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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ling Story(2010/8/22-24)
혼자 몇 일을 배에서 보내기로 마음 먹고 대난지도를 향했다.
열흘 전 겨우 오리온을 탄도에서 대난지도로 옮겨 정박시켜 놓은 후 처음으로 찾아 가는 길이었다. 오늘 이렇듯 혼자 호젓이 떠나는 대난지도 행은 나의 Sailing Story에 있어서 풋내기 시절 1막을 마치고 2막을 시작하는 출발점이라 할 수 있겠다. 그것은 우선 나의 마음의 변화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늘 누군가와 함께 해야만 했던 타성에서 벗어나 홀로 서기를 하겠다는 새로운 의지를 갖고 처음으로 바다를 찾는 길이기 때문이다.
혼자의 길을 택해야 한다는 필연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 나는 항해를 인생이고자 해서 놀이 보다는 삶을 택하기로 했다. 바다, 그냥 그곳에 머물며 자연의 일원이 되고자 한다.
도비도에 도착한 후 우선은 삼길포에 있는 해양경찰 대산파출소를 찾았다. 오리온이 대난지도에 머물것을 신고도 해야 했지만 요트를 이해 해 주고 신세를 끼칠 때 마다 반갑게 맞이 해 주는 파출소 직원들에 대한 인사와 이번에 출간한 'Sailing Story'를 몇권 전해 주고 싶은 생각 때문이었다.
요트 저변화에 있어서 그에 관련된 사람들의 요트 산업에 대한 선진된 인식은 매우 중요하다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바다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해양 경찰관들에게 새로운 세상인 요트를 소개하는 것은 이제 겨우 시작하는 우리의 요트 사회, 그 세련된 문화 창달을 위해 특히 중요하다 생각되어 나는 그들을 찾고 또한 요트 세상에 함께 하기를 늘 권하곤 했다.
대난지도에 도착한 것은 1시 반이나 되어서였다. YG선장의 등대집에서 식사를 하고 지난번 인사를 했던 포구 한기슭에 자리잡은 GJ씨집에 들렀지만 아무도 없었다. K선장을 만나 인사 한 후 DH씨를 찾아 함께 쎄일링을 하기로 했다. 그는 사십대 초반으로 섬이 좋아 부인과 함게 이곳에서 섬 생활을 시작한지 일년이 체 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육지에서 까페를 경영했던 그리고 음악을 좋아하는 그러나 건강이 여의치 않은 선한 사람이었다. 그는 작년에 한번 함께 요트를 탄 후 이번 기회가 두 번째인 그러나 내심 요트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고, 나 역시 그에게 요트를 가르쳐 함께 했으면 하는 사람이었다.
고무 보트를 타고 멀리 있는 오리온까지 노를 저어가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열흘만에 찾은 오리온은 별 탈 없이 건재하며 주인인 나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간단히 준비를 마친 후 우리는 넓은 바다를 향해 나아 갔다. 바람은 약한듯 했지만 편안한 항해를 즐기기엔 안성 맞춤이기는 했다. 풍도를 향해 해가 질 서쪽으로 방향을 잡고 정처없이 가는 만큼 가고 싶었다.
배를 타고 바다로 나아가면 늘 멀리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피안의 세계를 향하는 그런 마음, 그것은 본능과도 같은 마음 한 구석에 자리한 섭리적 속성인듯 싶다. 왔다가 되돌아 가야만 하는 필연 속의 우리네의 길....
네 시가 지나면서 태양은 이미 서쪽으로 기우러져 힘을 잃으며 하늘엔 분홍빛 노을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우리는 석양이 지는 수평선을 향해 하얀 바닷물을 가르며 바람따라 나아갔다.
풍도를 지나칠 무렵 전화가 왔다. JH 선생이었다. Paradise의 P 선장과 함께 대난지도를 향해 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시간에 오다니...., 어쨋든 반가웠다. 아쉽지만 다시 돌아가 그들을 맞이 하기로 했다. 난지 해수욕장을 끼고 돌아 소난지도와 대난지도 사이의 해협을 따라 부두를 향해 나아갔다. 이미 패러다이스는 한 앵커에 전박을 하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 대난지도에서 요트 일행을 만나기는 처음이었다. 늘 혼자 외롭게 대난지도 앞바다에 떠돌던 오리온이 친구를 만난 셈이었다.
