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상임금 소송, 노동조합이 주도권을 쥐기 위해서는?
임금체계 개편을 위한 사회적 논의를 제기하자!!!
사회진보연대 정책위원회
"GM 회장님께서 북한 문제 때문에 (한국에서) 철수할 수도 있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이 자리에 오신 것 보니까 철수가 아니라 투자를 더 확대하러 오신 것이라고 생각해도 되겠지요?"
역대 최대 규모의 경제사절단을 대동하고 미국을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은 5월 8일 미국상공회의소 주최 기업인 회동에서 댄 애커슨 GM회장을 만나 먼저 말을 걸었다. 애커슨 회장은 그 자리에서 지난 2월 발표된 8조원 가량의 신차 투자계획을 계획대로 집행하기 위해서는 엔저 현상과 통상임금 문제를 해결하여야 한다고 답변했다. 이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은 “그 문제는 GM 혼자만 겪고 있는 문제가 아니고 한국경제가 안고 있는 문제"라고 공감을 표했다.
이전까지 통상임금 소송은 사안의 파급력에 비해서는 비교적 조용히 진행되어 왔으나, 이를 계기로 노동계 핵심 쟁점 중 하나로 부상하였다. 원칙적으로 대통령이 사법부의 판단에 대해 개입할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애커슨 회장의 이러한 발언은 단순한 해프닝에 그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여러 정황이 GM을 비롯한 자본과 박근혜 정부가 지속적으로 전향적인 판결을 해 온 법원 밖에서 통상임금 문제를 풀겠다는 의도를 보여주고 있다.
GM회장의 엉뚱한 발언, 그 속내는?
애커슨 회장은 박근혜 대통령을 만나기 불과 1주일 전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금속노조 한국지엠 지부장과 만났다. 그는 이 자리에서 엔저 문제와 통상임금 소송 문제를 거론하며 똑같은 문제를 박근혜 대통령에게도 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 전에 한국지엠은 통상임금 소송에서 회사가 패소시 지급해야 할 체불임금 8,000억을 재무제표에 반영했다. 그 결과 영업이익에서 대우자동차 인수 이래 최대에 가까운 6,000억 흑자를 기록했음에도 오히려 당기순이익에서 3,000억 가량의 적자로 2012년을 마감하게 되었다. 소송비용의 반영이 한국기업회계기준(K-IFRS)에 따라 적법하게 이루어진 것이라 하더라도 이를 2012년 재무제표에 반영한 것은 맞지 않다.
한국지엠 조합원들이 제기한 5건의 소송 –원래는 7건이었으나 5건으로 통합- 중 일반적으로 판결 금액의 지급이 이루어지는 2심 판결이 나온 사건은 원고가 5명뿐인 사건 하나로, 약 1만여 명의 조합원을 원고로 하는 주 사건은 아직 1심 판결도 나오지 않은 상태이다. 참고로 한국 기업의 경우 경영상태를 실제보다 불건전하게 보이도록 하는 패소시 지급 비용을 재무제표에 반영하는 일은 거의 없다.
미심쩍은 점은 이뿐만이 아니다. 한국지엠은 그 액수에 있어서도 GM의 연차보고서의 언급대로 "합리적으로 추정할 때 해당 금액을 초과할 위험은 없다"고 할 정도로 극히 보수적으로 인식했다. 그 결과 8,000억(한국지엠 사측의 설명) 또는 7,460억(GM 연차보고서)에 달하는 패소시 지급할 체불임금 예상액을 소송인원을 기준으로 나누면 일인당 평균 7,000만원이 넘는다.
사측에서는 이렇게 금액을 크게 잡은 이유에 대해 소송의 대상이 되는 2007년부터 2010년까지만 아니라 2012년까지 모든 금액을 계산했기 때문이라 주장한다. 그렇다하더라도 소송을 제기할 당시 2007년부터 2010년까지 3년간의 체불임금을 1인당 1,800만 원 정도로 예상한 것과도 차이가 상당히 크다.
