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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법계) |
(십계호구) |
(십여시호구) |
(삼세간호구) |
불 계 |
×십계 |
각각×십여시 |
각각×삼세간 |
보살계 |
×십계 |
각각×십여시 |
각각×삼세간 |
연각계 |
×십계 |
각각×십여시 |
각각×삼세간 |
성문계 |
×십계 |
각각×십여시 |
각각×삼세간 |
천 계 |
×십계 |
각각×십여시 |
각각×삼세간 |
인 계 |
불 |
×십여시 |
각각×삼세간 |
보 살 |
×십여시 |
각각×삼세간 | |
연 각 |
×십여시 |
각각×삼세간 | |
성 문 |
×십여시 |
각각×삼세간 | |
천 |
×십여시 |
각각×삼세간 | |
인 |
여시상 |
오음세간 | |
중생세간 | |||
국토세간 | |||
〃〃성 |
×삼세간 | ||
〃〃체 |
〃 | ||
〃〃력 |
〃 | ||
〃〃작 |
오음세간 | ||
중생세간 | |||
국토세간 | |||
〃〃인 |
×삼세간 | ||
〃〃연 |
〃 | ||
〃〃과 |
〃 | ||
〃〃보 |
〃 | ||
〃〃본말구경등 |
오음세간 | ||
중생세간 | |||
국토세간 | |||
수 라 |
×십여시 |
각각×삼세간 | |
축 생 |
×십여시 |
각각×삼세간 | |
아 귀 |
×십여시 |
각각×삼세간 | |
지 옥 |
×십여시 |
각각×삼세간 | |
수라계 |
×십계 |
각각×십여시 |
각각×삼세간 |
축생계 |
×십계 |
각각×십여시 |
각각×삼세간 |
아귀계 |
×십계 |
각각×십여시 |
각각×삼세간 |
지옥계 |
×십계 |
각각×십여시 |
각각×삼세간 |
(십계) |
(백계) |
(천여시) |
(삼천세간) |
<삼천>의 기본이 되는 것이 <십계><십계호구>이다.
‘십계’란 인간을 기준해서 볼 때 생명의 경계를 열가지로 구분한 것으로
지옥계,아귀, 축생, 수라, 인, 천, 성문, 연각,보살, 불계를 말한다.
그런데 십계의 하나 하나가 각각 십계를 갖추고 있다. 예를 들면 지옥계에도 천계나 불계가 구비되어 있고 불계에도 지옥계나 아귀계가 명복되어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다.이것이 ‘십계호구’이다.
‘互具’란 ‘서로 갖춘다’는 의미로__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심한 공복을 느껴 먹을 것을 필사적으로 구하고 있을 때는 아귀계의 모습이다.
그러나 만약 그 사람이 진수성찬을 대접받게 되었다면 그 음식물을 연으로 해서 조금전까지의 굶주림의 괴로움은 꿈과 같이 사라지고 기쁨의 경지,즉 천계의 모습이 나타난다.
그러면 아귀계의 모습은 영원히 사라진 것일까?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원하는 것을 연으로 해서
재차 아귀계는 나타나니 없어진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십계의 각각에는 또 다른 九계가 冥伏되어 있는 것이다.
지옥계의 동녀에게도 불계의 생명이 구비되어 있고
‘노자’‘공자’‘요순’등의 성인은 인계에 갖춘 불계의 일분이며
“싣달태자”는 인계에서 불신을 이루었다.
따라서 명복되어 있는 다른 九계도 추측하여 알아야 할것이다.
여기서 수행을 하고 있는 우리는, 현실 생활속에서 자신의 생명의 경향성을 어디에 항상 住해야 할지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잘 알 것이다.
그러한 삶이 바로 중도실상의 지름길이요,올바른 수행으로
우리가 가고자 하는 목표인 진리의 정점에 이르는 길일 것이다.
범부,부처라 하는 것도 생명자체의 차별이 아니고,현상세계에 있어서의 변화상의 차이이며,
화엄경야마천궁보살설게품제16에[心 ,佛및 衆生,이 三差別이 없도다.]라고 있듯이
일체중생의 일념에 보편적으로 갖추어진 것이다................
...........우리의 영혼에 이 불종자가(불계) 없다면 진리 공부를 하며 영성 수행을 한다해서 어찌
道(본불)와의 合一을 이룰 수 있겠는가? 道의 씨앗이 있기에 진리(道)의 수행에 대한 果는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 나의 것이 되는 것이다.