패러다이스의 옆에 무어링을 하고 반갑게 JH선생의 손을 잡았다.
JH선생은 본래 수학선생님이지만 천문학에 관심이 많은 매우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다. 그는 탄도 요트사회의 감초와도 같은 특히 요트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정보를 주며 도움을 아끼지 않는 매우 요트를 아끼는 사람이었다. 이번 대난지도의 왕림도 패러다이스의 크루를 자청해 P선장과 함께 이곳을 찾은 것이었다. 물론 이번 방문은 난지도에서 홀로 고전 분투하는 나에 대한 그의 배려가 컸으리라.
패러다이스는 수령이 십년도 되지않은 베네또 33이라는 새 배였다. 우리의 오리온에 비하면 고급저택이라 할 만큼 선실에서부터 모든 장치들이 고급스러운 멋진 배였다. P 선장은 이 배를 지난 5월에 일본에서 구입해 직접 탄도로 끌고 왔다고 했다. 요트에 입문하고 불과 몇 번의 시승을 한 후 요트를 샀다는 그는 역시 도전적인 진정 바다를 좋아 할 그런 사람인듯 했다.
밝은 달이 구름사이로 떠오르며 여름밤의 정취 속에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 꽃을 피웠다. 기실 P 선장은 내일 새벽 5시 이전에 다시 탄도를 향해 돌아 갈 예정이었는데 우리의 이야기는 이미 새벽 2시를 넘기고 말았다.
패러다이스가 긴 꼬리를 남기고 새벽 바다를 따라 멀리 사라져 갔다. 서쪽에선 서서히 짙은 구름이 몰려 오며 온 하늘을 덮어 가고 있었다. 9시가 지나면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점점 빗줄기가 거세졌다. 먹구름을 뚫고 하얀 섬광이 바다 한가운데로 떨어지며 벼락을 때리고는 온 천지를 울리며 천둥을 친다.
몇 시간에 걸쳐 대난지도 앞 바다는 장대비와 천둥 벼락으로 마치 천지 개벽을 예고하듯 엄청난 향연을 벌렸다. 우비를 쓰고 이따금 칵핏에 나아가 이를 구경하다 벼락 소리에 주눅이 들어 다시 선실로 돌아와 가만히 누워 있곤 했다.
올 여름은 특히 천둥 벼락이 많은 것 같다. 비가 내리는 양상도 예년과 달리 동분 서주하며 전국 곳곳을 찾아다니듯 예고 없이 쏟아 붓는다. 진정 청소의 그때가 가까워 온 것인지....
오후가 되면서 서쪽 하늘이 게이고, 2시가 지나면서 하늘은 다시 말짱 해 졌다. DH씨를 불러 쎄일링을 청했다. 이왕이면 함께 할 난지도 사람들을 모아 오라 청했다.
결국 두 사람이 가세 해 우리는 네 사람이 되어 쎄일링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난지도 사람들, 이곳 대난지도에 발을 들여 놓으면서 나는 늘 난지도 사람들을 요트 세계에 끌어 드리고자 했다. 그것은 앞으로 도래 할 난지도의 요트 사회에 그들이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요트란 우리에게 새로운 것이어서 난지도인의 거취에 따라 난지도에 어떠한 요트 문화가 정착하게 될 것인가에 대한 이정표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만일 그들이 요트 사회에 함께 동참하지 못하고 결국 요트 사회의 아웃 사이더의 입장에 있게 된다면, 난지도에서도 요트 사회는 주객이 전도된, 그래서 상호 배타적인 불협화음의 문화가 만들어 질 수 밖에 없을 것이었다. 그러기에 난지도에서 있을 일들, 그 모든 문화의 주체는 난지도인이어야 한다는 것이 평소에 나의 주장이었다.
