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려있어 들어 갔더니 나가란다.
오늘은 휴관일.
일요일날 학교 운동장에도 못 들어가겠네?
말을 이렇게 하지만 살살 빌었다우!!
야외 전시 유물입니다.
설명문은 부여군청, e-museum에서 가져 왔습니다. 부여박물관은 먹통이네요.
귀부
석불좌상
구교리 석불좌상
용장리 석조
삼계리 삼층탑
국립부여박물관 앞마당에 자리하고 있는 석탑으로, 원래는 5층이나 현재는 지대석이 없어진 불완전한 3층 석탑이다. 지대석이나 하대저석(下臺低石)이 없고 면석(面石)만 남아 있는데 1개의 돌로 되어 있으며 장주(長柱)와 우주(隅柱)가 새겨져 있다.
그 위에 넓은 갑석(甲石)이 얹혀있다. 남아 있는 탑신은 모두 각각 1개의 돌로 되어 있고 모서리에는 기둥윤곽을 새겼다. 옥개석(屋蓋石)은 추녀와 낙수면이 곡선으로 휘어있고 네귀에서 반전(反轉)하였으며 네귀에 풍탁(風鐸)을 꽂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처마선 아래면에는 1층에 5개, 2층에 4개, 3층에 3개의 층급받침이 있고 그 바깥에 낙수홈이 있다. 노반(露盤)과 복발(覆鉢)이 하나의 돌로 되어 있으나 그 이상의 구조는 없어졌다. 비록 불완전하긴 하나 전체적으로 볼 때 세련된 솜씨로 새긴 고려시대(高麗時代)의 석탑이다.
동남리 오층탑
국립부여박물관 앞마당에 자리하고 있는 탑으로, 석목리 논절부락의 고려시대 옛 절터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 세웠다.
전체의 무게를 지탱해주는 기단(基壇)을 2층으로 마련하고, 그 위로 5층의 탑신(塔身)을 올려놓고 있는데, 아래층 기단은 일부만 남아있고, 탑신의 4층 몸돌은 없어진 상태이다. 위층 기단의 맨윗돌은 탑신의 1층 몸돌을 괴어주는 부분 주위로 넓게 테두리를 두른 뒤 연꽃무늬를 새겨 장식하였다.
탑신의 각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겼으며, 2층 몸돌부터 갑자기 높이가 줄어들어 1층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두텁고 무거워 보이는 지붕돌은 밑면에 3단씩의 받침을 두었고, 윗면은 거의 수평을 이루고 있으며, 네 귀퉁이는 희미하게 들려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쳐주던 받침돌만 남아있다.
돌을 짜놓은 수법이 소박하고 다듬은 솜씨가 서투르나, 고려시대 후기 당시의 석탑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어 양식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대보광선사비
고려시대 보광사를 크게 일으킨 원명국사의 공적이 새겨져 있는 비이다. 원래는 충남 부여군 성주산의 보광사터에 있던 것을 1963년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비문은 2차에 걸쳐 새겼는데, 앞면은 건립당시인 고려 공민왕 7년(1358)에 새겼고 뒷면은 조선 영조 26년(1750)에 추가하였다.
비문에 의하면 원명국사는 19세에 등과하여 선원사에서 뜻을 펴오다가 공민왕 원년(1351) 65세로 입적하였다. 죽으면서 문도들에게 비나 탑을 세우지 않도록 당부하여 6년이 지나서야 비가 세워졌다. 뒷면의 추가된 기록에는 임진왜란 때 건물이 모두 불타 없어지고, 기록을 적은 비도 알아볼 수 없으므로 주지인 석능일이 고쳐 새긴다고 되어있다.
