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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복음 강해 】
1998,6(?) 강의 이근호
♠ 98.6.24 새벽 5:00 완성 - 이명호
♠ 98,12,26 새벽 1:30 긴장 속에서 읽음 - 구득영
♠ 99,3,4 오후 1:30 테이프를 다시 한 번 자세히 정리함 - 구득영
♠ 2000,1,31 오후 1:30 테이프를 다시 한 번 자세히 재정리함 - 구득영
【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14) 】
♣ 요한복음 배경 연구하려고 하지 말라. 그 배경은 아무도 모른다. 여러 가지 가설이 있지만, 전부가 다 가설에 불과하다. 본문의 구속사적 내용을 모르기에 여러 가지 가설을 세우고 있다. 아들을 기쁘게 하면 영광 돌리는 것인데, 엉뚱한데 가설을 세우고 있다. 뭔가 유식해지려고 하지, 단순 하려고 하지를 않는다. 거지 나사로는 한평생 간사한 것이 없이 거지로 살아갔는데 말이다. 초점이 자기 유식에 있고, 뭔가 자기 이름을 내려고 하고 있다. 거지 나사로는 그냥 거지로 죽었는데도 말이다. 거지 나사로와 같은 모습이 오직 예수님만을 증거하는 가장 진솔한 모습이다. 그냥 사는 것이다. ♣
▣ 요한복음 1장
* 요한복음은 한마디로 상당히 어렵다. 김세윤 교수는 요한복음의 서론에 대해서 언급을 하는데, 그러나 요한복음은 서론 부분이 없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다. 뭔가 차를 타고 시동을 걸자마자 시급히 가려는 느낌을 준다. 바로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마가복음은 급하지 않은가?)
* 성경은 그 전부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에 그 비밀을 밝혀 내야 한다. 오직 그리스도이다. 성경을 볼 때 한 구절 한 구절 해석을 한다든지, 문법적 구조 분석이라든지 원어를 분석한다고, 무엇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성경전체를 파악해야 된다. 시냇물에 흘러가는 종이배를 따라가는 것처럼 성경 전체흐름을 뒤따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 원어 - 원어라고 하는 것은 없다. 그냥 그 시대의 언어만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있어서는 우리나라 말이 원어이다. 내용 자체보다도 원어(히브리어, 헬라어)를 통해서 뭔가를 얻어 보려고 하는 것은, 자기의 무식을 덮어 보려는 시도이다. 글자는 아무리 분석해도 아무 것도 나오지 아니한다.
(요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여기서 '말씀이 계시니라' 라고 하니까 대번에 나오는 질문사항이, '그 말씀이 무엇인가?' 라고 하는데, 그러나 이렇게 나오게 되면 그 물음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그냥 하나님을 '말씀'으로 표현을 한 것이다. 여기서 로고스가 어떻고 저떻고 하게 되면 여러가지로 혼란하게 된다.
◈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을 표현할 때 그냥 '말씀' 으로 표현을 하였다 !
* 요한복음을 볼 때, 이렇게 하면 된다는 것이다. 항상 염두에 둘 것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생각을 하지 말고, '그 분이 무엇을 하셨는가?' 라는 여기에 관심을 두어야 된다. 그래서 그 분이 무엇을 하셨는가를 보니, 상당히 중요한 것이 나온다는 것이다. - 히브리적 사고
(요1:3-4)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 원래 창조할 때 생명과 빛이 있었다. 생명과 빛이 있어야만 창조답다는 것이다. 생명과 빛이라는 것은 말씀이라는 하나님께서 하신 원래 의도였다는 것이다. '오직 빛과 생명을 함유한 창조만이 참 창조인데, 그런데 오늘날은 왜 이 지경인가?' 하는 것이다.
* 요한복음에서 처음부터 하시고자하는 의도는, 원래 생명과 빛이 있어야 창조답지 생명과 빛이 없으면 그것은 전부 헛된 것이라는 것이다. 이 상태에서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시 찾아오신다면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려고 하시겠는가?
◈ 요한복음 주제 : 생명과 빛 ! - 본래의 창조의 모습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영생이다.
* 다시 말해서, 생명과 빛이 없는 것은 예수님의 활동이 아니다. 이 말은 예수님만이 생명과 빛이고, 우리들에게는 생명도 빛도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러한 생명과 빛도 없이 버티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 놀랍구나 인간, 위대하다 인간 !
◈ 요한복음 1장의 관심사 -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려고 하시는가! 그 분이 나타나셨다면 우리에게 무엇을 하시려고 하시는가! - 이것은 우리가 원하는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한다는 자체가 말이 안 된다. 우리는 기도할 자격도 없다. 생명도 빛도 없이 어떤 기도를 하는가? 전도, 기도, 예배 등, 이 모든 것은 빛과 생명이 없는 인간에게는 해당이 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없기에 외부에서 주입되어야만 되는 것이다. - 바치려고 하지를 말고 받기나 잘 받아라 !
* 인간들의 하나님께 바치려고 하는, 그 모든 예배, 찬양, 헌금 등이 모든 것이 다 소용이 없는 것이다. 사람이 받는 것이 있는 사람은 받기에 바쁘다. 받는 것이 없기에 바치려고 한다. 쏟아지는 빛과 생명을 얻어먹기에 바쁘지, 뭘 바치려고 하는 것은 날라 오는 그 큰사랑에 대한 느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멋있는 전도, 예배, 찬양으로 바치려고 한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엉뚱한 질문을 한다.