람타도...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씨앗이 있으므로 하느님의 분신이 될 수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 십계의 각각에 십계가 호구되어 있으므로 백계가 된다.
그리고 이 백계는 각각 동등하게 열가지의 움직임과 기능을가지고 있다.
그것이 ‘十如是’이다.
십여시 중에서 如是相.여시性.여시体.는 생명 주체를 포착한 것이며,
여시力.여시작.여시인.여시연.여시과.여시보.여시본말구경등.은 생명의 작용과 기능을 포착한 것이다.
어떤 경계에도 십여시는 동등하게 구비되어 있다.그러므로 백계의 각각에 십여시가 갖춰지니까 ‘천여시’가 된다.
다음은 三世間(세간은 차별의 뜻)인데 십계호구하여 십여시를 갖추고 있는 경계를 세가지 관점에서 밝힌 것이다.
삼세간은 먼저 五陰(色.受.想.行.識)의 작용에 차별을 둔 ‘오음세간’과
이 오음이 가(仮-임시)로 화합한 중생에 지옥계로부터 불계까지의 여러가지 차별이 있는 ‘중생세간’
그리고 중생이 사는 장소에 차별이 있는 ‘국토세간’이다. 따라서
위에서 설명한 ‘천여시’에 각각 삼세간이 갖춰지므로 ‘삼천세간’이 된다.
이와같은 <일념삼천 법문>은 법화경에서 설해 밝혀진 것으로
우주의 온갖 현상을 총합적,입체적으로 완벽하게 포착한 법문인데
중생의 일념에 이 우주의 무한한 차별상을 구족하여 부족함이 없다고 설한 탁월한 생명철리이다.
이상 삼천의 수량에 대해 설명했지만 10x10,1000x3이라고 하는 계산과 수량에 매여서는 안된다.
일념의 생명의 모습을 십계, 십계호구, 십여시, 삼세간의 측면에서
입체적,유기적으로 상호 관련하면서 원융한 진실의 모습을 고찰한 것이 일념삼천론이다.
우리는 순간의 일념(염파)이 빛보다 빨리 우주를 돌아 나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또한 하나의 微塵 속에도 일체 만법이 다 들어 있음을 익히 알고 있다.
만약 우리가 어떤 연에 의해서 어쩔 수없이 원망과 미움의 생각(念)을 가졌다고 한다면
순간에 그 염은 우주 끝까지 간다. 더불어 우리의 집안에 있는 먼지,티끌도 순간에 원망과 미움의
파장으로 바뀌게 된다. 원망과 미움으로 변해버린 집안의 공기안에서 숨쉬는 식구들의 파장도 즉시 공명을 일으켜 똑같이 변해버린다. (이것은 본인이 여러번 체험하고 느낀 것이다.)
원망과 미움,분노,질투등 부정적인 생각은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청산가리보다 더 무서운 독을 분사하는 결과를 낳게 한다. 그 독은 결국 다시 나에게로 돌아와 엄청난 악과를 선사한다.
애써서 닦아 놓은 수행의 공든 탑을 하루 아침에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은 밥상 들고 들어 갔다 나오는 동안에도 8만4천번이나 변한다는 말이 있다.
그러한 인간의 속성을 변혁시켜 어떤 연에도 분동되지 않는 금강 불괴의 마음을 구축하여 항상
평상심을 유지하는 것이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나의 경우에도 그런 마음의 경애를 이뤄 보려고 수없는 참회와 .기도를 해 보았지만 어느정도 밖에는 되지 않았었다. 어느땐 자괴감으로 우울하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현리학회에 나와 책도 읽고 빠짐없이 강의를 들어가니 어느 순간 기쁨이 넘치고
(의식의 확장과 상승인지 모르지만) 만물에 대한 사랑과 감사의 눈이 떠진 것이다.ㅡㅡ많은 고통을 겪어내는 경험을 하면서 싹튼, 감사와 애정도 많다고 생각했지만.... 무정물에 대한 감사는 이론으로만 알고 있었다.ㅡㅡ
나 자신이 우주의식으로 열려 버리니 주변은 저절로 바뀌었던 것이다.
그리고 걸린다고 생각했던 파장들이 그냥 아무렇지도 않고 예쁜 감사의 대상이 된 것이다.
영혼의 성장을 위해서나, 정법을 구하는 도정에서는 반드시 삼장사마가 따르게 마련이다.
