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17호 BC 1447-BC 1412 |
"사십일 동안 땅을 탐지하기를 마치고 돌아와"(신13:25) | |
―――― 성경으로 여는 세계사 신문 ――― |
오늘의 세계표정 땅을 탐지한 사람들의 엇갈린 보고는 결국 그들을 다시 광야로 발길을 돌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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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그 땅을 정탐하다 |
-열 두 명의
정예 공작원이 투입되다-
(기원전 1447년경)-이스라엘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신정국가의 건국"이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고 한 신학자는 전하고 있다. 시내산에서 첫 번째의 십계명을 새긴 돌 판이 깨어지고, 두 번째 돌 판이 이스라엘에 돌아오자 백성들은 대오를 정렬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나안 땅이 보이는 지점에 그들은 잠시 멈추어 저마다 텐트를 쳤다. 지금부터는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전쟁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전에도 아말렉족과 전투를 해 본 경험이 있기는 하지만 400여 년간을 종살이만 하다가 나온 그들로서는 전쟁은 너무나도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먼저 정탐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조심스럽게 대두되었다. 열 두 지파에서 각 1사람씩 12명이 첩보원이 되어 그 땅의 지형이며 군사의 세력은 둘러보게 한 것이다. 그들은 40일 동안 각각 흩어져서 그 땅을 정탐하고는 와서 모세와 원로들, 그리고 각 지파의 장들 앞에서 보고를 하였다. 열 두 명 중 먼저 나온 열 명의 보고자들은 '가나안 진군불가'의 의견을 내어놓았다. 그 소리를 듣자 사람들은 가슴이 철렁 내려않았다. 그렇게 되자 나머지 두 명의 의견은 들으나마나 이었다. 아무리 설득해도 한 번 두려움이 들어간 가슴에는 용기를 주는 말이 소용이 없었다. 결국 그들은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한 많은 40년 꽝야 방랑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사진: 여리고 입구에서 바라본 가나안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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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집중/ 성공과 불가, 팽팽히 맞서
(찬) 성공할 수 있다. 이번 선발대에서 주목을 받았던 여호수아는 다음과 같이 성공할 수 있는 이유를 밝힌다. "그 땅에 가보았더니 과연 젖과 꿀이 흐르고 있었다. 우리가 가져 온 과일이 그 증거다. 우리보다 그들이 키가 크고 사나우나 우리는 능히 그들을 쳐 부술 수 있다. 그것은 지금까지 우리를 인도하신 야훼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강하게 하셔서 싸우게 되면 분명히 이기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범사에 때가 있다고 했다. 지금이 그때다. 힘을 모아 치러가자"
(반) 큰일 난다. "땅은 기름지고 소산물은 아름다운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곳에 거인족이 사는 것을 보았다. 아낙 자손은 말할 것도 없고, 또 다른 부족이 합해 일곱 족속이 그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에 비하면 우리는 정말 메뚜기 같은 존재다. 그러나 어찌 힘으로 저 들을 이기겠는가? 때가 지금 뿐인가? 조금 더 기다려 보
자"
숨막히는 설전, 그러나 결국 포기
-광야로 되돌아가는데 40년의 유랑이 예언되다-
(기원전 1447년경)-정탐꾼이 돌아온 뒤 국론은 완전히 분열되었다. 비록 그들이 그 어떤 세대도 보지 못한 신기한 기적들을 바다와 땅, 하늘에서 보았지만 인간의 마음속에 도사린 원천적인 불신은 씻어내지 못한 것이다. 여러 용사들이 몇 날을 걸쳐 설전을 벌였지만 이미 여론은 한쪽으로 기울어가고 있었다. 결국 그들은 '포기 쪽으로 굳히고 광야로 되돌아 나갔다. 350여 만 명의 엄청난 군중들은 싸움한번 해 보지 않고 고통스러운 광야로 다시 나선 것이다. 하나님도 이들의 믿음 없음을 아셨는지 "그 땅을 정탐한 40일을 40년으로 하여 광야에서 유랑하게 할 것"이라고 모세를 통하여 예언하셨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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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아십니까?
