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세위(尹世緯)
[생졸년] 1663년현종 4)~1716년(숙종 42) / 향년 5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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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윤공 묘갈(牧使尹公墓碣銘)
도암 이재(陶菴 李縡) 찬(撰)
해평 윤씨(海平尹氏)는 오음(梧陰) 문정공(文靖公) 이래로 성대하게 명문가가 되었다. 오음의 휘는 두수(斗壽)이고 그의 증손은 호조 판서 휘 계(堦)이다. 판서의 두 아들 세기(世紀)와 세수(世綏)는 연이어 현달하여 대체로 각자의 기량으로 한 시대의 중망을 받았다.
공은 판서의 4남으로 단아하고 겸손하고 신중하였으며, 또 훌륭한 자제라고 일컬어졌는데 현달해야 마땅한 데도 막혔으니 식자들이 안타까워하였다. 공의 휘는 세위(世緯)이고 자는 문보(文甫)이다. 12세에바닷가로 판서공을 따라가서는곁에서 공문서를 보고 번번이 물러나 판결문을 지었는데 왕왕 판서공의 뜻과 합치되어 노련한 아전들이 경탄하고 감복하였다.
숙종 정묘년(丁卯年,1687년, 숙종 13)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기사년(己巳年,1689,숙종 15) 사화(士禍) 때 판서공은 강진(康津)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판서공이 병이 위독했을 때 공은 손가락의 피를 내어 부친에게 올리고, 또 목욕재계하여 하늘에 기도하며 자신이 대신 죽기를 빌었다. 그때 형제들이 주위에 없어 직접 장례를 치렀는데 급박한 상황에서도 모두 예법에 맞게 행하니 사람들이 어려운 일이라고 여겼다.
정축년(丁丑年,1697,숙종 23) 성균관 유생들이 상소를 올려 정승남구만(南九萬)이 역적을 옹호한 죄를 성토하였는데 임금이 매우 노여워하여 그 소수(疏首)를 처벌하자 권당(捲堂)하고, 공은 재임(齋任)으로서 함께 죄를 받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여러 번 근신과 예조 판서를 보내 권유하였지만, 들어가려 하지 않고 더욱 절실하고 올곧게 열 번 상소를 올리니 임금이 어쩔 수 없이 벌을 풀어주었다. 태학사 이여(李畬,1645~1718) 공이 감탄하여 말하기를 “태학에강항령(強項令)이 있구나.”라고 하였다.
이듬해 벼슬살이를 시작하여 전설사 별검, 전생서 주부, 장례원 사평과 사의, 호조와 공조의 정랑, 익위사 익위, 사복시 첨정 등을 역임하였고, 그 사이에 선혜랑을 지냈다. 외직으로는 서흥 현감(瑞興縣監), 임천 군수(林川郡守), 연안 부사(延安府使), 파주 목사(坡州牧使) 등을 역임하였다.
숙형이 과거에 급제한 이후로 공은 더 이상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말하기를 “차고 넘치는 것은 두려워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관직에 있을 때는 인자하고 너그러워 곤장을 맞아 피가 나는 죄인을 보면 측연하게 여기며 말하기를,
“옛사람의포편(蒲鞭)은 본받을 만하다.”
하였다.
혹자가 말하기를,
“완악한 아전은 위력으로 제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자,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아전과 백성은 모두 나의 백성이니 어찌 누구는 사랑하고 누구는 미워하겠는가. 지은 죄에 따라 죄를 주면 그만이다.”
하였다.
부임하는 곳마다 폐단을 없애고 곤궁함을 구휼하는 것에 힘을 쓰니, 임지를 떠나면 백성이 송덕비를 세워 공을 사모하였다. 연안(延安)을 다스릴 적에 수십 년 동안 해결하지 못한 옥사가 있었는데 공이 그 원통함을 안타까워하여 즉시 판결을 내리니 오랜 가뭄에 단비가 내렸다.
병신년(丙申年,1716,숙종 42)에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장사 지내기 전에 상을 견뎌내지 못하여 세상을 떠나니 그때는 3월 3일로 향년 54세였다. 장단(長湍)의 어룡포(魚龍浦) 신좌(辛坐)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공의 모친 무안 박씨(務安朴氏)는 통덕랑 휘길(暉吉,1589~1645)의 따님이다.
공의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부친이 양주 목사(楊州牧使) 원구(元龜,1758~1828)이다. 1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 집(潗)은 진사로 군수를 지냈고, 사위는 진사 이재(李在)이다. 공은 모친을 잘 섬겨 미리 뜻을 헤아리고 안색을 살폈다.
모친이 언짢은 기색이 있으면 용납될 곳이 없는 것처럼 불안해하며 시중을 들다가 안색이 좋아지면 물러났다. 공적인 일이 아니면 한 번도 곁을 떠난 적이 없었는데, 이따금 밖에 있다가 마음이 동요되면 말하기를 “우리 모친께서 편치 않은 데가 있으신가 보다.” 하고, 물어보면 과연 그러하였다.
형님이 종기를 앓아 목숨이 위태했는데 밤낮으로 간호하느라 머리카락이 세었다. 이러한 효성과 우애를 친척들에게도 베풀어 귀천과 노소의 구분 없이 은혜롭게 두루 보살피고 질병과 상례가 있는 집은 반드시 힘을 다해 도왔다. 기제(忌祭)에는 열흘 전에 치재(致齋)하고 제삿날에는 빈객을 들이지 않았다.
