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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Sola Scriptura(오직 성경)
“비텐베르그로부터 강 건너의 면죄부 판매와 순수한 목회적 관심 때문에 그 악습에 대해 타오르는 적대심”을 참을 수 없었던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1517년 10월 비텐베르그 대학교 캐슬교회(Castle Church) 문에 95개 항목1)을 못질하였다. 그 이후 루터는 자신이 가진 신앙을 로마 카톨릭 학자들과 논쟁하게 된다.2) 1518년 10월 12-14일에 이루어진 추기경 카제탄(Cajetan)과의 논쟁에서 루터는 “이신칭의가 확고한 성경적 기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거침없이 언급했다. 루터는 기독교인들의 최종적 권위가 성경에 있다는 것에 호소”하였다.3) 이 후 종교개혁의 슬로건으로 나온 것이 sola scriptura였다. 그 외에도 sola fide와 sola gratia가 있지만 모두 sola scriptura에 의존한다. sola scriptura는 성경 66권이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이고 믿음과 삶의 모든 영역에서 무오류하고 권위적이라는 말이다. 성경화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계시의 모든 것을 담고 있으며 직접 계시의 모든 형태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성경만이 교회의 유일한 권위이다. 구원, 믿음, 그리고 삶의 모두 필요한 가르침에 관해 성경을 보통 사람들에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을 명백(perspicuous)하기 때문에 교회를 위한 성경의 무오류한 해석을 위해 더 이상의 다른 근원들이 불필요하다. 교황, 추기경, 감독, 교회교부들, 종교회의, 또는 회중이든 교회는 성경보다 우위에 있지 못하며 자기 입증의 성경만 교회와 모든 사람들에게 절대적 권위를 갖고 있다. 성경은 충족하며 완전하기 때문에 인간적 보탬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로마 카톨릭인들과 프로테스탄트들 간에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것들 중 하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신적 근원에 대한 것이다. 프로테스탄트들은 성경만이 우리의 궁극적 권위(authority)임을 믿는다. 로마인들은 이에 대해 성경 자체는 불충분하다(insufficient)고 한다.4) 교회와 전통의 가르치는 권위가 성경과 상응하는 권위들이라고 주장한다.5) 단순하게 다루거나 가볍게 다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전통이라고 할 때 선입적 개념을 가지고 있는데 예를 들면, 교회에 무슨 문제가 있어 누군가 지적하면, 이런 방법으로 지금까지 해왔다고 응답하곤 한다. 이런 의미로 전통을 받아들일 것인가? 로마 카톨릭인들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권위적 성경과 권위적 가르침과 전통들을 주셨다고 주장한다.6) 하나님의 말씀을 전통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하지만 이와는 정반대로 프로테스탄트들은 로마교회가 인간의 전통을 하나님의 말씀에 가미했다고 한다.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오직 성경만이 기록된 신적 계시의 유일한 근원이라고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고 확언했다. 오직 성경만이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는데 필수적이며 모든 기독교 사상과 행위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임을 믿는다.
sola scriptura의 의미
sola scriptura라고 해서 모든 진리의 내용이 성경에 있다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성경은 유전자, 미생물, 영어문법, 인터넷 등과 같은 것에 관해 언급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과학과 게임과 같은 것을 포함한 삶의 모든 영역에 접근할 수 있는 법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믿음과 실천의 모든 문제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최고의 권위며 유일한 귄위이다. 두 번째로 sola scriptura은 성경의 모든 구절들이 모든 독자들에게 동일하게 쉽게 읽을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성경은 존재하는 유일한 권위라는 의미도 아니다. 전통은 도움이 될 수 있고 무시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교회의 가르침은 권위를 갖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sola scriptura은 성경이 믿음과 실천을 위한 궁극적이며 무오류한 귄위임을 의미이다. 그 외 다른 권위들은 성경에 종속하며 오류를 포함하고 있다.
첫째, 성경은 완전하다(complete). 복원되어야하는 성경에 관한 최고의 진리는 하나님 말씀에 그 어떤 것도 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유다서 3에서는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라고 한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기 위해 우리가 필요한 모든 것은 성경뿐이다. 성경은 완전하다. 계시록 22:18은 우리들에게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 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라고 경고한다.
두 번째, 성경은 권위적이다(authoritive). 구약성경에서는 2,000회나 하나님의 말씀임을 언급하고 있다. 구약전체를 살펴볼 때 “주님의 영이 나에게 말씀하셨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임하니라” 그리고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등과 같은 표현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야고보서 2:10에서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라고 한다. 성경은 사람의 말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들어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쓰도록 하셨다. 디모데 3:16에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고 하며, 성경은 사람의 아이디어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자체라고 한다(벧후 1:21).
