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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클」 하린, 서울: 고요아침, p.429
I. 개요
1. 책소개
출판 문학수첩
발매 2019.03.29.
신개념 시 창작 안내서 ‘시클’ 출간
이론 중심 NO, 실기 중심 YES
슬럼프에 빠진 당신에게 찾아갈 명쾌한 창작 해법
『시클』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주관하는 2016년 우수출판콘텐츠제작지원 사업에 선정된 책이다. 시창작 이론서로는 이례적인 선정인데 기존의 이론서와는 변별점이 확연해서 선정됐을 것이다.
가장 눈에 띄는 변별점은 이론 중심이 아니라 실기 중심의 세세한 안내서라는 점이다. 시론에 관한 책이나 시창작 이론과 관련된 좋은 책들은 많다. 그런데 실제 창작 상황에서 활용 가능한 실기 중심의 책은 흔하지 않다. 시에 섬세함을 넣는 방법, 작위성 · 연출성 · 난해성을 탈출하는 방법, 개성과 스타일을 창출하는 방법, 시에 진정성과 깊이가 생기게 하는 방법 등 스물한 가지 이상의 창작 방법이 구체적으로 이 책에 담겨져 있다.
또 하나의 변별점은 책에 나오는 예문의 70% 이상이 현재(2016년 기준) 시단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젊은 시인의 시로 채워져 있다는 점이다. 보통 창작이론서는 근대문학 초창기에서부터 오늘날까지 활발하게 활동한 시인들의 시를 예문으로 인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 책은 고집스럽게 시적 감각에 초점을 맞추고 감각적인 시세계를 보여준 젊은 시인들의 시들만 집중적으로 인용했다. 그래서 시창작을 배우는 습작생들과 슬럼프에 빠져 있는 시인들에게 ‘실감’을 전해주는 역할을 할 것이다. ‘동시대의 감각’이 고스란히 담긴 예문을 읽고 자기 자신의 시와 비교하면서 미흡했던 부분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예스24 제공]
2. 저자소개
저자 : 하린- 시인, 문장 노동자, 시창작 지도자
2008년 『시인세계』 신인상으로 시 등단, 시집 『야구공을 던지는 몇 가지 방식』, 『서민생존헌장』, 『1초 동안의 긴 고백』이 있고 연구서로는 『정진규 산문시 연구』가 있음. 중앙대 일반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음. 중앙대, 한경대, 광주대, 협성대, 서울시민대, 열린시학아카데미, 고양예고 등에서 글쓰기 및 시창작 강의. 계간 『열린시학』 부주간을 맡고 있음. 첫 시집으로 2011년 청마문학상 신인상, 두 번째 시집으로 제1회 송수권시문학상 우수상, 2016년 한국해양문학상 대상을 수상했음. 『시클』이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2016년 우수출판콘텐츠제작지원 사업에 선정됨.
3. 추천글
시는 경험의 발견이고 확장이다. 경험에 상상력을 섞어 시를 빚는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슬럼프를 겪는다. 시쓰기의 문제점과 해결책을 조목조목 알려주는 책이 있다면 도움이 되겠다. 하린의 『시클』은 ‘슬럼프에 빠진 당신에게 찾아온 21가지 질문’이란 부제가 붙어 있다. 읽어보니, 시 창작법 안내서이자 ‘시 클리닉’을 위한 책이다. 하린은 좋은 시의 조건들을 짚고, 스타일과 개성을 불어넣는 방법을, 그리고 시의 다양한 수사법에 대해 논한다. 그 논의가 세세하고 실전적이라는 점에서 다른 시 창작법 책과 변별된다. 자신의 시뿐만 아니라 김경주, 권혁웅, 송승언, 김소연, 이원, 김진규, 신철규, 김병호, 김이듬, 이제니, 임봄, 이수명, 안희연, 박찬세, 강성은, 장이지, 유홍준, 이소연, 기혁, 이혜미…… 등 주목받는 젊은 시인들의 시를 예로 제시한다. 이 책을 훌륭한 시 엔솔로지로 읽을 수 있는데 이 점은 뜻밖의 선물이다. 시 창작자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4. 목차
■머리말 및 시 창작에 대한 몇 가지 오해 Q & A
제1장 남들이 다 쓴 것 같아요 무엇을 써야 하나요?
