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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칭 | 해당 작품 | 합 계 |
여편네
| 「생활」, 「여편네의 방에 와서」, 「모르지」, 「누이의 방」, 「파자마바람으로」, 「만용에게」, 「반달」, 「죄와 벌」, 「식모」, 「전화 이야기」, 「도적」, 「세계일주」, 「성」 | 13편 |
아내 | 「구름의 파수병」, 「사치」, 「초봄의 뜰 안에」, 「여름 아침」, 「거미잡이」, 「이사」, 「말」, 「이혼 취소」, 「금성라디오」, 「미농인찰지」, 「장시(2)」 | 11편 |
여자 | 「너를 잃고」, 「시골 선물」, 「중복」, 「먼 곳에서부터」, 「만주의 여자」, 「여자」, 「거대한 뿌리」, 「거위 소리」, 「강가에서」, 「X에서 Y로」, 「네 얼굴은」, 「금성라디오」 | 12편 |
너(네) | 「사랑」, 「누이야 장하고나!」, 「누이의 방」, 「구라중화(九羅重花)」 | 4편 |
계집애 | 「시골 선물」, 「격문」, 「만주의 여자」 | 3편 |
누이 | 「누이야 장하고나!」, 「누이의 방」, 「피아노」 | 3편 |
그녀 | 「거대한 뿌리」, 「식모」 | 2편 |
당신 | 「엔카운터지」, 「이혼 취소」 | 2편 |
여사 | 「거대한 뿌리」, 「미인」 | 2편 |
소녀 | 「구라중화」, 「수난로(水煖爐)」, 「반달」 | 3편 |
아가씨 | 「원효대사」 | 1편 |
아낙네 | 「거대한 뿌리」 | 1편 |
부녀자 | 「거대한 뿌리」, 「미농인찰지(美濃印札紙)」 | 2편 |
처 | 「아버지의 사진」, 「조국에 돌아오신 상병포로 동지들에게」, 「절망」, 「적2」 | 4편 |
년 |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성」 | 2편 |
여인 | 「아메리카 타임지」, 「거리2」, 「미스터 리에게」 | 3편 |
여보 | 「비」 | 1편 |
엄마 | 「VOGUE야」 | 1편 |
순자야 | 「꽃잎3」 | 1편 |
영숙아 |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 1편 |
장문이 | 「나가타 겐지로」 | 1편 |
매춘부 | 「엔카운터지」 | 1편 |
부인 | 「거리2」 | 1편 |
과부 | 「묘정의 노래」 | 1편 |
어미 | 「토끼」 | 1편 |
위의 <표1>에서 보듯이 金洙暎이 女性을 호칭한 형태는 ‘여편네’로부터 ‘어미’에 이르기까지 25가지에 이르고 있다. 물론 ‘순자야’, ‘영숙아’, ‘장문아’ 등은 대상의 이름을 직접 부른 것으로 그 性格이 유사하므로 함께 묶을 수도 있을 것인데, 그렇게 되면 23가지가 된다. 金洙暎이 여성을 호칭한 것 중에서 ‘여편네’(13편)가 가장 많고 다음으로 ‘여자’(12편), ‘아내’(11편)의 순이다. 세 호칭은 대부분 作品 話者의 아내를 가리키는데, 그러한 면은 初期보다도 後期의 작품에서(특히 1962년부터) 많이 나타나고 있다. 작품의 話者는 아내 외의 여성에게는 ‘여사’나 ‘여인’ 등 비교적 格式을 차리거나 ‘부인’, ‘처’ 등 客觀的인 호칭을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金洙暎의 작품에서 아내를 칭하는 ‘여편네’나 ‘여자’나 ‘아내’가 주목되는데, 특히 ‘여편네’의 경우 관심을 끈다. ‘여편네’는 ‘여자’나 ‘아내’보다 분명 그 格이 낮기 때문에 金洙暎의 여성 인식을 살펴보는 데에 중요한 端緖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호칭의 변화는 金洙暎 시세계의 흐름을 반영하는 것이기에 주목된다. 주지하다시피 金洙暎은 3․15마산의거와 4․19혁명을 겪으면서 이전 시대에 추구하던 모더니즘 시 경향으로부터 參與詩로 전향했다. 그런데 참여시 지향의 모습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소 변화를 보였다. 1960년에는 革命을 외칠 정도로 정치적이고 관념적이고 격정적인 목소리를 내었고, 1962년 무렵부터는 비교적 日常的이고 具體的인 모습을 보였으며, 1965년부터는 自己反省을 추구하면서 참여시를 지향한 것이다.