셋째, 성경은 충분하다(sufficient). 디모데후서 3:16-17을 통해 볼 대 하나님의 말씀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완전하지 않는다면 완전한 것을 찾기 위해 무엇을 찾아야만 할까? 비전? 환상? 꿈? 어떤 개인적 경험이 필요할까? 우리가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충분한 말씀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성경의 절대적 충분성의 그림은 시편 19:5-9에서 볼 수 있다.7) 이 말씀을 음미해보면, 우리를 변화시킬 책은 우리를 지혜롭게 하며, 우리의 눈을 밝게 하며, 견디게 하며, 그리고 의롭게 한다. 그 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은 충분하다.
sola scriptura의 근거들
1536년 제 일 헬베틱 고백서(First Helvetic Confession)
1. 성경.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령에 의해 전달되고, 선지자들과 사도들에 의해 세상에 소개되고, 가장 완전하고 고대적 철학을 포함하는 정경적 성경은 모든 경건과 삶의 모든 선을 포함하고 있다.8)
1559년 프랑스 고백서(French Confession)
5. 이런 책들을 포함한 말씀은 한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며, 오직 하나님으로부터이지 사람들의 어떤 권위로부터 나오지 않았음을 믿는다. 하나님의 예배와 우리 구원에 요구된 모든 것이 포함된 모든 진리의 총체이다. 사람들이나 천사들이라도 말씀에 덧붙이거나 말씀에서 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변할 수도 없다.9)
1561년 벨직 고백서(Belgic Confession)
7. 믿음의 유일한 규율인 성경의 충족성.
성경은 하나님의 뜻 모두를 포함하고 있으며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 믿어야하는 것은 그 말씀 안에 충족하게 담겨있음을 우리는 믿는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모든 예배의 형태가 대체적으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사도일지라도 성경에서 우리가 배운 것 외에 다른 것을 가르치는 것은 불법이다. 사도 바울은 심지어 하늘에 내려온 천사라도 안된다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 어떤 것이라도 가감하는 것이 금지되었기에 그 교리는 모든 면에서 완전하고 전체적이다. 거룩하다고 하는 성자라도 그들의 작품을 성경과 동일시해서는 안된다. 관습, 무리, 시간과 사람들의 고대성이나 연속, 또는 종교회의, 칙령일지라도 하나님의 진리와 동일시해서는 안된다. 진리는 모든 것보다 우위에 있고, 모든 사람들은 거짓이기에 그 자체가 허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들이 우리들에게 가르친 무오류한 규율과 일치되지 않는 모든 것을 과감하게 거부한다. 그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는지 판단하라. 너희에게 와서 이 교리를 전하지 않으면 너희 집에 들이지 말라.10)
1566년 2차 헬베틱 고백서(Second Helvetic Confession)
1. 하나님의 말씀이신 성경에 대하여 . . .
2. 성경 안에는 그리스도의 우주적 교회는 구원받는 믿음에 속한 것을, 하나님께 합당한 삶의 모습에 속한 것을 모두 설명하고 있으며, 이런 관점에서 그 어떤 것도 그것에 더하거나 빼지 말아야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다(신 4:2; 계 22:18-19).
3. 이런 성경에서 참된 지혜와 경건을, 교회들의 개혁과 정치 규범을, 모든 경건의 책임에 있는 교훈, 교리들의 확언, 그리고 모든 잘못된 점들의 논쟁을 얻을 것이라고 믿는다. 사도의 말씀에 따르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을 말한다(딤후 3:16-17). 또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딤전 3:15)11)
성경 해석에 관하여; 교부들, 종교회의들, 그리고 전통들에 관하여
4. . . . 믿음의 문제들과 종교 논쟁에서 무엇이 참이며, 무엇이 허위이며, 무엇을 따라야하며, 또는 무엇을 피해야하는지 성경에서 명하기 때문에 하나님 외에 다른 것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 영적 사람들의 판단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예레미야와 다른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 모였던 제사장들의 모임을 엄격히 정죄했으며 하나님의 율법에 어긋난 교부들의 길이나 그들의 고안들을 따르지 말아야만 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비록 자연의 빛과 창조 및 섭리의 사역이 사람들로 하여금 변명할 수 없도록 하나님의 선하심과 지혜와 능력을 명백하게 나타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구원에 필요한 하나님과 그의 뜻에 대한 지식을 줄만큼 충분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여러 때에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을 계시하여 자기 교회를 향한 그의 뜻 선포하기를 기뻐하셨으며, 후에는 진리의 보다 나은 보존과 전파를 위하여, 그리고 육신의 부패와 사탄 및 세상의 악의에 대비하여 교회의 보다 안전한 확립과 위안을 위하여 그 계시가 모두 기록되는 것을 즐거워 하셨으니, 이것이 성경을 가장 필수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그의 뜻을 계시하시던 과거의 그와 같은 방식은 이제 종료되었다”(1:1).