* 빛과 생명을 받은 사람이 뭔가 내어놓는 것도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 이렇게 질문을 하는데, 그러나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빛과 생명은 한 순간 온 것으로 만족한 것이 아니다. 날마다 한량없이 오신다. 단회성의 반복인 것이다. 죽을 때까지 늘 계속해서 받는 것이다. 하나님은 주시기에 늘 바쁘신 것이다. 주님의 모습을 늘 닮아가야 되는데, 한 순간 받은 것을 가지고 예수의 모습을 닮으려고 한다. 성령을 계속 공급받는다는 사실을 무시하려고 한다. 그러나 성령은 죽을 때까지 계속 받는다.
(약1:17)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 계속 온다 ! - 이것을 요한복음에서는 성령, 넉자로 성령세례라고 하는데, 그런데도 이 성령세례를 소유하는 것으로 보고 있으니, 다 엉터리가 되고 만다. 성령은 계속하기에 소유할 수가 없는 것이다.
* 실타래 - 실이 계속 나오듯이 성령은 하나님 소유이고 우리는 성령을 한량없이 받는다. 그러나 인간은 성령을 지배하려고 하는 의도로 나가려고 한다. 결국 우리는 성령을 모독하고 있는 것이다.
* 피조물의 자리 이탈현상 - 내가 성령을 소유하려고 하는 현상이다. 그래서, "빛과 생명을 받은 사람이 뭔가 내놓는 것도 있지 않습니까?" 라는 질문이 나오는 것이다.
◈ 성령을 받아라 ! - 던지는 쪽의 의도가 받는 쪽에 꽂힌다. "오직 성령을 받아라" 라는 것은 성령을 받을 그런 관계라는 것이다. 그런 관계라는 것을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의 호흡으로도 볼 수가 있는데, 그러나 창세기 2장의 것은 단지 폼에 지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자기가 소유를 했다는 생각을 버리고, '누가 나에게 성령을 한없이 주시는가' 하고, 그분께 관심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분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그것이 성부 성자 성령께 영광이 된다는 것이다.
(고전 2: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 성령을 받은 사람의 특징? - 주여, 주셔야만 되겠나이다. 저는 받아야 되겠나이다. - 은혜를 안다.
*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으로 바뀌는, 이것이 성령의 거듭남이다.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염치 불구하고 받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됨을 안다. 그리스도를 가리우는 것은, 즉 주는 것을 받기 거부하고 스스로 만들려고 하는 노력 등은 용납하지를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성을 가리는 교회의 모든 제도, 기관은 전부 엉터리이다 !
* 바울 신학적으로 이야기한다면, 교회가 아내 역할이고, 예수님을 남편 역할이다. 교회가 아내의 역할이라면, 교회는 "주세요, 주세요" 하는 역할이다. 이것은 주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이다. 주님은 주시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이다. 달라고 하는 것이 주님께 영광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뻔뻔스런 것이 아닌 것이다.
◈ 교회 : 여자의 역할 - '다오, 다오' 역할, 남자는 줌으로 기쁨을 누린다.
* 여자 - 얻어먹는 기쁨, 그것으로 만족함
* 남자 - 여자에게 줌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는 하나님의 은혜성을 보여 주는 역할
* 이것이 진정한, 하늘에 속한 가정의 모습이다. 이러한 예수님을 높이는 가정이 하늘나라의 표상이 되는 것이다. 이런 모습을 떠난 그 어떤 가정의 행복과 기쁨도 다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 가정사역 - 소위 요즘 유행하는 가정 사역의 모습은, 이러한 요한복음의 원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오히려 반대로 예수를 높이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이용해서 자기들의 행복만을 즐기도록 도와준다는 것이다. 누구를 위함인가? 가정인가, 예수인가? 그러나 믿음이 있는 자는 예수님이 먼저 교회를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버렸기에, 교회는 예수님께만 복종을 한다. - 저는 다른 곳에 눈 돌리지 않겠습니다. 오직 당신만을 위해 !
◈ 교회는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만 바라본다 !!
* 이러한 원리로, 여자는 오직 남편만을 바라본다. 남편만이 의지의 대상이다. 여자가 돈을 번다고, 남편보다 낫다고 하는 것은 이상한 여자이다. 돈을 못 벌어도 남편은 여전히 남편이라는 것이다. 못 먹어도 '고' 이다. 부부사이는 돈이 문제가 아니다. 오직 한 사람을 의지한다는 것이다.
* "돈을 벌든 안 벌든, 당신은 나의 주인이요!" - 이것이 여자의 본래의 모습이다.
◈ 정리하면 - 생명과 빛은 원래 창조 때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땅에는 없는 상태이다. 생명과 빛이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지는가?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말씀이 육신이 됨으로 주어진다. - 은혜 위에 은혜러라 ! - 요한복음의 결론
* 인도의 명상종교에서도 이 은혜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문제는 은혜의 내용이다. 자기들의 기도가 문제가 아니라, 자기들의 신이 베풀어주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러나 그들은 먹고사는 것을 두고 은혜라고 한다. 철저하게 이 땅의 것이다.
