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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봉수 유고 시집, <미안하다>, 푸른사상, 2014. 5.
반(反)근로기준법의 시학
맹문재
1.
육봉수 시인은 한국의 시문학사에서 반근로기준법의 시인으로 불릴 것이다. 그렇게 불려야 할 것이다. 그가 한국의 시인 중에서는 처음으로 근로기준법을 전면적으로 작품화했기 때문이다. 근로기준법을 단순히 제재로 삼은 것이 아니라 실제의 적용에서 무엇이 문제인가를 노동자의 입장에서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모순점에 맞섰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의 작품은 노동시의 영역을 한층 더 확장시키고 심화시키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근로기준법은 1953년 대한민국 법률 제286호로 제정되었다. “헌법에 따라 근로조건의 기준을 정함으로써 근로자의 기본적 생활을 보장, 향상시키며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제1조)고 규정하고 있듯이 노동자를 보호한다는 취지에서 만든 것이다. 사용자의 힘이 남용되는 것을 막아 노동자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키려는 것이었다.
노동자의 지위를 향상시키는 방법으로는 근로기준법처럼 사용자의 행위를 규제하는 것과 노동조합을 통해 스스로 마련하는 것이 있는데,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통해 마련하는 것이 보다 타당하다고 여긴다. 그만큼 근로기준법은 노동자들로부터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다. 개별 노동자의 권리는 개별적으로 실현되는 것이기에 근로기준법은 매우 중요한데도 노동자들은 기대하지 않는 것이다.
근로기준법의 제1조 규정에서 ‘헌법에 따라’ 근로 조건의 기준을 정한다는 사실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헌법은 “근로조건의 기준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도록 법률로 정한다.”(제32조 3항)라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노동자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확보할 수 있는 근로 조건을 최고의 법이 보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에서 살아가는 사용자라면 힘을 남용할 수 없고 노동자라면 보호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근로기준법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있다. 노동 조건에 해당되는 임금, 노동 시간, 재해 보상 등에 이르기까지 근로기준법은 상세하게 규정하고 있지만, 사용자는 무시하거나 자의적으로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근로기준법이 처음부터 노동자를 위한 것이기보다는 정치적인 이유에 의해 제정되었기 때문에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는데, 여전한 것이다. 그리하여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 열사는 평화시장 앞에서 근로기준법 책을 손에 쥔 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라고 외쳤다. 육봉수 시인 역시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들려주고 있다.
1970년
겨울의 막 문턱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 앞 푸른 불꽃 휘감은 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내 죽음을……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외치던 한 청년
재단사의 죽음으로 인해 잠깐 동안
세인의 입초시에 제법은 본때 있게
오르내리기도 했었던 제1장 총칙으로부터
제2장 근로계약 제3장 임금 제4장 제5장
도합 9장 112조의 근로기준법
1953년
전쟁의 포연 한창인 항도 부산
어쩌면 한때 수탈의 음모 지천이었을지도 모를
군국의 적산 가옥 이층 소리 소문 없이
민족이, 민중이, 생산이, 발전이
꼬집자면 역사도, 정치도, 외세 침략의 의미마저도
몰랐을 듯 싶은 한 늙은 권력가의
저녁식사 후의 식상스런 한마디쯤의
지시에 의해 다만 구색만을
오로지 명분만을 목적으로 태어났던 그 이후
맹목적 발전과 번영을 기반으로
북 치고 장구 치던 정권 속 시나브로
개정과 개정 또 개정의 걸레처럼
너덜거리는 실상과는 달리 겉으로는 여전
있는 듯 마는 듯 혹시나 누설될세라
국가 기밀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그냥
보호 보관 소장되어 왔을 뿐인 순진무구
함구무언의 근로기준법, 그렇다고 무슨
기대어 반짝하고 빛나줄 아름다운 노동자의
미래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현장 생활 석삼년
한번만이라도 진정 우리의 것으로 껴안아보기 위해
애면글면 책장 넘기며 밑줄의 치는 것은
그날 그 시각 그 젊은 재단사는
왜 스스로 불붙어 산화했고
묶어라 묶어라 졸라매기만 해야 하는
가늘 대로 가늘어진 내 허리 하마
언제쯤이면 풀어볼 수 있을까? 하는
지극히 어리석은 질문 때문이다 섣부르게
함부로 만들어진 법도 법이지만 일껏
만들어 두고도 뒷전으로
뒷전으로만 내어 돌리려는 그 따위의 아리송한
의문 때문이다. 그렇다 생각할수록 우스운
지극히 어리석은 의문 때문이다.
