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승려 惠慈와 쇼토쿠태자
이성시
[서론]
[본론]
1. 고구려의 對倭外交
- 신라의 군사적 외교적 공세에 대한 대비책으로서의 의미
* 570년 고구려가 倭에 정식외교사절을 파견한 사건은 동아시아 국제정세의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즉, 고구려-백제 간의 항쟁을 중심으로 전개된 북조+고구려+신라 : 남조+백제+왜의 대립구도
다자동맹외교의 틀을 깨는 의미
* 570년을 전후한 고구려의 정책기조
- 6C 신라의 고구려 영토 침탈 상황의 전개로 백제보다 신라와 군사적 대치상황 심각
(552 한강하류 568 함남지역 진출)
- 기능적이고 강고한 방비체제의 구축을 위해 평양의 城塞都市, 장안성을 축조(552~593)하면서 천도(586)
- 한강하류에 진출한 이후 560년대 신라의 대중국 자주외교, 다자외교에 대응할 필요.
(564 북제, 566 陳 등 각각 남북조에 사신 파견하고 책봉 획득(북제))
2. 고구려의 국제환경과 외교전략 (고구려의 전략적 외교정책)
* 통일제국 隋의 출현으로 고구려는 심각한 이중전선의 부담을 안게 되고 倭의 전략적 중요성 제고
* 영양왕代(590~617) 혜자 파견 등 빈번한 인적 물적 교류 추진
* 607년 倭 국서사건 이전, 동동궐에서 수양제가 고구려 사절을 적발한 사건은
고구려의 전략적 외교정책을 입증하는 사례
3. 왜에서 수로 가져간 국서의 배경(607년말)
* 隋書 倭國傳 "日出處天子, 致書日沒處天子 無?"
- 수양제는 倭의 自大를 인정하고 오노노이모코[小野妹子]에 裵世淸을 대동시켜 파견
(백제, 신라와 빈번히 교섭하고 있다하는 倭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정한 것(고구려-왜 동맹 우려))
- 倭의 大國 운운하는 자세는 수양제에게 충격
(결국 수양제를 견제하려는 고구려의 외교적 의도와 일치 - 혜자의 전략적 사고가 내재?)
*** 왜의 대수외교 배후에 고구려(혜자)가 있다는 추론으로 당시의 국제정세를 해석하는 것은
왜의 전략적 위치를 과대평가한 것이 아닌가)
4. 왜의 대수외교와 고구려
* 왜수관계는 사실상 고구려와 수의 긴장관계에서 시작되어 성립하는 역사적 정치적 산물로서
607년 倭 국서사건에서 쟁점화하고 있는 對等-傾斜관계의 여부는 본질적 문제가 아니다.
***** 日出處, 日沒處의 표현은 국경을 맞대고 수양제의 직접적인 군사적 위협을 느끼지 못하는
倭의 외교적 수사로서 ...
일본역사학계의 通說은 특히 견수사의 지속적인 파견과 관련하여
562년 상실한 任那의 탈환을 위해 한반도 3국보다 우위에 선 倭의 국제적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
수에 대한 조공국의 위치가 아님을 강조하고 다소 오만한 외교적 수사로 自大하는 것이
대등외교 정책노선을 불러왔다고 보고 있다. 그 강력한 근거가 이른바 「임나의 조(任那の調)」로 표현되는
신라의 타협적인 자세이다. (575, 600, 611, 622년 4회)
* 스이코 시대의 정치철학은 고구려의 영향하에 있음
- 600년 遣隋使 國書와 사절의 표현에 나타나는 天과 日의 사상적 배경은 5C초 고구려의 왕권사상에서 유래
- 倭의 官位十二階, 大臣제도 등도 고구려의 영향
- 기타 아스카불교의 가람배치, 호류사 墨書畵像의 使臣圖
*「임나의 조(任那の調)」역시 신라와 수를 견제하려는 고구려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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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僧 혜자(임석규)
595년 일본으로 건너가 귀화하여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 됨.
(쇼토쿠의 外傳, 즉 유학교육은 박사 각가(覺?)가 담당)
(귀화란 사실상으로는 전법승(傳法僧)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됨)
같은 해 도일한 백제 승 혜총과 함께 불법을 홍포(弘布; 널리 알림)
일본 최초의 대사찰 아스카寺에 주석(駐錫; 머무름)
596년부터 혜총과 함께 호코사(法興寺)에서 주석
615년 고구려로 귀국.(총 20년 거주)
일본서기 등의 일본자료에만 기록됨
호코사(法興寺)
원래 소가씨의 원찰로 588년에 건축 시작 596년 완공.