◈ 그러나 요한복음에서 "은혜" 라는 것은, 오직 '말씀이 육신이 된 것' 만을 은혜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 말씀 육신이 된 곳을 열어보니, 그 육신 안에 생명과 빛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
◈ 요한복음의 충돌이론 !! - 말씀이 육신 된 것만이 은혜이기에, 예수님의 육신 안에만 생명과 빛이기에, 예수님 앞에서 자칭 은혜라고 촐랑거리는 모든 것은 다 부수어진다. 인간의 자칭, 하나님 영광이라고 외치는 그 모든 것이 다 깨지고 만다. 안식일, 성전, 금식기도, 전도, 기적, 제자훈련 등, 모두 다 깨진다. 유대인들은 기존의 전도, 금식기도, 성전, 안식일, 기적, 오병이어 등,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간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것들이 예수님의 생명과 빛과 대조를 해 보니, 기존의 것은 다 깨지고 마는 것이다. 진짜 은혜는 예수님 자체뿐이시다 !!
* 인도종교에서는 식사할 때의 양식을 은혜로 본다. 그렇다면, '오병이어' 는 어떤 의미에서의 은혜인가?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 의미를 모르고 인도종교처럼 떡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진다. - 잘못된 은혜개념
◈ 은혜의 참뜻 - 예수님께서 떡을 주시는 것은 이 떡이 은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이다. 오직 인자의 살과 피만이 은혜라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세례요한이 등장하는 이유는, 세례요한은 깨어지고 진정한 은혜 위에 은혜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계속 "아니요, 아니요" 이어야 한다. - "나는 쇠하여야 하고 그는 흥하여야 하리라!"
◈ 이것이 요한복음의 충돌이론 !! - 예수님은 기존의 것들과 자꾸만 부딪친다. 예수님은 터미네이트!!이근호 목사 논문들을 보면, 요한복음의 충돌이론이 다 나온다.
* 양립이론 - 우리들은 피해갈 수가 없다. 피해가면 양립이론이 되고 만다. - "예수님도 중요하지만 교회도 있어야지!" 하는 양립이론은 있을 수가 없다. "믿음도 있고 하지만 행함이 있어야지!" 하는, 윤리와 도덕을 주장하는 것도 양립이론이다. 그러나 둘 중에 하나는 반드시 박살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사람은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다. 반드시 하나는 깨어지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 요한복음 해석은 오직 예수만으로 ! - 보존, 병립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1등, 우리는 2등이 아니라, 예수님이 다른 것을 박살내고 만다. 예수님은 1등이고 우리는 탈락이다. - 박살! 박살! 박살! 박상?
◈ 요한복음은 충돌이론 !! - 한국교회는 예수를 높이기 위해 이런, 이런 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사고방식을 깨부순다. "그래, 예수만이야! 그러나 예수 믿기 위해서 이런 것들이 있어야 되지를 않겠는가!" 하는데, 이런 것들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그것 자체가 가짜이다. 말씀이 아니라고 한다면 아닌 것이다.
* 예) 예수님이 나를 돈을 벌게 했다. 물론 난 돈을 사랑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돈이 없었다면 형편상 나는 예수를 믿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징검다리를 놓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아니 내가 놓지는 못해도 예수님이 놓아주신다고는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 징검다리를 부순다. 그러면, 징검다리, 혹 디딤돌 없으면 어떻게 예수를 믿는가?
◈ 성령세례 - 이렇게 징검다리를 가지고 나오는 것은 바로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오직 성령이 와야만 된다고 하는데, 이것은 인간이 만든 징검다리가, 그러한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직 임의로 부는 성령만으로 이다. 이것을 성령세례라고 한다.
◈ 성령을 대신하는 어떤 보조 수단도 있을 수 없다 !
* 한국교회의 총동원주일, 전도훈련, 새벽기도운동, 선교사 파송 등 이런 식으로 하니, 이러한 보조수단이 있어서 천만 명이 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전부 엉터리다. 오직 성령께서 예수 믿게 했다는 고백이 없다. 알맹이는 빠지고 껍데기만 가지고 흥분한다. 성령을 대신하는 어떤 보조수단도 용납이 안 된다는 것이다.
* 그런데 한국교회는 이상하게도 "주님을 믿는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엡2:5)" 라는 고백이 없다. 모두가 다 자기의 잘남이다. 예수님은 그러한 자기 잘남의 일의 들러리에 불과하다. 물론 예수님께 "주" 라고 하는 이름표는 달아준다.
(엡 2: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 니고데모 - 한 유대인 관원, 유대인을 대표하는 성격을 지녔는데, 그런데 왜 성령이 와야만 되는가를 모른다. 왜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셔야 하는가? 성경책도 왜 안 되는가? 이것이 니고데모의 질문이다. 니고데모의 이러한 태도는 나중에 나오는(1:37) 간사함이 없는 나다나엘과 비교가 된다. 예수님은 안식일 지킴, 금식, 성전 등, 인간들이 고수하는 모든 것을 박살낸다. - 두더지 박살내기 게임
◈ '왜 성령이 오셔야 하는가' 를 보여 주는 것이 바로 요한복음이다. 왜 성령이라는 분이 도입되어야 되는가를 보여 주기 위해서, 예수님은 항상 인간이 의지하는 모든 것들을 다 부순다. -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만이 영광이 될 때 !
* 성부, 성자, 성령에게 영광을 돌리는 이 엄연한 사실을, 너무나 기초적인 사실인데, 대구 신학교를 1, 2학년만 조금 지나면, 강도사 되고, 목사 되고, 교수가 되고 나면, 다 잊어버린다. 인간들의 목회로서 성부, 성자, 성령을 대체한다. 그러한 자들에게 이 요한복음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 "목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요3: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 목사의 할 일 - "나는 쇠하고 그는 흥하여야 한다" 라는 말을 하기 위해 강단에 서야 한다.