가령 1960년에는 “민주주의의 싸움이니까 싸우는 방법도 민주주의식으로 싸워야한다”(「하……그림자가 없다」)라거나, “그 지긋지긋한 놈의 사진을 떼어서/조용히 개굴창에 넣고/썩어진 어제와 결별하자”(「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우리가 찾은 혁명을 마지막까지 이룩하자”(「기도」), “혁명이란/방법부터 혁명적이어야 할 터인데/이게 도대체 무슨 개수작이냐”(「육법전서와 혁명」), “혁명은/왜 고독한 것인가를”(「푸른 하늘을」), “8․15를 6․25를 4․19를/뒈지지 않고 살아왔으면 알겠지/대한민국에서는 공산당만이 아니면/사람 따위는 기천 명쯤 죽여보아도 까딱도 없거든”(「만시지탄은 있지만」), “너희들 미국인과 소련인은 하루바삐 나가다오”(「가다오 가다오」),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그 방을 생각하며」) 등과 같이 정치 문제에 대해 격정적인 목소리를 내었다. 그렇지만 1961년 6월에 들어서부터는 ‘新歸去來’란 副題가 붙은 연작시들을 발표하면서 격정적인 목소리를 다소 가라앉히고 일상의 면들에 관심을 갖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다고 참여시를 포기한 것은 아니고 자신의 몸을 아파하고(「먼 곳에서부터」, 「아픈 몸이」), 절망하고(「절망」), 轉向을 생각하고(「轉向記」), 敵을 인식한(「적」) 것이다. 그리하여 이 즈음부터 이전과 다르게 여성에 대해 관심을 보였고 또한 呼稱에 있어서도 ‘여편네’(「여편네의 방에 와서」, 「모르지?」, 「누이의 방」, 「파자마바람으로」, 「만용에게」, 「반달」, 「罪와 罰」)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65년 이후는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어느 날 古宮을 나오면서」), “나는 한 가지를 안 속이려고 모든 것을 속였다”(「거짓말의 여운 속에서」), “지독하게 속이면 내가 곧 속고 만다”(「性」)와 같이 自己反省을 하면서 대항 의지를 지속해,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풀」)고 ‘풀’ 같은 사회적 존재에 대해 신뢰감을 지켰다.
그렇다면 金洙暎이 시작품에서 ‘여편네’란 호칭을 사용한 이유는 무엇일까? ‘여편네’의 辭典的 槪念은 아내를 속되게 이르는 말이다. 그러므로 언뜻 보면 金洙暎은 자신의 아내를 속되게 호칭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그의 散文(隨筆)을 보면 자신의 아내를 ‘여편네’로 종종 칭하고 있기 때문에 아내를 얕잡아보거나 卑下하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판단을 시작품 자체에 도입시키는 것은 무리이다. 시작품의 話者와 작품을 창작한 詩人을 일치시키는 것은 隨筆과 같은 산문의 경우에 비해 무리인 것이다. 따라서 隨筆의 경우와 같이 시작품의 話者를 詩人으로 보는 것은 常識的 차원에서 시작품을 해석하는 愚를 범하는 일이다. 시인의 人格을 통해 작품의 品格을 평가하게 되어 妥當하지 못한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시작품이 시인의 삶으로부터 독립되거나 분리될 수 없는 것이지만, 그리하여 시작품에 등장하는 話者가 詩人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시작품이 곧 詩人의 自敍傳이라고는 볼 수 없으므로 서로 분리시켜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金洙暎의 시작품에 나타난 ‘여편네’를 시인의 아내라고 보지 않고 獨立的인 대상으로 인정하는 것이 진정 필요하다. ‘여편네’를 시인의 아내를 호칭하는 것으로 한정시키기보다 시작품에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으로 보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이러한 전제가 성립되었을 때, 金洙暎의 시작품에 등장하는 ‘여편네’의 근거와 그 의미를 비로소 객관적으로 인지할 수 있고, 나아가 시인의 女性 認識을 보다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Ⅱ. 女性 認識의 實際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金洙暎의 시작품에 나타난 여성에 대한 呼稱은 주로 ‘여편네’, ‘아네’, ‘여자’ 등인데, 과연 이러한 호칭들이 反女性主義를 나타내는가를 糾明하는 것이 이 논문의 중심 과제이다. 그동안 金洙暎의 시세계에 대해서는 인간의 自由를 억압하고 방해하고 왜곡시키는 대상들에 대해 온몸으로 비판하고 나섰다고 평가해온 것이 정답처럼 인정되어왔다. 따라서 만약 그의 시세계가 反女性主義를 띠고 있다면 심각한 문제가 야기될 수밖에 없다. 自由精神을 지향해온 그의 시세계 자체가 社會的 弱者인 여성을 억압함으로 인해 모순되기 때문에 새로운 評價가 내려져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우선 다음의 시작품으로 진단해볼 수 있을 것이다.