1. 하늘 아래 새로움은 없다
2. “아! 이거다” 하는 순간에 생각해야 할 것들이 있다
3. 경험의 확장이 필요하다
4. 극단까지 가서 만나는 단 하나의 장면을 최종 선택하라
제2장 시적 진정성은 어떻게 확보되나요? ― 좋은 시의 조건 1
1. 진정성이 발현되는 전체 과정을 알아보자
2. 진지한 태도로 써라
3. 비유적 방법을 활용하라
4. 풍자적 방법을 활용하라
제3장 몰입성은 어떻게 생기나요? ― 좋은 시의 조건 2
1. 독자는 냉정하다
2. 하나의 시적 대상만 가지고 써라
3. 하나의 장면만 가지고 써라
4. 하나의 이미지만가지고 써라
제4장 진실되게 썼는데도 솔직성이 부족하대요 ― 좋은 시의 조건 3
1. 인식과 태도를 알몸의 상태로 두어라
2. 솔직성이 갖는 단점을 극복하라
3. 교묘하게 솔직성을 섞어보자
4. ‘나’를 드러내는 것을 절대 두려워 하지 마라
5. 참된 풍자는 솔직한 태도에서 나온다
제5장 미묘한 관계성은 어떻게 표현하나요? ― 좋은 시의 조건 4
1. 관계성을 드러내는 세 가지 축이 있다
2. 타자와의 미묘한 관계성을 잡아내라
3. 사람이 아닌 대상과도 미묘한 관계성이 성립된다
4. 합성어 안에도 관계성이 있다
5. 발상의 전환으로 관계성을 그려내라
제6장 구체성 안에 암시성을 담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요? ― 좋은 시의 조건 5
1. 구체성 없는 암시성은 무용지물이다
2. 구체성을 먼저 확보해라
3. 상징기법을 활용하라
4. 추상과 관념일수록 구체성은 필수다
제7장 시에 섬세함을 잘 넣을 수 있는 방법은 없나요? ― 좋은 시의 조건 6
1. 현미경 기법과 내시경 기법을 적용하라
2. 차이에 주목하라
3. 적극적으로 다가가 밀착하라
4. 작은 균열이 더 매력적이다
5. 상상력을 동원할 때도 섬세함을 잃지 마라
제8장 본심에만 머물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 좋은 시의 조건 7
1. 당선자를 뽑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2. ‘낯설게 하기’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펼쳐라
3. 역설적 사유를 활용해라
4. 발상의 전환은 과감하게, 자연스럽게 해라
5. 경쾌한 화법으로 솔직한 태도를 보여줘라
제9장 새로움에 대한 콤플렉스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나요?
1. 새롭게 보이는 시는 어떤 시인가?173
2. 개별 정서와 개별적 태도는 어떻게 만드나요?175
3. 시적 대상도 개별화 시켜라180
4. 작고 단순한 속성을 가진 상관물을 활용하라184
제10장 작위성, 연출성과 난해성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나요?
1. 숨김에 집착하지 마라
2. 환상적 리얼리즘을 활용하라
3. 몽상에게도 리얼리티가 필요하다
4. 직방으로 정서를 이미지와 함께 던져라
제11장 내 시에 개성과 스타일이 없다고 지적해요
1. 스타일은 형식 + 내용에서 비롯된다.
2. 순수서정 + α 방식이 있다
3. 모더니즘 + α 방식이 있다
4. 리얼리즘 + α 방식이 있다
제12장 제 시를 보고 건조한 시래요 경직성에서 벗어날 순 없나요?
1. 비법은 생체성이다
2. 생체성은 단순한 의인법이 아니다
3. 몸성과 관련된 단어를 최대한 활용하라
4. 모든 대상 안에서 몸성을 꺼내는 연습을 하라
5. 1인칭 주인공 시점이 몸성에 더 유리하다
제13장 내 시엔 깊이가 없대요 깊이를 넣을 수 있는 방법은 없나요?
1. 단순하고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것을 활용하라
2. 화자를 적극적으로 개입시켜라
3. 타자와 철저히 하나가 되어라
4. 극단까지 가는 상상적 체험을 하라
제14장 화법을 다양하게 하는 방법은 없나요?
