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1. 3. 13. 13:52
■ 이상백(李相佰)
[생졸년] 1904년∼1966년.4월 14일.
[세계도] 경주이씨 익재공후→21世 소경공→28世 논복공(論福公)→32世 무실(茂實)공의 7대손임.
사회학자· 사학자· 체육인.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상백(想白)· 백무일재(百無一齋). 대구 출신이다.
▲이상백(李相佰)
1. 가계와 일본유학
조부는 이동진(李東珍)이고 아버지 시우(時雨)의 3남이며, 맏형은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한 상정(相定), 중형은 민족시인 상화(相和), 아우는 정통 수렵인 상오(相旿)이다. 한말의 선각자이며 큰 부호인 큰아버지 일우(一雨)가 세운 우현서루(友絃書樓)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1915년 대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이어 일본 와세다 제일고등학원(早稻田第一高等學院)을 거쳐, 1927년 와세다대학 문학부 사회철학과를 졸업하고, 이 대학에서 사회학과 동양학을 연구하였다.
2. 동양학 연구와 교수활동
그 뒤 와세다대학 동양사상연구소 연구원을 거쳐, 이 대학 재외 특별연구원으로 중국에 파견되어 동양학 연구를 더욱 깊이 하였다(1939∼1941). 일본에서 수학, 연구하는 동안에도 자주 서울을 내왕하면서 국내 학계와 긴밀히 제휴하여 진단학회의 창립에 참여하고 《진단학보》에 무게 있는 논문을 게재하기도 하였다.
1945년 경성대학(京城大學) 교수로 취임하고, 1947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회학과를 창설하고 죽을 때까지 사회학과 주임교수로 재직하면서 연구와 교육에 진력하는 한편, 1957년 한국사회학회를 창설하고 이 학회의 1·2대회장으로서 한국사회학계를 주도하였다.
3. 연구실적
그의 학문분야는 크게 국사학·사회학 및 기타로 3대분될 수가 있다. 국사 분야의 연구성과는 주로 《진단학보》와 일본의 유수 학술지를 통하여 발표되었다.
〈서얼차대(庶孽差待)의 연원에 대한 일문제〉를 시작으로 하여, 〈삼봉 인물고 三峰人物考〉·〈이조태조(李朝太祖)의 사전개혁운동(私田改革運動)과 건국 후의 실적〉·〈위화도회군고 威化島回軍考〉·〈재가금지습속(再嫁禁止習俗)의 유래에 대한 연구〉·〈우창비왕설 禑昌非王說)에 취하여〉·〈고려말이조초(高麗末李朝初)에 있어서의 이성계 일파(李成桂一派)의 전제 개혁운동(田制改革運動)과 그 실적〉 등이 그 주요한 것들이다.
이밖에도 진단 학회편 《한국사―근대전기편―》과 《한국사―근대후기편―》을 집필하였다. 이와 같이 그의 국사 연구는 그 시대·내용 등에 있어서 꽤 다양하나, 그 가운데에서도 집중적으로 연구한 것은 여말선초의 사회사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 그는 무엇보다도 우리나라 사회사 연구의 선구자로 평가되고 있다.
사회학 분야의 활동으로는 한국사회학의 초창기에 국내 최초로 사회학과를 설립하고, 대학 강의와 교양지 및 학술지를 통하여 사회학의 보급에 주력한 것을 특기할 수 있다. 그는 대학에서 사회 학사· 한국 사회론 등을 강의하는 한편, 〈질서와 진보〉·〈중간계급의 성격〉 등 많은 논문을 발표하였다.
또한 외국 사회학의 소개에도 힘써, 이를테면 미헬스(Michels, R.)의 《정치사회학》, 루섹 와런의 《사회학개론》 등의 역서를 내기도 하였다. 그의 사회학은 주로 구미의 고전 이론에 바탕을 두되 그것을 한국사회의 이해에 원용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사회 조사에도 관심을 기울여 농촌·사회계층 등에 관한 여러 가지의 조사연구를 하였으며, 서해의 섬들에 관한 조사보고서인 《서해도서(西海島嶼)》를 발간하기도 하였다.