수입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너나 나나 매일반이다
모이 한 가마니에 430원이니
한 달에 12, 3만 환이 소리 없이 들어가고
알은 하루 60개밖에 안 나오니
묵은 닭까지 합한 닭모이값이
일주일에 6일을 먹고
사람은 하루를 먹는 편이다
모르는 사람은 봄에 알을 많이 받을 것이니
마찬가지라고 하지만
봄에는 알값이 떨어진다
여편네의 계산에 의하면 7할을 낳아도
만용이(닭 시중하는 놈)의 학비를 빼면
아무것도 안 남는다고 한다
나는 점등(點燈)을 하고 새벽모이를 주자고 주장하지만
여편네는 지금 주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아니 430원짜리 한 가마니면 이틀은 먹을 터인데
어떻게 된 셈이냐고 오늘 아침에도 뇌까렸다
-「만용에게」 부분
위의 작품에서 보듯이 ‘여편네’는 資本의 利益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모이 한 가마니의 값이 430圓인 것을 통해 한 달에 12萬圜 내지 13萬圜이 들어가는 것을 認知하고 있는 것이 그 단적인 면이다. 그리하여 ‘여편네’는 “아니 430圓짜리 한 가마니면 이틀은 먹을 터인데”를 기준으로 삼고 한 달에 6,450원(64,500圜)의 사료비가 들어가야 하는데 실제로는 12萬圜 내지 13萬圜이 들어가고 있으므로 그 차이가 어떻게 해서 발생하는지를 고민하고 있다. 사료비가 계산상에 비해 실제로는 2배 정도가 더 들어가고 있으므로 그 原因이 무엇인지를 따져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편네’는 그 이유를 알아내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결국 ‘나’는 ‘여편네’에 비해서 ‘무능’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료비가 계산상보다 2배 정도 더 들어간 原因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만용이’의 속임수 때문이다. 사료를 분실한 것도, 도둑이 든 것도, ‘만용이’ 때문이라는 것을 ‘여편네’는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橫領을 막으면 양계 운영의 이익 創出이 가능하다고 보고(뚜렷한 다른 生計 對策이 없기도 하지만) ‘여편네’는 한편으로는 열심히 收支를 따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만용이’에게 警戒心을 늦추지 않는다.
또한 ‘여편네’는 달걀이 하루에 60개밖에 생산이 안 되니 수지가 안 맞는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리하여 그 상황을 일주일의 食費 중 엿새는 닭이 먹는 셈이고 자신을 비롯한 식구는 하루밖에 못 먹는다고 比喩的으로 自嘲하고 있다. 그리하여 “7할을 낳아도/만용이(닭 시중하는 놈)의 학비를 빼면/아무것도 안 남는다고” 불평을 늘어놓는다. ‘여편네’가 자신의 일에 대해 이렇게 分析的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도 사업 운영자다운 자세이다. 資本主義 社會에서 자기 자본의 利益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자로서 사업의 세부 사항을 파악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런 점에서 ‘나’와 ‘여편네’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난다. ‘여편네’는 養鷄業을 소득을 얻을 수 있는 대상으로 대하고 있는데 비해 ‘나’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나’는 다른 면에서 양계업에 대한 보람을 찾고 있다. “나는 양계를 통해서 노동의 엄숙함과 그 즐거움을 경험했습니다.”(「양계변명」)라고 말하고 있듯이, 양계업을 통해 勞動의 價値를 체험하게 된 것을 보람과 즐거움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金洙暎의 勞動에 대한 긍정적인 자세는 다음의 작품에서도 볼 수 있다.
