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레이사가르(6,904m) 북벽은 보다 어려운 등로를 통한 등정을 추구하는 산악인들에게는 상징적인 대상지나 다름없다. 한국 산악인들은 93년 첫 도전 이후 이 북벽에 여러 차례 도전했으나, 악천후와 기량 부족 등으로 매번 패퇴해야했다. 여러 팀 가운데 특히 98년 가을 등반에 나선 한국산악회 경기북부지부팀은 산악계의 기대를 모았다. 여러 해 동안 자일파트너로 뛰어난 활약을 펼쳐온 최승철, 김형진과 뒤늦게 합류했으나 역시 기량이 출중한 신상만 등 모두 한국을 대표할 만한 거벽 등반가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북벽 최난 구간으로 일컬어지는 블랙타워 중앙 쿨와르(바위절벽 상의 가파른 물길 홈통)를 다이렉트로 등반, 명실상부한 북벽 직등루트를 내는 데 성공한 것. 그러나 그들은 해발 6,800m 지점에서 정상으로 이어지는 설사면에 진입한 직후 몰려온 구름과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최근 이들의 등반 과정은 한 권의 책을 통해 나왔다. 촬영과 기록으로 등반에 참가했던 손재식씨가 펴낸 <하늘 오르는 길>이다.
세대원들의 기가 어딘가에 존재하여 그 힘이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전달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대원들이 정상 등정길에 올랐다가 원인 모르게 사라진 1998년 9월28일 퍼뜩 잠에서 모두 깨어난 그 날 밤이었다. 우린 장기헌의 괴성 같은 소리에 놀라 함께 일어났다. 그것은 무언지 모를 강력한 기운이 우리 모두를 흔들어 깨웠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이승에서의 영원한 이별을 고하는 대원들의 영적 메시지였던 것이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다가 아침해가 떠오르자 대원들을 찾기 위해 다시 망원경을 들여다보았다. 전날에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 하더라도 어딘가에 매달려 있어야 할 대원들이었다. 그러나 절망스럽게도 대원들은 정상에 없었고 북벽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햇빛이 벽면을 사각으로 비추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대원들의 잔해로 짐작되는 점들이 눈에 들어왔다. 눈을 크게 뜨고 다시 보았지만 역시 착각은 아니었다.
결정적으로 어깨에 힘을 뺀 것은 로프였다. 그것은 사고의 결정적 단서이기 때문이었다. 이제껏 추락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었기 때문에 1,300m나 아래 부분에 걸려 있는 로프와 연결된 잔해들은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충격이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지만 그러나 그것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인연의 고리
1997년 초가을, 최승철이 느닷없이 충무로에 있는 내 사무실을 찾아왔다. 그 때 승철은 작은 액자를 하나 들고 있었다. 그것은 요세미티의 엑스컬리버 루트를 단독등반했던 사진인데, 바로 내게 주는 선물이었다. 돌이켜보면 그 날의 만남은 바로 이들과 탈레이사가르에 함께 가게 된 동기의 시발점이었다. 사진을 배우겠다고 찾아온 그 만남 이후 형진을 만났고, 장기헌과 윤길수가 합류했으며, 마지막엔 상만도 그들과 의기투합했기 때문이다.
승철은 요세미티 암벽을 등반하면서 필요하다고 느낀 사진기술을 철저하게 배우려고 마음먹은 듯했다. 그래서 내게 찾아왔으며 일주일 뒤에 다시 한 번 만나자는 이야기를 듣고 돌아갔다. 그는 잊지 않고 다시 일주일 뒤에 내게 왔다. 그런데 이번엔 김형진도 함께 왔다. 형진은 불곡산 바위터에서 그의 선배 이의현과 함께 만난 적이 있으며, 정승권과 함께 어울릴 때부터 여려 차례 만난 적이 있는 후배다.
형진은 해볼 만한 일이라고 생각하면, 무엇부터 손을 대야하고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잘 아는 친구였다. 그는 승철과 함께할 5개년 계획을 세워놓았었다. 계획의 첫번째는 1998년에 탈레이사가르 북벽과 알프스 드류 서벽에 새 루트를 개척하는 것이었고, 1999년에는 남미 칠레에 있는 세로토레와 네팔 히말라야의 랑탕리룽(카트만두에서 가까운 랑탕 지역에 있는 7,245m 봉우리) 동벽, 2000년에는 북미 알래스카의 헌터봉과 캐나다의 배핀아일랜드, 2001년에는 소련의 악수와 히말라야의 마셔브룸 동벽, 그리고 2002년이 되는 해에는 아직까지도 난공불락으로 있는 마칼루 서벽에 새 루트를 내는 것이었다.
어찌 보면 승철과 형진의 계획은 실현되기 어려운 꿈일지도 모른다. 이 꿈의 설계도 가운데 촬영과 기록은 대단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등반 계획에 이미 보고서 작성, 사진전, 잡지 기고, 보고회, 인터넷 정보구축 등이 포함되어 있어서, 이것을 실현하려면 사진기술은 어물쩍 넘길 문제가 아니었다. 형진은 엠비씨 드라마 ‘산’의 코디네이터를 해서 번 돈으로 산에 갈 궁리를 하고 있었고, 이후에 어떤 등반을 해야 좋을지에 대한 단서도 얻은 듯했다.
탈레이사가르 계획서는 승철과 형진 외에 대장 1명과 대원 1명을 더 영입하는 것으로 짜여져 있었다. 그들은 내친 김에 퍼미션(등반허가)부터 받아놓고 일을 추진하고 싶어했다. 어느새 일을 벌이고 있는 셈이었다. 형진은 다시 며칠 뒤에 내 이름으로 퍼미션을 신청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최승철이 앞장서는 게 좋겠다고 주장하자 결정은 곧 그렇게 내려졌다. 승철과 형진이 생각한 또 한 명의 대원은 장기헌이었다. 승철의 친구인 기헌은 해외원정 경험이 없었지만 실제 원정에서는 양보와 희생으로 성심껏 등반에 기여했다. 승철과 형진은 그의 순박함에 매료된 것 같았다. 기헌은 산에는 뒤늦게 입문했으나 승철과는 마음이 통하는 친구요, 형진에게는 믿을 만한 선배였다. 그는 첫 원정등반에서 믿을 만한 친구와 후배, 그리고 선배를 동시에 잃게 되는 지독한 불행을 당한 셈이다. 어찌 되었건 그것은 회한이 남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의정부에 있는 실내 암벽연습장인 샤모니 암장에서 만났을 때였다. 승철은 집안일을 핑계로 슬그머니 대장을 맡기로 했던 결정을 번복했다. 그리하여 결국 혼자라도 등반은 꼭 가야겠다는 형진이 탈레이사가르 등반대 대장을 떠맡은 것은 자연스런 귀결이었다. 대개의 산꾼들이 그렇듯이 승철과 형진도 역시 산과 생활을 놓고 끊임없이 저울질하며 고민했다. 결국 산을 포기하고 생활에 뛰어드는 일반적인 귀결과는 달리 그들은 산에 비전이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산을 통해 생계를 해결해보려고 마음먹었다. 할 수만 있다면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을 끊임없이 찾아다니며 오르는 그런 삶은 참으로 멋지다.
그러나 그렇게 삶의 순위에 가장 먼저 산을 놓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성실한 노력이 뒤따라야 가능하다. 남들이 일 할 때도 훈련을 하고 산에만 가는 일은 결코 만만치 않다. 이런 생활은 얼핏 소비적이거나 철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의 앞날은 밝았음을 기억해두자. 이들의 5개년 계획이 시작인 탈레이사가르 북벽에 머무르고 말았지만, 이미 그 자체로 완성된 산꾼의 삶이었다고 믿고 싶다.
탈레이사르 원정을 앞둔 1998년 초여름 어느 날이었다.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윤길수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때마침 김형진 최승철과 함께 사진 이야기를 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는 등반계획을 알고 있었고 대원들과 함께 가고 싶은 눈치였다.
“혼자만 갈 거유?”
“아니. 함께 갈 생각이 있다면 지금 볼까?”
우리는 그 날 운현궁 등나무 그늘 아래서 함께 만났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윤길수는 서슴없이 원정대에 합류하기로 결정 내렸다. 윤길수의 참여로 인해 원정을 사양했던 나는 미안함을 좀 덜 수 있었다. 그것은 나의 역할을 윤길수가 떠맡아 준 기분이었다. 그의 참여는 물심양면으로 대원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파이브텐사의 한국지사인 그의 집은 곧 장비창고로 둔갑했다. 난 그에게 대원들의 다른 원정등반에도 계속 지원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것도 좋다고 흔쾌히 대답했다. 냉정할 것만 같은 그가 가진 속마음은 바로 그랬다.