물두멍과 제사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할 마음이 있어 성막에 오면 먼저 제사장들이 이들의 속죄 의식을 돕게 되어 있는데 제사장들은 물두멍의 물로 먼저 정결케 되어야 했다. 왜냐하면 제사장들도 인간이기에 그들의 죄를 깨끗게 한 다음에야 다른 사람의 죄를 씻는 일에 보조를 하는 것이었다.
모세, 오경의 집필을 시작하다.
출애굽의 주역 모세는 이제 100살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측근들에 따르면 모세의 장막은 밤이 늦도록 불이 꺼지지 않고 있다고 전한다. 이것은 고령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모세가 밤늦도록 무엇인가 일을 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최측근의 전언에 따르면 그는 현재 이스라엘의 역사와 인류의 창세 기록을 중심으로 오경을 집필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이스라엘의 이집트 탈출은 이스라엘의 역사기록 가운데서 결코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사건으로서 이스라엘 자손만대의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비장한 각오로 집필에 들어갔다고 관계자들은 전한다. 낮에는 백성들을 이끌고 광야를 행진해야 하고 밤에는 밀린 국사를 돌아보아야 하는 힘든 여정 가운데서 사명감 하나로 붓을 들었다는 것은 모세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라고 여호수아는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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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추적 |
광야생활의 연대 측정 |
기원전 1406년까지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하였다고 본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택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기원전 1400년경까지 6년에 걸쳐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하셨다(수 14:7,10)는 것이다. 갈렙이 가나안 땅을 정탐할 때에 40세였고 출애굽한지 2년째 되던 기원전 1444년이었으며 기원전 1400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분할할 때에 그는 85세였다(기원전 1445년에서 45년 후)고 본다. 여호수아는 110세까지 살았는데(수 24:29), 그가 언제 죽었는지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여호수아 이후 얼마 동안은 장로들이 이스라엘 통치를 담당하였다(수 24:31). 여호수아와 더불어 이스라엘을 통치하였던 장로들이 죽은 것은 가나안 정복이 끝난 후로부터 15년 내지 20년 지난 후의 일이라고 볼 수 있다(기원전 1380년경)고 한다면 사사기는 기원전 1380년부터 기원전 1043년까지 337년간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고 성경학자들은 전한다. 사사들이 통치하던 기간과 압제받던 시기를 모두 합치면 410년이 된다. 사도 바울은 사사들이 다스리던 시기를 약 450년이라고 말했는데(행 13:20), 사사들이 다스리던 기간이 중복되기도 하였을 것이다. |
이스라엘이 애굽에 머무름 |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30년간(창 15:13) 살았다는 것은 이미 살펴보았다. 출애굽기 12장 40절에는 야곱의 가족이 출애굽 430년 전 애굽에 도착하였다고 기록되었는데 이것은 기원전 1876년경이었다(참고; 갈 3:17). 야곱의 가족이 애굽으로 이주할 때에 애굽은 특별히 강대한 나라는 아니었다. 학자들 중에는 야곱의 가족이 애굽에 이주한 것은 힉소스 시대 이후였음이 확실하다고 주장한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이후에는 애굽에 접근하기가 용이했으리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힉소스는 기원전 1570년까지는 애굽을 떠나지 않았다. 이것은 출애굽의 연대를 기원전 1270년경으로 잡게 만드는데 이 "후기 출애굽"이론은 다른 면에서 보면 믿기 어려운 점이 있다. 성서는 야곱이 애굽에 이거할 때에 130세였다고 말하고 있다(창 47:9, 28). 요셉은 39살이었다(30세에 7년과 2년을 더한 것, 창 41:46-47; 45:6). 야곱이 애굽으로 이거한 때를 기원전 1876년으로 보고 이 사람들의 연대를 계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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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화제의 책
출애굽기<Exodus>
최근 모세에 의해 발간된 출애굽기가
중동지역에서 인기리에 널이 읽혀지고
있다고 한다. 구약성서의 한 책으로,
‘모세 5경’ 또는 ‘율법서’의 제2서.