* 목사의 이러한 모습을 바로 요한복음 1장 8절에서 '증거' 라고 하는 것이다.
(요1: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요1:20)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요1:21) 또 묻되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야냐 가로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요1:23)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요1:27)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하더라.
* 오직 은혜와 진리는 예수님 외에는 어느 누구도 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이라고 합창을 해야 하는가? - "나는 아니라 !"
* '아니오' 를 증거하는 세례요한 - 은혜 위에 은혜는 세례요한도 해당이 안 된다는 것이다. 은혜 위에 은혜를 주는 경우는, 말씀이 육신이 되는 한 경우밖에 없는 것이다. 석가나 공자도 안 되는 것이다. 어떤 중간매체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교회도 필요 없는 것이다.
◈ 요한복음에서는 교회를 중간매체로 인정을 하지를 않는다 !
* 교회는 바로 오직 '아니오' 라는 것을 합창하는 곳이다. 비록 땅과 전 재산을 다 바친 장로라 할지라도, 그 땅을 바친 것이 '아니오' 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그 장로는 그 교회에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 "아니오" 의 집단이 바로 교회라는 것이다 !
* 새벽기도를 그렇게 열심히 하는 권사라고 할지라도, 그런 기도를 부정하는 권사의 고백이 있어야 한다. 비록 그가 전도 왕일지라도, 그는 '100명을 주께로!' 라는 것이 아니고, '아니오' 를 증거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나의 전도, 나의 기도가 결코 은혜의 매개체가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 "은혜 위의 은혜는 말씀이 육신 되신 그 분의 살과 피밖에 없다 !"
◈ 이것을 증거하는 모임이 교회다. 매개체는 오직 예수님의 살과 피밖에 없다. 그러면 한국교회는 과연 이러한 모습이 있는가! 없으면 교회가 아닌 것이다. 이것이 안되면 요한복음을 공부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서론이 없다. 처음부터 불도저처럼 밀어 부치는 것이다. 계속 이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 이 '아니오' 를 증거하는 사람의 모임이 바로 교회인 것이다.
* 그렇다면 요한복음에서 빛과 생명이 오는 방법은 무엇인가?
(요1:6)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요1:7)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요1: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요1: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요1: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요1: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 믿음 - 여기서 믿음이라는 것은 자기가 스스로 믿음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고, 영접하는 자를 영접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행위이다. 그렇지 아니하고 이 요한복음에서 믿음의 정의를 달리 내리면 안 된다. 믿음의 주체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 영접하는 것 - 누가 자기를 덮쳐오는 것이고, 덮쳐오는 사람에 의해 덮쳐지는 것이다. 자기가 만들어 내는 믿음을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만들어 낸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증거하고 영접하면 생명과 빛은 그 속에 들어와서 원래 말씀이 창조한 창조대로 원상복귀가 된다는 뜻이다. - 생명이 들어 있고 빛이 들어 있는 상태로 원상복귀 !
* 그러므로 증거할 때 무엇을 증거하느냐 하면, '아니오' 라고 하면서, 진짜 은혜 위에 은혜만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의 증거를 들어서 영접하는 자라고 한다. 그런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요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 이 본문을 해석할 때에, '하나님께 난 자' 에 대해서 보통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었다고 해석하는데, 그러나 그렇게 되면 흐름이 끊어진다. 이 본문에서의 뜻은 '원래 창조의 상태로 되어 갔다' 라는 뜻이다.
* 이 본문을 하나님의 은혜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즉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은혜성을 강조하여 많이 해석을 하게 되는데, 그러나 원래의 의미는 그런 뜻이 아니고, 그 해석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 구절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해석은 나중에 나오는 성령세례(1:33)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 이 구절에서, '하나님께 난 자' 라는 말은 원래 하나님께서 의도했던 대로 창조를 했으면 했던, 그러한 인간상태로 되돌아갔다는 뜻이다. 하나님께 난 자, 즉 영접하는 그 인간이 원래 말씀이 창조했던 그 의도대로 합당한, 그 인간으로 되돌아갔다는 뜻이다. 즉, 피조물의 존재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지,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하나님의 은혜로만 믿을 수 있다는, 그런 구원에 관한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 하나님께 난 자 ! - 영접하는 그 인간이 원래 창조 때에 의도했던 바로 그 인간이라는 뜻이다. 영접하는 그런 인간의 모습이 원래 인간의 모습이라는 뜻이다.
* '영접하는 자가 원래 인간이다' 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뜨겁고, 방언 잘하고, 찬양 잘하고, 기도 잘하는, 그런 것하고는 아무 상관없다. '주여! 나는 어두움이고 나에게는 빛이 없습니다. 나에게는 오직 은혜 위에 은혜 되신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라고 하는, 그 모습이 원래 하나님이 의도하는 그 모습이라는 것이다.
* 지금 여기서는 구원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여기 의도는, "영접하는 그 인간이 원래 창조했던 인간이다" 라는 말이다. 구원에 관한 문제는 나중 성령이 와야 가능하다. - '은혜와 빛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라고 하는 것이 원래 하나님이 의도했던 말씀이라는 것이다.
♣ 차영배 교수와 성령론 - 참고 : "차영배 교수와 성령론"(이근호 글) - 고영민 목사가 칭찬(?)