만년에 이르러 그는 국학·동양학의 연구를 위하여 서울대학교에 동아문화연구소를 설립, 그 초대 소장으로서 연구계획의 수립, 학술세미나의 개최 등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그는 고고미술에도 조예가 깊어 높은 식견과 감식안을 지녀 서울대학교 박물관장, 국보·고적·명승·천연기념물 보존위원, 국립박물관 심의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그 방면에도 많은 공헌을 하였다.
이밖에도 훈민정음을 해설한 《한글의 기원》을 저술하였고, 많은 논설·국내외 기행문·수필 등을 남겼다. 그는 또한 희귀한 고활자본을 비롯한 방대한 양의 서적을 수집한 장서가로도 유명한 바, 생전에 그 모두를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기증, 상백 문고(想白文庫)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4. 체육활동
그의 활동과 업적의 한 면이 학자·교수였다면 다른 한 면은 체육인이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체육계에서의 그의 위치는 너무나도 뚜렷한 것이었다. 그는 일찍이 유명한 농구선수로 활약한 바 있으며, 그 뒤에는 체육 이론가로서 그리고 체육행정가 또는 체육계의 지도자로서 눈부신 활약을 하였다.
그는 한국 체육회장(1964∼1966)·한국올림픽위원회 위원장(1964∼1966)으로서 한국 체육의 발전과 그 국제적 지위의 향상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일찍이 로스앤젤레스 올림픽(1932)을 비롯, 베를린(1936)·런던(1948)·헬싱키(1952)·멜버른(1956)·로마(1960)·동경(1964) 등 많은 올림픽대회에 임원, 선수단장 또는 대표로서 참석하여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마침내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으로 피선되었다.
죽은 뒤 그를 기념하기 위하여 해마다 한일 학생 농구 교환경기가 열리고 있으며, 아시안게임 최우수선수에게는 이상백배(杯)가 수여되고 있다. 이밖에도 고등고시위원·학술원 회원·교수자격심사위원·국사편찬위원 및 3·1 문화상 심의위원 등을 역임하는 등 광범한 활동을 하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일찍부터 5대양 6대주를 수없이 내왕한 여행가로서 특히 해외 풍물에 대한 안목은 가위 독보적인 것이었다.
그의 장례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한국사회학회·진단학회·대한체육회·대한올림픽위원회 등 5개 단체가 주관한 이상백 박사 연합장(李相佰博士聯合葬)으로 엄수되어 경상북도 달성군 화원면의 가족묘역에 안장되었으며, 1주기에 이희승(李熙昇)이 짓고 이기우(李基雨)가 쓴 묘비가 세워졌다.
1963년 건국문화훈장 등 생전에 여러가지 훈장과 상을 받은 바 있으며, 죽은 뒤에는 모란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스포츠와 李相佰博士(金正淵, 李相佰博士回甲紀念論叢, 乙酉文化社, 1964)
◇李相佰論(高永復, 韓國敎育의 先覺者, 새한신문사, 1973)
◇잊을 수 없는 사람―나의 恩師 想白先生―(金彩潤, 新亞日報, 1975. 5. 12.∼16.)
◇李相佰과 崔文煥(金彩潤, 이 땅의 이 사람들 2, 뿌리깊은나무編)
◇李相佰先生과 韓國社會史硏究(愼鏞廈, 東亞文化 14,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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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백(사학자)
이상백(李相佰, 1904년 - 1966년 4월 14일)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사학자, 체육인으로, 호는 상백(想白), 본관은 경주, 경상북도 대구군 (현재의 대구광역시) 출신이다.
그는 1915년 대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으며, 1927년에 와세다 대학 문학부 사회철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1930년에 일본농구협회를 창설했으며, 1931년에 일본체육회 상무이사를, 1935년에 일본체육회 전무이사를 맡았다.
1932년에는 로스앤젤레스 하계 올림픽 일본 선수단 임원으로 참가했으며, 1936년에는 베를린 하계 올림픽 일본 선수단 총무로 참가했다. 1939년에는 와세다 대학 재외특별연구원으로 중국에 파견되어 동양학을 연구했으며, 1944년에는 여운형이 결성한 지하독립운동 단체인 건국동맹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광복 직후에도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에 활동하였다. 1946년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가 되었다.