그 삼장사마가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다. ‘마를 마라고 간파하면 마가 사라진다는 ’지도문을 본적이 있다. 그러나 ‘마장’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없이 휘둘렸었다. 그 순간 평상심은 사라지고 마음 공부를 한다고 한 것은 있으니까 억지로 참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동안 공부했다고 한 것이 무슨 소용이 있었으랴! 지금은 그냥 참고 말고 할 것 자체도 없고 아무 마음이 일어나지 않고 기쁘기만 한 것이다.
그런 내 모습이 또 기쁘고 ... 기쁨은 또 기쁨을 낳고....
의식이 열리고 마음의 경애가 확장되니 마장 자체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한 것이다.
내 마음이 불국토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가치와 참 이데아가 감지되가고 있는 것이다.
이 색즉시공의 세계인 지구는 얼마나 광휘롭고 고마운 곳인가!! 내 영혼의 성장을 위해서 필수적인 모든 경험의 무대를 기꺼이 제공해 주고 있으니까!
스승님의 법문과 안내해 주시는 책을 읽으면서 나는 고통스럽고 힘들기만한 이 땅에서의 삶을 빨리 끝내야겠다는 강박관념에서, 완전히 벗어났고 걸림없는 자유인이 되가고 있다.
위에서 설명한 삼세간은 결코 따로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모두 인간의 일념에 동시에 구비되어 있다. 따라서일념 (순간 찰나의 염파)에 의해 삼천세간의 변혁이 가능한 것이다.
<여기서우리가 공부한 memetic의 법문도 진리임을 유추해, 간파할 수있을 것이다.>
차길진님이 증명해 주듯이 ...우리 인간의 정성이 실린 염이, 유계에서 떠도는 영혼까지도 쉽게 감화시킨다는데...우리 한사람의 일념이 삼천세간 우주 끝까지 미치지 않는 곳이 있겠는가 ?!
우리의 긍정적인 생각과 만물에 대한 사랑의 일념으로 오탁악세의 세상이,환희가 충만한 불국토로 바뀌는 것이다. 천국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번뇌 즉 보리]요 [예토 즉 상적광토]인 것이다.
이런 의미를 깨달으라는 한것이 일념삼천 법문을 설한 붓다와 선지식의 깊은 奧意가 아닐었을까?!
결국 람타도 어떤 세계를 창조하느냐 하는 것은 자신의 생각에 달려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생각을 다듬는 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많은 경험과, 진리의 법문을 많이 듣고 믿음으로 공명할 때 틀림없이 이루어지는 것같다.
불교에 대한 지식이 많거나 적은 것에 상을 갖을 필요도 없고, 매일 필요도 없다고 본다.
우리의 지식으로, 不易하는 道의 심심무량한 깊이를 어찌 헤아릴 수 있으랴.
붓다가 <불법은 불법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신 것도 그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정법의 진리를 전하는 법사를 믿고, 법사가 전하는 진리를 믿어서 解梧를 거쳐 證梧가 되어 내 영혼에 각인될 때 도의 분신으로 거듭날 것이다.
음식도 먹어 보아야 맛을 알 수 있듯이, 나의 신성을 믿고 <내안의 나>의 참사랑을 만물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시켜 나갈 때 도의 분신으로서의 그 참된 진리의 제호미의 맛을 알게되어 가리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근본 진리를 깨우쳐 주기 위한 것이 예수와 붓다가 이 세상에 출현한 목적(출세의 본회)이고 일대사인연 일것이다.
아즉신야를 알았을 때 그때부터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겸허하게 質直意柔軟질직의유연 一心慾見佛일심욕견불 不自惜身命부자석신명의 자세로
중도 실상의 삶을 살고자 노력하고 실천할 때,
스승님의 법문(진리의말씀)에 대한 신뢰를 쌓아 나가고, 그 간절하고 진실한 믿음과 마음이--
부족한 불교지식을 대체해 주어서
진리,道의 위신력과 가피력을 내 영혼에 조화롭게 이숙시켜 체화해 주는 바탕이 되어 내 안의 신성을 열게 하리라!!
도반님들이여 부디 속성취불신(道 )하옵소서!!!
<내안의나>인 하느님(원창조주)의 분신이 되옵소서!!!
람타, 빛, 생각이 되옵소서!!!
그리하여 이 우주를 상락아정의 세상으로 창조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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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념삼천법문을 제가 아는대로 우주를 향한 겸허한 마음으로 정리해 보았읍니다. 다 아시는 내용을 올린게 아닌가 싶어 조심스럽기도 합니다. 틀린 내용은 도반님들께서 정정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