1. 설의법을 활용하라
2. 도치법과 생략법을 활용하라
3. 명사형 어미를 활용하라
4. 다양하게 섞어서 활용하라
5. 대화체를 활용하라
제15장 행의 끝이 맨날 ‘다’로만 끝나요
1. ‘~다병’은 화법의 단조로움으로 이어진다
2. 다양한 행 처리를 배워보자
3. 산문시로 변화를 주자
제16장 시가 자꾸 짧게만 써져요 길게 쓸 수 있는 방법은 없나요?
1. 짧은 시를 선호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
2. 꼬리물기 방식을 활용하라.
3. 꼬리물기 + 변화주기 방식을 적용하라
4. 문장의 호흡을 길게 하라
5. 타인과 밀착해서 대화해라
제17장 동일화를 다양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나요?
1. 대상이나 타자 안에 살고 있는 화자를 체험하라
2. 화자나 타자 안에 살고 있는 대상을 체험하라
3. 대상 속에 거주하다 밖으로 빠져 나온 존재를 체험하라
4. 화자나 타자 안에 거주하다 빠져나간 대상을 체험하라
제18장 ‘낯설게 하기’를 새롭게 할 순 없나요?
1. ‘낯설게 하기’는 언어유희가 아니다.
2. 기표와 기의의 만남을 지연시켜라
3. 시공간에 대해서도 낯설게 하기를 할 수 있다
4. A도 B할 수 있다는 상상을 하라
5. 이질적인 것을 병치하라
제19장 인유와 직유를 세련되게 구사할 수는 없나요?
1. 인유의 방법
2. 직유의 방법
제20장 시작도 어려운데 끝은 더더욱 어려워요
1. 세련되게 시작하는 방법
2. 마무리를 노련하게 하는 방법
제21장 그 밖의 질문들
1. 제목 짓기의 노하우는 없나요?
2. 시어를 풍부하게 할 수는 없나요?
3. 중심축을 감각적으로 표현할 수는 없나요?
4. ‘시에 양념 좀 넣어라’는 무슨 뜻인가요?
5. 간절함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없나요?
6. 필사 말고 묘사 능력을 기를 수 있는 방법은 없나요?
7. 다 쓴 다음 점검해야 할 것들에는 무엇이 있나요?
8. 추가로 알려줄 기법은 없나요?
[예스24 제공]
5. 수록된 작품 (11편)
1) 소주병 / 공광규
술병은 잔에다
자기를 계속 따라주면서
속을 비워간다
빈 병은 아무렇게나 버려져
길거리나
쓰레기장에서 굴러다닌다
바람이 세게 불던 밤 나는
문 밖에서
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나가보니
마루 끝에 쪼그려 앉은
빈 소주병이었다.
2) 바닥경전 / 박혜림
엎드려야 보이는
온전히 몸을 굽혀야 판독이 가능한 전(典)이 있다
서 있는 사람의 눈에 읽힌 적 없는
오랜 기록을 갖고 있다
묵언의 수행자도, 맨발의 현자도 온전히 엎드려야만
겨우 몇 글자를 볼 뿐이다
어느 높은 빌딩에서 최첨단 확대경을 들이대고
글자를 헤아리려 들었지만
번번이 실패하였다
일찍이 도구적 인간의 탄생 이후밤새 달려야만 수평선을 볼 수 있다고 믿게 되면서
바닥은 사람들에게서 점점 더 멀어졌던 것이다
온전히 걷지 못하는 사람들이
울긋불긋 방언을 새겼던 것이다
빗물이 들이치고 폭풍이 몰아치면서
웅덩이가 패었고 글자들이 합해졌거나 떨어져나가
텍스트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일생을 대부분 엎드려 산 사람은
상형문자가 되어버린 이 경전을
판독해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다만 손끝으로 감아올린 경전經典의 구와 절에
바닥이 힘껏 이빨을 박고 있어 애를 먹을 뿐이라는 것이다
3) 서울역 석실고분 / 하린