결론적으로 한국지엠은 소송 패소 비용을 최대한 보수적으로 인식하여 사상 최대 흑자를 극적으로 적자로 전환하고, 모기업인 GM의 회장은 이를 노조와 박근혜 대통령에게 언급함으로써 사회적 문제로 만든 것이다.
행정부 수장에게 사법부의 판단을 뒤집어 달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비상식적이고 무례한 일인지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방미 사절단에는 정몽구 회장도 함께 했다고 하는데, 예를 들어 정몽구 회장이 오바마 대통령에게 “전미자동차노조(UAW)가 현대자동차 앨라배마 공장에서 조직화를 하면 미국에서 공장을 철수하겠다”고 하는 모습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만 이렇게 일견 황당해 보이는 애커슨 회장의 발언은 2012년 실적 발표에서부터 일관되게 법원 밖에서 소송을 흔들어 보려는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이루어진 것이다.
박근혜 정부 역시 이에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박근혜 대통령과 함께 방미한 조원동 청와대 경제수석은 경제인 회동 후 기자 브리핑에서 "이런 부분까지 이야기하지 않아도 되는데 통상임금의 심각성이 알려지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자세하게) 브리핑을 한 것"이라고 발언했다. 즉, 한국정부에서 오히려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이슈화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왜곡된 임금구조를 불러온 통상임금 산정지침
통상임금은 각종 법정수당, 그 중에서도 특히 시간외근무, 즉 법정노동시간 이외의 노동에 대한 대가를 산정할 때 기준이 되는 임금이다. 이에 반해 평균임금은 이미 지급된 임금, 3개월 내에 지급된 임금 일체를 다 합산해서 3개월의 일수로 나눈 것으로 퇴직금이나 휴업수당을 지급하는 기준이 된다. 평균 임금의 산정에는 물론 통상임금을 기준으로 하는 각종 법정수당이 포함되므로 통상임금은 평균임금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통상임금이 갈등의 원인이 되는 이유는 사용자들이 시간외근무에 대한 대가를 정상적으로 지급하지 않기 위해 전체 임금 중 통상임금에 해당되지 않는 부분을 늘려왔기 때문이다. 기본급은 낮은 수준으로 놓아둔 채 노동자들의 정당한 임금인상 요구는 ‘문짝수당'이나 'CCTV 수당'처럼 온갖 희한한 수당을 만들어 무마하면서 의도적으로 통상임금에 해당되지 않는 금품 명목으로 돌려버린 것이다.
그 결과 현재 제조업 평균 기본급 비율은 전체 급여의 40%밖에 되지 않는다. 이에 따라 사용자들은 별 부담 없이 잔업과 특근을 통해 설비투자 없이도 산출을 늘릴 수 있는 반면, 노동자들은 더 많은 시간을 일해야 생활임금을 벌 수 있게 된 것이다. OECD 최장 노동시간을 자랑하는 한국의 장시간 노동체계를 떠받치고 있는 것이 바로 온갖 수당과 정기 상여금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기형적인 임금체계이다. 또한 ‘물량=추가잔업시간=생활임금’인 구조 속에서 생산 물량을 두고 노동자 내부의 경쟁과 분열은 격화되었다.
통상임금 판례의 변화
법원은 지금까지 꾸준히 통상임금의 인정 범위를 확대해 왔다. 대법원은 1990년 통상임금의 개념에 대해 ‘정기성·일률성’이라는 판단기준을 확립하였다. 그리고 95년에는 임금 이분설을 폐기한다. 임금 이분설이란 임금이 노동의 대가로 지급되는 기본급 등의 교환적 부분과 복리후생비 등의 보장적 부분으로 나뉜다는 것인데,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법리를 폐기하게 된 데에는 집단적 노사관계에서 파업권을 제한하는 ‘무노동 무임금’ 원칙이 있다. 임금을 교환적 부분과 보장적 부분으로 나누어서는 ‘무노동 무임금’ 원칙을 주장할 수가 없다. 이 경우 파업을 한다고 해도 보장적 부분을 지급하지 않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임금 이분설이 폐기된 이후에는 지급형태가 고정적이고 일률적인 각종 복리후생비가 통상임금에 포함되게 된다. 월정액의 식대비, 체력단련비와 월동보조비, 정기적으로 지급되는 개인연금 지원금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지난해 3월, ㈜금아리무진 노동자 19명이 회사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는 매달 지급되지 않지만 미리 정해놓은 비율을 적용하여 산정한 금액을 분기별로 지급하는 정기상여금도 통상임금이라고 판결함으로써 이제 거의 변동성과급이나 일시적으로 지급되는 금품을 제외한 모든 임금, 수당, 상여 등이 통상임금으로 반영되게 되었다.