현재 비받침과 비머릿돌이 없고, 비몸만 남아있다. 비몸의 가장자리는 덩굴무늬를 띠 모양으로 둘러 새겼다. 석재는 편마암이고 윗쪽의 양끝을 사선으로 잘라냈다. ‘보광사중창비’라고도 하는 이 비는 고려 후기의 간략화된 석비양식과 불교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세도면 동사리 오층탑
국립부여박물관에 자리하고 있는 탑으로, 탑이 있었던 원래의 터에는 비석을 세워 그 자리를 밝혀두었다. 형태는 전체의 무게를 지탱해주는 기단(基壇)을 2층으로 마련하고, 그 위로 5층에 이르는 탑신(塔身)을 쌓아올렸다.
아래층 기단의 네 면에는 면마다 3개씩의 안상(眼象)을 얕게 새겨 장식하였다. 위층 기단은 윗면에 연꽃무늬를 두르고, 네 모퉁이마다 돌출된 꽃조각을 두었다. 탑신의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조각하였는데, 2층 몸돌부터는 심하게 높이가 줄어들어 1층의 부피와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지붕돌은 낙수면이 아래로 내려오면서 곡선을 이루고 있고, 처마는 네 귀퉁이에서 부드럽게 위로 들려 있으며, 밑면에 3단씩의 받침을 새겨놓았다. 꼭대기에 놓인 머리장식은 훗날 새로 만들어 복원해 놓은 것이다.
위로 올라갈수록 탑신의 몸돌 높이가 심하게 낮아지고 있어, 전체적으로 길쭉하고 가느다란 인상을 준다. 고려시대에 세운 탑으로, 당시에 유행하던 석탑양식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천왕사터 석조여래입상
1933년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금성산의 천왕사 절터에서 발견되어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 옮겨져 있는 불상이다. 몸체에 비하여 머리가 크며 어깨와 하체가 거의 일직선으로 곧바로 서 있는 자세이다.
얼굴은 살이 올라 풍만하며 눈은 반쯤 감겨있다. 목에는 3줄의 주름인 삼도(三道)가 새겨져 있으며, 양 어깨에 걸친 옷은 아무런 무늬없이 발 밑까지 내려져 있다. 오른손은 위로 올려 손바닥이 밖을 향하게 하였고, 왼손은 아래로 늘어뜨려 손바닥이 보이게 하였다.
몸체에 비해 머리가 크게 표현되어 전체의 균형을 잃고 비례가 맞지 않는 조각수법으로 보아 충청도 일원에서 유행했던 고려시대의 지방화된 불상으로 추정된다.
서천 군사리 귀부
이수와 碑身이 없는 귀부만이 남아있는 상태이다. 석질은 화강암제이고 형태는 거북모양이며 머리는 상상의 동물이 해태상과 흡사하다. 四足은 움크린 자세로 접혀있으며, 둥근 등부분에는 龜甲文이 2겹으로 양각되었다. 중앙에는 장방형의 碑座가 碑身의 넓은면이 머리방향(정면)으로 향하도록 음각홈이 마련되었다.
당진 용현리 석조보살입상
고란사 석조보살입상
조선시대 석불입상
부여 가탑리 부도
형·상태가 양호하며 균형미와 간략한 구성을 보이는 화강암제 석조浮屠이다. 표면은 정교하게 마연, 조각되었으며 그 구성을 보면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로 구분된다. 기단부는 원형의 상·중대석, 괴임석을 놓고 표면에는 연화문을 돌려 장식한 상태이며, 그 사이에는 팔각의 중대석을 놓았다. 바닥부에는 하대석, 지대석이 있는 것으로 보이나 확인할 수 없다.
탑신부는 팔각의 탑신석과 그 위에 8능의 笠石을 이중으로 올려놓고 상륜부에 해당되는 정상에는 연봉형 보주를 올려 놓았다. 특히 상륜부는 보주만으로 간결하게 처리하였으나 통일기에 이르러서는 노반, 복발, 보륜등을 놓아 장식성과 조화미를 강조하는 것이 통례로서 부도 및 탑등에서 주로 나타난다.
당진석불좌상==>안내문오류, 관음보살상이다.
2007.03.12
첫댓글 특이한 불상이 많으시군요. ()()()
가보고 싶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