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스코시즈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은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은 ‘남자 사람’ 예수를 등장시킨 당대 최고의 문제작이었습니다. 1988년 제작되어 아카데미 감독상까지 받았지만 국내에서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등의 격렬한 반대로 2002년에야 정식으로 개봉했지요. 반면 그의 최근작 〈사일런스〉(2016)는 일본의 초기 천주교 박해를 통해 신앙의 본질을 다루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마틴 스코시즈에게 지난 28년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그가 혹시 회심한 걸까요? 스코시즈는 〈사일런스〉가 자신에게 순례와도 같은 작품이라고 말했답니다. 속죄와 구원의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숙제와 같다고도 했지요. 일본의 대표적인 기독교 작가 엔도 슈사쿠의 1966년작 소설 《침묵》이 원작입니다.
침묵 끝에 들려온 음성, “배교하라!”
영화 〈사일런스〉는 예수회 소속 포르투갈 주교인 페레이라 신부(리암 니슨)의 편지로 시작합니다. 일본에서 기독교 박해가 한창이던 1633년에 쓴 것으로, 신부들과 일본 그리스도인들의 처형 소식이 담긴 편지였어요. 한편 다른 경로로 들어온 최근 소식은 바로 그 페레이라가 배교하고 일본인이 되었다고 전합니다. 페레이라의 제자였던 로드리게스(앤드류 가필드)와 가르페(아담 드라이버)는 그를 직접 만나봐야겠다며 일본으로 떠납니다. 〈사일런스〉는 이들이 한때 ‘기리시탄’(기독교인)이었던 기치지로(쿠보즈카 요스케)의 안내를 받아 일본 땅에 도착해서 겪는 박해와 신앙의 갈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두 신부는 묻습니다. 당신의 자녀들이 사흘 밤낮 매달려 파도에 깎이는 고통을 당할 때, 유황온천수에 살갗을 데일 때, 거꾸로 매달려 자신의 핏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당신의 이름을 부를 때, 그분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걸까요? 세월호 참사 3주기를 맞는 이 땅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아직도 생생하게 곱씹고 있는 질문이기도 하지요.
고통의 현장에서 침묵하신 하나님에 대한 집요한 질문 끝에 영화는 ‘신은 침묵하지 않았다’고 답합니다. 함께 고통당하고 있었을 뿐. “어서 해라. 밟아도 괜찮다. 네 고통을 내가 잘 안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졌다.” 긴 침묵을 깨고 배교 직전 들려온 음성은 모든 배교(背敎)가 다 배신(背神)은 아니라는 위로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쉽게 ‘버려질’ 수 있는 분이 아니라는, 깊이의 선언이기도 하지요.
이처럼 신정론을 둘러싼 영화의 메시지는 비교적 명료합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인물들의 태도와 심경의 변화는 단순하지도 명료하지도 않더군요. 영화 〈사일런스〉의 가장 큰 미덕은 바로 이 점, 즉 인간의 복잡함과 믿음의 역설에 대한 관찰이었습니다. 마침 최근 한 인터뷰에서 스코시즈가 이렇게 말했군요. “신의 용서를 받아들이기 전에 자신이 먼저 스스로를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젊은 날 스코시즈는 신부가 되기 위해 예비신학교에 다닌 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에서 가룟 유다까지
주정뱅이에 횡설수설하는 기치지로를 처음 보았을 때, 로드리게스는 그리스도를 떠올립니다. 예수님은 그보다 더한 자도 믿으셨다고요. 그리고 기치지로가 유다처럼 은 삼백 냥에 자신을 팔던 때는 냇가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그리스도 이미지와 겹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기치지로는 이후 로드리게스를 지겹도록 따라다니며 고해와 배교를 반복하는데, 흥미롭게도 로드리게스 자신의 배교 후에도 그의 곁을 지키는 것은 바로 이 기치지로입니다.
그 사이 자신을 그리스도와 동일시했던 로드리게스는 옥중에서 선교하는 바울이 되었다가, 주를 부인하는 베드로도 되었다가(그가 배교하는 순간 닭울음소리가 들려요), 마침내 가룟 유다가 됩니다. 그에게 배교는 한 번의 죽음으로 끝나는 순교보다 어쩌면 더 고통스러운 형벌이자, 반복되는 ‘영혼의 죽음’이었겠지요. 헌신된 선교사로서 그것은 신 앞에서 자신의 무용함을 인정하는 행위였으며, 자신이 그렇게도 경멸하던 기치지로나 페레이라와 똑같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순교자의 자부심과 명예마저 허락되지 않는, 죽음 아닌 죽음 말입니다.
더욱이 진리를 빌미로 쳐들어온 제국주의 열강의 먹잇감이 되지 않겠다는 일본의 의지와 ‘일본식으로’ 왜곡하여 수용되는 신 이미지에 대해서도 그는 어떤 반박도 내놓을 수 없었습니다. 복음에 힘이 없지 않음을 알지만, 그것이 다른 방식으로 주장되고 소비될 때 좌절하고 냉소할 수밖에 없는 것은 오늘날의 한국기독교와 지난 세기 교회사를 보아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일 겁니다. 맞아요. 우리도 그랬고, 실은 지금도 그러고 있지요.
죽어야 살고, 약함이 강함 되는 부활의 역설
순교조차 할 수 없었던 나약한 인간에 대한 연민일까요. 스코시즈의 기치지로는 미워할 수 없는 존재였어요. 기치지로는 늘 “전 약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 그가 마지막에는 목걸이에 성화를 숨겼다가 들켜 처형되지요. 반면, 어떤 신자의 표식도 없이 배교자 오카다 산에몬으로 죽은 로드리게스는 순교자가 남긴 작은 십자가를 손에 쥔 채 화장됩니다. 원작소설이 침묵했던 두 사람의 최후를 스코시즈가 이렇게 비밀처럼 전해왔어요. ‘그리스도’(구원자)이고 싶었던 신부는 그렇게 배신자 ‘가룟 유다’가 되었고, 배신자 ‘가룟 유다’는 단번에 자살하는 대신 매일 매일 ‘죽으며’ 주의 곁에 머물렀답니다. 그들은 정말로 믿음이 약했던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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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사일런스>의 한 장면 |
결국 스코시즈에게 믿음의 ‘약함’과 ‘강함’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무엇입니다. 역설적으로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에서 가룟 유다는 신념을 위해 스승을 배신할 만큼 ‘강하기 때문에’ 선택된, 구속사의 ‘조력자’이자 파트너로 등장했죠.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에서 스코시즈는 유다의 배신이 결국은 하나님의 구속 계획 안에 있었던 것 아니냐고, 그러니 배교자라는 낙인은 너무한 것 아니냐고 항변합니다. 마치 기치지로의 약함을 변호했던 것처럼요.
세월호 3주기와 같은 날짜이면서 종교개혁 500주년에 맞는 2017년 부활절은 ‘약함’과 ‘강함’의 역설과 로드리게스의 ‘죽음 아닌 죽음’이 도처에 흥하는 그리스도의 계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단 한 번의 고민도 없이 당연한 것으로 믿었던 명제와 전제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안전하게 유지해주는 구조와 집단, 심지어 자부심을 유발하는 연륜과 모든 자랑들까지도 다 내려놓고 처음부터 다시 질문하고 따지는 일일지 모릅니다. 그런다고 해서 당신 자신이 부정되는 수준의 나약하고 속 좁은 하나님은 아니라고, 최소 30년간 이 문제로 씨름해 온 스코시즈가 알려주네요.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는, 한국교회는 그래야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것만 같아요.
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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