 의해 형성되고 보존되는, 내적으로 필연적인 공동체이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받아들여짐으로서 이 세상에서 개인의 불행한 처지로부터 건짐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십자가를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의 실존 안으로 들어 왔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된 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로서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2) 하나님의 나라의 공동체
참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공동체'이기도 하다. 바르트가 말하려는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것인가?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되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요 그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 세상 및 인간 간의 상실된 유기적 일치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요, 지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재건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출현 속에서 빛나고 하나님의 나라의 관점에서 교회는 어떻게 정의되는가? 교회는 집, 제도 혹은 사업체가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의 유기체요 그 공동체이다. 참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을 세상의 밭에 뿌리는 사명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모든 우월성을 부숴버린다.
제II부 변증법적 교회이해(1921년-1931년)
1. 교회관과의 관련 속에서 본 1919년과 1921년 사이의 기본관점의 변화
1) 유기적-불가시적
로마서 주석 제 2판에서는 가장 분명한 차이점은 '유기적'이라는 개념이 사라지고 그대신 '불가시적'이라는 개념이 등장한 점에 있다.
2) 역사의 종말-원역사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공동체로서 종말을 향하여 진행하고 있고, 새 세계는 이미 교회 안에서 시작하고 있다. 즉 종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으로 인하여 교회 안에서 이미 터전을 잡고 있다. 역사의 종말로서의 하나님의 나라의 사상, 차안적인 세계의 종국으로서의 종말론 이해 대신에 초시간적인 '원역사'의 개념이 바르트에게도 등장했다. 원역사는 생명 그 자체 안에 출발점을 가지고 있고, 그러기에 그것은 '생성사'이다. '계시'의 개념을 더 자세히 정의할 수 있기 위하여 원역사의 개념을 사용했다.
3) 보편주의-개인
바르트는 하나님-세계-인간의 관계를 실존적인 관계로 해석함으로써 이를 실존화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개인의 개체성은 개인이 하나님과 맺는 관계의 결과이다. 교회는 공동체일 뿐만 아니라 한 몸이며,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한 개체이다. 교회를 공동체로 구성하는 그리스도도 역시 한 개체이다. 그는 교회의 일치의 근거이다.
2. 로마서 주석(제 2판)교회관
1) 교회의 위기
바르트의 두 번째 '로마서 주석'은 "엄청난 폭발과 같이" 그 당시 우세하던 종교주의적·인간중심적·인본주의적 신학을 강타했다. 바르트는 교회의 상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위기를 선언한다. 교회는 불가피한 재앙 속에 빠져 있다.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의 대립은 무한하다. 복음과 교회의 대립은 근본적으로 어디서나 무한하다. 복음과 교회의 대립은 근본적으로 어디서나 무한하다. 교회가 복음의 폐기이듯이 복음도 교회의 폐기이다. 교회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교회가 위기와 재앙 속에 처해 있는 이유를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입장에서 해명하였다.
⑴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본질, 소유 및 행위의 순수한 한계이시자 순수한 시초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정 속에 계신 긍정이시며, 우리의 긍정속에 계신 부정이시고, 처음과 나중이시며, 그러한 분으로서 미지의 분이시고, 결코 우리가 아는 많은 실체들 중의 한 실체가 아니다.
⑵ 교회에는 하나님이 안 계신다.
복음과 교회의 무한한 대립이 교회를 위기로 몰아 넣는다. 교회의 버림받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말하려는 교회 안의 인간의 시도가 심판 받고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있다.
⑶ 하나님의 의(義)는 하나님의 의이고 결코 원하거나 달리는 인간의 의가 아니다. 하나님의 의는 어떠한 인간의 신실에 의해 제약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 자신의 신실로부터 나온다. 그것은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이다. 교회의 위기는 교회가 하나님의 의, 신앙, 기적을 추구하고 그것을 획득하고 입증하며 그것에 도달할 수 있다고 잘못 생각하는 데에 있다. 교회가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없애 버리고 자신의 의를 세우려는 것이고, 경건한 인간을 영화롭게 함으로써 인간을 의롭게 하고 구원하려는 것이다. 교회의 위기와 재앙은 "교회가 진정 하나님을 거역하는 인간의 적대감이 드러나는 곳이고 인간의 무관심, 오해, 저항이 가장 고상하고도 가장 유치한 형태를 취하는 곳이라는 사실 속에서 밝혀진다."
2) 인간의 가능성으로서의 교회
그는 교회를 하나님의 불가능한 가능성 앞에서 최종적인 인간의 가능성을 형체화한 것으로 파악했다. 바르트는 교회와 문화를 , 교회와 종교를 혼합하여 교회를 문화와 실체로 파악하려던 신개신교주의의 교회관에 대해 불가피한 수정을 가했다.
3) 불가능한 가능성으로서의 교회
그의 비판은 종교, 문화, 경건주의, 관념주의와 같은 인간의 가능성의 껍데기를 뒤집어 쓴 잘못된 교회에 대해 하나님의 위기와 심판을 선언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지, 교회 그 자체에 대한 부정과 파괴의 행위가 아니었다. 참된 교회는 무엇이고,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는가? 기적의 교회다.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회개한 교회, 하나님을 경외하는 교회다. 죄인들의 교회다. 은총과 하나님의 자비를 받는 교회다. 그런데 여기서 바르트가 참된 교회라고 이해하는 야곱의 교회는 역사적 실체가 아니라 변증법적 실체임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4) 성도들의 교제
매우 주목할 만한 점은 바르트가 장소나 역사, 회원이나 모임도 없는 비역사적. 변증법적
실체인 교회, 오직 하나님의 기적과 은혜가 주어질 때에만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사건인
교회를 또 한편으로는 "성도들의 교제"라고 칭했다는 사실이다. 바르트는 인격적인 사귐을 나타내는 의미로 Communio Sanctorum을 표현한다. "교회는 사귐" 이다
3. 로마서 주석(제 2판)과 "교회 교의학" 사이의 교회관.
1)1921년과 1923년 사이의 신학적 전환
"말씀의 신학"의 특징을 이루는 것은 "성서에서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계시라고 불리는 것으로서, 모든 인간적인 자기이해를 제한하고 규정하는, 탁월하고 새로운 것에 관한 질문"이다. 그리하여 바르트의 신학의 척도와 동기였던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에 놓는 원리가 등장하게 되었다.