참고로 미국의 경우에도 시간급의 통상급여는 성과급, 출장여비, 보험료, 휴일/특근 수당 중 추가부분을 제외한 모든 임금을 총 노동시간으로 나눈 것으로 정하고 있다.
이렇듯 법원은 꾸준하게 통상임금의 산정 범위를 확대해 왔다. 그럼에도 기업들은 이를 무시하고 법적 근거가 미약한 노동부의 통상임금 산정지침을 근거로 상여금과 각종 수당을 통상임금에서 제외하면서 노동자들을 저임금의 올가미로 묶어 놓았던 것이다.
왜곡된 임금체계와 장시간 노동체계 개선의 계기로
자본가들은 지금까지 김앤장 등 유수의 법무법인을 동원하여 통상임금 소송에 대응해 왔다. 그렇지만 상여금이 통상임금에 포함된다는 대법원의 판결이 나오자 이들은 오히려 법을 버리고 판을 깨려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노동부 지침에 근거하여 노동자들을 육체를 갉아먹는 장시간 노동으로 몰아넣는 저임금 체계를 만들어 놓은 이들이 이제는 법원 판결이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나오기 시작하자 그 판결을 뒤집기 위한 집단행동에 들어간 것이다. 전경련, 경총은 통상임금소송으로 금방 한국경제가 거덜날 것처럼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고 이들을 대변하는 한국경제, 매일경제 등은 기업이 추가 부담해야 할 비용이 최소 38조나 된다며 재벌을 거들고 있다.
여기에 정부는 10일 상여금을 통상임금에 반영할 지에 대해 다음 달부터 노사정 간의 논의를 시작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쌍용차 해고노동자들,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 문제 등 절박한 노동자들의 요구에는 귀를 막고 대화를 하지 않다가 통상임금이 문제가 되자 노사정 협의를 들고 나오는 모습은 박근혜 정권의 본질이 무엇인지 명확히 보여준다.
이러한 자본과 정부의 움직임에 맞서는 노동자운동은 통상임금 소송을 장시간․저임금 노동체계를 강제해 온 왜곡된 임금체계를 바로잡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하지만 이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총 임금 중에서 상여의 비중이 높은 사업장은 그나마도 교섭력이 있던 일부 대형․조직 사업장에 국한되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애커슨 회장의 8조 투자와 통상임금 연계 언급에 대해 적극적으로 긍정의 메시지를 보낸 것은 대법원에 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의도가 깔려있다. 만약 통상임금 소송을 진행하고 있는 노조가 조용히 판결을 기다리는 전략을 취한다면, 정권과 자본은 “기업의 생존은 나몰라하는 귀족노조의 돈 잔치”라는 식의 이데올로기적 공세를 통한 사회적 압박을 펼칠 공산이 크다.
여기에 더해 GM이 8조 투자 계획 중 일부 혹은 전부를 취소하거나 연기하는 ‘전략적 후퇴’가 더해지면 그 사회적 파장은 단위 사업장을 넘어 민주노조 운동을 내외부에서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게 만들 것이다.
이를 헤쳐가기 위해서는 현재 통상임금 소송을 진행하고 있는 노조들이 먼저 장시간 저임금 체계를 바꾸는 사회적 논의를 제기해야 한다. 단위 사업장의 임금 교섭에서는 상여나 수당이 아닌 기본급 인상에 집중함으로써 주도권을 쥐고 나가야 한다. 통상임금 소송을 생산물량에 연동되어 발생하는 노동자 내부의 격차와 분열을 극복하는 발판으로 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