* 단회성, 반복성은 다 말장난에 불과하다. 차영배와 안영복 교수는 자꾸만 납득시키려고 하는데, 과연 그러한 행동을 하늘에 계신 우리 주님이 기뻐하시겠는가를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어떤 식으로 사람을 납득시킬까하는 것은 우리의 소관이 아니다. 우리는 주님을 증거하는 사람에 불과하다.
* 학문적 체계를 왜 세우려고 하는가? 그것은 심심풀이 땅콩이다. 인간의 교만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보고, 그냥 증거하라고 하셨는데, 우리는 왜 소명, 중생, 회심, 신앙, 칭의, 수양, 성화 견인, 영화와 같은 이러한 틀을 만들어 갈려고 하는가? - 명저, [복음과 회복] 에 잘 설명됨.
* '긴장과 갈등', '이미와 아직' 등, 이런 소리하는데, 그냥 '예수님이 계시다' 라고 하면 되는데, 왜 어려운 용어를 사용하는가? '철저 종말론' 이런 소리하는데, 학문이 아니라, 십자가 능력이 바로 구원의 능력이다. 신앙자체가 바뀌어 져야 된다는 것이다.
* 안영복, 차영배 교수는 '교회가 침체되어 있다' 라고 하는데, 세상에 교회가 침체되다니? 말도 안 된다. 주님이 누구이신가? 주님이 무능력자인가? 주님이 얼마나 칠칠맞지 못하기에, 교회가 침체되도록 버려 두신다는 말인가? 그런 주님 같으면 우리가 믿지 말아야 한다. 사실은 교회가 침체된 것이 아니고, 자기 장사가 잘 안되니까, 교회가 침체되느니 하는, 이런 소리하고 있다. 개혁이 되고 침체가 될 교회라고 하면 애당초 교회가 아니었다. 그것은 거품경제, 거품교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전도 - 이들은 또 전도가 안 된다고 하는데, 무슨 뚱단지 같은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예수님의 뜻은 주님을 증거하면, 그것이 전도인데, 전도가 안 된다고 하니, 이 얼마나 엉뚱한 소리인가? 이들은 사람을 꼬시는 것을 전도라고 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전도가 아니다. "우리교회에 사람이 안 모여도, 예수님이 엄연히 살아 계십니다. 이 예수님만을 믿읍시다" 라는 이것이 전도인데, 왜 전도가 안 되는가? 박사교회에 불난다고 해서 주님이 살아 계시지 않는가? 교회를 믿습니까, 예수님을 믿습니까? 관심이 엉뚱한데 가 있기에 한심하기 짝이 없다. - 이런 자들은 물에서 먼지가 나도록 맞아야 한다.
◈ 요한복음 1장 1-18절 : 조직신학(예수님의 실존과 존재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생명과 빛은 오직 은혜로만 온다는 것이다.
◈ 오직 은혜 -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1:14). - 이 말의 뜻은 어떤 중간매체도 필요 없다는 것이다.
* 육신의 시대 - 그 분이 곧 말씀이다. 전에는 하나님과 말씀이 있었는데, 이제는 아버지와 아들사이만 남았다. 모세의 시대, 즉 말씀의 시대는 끝났다는 것이다. 육신의 시대란, 지금은 말씀이 육신이 된 아버지와 아들의 시대, 아버지와 아들사이만 덩거란히 남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진짜 은혜가 왔기 때문에, 폼만을 잡던 모세의 율법시대는 끝났다는 것이다. 충돌되어 깨어진 것이다. - 아버지와 아들시대 !
(요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충만하더라 - 그것으로 완성된 것이다. 더 이상 간증이나 내 노력이 필요 없다. 헬라인은 지식을 원하지만, 유대인은 기적을 원하지만, 우리에게는 오직 십자가만이 구원의 능력인 것이다(고전1:18).
(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1: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 그러므로 간증거리는 십자가를 가리우는 것이다. 기도하니 병이 낳았다는 그 순간, 십자가를 갉아먹는 삐뚤어진, 왜곡된 십자가 되고 만다. 십자가는 날 죽이는 십자가인데, 그런데 나를 살리는, 병을 고치는 이상한 십자가가 된고 만다. 교회를 부흥시키는 십자가가 되고 만다. 이는 십자가의 피와 살만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십자가만으로 만족하지를 못하는 인간의 탐욕(죄)을 보여 준다. - 십자가마저도 이용하는 인간의 대담함에 경탄할 뿐이다 !
(요6: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는 것은, 더 보탤 은혜가 필요 없다는 것이다. 십자가가 있는데 더 달라는 것은, + 를 요구하는 것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데 미흡한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 내 기도, 내 간증, 이런 것은 다 필요 없다 !
* 지금 한국교회는 "제자 훈련을 좋다" 라고 하고 있다. 그리고 '경건의 시간' 을 강조하고 있다. Q.T를 하더라도, Q,T가 "아니오" 라고 해야 될 것을, 오히려 Q.T 자체를 강조하고 있다. 성서 유니온의 윤종하씨는 이런 것을 나중에서야 알고 고치려고 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의 밑에서 일하는 사람은 모르고 있다. 전혀 여기에 대해서 무지하다. 돈이 되는데 왜 버리려고 하겠는가?