―「근로기준법」 전문
근로기준법은 “1953년/전쟁의 포연 한창인 항도 부산”에서 “한 늙은 권력가의/저녁식사 후의 식상스런 한마디쯤의/지시에 의해 다만 구색만을/오로지 명분만을 목적으로 태어났”다. 1951년 조선방직에 근무하던 여성 노동자들이 낙하산으로 내려온 사장의 횡포와 보건 차원에서 지급하던 생리대마저 끊기자 12월부터 파업 투쟁에 들어갔다. 그런데 여성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이 이승만의 독재 정권을 규탄하는 방향으로 확대되자 노동법을 제정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그리하여 1953년 노동조합법, 노동쟁의조정법, 노동위원회법과 함께 근로기준법이 제정되었다. 그렇지만 제정된 근로기준법은 일본의 노동법을 베낀 것에 불과했을 정도로 현실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근로기준법에는 1일 8시간, 주 6일제, 주48시간 등을 법정 노동시간으로 규정하고 있었지만 한국전쟁으로 인해 폐허화된 상황에 적용하기가 어려웠다. 뿐만 아니라 사용자들의 후진적인 노동인식으로 근로기준법이 준수될 리 없었다. 대한노총 역시 자유당의 하부 단체로 전락되어 근로기준법의 요구나 감독에 관한 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다. 더욱이 1961년 5․16군사 쿠데타의 등장으로 인해 노동법의 효력이 정지되고 노동조합의 활동이 규제되면서 근로기준법은 유명무실해졌다.
그에 반해 사용자의 노동자에 대한 탄압은 강화되었다. 수출 주도형 경제 정책을 추구한 정부는 노동자를 혹사시키면서 생산량을 증대시키는 사용자의 경영 전략을 지원하거나 묵인했다. 그리하여 노동자들은 근로기준법이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생존을 위해 세계에서 가장 긴 노동 시간과 저임금에 시달렸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전태일 열사가 나섰다. “1970년/겨울의 막 문턱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 앞 푸른 불꽃 휘감은 채/“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내 죽음을……/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고 외친 것이다. “한 청년/재단사의 죽음으로 인해” 근로기준법은 한국 사회에서 주목받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것도 아주 “잠깐 동안”이었다. 노동자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정부의 경제개발 정책으로 인해 근로기준법은 또다시 무시된 것이다.
육봉수 시인은 그와 같은 현실을 방관하거나 침묵하지 않았다. 더 이상 노동자의 희생을 강요하는 자본주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없다고 근로기준법의 문제점을 전면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그러므로 그를 반근로기준법 시인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의 시 정신을 계승한다는 차원에서 그렇게 불러야 할 것이다.
2.
육봉수 시인은 노동자 중에서도 근로기준법마저 적용받지 못하는 이들에게까지 관심을 확대했다. 그들은 다름 아니라 비정규직 노동자이거나 실업 상태에 있는 노동자이다. 비정규직이나 실업을 자의적으로 선택한 노동자도 있겠지만, 그와 같은 이들은 극히 예외적이다. 모두들 정규직이라는 별을 따고 싶어 하는 것이다.
정규직이나 비정규직이란 개념이 한국 사회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문제가 된 것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부터이다. 국제통화기금은 한국 정부가 요청한 구제 금융을 받아주는 대신 은행의 자기 자본 비율 8% 이상 유지를 비롯해 기업의 인수 및 합병, 부실한 기업의 정리, 노동 시장의 유연화 등을 조건으로 제시했는데, 다급한 정부는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기업들의 구조 조정이 본격화되었고 해고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가 양산되었다. 육봉수 시인은 그와 같은 상황을 구체적으로 그려냈다.
