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홑처마 팔작지붕건물. 전라남도
기념물 제21호. 한말의 대학자 정만조(鄭萬朝)가 1907년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낮은 기단에 다듬은 초석을 놓고
그 위에 민흘림의 원주(圓柱)를 세우고 공포(栱包) 없이
장혀와 도리를 받쳐 서까래를 올렸다. 창문은 중앙 2칸은
세짝 井자살문이고 좌우 양칸에는 두짝문을 달았다.
측면과 뒷면의 중방은 산 언덕에서 스며드는 습기를
방지하기 위하여 벽돌로 쌓았으나 1984년 보수하면서
이를 모두 제거하였다. 이 건물은 각 지방에서 문사(文士)
200여명이 모여들어 봄·가을 2회 백일장을 개최, 한시의
명맥을 이어온 곳으로 국내 유일의 시사이기도 하다.
시사(詩社)는 서로 뜻이 통하는 선비들이 모여서 자연을
노래하고, 시를 읊고 풍유를 즐기던 곳이다. 목포시사의
모태는 1920년에 결성된 유산시사(儒山詩社)라고 할 수 있다.
유산시사는 1920년 4월 29일에 창립되었는데 초대 시사장
草亭 金星圭와 竹下 崔芳鉉, 雲河 金賢瑞 등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졌다. 유산시사의 활동은 1932년 시사건물인 유산정의
창건을 계기로 활발해 졌으며, 그 영향을 받아 1930년대
말에 목포지역에는 보인시사(輔仁詩社)라는 또 다른
문학결사가 구성되기도 하였다. 이후 각각 활동을 해 오던
유산시사와 보인시사는 1961년 통합되어 현재의
목포시사로 새롭게 발족하게 되었다.
목포시사는 중앙정계에서 목포 주위의 도서지방으로 유배당해
유배지로 가거나, 유배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중앙
문인들이 유달산에 올라 서정과 자신의 뜻을 아름다운 자연과
비견해서 회포를 풀고자 했으며, 그들과 이 지방 문인 사이에 서로
시로서 화답하는 문학적 교류가 이루어졌던 곳이라고 하겠다.
또한 목포시사가 만들어진 시기는 일제강점기였기 때문에 단순히
시인묵객들을 위한 모임이라기보다는 망국의 한과 우국충정의
심정을 토로한 유림들의 문학적 결사체로서의 성향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목포시사는 창립이후 목포백전회(木浦白戰會) 등과 같은
이름의 시회(詩會)를 개최하여 이 지방의 한문학 활동의 명맥을
계승해 왔고, 지금도 매년 봄과 가을에 정기적으로 개최되고 있다.
목포시사의 건물은 1976년 9월 30일자로 전라남도 기념물 21호로
지정되었으며, 건물의 규모는 정면 4칸, 측면 1칸반으로 지붕은
팔작지붕의 모양을 하고 있다. 목포에 세워져 있는 건물 중에서
유일하게 전통적인 건축 양식을 띄고 있다. 현재 목포시사 건물
내부에는 유산정 상량문, 유산정 중수기 등 목포시사의 연혁과
관련된 글과, 문인들의 작품 등 36개의 편액이 걸려 있다.
현재 목포시사 건물에는 '목포시사'라는 제목의 현판이
걸려있는데, 목포시사는 이 단체의 이름이고 이 건물의 이름
즉, 당호는 '儒山亭'이다. 지금 걸려있는 '목포시사'라는 제목의
현판을 뒤집어 보면 원래 걸려 있었던 '유산정'이라는 제목의
당호가 나온다. 이 유산정 글씨는 초정 김성규의 자필로 새겨져
1932년 유산정 건립 당시 만들었던 중요한 유산인데, 나중에
유산시사가 목포시사로 이름을 바꾸면서 후학들이 목포시사라는
간판을 내걸기 위해, 이 유산정 현판을 뒤집어서 거기에
목포시사라고 쓰고 현재 모습처럼 걸어놓았다.
- 최성환님의 글 중에서-
이 집에서 보이지 않는 사랑을 ,
아픈 이별을 시로 떠올릴 수 있다면
살아있는 가슴을 가진 주인공일 것이다.
다만
남기고 간
옛날의 향기만이
알뜰이도 이 가슴에
젖어있습니다.
아, 그대여
백합이 지기전에
왜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박화성 선생님의 시 중에서
목포시 외달도(外達島)
면적 0.42㎢, 인구 79명(2001), 해안선길이 4.1㎞,
최고점 62m이다. 밖다리라고도 한다. 목포 시가지에서
서쪽으로 6㎞ 정도 떨어진 해상에 자리잡고 있으며, 동쪽
으로 1㎞ 가량의 좁은 수로를 사이에 두고 달리도(達里島)와
마주본다. 1700년대에 달리도에 거주하던 주민들이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외롭게 떠 있는 섬이라 하여 외달도라고
하였다. 원래는 달동에 속하였으나 1966년 동제 변경에
따라 충무동으로 편입되었다. 해안선이 단조롭고, 북서쪽은
비교적 넓은 농경지가 있어 약간의 쌀·보리·콩·고구마
등을 산출한다. 근해는 조류가 빨라서 어로가 어려우므로
해안에서 돌김·파래·미역 등을 채취하며 김을 양식한다.
백사장이 넓게 펼쳐진 서북쪽 해안가는 1925년부터 해수
욕장으로 이용되어 왔으며 지금도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다.
목포항 여객터미널에서 1일 5∼6회 배가 운항된다.
출처:두산백과
외달도 주변전경
유럽풍 하수종말처리장 건물 전경
천년기념물 ? 무화과나무
외달도 저녁노을 해변 전경
겁없이 돌아다니는 외돌게
고요한 아침 북항에서
목포의 달밤 / 이미자 (1967)
여기는 목포항구 눈물 많은 남쪽 항구
사공은 간곳없고 홀로 잠든 저 목선아
님싣고 갈적마다 님싣고 올적마다
얼마나 울었드냐 얼마나 울었드냐
목포의 달밤
♥
님없는 무정항구 돌아서는 이별항구
물새도 잠든 바다 깜박이는 저 등대야
뱃고동 울적마다 파도소리 칠적마다
몇번을 울었드냐 몇번을 울었드냐
목포의 달밤
2016-08-27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