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말씀드릴 것은 제가 이이화선생님의 책을 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의 공통점을 어떻게 적어놓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서도 글을 쓰는 이유는 역사소녀님의 생각대로 두사건은 공통점이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물론 두사건 모두 고려문벌귀족사회의 모순이 드러난 것이라고 한다면 광범위한 의미에서 공통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속을 드러다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닙니다.
현재 학계에서는 고려사회의 성격을 문벌귀족사회라고 합니다. 음서와 공음전을 통해 성장한 문벌귀족들이 폐쇄적 통혼권(쉽게 표현해서 요즘 재벌끼리 결혼하는 것)을 설정하고 자신들의 세력을 유지해 왔습니다. 그러다보니 가장 강력한 세력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왕실과의 혼인을 원하게 되고 그가운데 대대로 왕실과 혼인을 맺은 대표적 가문이 이자겸으로 대표되는 인주 이씨입니다. 이자겸은 자신의 딸을 예종의 왕비로 들여서 그 소생인 인종으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인종에게도 그의 두딸을 들여서 중복되는 인척관계를 맺고 절대 권력을 차지하게 됩니다. 인종은 자신의 이모들과 결혼한 셈이지요. 특히 이자겸에게는 여진토벌에 공이 큰 척준경이 있었기에 그누구도 이자겸의 세력을 넘볼 수 없었습니다. 교만해진 이자겸은 十八子(세글자를 합치면 李자가 됨)가 왕이 된다는 도참설을 믿고 인종을 폐하고 스스로 왕이 되려는 야심을 품습니다. 인종은 이자겸의 세력을 자신들의 측근으로하여금 제거할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거의 폐위 직전까지 갑니다. 하지만 인종은 척준경을 자신의 세력으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하고 이자겸을 제거할 수 있었습니다.
이자겸의 몰락후 척준경이 권력을 잡았으나 정지상의 상소로 그 역시 제거됩니다. 척준경을 상소 한장으로 제거한 정지상은 묘청 , 백수한등 서경파 세력을 끌어들여 권력을 장악하려 합니다. 특히 여진이 금을 건국한후 고려에 대해 압력을 가하고 있었고 이자겸의 난으로 궁궐마저 불 타버린 상황에서 풍수지리설에 바탕을 둔 서경천도는 인종의 마음을 움직이기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서경파 , 풍수지리설 , 배외(금나라 배척)파로 지목되는 묘청일파의 주장은 김부식을 대표로 하는 개경파 , 유학파 , 사대파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뜻을 관철 시킬수 없게 된 묘청일파는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김부식의 지휘를 받는 관군에게 1년만에 진압되고 맙니다. 이자겸의 난이 왕의 측근세력과 외척세력의 대립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면 묘청의 난은 서로 다른 사상에 바탕을 둔 개경파와 서경파의 대립이 불러온 사건입니다. 따라서 두 사건은 공통점을 찾아보기 어렵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