물을 뜨러 나온 아내의 얼굴은
어느 틈에 저렇게 검어졌는지 모르나
차차 시골 동리 사람들의 얼굴을 닮아간다
뜨거워질 햇살이 산 위를 걸어내려온다
가장 아름다운 이기적인 시간 위에서
나는 나의 검게 타야 할 정신을 생각하며
구별을 용사(容赦)하지 않는
밭고랑 사이를 무겁게 걸어간다
-「여름 아침」 부분
위의 작품에서 보듯이 ‘나’는 밭을 매는 노동을 “가장 아름다운 이기적인 시간 위에서/나는 나의 검게 타야 할 정신”이라고 말하고 있다. 노동의 가치를 단순히 육체적인 차원으로만 국한하지 않고 정신적인 차원으로까지 새기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藝術의 출발은 勞動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시작품은 인간의 노동을 적극적으로 認知하고 수용할 때 건강함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金洙暎은 노동에 대해 그와 같은 경건함을 가지고 “구별을 용사(容赦)하지 않는/밭고랑 사이를 무겁게 걸어”간다. 또한 “보석 같은 아내와 아들은/화롯불을 피워가며 병아리를 기르고/짓이긴 파 냄새가 술 취한/내 이마에 神藥처럼 생긋하다”(「초봄의 뜰 안에」)라고 노동의 소중함을 말하고 있다. 養鷄 運營을 하는 동안 傳染病에 걸린 닭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生命의 귀중함에 안타까워하고, 약을 사러 다니면서 꼭 필요한 것이 사료상이나 도매상에 절품된 현실을 보면서 모순되고 허약한 사회에 분노하는 것도 노동에 대한 신성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金洙暎이 勞動의 신성함에만 관심이 있고 資本의 利益에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한 모습은 「만용에게」에서 “나는 점등을 하고 새벽모이를 주자고 주장하”는 데서 확인된다. 그렇지만 ‘나’의 제의는 ‘여편네’에게 여지없이 거부당하고 만다. 왜냐하면 ‘여편네’가 보기에 ‘나’의 제의는 현실적으로 타당한 對策이 못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여편네는 지금 주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아니 430원짜리 한 가마니면 이틀은 먹을 터인데/어떻게 된 셈이냐고 오늘 아침에도 뇌까”린다. 이처럼 ‘여편네’는 자본주의의 가치를 삶에 철저하게 適用하고 있고, 그에 비해 ‘나’는 자본의 이익에 대해 관심이 있고 그 필요성을 認定하고 있지만 적극적으로 實行하지 못하고 있다. ‘여편네’가 자본주의에 밝은 프로이고 전문가라면 ‘나’는 아마추어이고 비전문가인 셈이다. 그리하여 ‘나’와 ‘여편네’의 관계는 아이와 어머니의 관계로도 놓인다.
여편네의 방에 와서 기거를 같이해도
나는 이렇듯 소년처럼 되었다
흥분해도 소년
계산해도 소년
애무해도 소년
(…중략…)
여편네의 방에 와서 기거를 같이해도
나는 점점 어린애
나는 점점 어린애
태양 아래의 단 하나의 어린애
죽음 아래의 단 하나의 어린애
언덕 아래의 단 하나의 어린애
애정 아래의 단 하나의 어린애
사유 아래의 단 하나의 어린애
-「여편네의 방에 와서-新歸去來1」
위의 작품에서 보듯이 ‘여편네’와 ‘나’와의 관계는 마치 어머니와 ‘소년’ 또는 ‘어린애’의 관계와 같다. ‘나’는 ‘여편네’ 앞에서 아무리 ‘흥분’을 해도 ‘계산’을 해도 ‘애무’를 해도 ‘어린애’의 存在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한 관계는 시간이 간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固着化되고 만다. 그리하여 ‘태양’이나 ‘죽음’이나 ‘언덕’이나 ‘애정’이나 ‘사유’ 아래에서 ‘나’는 ‘단 하나의 어린애’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나’는 ‘여편네’로부터 철저히 보호받고 조종받고 그리고 그녀를 따르는 存在에 놓여 있다. ‘나’는 ‘여편네’를 속일 수 있겠지만 ‘그만큼/지독하게 속이면 내가 곧 속고’(「性」) 마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여편네’를 卑下하고 있는 것은 인간 자체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屬性에 대한 것이다. 資本主義的 世界觀에 철저한 ‘여편네’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여편네’를 자신을 조종하고 업신여기고 끝내 복종하도록 만드는 무서운 존재라고 여기고 있다. 결국 ‘여편네’를 自由 精神에 대한 敵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金洙暎은 왜 敵의 상징으로 ‘여편네’라는 기호를 썼을까? 敵을 나타내는 기호로 돌멩이나 장미꽃이나 여우를 써도 상관없는 일 아니겠는가? 또한 敵의 상징으로 資本家나 資本家 階級에 해당하는 대상을 직접 명명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고 또 공격적이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이 점은 金洙暎이 생각하는 敵이 社會的 存在이므로 돌멩이나 아파트와 같은 무생물이거나, 장미꽃이나 선인장과 같은 식물이거나, 여우나 두더지와 같은 동물을 지칭할 이유는 없다. 또한 敵의 대상인 자본가 계급을 직접 거명하지 않는 것이 공격을 한층 周到綿密하게 하는 戰略이다. 敵에 대한 직접적인 거명은 표면적으로는 더 당당하고 유리할지 모르지만 단순한 것이어서 오히려 불리할 수 있다. 공격할 대상이 단순하지 않은데 단순하게 공격해서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金洙暎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敵이란 결코 단순한 상대가 아니다.