승철과 형진은 나중에 합류하게 된 신상만을 더없이 반겼다. 고향은 대전이지만 설악산에 거처를 잡기 시작한 상만과는 훈련 차 오가면서 자연스럽게 줄을 묶게 되었다. 그가 참여하면 틀림없이 등반에 도움이 될 것은 물론 분위기도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상만은 등반 퍼미션에 대원으로 포함되지 않았다. 이미 원정이 확정된 뒤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목적은 대상지 정찰이었고, 등반은 대원들을 도와서 짐을 날라주는 것으로 충분했다.
상만은 대전 선배들한테서 함께 등반할 인도의 등반 대상지를 정찰해 오라는 지령을 받아놓은 터였다. 지난해에 낭가파르밧 등정에 성공함으로써 쌓은 신뢰와 자신감을 바탕으로 또 다른 오를 곳을 물색하는 임무였다. 낭가파르밧 원정으로 상만은 높이에 대해 자신감을 얻었다. 그는 8,000m급 산을 오름으로써 흔히 말하는 별을 하나 단 셈이다.
그러던 신상만이 탈레이사가르 원정을 떠나기 보름 전 집에 찾아왔다. 그는 1992년 여름 키르기즈스탄의 악수 북벽에서 했던 빛바랜 약속을 상기시켰다. 그 때까지 나는 등반에 참여할 생각을 이미 접어두고 있었다. 다시 함께 가자는 그 말은 지키지 않아도 될 약속이었다. 그러나 바람 같은 말일지라도 그것은 묘한 충동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는 퍼미션 없이 탈레이사가르에 오르는 것이 위반이지만, 출국이 임박하자 등반에 참여하고 싶은 생각으로 바뀐 게 틀림없었다. 결국 나는 등반에 필요한 훈련도 하지 않은 채, 불참하기로 한 결정을 어렵사리 번복하고 말았다. 그것은 바로 신상만의 권유 때문이었다.
이들에게는 다른 어떤 일보다 좋아하고 정말로 잘 할 수 있는 일이 등반이었으며, 그것을 통해 남들한테 인정받은 사실 하나만으로도 삶의 의미가 있었다. 산은 정말 그들이 기댈 만한 언덕이었으며, 진정으로 쉴 만한 곳이었다. 세 친구들은 유쾌했고 창의적이며 또한 믿음직스러웠다. 자기의 산과 삶을 맞바꾸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그 때까지 산을 향해 뜻을 세울 수 있었다.
산을 통해서 생계를 꾸려가겠다는 같은 생각 때문에 그들은 더 가까워졌다. 그들이 추구했던 등반의 가치를 운운하기 전에 세 친구들은 한 마디로 같이 어울려 놀고 싶은 사람들이었다. 대책 없이 순수하기만 하거나 자기만의 성을 쌓고 사는 그런 부류의 사람도 아니었다. 그들과 함께 있으면 언제나 유쾌했으며 생기 넘치는 에너지를 느꼈다. 산에 가기 위해서 준비하고 훈련하던 일을 나는 이미 오래 전에 접었다. 함께 열정을 쏟으며 어울리던 친구들이 멀리 떠나버렸고, 아무리 열심히 해도 그 전처럼 할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그럼에도 그들과는 무언가 해볼 수 있다는 마음이 생긴 것이 원정을 따라나선 이유라면 이유였다. 살아 있다면 같이 즐겨 놀 만한 친구가 셋이나 사라진 지금 나는 쓸쓸하다. 그것은 또 다시 그런 친구를 얻으면 해소되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다.
캐러밴
서울을 떠난 지 1주일만인 8월30일, 드디어 대원들은 강고트리를 떠나 캐러밴 길에 올랐다. 덥고 모기가 많은 델리를 떠나 강고트리에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이곳이 그렇게 좋은 곳이라곤 생각지 않았다. 대원들은 이곳에서 고도 1,000m를 올려 4,040m 지점에 캠프를 설치한다. 양치기들이 있어서 십캠프(sheep camp)라고 불렀던 이곳에서 대원들은 처음 진입하는 4,000m의 고도에 부담스러움을 느꼈다. 제일 먼저 고소증세가 찾아온 김형진과 장기헌이 적응을 위해 하산했다. 등반대가 이곳에서 야영하지 않고 강고트리 근방 마을을 오르내리면서 적응하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지금도 남아 있다.
다음 날인 8월31일 다시 고도를 700m 올려 베이스캠프 예정지에 도착하자 대원들의 컨디션은 난조를 보이기 시작했다. 알프스에서 고소적응을 하고 돌아온 윤길수와, 8,000m급 봉우리 낭가파르밧을 등정하여 고소에 자신이 붙은 신상만이 그나마 흔들리지 않은 컨디션을 보였을 뿐, 대원들은 물론 나는 신상만의 등에 업혀 강고트리로 하산해야할 정도로 괴로운 사태가 벌어졌다. 곧바로 베이스캠프에 올라온 대가는 결국 체력 소모와 함께 시간까지 빼앗아갔다. 탈레이사가르 등반의 장점은 캐러밴 거리가 짧은 것인데, 이 점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한 것이 억울했다. 성급히 움직이면 화가 될 수 있다는 교훈을 다시 한 번 확인한 셈이다.
캠프1 건설
일주일이 지난 9월8일 베이스캠프에서 처음으로 전 대원이 합류하였다. 다음날엔 전 대원이 장비와 식량을 메고 캠프1에 진출했다. 캠프1 건설로 인해 모두는 고생이 끝난 것처럼 가벼운 마음이었다. 이 날은 최승철 대원의 생일이었다. 무언가 깜짝 쇼가 필요했다. 그런데 배낭에 담아온 식량은 햇반이 4개, 곰탕다시다와 신라면, 파워바 3개, 그리고 선식과 분유가 조금 있을 뿐. 승철을 위한 생일잔치는 뜨거운 차 한 잔에 텁텁해진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가 전부다.
9월10일 오전부터 신상만 최승철 김형진이 북벽의 완경사 200m 구간에 고정로프를 깔기 시작했다. 작업을 마친 오후, 허기를 면할 수 없어 간단한 식사 후 분말 우유를 한 잔씩 타서 마셨으나 여전히 배는 부르지 않다. 이 날 오후 우리는 식량과 장비를 가져오기 위해 다시 전진캠프로 내려갔다. 배고픔의 해결책은 오로지 빨리 하산하는 일. 그래서 내려가는 길은 체력 보단 식욕이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대원들은 캠프에 도착하자마자 반사되는 눈밭을 걸어오느라 참았던 갈증을 달래기 위해 벌컥벌컥 물부터 마셔댄다.
저녁을 기대하며 비스킷과 새우깡이 대원들의 입속으로 연신 들어가는 사이 문득 지난번 고소로 하산했다가 올라올 때 발견하여 뜯어둔 곰취가 생각났다. 돼지고기 대신 햄을 구워 고추장을 발라 곰취에 싸먹는 기발한 저녁으로 대원들이 허기에 당한 보상은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모처럼 들뜬 분위기는 소주 파티로 이어졌다. 팩 소주를 뜯어서 한 모금씩 돌려가며 마셨다. 그러나 한 바퀴에 술은 끝나고 만다. 기분이 나서 한 팩 더 마시고 싶지만, 아직 등반 초반이며 술 때문에 무리해서는 안 될 일이어서 형진의 눈치를 슬쩍 살필 수밖에 없다. 병권(?)은 대장인 김형진이 쥐고 있어서 모두들 웃음을 감춘 묘한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쳐다본다.
폭설이 준 휴가
9월12일. 간밤에 내린 눈이 또 다시 캠프 전체를 뒤덮었다. 대원들은 걱정하면서도 생각지 않은 휴일이 마냥 즐거운 표정이다. 마치 폭설로 휴교령이 내린 학교의 아이들 같다. 천재지변도 가끔은 공짜로 무엇을 얻은 듯한 느낌을 줄 때가 있다.
“쌍만이 혀엉!”
“어이구, 저 눔이 또 시작이여!”