* Q.T, 제자훈련, 다락방 등, 이러한 용어를 사용하지 말고, 그냥 "성경공부를 합시다", "전도를 합시다" 라고 하면 되는데, 이러한 용어를 집어넣는 것은, 용어에 어떤 주술적 의미를 담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Q.T를 하면 은혜를 받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도는 자기 교회로 사람을 모으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이 성령을 모독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꿈에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 인간적인 불신 - "이렇게 하면 효과가 있을 것이다" 라는 효과론(실용주의)적으로 가고 있다. Q.T를 하면서도 Q.T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성경을 보면 되는데, 그러나 그렇지를 못하고, "말씀+묵상=참선" 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온갖 귀신이 다 들어오고 말았다는 것이다. - 오늘은 동쪽으로 갈까, 서쪽으로 갈까? - 마귀가 인간을 어느 정도로 이용하려고 하는지를 모르고 있다.
◈ 정리하면 - 하나님께서는 원래 생명과 빛이 함유된 이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이것이 붕괴가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생명과 빛이 함유된 창조가 아니면 창조가 아니기 때문에, 이 창조를 회복시키시기 위해서 따로 계획을 세우셨다. 그리고 이 세상은 생명과 빛을 잃어버려서 어둠의 세상이 되고 말았고, 이 어두움 자체는 원래 말씀이 의도한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져 버렸다는 것이다.
◈ 그래서 이 세상은 스스로는 도저히 생명과 빛을 만들 수 없기에, 그래서 하나님은 일방적인 은혜로 이 세상에 생명과 빛을 주시는 것이다.
◈ 그러면 이 생명과 빛은 어떻게 오는가? - 이제 말씀의 시대는 끝나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내려온다. 육신만 남고 말씀은 사라지는 것이다. 하나님 개념이 추상적인 개념(전지, 전능 등)에서 예수님의 움직임으로 바뀌는 것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이고, 성부 하나님은 예수님의 아버지로서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다. - 신론에서 기독론으로 바뀐다.
(요14:7)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 은혜 - 법의 개념(인간의 행함)이 아니고 한량없이 계속해서 주어진다는 개념이다. 그러면 그 은혜와 진리는 어떻게 주어지는가? 세례요한은 빛이 "아니오" 라고 말함으로 말미암아, 예수 앞에 나오는 모든 것은, "아니오", "아니오" 로 이어진다. 예수님 앞에서 은혜라고 여겨지는 모든 것은 다 걸려서 넘어지고, 오직 말씀이 육신이 된 그분만이 은혜로 남기 위해서, 그분만이 생명과 빛으로 주어짐을 증거하기 위해서 "아니오", "아니오"를 외치는 것이다.
◈ 그렇다면 요한은 어떻게 빛을 증거하는가? - 물로서 빛을 증거하는 것이다. 요한복음의 성령은 오직 그리스도만을 증거하지, 자신에 대해서는 증거하지 않는다. (물론 다른 성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 여기서 물은 통일교의 양수개념이 아니다. 그리고 거듭난다는 것은, 단순히 죽었다가 살아나는 의미의 부활의 개념이 아니고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이다.
◈ 되반사(Reflect) - 로버트 오툴은 자신의 책, [누가신학의 통일성]에서, 성령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증거하는 의미에서, 성령의 되반사(Reflect)라고 했다. 그러므로 성령을 강조한다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성령 자체를 강조하는 것은 이러한 점이 무지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유대인들이 세례요한에게, "당신은 선지자도 아닌데, 어찌하여서 세례를 주는가?" 라고 질문을 하니까, 거기에 대한 답변은 하지 아니하고, 세례요한은 자기의 세례는 진짜를 보여 주는 폼(form)이라는 것이다. 이 진짜 세례는 바로 성령세례인 것이다(1:33). 그러므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요1:25) 또 물어 가로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
(요1:26)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너희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사람이 섰으니
(요1:27)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하더라
(요1:28) 이 일은 요한의 세례 주던 곳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된 일이니라
(요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요1:30)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요1:31)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요1:32) 요한이 또 증거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요1: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 즉, 사도요한은 물로서 증거하는데 그것이 물세례라는 것이다. 이 물세례라고 하는 것은 진짜를 보여 주는(33절) 하나의 폼을 잡는 것이라 결론을 맺는 것이다.
◈ 물세례 의미 -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진짜를 폼잡는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성령을 줄 수 있는 근거는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심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앞당겨서 미리 보여주는 물세례의 의미는, 역시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것을 폼잡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 물에 푸덩덩! 이다. 나는 물에 빠져 익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물에서 올라오는 것은 살아난다는 의미이다.
* 현재 세례요한의 물세례는, 장차 있을 예수님이 하실 성령세례를 폼을 잡는 것이다. 그것처럼, 죽었다가 되살리는 작업이다. 장차 오실 주님께서 사람을 죽였다가 다시 살리시는 성령의 작업을 미리 앞당겨서 보여 주는 것이다.
* 세례요한의 세례의 의미는, 날 보지 말고 저쪽 보라는 뜻이다. 자기는 증거하는 자격이 있는 그 자기에 의미를 두는 것이 아니라, 다음에 성령으로 세례를 줄 그 분에게 초점을 돌린다. 자기가 지금 폼을 잡는 그러한 취지로, 그분은 폼이 아니라, 실제로 그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는 것이다.
◈ 물세례를 주는 의미는 바로, 사실은 내가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의 귀중성이 부각이 되는 것이다.
(요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 오직 물세례를 받은 사람만이 자기가 죽어야 되는 이유를 아는 것이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사는 그 자리에서, 그 죽음의 자리에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의 귀중성이 부각되는 것이다. 주께서 죽으셔야 되는 이유가 바로, 내 죄 때문에 세상 죄를 지고 있는 나 같은 인간 때문에, 예수님이 어린양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 여기서 구약과의 연결고리가 된다.