우리들의 적은 늠름하지 않다
우리들의 적은 커크 더글러스나 리처드 위드마크모양으로 사나웁지도 않다
그들은 조금도 사나운 악한이 아니다
그들은 선량하기까지도 하다
그들은 민주주의자를 가장하고
자기들이 양민이라고도 하고
자기들이 선량이라고도 하고
자기들이 회사원이라고도 하고
전차를 타고 자동차를 타고
요릿집엘 들어가고
술을 마시고 웃고 잡담하고
동정하고 진지한 얼굴을 하고
바쁘다고 서두르면서 일도 하고
원고도 쓰고 치부도 하고
시골에도 있고 해변가에도 있고
서울에도 있고 산보도 하고
영화관에도 가고
애교도 있다
그들은 말하자면 우리들의 곁에 있다
-「하…… 그림자가 없다」 부분
위와 같이 金洙暎은 敵의 상황을 여실하게 현실에서 인식하고 있다. 敵은 진정 미국의 영화배우인 커크 더글러스Kirk Douglas나 리처드 위드마크Richard Widmark의 생김새처럼 “사나웁지 않”고 오히려 “선량하기까지”하다. 또한 敵은 “민주주의자를 가장하고” “양민이라고도 하고” “애교도 있”는 대상으로 존재한다. 敵은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우리들의 곁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金洙暎은 敵에 대한 공격에서 승리하기 위해 고도의 戰略을 짜내려고 했는데, ‘여편네’가 그러한 차원의 産物이다. 金洙暎의 시편들이 難解性을 띠는 것은 세계인식이 깊은 점도 있지만, 이와 같이 주도면밀하게 敵을 공격하는 전략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金洙暎의 최고 작품으로 평가받는 「풀」의 경우 풀과 바람의 관계가 있을 뿐 그 어디에도 직접적인 공격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바람보다 늦게 울어도/바람보다 먼저 웃는다”와 같이 대비를 통한 풀의 공격성은 결코 약한 것이 아니다. 간접적인 공격을 통해 오히려 풀이 승리를 거두는 것을 더욱 적극적으로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눈」의 경우에도 “기침을 하자/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라고 직접적인 공격 없이 기침하는 행동만 제시하고 있지만, 詩人으로서 지향해야 할 진정한 勇氣와 實踐 行動이 어떠한 것인지를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金洙暎의 시작품에 나타나는 여성에 대한 호칭은 새롭게 인식해야 한다. 특히 「만용에게」, 「여편네의 방에 와서-新歸去來1」, 「생활」, 「반달」, 「도적」 등에서 아내를 비하하는 호칭인 ‘여편네’를 사용했다고 해서 일방적으로 反女性主義的인 태도를 보인다고 평가하는 것은 再考되어야 하는 것이다.
金洙暎의 시작품에서 ‘여편네’는 그 어떤 대상보다도 親密性과 客觀性을 공유하고 있다. ‘여편네’는 부모형제나 친구보다도 관계가 깊지만 어디까지나 契約關係의 대상이다. 마치 雇用主와 雇傭人의 관계와 같은 대상이어서 계약이 어긋나면 얼마든지 돌아설 수 있다. 부모형제인 경우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부부는 새로운 계약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金洙暎은 자신의 시작품에서 不可缺하게 인정해야 하면서도 대항해야 할 대상으로 ‘여편네’를 칭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여편네’는 고용인이 비인격적이고 속물적인 고용주를 비판하기 위해 쓴 象徵語와 같다고 볼 수 있다.