최승철이 혀를 꼬부려 소리치면 뒤이어서 신상만의 충청도 사투리가 들려온다. 언제부터인가 이들의 정감 어린 말들은 밤새 안녕을 묻는 인삿말이 되었다. 북어국으로 아침을 먹은 뒤 상만과 장기판을 벌였다. 두 판을 두고 나서 승철에게 넘겼다. 상만과 나는 승부에 연연하지 않지만, 승철과의 시합은 열전이었다. 두 사람은 등반을 왔다는 사실도 잊은 듯 장기 시합에 빨려들어갔다. 이긴 사람이 진 사람의 이마를 두 번 때리고, 진 사람은 이긴 사람의 배낭을 벽 밑에까지 져다 주기로 내기를 했는데, 간발의 차이로 번번이 최승철이 졌다. 승철은 그 크고 바위처럼 단단한 손으로 상만의 이마를 두들겨주지 못해서 약이 올랐다.
시합은 점심 식사 뒤에도 계속되었다. 한 판 지면 밥하기, 두 판 지면 설거지까지 내기를 걸었다. 마침 요리사인 파상이 강고트리에 양고기를 구하러 내려가고 없기 때문에 이 약속은 지키지 않을 수 없다. 게임은 서로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불꽃 튀는 접전이 되었다. 덕분에 나머지 대원들에겐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생긴 셈이다. 한 판의 승부가 결정돼서 열이 오를 때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길수는 김종서를 연상케 하는 째지는 톤으로 말한다.
“에~또! 이 상황의 장기에 대해서 장기~헌 대원께서 해설을 한 말씀….”
장기판의 열은 식을 줄 모르고. 한 쪽에선 심각하지만 나머진 킥킥대는 웃음이 계속된다. 몬순의 끝을 타는지 눈발이 그치지 않았다. 심심할 때를 대비해서 준비해온 물건들이 주섬주섬 나오기 시작했다. 우크렐레를 퉁겨대며 동요와 산노래를 신나게 불렀다.
9월13일 아침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은 캠프1으로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배낭을 꾸리다가 곧 계획을 바꾸어야만 했다. 싸락눈과 진눈깨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하는 수없이 상만과 승철은 다시 장기판을, 길수는 우크렐레를 잡았다. 하루만 열심히 쳐도 몇 곡쯤은 반주할 수 있다는 내 말에 대원들은 번갈아가며 우크렐레를 열심히 퉁겨댄다. 하늘에는 드디어 별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기온은 뚝 떨어지고, 멀리 탈레이사가르 북벽은 온통 하얀 눈을 뒤집어쓰고 하늘을 찌를 듯이 서 있다. 아름답다고 표현하기엔 너무나 괴기하다. 마치 얼음에 갇힌 악마의 붉은 성채가 연상된다.
‘저 곳을 올라야 한단 말이지. 칠흙같이 어두운 밤, 숨소리와 말조차도 얼어버릴 것 같은 시린 추위에 벽에 매달려 떨며 지새야 하고 말이야.’
9월14일. 벌써 5일째나 쉬지 않고 눈이 내린다. 어제까지만 해도 5분 대기조 차림으로 출동을 기다리던 우리의 대장 형진이도 오늘은 별말이 없다. 눈 속에 반쯤 파묻혔다고 전해들은 캠프1은 이제 완전히 눈에 덮였을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도대체 우리가 하는 이런 행위은 무슨 가치가 있을까? 등반 때마다 골똘히 생각해보는 문제지만, 매번 새롭게 떠오른 고민처럼 머릿속을 뒤흔든다.
‘산정의 아름다움도, 위대한 공간에서 얻는 자유도, 다시 발견한 자연과의 친밀함도, 산 친구의 우정 없이는 무미건조한 것이다.’ ‘그곳은 신비의 왕국이며, 그곳에 들어가는 무기는 오직 의지와 애정뿐이다.’ 프랑스 샤모니의 가이드였던 가스통 레뷰파는 산 친구와 산에 대해서 그렇게 말했다. 시인과 같은 감성과 통찰력으로 바라본 산의 느낌을 산꾼들은 단지 머리로만 공감하지 않는다. 그곳이 냉철한 이성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걸 깨친 자들은 오늘도 내일도 광신도처럼 산에 가야하며, 친구와 함께 어디라도 가리라 하는 꿈을 꾼다.
9월15일, 여전히 눈이 내린다. 캠프에 올려놓은 장비와 식량에 대한 걱정도 내리는 눈에 묻혀 조금씩 둔해져 간다. 현재 우리 원정대의 고소적응도는 5,400m인 캠프1까지다. 정상을 힘있게 공격하려면 모든 대원이 6,200m까지는 무리 없이 적응해야 하는데, 기상 악화 때문에 확인할 시간이 지나가고 있다. 저녁에 등반회의를 열었다. 먼저 대장 김형진이 애초에 계획했던 새 루트로 오르는 것이 무리라는 얘기를 꺼냈다. 언제 눈이 그칠지 모르며 식량과 시간도 안심할 만큼 여유롭지 않아서 중앙의 쿨와르로 등반을 택하자고 했다. 최승철은 세 사람이 한 조로 움직였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회의가 끝나자 우린 또 다시 어떻게 하면 무료하지 않게 지낼까를 궁리한다.
9월16일. 김형진이 즐겨 듣는 김경호의 외쳐대는 노래와 인도방송에서 흘러나오는 기도문 같은 음악은 마치 하늘에다 대고 무엇이든지 내려달라는 주문처럼 들린다. 싸락눈이 뿌리다가 다시 함박눈으로 바뀌기를 반복하고 있다. 눈이 그치기를 기다리는 일도 이젠 무료하다. 일기를 쓰거나 책을 읽는 자기만의 일로 지루함을 달랠 뿐이다. 간간이 질러대는 괴성은 대원들에게 스트레스가 쌓이고 있다는 징후다.
드디어 고소캠프로
9월17일 아침 7시가 되자 파상은 어김없이 밀크티를 가져와서 천막 문을 두드린다. 이 친구도 오늘은 무언가 다른 날이라고 느꼈는지 여느 때와 달리 움직임이 빠르다. 형진과 상만은 천막 밖에서 벌써 몸을 풀고 있다. 모두들 짐을 챙기고 배낭을 꾸리느라 캠프는 부산스러웠고 활력이 넘쳤다. 6명이 10일 동안 먹을 수 있는 건조 식량과 벽 등반장비를 챙겨 넣은 대원들의 배낭이 묵직해 보였다. 승철은 7.2kg의 패러글라이더 한 동을 추가로 넣었고, 길수의 배낭도 거대하게 불어났다. 카메라 렌즈를 넣은 내 배낭의 무게도 24kg이나 나갔다. 설면이 시작되는 부분에 데포해 놓은 안전벨트와 아이젠을 차고 플라스틱 이중화를 신으면 움직임이 더욱 부자유스러울 것이다.
“우르르릉… 쿠콰앙!”
어디선가 눈사태의 굉음이 들려왔다. 탈레이사가르의 이웃 봉우리인 브리그판트(6,772m) 쪽이다. 갑자기 말할 수 없는 공포감이 밀려온다. 등반은 고사하고 눈사태에 밀려서 크레바스로 빠져버리면 어쩌지? 평소에 감동 깊게 들은 등반가들의 체험이 어느 순간에는 오히려 공포감을 극대화하는 데 큰 몫을 하고 만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끝내 살아서 돌아온 체험기 <친구의 자일을 끊어라>(정광식 번역)의 주인공 조 심슨과 사이먼 예이츠의 경우가 그렇다. 결코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들이 처했던 상황이 우리와 전혀 먼 얘기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적설량이 많아서 대원들은 서로 바짝 붙어서 오른다. 앞에서 러셀하는 선두의 속력이 느리기 때문이다. 배낭의 무게 때문에 열 걸음도 채 못 가 한 번씩 호흡을 가다듬어야 한다. 걸음은 점점 느려져 어느덧 해는 서편으로 기운다. 첫번째 사면을 벗어나기도 전에 날이 저물기 시작한다. 장시간을 더 가야할 것에 대비하여 건포도를 한 주먹 입에 털어 넣고 사탕을 문 채 헤드램프에 불을 밝혔다. 설사면은 조금씩 단단해지는 듯하다. 두번째 크레바스를 지나자 빙벽으로 올라서고 있는 대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도 역시 불을 켜고 오르고 있다. 빙벽이 끝나면 시야에서 사라질 그 불빛은 우리가 같은 공간에 있다는 걸 말해주는 위안이다.