대한민국이 자랑하는 서울역 돌방식 무덤에서
한 남자의 시체가 발견되었다면
누군가 발로 툭 건드리자
덮고 있던 신문지 관이 열렸다면
세상에 공개된 남자의 얼굴이 낯선 부족처럼 느껴졌다면
그는 분명 전사임에 틀림없다
치열한 영역 다툼으로 머리카락이 헝클어져 있고
온몸에 피멍이 솟았다면
군용잠바 왼쪽 주머니에서 선사시대의 사진이 발견되었다면
중년여자와 어린 딸이 박제되어 있었다면
그가 마셨을 것으로 추정되는 병 속에 이물질은
분명 전투에서 패배한 자들이 자주 찾는 독극물이다
바지 주머니를 뒤질 때 예상대로 로또 복권 한 장과
폐쇄된 사냥터에서 쓸 수 있는 무료 배식권이 나왔다면
그는 분명 부족의 깨끗한 미래를 위해 제거된 무녀리다
관리자들은 관을 연뒤 한 시간 만에 결론에 도달한다
“10년 만의 한파, 신원 미상의 남자 하나 얼어 죽음”
당신과 당신의 그림자가 이런 보고서를 봤다면
분명 당신은 죽은 남자와 같은 연대기에 사는 공복이다
4) 봄밤 / 권혁웅
전봇대에 윗옷 걸어두고 발치에 양말 벗어두고
천변 벤치에 누워 코를 고는 취객
현세와 통하는 스위치를 화끈하게 내려버린
저 캄캄함 혹은 편안함
그는 자신을 마셔버린 거다
무슨 맛이었을까?
아니 그는 자신을 저기에 토해놓은 거다
이번엔 무슨 맛이었을까?
먹고 마시고 토하는 동안 그는 그냥 긴 관(管)이다
그가 전 생애를 걸고
이쪽저쪽으로 몰려다니는 동안
침대와 옷걸이를 들고 집이 그를 마중 나왔다
지갑은 누군가 가져간 지 오래,
현세로 돌아갈 패스포트를 잃어버렸으므로
그는 편안한 수평이 되어 있다
다시 직립인간이 되지는 않겠다는 듯이
부장 앞으로 목이 굽은 인간으로
다시 진화하지 않겠다는 듯이
봄밤이 거느린 슬하,
어리둥절한 꽃잎 하나가 그를 덮는다
이불처럼
부의봉투처럼
5) 아파트가 운다 / 최금진
가난한 사람들의 아파트엔 싸움이 많다
건너뛰면 가닿을 것 같은 집집마다
형광등 눈밑이 검고 핼쓱하다
누군가는 죽여달라고 외치고 또 누구는 실제로 칼로 목을 긋기도
한다
밤이면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이
유체 이탈한 영혼들처럼 길다란 복도에 나와
열대야 속에 멍하니 앉아 있다
여자들은 남자처럼 힘이 세어지고 눈빛에선 쇳소리가 울린다
대개는 이유도 없는 적개심으로 술을 마시고
까닭도 없이 제 마누라와 애들을 팬다
아침에 보면 십팔 평 칸칸의 집들이 밤새 욕설처럼 뱉어낸
악몽을 열고 아이들이 학교에 간다
운명도 팔자도 모르는아파트 화단의 꽃들은 표정이 없다
동네를 떠나는 이들은 정해져 있다
전보다 조금 더 살림을 말아먹은 아내와
그들을 자식으로 두고 죽은 노인들이다
먼지가 풀풀 날리는 교과서를 족보책처럼 싸짊어지고 아이들이
돌아오면
아파트는 서서히 눈에 불을 켠다
이빨이 가려운 잡견처럼 무언가를 갉아먹고 싶은 아이들을 곁에
세워놓고
잘 사는 법과 싸움의 엉성한 방어자세를 가르치는 젊은 부부는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
밤이면 아파트가 울고, 울음소리는
근처 으슥한 공원으로 기어나가 흉흉한 소문을 갈기처럼
세우고 돌아온다
새벽까지 으르렁거린다
십팔, 십팔 평 임대아파트에 평생을 건 사람들을 품고
아파트가 앓는다, 아파트가 운다
아프다고 콘크리트 벽을 쾅쾅 주먹으로 머리로 받으면서 사람
들이 운다
6) 샌드위치맨 / 신철규
그는 무심과 무관심 사이에 있다
그는 좀 더 투명해져야 한다
그는 처음에 모자와 마스크로 변장을 했지만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의 변장인 것을 깨닫는다
그는 아침마다 거울을 보고 입술을 지운다