金洙暎의 ‘여편네’에 대한 이와 같은 태도는 다른 작품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이 밭주인은 차밭 주인의 소작인이다/그러나 우리집 여편네는 이것을 모두/자기 밭이라고 한다 멀쩡한 거짓말이다”(「반달」)라거나, “돈에 치를 떠는 여편네”(「도적」)라는 등 俗物的으로 묘사하고 있는 데서 여실히 확인된다. 그러면서도 金洙暎은 자신 역시 자본주의 제도에 몸을 맞춰 살아가야 하는 存在임을 인정하고 있다. 자신이 자본주의의 한 構成員이라는 사실을 거절할 수도 회피할 수도 없음을 깨닫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金洙暎은 자본주의의 요구에 일방적으로 順應할 수만은 없다고 생각하고 그에 대한 對應을 보인다. 갈브레이드John Kenneth Galbraith가 대중은 왜 빈곤한가에서 상황에 順應하는 것이야말로 克服해야 할 것이라고 인식한 것처럼 金洙暎은 자본주의를 ‘여편네’라고 卑下하며 맞선 것이다.
Ⅲ. 女性 認識의 의미
金洙暎은 자본주의를 ‘여편네’로 부르며 신랄하게 공격하고 있지만 그 싸움에서 승리한다는 확신을 갖고 있지는 않다. 자본주의가 多數라면 金洙暎은 小數이고, 자본주의가 巨人이라면 金洙暎은 小人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프로라면 金洙暎은 아마추어이고, 자본주의가 힘센 사장이라면 김수영은 힘없는 종업원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김수영은 주눅 들거나 힘없이 물러서지 않고 그 나름대로 대항하기 위해 궁리한다. “파자마바람으로 주스를 마시면서/프레이저의 현대시론을 사전을 찾아가며 읽고 있으려니/여편네가 일본에서 온 새 잡지 안의/김소운(金素雲)의 수필을 보라고 내던”(「파자마바람으로」)지는 바람에 자신이 추구하는 시론이 흔들리는 상황에서도 “어떻게든지 체면을 차려볼 궁리”(「파자마바람으로」)를 한다. “제일 피곤할 때 적에 대”(「적2」)하기도 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具體的으로 對抗하기도 한다.
이렇게 주기적인 수입 소동이 날 때만은
네가 부리는 독살에도 나는 지지 않는다
무능한 내가 지지 않는 것은 이때만이다
너의 독기가 예에 없이 걸레쪽같이 보이고
너와 내가 반반-
「어디 마음대로 화를 부려보려무나!」
-「만용에게」 부분
위의 作品에서 보듯이 金洙暎은 ‘네’로부터 물러설 수 없다는 자세를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화자인 ‘나’는 “이렇게 주기적인 수입 소동이 날 때만은/네가 부리는 독살에도 나는 지지 않는” 자세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무능한 내가 지지 않는 것은 이때만이다/너의 독기가 예에 없이 걸레쪽같이 보이고/너와 내가 반반-/「어디 마음대로 화를 부려보려무나!」” 하며 당당하게 맞서고 있는 것이다.
‘나’는 ‘여편네’로부터 자본주의 체제의 弱者로서 操縱당한다. 위의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내’가 ‘만용’이를 나무라는 것도 ‘여편네’의 조종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내’가 ‘만용’이를 나무라는 것은 일방적으로 ‘여편네’에게 順從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능’한 존재이지만 가만히 있지 않는 모습이다. ‘만용’이를 통해 間接的으로 ‘여편네’를 공격하는 것이다. “너와 내가 반반―/「어디 마음대로 화를 부려보려무나!」”라고 열어 두고 있는 것이다. ‘나’의 ‘만용’에게 대한 自信感 있는 態度를 통해 간접적으로 ‘여편네’에게 강인함을 알리려고 하는 것이다. ‘내’가 무능한 존재로 보일지라도 일방적으로 무시당하지 않고 나름대로 主體性을 가지고 있음을 알리려는 행동이다. 養鷄 運營의 손실이 ‘만용’의 소행이라고 보는 것은 收入에 신경을 쓰고 있는 ‘여편네’의 입장이지 결코 ‘나’의 생각은 아니다. ‘무능한 내’ 책임도 있겠지만 ‘여편네’의 책임도 크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여편네’에 대한 불평을 ‘만용’에게 한다. ‘만용’이도 책임이 있기 때문이지만, 그보다도 내가 效果的으로 싸울 수 있는 상대이기 때문이다. ‘만용’이는 ‘수입 소동이 날 때’마다 ‘독살’을 부리는데, 그것은 양계 운영의 손실 책임이 자신에게 轉嫁되는 것을 느끼고 반발하는 것이다. ‘만용’의 그 반발에 ‘나’ 역시 물러서지 않는다. “네가 부리는 독살에도 나는 지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이 싸움은 결코 ‘만용’에게 지기 위한 것은 아니지만 이기기 위한 것도 아니다. 단지 ‘여편네’에게 보여주기 위한 싸움인 것이다. 결국 “너와 내가 반반-”으로 하는 싸움이다. ‘나’와 ‘만용’의 1대 1 싸움이지만 窮極的으로 ‘나’와 ‘여편네’의 1대 1 싸움인 것이다.