2) 하나님의 말씀 아래에 있는 교회
"바르트가 1923년에 뤼벡에서 행한 강연 '교회와 계시'는 그가 교회의 문제를 새로이 다루고 있음을 보여 준다. "참된 그리스도의 교회의 근거는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주관주의의 종말이며 실제적인 그리스도인의 예언의 전제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르트의 강조는 그가 1925년에 행한 강연 '개혁교회의 성서원리'에서도 드러난다. 여기서 그는 교회가 계시로부터, 오직 하나님의 결단 안에서만 정초된 하나님의 자기인식에의 참여로부터 살고 있다고 고백했다. 그런데 바르트에 의하여 성서도 계시의 직접적 현재화가 될 수 없다. 계시가 다음 시대로 전달되는 것은 유출, 발전 혹은 조립의 경로 위에서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계시의 전달은 결코 연속이 아니라 새롭고 놀라운 기적이며, 계시 그 자체와 같이 동일하고 절대적인 의미로 말씀하시고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여기서 바르트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이다. 성령은 스스로 자신의 일을 수행하시는 하나님을 의미하며, 역사적 자료, 마음과 양심의 암흑 속에 있는 우리에게 오는 계시 속에서 무시간적·동시대적활동을 행동하시는 하나님을 의미한다.
⑴ 교회의 권위는 시간적. 역사적. 간접적 권위이다.
⑵ 교회의 권위는 상대적 권위이다.
⑶ 교회의 권위는 형식적 권위이다.
교회에서 주어진 이러한 전권위임은 오순절의 성령의 은사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교회의 개념'이라는 강연에서는 바르트는 교회의 권위가 하나님의 계시의 이해와 선포의 준거가 되는 사도들의 증언 위에 정초되어 있고 또 항상 거듭 정초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⑷ 죄인들의 교회
교회에 관한 본래적·본질적·내적인 진술의 하나는 '죄인'이라는 개념 속에 있다. 그는 이미 1926년에 교회를 죄인들의 공동체라고 불렀고, 1927년에도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용서받은 죄인들의 중간에 존재한다고 말했다. 교회는 오직 용서 속에서만 존속할 수 있고 오직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 안에서만 구원을 발견할 수 있는 십자가 아래의 교회, 죄인들의 교회이다.
⑸ 십자가 아래에 있는 교회
"죄인들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심판 받게 됨과 더불어 계시의 은폐성 안으로 놓여진다." 십자가 아래에 있는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며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계시와 화해의 연속, 현재화, 구체화 및 명시화가 아니다.… 그것은 결코 그리스도를 등장시킬 수 없고 묘사할 수 없으며 활동시킬 수도 없다. 그것은 구원을 나누거나 번식 혹은 확장할 수도 없다. " 십자가 아래에 있는 교회는 구원케 하는 말씀, 계속적인 신적 권위, 절대적 지식, 분명한 지시, 직접적으로 확신시키는 영광이 없는 궁지와 실존의 궁지에 빠진다. '새로운 교회의 현실주의'로 나아가려 한다.
그런데 교회의 궁지는 '보이지 않는 영적인 교회라 하는 이상주의'로 도피한다고 극복되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보이는 인간적인 교회라고 하는 현실주의'로 도피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간의 이러한 긴장은 교회의 본질에 관한 물음을 항상 상기시킨다. 교회는 하나님의 약속으로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고 완전히 궁극적으로 발언된 하나님의 확약으로부터 살아야한다.
⑹ 하나님이 제정하신 교회
1926년부터 바르트는 교회가 하나님의 화해의 결의안에서 제정되었음을 보게 됨으로써, 교회는 하나님에 의해 제정된 죄인의 공동체, 신앙하고 순종하는 인간들의 공동체라고 정의되었다. 1927년에는 바르트는 교회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체결된 계약에 근거하여 창조되고 성령을 통하여 각성된 신앙의 백성의 소집으로 정의했다.
제III부 기독론적 교회이해(1932년-1968년)
1. 교회관과의 관련 속에서 본 1927년과 1932년 사이의 기본통찰의 변화
1) 변증법에서 유비론(類比論)으로
바르트는 그가 1920년에 행한 강연 '성서적 질문, 통찰 및 전망'에서 성서적인 사고와 발언의 특성을 변증법적인 것이라고 기술했다. 로마서 주석 제 2판(1921년)에서는 바르트는 '바울의 로마서의 내용의 내적인 변증법'을 기술하는 것을 자신의 신학과제로 삼았다. 바르트는 그가 행한 강연 '신학의 과제로서의 하나님의 말씀' (1922년)에서 형식적 변증법의 신학적 배경에 관해 숙고했다.
1925년에 행한 강연 '교회와 신학'에서 바르트는 신학의 변증법적인 특징을 단절, 역설, 철저한 보충의 필요성, 모든 신학문장의 원칙적 개방이라고 표현했다. 바르트는 변증법적 원리는 어디에서부터 유래하는가? 그 자신은 이것을 '바울과 종교개혁자들의 변증법'이라고 말했다. 바르트는 "우리가 어떻게 신학의 대상에 관하여 신학적으로 적합하게 말할 수 있는가?" 라고 하는 질문 앞에서 점점 더 고심하게 되었다. 이 질문은 그에게 점점 더 회피할 수 없는 것으로 다가왔다. 그 동기는 설교의 상황, 선포의 문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물음과 들려진 계시와 과제에 대한 신학적 사고와 발언의 책임성 문제였다. 이 물음을 놓고 씨름한 것을 보여주는 문서는 '신학에 있어서의 운명과 이념'(1929년)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미 바르트가 신학을 '그 대상에 일치하여 오직 교회 안에서만 가능한 학문' 이라고 파악한 것을 볼 수 있다. 신학은 단지 입문, 교정, 지시, 방주(傍註) 혹은 식탁의 양념일 수만은 없다. 변증법은 신학적 진술을 대체할 수 없다. 신학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 가운데서 자신을 계시하셨고 또 계시할 것이라는 전제로부터 출발한다. 그리하여 바르트에게서 변증법적 발언 속에 나타난 움추리는 몸짓은 점점 사라지고, 계시의 사건에 더욱 접근하려는 노력이 나타났다. 즉 하나님에 관한 인간의 발언의 변증법적 구조에 관한 분명한 관심 대신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비(Analogia:類比)에 관한 관심이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했다. 바르트는 아날로기아를 정의하기를 "동일성 및 비동일성과 마찬가지로 동일성도 제한하는, 두 가지 혹은 더 이상의 다른 실체들 간의 부분적인 상응과 합치, 즉 유사성이라고 했다.
2) 그리스도론적 집중
변증법에서 유비론으로 신학적 인식원리를 전환시킨 바르트는 이제 그의 신학의 새로운 기초를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의 새로운 과제는 "이전에 말했던 것을 다시 한번 완전히 다르게, 즉 이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신학으로서 끝까지 숙고하고 표명하는 것이었다. 계시의 본질과 내용을 가장 포괄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되었다. 변증법적 실체였던 교회 대신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등장한다. 이 새로운 교회관은 그리스도론적 집중에 의하여 강하게 각인 되었으며, 신약성서의 그리스도의 몸 이해를 통해 규정되었다.
