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일기(31) - (양산) 물금역/원동역
안동에서 출발한 낙동강은 경상도 지역을 돌아돌아 남쪽 바다를 향해 흘러간다. 마지막 도착지인 부산 낙동강 하구둑에 이르기 전, 낙동강은 두 개의 행정구역 사이를 흐른다. 한쪽은 김해이고, 다른 한쪽은 양산이다. 최근 경남 지역 역답사는 자연스럽게 ‘낙동강 답사’로 바뀌었다. 경남의 많은 역들이 낙동강 주변에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양산 지역에는 두 개의 기차(국철)역이 남아 있다. 하나는 <물금역>이고 다른 하나는 <원동역>이다. <물금역>은 양산의 중심역이다. 역에서 내리면 시내 쪽으로 향하는 길이 있고 다른 쪽으로 나가면 낙동강과 만난다. 이번 답사는 낙동강으로 향한다. 멋진 다리를 건너면 ‘황산공원’이 있다. 다른 지역 공원보다도 더 자연스럽고 유연한 느낌을 준다. 공원을 지나 낙동강 자전거도로에 합류한다. 수풀로 막혀있던 낙동강이 모습을 드러냈다. 장마 때문에 물색깔은 흐릿해졌지만 그만큼 수량은 풍부해지고 거세졌다. 싱싱하고 원시적인 강의 모습이다.
<물금역>에서 <원동역>까지는 약 10km 정도 되는 듯했다. 원래는 기차를 이용하려 했지만, 걸어가기로 결정했다. 낙동강을 제대로 관찰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콘크리트 도로를 걷다 다른 자전거 도로에서는 좀처럼 발견하기 어려운 특이한 장소와 마주한다. 보통 강 옆을 정돈하여 자전거 도로를 만들지만 이곳은 강 위에 테크 형태로 길을 만들었다. 강과 더 가까워지고 물 위를 걸을 수 있다는 것과 바로 위에는 기차가 생생 다니는 철길이 마주하고 있다는 점에서 길과 강 그리고 철도라는 매우 신선하고 낭만적인 조합을 만난 것이다. 멀리 보이는 다리의 전경과 함께 길지는 않지만 멋진 양산의 <황산강> 코스를 걸었다.
2시간이 가까워지자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날씨가 심상치 않다. 한바탕 폭우가 내릴 기세였다. 최근 장마는 국지성 호우와 번개를 동반하는 성격을 띠고 있어 자칫 위험한 상황에 빠질 수 있다. 걸음을 서둘렀다. 자전거 도로를 빠져나와 원동마을로 향했다. 하늘은 우르렁 거리며 위협한다. 비가 내리기 바로 전, <원동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역은 깔끔하고 아름답다. 역 앞에는 넓은 규모로 비를 피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번개와 함께 폭우가 쏟아졌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 휴식공간 가장 안쪽으로 피신했다. 안도감과 함께 청량감이 밀려온다. 오랜만에 폭우의 강렬함을 바로 눈앞에서 바라보는 기회를 얻었기 때문이다. 나름 안정된 장소였기에 그저 가만히 앉아 아무 생각없이 ‘비멍’을 때렸다. 특별한 <원동역>의 경험이다. 비와 역, 예상치 못했지만 매우 어울리는 조합이다. 그렇게 요란한 비와 함께 약 2시간이 흘러갔다.
비가 조금 약해져, 마을 답사를 하기로 했다. 양산 원동마을은 매화와 마을벽화로 제법 알려져 있는 곳인 듯하다. 마을 벽에 붙어있는 ‘매화마을 축제’ 걸개그림은 <원동역>이 바빠질 시기를 상상하게 만든다. 비가 내린 거리는 너무도 깨끗하고 정결하다. 이때는 사진도 가장 선명하고 아름답다. 빛은 사진과는 상극이다. 아름다운 사진은 대부분 빛이 약해져 있을 때인 여명과 석양에 탄생한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오늘과 같이 비가 그친 날도 아름다운 풍경과 만날 수 있다. 멀리 안개와 산과 물이 절묘하지만 섬세한 빛의 조화 속에 아름답게 모습을 드러낸다. 그 속에서 2020년 계획했던 미래와 과거의 관계를 다시금 다짐한다. 과거의 소중한 몇 개의 추억과 기억만 필터링한 채, 현재와 미래에 집중하기로 한 나와의 약속이다. 항상 위협받는 생각이지만 오늘 청량한 세계와 만나면서 계획의 의미를 다짐한다.
정말로 오랫동안 <원동역>에서 비와 머물렀다. 비가 오지 않았다면 ‘밀양’까지 자전거도로를 따라 걸으려 했지만, 비가 더 큰 추억을 안겨주었다. 움직임 속에서 얻은 고요와 정지의 순간, 모든 것은 조화와 중용 속에서 그것의 의미를 확장한다. 움직임도 더 큰 가치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때론 머물러야 할 순간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조금은 혼란스러웠던 생각을 정리할 수 있어 좋았다. 비가 그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천안으로 돌아가기 위해 원동에서 밀양으로 가는 기차를 탔고, 밀양에서 천안으로 가는 기차로 환승했다. 한참을 가다 보니, 항상 어깨에 메고 있던 작은 가방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원동역’ 플랫폼에 그렇게 오랫동안 서성였을 때는 기억나지 않았던 가방이 이제야 기억난다. 아마도 2020년 이전과의 이별에 대하여 골몰한 결과인 것같다. 나쁘지만은 않다. 가방의 상실이 떠오를 때마다 내가 잊어야 할 과거의 허상도 분명하게 인식할 것이기 때문이다. ‘가방의 분실은 과거와의 진정한 이별’인 것이다.
첫댓글 - 비와 역, 예상치 못했지만 매우 어울리는 조합!!! 과거의 허상보다 현재에 집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