‘모세 5경’의 제1서 《창세기》가 이스라엘 민족의 배경을 이루는 가족사(家族史)라고 한다면, 이 책은 민족의 탄생에 관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내용은 3부로 나누어
읽으면 더욱 재미있다. | |
중국을 살려낸 정전법(井田法)
주(周)나라에 있던 토지제도. 중국 고대 사상가 맹자(孟子)가 설(說)한 것이 가장 오래 된 것이다. 1리 4방(1리는 400 m)의 토지를 ‘정(井)’자 모양으로 9등분하여, 주위의 8구획은 8호(戶)의 집에서 각기 사전(私田)으로서 경작하고, 중심의 1구획은 공전(公田)으로서 8호가 공동으로 경작하여 정부에 바치는 조세로 할당하였다. 또한 맹자는 인의정치(仁義政治)에 입각하여 이 경지 외에도 택지를 백성에게 재산으로 주어 애국심을 함양하도록 하였다. 정전법의 내용은 《주례(周禮)》 등 유가(儒家)의 문헌에서는 더욱 복잡해지는데, 그것은 소농민을 기본으로 한 유가적 정치사상의 소산이었다. | | |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은 여호와 |
이집트를 탈출한 모세는 새로운 하나님 앞에 동포 이스라엘 백성을 규합하여 하나의 새로운 계약 공동체를 이루었다. 그들에게 선포된 신의 이름을 "야훼"라고 한다. 이것은 모세 이전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이름이었으나, 이스라엘 백성은 이 야훼 하나님에게서 조상 전래의 하나님을 재인식하고 새로운 출발을 하였다. 야훼는 이집트의 신이 아니라 분명히 모세가 만났던 바로 그 신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 야훼는 헤브라이 글자 4자음 YHWH(모두 자음이고 모음이 없다)로 표기되어 있다 (구약성서에서는 약 6800번 나온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고유명사 야훼 Yahweh의 본래의 뜻은 분명하지 않으나 야훼는 <있다>를 뜻하는 동사 하야 hayah(어두의 h를 강하게 발음하면 hayah가 되어 <산다>를 의미한다)가 변화한 말이며 <있게 하는 자><살리는 자>라는 뜻으로도 해석되고 있다. 여기에 이스라엘의 신관이 나타나 있다고 할 수 있다. 유대인 학자들은 자음만의 말에 모음표를 붙여서 성서의 바른 독법을 보존하려고 노력하여 왔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출애굽기나 레위기 24장 11절의 계명에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고, 이것을 읽어야 할 때는 <아도나이> (<나의 주>의 뜻)라는 말로 대용해 왔다. 후에 야훼를 나타내는 자음과 아도나이를 표시하는 모음이 합해서 <여호와>라고 발음되었다. 즉 아도나이의 모음을 YHWH에 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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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색의 나라> 가나안에는 어떤 신들이
가나안의 모든 신들은 거짓신이나, 계시된 하나님은 살아계신 신(神) |
가나안은 시리아. 팔레TM티나 지방의 고대 이름이며 성서의 이야기가 전개된 무대이다. 그것은 오늘날의 레바논 공화국, 이스라엘 공화국 및 요르단 왕국에 걸친 여러 지방을 주무대로 하고 있다. <가나안>이라는 이름은 지중해 특산인 호네 조개(학명 무렉스)에서 만들어 낸 자홍색염료와 관계가 있으며 <자색의 나라>라는 뜻이라고 한다. 가나안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를 연결하는 교통상의 요로이며 <육교>라고도 붙인다. 가나안의 역사는 메소포타미아의 슈메르 시대까지 소급된다. 기원전 4천년 대 초기에는 셈어족이 가나안에 정착하였고 기원전 3천년 대에는 상당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가나안의 문화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영향 아래 발달하여 기원전 2천년 대 중엽에는 절정에 이르러 염색, 직물, 도기, 건축, 알파벳의 발명 등으로 기원전 13세기 중엽 이후에 이스라엘에 계시된 유일신 야훼를 모시고 가나안에 이주 정착한 이스라엘인들에 의해 거의 종교가 통일된다. 