3) 역사의 종국으로서의 종말론의 재발견
바르트에게서 세계사적, 목적론적 종말론은 그리스도론적인 방식으로 그 의를 재획득하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모든 시간의 신비요 영원이라고 주장되던 변증법적 시대와는 달리 이제 종말론은 역사적 사건의 의미에서 긍정적으로 재평가 되었다.
2. '고백교회'의 투쟁기(1933년-1945년)에 나타난 바르트의 교회관
1) 정치와 교회의 상황
⑴ '독일 그리스도인들'의 등장과 '고백교회'의 탄생 : 모든 신학적 성찰에서 벗어난 광신주의와 다름없는 '독일 그리스도인들'(DC) 조직의 가장 중요한 교회정치의 목표는 루터적 특징과 아리안 종족의 통일제국교회를 설립하려는 것이었다. '아리안 조항을 통하여 많은 자들이 독일 그리스도인들의 운동에서 탈퇴했고. 이 운동은 여러 갈래로 찢겨졌다. 이 즈음에 '고백교회(Bekennende Kirche)운동이 태동하기 시작했다.
⑵ 바르트는 무엇을 하였는가? : 바르트는 '오늘의 신학적 실존'(1933)에서 교회가 신학적 실존을 상실했으며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소리를 들으려고 하다가 교회됨을 망각했다는 것, 그러나 성서가 주인이 될 때 비로소 신학적 실존이 있고 교회개혁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했다. 바르트는 1934년 5월 31일에 채택된 '바르멘 신학선언'을 기초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2) 교회의 본질
⑴ 교회의 자리 :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말씀하셨으므로 인간이 그 말씀을 듣는 바로 그곳에 교회가 존재한다. 하나님께서 성서를 통하여 위대한 행위의 언어로써 말씀하시고 인간이 이를 듣는 바로 그곳에 교회가 생기고 존재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성서의 원천, 핵심 및 그 대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이다.
⑵ 형제들의 공동체로서의 교회 : '바르멘 선언' 제 3항에서 바르트는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과 성례전 속에서 성령을 통하여 주로서 현존하시면서 행동하시는 형제들의 공동체"라고 정의했다. 이 개념은 '그리스도의 몸'이해와 매우 밀접히 결합되어 있다.
⑶ 교회의 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 안에서 주로서 현존하시면서 행동하시고, 이 행동을 통하여 항상 새롭고 교회를 창조하시며 교회를 보존하신다. 그런 의미에서 그분은 교회의 첫째가는 본질적인 주체이시다. 바르멘 선언은 처음으로 교회의 본질을 그리스도론적으로 정립할 수 있었다.
3) 교회의 사명
⑴ 증언봉사의 주체로서의 교회 : 우리는 우리의 선포와 가르침을 통하여 교회와 세상 속에서 하나님 말씀에 봉사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라는 것이다. 교회의 증언봉사는 하나님의 능력 속에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 속에 반복하는 데에 있다.
⑵ 시대사(時代事) 속에서의 교회의 증언책임 :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게 되고 선포할 때 시대를 떠난 어떤 추상적인 영역 속에 있지 않고 바로 시대 속에 있기 때문에, 교회는 시대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과 연루되어 있고 그것의 도전과 요구를 받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모든 시대에서 시대사에 참여해야 한다.
4) 교회의 형태
"교회는 이 세상 속에서 어떠한 형태를 취하는가?"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를 이룩하는 데 있어서 결정권을 가진 자, 즉 교회의 형성자가 누구인가?"하는 물음에 답변이 주어져야 한다. 모든 교회형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인 직분의 행위로서, 오직 그분만이 교회를 형성하는 자이다. 바르트는 지배가 아니라 오직 봉사만이 교회 위에 세워지는 표지가 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5) 참된 교회와 거짓 교회 사이에서 투쟁하는 교회
교회는 자신이 참된 교회인지, 거짓 교회인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인지 적그리스도의 교회인지 항상 필수적으로 자신을 검증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항상 거짓 교회가 될 가능성의 위험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오류를 진리로써 극복하려는 자세가 없는 교회는 그 자체상 거짓 교회일 것이다.
3. 교회와 성서(교회교의학I/2, 1938년)
1) 교회에게, 교회를 위하여 주어진 성서
바르트는 성서를 교회의 선포와 대면해 있는 쉂의 법정을 지시하는 표지로서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성서란 무엇인가? 바르트에 의하면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한 것이 아니며, 그것만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 가지의 형태를 가진다. 계시된 말씀, 기록된 말씀 및 선포된 말씀.
2) 교회 안에서, 교회와 함께 형성된 성서
성서는 카논의 형태로 교회에 의해 성서로 발견되고 인정된 문서의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졌다. 카논 형성은 하나님의 증인선택과 증인소명에 대한 교회의 고백이다.
3) 성서 아래에 있는 교회의 권위
성서를 떠나서는 교회가 아무런 독립적인 권위를 가지지 못한다. 왜냐하면 교회의 권위는 자신 속에 세워진 성서의 권위를 통해서 정초되고 제한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신의 존재, 근거 및 본질을 이루는 성서에 대하여 순종의 관계에 있다.
4) 성서 아래에 잇는 교회의 자유
교회의 권위가 순종의 객관적 규정이라면, 교회의 자유는 순종의 주관적 규정이다. 교회의 자유는 말씀의 자유로 말미암아 정초되고, 또 간접적ㆍ상대적ㆍ형식적 자유로서 제한된다. 교회 안의 인간의 자유는 하나님의 말씀의 자유에 상응하는 자유로서 다름아닌 성서주석과 그 적용에 대한 책임을 떠맡는 행위로 나타난다. 성서의 해석과정은 하나님의 말씀 아래에 있는 교회의 자유로서 관찰, 숙고 및 적용이라는 삼중적인 성서주석의 행위로 이루어진다.
4. 공동체의 선택(교회 교의학 II/2, 1942년)
1)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선택의 중개자로서의 공동체
⑴ 복음의 요약으로서의 하나님의 선택 : 바르트의 선택론은 그의 전체의 신학의 열쇠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선택론은 창조, 화해 및 구원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든 계시? 이해하는 데 있어서 열쇠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의 신학의 중심적 주제이다.
하나님의 선택의 인식근거와 존재근거는 무엇인가? 교회의 전통, 선택론의 교육적ㆍ목회적 가치와 유용성, 경험적 자료 혹은 전능자로서의 신개념에 있지 않고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선택은 곧 하나님의 '은총'의 선택을 의미한다.
⑵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은 공동체의 선택을 포함한다. 은총의 선택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이면서도 동시에 하나의 하나님의 공동체의 영원한 선택이다. 이 공동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는 온 세상에 증언 되고, 온 세상은 그에 대한 신앙으로 부름 받는다. 바르트는 이러한 공동체의 선택을 중보적ㆍ중개적 선택이라고 정의한다.