이후 1955년 서울대학교로부터 문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1946년에는 조선체육회 이사장에 취임했으며, 1951년에는 대한체육회 부회장에 취임했다.
이후 1964년에 대한 올림픽 위원회 위원장과 국제 올림픽 위원회 종신위원(우리나라 초대 IOC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63년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문화훈장 대통령장을 수여받았다. 그가 죽은 이후 1966년 8월에 일본 정부로부터 훈삼등 욱일중수장을 추서받았으며, 1970년 12월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받았다.
주요 저서로 《조선 문화사 연구 논고》, 《이조 건국의 연구》. 《한글의 기원(起源)》, 《한국사 : 근세전기편. 근세후기편》, 《농구지도의 이론과 실제》. 《서해도서(西海島嶼)》등이 있고, 역서에 《정치사회학(政治社會學)》. 《사회학 개론(社會學槪論)》등이 있다. 현재 그의 이름을 딴 이상백배 한-일 대학선발농구대회가 개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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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백(李相佰, 1904~1966)
[요약]
사학자·사회학자·체육인. 서울대학교 교수, 한국사회학회장를 역임했고, 한국 사회학의 개척자로 활약, 조선왕조사 연구에 업적을 남겼다.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이었고, 일본 체육발전에도 공헌했다.
◇본관 : 경주(慶州)
◇호 : 상백(想白)· 백무일재(百無一齋).
◇활동분야 : 사학·사회학·체육
◇출생지 : 대구
◇주요수상 : 건국문화훈장 대통령장(1963)
◇주요저서 : 《조선문화사연구논고》《이조 건국의 연구》
[본문]
본관 경주(慶州). 호 상백(想白). 대구(大邱) 출생. 대구고보를 거쳐 일본 와세다대학교 부속 제일고등학원(第一高等學院)을 졸업하고 l924년 와세다대학교 사회철학과에 입학, 같은 해 일본의 대학농구연맹이 결성되자 동대학 농구부 주장으로 미국에 갔다.
1927년부터 와세다대학 대학원에서 3년간 동양학을 연구하였다.
1930년 일본농구협회 임원을 거쳐 이듬해 일본체육회 상무이사에 선임되었는데, 1932년 제9회 올림픽대회 일본 대표단 임원으로 로스앤젤레스에 다녀온 후, 1935년 일본체육회 전무이사가 되었다. 이듬해 제11회 올림픽경기대회 준비위원으로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스웨덴· 폴란드 등을 방문하고, 1939년 와세다대학교 재외(在外)특별연구원으로 중국에 가서 2년 6개월간 동양학을 연구하였다.
8·15광복 후 1946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가 된 후, 사회학과 주임, 부속박물관장, 동아문화연구소장을 역임하고, 1955년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밖에 대한민국학술원 회원·국사편찬위원·한국사회학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한국 사회학의 개척자로 활약, 조선왕조사(朝鮮王朝史) 연구에도 업적을 남겼다.
체육인으로서는 8·15광복 후 조선체육동지회를 창설, 위원장이 되고, 1946년 조선체육회 이사장을 거쳐 1951년 대한체육회부회장에 취임하였다. 제15∼18회 올림픽대회에서는 한국대표단 임원·단장 등으로 활약하고, 1964년 대한올림픽위원회(KOC) 위원장, 종신직인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에 선출되었다.
1963년 건국문화훈장 대통령장을 받았으며, 서울대학과 대한체육회의 공동장(共同葬)으로 고향에 안장되었다.
일본 체육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로 일본정부로부터도 훈3등 욱일중수장(勳三等旭日中綏章)이 추서되었다.
저서에 《조선문화사연구논고》 《이조 건국의 연구》 《한글의 기원(起源)》 《한국사:근세전기편·근세후기편》 《농구지도의 이론과 실제》 《서해도서(西海島嶼)》 등이 있고, 역서에 《정치사회학(政治社會學)》 《사회학개론(社會學槪論)》 등이 있다.
[출처]
이상백 [李相佰 ] | 네이버 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