어떤 일에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그 일을 수행 할 수 있는 능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난지도의 새로운 요트 사회를 위해 난지도인이 요트에 대한 사전 지식 및 이를 선도 할 능력을 갖어야 하는데 그 첫번째가 요트에 대한 체험이다. 그 체험을 위해 오늘 나와 함께 세 사람이 동행 하게 된 것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하듯 먼 발치에서 바라본 요트의 세상과 막상 선상에서 함께 요트를 즐기며 느끼는 요트의 세상은 역시 그들에게도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결국 그들은 한번의 체험으로도 요트에 대한 사회적 가능성을 느끼고, 미래의 무한한 가치에 대해 동참 할 수 있는 고귀한 기회를 얻은 것 같았다.
역시 요트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배를 다루는 기술이 아니었다. 그들 난지도인들은 요트는 처음이지만 늘 바다와 함께 한 덕에 바다를 잘 알고 있었다. 요트를 어떻게 운영하는지는 모르지만 바다에서 요트를 어떻게 타야 하는 것인지를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요트란 몇번 타고나면 능히 바다로 나아 갈 수 있는 그냥 안전하고 배우기 쉬운 편리한 배 일 뿐인 것이었다.
우리 민족과 바다란 매우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국토의 삼면이 바다여서 늘 가깝게 접근 해 온 터였고, 깊고 넓은 동해 바다가 있는가 하면, 수 많은 섬들로 이루어진 남해의 다도해가 있다. 또한 중국을 향한 서해 바다, 서해 바다는 우리의 오천년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했을, 수 없이 많은 사연을 지닌 바다 임에 틀림이 없을게다. 그러나 그 한 많은 역사는 긴 세월의 탁한 썰물에 휩쓸려 대부분 지워지고 또 얼룩져 지금 우리에겐 망각의 역사로 남아 있는 듯 하다.
서해 바다는 참으로 오묘한 바다다. 세계에서도 유명한 갯벌이 곳곳에 산재 해 있는가 하면 간만의 차이가 10미터나 될 정도로 밀물과 썰물이 심한 바다이기도 하다. 바다에 면한 해안선도 매우 굴곡이 심하고 또한 크고 작은 섬들이 수 없이 산재 해 있다.
그러므로 서해 바다에서 배를 탄다는 것 특히 연안에서 배를 타기 위해서는 서해 바다를 잘 알아야만 한다. 밀물 썰물의 때를 알아야 하고 조류의 흐름을 알아야 하며 뱃길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만일 어설피 요트를 타고 서해 바다를 나아가면 갯벌에 배가 얹히기 일수이고 자칫 어망에 걸려 낭패를 보게 된다. 그러므로 서해 바다를 이해하고 그에 맞추어 배를 부리는 일은 결코 어느 바다에서 보다 쉽지 않다 할 수 있다.
서해 바다에서 벌어졌을 일들, 불과 이년 동안 내게 벌어진 숱한 사연들과 마찬가지로 서해 바다에서는 오천 년 역사를 통해 수 없이 많은 사건들이 벌어졌을 게다. 특히 한, 수, 당, 원, 명, 청으로 이어진 중국 한족과 벌어졌을 수 많은 해전, 이는 이상할 정도로 우리의 역사 속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만일 당시 있었던 서해 해전에서 중국이 우리에게 당했을 참상은 미루어 짐작이 된다. 그것은 우리의 서해 바다의 특성 상 서해 바다에서 우리 민족만큼 배를 잘 다루는 민족은 없었을 터이기 때문이다. 이는 임진 왜란 때 일본이 서해를 피 할 수 밖에 없었고 근세 역사의 프랑스와 미국을 상대로 한 강화도 앞바다에서 치루어진 해전을 보아도 짐작 할 수 있다.
대충 저녁을 배에서 떼우고 선상의 밤을 맞이 했다. 다시 하늘은 구름이 짖게 드리고 비가 내릴 채비를 하고 있었다. 하늘엔 달도 별도 보이지 않고 오직 희뿌연 구름만 가득하다. 검게 흐르는 바닷물이 난지도 앞바다에 만조를 이루고 마을에서 비치는 불빛이 너울을 따라 반짝 거리고 있었다. 이런 날은 낭만 보다는 그냥 을시년 스러운 분위기로 일찌감치 잠을 청하는 것이 좋겠다 싶었다.