2) 이스라엘과 교회
⑴ 바르트의 신학에서의 이스라엘의 의미
로마서 주석 제1판에서 '이스라엘'을 신학적 주제로 받아들여 이스라엘과 교회 간의 연대적 관계를 강조했으며, 그리하여 자신의 사명에 부응하지 못하는 이스라엘을 당대의 교회와 동일시함으로써 교회비판의 해석학적 모델을 찾았다. 교회로서 공동체는 이스라엘이고, 바로 이스라엘로서 공동체는 교회이다.
⑵ 이중적 형태와 기능을 갖는 하나의 공동체
바르트의 선택론에 드러난 그의 이스라엘 이해는 양면적이다. 한편으로 그는 이스라엘을 낡은 인간의 사라지는 형태로서 부정적으로 파악했다. 그에 반해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오고 있는 형태로서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5. 하나님의 화해의 역사로서의 교회(교회교의학 IV/1-3, 1953년-1968년)
1) 하나님의 삼위적 행동 안에 있는 교회
⑴ 하나님에 의해 성취된 화해의 선행적 묘사
교회 안에서는 하나님에 의해 성취된 객관적 화해가 개개인에게 주관적으로 적용되는 일이 일어난다. 화해는 하나님의 전 존재요 그분의 전 삶이다. 화해는 모든 하나님의 행위의 목표요 하나님의 원래적 의지와 근본의지이며, 창조자로서의 그분의 의지와 의미와 근거이다. 화해는 또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맺어진 '계약'의 성취이기도 하다. 계약이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처음부터 존재하다가 교란되고 위협받데 된 사귐인데 그 의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즉 화해의 역사 안에서 성취되었다.
⑵ 예수 그리스도의 피조물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객관적으로 일어난 하나님과 인간 간의 화해의 주관적 묘사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부름받은 자들의 공동체'(Communio vocatorum)로 일으켜 세워졌다.
⑶ 성령의 역사(役事)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교회를 창조하고 계속적으로 갱신시키는 능력은 바르트에 의하면 성령이다. 교회가 설립되고 바로 그렇기에 항상 거듭 설립되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이다. 성령이 활동함으로서 교회가 생겨났고 지금도 존속하고 있다. 그런데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동하시는 하나님의 영이다.
2) 교회의 삼중적 본질
⑴ 그리스도의 몸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적ㆍ역사적 실존형태', 즉 그의 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과 부활하신 분으로서 천상적ㆍ역사적 실존형태로, 그리고 교회라는 지상적ㆍ역사적 형태라는 두 종류의 실존형태를 가지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주, 교회의 머리이실 뿐만 아니라 몸, 교회이시기도 하다.
⑵ 성도들의 교제
교회는 '성도들의 교제'(Communio Sanctorum)이다. 성도들의 교제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그리고 성령의 역사에 의해 회집되고 생동된 인간들의 활동 안에서 일어난다. 바르트는 성도들의 교제를 전통에 따라 두 가지 의미로 이해했다. 하나는 '성도들', 다시 말하면 성령에 의해 거룩하게된 인간들의 친교이고, 또 다른 하나는 '거룩한 것들', 거룩한 관계들, 거룩한 은사들, 거룩한 임무들, 거룩한 직분들, 거룩한 역할들 안의 교제이다.
⑶ 하나님의 백성
교회는 하나님의 '소명'의 역사와 '조명하는' 성령의 역사인 것으로 나타난다. 이 교회는 다름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교회의 실존양식을 가리킨다. 즉 교회는 세상 뒤에 숨어 있거나 세상 위에 떠 있는 것이 아니라 공간과 시간 속에서, 지금 여기에, 다른 사람들 한 가운데에 있다.
3) 교회의 질서(교회법)
바르트는 교회의 법을 일차적 행동의 주체인 예수 그리스도와 이차적 행동의 주체인 성도들의 공동체 간의 관계의 척도에서 볼 때 올바른 것이라고 파악했다. 교회 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 명령 및 지시가,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성도들의 공동체의 순종적ㆍ복종적 행위가 중시된다. 이 관계야말로 곧 교회의 질서원리, 기본법이다. 교회의 법의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가 여기 머리와 주 그리고 일차적 행동의 주체가 되신다는 사실에 있다.
교회법은 어떤 내용을 갖는가? ⑴ 봉사의 법의 특성과 의미를 갖는다. ⑵ 예배의 법이다. 교회의 모든 법은 예배의 사건에 그 본래적 자리와 고유한 목적을 갖는다. ⑶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계신 인격으로서 그의 교회를 통치, 보존, 조직하심으로써, 교회 법은 필연적으로 역동적으로 움직여지는 살아있는 법의 특성을 갖게 된다. ⑷ 교회 법은 인간의 일반적인 법의 제정과 실행에 대해 모범적인 것이어야 한다.
4) 교회의 임무
교회의 임무는 그리스도 대신에 그리고 말씀과 성례 전을 통해 그의 말씀과 사역에 봉사하면서 값없는 은총의 복음을 모든 백성에게 전하는 것에 있다.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은 교회의 모든 봉사의 총괄적 요약이다.
5) 교회와 세상
⑴ 세계사의 변혁요인으로서의 교회
세계사는 하나님의 영역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 진행된다. 교회는 세계사 한복판 속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세계사를 달리 보고 달리 그것에 참여해야 한다. 교회는 세계사의 한복판에서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인간들이 행하지 않고 또 행할 수도 없는 바로 그것을 항상 어디서나 구체적 순종과 고백 속에서 행해야 한다. 교회는 세계사의 한복판에서 그러한 결딴을 실천함으로써 세계사를 분명히 변혁시킬 것이다.
⑵ 세상을 위한 교회
교회는 자신에게 부여된 전권에 힘입어 세상으로 보냄 받음으로써 그 자체선 세상을 위해 존재한다. 교회는 세상을 위해 자신의 임무를 실행하기 위하여 세상으로 보냄 받았다. 교회가 세상에 관해 앎으로써, 교회가 세상과 연대적으로 결합되어 있음으로써, 교회는 세상에 대해 함께 책임적이게 된다.
제IV부 칼 바르트와 카톨릭 교회(비교와 평가)
1. 바르트의 '그리스도의 몸'-피오(Pius) 12세의 '신비한 그리스도의 몸'(1943년)
⑶ⓛ바르트에게서는 교회의 설립이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인류의 대리자로서 자신의 몸 안에서 죄의 몸을 지고 죽으심으로써 이를 제거하신 행위에 근거한 것으로 설명되고 있는 반면에, 피오 12세의 교서에서는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그의 몸으로 설립되었거나 사들여졌다고 설명된다.