그는 앞뒤를 구분하지 못한다
그는 말과 말 사이에 갇혀 걷는다
말의 고삐에 꿰여 말의 채찍질을 받으며
그는 납작해진다
그는 양면이 인쇄된 종이가 된다
사람들이 그를 밟고 간다
그의 온몸은 발자국투성이다
어제는 피켓을 든 한 무리의 시위대와 함께 걸었다
그는 목소리가 없어 추방당했다
그는 앞뒤로 걸친 간판을 벗고
그늘에 앉는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 낀 그늘
그림자와 그림자가 겹쳐 더욱 짙어지는 그늘
사람들은 그가 그렇게 두툼한 줄 그제야 알아본다
7) 대화 / 김진규
메마른 나무옹이에 새 한 마리가 구겨져있다
다물어지지 않는 부리 위를 기어 다니는 어두운 벌레들
작은 구멍에 다 들어가지 않는 꺾인 날개가
바람에 흔들리는 이파리들의 그림자를 쓰다듬고 있다
누군가가 억지로 밀어 넣은 새의 몸을 오래도록 들여다본다
나도 분명 그런 적이 있었을 것이다
어울리지 않았던 것들의 속을 채워보기 위해
아귀가 맞지 않는 열쇠를 한 번 밀어 넣어 보듯이
혼자 날아가지도 못할 말들을 해본 적이 있었을 것이다
둥근 머리통을 한참 보다가 눈이 마주친다
이쪽의 눈과 저쪽에 있는 새의 눈이 마주치자,
여태껏 맞아본 적 없는 햇빛이 머리 위로 쏟아진다
머리통이 간지러워져서,
나도 어딘가 머리를 드밀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방에서 방으로 옮겨갈 때의 걸음을 생각해보니
나는 언제나 이곳과 저곳의 국경을 넘는 사람인 거 같아
누워있는 사람의 말을 대신 전할 때
구겨진 새의 몸을 손으로 감싸서 누구한테 내밀 듯
나도 어떤 말인지 모를 말들을 했던 것 같아
새의 부리가 날보고 웅얼거리는 것 같아서
내 귀가 어쩌면, 파닥거리다가 날아갈 것 같아서
나무옹이를 나뭇가지로 쑤신다
좀 더 따뜻한 곳으로 들어가라고
삼키지 못할 것들을 밀어 넣듯이 밀어 넣는다
8) 내간(內簡) / 기혁
현미경으로 본 바늘 끝에는 운동장만한 대지(大地)가 있었다
귀를 대어보면 바람소리나 희미한 웃음소리 같은 게 들려올 것도 같았다
피 묻은 몽당 빗자루가 묵어 도깨비가 된다는 속설처럼 누군가를 찌른 바늘도
장롱 밑바닥에 앉아 요물(妖物)이 된 건 아닌지
배율을 높인 바늘 끝에는 흩어진 일가(一家)의 혈흔이 보였고
한 사람의 것으로 짐작되는 콧김과 머릿기름 따위가 뭉쳐있었다
손을 따는 것은 자신의 체취(體臭)를 핏줄 속에 흘려 뒤엉킨 매듭을 푸는 일이지만
미처 희석되지 못한 체취는 몸 속 어딘가에 박혀 사람의 모습으로 깊어지기도 할 텐데
매일 저녁 바늘귀에 눈을 맞추며 살아온 사람과
조금씩 줄어드는 바늘의 면적을 그리워하던 사람에게
한 땀 비련(悲戀)은 무딘 바늘을 주고받고서야 완성되는 겨를일까
살에 닿기 직전 가장 은밀해지는 연애를 간수하고 나면
열 손가락을 따고서도 내려가지 않던 기별이 체증(滯症)으로 남는다
시원하다, 어머니의 등을 두드리며 읽어낸 문장 속에서 아내의 뒷모습이 겹칠 때
나라는 바늘도 직진을 멈추고 몸을 휜다
노련한 복화술사의 얼굴을 내밀듯 휘어진 속내를 기운 적이 있다
9) 놀란흙 / 마경덕
뒤집힐 때 흙도 놀란다
쟁기 삽 괭이 호미 쇠스랑 포클레인… 누가 제일 먼저 괭잇날에 묻은 비명을 보았을까
낯빛이 창백한, 눈이 휘둥그런
겨냥한 곳은 흙의 정수리거나 잠든 미간이거나,
흙의 표정을 발견한 누군가의 첫 생각, 그때 국어사전에 놀란흙이라는 명사가 버젓이 올라갔다
흙의 살붙이, 지렁이 땅강아지 개미 두더지
그것들이 가랑이를 헤집어 집을 짓고 길을 내도 놀라지 않는다
나무뿌리, 바위뿌리에도 덤덤한 흙이
사람만 보면 왜 그리 놀라는지,
흙의 나라