하지만 여전히 가나안의 우상들은 이스라엘의 신앙에 큰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하지만 여호와 신앙의 헤브라이즘은 페니키아를 통하여 그리스 문화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가나안에서는 우가리트, 비프로스, 듀로스, 아코 등의 도시들이 일찍부터 발흥하였다. 종교는 고대 오리엔트 공통의 다신교적 자연 종교였다. 시리아 북부 해안에 람. 샤므라(거룩한 곳)이라는 뜻하는 언덕이 있고, 이곳에서 출토된 점토판 문서들을 <우가리트 문서>라고 부른다. 에서 엘(남신)과 그의 아내 아세라(여신), 그의 아들 바알(남신)과 그의 아내 아나드(여신),그리고 다곤(우가리트에서는 바알의 아버지로 숭배되고 있었다. 셈족의 신이며 원래는 곡물신, 구약성서에서는 BC 12세기에 가나안 연안지대에 정착한 폐르샤인의 신이며, <삼손과 들릴라>이야기에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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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계십니까?
어족<language family>(語族)
하나의 공통조어(共通祖語)에서 파생되었다고
생각되는 하위(下位) 제언어군(諸言語群). 언어는
일반적으로 유형론적·계통론적으로 분류, 어족은
계통론적인 분류에 의한다. 계통론적인 분류는
언어의 두 가지 특성 즉 언어기호의 자의성(恣意性)과 언어변화의 규칙성에 의하여 가능한데 비교 방법에
의하여 각 언어간의 친소 관계가 정해진다. 이러한
방법을 통하여 각 언어간의 관계가 정립되어,
이들이 하나의 공통조어 또는 하나 이상의 중간조어로 소급될 수 있을 때, 각각의 언어들 간에는 친족관계가 있다고 하며, 이들의 각 구성언어를 어족이라고 한다. 지구상의 언어 가운데 가장 잘 연구되고 분류된
어족으로는 인도유럽어족이 있는데, 이에는 인도이란제어(諸語)·발트슬라브제어·로망스제어·켈트어·게르만제어 등이 포함되어 있다. 한국어의 경우 알타이어족과 친족관계를 가진다는 것이 일반론이나, 가지지 않는다는 학설도 있어 연구가 필요. | |
발언대
순장(殉葬) 왜 합니까?
순장은 어떤 죽음을 뒤따라 다른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강제로 죽여서 주된 시체와 함께 묻는 장례
습속. 순사(殉死)라고도 한다. 통치자 등 신분이 높은 사람이나, 남편이 죽었을 때 신하나 아내가 뒤를 따르는 습속은 세계적으로 분포하는데, 중심을 이룬 것은 신분 계층이 있는 사회, 뚜렷하게 가부장제적(家父長制的)인 사회, 특히 초기 고대문명과 그 영향권에 있는
사회에서 성행하였다. 중국에서는 은(殷)나라 때 많은 청동기 등의 껴묻거리[副葬品]와 함께 많은 사람을 죽여 순장하는 묘제(墓制)가 있었다.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으나, 부여와 같은 문화권에 있는 고구려, 백제에서도 순장의 풍속은 있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러한 순장을 몰아내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일고 있다. 사람의 목숨은 빈부귀천에
관계없이 소중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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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레위기가 집필이 완성되다
내용과 주요 사상 |
