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일:9월1일
성 에지디오(질스)아빠스
Sant’ Egidio Abate
ST. Egidio(Aegidius) or GILES
St. GILES
(sec. VI-VII )
Born:at Athens, Greece
Died:c.710-724 in France
Egidio = figlio di Egeo, nato sull'Egeo, dal greco
불구자와 걸인들의 수호성인
그는 중세 서방교회에서 널리 공경받던 성인 중의 한 분이지만, 그의 생애는 별로 알려진게 없다.
부모님이 물려 준 많은 재산을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고
자신은 거지 행세를 하며 오직 기도 생활에만 전념하였다고 한다.
그는 아테네 사람인데 자신이 행한 기적을 보고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므로
아테네를 떠나 마르세이유로 피신하였다.
그는 2년 동안 아를르에서 성 체사리오와 함께 지냈고, 론강 하구에서 은수자 생활을 하였다.
그는 사슴의 젖을 먹고 살았다고 한다.
한 번은 플라비우스왕이 일행을 이끌고 사냥을 나갔는데,
어느 포수가 사슴을 명중시키고 달려가보니 질스가 화살을 맞고 쓰러져 있었다고 한다.
왕은 이를 애통히 여기고 그를 위한 수도원을 짓고 원장으로 임명하였다.
그의 높은 덕을 흠모한 국왕까지 그에게 고해성사를 받을 정도로 명성이 날로 높아만 갔다.
질스는 불구자와 걸인들의 수호성인이다.
성 에지디오는 640년 경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다 신앙심이 두터운 분들이었으나, 일찍이 세상을 떠나고 에지디오에게 상당한 재산을 남겨 주었다.
에지디오는 어려서부터 하느님만을 위해서 살겠다는 생각을 가졌었다.
그래서 전 유산을 다 처분해 빈민에게 나누어 주고 자신은 거지 행세를 하며 이탈리아를 거쳐
프랑스에 와서 기도에 전념할 수있는 조용한 곳을 찾아다녔다. 그때 그의 나이 26세였다.
에지디오는 아를르에 도착해 그곳 주교의 승낙을 얻어 2년간을 그곳에 머물렀다.
주교는 그의 성품을 알고 그를 보내려 하지 않았으나,
그는 고독한 곳을 동경한 나머지 밤에 몰래 집을 나와 인기척 없는
조용한 곳에 보잘 것없는 초막을 짓고 그곳에서 지냈다.
그러나 그 은밀한 장소까지 나중에는 발견되고야 말았다.
부근의 사람들은 그의 성스러운 생활 태도를 보고 그에게 지도를 청하러 왔으나
고독을 즐기는 그는 번잡한 것이 싫어졌다.
그래서 그는 산림이 울창한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어느 샘물 가까이 있는 동굴을 발견하고
그곳을 거처로 삼았다.
그는 이 곳에서 기도와 묵상으로 수년을 지냈다. 그의 음식은 물과 풀부리와 나무 껍질뿐이었다.
The Death of St Giles - MASTER THOMAS de Coloswar
1427.Tempera on pine wood, 89,5 x 69 cm .Christian Museum, Esztergom
그에게 대해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그 굴에 매일 사슴 한 마리가 와서 그에게 젖을 먹여 주었다. 이것이 사람들에게 발견되는 실마리가 되었다.
즉 어느 날 수많은 부하를 거느린 왕이 그 숲속에 사냥하러 왔을 때 한 사슴이 에지디오의 동굴로 뛰어갔다.
왕이 따라 와서 보니, 개는 우뚝서서 그 굴 근처에 가질 못했다.
왕과 신하들은 그것을 신기하게 여겨 그 개에게 명령해 동굴 속으로 들어가도록 했으나 아무 효과가 없었다.
사슴은 성인이 발 밑에 웅크리고 앉았고, 에지디오는 그 사슴을 끌어안고
화살이 손을 맞추어 그 상처에서 붉은 피가 흘러 그의 옷을 물들였다.
왕은 그 자리에서 꿇어 이 은수자에게 용서를 청하고 대신 많은 선물을 보내주려 했다.
그러나 은수자는 그런것은 도무지 생각하지 않고 "나는 그런 것이 필요치 않습니다"하며 끝끝내 사양했다.
그리고 "이런 상처는 좋은 보속의 재료가 됩니다."하며 붕대를 감을 생각도 안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왕은 가끔 이 동굴에 와서 에지디오와 좋은 담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때로는 선물을 보냈으나 그는 한번도 받은 일이 없었다.
그래도 왕이 한 번 만은 받아주기를 간청하자,
그는 "만일 하느님을 위해 하시고 싶은 생각이 계시다면 수도원을 세우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렇게 하시면 그 수도원에 사는 수도자들이 매일같이 당신을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하고 대답했다.
왕은 "당신이 그 수도원장이 되킴摸?기쁜 마음으로 지어 드리지요"라고 했다.
이 말에 에지디오는 깜짝 놀라며 처음은 거절했으나,
곧 하느님의 뜻이 있음을 깨달았음인지 원장이 될 것을 승낙했다.
수도원은 그가 살고 있던 바로 그곳에 건축되었다. 순식간에 다수의 청년들이 모여들어 수사가 되었다.
에지디오는 베네딕토회의 규율로써 그 수도원을 잘 다스렸다.
*성 베네딕토 아빠스 축일:7월11일.인창동성당게시판1267번
그의 훌륭한 행실은 무엇보다도 수사들에게 교훈이 되었다
왕은 그 수도원의 생활비 등을 보조했으며, 교황은 에지디오에게 호의로써 여러 가지 조언을 베풀어 주었다.
그런데 에지디오의 예언대로 2,3년이 지나자 사라센 군대가 침입해 부근 일대는 말할 것도 없고
그 수도원까지 불타 폐허가 되버렸다.
에지디오는 수사들과 다른 곳에 피난하고 후에 2,3명의 수사와 더불어 오를레앙으로 향했다.
오를레앙에서 가장 유력한 가롤로 마르테르는 에디지오를 만나 그의 기도를 청했다.
사라센 군이 격퇴하자, 그 수도원은 복구되고 에지디오도 그곳으로 귀환했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그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조촐한 영혼을 주님의 손에 바쳤다.
때는 725년 9월 1일이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사람들은 그를 성인으로 공경하기 시작했다.
그를 주보로 모시는 성전이나 수도원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그에 인접한 나라에도 많이 건축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14명의 구난(救難)성인 중의 한 사람으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