같은 시간에 같은 차를 타고
같은 문으로 같이 출근하고
같은 기계를 같이 돌려도 그는
나의 이름 알려 하지 않고 나도
부를 일 거의 없는 그의 이름 굳이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필요할 때만 간간히 부딪히는
약간 미안한 눈빛만으로도 능히
그의 작업 지시는 내게로 와 닿고
흩어진 박스를 정리하며 나는 또
무심한 척 약간만 부끄럽고
휴식 시간이면 우리는 은연중
서로가 서로를 밀어내는 아예
남남입니다
본 공장 노동조합 조합원인 그는 당연 알고
이대로라면 노동조합 조합원 다시 한 번
되어 보겠다는 꿈 영원히 접고 말아야 할
나도 아는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뜻은
3일의 오차를 두고 받아드는 서로의
월급봉투 안에서만 혓바닥 빼어 물 뿐
누구도 말해서는 안 될 무언의
금기사항입니다
시작은 이렇지가 않았다고
맨 처음의 시작은 절대 이렇지가 않았다고
누군가 말하는 걸 들은 적 있습니다 하다못해
저 높은 곳의 사장님까지도 평등 앞에 묶어 세워
내남 없고 차등 없는 즐거운 일터 만들어 보자
어쨌거나 시작은 그랬다고 했습니다
급할 때 급하게 불러다 쓰는 하루살이
일용직 근로자를 빼고라도
파견근로자 위에 계약직 근로자
계약직 근로자 위에 사내 하청근로자
사내 하청근로자 위에 정규직 노동자
정규직 노동자 위에 계장 과장 부장 또
그 위와 그 위 더욱 더 그 위와 그 위
해 떨어지고 작업 종료 5분 전
예비 차임벨이 울립니다 작업 일지 챙겨 든
정규직의 그는 하루의 성과 보고하러
사무실로 가고 빗자루를 챙겨 든 나와 같은
행색의 사람들만 남은 작업장 안 비로소
시끌벅적해집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생기는지도 모르게 생겨나 자꾸만
허리 구부리게 하는 하루가
끝나갑니다 기계들이 꺼집니다
지루하게 끌고 돌던 컨베이어
일제히 멈추어 섭니다 작업등이 꺼집니다
허리를 폅니다.
―「관계-어느 비정규직 노동자의 이야기」 전문
“같은 시간에 같은 차를 타고/같은 문으로 같이 출근하고/같은 기계를 같이 돌려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다르다. 신분상의 차이는 물론이고 임금을 비롯해 각종 수당에서 그리고 사회적 위치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나의 이름 알려 하지 않고 나도/부를 일 거의 없는 그의 이름 굳이/알려고 하지 않”는다. 같은 작업장에서 일하면서도 서로 “남남”인 것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이는 노동조합 활동에도 영향을 미친다. “본 공장 노동조합 조합원인 그는 당연 알고/이대로라면 노동조합 조합원 다시 한 번/되어 보겠다는 꿈 영원히 접고 말아야 할/나도 아는” 것이다. 그리하여 서로는 연대활동을 하지 못해 신분 보장이며 임금 등 여러 면에서 비정규직 노동자가 불리해질 수밖에 없다. 비정규직보호법(비정규직법)이 제정되어 있지만 해결 방안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비정규직보호법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비정규직 노동자가 전체 노동자의 30% 이상이 될 정도로 급증하자 2007년부터 시행되었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신분상 차별을 막고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즉 비정규직 노동자의 문제를 방치하면 사회의 양극화가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기에 제정된 것이다. 비정규직보호법의 핵심은 계약직 노동자로 2년 이상 근무하면 정규직으로 전환하고, 정규직과 동등한 업무를 수행할 경우 임금에서 차별을 받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의 차별을 해소하지 못했다. 오히려 비정규직 노동자의 양산을 가져왔다. 계약직 노동자가 2년 이상 근무해서 정규직으로 전환된 경우 못지않게 그 이내에 해고된 경우가 많았다. 또한 같은 일을 하고도 비정규직 노동자의 임금이 정규직 노동자의 70% 정도에 이르고 말았다.
따라서 노동자들 스스로 공생할 수 있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개진해야 한다. 자본주의 체제의 분신인 사용자는 노동자의 요구를 쉽게 들어주지 않을 것이지만 노동자가 주체적으로 나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정규직 노동자들이 변해야 한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양보해서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연대해야 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본보기는 뉴코아―이랜드의 연대 투쟁에서 볼 수 있다. 뉴코아와 이랜드의 사용자는 비정규직보호법을 악용하여 기간제 노동자들을 2년 이내에 해고했다. “정규직이 돼서 한 달에 150만 원, 200만 원 받고 싶다는 것도 아니고, 지금처럼 한 달에 80만 원, 1년에 960만 원 벌게 해달라”는 기간제 노동자들의 요구를 무시한 채 해고한 것이다. 그리하여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투쟁할 수밖에 없었는데, 정규직 노동자들이 연대해 마침내 사용자의 횡포를 막아냈다.