레위기는 선민 이스라엘의 종교적 및 사회적 생활 전반에 걸쳐 그들이 준수해야 할 율법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시내산에서 언약에 의하여 이스라엘 민족은 선정민족 으로 원칙적 조직을 본 것이다. 이미 하나님은 시내산 에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기본적 율법을 주셨고 성막도 세워졌 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들 속에 이미 임재 하시어 통치 하셨다. 이제 백성들이 긴 여행을 떠날수 있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성막에서 하나님을 예배 하는 법을 가르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주신 율법이 바로 레위기의 내용 이다. 본서는 선민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이 계시되어 있다. 종교 의식과 예배의 법이 주가 되지만 동시에 율리적 생활의 규칙도 중요한 내용이다. 선민 이스 라엘은 우주의 창조주되시고 그들을 애굽에서 해방하여 구원해 주신 여호와께 찬송과 헌신의 표로 [번제]를 드리게 되었고, 또 생명의 주되신 은혜로운 하나님과 또한 이 웃과의 교통과 화목의 표로 [화목제]를 드리라고 하셨으며 범죄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하나님을 노엽게 한 자는[속죄제]를 드려 죄의 용서를 구하라고 하셨다. 본서에서 우리는 구원의 주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의 은혜롭고 경건한 또 엄 숙한 종교 생활의 법을 배우게 된다. 또 본서에서 우리는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라는 강한 인상을 받게 된다. 제물을 성별하며, 제사장들이 마음과 몸을 성결케 하며,부정 한 자는 반드시 먼저 정결케 된 후에야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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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추적(TIME LINE) |
모세의 출애굽 경로를 찾아라
발굴작업 계속중이나 윤곽은 잡힌 듯 |
모세가 3천5백여년전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출애급할 당시 택했던 고대 사막길이 새로 발견됐다고 이집트의 한 고고학자가 주장했다. 주인공은 수에즈운하 대학의 마흐무드 압델 라지크 교수, 그는 말라붙은 우물들이 잇따라 발견됨으로써 카이로 부근 나일 삼각주에서 수에즈만(灣) 서안까지 약 200km에 달하는 고대 이동로의 존재를 입증해 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라지크 교수가 이끄는 수에즈운하 대학 발굴단은 또 고대 이집트 제18왕조 시대인 아멘호텝 1세와 아멘호텝 2세 재위 당시 4천명 이상이 시나이 반도 탐사에 나섰던 사실을 알려주는 상형문자가 새겨진 바위도 발견했다고 밝혔던바 있다. 독일에서 수학한 고고학자인 라지크 교수는 고대 시나이 반도 탐사에는 채석장에서 일하기 위한 인력 7백여 명만이 통상 참여했다고 말했다. 따라서 시나이 탐사대가 이처럼 대규모로 구성됐다는 사실은 이들이 채석장에서 일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출애급에 목적이 있었음을 입증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더욱이 이번에 바위가 발견된 곳은 수에즈만 부근으로 모세가 유대인들을 이끌고 홍해를 건넜던 바로 그 지점일 가능성이 크다고 라 지크 교수는 말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그곳에서 홍해를 건넌뒤 시나이 반도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라지크 교수는 출애급 경로의 궁금증을 풀어줄 단서가 될 상형문자가 카이로 남동쪽 130km 떨어진 아인 알-수크나의 사막도로 끝에서 발견됐다고만 말하고 정확한 지점은 밝히지 않았다.다른 고고학자들이 끼어 들어 법석을 떨지 못하도록 하고 자신의 연구를 혼자 끝내려는 의도에서라고 한다. 그는 "아멘호텝 1세와 아멘호텝 2세 당시의 시나이 탐사 목적을 밝혀줄 다른 기록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로 아인 알-수크나 일대에서 발굴작업을 계속하고있다"고 밝혔다. 사학자들은 지금까지 나일 삼각주에서 시나이 반도 서쪽으로 가는 고대 경로가3개 있었다고 주장해 왔으나 이들이 주장한 경로는 라지크 교수가 이번에 발견한 경로 보다 모두 북쪽에 위치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영화상영안내 나는 가나안을 보았노라
