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득의 부산항 이야기 <23> 영도해변 화약폭발 사고
동래부사 맘졸이게 한 한밤의 폭발
본래 영도는 사람이 살지 않던 한적한 곳으로서 개항 이후 급속히 발전했다. 개항 초 부산항에 콜레라가 발생했을 때 피병원이나 임시무역장이 설치되기도 했다. 사진은 1903년께의 부산항과 영도 전경.
- 밀수 중 화약 불붙어 12명 사망
- 군수보급 특명 못 이룰까 한숨
1874년 3월 15일 자정이 가까워져 올 무렵, 부산항에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그때 절영도(영도) 앞 해상에서 갑자기 불기둥이 솟으면서 뇌성과 같은 폭발음이 울렸다. 얼마나 소리가 컸던지 용두산 주변의 일본인 집에서는 시렁에 올려둔 물건이 굴러떨어지고 문이 세차게 여닫히는 바람에 문풍지가 찢어질 정도였다. 그날 밤 많은 사람이 폭발음에 놀라 마음을 졸이며 뜬눈으로 지샜다. 날이 밝자 비가 그친 해변에는 배 한 척이 선수를 반쯤 드리운 채 침몰해 있었다. 그리고 인근 모래사장에는 지난밤 폭발사고로 희생된 시신을 부여안고 통곡하는 소리가 울러 퍼지고 있었다.
개항을 불과 2년 앞두고 일어난 참담한 사고였다. 더구나 일본 메이지정부는 1년 전부터 애초 대마도주가 관리해 오던 초량왜관을 직접 접수해 관여하던 시점이었다. 그래서인지 일본은 이 사고의 진상을 알아내기 위해 아주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선상폭발이 화약에 의해서라면 일본에서 건너왔을 것이 농후한 데다 심지어 수출금지품목을 싣고 들어오려면 일본인 누군가의 협조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내다봤다. 그래서 당장 초량관어학소(草粱館語學所)에서 조선말을 배우는 일본 학생을 현장으로 파견, 이 사건을 조사토록 했다.
현장에 다녀온 이 학생은 "화약은 일본에서 복영환(福榮丸)에 싣고 들어 왔으며, 비밀리에 야간 하역작업을 하던 중 횃불이 화약에 닿아 대형폭발을 일으켰다"고 보고했다. 이로 인해 배는 일순간에 침몰했고 배에서 일하던 인부 12명이 익사했다는 것이었다. 사상자는 대부분이 작업 인부였고 그중에는 일본어 역관 박사원도 끼어 있었다. 또한 역관 최재수는 사고뒤처리를 도맡고 있었다.
이 폭발사고 소식을 전해 들은 대원군의 심복 정현덕 동래부사도 맘이 편치 않았을 것이다. 이미 1년 전에 통상수교거부정책에 맞춰 동래성에서 단독으로 대포를 주조해 어렵사리 구한 화약으로 발포시험을 하다가 포신이 망가져서 아수라장이 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변방의 군비강화를 위해서 화약은 필수 품목이었다. 이런 관계로 오래전부터 우리나라는 화약의 원료인 유황을 일본에서 비밀리에 사들이곤 했다.
1666년 삼도수군통제영이 있던 지금의 통영시(당시 거제현) 용초도에서 김 씨라는 이 섬의 주민이 유황을 가득 실은 밀수선을 발견한 적이 있었다. 당시 신고를 받고 급히 달려온 경상도관찰사 군졸들이 밀수선에 탄 일본 선원들을 문정하자 이들은 피봉사(皮奉事)와 임주부(林主簿)를 찾는다고 했다. 성(姓) 다음에 말단 관직명을 붙여 들먹인 사람은 동래상인 피기문(皮起門)과 임지죽(林之竹)으로 이들은 오래전부터 유황밀수에 종사하던 사람이었다. 조정에서 동래부사와 통제사에게 명령해 이 두 상인을 내세워 밀사무역(密使貿易)을 시켰던 것이다.
특히 변방과 관문에 임지로 둔 동래부사는 화약과 같은 군수품목에 관해서 관심을 두고 직속 부하인 역관이나 아니면 특수 관계인 상인들과 밀사무역으로 연을 맺고 있었다. 어쩌다 이게 본의 아닌 사건사고로서 다가서면 변방의 목민관이자 수령으로서 어디 깊은 한숨이 나오지 않았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