태초에 그곳에서 태어난 사람을 닮은 흙의 심장은 사람을 잘 알고 있다
공사장 주변, 포클레인이 파헤친 땅
매장된 산업폐기물을 껴안고 까맣게 죽어있었다
싱싱하던 흙빛은 흑빛이었다
소심하고 겁 많은 아버지는 흙집으로 들어가
더는 놀라지 않고,
나는 아직 살아있다. 그래서 자주 놀란다
10) 죽순 / 이병일
수상하다, 습한 바람이 부는 저 대밭의 항문
대롱이 길고 굵은 놈일수록 순을 크게 뽑아 올린다 깊숙이 박혀있던 뿌리들이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푸른 힘을 밀어내고 있다 댓잎이 쌓여있는 아랫도리마다
축축이 젖어 뾰죽 튀어나온 수만의 촉이 가볍게 머리 내밀고 뿌리는 스위치를
올릴 것이다
난, 어디로부터 나온 몸일까?
대나무 숲, 황소자리에서 쌍둥이자리로 넘어가는 초여름이다 땅속에서는 어둠
을 틈타 안테나를 내밀 것이다 난 초록의 빛을 품고 달빛 고운 하늘에 뛰어오를
것이다 대나무 줄기가 서로 부딪쳐 원시의 소리를 내는 아침, 날이 더워질수록
물빛 속살을 적시며 얕은 잠을 자고 있었던가 초승달이 보름달을 향해 갈수록,
난 허공으로 솟구쳐 올라 하늘에 닿을 때까지 단전에 힘을 줄 것이다 대나무향
이 하얗게 깔리는 밤, 튀어나온 뿌리 마디마다 젖무덤처럼 불어올라 포개져있는
껍질을 열어젖힐 때, 댓잎에 미끄러진 햇빛이 푸른 옷을 던질 것이다 나는 마침
내 문을 열었다
11) 종이감옥 / 나희덕
그러니까 여기, 누구나 불을 끄고 켤 수 있는 이 방에서, 언제든 자유롭게 문을 잠그고 나갈 수 있는 이 방에서, 그토록 오래 웅크리고 있었다니
묽어가는 피를 잉크로 충전하면서
책으로 가득 찬 벽들과
아슬아슬하게 쌓아놓은 서류 더미들 속에서
이 책에서 저 책으로 이 의자에서 저 의자로 옮겨다니며
종이 부스러기나 삼키며 살아왔다니
이 감옥은 안전하고 자유로워
방문객들은 감옥이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지
간수조차 사라져버렸지 나를 유폐한 사실도 잊은 채
여기서 시는 점점 상형문자에 가까워져간다
입안에는 말 대신 흙이 버석거리고
종이에 박힌 활자들처럼
아무래도 제 발로 걸어나가기는 어려울 것 같다
썩어문드러지든지 말라비틀어지든지
벽돌집이 순식간에 벽돌무덤이 되는 것처럼
종이벽이 무너져내리고
어느날 잔해 속에서 발굴될 얼굴 하나
종이에서 시가 싹트리라 기다리지 마라
그러니까 오늘, 이 낡은 방에서, 하루에 겨우 30분 남짓 해가 들어오는 이 방에서, 위태롭게 깜박이는 것이 형광등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되다니
II. <독후활동>-창작시
1) [간재미] 가은미
홍어 사촌뻘 앗싸 가오리
그의 새끼 간자미라 부르면 간이 싱거울 것 같은 간재미가
낚시줄을 삼킨 채 좌판에서
마지막 남은 목숨을 확인하려는지
날개를 퍼덕인다
지나가는 행인을 불러 모으는 생선가게 사장님의 재미진 입담
간재미무침, 간재미찜, 매운탕맛은 더 끝내줘요
이 봄에 입맛 돋구는 소리다
버릴게 없어, 꼬리 자르고 요 입과 내장만 빼면 다 먹어
간재미 요리는 전혀 경험없지만
그중 제일 날뛰는 놈을 골라
까만 비닐봉지를 대롱거리며 들고왔다
씽크대에 펼쳐 놓다 손으로 살짝 스쳤는데
간재미는 거부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남아있던 기름 한방울까지 쥐어짜냈는지
자기몸에 투명유리처럼 보호막을쳤다
빙판위에 기름을 뿌린 것보다 미끄러워
만질 수도 잡을 수도 없었다
움직임이 없는 걸 보니 이미 숨은 다 끊어진 것 같았다
입에 걸린 낚시줄을 살그머니 잡아 당기자
야아앞!!!