* 구약의 연관성 - 요한복음에서 구약과의 연계성를 찾기가 어려운데, 그 이유는 공관복음에서 다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 이스라엘이라는 개념으로 구약과의 연계를 가질 수 있다.
(요1: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과 참 이스라엘 사람인 나다나엘, 이스라엘이 처음 국가로 시작이 될 때, 유월절 어린양으로부터 시간이 바뀜으로 시작이 된다는 것이다.
(출12:2) 이 달로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
* 원래 유월절은 3-4월이다(애굽식으로는). 그런데 이스라엘 국가의 시작과 아울러 시간이 바뀌고 있다. 국가인 이스라엘 자체가 새로운 시간을 만들어 가는 참으로 희한한 나라가 된다. 이 이스라엘의 시간은 유월절 절기를 통해서 보여 준다.
◈ 새로운 시간 개념 - 이스라엘은 희한한 나라로 역사를 만들어 내는 이스라엘에 의해 시간에 의미가 담긴다. 이스라엘의 시작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을 보라" 에 초점이 있다는 것이다.
◈ 요단강에서 오직 한 분에게만 내리신 성령 !
(요1:31)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 물세례 시에 유독 한사람인 예수님에게만 임하였다. 성령께서 예수님을 사용해서 하시고자 하는 일이 있었다. 그 일은 새 이스라엘을 만드는, 즉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일을 하여야 하기에 예수님에게 성령이 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 우리는 흔히들 예수님이 성령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의 승천 이후의 일이고, 승천 이전에는 오직 성령님이 예수님을 몰고 가신다는 것이다.
(막1:12)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 예수님의 공생애는 성령의 주도하에 있다. 왜냐하면 그분에게만 성령이 임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성령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예수님을 인도하는 것이다. 주의 자리에 등극(승천)해야 만이 예수님이 성령을 보내시는 것이다.
◈ 최초로 성령의 세례 받으신 분은 예수님인데, 예수님이 성령을 주도한 것이 아니라, 성령이 예수님을 주도한 것처럼, 나중에 우리가 성령의 세례를 받게 되면, 예수님이 마치 성령에 매인바 된 것처럼, 우리도 역시 성령에 매이게 된다. - 이것을 보여 주는 것이 예수님의 성령 세례 받음의 한 의미이다.
* 전도를 하는데 성령이 시켜서 한다 ! - 전도를 하는데 어떻게 하는가에 초점을 맞추면 헤깔리게 된다. 성령세례를 받게 되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되는데 목적이 맞추어 진다. 예수님은 이 일 때문에 오셨다. 그렇다면 나중에 우리도 역시 성령의 세례를 받게 되면, 전도가 목적이 아니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보여주는 길로 가게 된다. 예수님을 증거하게 된다. 전도라는 개념이 탈락되고 만다. 우리는 자꾸 자기 전도에 초점을 맞추니 성령의 뜻이 무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 성령의 뜻은 우리 속에 있는 어린양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다 ! - 이것을 우리가 증거하는 것이다.
(요1: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예수님)를 증거하는 것은, 요단강에서 성령을 받은 사람만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이가 된다는 것이다.
◈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이 ! - 성령이 임하지 않은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은 무용지물이라는 것이다. 그 분만이 성령으로 임하셨기 때문이다. 그분 외에 다른 사람들은 단지 세상 죄를 가지고 있기에, 물세례 받을 때처럼 죽는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다. 물 속에서 죽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무엇을 할 수가 있는가? 같은 물세례를 받지만, 성령의 세례를 받는 그 분이 성령세례를 주셔야 살 수 있다는 것이다.
* 우리는 그것을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물 속에 죄 때문에 빠져 죽어 있다는 것이다. 성령을 받은 그분이 성령을 주시는 분으로 바뀌어서 성령세례를 주시는 분이 된다는 것이다. 아버지께로 가신 다음에(부활+승천) 이런 일이 일어 난다는 것이다.
* 승천개념 - 부활(소생이 아님)이 승천을 포함하는 의미에서 부활, 승천을 같은 개념으로 보는 것이다.
◈ 성부, 성자, 성령의 활약상에 눈을 돌리자 ! - 이러한 사실을 증거하는 사람만이 바로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람 ! - 이것이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이기도 하다(20:31).
* "세례를 주시는 분이 이분이다" 라는 것을 증거해야 하는 이유는? - 세상 죄를 지고 갈 때, 세상 죄에 해당되는 사람과 지고 가는 사람은 누구인가를 가려내기 위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은혜 위에 은혜' 라는 의미를 알게 하시는 것이다. 은혜라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하나님의 관심은, 은혜를 알 때만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이다(17장 참고). - 주님이 주신 은혜 위에 은혜를 받아라! - 이것이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성령으로 거듭나라" 라고 명령을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성령은 우리의 말을 듣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에 관심이 없고, 내 구원에 관심을 두니, 성경해석이 미로를 헤맨다는 것이다.
◈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날 수가 있다면, 우리가 성령인가? 그것이 가능한 인간인가? 우리는 송장인데 말이다. 위에서 태어남의 의미를 모르고 있다. 위에서 태어나는 것은,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통일교의 양수개념이고, 오직 성령세례밖에 없다는 것이다.
◈ 요한복음의 마지막 결론 !! - 1:33절에 대해
(요1: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 어떻게 성령이 와서 우리에게 생명과 빛을 제공하는가? - 그것이 14장부터 21장까지 내용이다.