깊은 잠을 깨고 눈을 떠보니 이미 시간은 아침 8시에 다가섰다. 고단했던 탓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늦잠을 잔 것이다. 하늘은 구름이 짙어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 질 듯 싶었다. 역시 후두둑 빗소리가 나더니 주변에서 천둥 번개가 치기 시작한다.
바다는 이미 썰물이 되어 갯벌을 드러내고 한산한 마을은 비에 젖어 고요하다. 우비를 쓰고 갯벌에서 바지락 조개를 줍는 사람도 있었다. 궁금도 해서 민박을 운영하는 K선장에게 전화를 했다. 손님 중에 목사님 가족이 혹 날씨가 개이면 요트 체험을 하고 싶은데 가능하겠냐고 물었다. 나로선 반가운 제의이기에 날씨보아 전화를 드리겠다고 화답을 했다. 비는 점심이 지나도록 계속 내리고 틈틈히 천둥 번개를 치며 그칠 줄 몰랐다. 할 일도 없곤 해서 요트의 구석 구석을 정리하며 시간을 보냈다. 두 시가 지나면서 구름이 간혹 살짝 걷히기도 하고 천둥 번개도 자리를 옮기면서 멀어져 가고 있었다.
목사님 가족에게 전화를 했다. 비가 멎을 것 같기도 한데 우선 우비를 쓴 체 배를 탈 수 있겠냐고 제안을 했다. 그들은 반가운듯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기에 배를 선창가로 몰고 갈테니 그곳에서 만나기로 했다. 중년의 목사님 내외와 아들과 딸 네식구였다. 그들은 난생 처음 타보는 요트라 하며 감회가 깊은듯 감사의 표시를 내가 무안 할 정도로 극진하게 했다.
우리에게 요트란 그러했다. 과거에 가난했던 시절에서 불과 반세기만에 선진국의 문턱에 들어선 우리에게 요트란 별안간 들이 닥친 피안의 세계와도 같았다. 어렸을적 그냥 상상으로만 생각되던 화려한 요트가 나이들자 우리에게 가깝게 다가서선 우리 모두를 놀라게 하는 사건이 된 것이다. 그들 목사님 내외도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들의 느낌은 조금 달랐다. 그들에겐 요트가 어른들처럼 환상의 대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냥 다가서기가 조금은 멀었던 그러나 그들도 언젠가 즐길 수 있을 것이란 부러움의 대상 일 뿐이었다.
비를 맞으며 즐기는 요트는 역시 또 다른 별미가 있었다. 가급적 편안한 쎄일링을 위해 제노아만 폈다. 육도와 당진 화력 발전소 앞을 오가며 태킹과 자이빙을 번갈아 구사하여 그들에게 요트의 맛을 흠씬 보여 주었다. 그들은 기쁨의 감회에 들 떠 있었다. 특히 목사 사모님은 적성에 맞는 듯 좋아하며 상기된 체 '모처럼의 가족 모임에 이렇게 귀한 기회를 갖게 되어 너무나 기쁘다.'고 내게 거듭 감사를 표시 했다.
목사님 가족은 세시 배를 타고 돌아 갔다. 나는 오리온을 앵커에 무어링 한 후 정리를 마치고 고무 보트를 노를 저어 힘겹게 겨우 욕지로 나왔다. 다섯시 반 배를 타고 집으로 돌아 가야 했다. 배가 고팠다. 등대집에 들러 식사를 하며 그 곳의 여인네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요트에 관심을 갖고 기회가 나면 남편에게 함께 요트 체험을 하자 조르라고 풋내기 선장인 나는 그들을 다시 꼬득였다. -풋내기 선장의 이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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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글 잘 보았습니다
다시 난지도로 돌아 가셨군요 항상 안전하게 즐거운 세일링 하세요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담에 세일링으로 멀리 같이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