입을 쭉 내밀고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히죽 웃고 있는 게 아닌가
그야말로 앗싸 가오리를 외치고 있었다
아이구머니나!
칼을 들었다 가위를 들었다
이미 내 정신은 이성을 잃고 혼미해졌다
가뿐 심장아 나대지마
전에 간재미찜이랑 간재미무침 맛있게 먹었었잖아
맛있게 먹었던 기억은 전혀 회상되지 않고
토막쳤던 고등어의 빨간 피, 끌려 나오는 내장들,
상추 모가지의 하얀 피 등
가슴속 저 깊이 잠들어있던 죄가 선명하게 솟구쳐 올라왔다
주문을 외웠다
이건 요리야, 내 가족이 먹을 음식이라구
허나
심장은 지금껏 벌렁거리고 있다.
2) [엄마에게] 김혜진
내가 태어난 날은 아무도 없었다.
술에 취해 갓길에 앉아있던 남자를 발견하지 못한
택시가 사라졌고
엄마는 혼자였다가 나의 눈을 만나는날
가장 영롱한 별을 만졌다.
엄마는 나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내가 태어나 울던 소리와
처음눈을 맞추고 까르르 웃던 날과
첫니를 빼 손수건에 싸놓은일과
잘게 음식물을 씹는지 뱉는지 볼의상태를 알고
어금니를 지나 목으로 넘겨
얼굴과 손발이 커지고
우주만큼 땅만큼 사랑한다는 완전한 고백의 말들을
그러다 엄마는 아무것도 몰랐다.
내가 왜 혼자 책읽기를 좋아하는지
먹어도 입어도 허기지는 외로움의 깊이를
환한 18호 파운데이션에 입술을 덮어
라인을 그려 모양을 찍어내다 그만두고
낯선 또다른 여자와 대면하고 있는지를
그렇게 엄마는 떠들고 나는 귀를 막고 떠나왔다.
지금의 엄마라면 어떻게 했을까?
방황하는 밤하늘의 별만큼 이방인의
한없는 내 슬픔을 그곳까지 전할 수 있을까?
날 떠나려는 사람들을
수용하고 포용할수 있을까?
엄마에게 물어볼 수만 있다면
내가 행복을 좀더 껴안을 수 있었을텐데
(해설) 함께 하지 못해 아쉬웠지만 안국환 선생님의 감사한 동영상을 통해 잘 들었습니다. 저에게 시클이라는 책은 새로운 작품을 많이 만날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으며 그 시들을 통해 부족해서 글을 낸다는게 염치없기까지 하는데 냈습니다. 저는 딸이 엄마에게 성장하면서 느끼는 감정을 적어보고 싶었습니다. 특히 지난번 희진 샘의 주인공을 생각하면서 써보았습니다. 두리요. 그리고 제가 봉사활동을 했던 탈북민 여자아이를 생각하면서요. 딸은 아빠 없이 딸을 키우는 애닮고 사랑하는 엄마. 4살때 나의 모든 것을 다 아는 엄마 그러다 사춘기가 되면 서 부터 성장하면서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엄마. 친구들 사이에서 약간은 다른 외모 즉 눈과 입술이 크고 선명하며 약간 피부색도 까만 다른 이방인의 모습으로 성장하는 아이... 3-4-50 남편을 만나고 애를 낳고... 하지만 그 절절히 모든것을 들어줬던 엄마가 돌아가시고 안계실때의 자녀의 입장을 쓰고 싶었는데... 첫문장 잘 나가다가 그다음은 엉망이 되더라고요^^
3) [목구멍의 실체] 권희진
“너의 이름이 욕망이라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혀 안에 숨기렴”
나는 미카엘이 준 목구멍이라는 것을 덜컥 받아 삼켜버렸다.