백제에서 초빙된 佛師, 寺工, 瓦工 등에 의해 건립.
탑에 안치된 불사리도 백제에서 가져온 것
찰주를 세울 때 소가대신이 100인의 대신들과 함께 백제 옷을 입고 불사리 봉안식.
一塔三金堂式 가람배치가 고구려 금강사지와 유사함.
혜자는 단순한 전법승(傳法僧)의 역할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정치고문으로서의 역할까지 담당한 것으로 추측됨.
고구려가 보낸 金, 아스카寺 金銅佛(지다 다케미치)
[아스카사의 조영경과]
587 소가노우마코 아스카寺 造營 發願
588 백제에서 사리, 僧, 寺工 등이 오다
592 불당과 회랑 완공
593 佛舍利를 刹柱의 초석 안에 모시고 그 위에 찰주를 세우다
595 혜자 귀화, 혜총 도착
596 완공. 혜자, 혜총이 거주하다
605 백제계 도래인 구라쓰쿠리노도리(安作鳥)를 조불공으로 삼아 장륙상 2 제작 시작
고려 대흥왕(혹은 영양왕)이 황금 삼백냥을 보내다
606 銅, 繡 장륙상 각 1구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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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글의 핵심논조는 고구려僧 혜자가 쇼토쿠태자를 오랫동안 보필하면서 고구려의 전략적 의도를 관철시켰다는 전제 하에 서술된다. 그러나 당시 倭의 상황은 소가씨를 중심으로 한 정책기조가 백제와의 외교적 협조체제 아래서의 정권안보였고, 혜자의 역할이 소가씨와 어떠한 연계가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역사적기록도, 근거도 없다는 점에서 단순한 추론 이상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 더 나아가서, 관위십이계 등으로 표현되는 쇼토쿠태자의 왕권 확립 노력이 고구려의 영향을 받을 수는 있겠으나(그러한 영향력을 말하자면 倭의 모든 정치, 역사발전은 한반도 삼국의 영향 아래 있다) 그 외교의 방향을 혜자를 매개로 한 고구려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 하는 것은 그 추론의 비약이다.
아스카 寺가 완공되기 직전에 도일한 혜총과 혜자의 역할은 그 시기적으로 보아 전법승으로서의 역할 이외에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무리라고 본다. 불번전파를 위해 倭의 지배층이 필요로 했던 것은 아스카사를 중심으로 한 불법승의 교육과 각종 의식에서 위엄과 형식을 갖추기 위한 도래승의 존재였을 것이다.
[추고천황(推古天皇)] 1년(593)] 여름 4월 경오삭(庚午朔) 기묘(己卯)일, 구호풍총이 황자(皇子)를 세워 황태자(皇太子)로
삼았고, 이에 더하여 섭정(攝政)을 맡겨 각종 정무를 모두 위임하였다. ……(중략)…… 또한 고구려의 승려 혜자(慧慈)로부터
불교[內敎]를 익히고, 박사(博士) 각가(覺哿)로부터 불교 이외의 학문을 공부하였는데, 아울러 모두 통달하였다.
-『일본서기』권22, 「추고천황」 1년
저자는 위의 몇 줄로부터 상당히 많은 것을 유추해내는 것 같습니다.
혜자의 역할을 과대평가하고 있다고 판단하는 또 하나의 근거는
570년 이전 한반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6C의 百濟-倭 관계는 聖明王(523~554)과 継体紀 ~欽明紀의 시기로, 이때 많은 日系 百濟 관료가 渡日한 것이 日本書紀에 편재하여 나타나는데(継体(4例) 欽明紀(14例). 漢江流域의 수복과, 新羅에의 패배, 자신의 전사로 이어지는 당시의 위협적이고 긴박한 상황이, 欽明紀 13年부터 同 15年에 걸친, 불과 3年간 총 5件의 원군 외교단의 파견으로 나타납니다. 소위 百濟 五経博士의 渡日은 이러한 軍援 제공요청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고, 불교수입을 갈망하는 倭의 입장에서 그들의 파견이 가장 큰 외교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百濟이 복안이 있었을 것입니다.
즉, 570년 이전 당시의 상황에서 고구려가 일개 승려 한명을 파견함으로써 정치적 고문의 역할을 부여받고, 고구려의 국가이익에 유리한 방향으로 왜의 정책을 유도한다는 추론은 무리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는 백제-倭의 관계가 너무도 돈독하였고, 오히려 倭의 입장에서는 삼국의 문화적원조를 경쟁적으로 유치할 수 있는 상당히 유리한 이니셔티브를 쥐고 있는 것이지 그들에게 휘둘릴 상황이 아니었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