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이야 소 타고 다니는 사람을 보기 어렵지만, 예전에는 말처럼 소도 타고 다녔던가 보다.
조선 초기 청백리로 알려진 맹사성(孟思誠, 1360~1438)은 소를 타고 다니기를 좋아해 그가 재상인 줄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맹사성보다 여덟 살 연상이자, 두문동 72현으로 꼽히는 이행(李荇, 1352~1432)은 호가 기우자(騎牛子), 즉 소를 타는 사람이다.
당시 말이 귀해서 이행이 소를 탔던 것 같지는 않다.
그의 동갑내기 친구이자 조선 개국공신인 권근(權近, 1352~1409)은 이행의 소 타는 모습을 보고 “무릇 눈으로 만물을 볼 때 바쁘면 정밀하지 못하고 더디게 보아야 그 오묘한 데까지 다 얻을 수 있다.
말은 빠르고 소는 더딘 것이라 소를 타는 것은 곧 더디고자 함이다”라고 논했다.
권근이 20대에 쓴 글이니 이행은 이미 20대에 소를 즐겨 탔음을 알 수 있다.
이행의 자는 주도(周道)이다.
자(字)는 성년이 되면 갖게 되는 또 하나의 이름인데, 흔히 본명과 상통하게 붙여진다.
곧 이행의 이름과 자를 풀면 ‘여러 길을 두루 다니라’는 뜻이 된다.
만약 이행이 요즘 세상에 태어났다면 여행가가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울진 월송정에 이행의 시 남아있다.
이행은 이미 7세 때에 “천리마를 타고 천지간을 주유하겠다(我乘千里馬 周遊天地間)”는 포부를 밝혔다.
그의 시문을 정리한 ‘기우집(騎牛集)’을 봐도 금구(김제시 금구), 금성(나주), 부안, 진보(청송군 진보), 이천(강원도 이천), 청하(영일군 청하), 고창, 우봉(황해도 금천) 등의 지명을 제목에 넣은 시가 눈에 띈다.
그는 또한 물맛을 잘 변별할 줄 알아서 “충청도 달천의 물이 제일이고, 한강 한가운데를 흐르는 우중수(牛重水)가 둘째이며, 속리산의 삼타수(三陀水)의 맛이 셋째”라고 평하기도 했다. 세상을 많이 주유한 뒤라야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인 셈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600여년이 지났건만, 행복하게도 그를 기억하고 그를 주인으로 삼는 명소가 있다.
관동팔경 가운데 가장 남단에 위치한 울진 월송정이다. 월송정과 관련해서는 경기체가 ‘관동별곡’을 지은 안축(安軸, 1287~1348)의 시가 있고 숙종의 어제시(御製詩)까지 전해오지만, 이행이 지은 시 ‘평해 월송정’이 바다를 향한 정자의 중앙 상단에 걸려 있다.
“동해의 밝은 달이 소나무에 걸려 있네(滄溟白月半浮松)/ 소를 타고 돌아오니 흥이 더욱 깊구나(叩角歸來興轉濃)/ 시 읊다가 취하여 정자에 누웠더니(吟罷亭中仍醉倒)/ 선계의 신선들이 꿈속에서 반기네(丹丘仙侶夢相逢).”
동해의 밝은 달이 소나무에 걸려 있네
소를 타고 돌아오니 흥이 더욱 깊구나
시 읊다가 취하여 정자에 누웠더니
선계의 신선들이 꿈속에서 반기네
부귀권세 버리고 험난한 의리의 길
밀양 산외면 엄광리 재궁동에 있는 단향비.
이행을 중심으로 그의 조부, 손자의 관직과 이름을 새겼다.
그가 소를 타고 노닐던 정경을 당시 고려에 머물던 일본 승려 석수윤(釋守允)이 ‘월하기우도(月下騎牛圖)’에 담아놓았고, 그 그림을 보고 권근과 성석연(1357~1414)은 시를 짓기도 했다.
題騎牛子月下騎牛圖 (제기우자월하기우도)
기우자의 “월하기우도”에 화제하다
桑谷 成石珚 (상곡 성 석 연)
月松亭伴 월송정반
海月礎窺 해월초규
彼其幅巾壺酒 피기복건호주
叩角而逍遙者 고각이소요자
是老子那凝之那 시노자나응지나
中庵只得畵外面 중암지득화외면
先生心事有誰知 선생심사유수지
월송정 바닷가에
달이 처음 뜨는데
저쪽에 복건 쓰고 술병차고
소를 타고 소요하는 사람은
노자(老子)인가? 응지(凝之)인가?
중암은 다만 외면만 그렸지만
선생의 심사는 누가 알 수 있으랴?
이행은 17세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20세에 문과에 급제했다.
이때 시험관이 이색(李穡, 1328~1396)이어서 평생 사제 관계를 맺게 됐다.
그래서 이색이 탄핵을 받을 때에 그는 이색을 지지했고, 그 때문에 감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풍류도 있었지만 의리도 있던 사람이었다.
정치·외교적인 능력도 좋아, 제주에 건너가 성주(星主) 고신걸(高信傑)을 설득하고 그 아들을 데리고 와서 비로소 제주를 복속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는 조영규(趙英珪, ?~1395)가 정몽주를 살해하자 “만세(萬世)의 흉인(凶人)”이라고 대놓고 비판했고, 고려가 망하자 “서쪽으로 수양산을 바라보아, 주나라 곡식을 어찌 차마 먹으랴”며 두문동에 들어갔다.
그는 조선에 협력하지 않아 평해 월송정 마을로 귀양 가기도 했는데, 말년은 주로 집안 별장이 있던 황해도 강음 예천동에 칩거했다.
그와 시문을 주고받던 친구였던 권근·성석린·성석연 등은 개국공신으로 조선에 합류했지만, 그는 그들과 원수지간이 되지 않으면서 지조를 지켰다. 아들에게도 “신왕(新王) 또한 성인(聖人)이다.
너는 나와 처지가 다르니 모름지기 잘 섬겨라”고 했는데, 그 말을 좇아 아들 척()은 직제학까지 올랐다.
이행은 천수를 누려 81세까지 살다가 황해도 금천군 설봉산 아래에 묻혔다.
이행의 후손들은 남북이 분단되어 성묘를 할 수 없게 되자 경남 밀양에 이행의 조부부터 손자까지 5대를 함께 모신 단향비(壇享碑)를 마련하고 음력 10월 10일이면 제사를 지내고 있다.
밀양은 이행의 고손자인 이사필(李師弼)이 연산군 때에 어지러운 정국을 피해 처가 동네로 내려와 살면서 여주 이씨 집성촌이 된 곳이다.
[출처] 기우자(騎牛子) 이행과 상곡 성석연>조아조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