욕망이 만든 길로 생명은 녹아내리고, 그곳엔 미끈한 사막으로 남았다.
오늘 내가 삼킨 음식과, 숫자를 세던 마른침이 수직 낙하하는 곳에서 차라리 미카엘의 충고를 삼치지 않았더라면 나와 당신의 오늘은 어제와 다른 모습이었을까.
순간 차이코스프키 바이올린 협주곡 속 비브라토를 닮은 첫 사랑의 눈물은 시간을 뒤틀며 또 한번 나를 떠나고
가끔씩
무엇이 되고자 되고 싶었던 순간은 심장 역류성 폭포처럼 불쑥 머리를 내밀고 여전히 이뤄지지 않은 것들이 장탄식의 벽의 틈 사이에서 희번득거린다.
허기진 절규로 단단해진 길, 그것이 목구멍이 실체였다.
4) [수선화] 힐러리2
<cf. 첨부 파일 그림 위>
5) [꿀 샘물 위에 핀 봄 꽃] Andrew
III. 독서 토론회 영상물(파일참조)
IV. [Billy Collins]의 <겨울 문장론> p.329 Andrew
<사랑의 역사>에서 Postmodernism의 글을 읽었는데 제18장 ‘낯설게 하기’를 새롭게 할 수 없나요?
이 대목에서도 Modernism과 Postmodernism을 찾아 볼 수 있다.
Modernismdl 규칙성, 이성성, 효율성, 남성성을 내포하는 사상이라면,
포스트모더니즘은 그 반대의 속성으로
"이성 자체가 문제를 지니고 있으며, 이성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사상이다.
p.329 제18장에서 <낯설게 하기>가 postmodernism 의 시라고 보면서
러시아형식주의의 강조된 문학적 수법이라고 한다.
이것은 가짜가 아니라 예술가와 예술작품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상황에서 시 분야도 현대사회에서 익숙한 것을 재생산하는 일은 무의미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 時作者들도 <낯설기 하기>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Billy Collins]의 소개
2015 년 빌리 콜린스라 하다
원래 윌리엄 제임스 콜린스로 1941 년 3 월 22 일 (80 세) 태어나 현재 나이이며, 뉴욕, 미국에 거주하다
아내로 수잔나 게일 콜린스, 그의 직업은 교수, 시인, 책 작가, 선집가
교육은 College of the Holy Cross (BA) University of California, Riverside (MA, PhD)
뉴욕 시립 대학교 리먼 대학의 저명한 교수이다 (2016 년 은퇴). 콜린스는 뉴욕 공립 도서관 (1992)의 문학 라이온으로 인정 받고 2004 년부터 2006 년까지 뉴욕 주 시인으로 선정되다. 2016 년에는 미국 예술 및 문학 아카데미에 가입하다. [3] 2020 년 현재 그는 Stony Brook Southampton의 MFA 프로그램 교사이다.
주목할만한 작품: 파리를 놀라게 한 사과, 천사에 대한 질문, 익사의 기술
주목할만한 상: 미국 시인 수상자 (2001-2003) Norman Mailer Prize for Poetry (2014)
<겨울 문장론>
직유법을 많이 쓰고 있다.
문장은 외로운 여행자처럼 출발하여
2연 둘째줄 예를들면 제스처의 감식가처럼
소녀의 얼굴을 꽃병처럼...
5연 그러나 여행자는 비참함을 고집한다
사람이 아니고 문장이 여행자이다.
p.331 4행에서
언뜻 보면 ‘낯설게 하기’에서 모더니즘계통의 시들이 더 유리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오히려 그 반대다.
모던니즘계통의 시는 자기 중심적인 입장에서 쓰여진 시가 많기 때문에 ‘난해성’문제에서 자유로울수가 없다.
너도나도 난해성이라는 비슷한 색깔의 옷을 껴입고 창작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도리어 변별성이 없을 확률이 높다고 하린 저자는 말한다.
그의 특성은 pp.330~334에 잘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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