정규직 노동자들이 정규직 노동자들과 함께해야 되는 이유는 사용자는 필요하면 언제든지 정규직 노동자를 비정규직 노동자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용자가 비정규직 노동자에 먼저 손대는 것은 궁극적으로 정규직 노동자를 손대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뉴코아―이랜드의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연대해서 투쟁한 것은 공생전략의 좋은 예가 된다. 점점 자본주의에 종속되어 가는 작업장을 “내남 없고 차등 없는 즐거운 일터 만들어”낸 것이다. 그렇지만 자본주의의 파고가 워낙 높아 노동자들이 공생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팔팔년 군사정권 때는
강성노조 위원장님이었다가
의기양양 문민의 정부 때는
거듭거듭 해고 노동자였다가
멀쩡한 국민의 정부 때는
작업복만 바꿔 입은
사내 하청 노동자였다가
마침내 참여정부가 되어서야
오개월 계약 비정규직 노동자로
위원장님 이전의 컨베이어 앞으로
원직 복직되었습니다
―「한심한 이력서」 전문
“팔팔년 군사정권 때는/강성노조 위원장님이었”던 한 노동자가 “문민의 정부 때는/거듭거듭 해고 노동자”로, “국민의 정부 때는/작업복만 바꿔 입은/사내 하층 노동자”로, 그리고 “참여정부가 되어서야/오개월 계약 비정규직 노동자로” 추락한 사실을 전기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사용자의 필요에 의해 정규직 노동자가 해고자가 되고 하청 노동자가 되고 비정규직 노동자가 될 수 있는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이제 노동조합도 노동자를 지켜주기가 쉽지 않다.
노동조합은 노동자에 의한 노동자를 위한 단체이다. 노동자는 사용자와 대등한 위치가 아니므로 노동 계약을 할 때 자신의 권리를 충분히 반영시키기 어렵다. 그리하여 노동조합이 노동자의 생존권이나 지위를 앞장서서 향상시킨다. 구체적으로 노동자의 임금, 근무 조건, 복지, 안전, 산재 보상 등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그에 따라 노동조합 위원장의 책임은 크고도 무겁다. 그동안 수많은 노조 위원장이 노동자를 위해서 투옥되거나 심지어 분신까지 감행한 것은 그 책임감의 정도를 잘 보여준다. 그렇지만 노동조합 위원장의 대가는 “해고 노동자가” 되거나 “비정규직 노동자”가 될 정도로 참혹하다. 자본주의 체제의 분신인 사용자는 노동자를 종속시키기 위해 노동조합의 위원장을 우선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육봉수 시인은 그와 같은 상황에 물러서지 않고 맞섰다.
3.
모든 노동자는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노동 조건을 희망한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를 바탕으로 한 자본주의가 심화되고 있기에 이루기가 쉽지 않다. 자본주의는 자기의 이윤을 철저히 추구하기 때문에 방해가 된다고 여겨지는 노동자는 예외 없이 처리한다. 그러므로 비정규직 노동자와 해고 노동자가 계속 늘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노동자 대신 컴퓨터를 입사시킨다. 이제 컴퓨터가 노동자의 작업장을 점령해가고 있다. 아탈리(Jacques Attali)가 얘기했듯이 “기계가 새로운 프롤레타리아이다. 노동 계급에게는 해고 통지서가 발부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해고된 노동자는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 근로기준법의 보호를 받을 수도, 노동조합의 활동도 함께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노동자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생의 포기 아니면 투쟁인데, 당연히 투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너에게 희망 준다고 달려가는 2차 희망버스 안에서
나는 자꾸 눈물을 훔친다 누가 누구에게
희망을 주고 있는가? 누가 누구에게 과연
희망을 주고 있는가?
줄기차게 비 내린다 즐겁게 두드리는
빗줄기 속에서 너의 삶을 생각한다 여기가
부산인가? 한진중공업인가? 박창수가
죽었던 곳인가? 곰씹으며 크레인 올라갔을
너의 결정을 생각한다
왔다 간다 동지여 저들이 쳐놓은 차벽 결국
타넘지 못하고 넌지시 너의 희망을 나의
희망으로 껴안듯 고함 몇 번 지르고 빗속에서
행복하게 우리 왔다 간다 너도
행복하게 견뎌라 올해 장마는
유독 길단다.
―「2011 부산― 한진중공업 앞에서」 전문
“2차 희망버스 안에서” “자꾸 눈물을 훔”치는 시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주지하다시피 “희망버스”는 부산에 있는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 위에서 농성을 한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 본부 지도위원과 노조원들을 응원하기 위해 운행된 버스를 지칭한다. 2011년 6월에 시작한 파업이 11월에 끝날 때까지 다섯 차례 운행되었는데, 그 후 다른 사업장으로 확대되어 지금까지 운행되고 있다. “희망버스”에 대해 3자 개입으로 노사 갈등을 부추긴다는 비판도 있지만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대학생이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연대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노동운동 내지 사회운동의 등장으로 볼 수 있다.