②피오12세의 교서에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인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유일독특한 신분 때문에 교회의 머리라고 불린다는 사실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곧장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적 대리권, 즉 교황의 수위권도 도출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땅에서 자신을 대리하는 자를 통하여 자신의 신비한 몸을 조직형태로 다스리신다. 즉 그는 사도의 우두머리에게 보이는 통치권을 넘겨주신다. 그와 달리 바르트에 의하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신의 교회의 머리와 통치자이시다. 그리고 교회는 오로지 그에 의해서만 통치되는 자매들과 형제들의 공동체이다. 그러기에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머리, 주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③ 바르트의 교회론에서는 그리스도와 교회 간에 관계가 뒤바뀔 수 없는 한에서, 그리스도의 몸에 관한 바울적 어법을 똑같이 강조한 사실과 아울러 피오12세의 교서로부터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바르트쭻 말한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렇지만 피오12세의 교서에서는 "그리스도가 교회이시다"는 문장이 뒤바뀔 수도 있다. 즉 "교회는 그리스도이다"고 말할 수 있다.
2. 바르트의 '하나님의 백성'-제 2 바티칸 공의회의 '세상의 빛'(1966년)
⑴ 제2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헌장 'Lumen Gentium(세상의 빛)은 교회의 구원사적 차원에 역점을 두어 '하나님의 백성'의 개념을 구원사의 관점과 결합시켰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시다"라는 신약성서의 특별한 문장으로부터 특별한 역사, 구원사를 이해한다. 바르트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계시로부터 역사를 향해 사고한다. 오직 이 길에서만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가 인식된다. 이러한 기초 위에서 '구원사'의 개념은 점차로 퇴색하고 '계약사'의 개념이 점차로 나온다. 계약사란 계약 안에서 진행되는 역사를 말한다. 바르트의 '하나님의 백성' 이해는 '계약사'와 어떤 관련을 갖는가? 그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일어나는 모든 역사는 계약사의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런데 바르트에게서는 구원사의 개념이 계약사의 개념에 의한 해명, 요약 혹은 전화되긴 했어도, 그의 교회이해는 근본적으로는 제 2 바티칸 공의회의 구원사적 교회이해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⑵ 바르트는 참된 보편적 교회에 대한 질문을 교회의 어떤 시간적 초기형태들과의 동일성에 대한 질문에만 국한시키려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시도에 이의를 제기한다.
⑶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는가? 교회에 속하는 것은 구원에 필수적인가? 바르트는 교회의 중개를 통하지 않고도 그리스도의 화해의 사건에 포함되는 은밀한 방식에 열린 태도를 보였다. 이런 점에서 그는 카톨릭 교회와 근본적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⑷ '하나님의 백성'의 개념은 구원사의 연속성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것의 역사적 의의를 보여준다. 교회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해하는 제 2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이해는 주요 강조점이 교회의 종말론적 역동성에 놓여 있다. 바르트에게서도 교회의 종말론적 역동성은 자신의 '교회 교의학' 안에서 점차로 큰 비중을 획득한다. 바르트는 "교회가 성도들의 공동체로서 하나님의 바라로부터 왔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나가고 있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한다. IV/3에서도 바르트는 도상에 있는 지나가는 교회의 실존을 강조한다. 교회는 이미 왔으나 아직 오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비유요 그 반사이다. 자신을 '완전한 사회'나 '지상의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의 실존 형태'로 보는 것을 과감히 포기하고 자기 갱신과 종말론적 희망 및 고통 당하는 자들과의 연대성을 선포한 제 2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헌장 '세상의 빛'은 바르트의 '세계사 한복판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과 매우 가까운 위치에, 아니 같은 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결론(요약과 평가)
⑴ 교회란 무엇인가? : 바르트에게 압도적으로 빈번한 교회개념은 '그리스도의 몸'이다. 로마서 주석 제 1판(1919년)에서 그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정의하고, 그것을 유기적으로 성장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공동체로 매우 유기적으로 이해했다. 로마서 주석 제 2판(1921년)에서 그는 교회의 일치를 구성하는 초월적 원리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제시했다.
⑵ 교회는 어떤 형태를 갖는가? : 바르트는 점차로 '직무'(Amt)'의 개념 대신에 '봉사'(Dienst)의 개념을 교회질서의 본질적 개념과 내용으로서 부각시키려고 했다. 화해론 IV/3에서는 교회의 질서가 명백하게 그리스도론적ㆍ교회론적 개념에 따라 '형제애적 그리스도통치'의 형태로, 즉 봉사의 형태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교회에서 적용될 법은 오직 봉사의 법으로서 명백하고 전체적이며 보편적이어야 한다.
⑶ 교회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 교회의 중심적 임무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에 귀착된다.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증언의 원천이요 그 근거 및 내용이기도 하다. 그런데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은 세계의 제반 관계로부터 분리된 고백이 아니라 당대의 시대사를 위해 결정되는 명확한 고백이다.
⑷ 교회의 미래는 무엇인가? : 바르트에 의하면 교회는 겨자씨 형태처럼 세워진 하나님 나라로부터 와서 나무형태처럼 완성되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나아간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의 기원이면서도 그 목표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에 세워진 지배, 그분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통치이다. 그분 자신이 곧 하나님의 나라이시다.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의 미래일 뿐만 아니라 전 인류의 미래이기도 하다.
출처: 이신건 지음 <성광문화사. 1989, p.301> [요약: 이 종 국]
고백교회와 바르멘 신학 선언
이신건 저 : 칼 바르트의 교회론 중에서
1. 정치와 교회의 상황
1920년대에 이르러 '독일과 독일국민'이라는 개념은 바이마르 공화국을 혐오하던 독일인들에게 하나의 고백적인 언어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 당시 사람들은 경제적, 정치적, 정신적인 어려움에 맞서서 이 개념을 이상화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말미암아 겪게 된 민족적인 모욕감, 정치적인 혼란, 경제 공황을 통해 발생한 6백만 명 이상의 실업자 등으로 인해 야기된 감정은 독일을 하나의 비합리적인 이상(理想)으로 끌어올렸다. '국민교회'(Volkskirche)의 이념도 은근히 혹은 분명히 이 이상과 결합되어 있었다. 교회에 속한 자들 중에서는 국민과 신앙이 분리되는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국가를 종교적으로 이해하기를 원하는 자들이 많이 생겨났다. 국민들의 운동이 점차 종교적인 색채를 띠게 되면서, 독일 국민, 독일 성서, 독일 전통을 모든 비독일적인 것과 대립시키려는 열망이 일어났고, 급기야는 독일 게르만적인 종교를 열광적으로 숭배하려는 경향이 일어났다. 점점 더 분명하게 독일 국민은 그 자신의 구원자로서 등장했고, 히틀러(Hitler)라고 하는 인물 속에서 그 구원의 창조자를 필요로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이른바 '독일 그리스도인들'(Deutsche Christen)의 운동이 일어난 배경은 다음과 같다. 1927년에 레플러(S. Leffler)와 로이트호이저(J. Leutheuser)라는 이름의 두 목사가 고백적인 신앙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한 나머지, 루터 교회로부터 탈퇴한 후, 튀링엔(Thüringen)의 자유스러운 교회에서 봉사했다. 이 교회의 강령은 '개신교회의 자유와 관용의 안식처'였다. 그들은 학생 그룹에 소속되어 노래와 무용, 오락 등을 통해 교회를 지도하는 방법을 배웠다. 교회 활동은 처음부터 인간을 그 자연적인 특성으로부터 이해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들의 관심은 음악, 놀이 외에도 국가 문제에 관한 토론에 있었다. 그들의 그룹에는 농부, 수공업자 및 각종의 노동자들도 속해 있었다.