어두운 빙벽으로 다가서는 길에는 간간이 세로로 놓인 작은 크레바스가 도사리고 있다. 길은 평평하지만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다. 그런데 그 생각을 추스르기도 전에 “풀썩!” 하는 소리와 함께 내 몸이 아래로 푹 꺼졌다. 순간, 머리와 귀가 하늘로 빨려 올라가듯이 쭈뼛거렸다. ‘아니, 이런! 정말로 크레바스에 빠지다니!’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상상이나 하던 일이 바로 내게 일어난 것이다. 발은 허공에 떠 있는데, 도무지 상체를 움직일 수가 없다.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니 배낭이 크레바스 양쪽 턱에 걸려 구사일생으로 허공에 매달려있다. 허리까지 빠진 하체를 누가 밑에서 잡아당기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무도 보지 않는 순간에 홀로 사고를 당한다는 것은 정말 소름 끼치는 일이다.
사이먼과 조의 경우가 다시 떠올랐다. 몸을 조금이라도 잘못 놀리면 더 깊이 떨어질 거라는 생각이 들자, 순간 어디서 나오는지 모를 힘이 불끈 솟았다. 두 발을 설벽에 박고 상체를 들어올려서 간신히 구덩이를 빠져나왔다. 아! 살았다. 등에는 땀이 흥건히 배어 있고 몸은 천근만근 무거웠다. 한동안 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길수의 불빛은 여전히 저 뒤에 있지만, 단지 그가 그 곳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따스해졌다. 아! 고마운 길수. 이제 그가 아무리 싫은 짓을 해도 미워하지 말아야지….
생각하기 싫은 일이 일어났어도 마음을 가다듬고 드디어 빙벽을 넘어섰다. 대원들의 불빛이 보이고 환호성이 들려왔다. 낮에 헤어졌다가 밤에 만났지만 마치 오랜만의 상봉 같았다. 어느새 밤 9시30분. 캠프는 예상한 대로 완전히 눈에 파묻혔다. 일주일 동안 쉬지 않고 내린 눈이 녹지 않고 그대로 쌓인 것이다. 천막이 있던 곳 위로 1m 이상 눈이 덮여서, 우선 정확한 장소를 찾아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무리하게 운행했지만 잠자리를 만들기 위해서 천막을 복구하는 데 전력을 기울여야 했다.
피켈 자루에 눈삽을 붙이고 작업을 시작했다. 모두가 합심해서 움직이는 건 우리가 아직 건강하게 살아 있으며, 어떤 일이 닥쳐와도 헤쳐나아갈 수 있다는 증거다. 두 시간을 파내려 가서야 겨우 천막 기둥을 찾아냈다. 두 동의 천막은 지진으로 파묻힌 폐허의 건축물처럼 제멋대로 휘어진 채로 주저앉아 있었다. 바닥으로 더 깊이 파자 침낭과 식량이 나왔다. 쉴 사이 없이 작업한 탓에 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찌그러진 천막 한 동을 복구해내고, 일단 그 속으로 피곤한 몸을 던졌다. 새벽 1시가 지나고 있었다. 인삼차 한 잔을 끓여 마시고는 쓰러지듯이 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염치를 저당잡힌 채 촬영과 기록에 몰두
9월18일. 어제 무리하게 운행한 탓도 있지만 먹은 것도 변변치 않아서 아침 컨디션이 말이 아니다. 더구나 간밤에 길수가 위경련을 일으켜 잠자리가 편치 않았다. 코발트빛 하늘만이 푸석푸석한 기분을 조금씩 밝게 해주고 있다. 길수와 기헌은 곧바로 전진캠프로 하산했고, 나머지 세 대원은 데포했던 장비를 올리기 위해서 설면이 시작되는 지점으로 내려갔다. 대원들을 보면서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일찍이 대원들을 위해서 희생하겠다고 말한 길수나, 정상 등반을 양보하고 궂은 일을 묵묵히 하고 있는 기헌에게는 고마운 마음뿐이다. 촬영을 맡은 까닭에 내가 도와주지 못해도 불평 한 마디 없고, 오히려 힘든 일을 부탁하지 않는 그들의 마음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상만은 내게 기대하는 게 있을 것이다. 더구나 그의 권유로 이 등반에 참가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그들과 함께 등반할 만한 몸을 만들지 않은 내가 등반대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염치를 저당 잡히고라도 빠짐없이 촬영하고 기록하는 일이다. 대원들이 힘들어하거나 설사 사고가 난다 해도, 나는 카메라 셔터에서 손을 뗄 수가 없다. 지금 당장은 그저 미안하지만 나중에 이해될 수 있으리라.
쉬지 않고 일하는 사이에 하늘에는 별이 총총해졌다. 이젠 제법 날씨가 차가워져서 며칠 동안은 날씨가 잠잠해질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암벽에는 새하얗게 눈이 붙어서 바위는 찾아볼 수 없다. 내일쯤 되면 눈이 제법 단단해질 것이다. 앞으로 열흘이 지나면 싫든 좋든 우리는 등반을 끝내고 서울로 돌아갈 준비를 해야 한다. 그 때가 되면 벗어나고 싶은 서울이 가고 싶은 고향으로 바뀌어 있겠지.
9월19일. 천막 안의 아침 기온이 영하 7℃. 견딜 만한 추위다. 침낭을 주머니에 접어 넣고 오리털 파카를 꺼내 입었다. 내복을 입고 침낭에 들어갔다가 빠져 나와서 옷을 입을 때는 참 조심스럽다. 버너 불을 피워놓고 성에가 떨어지지 않도록 마치 얼음판을 걷듯 살살 움직여야 한다. 누룽지와 건조 팔보채에다 깻잎으로 아침 식사를 마치고, 일찌감치 고정로프를 갖고 북벽으로 나섰다. 일본팀은 무릎까지 빠지는 눈을 다져가면서 북동릉으로 접근하느라 허우적대는 중이었다.
먼저 출발한 상만과 승철이 빙벽에 스크류와 스나그를 때려 박는 소리가 잔잔한 호수에 파문을 일으키듯 널리 퍼져나간다. 무서우리만큼 고요했던 정적 이전에는 바람만이 유일한 소리였다. 장비가 부딪히는 소리가 잠시 설악산에 온 듯한 친근함을 준다. 고정로프 작업이 끝나는 곳을 향해서 형진과 함께 주마링을 해서 올라갔다. 200m 길이의 로프가 풀려나갈 즈음, 다시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벽에는 네 명이 함께 머물 만큼 넉넉한 자리가 없다. 승철과 상만이 작은 눈사면을 넘어서 본격 빙벽등반을 시작하는 곳에 이르렀을 때 기헌이 캠프에 도착했다. 만일 기헌이가 열심히 지원하지 않는다면 예정보다 시간이 많이 지체될 것이다. 그가 지고 오는 식량만큼 성공 가능성도 높아지는 건 틀림없는 일이다.
기온이 올라가자 다시 날리기 시작한 눈발은 아주 심각할 정도다. 멀리서 마른벼락이 치기 시작한다. 또 다시 눈이 내리면 이미 폴이 몇 군데나 부러져나간 천막은 분명히 무너질 것이다. 하늘에 맡길 수밖에 없다는 말은 이렇게 하늘만 올려다보며 눈 그치기를 기다리는 경우이리라. 9월20일. 예상대로 또 눈이 내렸지만 오늘은 쉴 수가 없다. 폭설에 찌그러진 천막 여기저기에서 눈 녹은 물이 줄줄 새들어왔다. 찢어지고 구멍 난 곳이 열 군데도 넘는다.
대원들은 로프를 따라 주마링을 해나갔다. 한 차례만 더 작업하면 정상에 오를 준비는 마무리된다. 기헌이 합류한 덕분에 작업은 더 활기가 넘쳤고, 나는 캠프에 남을 수 있었다. 마침내 600m 고정로프가 다 풀려갔고, 작업은 끝났다. 숙제를 다 끝낸 대원들은 우유와 라면으로는 양이 안차서 자장면을 하나씩 더 먹는다. 오늘 작업이 피곤했는지 밤 8시가 되자 아무도 떠들지 않고 모두 조용히 침낭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생이별
고정로프 작업이 끝났으므로 이젠 정상을 향한 공격만이 남았다. 모두들 전진캠프로 내려가서 쉬고 다시 올라오기로 했다. 또 다시 눈이 내릴 것에 대비해서 천막의 지퍼를 내리고 단단히 고정한 다음, 패러글라이딩으로 내려오기로 한 최승철만 남겨놓고 캠프를 떠났다. 그는 이번 등반에 성공하면 정상에서 활공하여 한 번에 내려오려는 경쾌한 계획을 갖고 있다. 1997년 여름, 형진과 함께 그레이트 트랑고타워를 등반했을 때, 승철은 이미 패러글라이딩으로 날아서 하산한 경험이 있다. 그 때 하늘을 날아서 사뿐히 모레인에 떨어진 그는 파키스탄 군인들에게 불려갔다. 군인들은 그가 한 행동보다 활공기술과 장비에 관심이 있었다. 승철은 잠시 어리둥절했다가 오히려 군인들에게 기술을 가르쳐 주고 간단히 풀려났다.