초가 쳐 있다 잔인의 초가
요놈― 요 어린 놈― 맹랑한 놈― 6학년 놈―
에미 없는 놈― 생명
나도 나다― 잔인이다― 미안하지만 잔인이다―
콧노래를 부르더니 그만두었구나― 너도 어지간한 놈이다― 요놈― 죽어라
-「잔인의 초」 부분
“몇 년 전에 「만용에게」라는 제목의 作品을 쓴 것이 있는데, 生命과 生命의 대치를 취급한 주제면에서나, 호흡면에서나, 이 「잔인한 초」는 그 작품의 계열에 속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너와 나는 <반반>이라는 의미의 말이 그 「만용에게」의 모티브 비슷하게 되어 있는데 그러한 1대 1의 대결의식이 이 「잔인한 초」에도 들어 있다. (중략) 아무래도 나의 본질에 속하는 것 같고 시의 본질에 속하는 것 같다.”라고 金洙暎 스스로가 吐露하고 있듯이, 위의 작품에는 그의 시 本領이 잘 나타나 있다. 金洙暎 시의 본령은 1 대 1 對決意識이다. 그리하여 ‘나’는 ‘놈’과 대결하고 있다. ‘놈’은 어리고 맹랑하고 6학년밖에 안 되었고 에미 없는 상대라면 ‘나’는 ‘잔인’할 정도로 ‘생명’이 있는 상대이다. 그렇지만 兩者間에 벌이는 대결이 쉽게 승부나지 않는다. “너도 어지간한 놈”이기 때문이고, ‘나도 나’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요놈― 죽어라” 하고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돈에 치를 떠는 여편네도 도적이 들어왔다는
말에는 놀라지 않는다
그놈은 우리집 광에 있는 철사를 노리고 있다
싯가 700원가량의 새 철사뭉치는 우리집의
양심의 가책이다
우리가 도적질을 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훔친 거나 다름없다 아니 그보다도 더 나쁘다
(…중략…)
그래도 여편네는 담을 고치지 않는다
내가 고치라고 조르니까 더 안 고치는지도 모른다
고칠 사람을 구하기가 어려운 것도 있고
돈이 아까울지도 모른다
(…중략…)
아니 내가 고치라고 하니까 안 고칠 거라
이 추측이 맞을 거라 이 추측이 맞을 거라
이 추측이 맞을 거라
-「도적」 부분
위의 작품에서 보듯이 金洙暎은 자본주의에 대한 자신의 攻擊을 강화하기 위해 또 한번 ‘여편네’를 敵으로 등장시키고 있다. ‘여편네’는 “돈이 아까워” 담을 고치지 않고 있지만 “내가 고치라고 하니까 안 고”치는 면이 강하다. 이렇게 본다면 ‘여편네’는 ‘내’게 敵이다. ‘내’가 철저하게 공격해야 할 상대인 것이다. 이처럼 ‘나’와 ‘여편네’의 싸움은 단순히 부부간의 대결이 아니라 양쪽 屬性間의 대결이다. ‘나’는 거대한 자본주의 체제로부터 무능하고 소외된 존재이고, ‘여편네’ 역시 자본주의 체제로부터 지배받고 있지만 ‘나’를 조종하고 억압하는 專門家的인 존재이다. 그러므로 ‘나’의 ‘여편네’에 대한 공격은 결국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對抗인 셈이다. ‘나’는 그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싸움의 의미는 이기고 지는 結果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過程 그 자체에도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봄밤」)라는 마음으로, 그리고 “그러나 이런 거짓말을 해도 별로/성과는 없었다 성과가 없을 것을/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여편네의/거짓말에 반대하지 않는”(「반달」) 여유를 가지고 대항하는 것이다.