이 교회 주변에서 일어난 노동 운동은 다분히 계급 의식을 띠고 있었고, 사회주의적이고 무신론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비라탈(Wiertal)에 국가사회주의 노동당(NSDAP)의 첫 지구당이 창당된 지 3년 후, 레플러, 로이트호이저 두 목사는 동일한 목적(특히 맑스주의 타도)을 가지고 이에 합류했다. 국가 사회주의 노동당과 교회의 활동 사이에 교류가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동일한 사람들이 두 단체에 속해 있었고 정신적인 지도자들도 같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1931년에 이들은 '독일 그리스도인들'이라는 명칭 아래 교회의 대표 선거에 참여하여, 60석 중에서 5석을 확보했다. 그 이후 이 운동은 다른 교회에서도 조직되었고, 1933년 1월경에는 주(州) 지방 차원에서 30%의 찬성을 획득하였다. 그에 앞서 열렸던 집회에서 이 새로운 운동은 성명서를 발표하여 사람들의 인기와 관심을 모은 적이 있었다. 그 성명서에서 그들은 "우리는 창조자를 통하여 독일 국민의 피와 운명의 공동체 속으로 태어났고, 그 곳에서 하나님의 과업을 수행해야 한다"고 천명했다.
이 운동은 교회 안에서 교회정치 활동을 통해 다수의 지원자들을 획득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 운동의 종교적인 핵심 사상은 레플러 목사를 통하여 표명되었다. "독일 그리스도인들의 과제는 독일이고 그 능력은 그리스도인이다." 그들은 전통적인 신학 체계를 비방하였고, 자연적인 국민 의식을 지도이념으로 삼았다. 그것은 브룬너(E. Brunner)나 아퀴나스(T. Aquinas)가 말한 '자연신학'이 아니라, 모든 신학적인 성찰을 벗어난 광신주의와 다름이 없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로이트호이저의 말에서 잘 드러난다.
진정으로 예수를 믿는 독일인은 히틀러 운동에서 하나님 나라의 정신을 새삼 감지할 수 있었다. 교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능력과 영원과의 유대감을 상실해 버린 수백만의 독일인들은 히틀러를 통해 다시금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믿는 법을 배웠다... 예수의 영이 독일을 통해 나타났고, 지옥의 권세를 압도하는 하나님 나라의 승리에 대한 신앙이 출현했다.
또 레플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영도자인 인물 속에서 독일을 역사의 주(主) 앞에 세우고 말의 예배, 레위인과 바리새인의 예배로부터 사마리아인의 거룩한 예배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사자(使者)를 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을 위해 목사가 되려고 결심한다.
튀링엔서 일어난 전국적으로 확산되어가던 '독일 그리스도인들'의 운동은 1932년에 베를린에서 동지를 얻게 되었다. 나치(Nazi) 정당의 지도자들은 교회 단체를 정복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중요한 일이라고 판단한 후, 호쎈펠트(J. Hossenfeld) 목사의 주도 아래 신앙 운동을 일으키게 했다. 이들은 튀링엔 사람들과 제휴하여 그들이 쓰던 '독일 그리스도인들'이라는 명칭을 채택했다. 그 후 이 운동은 여러 운동권으로부터 많은 회원들을 영입하여 거대한 조직으로 발전하였는데, 이 조직의 가장 중요한 교회 정치적인 목표는 루터적인 특징과 아리안 종족의 통일 제국 교회를 설립하려는 데 있었다.
사태가 이렇게 발전하자, 1933년 5월에 이 운동에 저항하는 '젊은 개혁자들의 운동'(Jungreformatorische Bewegung)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니묄러(M. Niemoller), 야코비(G. Jacobi), 퀸네트(W. Kunneth), 하임(Heim)과 같은 여러 교회적, 신학적인 특징을 갖춘 인물들이 대거 참여했다. 이 운동은 국가 감독직 선거의 후보자로 보델쉬빙흐(F. von Bidelschwingh)를 내세워 당선시켰으나, 몇주 후 그는 온갖 조작과 음모에 의해 그 자리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 대신에 히틀러가 배후에서 교회의 끄나풀로 삼기 위해 지목한 군목 뮐러(L. Muller)가 1933년 9월 27일에 열린 국가 총회에서 국가 감독에 선출되기에 이르렀다. '독일 그리스도인들'은 나치당의 도움을 받아 교회 선거에서 독일 개신교회(DEK)의 실권을 장악하여 놓은 후의 일이었다.
1933년 11월 13일에 되어 '독일 그리스도인들' 운동의 가담자들은 베를린 체육관에 모여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 성명서는 그들의 정체를 여실히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을 경악케 하였다. 이 성명서의 주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교회가 아리안 조항*을 속히 촉진시키고... 핏줄이 다른 모든 개신교인들을 그들 자신의 교회 안으로 결집시키며,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교회를 세우는 일을 도와주기를 기대한다. 우리는 교회가 독일국민의 교회로서 예배와 신앙 고백에서 다른 모든 비독일적인 교회, 특히 구약성서와 그 유대적인 보응 윤리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한다. 우리는 독일교회가 동양적으로 왜곡된 모든 요소를 청산한, 단순하고 기쁜 복음과 영웅적인 예수상을 진정한 기독교의 기초로 선포하길 요구한다. 이 기독교에서는 부끄러운 종의 영혼 대신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과 그 백성에 대한 의무를 절감하는 자랑스러운 인간이 등장해야 한다. 우리는 유일한 참 예배가 우리 백성들에 대한 예배라고 고백하며,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완성한 것으로 볼 수 있는, 오직 국가사회주의 국가의 절대적인 주장에 걸맞은 진정한 국민의 교회를 세우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투쟁의 교회로서 의무감을 지고 있음을 느낀다.
이 놀라운 선언을 통해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독일 그리스도인들'의 진정한 목적이 실로 무엇인지를 여실히 깨닫게 되었다. 이 선언서가 온 교회에게 던진 충격은 굉장한 반응을 일으켰다. 많은 사람들이 '독일 그리스도인들'의 운동으로부터 탈퇴했고, 이 운동은 여러 갈래로 찢겨졌다.
이 즈음에 '고백 교회'(Bekennende Kirche) 운동이 태동하기 시작했다. 이 운동은 1933년 7월에 예정된 '젊은 개혁자들의 운동'의 선거 소집서에서 처음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우리는 고백하는 교회를 위해 싸운다. 우리의 고백이 침해받고 있지 않다는 것으로는 족하지 않다. 교회는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서 증거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신앙한다는 것을 고백하는 법을 다시 새롭게 배워야 한다.