* 1-13장 - 인간은 왜 안 되는가? 왜 성령이 오셔야 하는가? 왜 그분이 죽으셔야만 하는가? 예수님이 이 땅에 나타난 것은, 너희들은 어두움이다. 그래서 생명과 빛 된 나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 요한복음은 성령과 율법을 대조시킨다. 성령과 율법을 대조시키는데, 예수님이 오시고 난 이후에는 율법은 폐기 처분해야 되는 것이다. 바로 대충돌이 일어나는 것이다.
(요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요1:51)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 다른 어떤 길로도 아버지를 알 수가 없다. 오직 예수님뿐이다.
(요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 어떤 방법으로도 하나님이 나타난 적이 없었다. 오직 아들로서만 하나님을 나타낸다. 모두가 다 아는 이야기라고 무시를 하려고 하는데, 그러나 이 말씀은 다른 중간매체를 넣지 말라는 것이다. 인간들은 그 누구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계속 충돌시키는 것이다.
* 간사한 것이 없는 나다나엘이 보여주는 것은? - 참 이스라엘
* 인자(人子) - 나다나엘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나다나엘을 예수님이 찾아간 이유도, 인자 외에는 오르락내리락 할 수가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천사들도 인자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이다(1:51). 오직 인자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을 계속해서 보여 준다.
(요1: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 아들의 개념 - 아들은 바로 이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중간매체의 개념이다. 마치 창세기의 야곱의 사닥다리처럼 말이다(창28:12).
* 그리고 예수님이 나다나엘을 보고, "간사한 것이 없다" 라고 하는 것은, 나다나엘을 칭찬하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나다나엘이 갖고 있는 그 순수함이, 곧 예수님의 순수함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다. 예수님만이 순수한 분임을 그대로 보여주는 좋은 도구가 되는 것이다.
(요1: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 이 말의 뜻은 "너야말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됨을 잘 보여 주는 증인이다" 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나다나엘은 예수님만을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무화과나무에서 혼자 있었는데,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는데,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보았다고 했다는 것이다.
* 나다나엘이 과연 무엇을 기도하고 있었을까? 예수님 만나 본적도 없는데 말이다. 오히려 나다나엘은 예수님께 들킨 것이 된다. 오직 나다나엘은 예수님만을 바라보았을 뿐이다. 그러나 이 예수님만을 보는 모습이 참으로 순수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 나다나엘 : 나를 본적이 없는데 어떻게 저를 아십니까?
* 예 수 님 : 너는 그것을 보고 놀라느냐, 더 중요한 것은, 이 보다 더 큰 일은 그 다음이다.
(요1:5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요1:51)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 그러므로 간사함이 없는 참 이스라엘은 오직 예수님만을 증거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순수한 사람은 오직 예수님만을 증거하고 고집하는 사람인 것이다.
* 지금 우리가 누구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가는가? 우리가 설교할 때에, 눈앞에 누가 보이는가? 정말로 앞에 앉아 계신 예수님만이 보이는가? 아니면 사람도 보이는가? 당회장은 어떠한가? 장로가 보이는가?
* 나는 정말 간사함이 사람이 없는 사람인가, 아니면 간사함으로 똘똘 몽친 사람인가? 예수님만을 증거하면 그것으로 족한 줄 모르고, "그렇다면 목회 어쩌란 말인가요?" 라고 하는데, 먹고사는 문제에 관심을 두고 있다. 간사함 없이 예수님만을 증거하면, 그것으로 끝나는데 말이다.
◈ 성령세례 받은 분은 예수님인데,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서의 사명을 감당을 하는 것이다. 우리도 역시 성령세례 받았다면, '어린양을 증거하는 삶' 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 총신대원에서 강의할 때 있었던 일
* 신학생들은 항상 내 쪽에서 뭘 해야 된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성령을 내가 소유하고 있다는 생각을 계속 붙잡고 있다. 그래서 오히려 성령이 나를 주도한다는 생각이 자리를 잡지를 못한다.
* 이근호 : 성령을 바라봅시다 !
* 학생들 : 성령만 바라보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 초점이 맞지를 않다(성령과 나).
지금 목사님이 강의하시는 것은 우리의 신앙이 잘못되었음을 치려고 하는 것이죠?
* 이근호 : 여러분을 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예수님이 이것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만을 봅시다.
* 학생들 : (4일 이후에 강의가 끝나는 날) 학교에 공납금 돌려 달라고 하자. 잘못 배웠다.
* 그렇게 이야기를 해도 신학생들의 그 관심이 자꾸만 자기를 보고 있는 것이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나를 부인하고 있는 것인데,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을 보게 되면, 나는 자꾸 없어지는데, 그런데도 나를 부각하려고 애쓰고 있다. 관심이 다른 곳에 가 있다는 것이다.
* 신학생들이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간 사도바울은 안중에 없고, 예수를 바라보면 목회 성공, 교회 성장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신학생들이 학교에서 배운 조직신학이 엉터리라는 것이 아니고, 관심을 교회 성장으로, 교단 팽창으로 돌리게 한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방향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 나다나엘의 경우에도 그를 칭찬하는 것 같지만, 그러나 사실은 예수님 자신에 대해서 부각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나다나엘에 대한 언급이라는 것이다.
◈ 예수님은 자기 앞에 아른거리는 그 어떤 것도 다 부순다. - 오직 자기 자신만을 아시는 예수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