왜 우리는 가나안을 보기만하고
들어가지 못했는가를 심층적으로
다룬 화제의 영화, 기대하시라 개봉박두 | |
신간안내----여리고는 함락될 수 있었다. 여호수아의 자서전
12명의 정탐꾼중 한사람이었던 여호수아의 회한에 친 육필수기 당신은 이 글을 읽으면서 가나안 점령의 대의를 깨달을 것이다. | | |
관련사이트▶http://www.kcm.co.kr/bible/lev/index.html▶http://members.aol.com/chichi/dingbats.html ▶http://members.aol.com/chichi/misc.html▶http://www.metmuseum.org/htmlfile/newexhib/E_Current.htm |
첨부자료 출처 : 성화사랑 http://blog.cbkmc.com/sungh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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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리고 전경 (이하 출처- http://blog.daum.net/wonsunbe)
여리고는 450Km되는 요르단 계곡 안에 위치한다. 이 계곡은 헬몬산으로부터 남쪽의 아카바만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계곡이다. 이 계곡은 케냐, 탄자니야를 거쳐 모잠비크까지 이어진다. 계곡의 가장 낮은 바닥은 세상에서 가장 낮은 해저 396m인 사해 부근이다. 40Km 거리에 있는 예루살렘(해발760m)으로부터 약 1200m를 내려와 덥고 무성한 요르단 계곡에 이른다.여리고는 요르단 계곡 주변의 황량한 사막 정 가운데 펼쳐진 녹색 카페트와 같다.
여리고
여리고는 오래 전부터 기름진 토질과 오렌지, 바나나, 대추로 유명했다. 옛날에는 대추의 도시라 불리었다. 여름에는 메마르고 아주 더우나 겨울과 봄에는 수 많은 꽃의 향기 덮여 아름다운 기후를 만든다. 비옥한 여리고는 주전 7000~10000년 전부터 형성된 문명의 중심지였다.
여리고 옛 로마 길
여리고 성 돌기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 장군의 인도로 팔레스틴 지역으로 들어온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땅에 있는 성중에 최초로 공격한 성이 여리고 성이다. 다른 성은 열심히 전쟁을 해서 빼앗았는데, 여리고 성은 기적으로 빼앗았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먼저 여호수아 6장 15-17절을 보면 "제 칠일 새벽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서 여전한 방식으로 성을 일곱 번 도니 ... 일곱 번째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외치라...'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소리를 듣는 동시에 크게 소리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여리고 성 돌기
무너진 여리고 성 (출처- http://blog.daum.net/wonsunbe)
여러 고고학자들과 대영 박물관 탐사팀 등등이 19세기부터 열심히 여리고성의 고고학적 발견을 시도했다. 그 결과 이와 같은 사실이 발굴되었다. 19세기 후반에 처음 발굴된 이래로 고고학자들의 지대한 관심이 집중된 유적지였다.예루살렘 탐사의 임무를 띠고 팔레스타인에 머물고 있던 영국의 워렌(C.Warren)은 1868년 4월 여리고를 방문,수십명의 인부들을 이끌고 성서시대의 여리고로 여겨지는 `텔 술탄'이란 언덕을 발굴하기 시작했다.약 한달동안 지속된 발굴에서 워렌은 마치 참호를 파듯이 텔의 동서로 이어지는 도랑과 텔의 바닥까지 도달하는 수직 갱을 팠다.하지만 그의 발굴에서 흙벽돌건물의 흔적만 밝혀졌을 뿐 이렇다 할 만한 여호수아의 성벽은 찾을 수 없었다.당시에는 돌로 만든 석조건축물만을 가치 있는 유적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는 더 이상 발굴을 지속할 수 없었다.나중에 알려진 일이지만 워렌의 수직 갱은 1만년전에 건설된 신석기시대의 성벽과 망대를 1m 정도 벗어났다.