패러글라이딩으로 날아오려는 승철을 보기 위해 캠프쪽을 계속 올려다보지만, 기류가 없어서인지 볼 수가 없다. 혹시나 해서 무전기로 그를 불러보지만 답이 없다. 이젠 기다림보다 걱정이 앞선다. 식당 천막에서 밖으로 나오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김경호의 노래가 다시 흘러나왔고, 쉬탈과 파상의 알아들을 수 없는 수다가 이어졌다.
이제 며칠 뒤면 세 대원은 탈레이사가르의 춥고 가파른 암벽에 붙어서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을 것이다. 악천후만 아니면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 이번 등반을 꾸리기까지는 정말 쉽지 않은 과정이 있었지만, 서로를 좋아하는 마음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었다. 대원들은 성격이 모두 독특하다. 승철은 객관적이고 일반적인 일에는 흥미가 없는 듯하다. 행동은 사려 깊지만 항상 엉뚱한 그는 형진과 논쟁할 때마다 이기는 적이 없다. 항상 그가 뱉어놓은 말에 논리를 세워 반박하는 형진의 승리로 끝난다. 그러나 형 만한 아우 없다는 말처럼, 승철은 매사를 자기 실수로 돌리고, 형진은 그의 양보에 머리를 숙이기 때문에 둘의 화합은 단단해진다. 히말라야의 고산 거벽을 두루 등반하는 꿈을 이루려면 그렇게 상호 보완적인 점이 더욱 좋을 것이다.
승철은 상만의 인간미에 호감을 가지고 있다. 가능하면 일반 루트로 올라보려고 생각했던 상만이 대원들과 함께 북벽을 오르기로 한 것은 서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줄 수 있을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상만은 1995년에 파키스탄의 가셔브룸4봉을 등반할 당시, 7,800m 높이에서 비박하다가 발에 심한 동상을 얻었다. 양쪽 엄지발가락을 절단한 뒤, 그의 등반 스타일은 많이 달라졌다. 노련미와 세심함이 한결 더 깊어졌다. 특히 장갑과 양말 등 보온 장비를 철저히 준비했고, 또한 품질을 많이 따졌다. 그래서 그의 곁에 있으면 항상 따뜻했다.
기헌은 배에 임금 왕(王) 자가 가장 선명하게 새겨지는 친구다. 그만큼 운동량이 많다는 뜻이다. 그는 이번 등반에서 제일 먼저 고소증에 시달렸는데, 그러면서도 적응을 잘 한 듯하다. 모든 일에 별로 불평을 안 하는 것이 그의 가장 큰 장점이다.
억세게 운 좋은 사나이 윤길수는 벼락을 두 번이나 맞고도 살아남은 사람이다. 그리고 각각 다른 사고로 왼발과 오른발의 발등뼈가 부러졌는데, 묘하게도 똑같은 모양으로 부러진 특이한 운명의 소유자다. 벼락을 맞고 고질이던 디스크도 고치고 나쁜 시력도 회복한 그의 벼락 체험담은 우리들의 무료한 시간을 즐겁게 해주었다. 난 이 친구들과 등반의 과제를 놓고 함께 고민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적지 않은 행운으로 여겨야겠다.
9월22일. 밖에는 바람이 불고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이미 10cm가 쌓인 것으로 미루어 가볍게 생각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어제 캠프에서 내려온 시간은 적절했어도, 최승철이 하산하지 못하고 홀로 남아 있는 게 마음에 걸린다. 펼쳐지지 않는 패러글라이더 때문에 간밤에 얼마나 몸을 뒤척였을까. 오늘 활공하려 해도 눈이 이렇게 내리는 상황에서는 꼼짝 못할 것이 뻔하다. 윤길수와 천막에 나란히 앉아서 후배들 걱정으로 아침을 연다. 그릇 바닥까지 밥을 박박 긁어먹고도 모자랄 정도로 식욕은 여전하다. 그러나 눈에 띄게 줄어든 식당의 부식을 보면서, 등반은 후반으로 접어들어 가는 것을 느낀다.
승철이 본의 아니게 캠프1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 남은 대원들은 정상 공격과 하산에 대한 계획을 세웠다. 처음 계획은 등반을 두 조로 나누어서 할 생각이었다. 승철과 형진이 새 루트를 개척하고, 나머지 대원들은 일반 루트로 오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점차 생각이 바뀌어서 결국 가장 젊고 등반능력이 뛰어난 세 대원이 정상에 오르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들을 지원하기로 했다. 윤길수는 등반 초기부터 대원들을 위해 희생하겠다고 다짐해왔다. 상만은 등반대원으로 허가를 받지 않은 상황이어서 일반 루트로 오르는 것도 규정에는 어긋나는 일이다. 그러나 내게 함께 오를 것을 제의한 걸로 보아 상황이 되면 등반을 하겠다는 생각을 애초부터 갖고 있었던 셈이다.
등반 시나리오를 짜고 있는 동안에도 눈은 걱정스럽게 내리고 있다. 기헌이 필드스코프로 캠프를 살펴본 결과, 승철은 아직도 활공을 시도하고 있으나 계속 눈속에 곤두박질치며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고 중계한다. 승철의 모습을 볼 수는 있으나 만나지도 못하고 말을 나눌 수 없는 현실이야말로 생이별이나 다름없다.
라면요리에 도통한 승철
9월23일. 눈이 조금 내렸으나 예정대로 캠프1으로 올라가야 한다. 서울을 떠난 지 꼭 한 달만에 본 등반에 오른다.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니 손끝에 힘이 실린다. 내려올 때를 대비해서 짐을 꾸려 놓고, 카메라 두 대를 챙겼다. 아직 해가 중천에 있으므로 지난번과 같이 크레바스에 빠지는 실수는 하지 않으리라. 빙벽에 다져놓은 발자국에는 다시 눈이 쌓여서 밋밋해졌으나 오르기는 불편하지 않다.
턱까지 차오르는 숨을 몰아쉬며 마지막 빙벽을 넘어서자 저 앞에 사람의 움직임이 눈에 들어왔다. 승철이다. 패러글라이딩에 실패한 그가 우리를 반기는 환호는 마치 무인도에 갇힌 사람이 지나가는 배를 발견하고 지르는 괴성이나 다름없었다. 캠프에 홀로 남아서 고독과 싸운 이틀은 처량하고도 길기만 했다. 먹을 것도 변변치 않고 책 한 권 없는 캠프1에서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라면 겉봉에 적힌 조리법을 되풀이해서 읽거나, 등산화를 부여안고 시간을 죽이는 것이 전부였다. 이 날부터 우리는 그가 이틀동안 달달 외던 라면요리의 정석을 빠짐없이 전수받아야 했다.
다행히 캠프1은 이틀 동안 내린 눈에도 끄떡없었다. 승철이 여섯 차례나 천막을 보수했고 눈이 쌓일 때마다 걷어낸 덕분이다. 만일 그가 활공에 성공해서 내려왔다면 우리 천막은 또 다시 눈에 묻혔을 것이고, 벽 등반은 시도해보기도 전에 실패로 끝날 것이 뻔했다. 반면에 일본팀 천막은 또 다시 무너져 눈에 파묻히고 말았다.
9월24일. 가슴이 조여와서 눈을 떴다. 옆에서 자던 형진도 부스럭대며 일어난다. 간밤에 내린 눈이 천막을 압박해 들어와서 공간이 비좁아졌다. 숨쉬기조차 힘들 정도로 답답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얼른 옷을 차려 입고 밖으로 튀어나갔다. 그리고 천막에 쌓인 눈을 걷어내기 시작했다.
하루하루 날짜를 기록하며 일지를 쓰는 것도 이젠 며칠 남지 않았다. 30분 간격으로 들리고 있는 저 무시무시한 눈사태 굉음에도 우리는 무감각해지고 있었다. 집에 두고 온 처자와 친구들이 그립다. 캠프에 머문 24일 중 무려 15일이나 눈이 내렸다. 우리 마음은 눈에 따라서 춤을 추었고, 기대와 실망은 끊임없이 반복됐다. 지금까지 눈이 녹으면서 쌓인 눈이 적어도 2m는 됨 직해 보인다. 그러나 천막에는 눈이 쌓이면 곧바로 치웠으므로 밤 사이에 더 내린다해도 얼마간 견딜 수는 있을 것이다.