1933년 9월에는 베를린에서 니묄러 목사의 호소에 따라 '목사긴급동맹'(Pfarrernotbund) 이 결성되었다. 1934년에는 7,000명 이상의 목사들이 이 조직에 가담했으며, 그 이후로 독일 전역에 고백 교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
그러자 1934년 1월 4일에 국가 감독의 훈령이 발표되었다. 이것은 교회가 예배를 교회정치의 토론 목적을 위해 악용하지 말 것, 또 교회당이나 교회의 장소를 교회정치 집회의 통보 수단으로 허용하거나 이용하지 말 것, 그리고 문서, 비라, 회람을 통해 교회의 체제와 그 조치를 공공연히 혹은 공격하지 말 것을 명시했다. '목사긴급동맹'은 이에 맞서서 격렬한 저항을 시도했다. 그러자 연이어 파면, 교육, 침묵강요 등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국가감독은 교회에 대한 간섭을 더 강화하였고, 합병시도를 계속 추구했다.
이러한 조치들은 고백총회를 형성하는 실마리를 제공하였다. 니뮐러 목사의 주도 아래 코흐(P. Koch)는 1934년 5월 29일-31일 간에 바르멘(Barmen)에서 열릴 고백교회의 총회를 소집했다. 25개 주(州) 교회와 지역교회로부터 139명의 대표들이 참석하여, 신학의 문제점과 차이에도 불구하고 신학적, 법적, 영적인 문제에 합의하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로 종교개혁 이래 처음으로 독일 개신교인들은 '성서와 고백'이라고 하는 공동유산의 토대 위에 집결하여 하나님이 그들의 입에 의탁하셨다고 확신한 신앙 고백서를 온 세계 앞에서 천명하였다. '바르멘 신학선언'(Barmer Theologische Erklärung)는 하나님의 기적과 같이 나타났고, 교회 고백의 대헌장(大憲章)로서 기념비적인 가치를 갖게 되었다.
2. 바르멘 신학선언
<제1항>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이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요 10:1,9)
성서에서 우리에게 증언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들어야 하며, 사나 죽으나 신뢰하고 복종해야 할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이다.
우리는 마치 교회가 그 선포의 원천으로서 이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 외에, 그리고 그것과 나란히 다른 사건들, 권세들, 형상들 및 진리들도 하나님의 계시로서 인정할 수 있고 인정해야 하는 것처럼 가르치는 잘못된 가르침을 배격한다.
<제2항>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고전 1:30).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는 하나님의 판결인 것처럼, 또한 그와 조금도 다름이 없이 우리의 온 생명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강력한 주장이기도 하다. 그분을 통하여 우리는 이 세상에 얽매인 불신앙적인 예속으로부터 기쁘게 해방되어, 그분의 피조물에게 자유스럽게, 감사하면서 봉사하게 된다.
우리는 마치 우리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주(州)들에게 속하는 영역, 그분을 통한 칭의와 성화가 필요 없는 영역이 있는 것처럼 가르치는 잘못된 가르침을 배격한다.
<제3항>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상합하여..."(엡 4:15-16)
그리스도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과 성례전 속에서 성령을 통하여 주님으로서 현존하면서 행동하시는 형제들의 공동체이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은총을 입은 죄인들의 교회로서 죄많은 세상의 한 복판에서 그 신앙과 순종으로써, 그 사신(使信)과 직제로써 증거해야 할 것은, 자신은 오직 그분의 소유이며, 그분의 오심을 기다리면서 오직 그분의 위로와 교훈으로 살고 있고, 또 살기를 원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마치 교회가 그 사신과 직제의 형태를 자신의 기호에, 혹은 때때로 지배하는 세계관적, 정치적인 확신들의 변화에 내맡겨도 되는 것처럼 가르치는 잘못된 가르침을 배격한다.
<제4항>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으로 주관하고 그 대인(大人)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 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마 20:25-26).
교회 안의 다양한 직책들은 어떤 직책들이 다른 직책들을 지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온 공동체에 위탁되고 명령된 봉사를 수행하기 위한 기초이다.
우리는 마치 교회가 이 봉사를 떠나서 통치권을 부여받은 특별한 영도자들을 허용하거나 허용하게끔 할 수 있고 또 해도 되는 것처럼 가르치는 잘못된 가르침을 배격한다.
<제5항>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벧전 2:17)
성서는 우리에게 말한다. 국가는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다음과 같은 과제, 즉 교회도 속해 있는 아직 구원받지 못한 세상에서 인간의 통찰과 능력의 분량에 따라 권력으로써 위협하고 권력을 행사하면서 정의와 평화를 보호할 과제를 가진다. 교회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분을 경외하면서 이러한 그분의 섭리의 은혜를 인정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계명과 그분의 의, 그리고 통치자들과 피통치자들의 책임을 상기시킨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만물을 유지하시는 수단인 말씀의 능력을 신뢰하고 이에 복종한다.
우리는 마치 국가가 그 특별한 임무를 넘어서 인간 생활의 유일하고 전적인 조직이 되고, 그래서 교회의 사명까지 실현해야 하며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처럼 가르치는 잘못된 가르침을 배격한다.
우리는 마치 교회가 그 특별한 임무를 넘어서 국가적인 형태, 국가의 과제와 국가의 위엄을 취하고, 또 그리하여 자신이 유일한 국가의 기관이 되어야 하며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처럼 가르치는 잘못된 가르침을 배격한다.
<제6항>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딤후 2:9)
교회의 자유의 근거이기도 한 교회의 임무는 그리스도 대신에, 그리고 설교와 성례전을 통하여 그분의 말씀과 사역에 봉사하면서, 모든 백성에게 하나님의 값없는 은총의 복음을 전파하는 데 있다.
우리는 마치 교회가 인간을 스스로 높이면서, 주님의 말씀과 사역을 인간들이 임의로 선택한 어떤 소원, 목적 및 계획에 이용할 수 있는 것처럼 가르치는 잘못된 가르침을 배격한다.