항상 집안사람들에게 경계하기를,
“근래 민가에서 선조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 너무 사치스럽지 않으면 너무 검소하니 둘 다 잘못되었다.”
하였다.
《주자가례(朱子家禮)》와《격몽요결(擊蒙要訣)》에서 취해 참작하여 일가의 제식(祭式)을 만들었으니, 공이 만년에 힘을 기울인 곳은 대부분 예가(禮家)에 있었다. 서적 가운데《심경(心經)》을 가장 좋아하여 한 번도 손에서 놓지 않았고, 또 전고(典故)에 뛰어나 끝없이 이어지는 말이 들을 만하였다. 두문불출하며 권귀의 집에는 드나들지 않았다.
소박한 옷을 입고 화려한 것은 절대 좋아하지 않았으니, 그 상례 때에 자제들이 감히 무늬가 놓인 화려한 옷을 입히지 못하였다.
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사대부는 법가(法家)의 규범을 실추시키지 않는 것이 효이다.”
하였으니, 공은 그 말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이를 만하다.
아! 훌륭하도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온순하고 온순한 공인을 / 溫溫恭人
나는《시경》에서 들었네/ 我聞周詩
공에게 그 덕이 있으니 / 公有厥德
효우의 기초라네 / 孝友之基
안에서는 조심하고 / 入則洞屬
밖에서는 화락하였네 / 出則怡怡
이렇게 백성을 다스리니 / 以是臨民
백성은두모의 자애로움이라고 하네 / 民曰杜慈
이 예서야말로 / 維此禮書
공이 실로 좋아하였네 / 公實好之
대대로 녹을 받는 집안치고 / 凡厥世祿
예를 지키는 경우는 드물다네 / 鮮克由玆
생강과 계피의 뜻을 / 薑桂之義
공이 어찌 몰랐으랴 / 豈公罔知
효를 위해 목숨을 잃었으니 / 乃死於孝
나는 공을 위해 슬퍼하네 / 我爲公悲
아, 후손들이여 / 嗟爾後昆
이 명문에서 징험할지어다 / 徵此銘辭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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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목사 윤공 묘갈:
저자가 윤세위(尹世緯, 1663~1716)를 위해 쓴 묘갈문이다.
[주02] 바닷가로 판서공을 따라가서는:
윤계(尹堦)는 1675년(숙종 1)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다.
[주03] 남구만(南九萬)이 …… 죄:
장희재(張希載)는 숙종의 후궁 희빈(禧嬪) 장씨(張氏)의 오빠이다. 인현왕후를 해치려는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어 사형당하게 되
었으나, 후환이 세자에게 미칠 것을 염려한 남구만 등 소론의 주장으로 사형을 감면하여 절도에 유배되었다.《肅宗實錄 20年 5月
20日, 閏5月 2日》
[주04] 강항령(強項令):
강직하여 굴하지 않는 현령이란 뜻으로, 후한(後漢) 때의 동선(董宣)을 가리킨 말이다. 광무제(光武帝) 때에 호양공주(湖陽公主)
의 노복이 사람을 죽였으므로, 당시 낙양 현령(洛陽縣令)으로 있던 동선이 그를 잡아서 죽였다.
그러자 공주가 이 일을 임금께 하소연한 결과, 마침내 임금이 동선을 잡아다 놓고 공주에게 사과를 하라고 하였으나 듣지 않자 억지
로 머리를 조아리게 하니, 동선이 두 팔로 땅을 힘껏 버티어 끝내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 임금이 마침내 강항령(强項令)을 내보내라
고 명했다.《後漢書 卷77 酷吏傳 董宣》
[주05] 포편(蒲鞭):
때려도 아프지 않도록 부들 가지로 만든 회초리로 아주 관대히 처벌하는 것을 의미한다.《후한서(後漢書)》권25〈유관열전(劉寬
列傳)〉에 이르기를 “관리나 백성이 과실이 있을 때는 단지 포편으로 매를 때려서 모욕만 줄 뿐이고 끝내 고통을 가하지 않았다.”
하였다.
[주06] 온순하고 …… 들었네:
《시경》〈대아(大雅) 억(抑)〉에 “온화하고 공손한 사람이여, 오직 덕을 닦는 기초로다.[溫溫恭人, 維德之基.]” 하였다.
[주07] 두모의 자애로움:
두모(杜母)는 후한(後漢) 때 어머니처럼 백성에게 선정을 베푼 두시(杜詩)를 가리킨다. 전한의 원제(元帝), 성제(成帝) 때 남양 태
수(南陽太守)였던 소신신(召信臣)이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고, 후한 광무제(光武帝) 때 남양 태수였던 두시 또한 선정을 베풀
었는데, 뒤에 백성들이 이들을 아버지 같은 소신신과 어머니 같은 두시라는 뜻에서 소부(召父), 두모(杜母)라고 칭송하였다. 《漢
書 卷89 循吏傳 召信臣》《後漢書 卷31 杜詩列傳》
[주08] 생강과 계피의 뜻:
거상(居喪) 중에 상한 몸을 보양하고 입맛을 돋우기 위해 생강과 계피 등의 양념을 넣어서 만든 음식을 먹는 것을 뜻한다.《禮記 檀
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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