9월25일. 간절하게 바라고 또 바라던 대로 눈이 멎었다. 드디어 기다리던 햇빛이 천막 윗부분을 비치기 시작했고 기온은 아직 영하 10℃다. 화창해진 날씨에 형진과 승철, 그리고 상만 모두가 환호성을 지른다. 며칠 동안 젖어서 눅눅해진 재킷과 장갑, 침낭 등을 먼저 햇볕에 널고 장비들을 펼쳐놓았다. 금속성 장비들이 부딪혀서 쩔그럭대는 소리에는 아무도 모르는 운명의 암시가 숨겨져 있는 것 같다.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지만,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만일 더 이상 내일이 없다면 사진기록은 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러나 내 손은 습관적으로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다.
장비정리가 끝났다. 오후 5시가 채 안되었지만 곰탕 국물에 건조 밥을 말아서 일찍 저녁 식사를 마치고 분유를 타서 한 잔씩 마셨다. 한밤중에 출발하려면 미리 잠을 자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밤 자정이 지나면 대원들은 캠프를 떠나서 저 험난한 벽으로 간다. 위험이 닥쳐서 부상을 당하거나 죽는 일이 벌어지리라는 생각은 누구도 하지 않았다. 다만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의지와 얼마나 될지 모르는 가능성을 믿고 오를 뿐이다. 그동안 수많은 빙벽과 암벽에 매달려 단련해온 몸은 몇 시간 뒤 탈레이사가르 북벽에서 최고 어려운 시험을 치러야할 것이다.
운명의 시간
비장한 마음 때문인지 대원들은 잠을 잘 이루지 못한다. 상만이 뀌어대는 방귀 소동도 형진의 킬킬대는 웃음소리도 밤 9시가 넘어서야 잠잠해졌다. 천장을 보고 떠들어대는 말소리도 먼 나라로 사라져가듯 꼬리를 감추고, 밤은 점점 더 깊어간다. 바람소리마저 들리지 않으면 히말라야의 밤은 원초적 고요, 바로 그것이다. 하늘은 얼어붙어 별빛만 반짝이고, 대기는 시리다 못해 칼날 같은 섬뜩함이 느껴진다. 저 아래 세상사는 마치 다른 별의 이야기처럼 아득한 시공 저편의 일로 느껴질 뿐이다.
소풍 갈 때면 굳이 깨우지 않아도 새벽에 일어나는 것처럼 긴장되는지 숙면을 취할 수 없다. 깜빡 졸음에서 깨어나 눈을 떠보면 아직 시커먼 밤중이다. 깨우지 않아도 모두들 뒤척거리며 일어난다. 밤 12시에 일어나려고 했는데 벌써 새벽 2시다. 바깥 날씨는 구름 한 점 없다. 랜턴을 켜고 버너에 물을 올리면서 각자 준비를 시작한다. 양말을 신고 내의를 입는 일은 수도 없이 해본 일인데도 망설임이 뒤따른다. 고소용 내의를 두 벌이나 껴입으려는 상만의 고민은 이 컴컴한 새벽에도 계속됐다. 일단 등반을 시작하면 옷을 갈아입을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다. 가셔브룸4봉(7,925m)과 낭가파르밧(8,125m)에서 동상으로 발가락의 일부를 절단했던 고통을 다시는 맛보고 싶지 않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따뜻한 기운이 있을 때 옷을 입느라고 천막 안은 들썩댔다.
호박죽과 짜파게티로 때우는 아침이 맛이 있을 리 없지만 먹어두어야 한다는 걸 대원들은 누구보다 잘 안다. 딱딱해진 플라스틱 이중화를 신고 오버재킷을 입는 데 한 시간이나 걸려 시간을 허비하는 것 같지만 굳은 몸을 풀어주는 스트레칭이라고 생각하는 게 편하다. 안전벨트를 매고 장비를 거는 소리가 다시 쩔그럭쩔그럭 울려 퍼졌다. 알프스에서 새벽 별을 쳐다보며 ‘우리는 왜 이 한밤중에 아무도 없는 저 험한 벽으로 가야 하는가?’ 하고 푸념했던 일들이 문득 스쳐간다.
그야말로 조촐한 아침이 끝나고 플라스틱 등반화의 끈을 야무지게 조여 맨 다음 문 밖으로 튀어나왔다. 배낭과 장비를 착용해서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차례로 박차고 일어선다. 자! 출발이다. 저 북벽 밑으로 가자면 우선 1m가 넘는 눈턱을 넘어야 한다. 시간은 새벽 3시30분이다. 새로 내린 눈의 표면은 약간씩 얼어 있어서 차가운 소리가 뒤따랐다. “사그락 사그락!” “보드득 보득!” 형진의 발뒤꿈치를 보며 오른다. 어둠 속에서 그의 뒤에 바짝 붙어 가는 건 과거에 해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해볼 수 없는 새로운 일이다.
오늘의 목표인 첫번째 비박지 6,450m 지점을 향해 상만이 자청해서 앞서 나간다. 그 곳까지는 비교적 난이도가 심하지 않을 것이고, 고난도인 위쪽에서는 승철과 형진이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다. 상만은 장비만을 착용하고, 승철과 형진은 각자 대형 배낭을 메고 오른다. 휘영청 밝은 달빛을 받아서 눈비탈은 환한 편이었지만 랜턴을 끄지 않았다. 불을 켜고 오름으로 해서 우리가 너무 깊은 암흑 속에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다. 경사가 조금씩 심해지면서 고정로프에 의지해서 올라야 하는 구간에 이르렀다. 앞서가던 상만이 밤공기를 가르며 외친다.
“어이구! 이거 고정로프가 눈에 모두 다 파묻혀 버렸는데!”
“피켈로 잘 좀 파봐요, 혀엉.”
“응, 그런데 눈이 얼었어.”
“포기하는 게 좋겠어. 1m나 되는 눈을 파려면 너무 오래 걸려.”
“그냥 올라야겠어.”
“확보지점까지 각자가 알아서 합시다.”
“모두 단독등반이야.”
앞서 가는 형진의 배낭이 너무 무거워 보인다. 힘에 겨운 표정이 역력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배낭은 공동으로 쓸 침낭, 우모복, 식량 등으로 꽉 찼기 때문이다. 형진에게 침낭을 하나 빼자고 했다. 하산할 때 내가 갖고 내려갈 터이니 과감하게 장비를 줄이자는 나의 제안이 싫지 않은 눈치다.
왼쪽 사선 방향으로 등반이 이어지고 경사가 다시 급해졌다. 하지만 승철과 상만이 여유 있게 피치를 끊어간다. 중단의 빙설 부분에 도달하려면 암벽을 가로질러 올라야 한다. 슬링과 하켄이 제법 많이 눈에 띄었다. 지금까지 시도했던 한국 원정대와 외국 등반가들이 설치해놓은 확보물로 이 루트를 읽을 수 있었다. 20m의 수직에 가까운 벽을 여러 차례 쉬면서 오르다가 밑을 쳐다보니, 고도감 때문에 편안히 쉴 수가 없다. 북벽은 한 번 미끄러지면 중간에 어느 한 곳도 멈출 데가 없다. 얇은 얼음으로 뒤덮인 바위는 반질반질하다는 표현이 딱 어울렸다.
“건투를 빈다”, “형도 조심하세요”
든든하게 하켄을 박아놓은 지점을 지나 빙벽 중단에 이르렀다. 6,000m에서 6,100m 사이쯤 되는 곳은 넓은 폭포의 암반처럼 펼쳐져 있고, 우리는 그 물길 한가운데 매달려 있었다. 승철이 새 루트를 내고 싶다던 왼쪽 페이스는 얼음이 얇아 보여서 아이젠이 박힐 것 같지 않았다. 탑처럼 우뚝 솟은 바위지대인 블랙타워의 거대한 바위탑이 시커멓게 찍어누르고 있으면서 눈앞이 탁 트인 곳에 이르렀다. 예정된 1차 비박장소까지 걸림없이 조망되고 아래로 끝없는 절벽이라 고도감도 상당하다. 이제 이 곳에서 우리는 헤어져야한다. 더 오르면 줄을 걸 만한 든든한 확보물도 없고 그냥은 내려갈 수 없기 때문이다.
상만의 카메라에 내 건전지를 빼서 넣어주고, 형진의 침낭은 오른쪽 안전벨트에 걸었다. 별로 쓸 일이 없는 하켄과 너트도 넘겨받았다. 배낭과 카메라가방, 거기에 넘겨받은 장비까지 함께 멘 나는 열쇠장수처럼 주렁주렁한 차림새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하강만 하면 되므로 별로 어려운 일은 없을 것이다. ‘자! 이제 헤어져야 한다.’