그 다음 1문 6항에서는,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 신앙, 그리고 삶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에 관한 하나님의 완벽한 권고가 성경에 명시적으로 기록되어 있거나, 아니면 성경으로부터 정당하고 필연적인 결론으로 유추될 수 있다. 따라서 결코 성령의 새로운 계시나 인간의 전통에 의하여 어떤 때에도 첨가되어서는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의 내적 조명이 말씀 안에 계시된 그와 같은 것들의 구원에 이르는 이해에 필수적이며, 또한 사람들의 행위와 사회에 공통적인 하나님의 예배와 교회의 운영 문제에 있어서, 항상 준수되어야 하는 말씀의 보편적인 규범들에 따라 자연의 빛과 그리스도인의 분별력에 의해 정해야 하는 특수한 상황도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1:6).
또 영국 1571년에 작성된 39개 항목(Thirty Nine Articles)에서는 Sola Scriptura에 관해 말하기를 “성경은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읽는 것마다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믿음의 항목으로서 믿는 것이며 구원에 요구되거나 필요한 것이라 여겨야만 한다”(6항목).
sola scriptura 적용
sola scriptura는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근본원리들 중 하나이다. 믿음과 삶의 유일한 기준과 권위로서 성경을 보므로 프로테스탄트들은 인간 전통에 기원을 둔 모든 로마 교리들과 실천들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었다. 권위성에 관한 가르침에 관련하여 sola scriptura는 성경의 전체성(completeness), 완전성(perfection), 그리고 충족성(sufficiency)을 올바르게 그리고 갱생된 열정으로 가르쳐야만 한다. 갱생된 열정으로 임해야하는 이유는 급속도로 우리 주위로 로마주의(Romanism), 동방 정교회, 현대주의(modernism), 신 정통주의(neo-orthodoxy), 사이비 종파들, 카리스마적 운동, 그리고 교회 성장운동이 퍼지고 있기 때문이다. sola scriptura에 관한 종교개혁자들의 확신은 교회와 세계에 큰 빛을 안겨다 주었다. 하지만 현재 우리의 상황은 이들의 기준과는 조금 다른 면을 보곤 한다. 치료법적 테크닉(therapeutic technique), 시장 전략, 그리고 유희 등과 같은 방법들이 교회가 원하는 것, 기능 등에 하나님의 말씀 보다 더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성경적 권위는 실천면에서 배반되어졌고 도덕적 권위와 그 진행이 결여되어 있다. 그 주된 이유는 보수적 개혁파와 장로교들의 예배 영역에 탈선이 빚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배 시에 인간적 방법들을 허용할 뿐만 아니라 믿음의 모든 영역에서 성경의 충족성이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 가운데 경시되고 있는 실정이다. 예배의 규정은 칼빈주의적 개혁에서 이루어낸 과업이라 할 수 있다. 개혁파 예배 기틀을 강화하기 위해 sola scriptura 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모든 전통을 받드는 것이나 사람의 가르침을 하나님의 말씀의 수준의 동일한 권위로 받드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근본주의 교회들은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술을 마시지 않거나, 춤도 추지 않거나, 그리고 영화관에도 가지 말아야한다고 한다. 이러한 행위들을 삼가면서 경건한 지혜를 나타내는 것이지만 성경 어디서도 그와 같은 행위를 저버리는 것이 기독교 행위의 기준이라고 명하지는 않는다. 이런 것들은 사람들의 전통일 뿐이다. 종교개혁의 영적 여명의 시점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과 교회의 전통이 동일한 교리들이나 적어도 보충적 교리들을 가르친다고 믿었다. 하지만 루터와 함께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수세기동안 여겨졌던 것보다 훨씬 깊게 다루었다. 그들에 따르면 마리아가 죄가 없다고 전통에서 가르치지만 성경은 예수님 외에는 모든 사람들이 죄를 지었다고 가르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롬 3:10-12, 23). 사제가 미사에서 그리스도를 희생 제사를 드린다고 했지만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희생제물이 되셨다고 가르친다(히 7:27; 10:12-14). 전통이 유물 숭배를 가르치지만 성경은 우상에게 절하지 말라고 명한다(출 20:4). 전통에서는 마리아가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협력 중보자라고 하지만 성경은 예수님께서만 하나님과 사람 간에 유일한 중보자이심을 말씀한다(딤전 2:5). 성자들과 사제들이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특별한 카스트제(castes)임을 전통에서 찾고 있지만 성경은 모든 기독교인들이 성자며 사제임을 천명한다(엡 1:1; 벧전 2:9).