이처럼 金洙暎은 인간 소외와 물질주의와 끝없는 경쟁을 낳고 있는 資本主義에 대해 ‘여편네’라는 詩的 裝置로써 만들어 놓고 싸우고 있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小市民性을 부단히 부끄러워하고 反省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힘닿는 한 資本主義와 對決하고 있는 것이다. 金洙暎의 시적 성취가 당대적인 것이면서 동시에 시대를 넘어설 수 있는 것은 끝없는 자기 혁신에 있는 것이지만, 同時代의 그 누구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못했던 資本主義의 모순을 온몸으로 인식하고 대항했다는 점에도 있는 것이다.
Ⅳ. 결 론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金洙暎의 시작품에 나타난 ‘여편네’는 단적으로 말해서 反女性主義를 나타내는 호칭이 아니고, 시적 장치의 한 對象일 뿐이다. 그러한 근거는 다음의 글에서 또한 엿볼 수 있다.
여편네를 욕하는 것은 좋으나, 여편네를 욕함으로써 자기만 잘난 체하고 생색을 내려는 것은 稚氣다. 시에서 욕을 하는 것이 정말 욕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하여간 문학의 惡의 언턱거리로 여편네를 이용한다는 것은 좀 졸렬한 것 같은 감이 없지 않다. 이불 속에서 활개를 치거나, 아낙군수노릇을 하기는 싫다.
金洙暎은 집안에만 들어앉아 있는 사람과 같이 “아낙군수노릇을 하기는 싫다”라고 말하고 있다. “惡의 언턱거리로 여편네를 이용한다는 것”은 拙劣한 행위라고 토로하고도 있다. ‘惡’의 핑계거리로 ‘여편네’를 이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졸렬한 일이고 나아가 “시에서 욕을 하는 것이 정말 욕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여편네’라고 말하는 것이 곧 자신의 아내를 卑下하는 일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金洙暎의 시에서 ‘여편네’는 反女性主義 사상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페미니스트의 관점에서 보면 이 점은 同意할 수 없을지 모른다. 남성인 金洙暎이 여성인 아내를 비하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그와 같은 呼稱을 사용했다면 潛在的인 면에서 아내를 자신보다 낮게 여기고 있는 증거라고 주장할 수 있다. 金洙暎의 의도와 상관없이 男性主義 思考觀이 이미 사회의 관습이나 윤리에 의해 몸에 배었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주장은 金洙暎이 散文(隨筆)에서 아내를 ‘여편네’라고 호칭하고 있는 점을 근거로 제시하면 더욱 일리가 있어 보인다. 나아가 여성주의 및 남성주의란 加하는 쪽에만 해당하는 개념이 아니라 받는 쪽도 함께하는 개념이기에 더욱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페미니스트의 비판도 金洙暎의 시에 나타난 ‘여편네’란 詩語가 시인의 아내를 呼稱하는 것에 한정시킬 수 없다는 前提를 인정한다면 다르게 생각될 수 있다. 오히려 새로운 次元으로 ‘여편네’를 규명할 필요가 생긴다. 다시 말해 金洙暎의 시에서 쓰인 ‘여편네’는 그의 아내를 呼稱하는 것이 아니기에 反女性主義의 문제는 성립되지 않고 새로운 觀點으로 고찰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논문에서는 金洙暎의 시작품에 등장하는 ‘여편네’를 詩人이 대항하고자 하는 상대로 삼고 살펴보았다. 그 敵은 「만용에게」, 「여편네의 방에 와서-新歸去來1」, 「생활」, 「반달」, 「도적」 등에서 여실하게 나타나고 있듯이 資本主義的 屬性을 가진 대상이다. 金洙暎은 그 적들로부터 회피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自由 精神을 위해 맞섰다. 나와 너, 정직과 타락, 고결과 속물, 정의와 불의, 자유와 억압, 휴머니즘과 자본주의의 대립구조에 속에서 자신의 主體性을 잃지 않고 당당하게 대결한 것이다.
(『어문연구』 33집,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