2010년 12월, 한진중공업의 사용자는 경영의 악화를 들어 생산직 노동자 400명을 희망퇴직 시키기로 결정하자 노동자들은 정리해고의 전면 철폐를 주장하며 농성을 벌였다. 이듬해 1월부터는 김진숙 노동자가 85호 크레인 위에 올라가 농성을 시작했다. 그런데도 사용자가 입장을 고수하자 시민들은 6월부터 희망버스를 타고 농성장에 도착해 촛불 행진 등으로 응원했다. “2차 희망버스”가 운행된 때에는 야당 정치인들을 비롯해 약 1만 명이 참가할 정도로 호응이 높았다.
그 노동자들 속에 육봉수 시인이 들어 있다. 시인은 농성 노동자들을 응원하면서 “누가 누구에게 과연/희망을 주고 있는가?”라고 자문한다. 막연히 호소하거나 외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로서 추구하는 희망이 가능한가를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시인의 희망은 진실하고도 절박하다. 또한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미안하다」)고 토로할 정도로 인간적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저들이 쳐놓은 차벽 결국/타넘지 못하고 넌지시 너의 희망을 나의/희망으로 껴안듯 고함 몇 번 지르고 빗속에서/행복하게 우리 왔다 간다”고 안타까움을 전하고 있다. 함께하겠다는 의지를 겸손하면서도 강하게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가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희망버스” 같은 행동이 필요하다. 노동자는 자본주의의 횡포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 대처 방안을 마련해도 자본주의가 변하는 속도에 따르지 못한다. 그리하여 노동자는 해고되거나 비정규직의 처지가 되고 만다. 다른 노동자와 공생할 수 없는 위치로 추락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자는 연대 의식을 가지고 나서야 한다.
당신
해고자요?
…아니요.
그런데 여긴
무엇 하러 왔소?
그렇게 될까봐 왔고 왜?
―「노동자 대회」 전문
근로기준법이나 비정규직보호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은 ‘88만원’을 벌기 위해 잠도 자지 않고 일한다. 심지어 자신의 희망을 포기하고 세상을 등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실패한 그들에게 전적으로 책임을 돌려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최저생계비를 보장해주지 않거나 노동의 대가를 지급하지 않거나 노동할 기회를 박탈한 자본주의 체제에 맞서야 한다.
육봉수 시인은 “여덟 시간/주간근무. 일당 팔천오백 원 수당은/없습니다 단지 회사의 사정상/잔업 두 시간을 필수적입니다 계약/하기 싫으면 그만 두셔도/상관은 없습니다 당신 아니라도/일할 사람은 수두룩 널려/있으니까요”(「근로기준법 제13조」)라고 위법적이고 비인간적으로 노동자를 대하는 사용자를 고발했다. 아울러 “주 44시간제 근무 철저하게 고집하다/불법선동, 연장근로 거부, 기타의 여죄 총총으로/회부된 징계위원회의 만장일치//비밀 무기명 투표는 살인적 민주주의로 내게/해고를 언도”(「근로기준법 제22조․2」)했지만 주눅들지 않고 당당하게 맞섰다. 그리고 “일어서라 일어서라 일어서라”(「파업농성 1」)라며 노동자의 연대를 호소했다.
자본주의 시대의 노동자는 육봉수 시인처럼 “노동자 대회”에 동참해야 한다. 노동조합의 활동을 비롯해 시민운동이나 정치활동에도 연대해야 한다. 해고된 노동자는 물론 해고되지 않은 노동자도 참가해야 한다. 그것이 노동자로서의 주체성을 지키는 일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점령으로 인해 노동자는 점점 단자화되고 생존을 위협받고 있으므로 투쟁 전략을 마련해야 하는데, 연대가 가장 타당한 것이다.
노동 시간이 단축되었는데도 불구하고 한국의 노동자는 여전히 장시간 노동과 강도 높은 노동을 강요받고 있다. 노동 시간에 비해 임금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작업 현장의 안전시설이나 산업재해의 보상도 미흡하다. 육봉수 시인은 그와 같은 노동 현실을 구체적으로 고발하며 맞섰다. 근로기준법조차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는 노동자의 처지에서 인간다운 삶의 조건을 실현하기 위해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과 횡포에 온몸으로 대항해 나간 것이다.
孟文在 |시인․안양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