3. 바르트의 투쟁
국가사회주의가 대두하고 독일교회가 이에 호응하려는 즈음, 스위스 출신으로서 독일의 본 (Bonn) 대학에서 강의하던 바르트는 가급적 정치 활동을 멀리하면서, 오직 신학 연구에만 몰두하고자 했다. 그러나 무능하고 술에 취한 자가 운전하는 위험한 차 속에 앉았을 때와 같이 위급한 독일의 정치적 상황 앞에서 바르트는 자신의 입장을 표명해야 할 필요성을 점점 더 절감하기 시작했다. 1931년 5월에 그는 독일 사회민주당(SPD)에 가입했다. 그에게서 정당 가입은 사회주의 이상과 세계관에 대한 신조 때문이 아니라 하나의 실천적인 결단이었다. 그가 독일 사회민주당에 가입한 것은, 그것이 노동자 계급의 정당, 민주주의 정당, 비군국주의적인 정당, 독일 민족을 긍정하는 정당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그는 스위스 사람이었지만, 독일 속의 스위스 사람이라는 자각 속에서 독일에 대한 그의 사랑과 소속감을 잊으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동료 덴(G. Dehn)이 전쟁에 관해 비판적인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할레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하다가 습격을 받고 퇴진을 강요당했을 때, 바르트는 적극적으로 그를 옹호하고 나섰다. 그리고 그는 파시즘을 하나의 종교로 규정하고서, 기독교가 거기에 적응하려는 유혹에 빠져드는 위험에 처해 있음을 경고하기 시작했다.
1933년 1월 30일에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하고 독일 백성이 우상을 경배하기 시작하자, 바르트의 태도는 현저히 적극적으로 변해갔다. '시간들 사이에서'(Zwischen den Zeiten)라는 잡지의 협력자인 고가르텐(F. Gogarten)이 '독일 그리스도인들'의 운동에 가담하자, 바르트는 그를 나치의 지성적인 선동자로 간주하고, 그로부터 공개적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그는 학생들로 하여금 일상적인 수업에 충실하도록 지도한 반면, 교회로 하여금 지배적인 세계관에 대항하여 복음에 따라 자신을 보존하도록 돕는 것을 자신의 의무로 생각했다. 1933년에 두 차례 행한 강연 '신학적 공리로서의 제1계명'에서 바르트는 계시의 개념을 인간의 실존, 질서, 국가, 민족 등과 같은 어휘들과 연관시키려는 모든 신학의 우상숭배적인 위험을 지적했으며, 모든 종류의 자연신학으로부터 결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만을 의지할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독일의 교회-정치적인 상황에 대한 바르트의 최초의 공개적인 태도 표명은 1933년 7월에 출판된 소책자 '오늘의 신학적 실존!'(Theologische Existenz heute!)에서 나타났다. 이 책은 히틀러에게도 증정되었으며, 압수되기까지 3.700 여부가 인쇄되었다. 여기서 바르트는 "교회가 신학적인 실존을 잃어버렸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인간의 정치적인 판단의 소리를 들으려고 하다가 교회가 자신의 본질을 망각했다. 하지만 성서가 주인이 될 때, 비로소 신학적인 실존이 있고, 교회개혁이 가능하다"고 외쳤다. 그 밖에도 그는 유대인 문제, 나치당의 독재적인 주장, 야당 탄압 등을 언급하면서, 나치에 도전했다. 1933년 10월에 행한 강연 '결단으로서의 개혁'(Reformation als Entscheidung)에서도 바르트는 "오늘날 교회에서 지배하는 운동은 종교개혁에 대한 불충실의 최종적 형태임"을 지적하고, 이에 맞선 저항을 호소했다.
바르트는 1934년 5월 31일에 채택된 '바르멘 신학선언'을 기초하는 작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물론 브라이트(T. Breit)와 아스무쎈(H. Asmussen)도 기초 위원으로 위촉되어 문안 작성에 참여했다. 그리고 사쎄(Sasse)와 알트하우스(P. Althaus)의 듯대로 '성례전'이라는 낱말도 문안에 추가되었다. 하지만 전체적인 구조와 내용으로 판단하면, 이 선언서는 실제로 바르트 자신의 문장과 다름이 없는 것이었다. 전형적으로 칼빈주의적인 문장으로 이루어진 기초안을 총회는 채택하였다.
그 후 히틀러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서약을 거부한 이유로 바르트는 교수직에서 해직을 당하였고, 1935년 2월에 학생들에게 이별사를 남기고, 강단을 떠났다. 그의 마지막 충고는 " 주석, 주석 그리고 또 한번 주석! ...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 성서를 굳게 붙들라"였다고 한다. 같은 해에 그는 홀랜드 우트레히트(Utrecht) 대학에서 16회에 걸친 강연 'Credo'(사도신경 해설)를 행하였다. 여기서 그는 신앙을 하나님의 현실의 인정, 결단 및 고백으로 정의했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이야말로 창조 신앙의 원천이기도 하다는 점을 역설했다.
1935년 5월에 바르트는 독일을 떠나 스위스로 되돌아갔으며, 바젤(Basel) 대학의 교수가 되어 온 세계로부터 몰려오는 많은 학생들을 가르쳤다. 1945년에 독일로 다시 여행할 수 있었던 그 때까지 그는 10여년 동안 뜨거운 애정과 비판적 동정을 가지고 독일과 함께 호흡하며 살았다. 스위스에 있으면서도 그는 매우 적극적으로 말과 문서로써 정치적인 투쟁에 참여했으며, 방송과 편지 등을 통하여 독일인을 비판하고 격려하였다. 이것은 나중에 '한 스위스인의 목소리'(Eine Schweizer Stimme)라는 책으로 발간되었다.
주요 참고문헌들
1. K. Barth, How my mind has changed.
2. K. Barth, Texte zur Barmer Theologischen Erklärung, Hrsg. von M. Rohkrämer, Zürich 1984.
3. K. Barth, Theologische Existenz heute! München 1984.
4. E. Busch, Karl Barths Lebenslauf.
5. A. Burgsmüller/R. Weth(Hrsg.), Die Barmer Theologische Erklärung(Einführung und Dokumentation), Neukirchen-Vluyn 1983.
6. D. Cornu, Karl Barth und die Politik, Wuppertal 1969.
7. K. Kupisch, Karl Barth in Selbstzeugnissen und Bilddokumentation.
8. R. Weth, "Barmen" als Herausforderung der Kirche, ThExh. Nr. 220, München 1984.
9. E. Wolf, Barmen, Kirche zwischen Versuchung und Gande, München 1957.
10. E. Wolf, Karl Barth zum Kirchenkampf, München 1956.
11. M, Schoch, Karl Barth: Theologie in Aktion, Frauenfeld/Stuttgart 1967.
출처:http://cafe.naver.com/modernth.cafe
첫댓글 내용 소개) 칼 바르트의 생애와 업적--->칼바르트의 저서 --->자유주의와 신정통주의 신학--->한국교회에서 칼바르트를 자유주의와 동일하게 보게된 배경 --->칼 바르트의 하나님나라 이해 --->칼 바르트의 화해론의 계약신학적 배경--->칼 바르트의 교회 교의학 화해론에 (KD IV,1-4) 있는 계약의 개념들--->신학적 공리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계약--->칼 바르트의 변증법--->칼바르트의 부활관 --->바르트와 타자의 해석학(종교신학과의 비판적 대화를 위해)--->칼 바르트의 하나님의 나라 이해 --->칼 바르트의 교회론 -요약 --->고백교회와 바르멘 신학 선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