무너진 여리고 성
두번째의 여리고 발굴은 1907년부터 1911년까지 오스트리아의 젤린(E.Sellin)과 독일의 바찡어(C.Watzinger)에 의해 조직적으로 이뤄졌다.이미 1902년부터 3년동안 이즈르엘 평원의 타아낙을 발굴하여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춘 젤린은 엄청난 흙벽돌의 잔해 속에서 견고한 바윗돌로 기초를 다진 성벽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젤린이 여리고에서 발견한 성벽이 여호수아가 파괴한 성벽이라는 소문이 삽시간에 예루살렘을 통해 온 유럽으로 번져 나갔다. 하지만 발굴이 진행되면서 한 시대의 성벽만 발견된 것이 아니라 여러 군데서 다양한 시대의 성벽들이 속속 드러나게 되자 발굴당사자들은 과연 어느 것이 여호수아의 성벽이냐는 난감한 문제에 부딪쳤다.결국 그들은 기원전 16세기경 파괴된 중기 청동기시대의 성벽을 선택했고,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 입성도 같은 시대로 보았다.이 연대를 기준으로 광야생활 40년을 거슬러 올라가서 출애굽사건도 기원전 1500년경 발생한 것으로 추정했다.젤린의 이러한 연대추정은 여리고의 고고학적 중요성을 신봉하는 일부 성서학자들에 의해 오늘날까지도 주장되는 초기 출애굽설을 낳게 된다.
무너진 여리고 성
1차대전 이후 팔레스타인을 식민지로 거느린 영국이 이 위대한 발굴을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젤린의 발굴결과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나선 리버풀대학의 가르스탕(J.Garstang)은 1930년부터 새로운 성벽을 찾기 위한 대규모 발굴을 시작했다.특히 그는 처음으로 여리고에서 기원전 3000년~1500년 사이의 무덤들을 발굴했다.이곳에서 함께 출토된 부장품들,특히 잘 보존된 토기들을 통해 여리고의 주거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었다.하지만 7년동안의 발굴결과 가르스탕이 내린 결론은 젤린의 것과 별 차이가 없었다.단지 연대를 1백여년 늦추어서 여호수아에 의한 여리고 성의 파괴가 기원전 15세기에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무너진 여리고 성
마지막 여리고 발굴은 영국의 여성 고고학자 케년(K.M.Kenyon)이 1952년부터 1958년까지 지속한 것이다.그녀는 이 발굴에서 가장 발전된 발굴기술을 적용,토기 분석을 통해 정확한 연대를 추정한 결과 여호수아 성벽보다 더 중요한 사실을 밝혀냈다.이곳에는 이미 1만년전부터 거대한 성벽과 망대가 건설됐기 때문에 여리고가 공식적으로 세계 최초의 도시라는 것이다.도시문명의 고향인 메소포타미아지역에서 기원전 4천년경부터 성벽을 쌓기 시작한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파격적인 결과였다.한편 그녀의 `여호수아 성벽'에 대한 연대추정 결과는 이전의 발굴 결과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고고학자 가스텡과 여러 학자들은 여리고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방법으로 정복되었다는 증거들을 찾아냈다. 발굴된 성내에는 많은 식량들이 남아있었다. 고대의 전쟁은 오랫동안 성을 에워싸고 전쟁을 하기 때문에 식량이 바닥나게 된다. 그런데 여리고성은 식량이 그대로 남아있는 채로 정복된 것이다. 또한 대영박물관의 탐사팀에 의해 여리고성은 여호수아시대에 강도 6.0의 강력한 지진이 발생하여 파괴되었음을 보여주는 지질구조가 발굴되었다. 이런 여러 가지 정황을 볼 때 여리고 성의 성경적 함락이 매우 신빙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무너진 여리고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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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여호와 로이~ 좋은 내용 감사합니다 GOD bless you!!!
감사합니다.잘 보고갑니다.
참으로!귀한역사자료임니다.더확실하게.더진실하게.연구하여지기를기원함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