교회사를 통해 볼 때 설교자들의 가장 위대한 것은 자신들이 아무런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설명하며 듣는 자들에게 분명하게 전달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들은 기독교 경험들이나 다른 사람들의 경험들의 선포로부터 능력을 인출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견해들, 창조적 아이디어들, 또는 말하는 기술로부터 자신들의 능력을 인출하지 않았다. 그들의 것은 성령의 능력이었고 하나님 말씀의 능력이었다. 만일 진정으로 부흥(revival)과 개혁(reformation)을 간절히 염원한다면 sola scriptura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권위적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충만하다. 하나님 말씀의 진리를 위한 전투는 처음부터 사납게 일어났다. 사탄, 즉 영들의 큰 적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더냐?”라고 물으면서 공경을 시작했다. 수많은 전문적 복음주의자들이 필요함, 시장경제를 세우거나, 또 영적 경험들을 느끼게 될 때마다 디모데에게 명한 바울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자: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써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
복음주의를 고백하는 연맹(Alliance of Confessing Evangelicals)에서 캠브리지 선언(The Cambridge Declaration)을 다음과 같이 고백 한다:
우리는 무오한 성경이 쓰인 신적 계시의 유일한 근원이 양심을 묶을 수 있음을 재 확언한다. 오직 성경만이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가르치고, 모든 기독교인의 행위가 점검받아야 하는 기준인 모든 것을 가르친다. 모든 신조, 종교회의, 또는 개인이 기독교인의 양심을 묶을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며, 성령이 성경에 나타난 모든 것과 반대하거나 독자적으로 사역함을 부인하며, 영적 개인 경험이 계시의 매개체가 될 수 있음을 부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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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래는 라틴어로 쓰였는데 곧 독일어로 번역되었다. 인쇄술의 발달로 인해 “2주 내로 유럽 전 지역으로 알려졌고, 읽혀졌고, 한 달 내에 영국에까지 이르렀다.” William R. Estep, Renaissance and Reformation 「르네상스와 종교개혁」라은성역 (서울: 그리심, 2002), 252, 249.
2) 첫 번째는 1518년 4월 26일 하이델베르그에서, 두 번째는 같은 해 10월 아우구스부르그에서 추기경 카제탄과 함께, 세 번째는 1519년 7월 라이프지히에서 당대의 최고의 신학자였던 요한 에크(Johann Eck)와 함께, 네 번째는 1521년 보름스 회의에서 모든 독일 군주와 황제가 있는 곳에서 갖게 된다.
3) Estep, 260.
4) “카톨릭인들과 프로테스탄트들의 기본적 상이점들 중 하나는 성경만, 아니면 성경에 초자연적(extra-biblical)인 사도적 전통을 더하는 것이 믿음과 관습을 위해 충족하며, 그것을 위해 최종적 권위가 필요 하느냐하는 것이다. 로마 카톨릭인들은 후자의 입장을 확언하고, 프로테스탄트들은 전자의 입장을 확언한다. 카톨릭인들이 성경의 실질적 충족성에 대해 프로테스탄트 가르침을 허용하지만 그들은 확실한 사도적 전통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관한 것을 규제하는 권위적 가르침이 필요하다고 한다.” Norman L. Geisler와 Ralph McKenzie, ed., Romans Catholics and Evangelicals, 『로마 카톨릭주의와 복음주의』라은성역 (서울: 그리심, 2003), 263-4.
5) Geisler, 267.
6) 1546년에 열렸던 트렌트 종교회의 Session 4에서는 “이 진리와 교훈이 쓰인 책들과 쓰이지 않은 전통들, 즉 그리스도의 말씀을 직접 들은 사도들 또는 성령의 구술을 받은 사도들에게서 전해진 것이 지금 우리들에게까지 전해진다”고 진술한다.
7) 해는 그 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 온기에 피하여 숨은 자 없도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8) Peter Hall, The Harmony of Protestant Confession (Edmonton, Canada: Still Waters Revival Books, 1992), 4.
9) Hall, 8.
10) Joel R. Beeke and Sinclair B. Ferguson, eds., Reformed Confession Harmonized (Grand Rapids: Baker, 1999), 14, 16.
11) Beeke, 10, 12.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