“건투를 빈다.”
“형도 조심하세요.”
“만일 오늘 하산하지 않으면, 포기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할께.”
짧은 인사를 나누고 헤어지는데, 내려가는 나를 무척 부러워하는 마음이 그의 표정에 스친다. 상만과 승철, 그리고 형진, 난 그들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벽을 향해 올라가는 그들에게서 삶과 죽음의 경계가 느껴졌다. 홀로 하강하면서 한 차례 내려간 다음 한 번씩 위를 올려다보기를 수도 없이 반복했다. 급경사 물길을 우회해서 내려가자 대원들의 모습이 감춰졌다. 새벽부터 쉬지 않고 운행한 지 열 시간이 되었으나 아직까지 긴장을 풀 수 없어 배 고픈 것도 잊었다.
캠프를 정리하고 나서 대원들이 내려오면 마실 물을 만들었다. 캠프에는 신라면 세 개와 수프가 조금 있을 뿐이다. 이들이 내려오면 딱 한 번 먹을거리다. 우선 이것으로 요기하고 얼른 전진캠프로 하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배고픔을 이겨낼 수 없을 것이다.
대원들이 캠프를 출발한 지 열두 시간만에 첫번째 목적지인 쿨와르 아래 모여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세 사람이 나란히 매달려 있는 것으로 보아 길고 평평한 곳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 6시가 넘어서까지 등반은 계속되었다. 상만이 쿨와르 바로 밑까지 갔으나 승철과 형진은 움직이지 않고 있다. 등반을 마무리하고 쉴 곳을 찾는 모양이다. 왼쪽 상단으로 자리를 정한 듯 모두들 그곳으로 주마링해서 오르고 있다.
북벽은 하루 종일 햇빛이 들지 않는 곳이다. 일단 쉴 자리가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피켈로 얼음을 깎아서 자리를 만들고, 그 위에 드디어 하얀 천이 하나 펼쳐졌다. 무게를 줄이기 위해서 천막 대신 가져간 내피였다. 그 속이라면 바람과 추위에 완전히 노출되는 걸 막을 수 있으며, 벽에서 흘러내리는 스노샤워는 맞지 않을 것이다.
9월27일. 대원들은 벽에 붙어 추운 밤을 보냈겠지만 나 역시 기나긴 밤을 지냈다. 오늘은 전진캠프로 내려가야 한다. 이 곳에 먹을 거라고는 라면 두 봉. 이것마저 먹어치우면 대원들이 내려와도 허기를 달랠 식량이 없다. 오전 6시30분쯤 침낭을 털고 밖으로 나오니 일본팀은 북동릉을 향해서 출발하고 있다. 우리 대원들은 쿨와르 밑에서 아직 움직이지 않는다. 하늘에는 여전히 구름 한 점 없다. 느리긴 하지만 어제와 같은 속도로만 올라간다면 오늘은 저 검은 바위탑을 넘어설 것이고, 정상에 도달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오전 7시 선등자가 우측 쿨와르 밑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제는 상만이 선등했으므로 오늘은 다른 대원이 먼저 움직일 것이다. 망원경 없이는 정확히 분간이 되지 않지만, 옷 색깔이 푸른 것으로 보아서 승철로 짐작이 된다.
어쩌면 다시 못 올지도 모르는 천막을 깨끗이 정리하고, 대원들이 내려오면 먹을 수 있도록 물을 만들어 놓았다. 두 개의 라면과 나머지 수프를 눈에 띄게 잘 펼쳐 놓은 다음, 천막을 나선다. 남은 장비들을 쑤셔 넣었더니 제법 배낭이 묵직하다. 설원 아래로 내려서자 모레인 지대의 시작이다. 그런데 저 아래쪽에서 한 사람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설사면이 시작되는 부분에 묻어놓은 장비를 회수하려고 오는 장기헌이 틀림없다. 항상 맥을 풀어놓고 사는 듯한 그의 모습을 보자 거꾸로 힘이 솟았다. 기헌이와 저 지루한 모레인지대를 같이 걸어갈 수 있다는 사실에 이미 하산을 끝낸 것처럼 힘이 난다.
오후 3시 전진캠프에 도착했다. 길수와 재회의 악수를 나누고 배낭을 벗기도 전에 북벽을 먼저 쳐다보았다. 대원들은 붉은 색 벽을 끝내고 오른쪽 상단의 검은 바위탑 밑으로 오르고 있었다. 비스듬히 누워 있는 검은 바위탑의 세로 벽 밑으로 세 대원이 모인 시간은 오후 6시. 지난해에 올랐던 팀이 이곳을 셀밴드(Shell Band·탈레이사가르 북벽 상단부)라고 이름 붙였는데, 해발 6,700m쯤으로 추정된다.
기헌이 반죽한 밀가루를 썰어 넣은 카레 요리를 했다. 이제 전진캠프에도 쌀이 다 떨어졌으므로 남은 부식을 최대한 털어서 먹을 것을 만들어야 했다. 그래도 술은 아직까지 남아 있다. 밥 먹은 뒤에 팩소주 두 개를 뜯었다. 그동안 대장 형진이 눈치를 보느라고 손대지 않았던 술이다. 초승달이 뜬 밤의 탈레이사가르 북벽은 여전히 하얀 광채를 잃지 않고 있다.
잊을 수 없는 98928
1998년 9월28일 오늘은 대원들이 정상에 오르는 날이라 매우 의미 깊은 날이 될 것이 분명하다. 기억력이 나쁜 내 머리로 928이라는 숫자를 잊지 않는 것은 20년 전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날이기 때문이다.
오전 6시. 이른 아침인데도 대원들은 벌써 두번째 비박지 밑에서 움직이고 있다. 대원들은 정상에 오르면 지체 없이 하산해야 한다. 네 개의 파워바와 사탕만으로 3일을 넘긴다는 것은 인간의 능력 밖의 일이기 때문이다.
오전 9시. 선등자가 정상 밑 블랙타워에 도달한 것이 보였다. 정상부의 마지막 바위인 블랙타워는 마치 검은 바위탑처럼 보여서 자연스럽게 붙은 이름이다. 1991년에 등반했던 헝가리팀은 이곳을 자살구간이라며 다른 길로 돌아갔고, 1997년에 올랐던 오스트레일리아 합동대가 무시무시하다고 표현했던 곳이 바로 블랙타워다. 보기에도 바위질이 불안하고 거무스레하여 까다롭고 어려운 곳으로 추측된다.
오전 10시. 어찌된 일인지 대원들이 꿈쩍도 하지 않는다. 틀림없이 무언가 고민거리가 생긴 모양이다. 배가 고파서 허기지는 것은 각오한 일이고, 몸은 이미 비상체제로 들어갔을 것이다. 며칠 사이에 체중이 10kg 넘게 빠지는 것은 바로 극도의 공포를 느낄 때다. 훈련을 거치지 않은 사람은 바로 탈진하겠지만, 대원들은 체내에 쌓여 있는 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정오. 왼쪽 스카이라인 밑의 세로로 갈라진 세번째 크랙(실제로는 침니처럼 넓은 곳일 것으로 추정)에 있는 선등자는 정상으로 이어지는 설릉까지 한 피치를 남겨두고 있다. 두번째 대원이 오른쪽에 스노바를 번쩍이며 등반하는 모습은 이렇게 먼 곳에서 보아도 무척이나 역동적이다. 대원들은 우리가 필드스코프를 통해서 이렇게 일거일동을 관찰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할 것이다. 날씨는 구름 한 점 없는 가을날과 같다. 피할 수 없는 마지막 날에 이렇게 날씨가 좋다는 것은 대단한 행운이다.
오후 1시50분. 블랙타워 밑에 대원 셋이 다 모여 있다. 마지막 구간을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 같다. 그 구간만 끝내면 이제 정상으로 가는 설원이다. 셋 중에 누구 하나라도 이 구간을 오르면 모든 게 다 해결되는 셈이다.
오후 3시. 두 사람이 침니 밑에 대기 중이고 드디어 선등자 한 사람이 블랙타워의 침니를 돌파했다. 침니 다음은 정상으로 이어지는 설원일 뿐이다. 마음속에서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그동안의 길고도 지루했던 눈과의 싸움도 이것으로 끝났다. 모든 어려움은 이 마지막 벽을 통과함으로써 끝난 것이다. ‘대원들이 우리가 이렇게 망원경으로 보고 있는 줄 안다면 손이라도 한 번 흔들어줄텐데.’
오후 4시15분. 기다리던 파상이 돌아왔다. 포터 15명과 쌀 두 되, 그리고 사과와 바나나도 한 무더기를 들고 왔다. 갑자기 부자가 된 기분이다. 기헌이 감자와 양파를 섞어서 옛날자장을 만들었는데, 그럴듯하게 맛이 났다. 일찍 저녁밥을 먹은 뒤 내일 내려갈 포터들에게 짐을 분배하고 캠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약간 부산스러워진 이 때. 대원들이 등반하고 있는 벽으로 갑작스럽게 구름이 몰려들었다. 일시적으로 날씨는 어두워졌고 벽에는 구름띠가 둘러쳐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제 어려운 과정은 다 끝났으므로 걱정은 되지 않았다.
오후 5시. 한 시간 가까이 북벽에 드리웠던 구름이 벗겨지기 시작했고, 다시 시야가 트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대원들이 보이지 않았다. 순간, 사라진 대원들이 정상에 오르는 광경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아이젠 발톱을 둔중하게 옮기다가 드디어 정상에서 천천히 돌아서며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린다. 승철이 먼저 괴성을 지를 것이고, 형진은 누구를 먼저 껴안을까 고민하며 웃음 짓는다. 상만은 열심히 사진을 찍어대겠지. 모두들 감격에 겨워 부둥켜안고 울음을 터뜨리기보다는 엉뚱한 장난을 치거나, 주머니 속에 남은 사탕 부스러기를 나누어 먹고 있지는 않을까? 어쩌면 어려운 과정을 다 거쳤으므로 정상에 오르는 것이 별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고 냉정하게 하산을 서두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가셔브룸4봉(7,925m)을 등반했던 폴란드의 보이테크 쿠르티카(폴란드의 세계적인 산악인)와 오스트리아의 로버트 샤우어(쿠르티카와 함께 가셔브룸4봉 서벽을 올랐던 오스트리아 산악인)도 그 악명 높은 서벽을 돌파하고 나서 정상을 90m 앞에 두고 돌아서서 내려오지 않았는가. 높이가 2,000m나 되는 벽에서 11일 동안 비박을 감행했던 쿠르티카와 샤우어의 생각은 이미 목표로 삼았던 벽 등반에 성공한 이상, 굳이 정상에 올라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대원들은 그 시간에 설원을 걷고 있거나 정상에서 사진촬영을 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 말고는 어느 누구도 다른 일이 일어났으리라고는 상상하지 않았다.
오후 6시. 정상에 오른 뒤 빠른 속도로 일본팀이 시도하고 있는 북동릉으로 하산길을 잡은 것일까? 아니면, 날씨가 나빠져서 전 날 비박하던 곳으로 하강을 서두른 것일까? 일어날 수 있는 온갖 상황을 추정해보아도 대원들이 보이지 않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북벽으로 고정해 놓은 망원경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마음속에는 불길한 예감이 조금씩 스며들고 있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그들의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캠프에는 어둠이 내리고 정적만이 흘렀다.
9월29일. 아침이 되어도 희망은 사라져가고, 계획한 루트에 대원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만 불안한 현실로 다가왔다. 그들이 하산길에 접어들었을 것이라는 가정은 우리의 소망일 뿐 더 이상 변화의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햇빛이 북벽 하단을 비칠 때 캠프1의 왼쪽 위 5,500m 지점에 보이는 작은 물체들이 모든 상황을 확연히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그 물체를 연결하고 있는 것이 로프임이 확실해지면서 혹시나 했던 우려가 최악의 현실이 되고 말았다. 그 로프는 대원들이 정상에서 바닥까지 떨어졌음을 의미했다. 그들이 보이지 않았던 것에 대한 알리바이는 더 이상 필요치 않았다.
구름만이 아는 비밀
돌이켜보면 북벽에 구름이 몰렸던 것은 한 시간 남짓했고, 그 뒤부터 대원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마지막 행적을 구름의 책임으로 돌린다면 그야말로 뜬구름 잡는 소리가 될까? 그들이 추락하기 직전까지 분명히 확보하고 있었다면 확보물이 견디지 못할 정도의 엄청난 힘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그리고 그 힘의 원인은 자연적인 것인가, 아니면 인위적인 것인가에 의문이 집중된다. 그러나 그런 추측이 아무리 진실에 가깝다고 해도 반대의 가정이 동시에 성립하기 때문에 결국 확실한 것은 누구도 알 수 없다는 사실뿐이다. 그것은 오직 그들을 감싸고 있던 구름만이 아는 비밀이다.
가능한 모든 상황을 아무리 골똘히 추정해 보아도 움직이지 않는 사실은 대원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주 냉철한 추측이나 변증도 대원들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변함없는 사실 앞에서는 부질없는 일이 되고 만다. 그들은 이제 누구와도 만날 수 없는 영원한 이별의 길을 떠난 것이다. ‘짧았지만 훌륭하고 아름다운 삶’이라고 위로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회한이 남을 뿐이다.
석가모니는 29세라는 젊은 나이에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왕궁을 뛰쳐나왔다. 사랑하는 부모 처자는 물론, 부귀와 권세까지도 다 버리고 그가 선택한 일은 누더기 같은 옷을 걸쳐 입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것이었다. 그는 수행의 길을 선택하여 온갖 고난을 이겨내고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하여 후세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을 듣고 만든 경전에는 무엇을 깨달았는가 하는 내용보다는 그곳에 이르는 방법만이 설해져 있다고 한다. 그것은 철저히 스스로를 구하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산에 오르고자 하는, 특히 벽을 오르려는 젊은이들에게서 바로 그와 같은 삶을 떠올리는 것은 반드시 벽에 원하는 무엇이 있거나 혹은 없어서만은 아니다. 그들 옆에는 치열하게 같이 고민하고 같은 길을 바라보았던 ‘사람’이 있었다. 생의 마지막을 같이 장식해도 좋을 만한 상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것은 가벼운 죽음은 아닐 것이다.
대원들의 빛나는 등반은 그렇게 끝났다. 세 대원들의 어울림은 너무나 보기 좋았다. 1,300m를 추락하면서도 줄은 한 데 묶여 있었고, 각기 다른 날 세상에 태어났으나 약속이라도 한 듯 한 날 한 시에 생을 마감한 것이다.
등반을 떠나기 전 캠프에서 서로 먼저 읽겠다고 티격태격하던 책 <세비지 아레나>의 주인공들처럼 대원들도 그렇게 세상을 떠나갔다. 영국의 뛰어난 산악인 조 태스커와 피터 보드맨은 1982년 에베레스트 북동릉을 향해 등반을 떠나며 그 책의 원고를 출판사에 넘겼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이 두 사람 역시 등반 도중 8,300m 구름 속에서 실종되었고, 결국 그들이 죽고나서야 책은 빛을 보았다.
죽기 전에 캠프에서 그 책을 서로 뺏어가면서 읽으려 했던 대원들은 말했다. 등반은 깊이 빠져갈수록 죽음과 떼어놓을 수 없는 것 같다고…. 그런데 그들과 똑같이 대원들 역시 구름 속으로 사라져갔다. 캠프에는 마지막까지 추위를 견디고 있던 이름 모를 하얀 꽃들이 아무 일 없다는듯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하늘 오르는 길
탈레이사가르에서 숨진 고 김형진 최승철 신상만 세 악우의 기록을 <하늘 오르는 길>이란 제목을 붙여 출간했다. 그런데 미루었던 숙제를 했다는 느낌에 앞서 줄곧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 있다. 그 생각의 단서는 몇 년 전 출간된 지허 스님의 <선방일기>라는 책에서 비롯되었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인 1973년 봄 ‘지허’라는 이름을 가진 서울대 출신 스님은 신동아의 논픽션 공모에 당선된 후 글을 남기고 홀연히 어디론가 사라져 지금까지 소식이 없다.
글에는 일반인들로서는 접할 수 없는 선방 생활을 솔직하고도 담담하게 그려져 있으며, 수행자로서의 고뇌와 의지가 스며들어 있다. 그 글은 다시 현대불교에 연재된 후 책으로 묶어져 세상에 나오게 되었지만, 지금까지 장본인인 지허 스님은 세상 어디에도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그런 일을 생각하면 대원들의 행적을 담은 기록이 혹시 누구에게 누가 되는 것은 아닌지, 또한 나에겐 부끄러운 일이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그러나 그처럼 한다는 것은 속물이 들어 사는 범인으로선 넘보지 말아야 할 한계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