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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16 - 스튜어트 왕가로 영국왕이 된 제임스 1세와 처형된 찰스 1세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과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의 아들인 스코틀랜드 왕국의 제임스 6세
는 1603년에 엘리자베스 1세가 죽자 뒤이어 잉글랜드 왕국(+아일랜드 왕국) 의
국왕에 올라 제임스 1세를 칭했는데... 스스로를 "그레이트 브리튼의 국왕" 으로 칭했습니다.
메리는 스코틀랜드왕국 제임스 5세와 프랑스 명문 가톨릭 귀족 마리 드 기즈 공녀의 딸로 태어났으나
아버지는 불과 6일 만에 숨을 거둔지라..... 1543년 9개월의 아기였던 메리 스튜어트는 대관식을
치르고 스코틀랜드 여왕이 되었으며 아란 백작 제임스 해밀턴 과 메리의 모후 마리가 섭정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제임스 5세는 제임스 4세와 잉글랜드의 왕 헨리 8세의 누나인 마거릿 튜더의 아들
인데, 부친 제임스 4세가 1513년 9월 9일 처남인 잉글랜드 왕국 헨리 8세와 매형인 스코틀랜드
왕국 제임스 4세가 맞붙은 플로든전투에서 전사하니 제임스 5세는 1살 5개월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어머니 마거릿 튜더가 갑자기 앵거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와 재혼하면서 친프랑스파
세력의 목소리가 커지니 1515년 제임스 3세의 조카인 올버니 공작 존이 프랑스군을
이끌고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실권을 장악하니 스코틀랜드와 프랑스 간에 동맹이 성립됩니다.
마거릿은 시댁 삼촌인 올버니 공작이 프랑스에 간 틈을 노려 아란 백작등, 친잉글랜드파 귀족들과 함께
1524년에 쿠테타를 일으켜 올버니 정권을 종식시키고 제임스 5세는 12살 나이에 친정을 선포했는데
30세인 1542년 11월 솔웨이 모스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에게 패해 병석에 누웠는데 왕비가 여아 메리
를 출산하자 “우리 왕조는 여아로 시작해서 여아로 인해 끝나는구나” 하고 장탄식한 후 병으로 죽습니다.
어린 메리는 잉글랜드왕 헨리 8세의 협박으로 그의 아들인 웨일스공 에드워드와 약혼했지만
헨리 8세가 스코틀랜드에 대한 합병 야욕을 드러내자 약혼은 깨졌고 1547년 9월 10일,
스코틀랜드군은 잉글랜드군과 전투에서 대패하자 딸 메리를 염려한 모후
마리 드 기즈는 1548년 메리를 프랑스 왕 앙리 2세의 아들 도팽 프랑수아와 약혼시킵니다.
그해 메리는 스코틀랜드를 떠나 프랑스로 건너갔으며 모후가 섭정으로서 스코틀랜드 왕위를
지켰는데, 메리는 외할머니에게 의지했으며 10년후 1558년 프랑스의 도팽 프랑수아의
결혼식을 치르고 다음해 프랑수아가 왕이되자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으나 남편이 1년만에
죽자 시어머니 카트린 드 메디시스와 갈등이 심해져 스코틀랜드 여왕으로 살고자 귀국합니다.
귀국 후에 메리 여왕은 헨리 스튜어트와 정략적으로 결혼했으니 애정은 없었다고 여겨
지는데 제임스 1세를 낳기 전 부터 결혼 생활은 파국으로 치달았으니 헨리
스튜어트는 오만한데다가 술만 먹으면 행패를 부려 인격에 문제가 있었고 메리여왕
도 그런 남편을 싫어해서 시종 이탈리아인 음악가 다비드 리치오와 연인관계 였습니다.
제임스 1세가 리치오의 아들이라는 의혹까지 있었을 정도였으니 아내의 바람기에 노한 헨리
스튜어트는 다비드 리치오를 죽였고 분노한 메리 스튜어트는 보스웰 백작 제임스 헵번
과 짜고 헨리 스튜어트를 죽인후 그와 재혼하자 분노한 스코틀랜드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메리를 폐위했기 때문에..... 제임스는 1살에 스코틀랜드왕 제임스 6세로 즉위합니다.
왕이 나이가 1살이니 4명의 섭정이 통치를 했는데 이내 다툼으로 일부 섭정이 살해당했으며,
청소년기에 고리 백작의 저택을 방문하면서 백작과 그 아들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생겨서
민심이 나빠졌지만 스코틀랜드인들에게는 평온을 가져왔기에 좋은 왕이라고 호평을
들었는데 엘리자베스 1세가 어머니 메리 스튜어트를 처형했을 때 제임스 6세는 방조합니다.
제임스 6세의 어머니 메리 스튜어트는 출산 한달후 애를 내팽개치고 놀러갈 정도로 애정이
없는데다가 아기 시절이였기에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없었으며 메리가 아버지 단리
경을 살해한뒤 재혼한 보스웰 백작 제임스 헵번은 왕위를 찬탈하는데 방해되는
제임스 6세를 암살하려 들었고 메리도 협조했기 때문에 모자간의 정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 메리가 영국의 런던 재판장에 세워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대사를 통해 목숨만은
살려줄 것을 요청하기는 했으나, 메리 스튜어트는 복위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데다가 종교가 달라 정치적 입장도 전혀 달랐고, 더욱이 엘리자베스 1세의 추정 상속자
인 자신이 잉글랜드 왕위를 얻는데 방해 요소가 되기에 구명에 적극적이지도 않았습니다.
스코틀랜드 왕으로서 제임스 6세의 권력과 지지 기반은 바로 전 시대 자기 어머니를 필두로
한 하이랜드 친프랑스파 가톨릭 클랜들과 피비린내나는 권력투쟁 끝에 스코틀랜드의
지배계급으로 자리잡은 로우랜드의 칼뱅파 귀족들이었기 때문에 어머니 처형을
방조하는게 당연했으니 제임스 6세는 종교 투쟁에서 급진 개신교파의 거두 중 하나였습니다.
제임스 6세는 개신교도 급진 매파였으나 잉글랜드의 국왕까지 겸하면서 포용적이고 너그러운
국교회 중심으로 바뀌었는데 장로회 거두들이 왕권보다 신권이 우월하다는 주장을 펴서
제임스 1세는 반발하게 되며 개혁파의 거두 조지 부캐넌의 제자였는지라 처벌하지
않고 장관직을 주었으나.... 그후 사이가 나빠 해임하기는 했지만 다른 관직을 주어 대접합니다.
1603년 엘리자베스 1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여 튜더왕조 헨리 8세의 후손은 완전히 끊겼기에 헨리
7세의 후손 중에서 계승자를 찾아야 했는데 딸이자 헨리 8세의 누나 마거릿은 세번 결혼했는데,
첫번째 결혼에서 낳은 제임스 5세가 메리 여왕의 아버지였으며, 두번째 결혼에서 낳은 딸이 단리경
의 어머니였기 때문에 제임스 6세는 부계와 모계 양쪽으로 튜더 왕조의 계승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임스 6세에게 엘리자베드는 5촌 왕고모니 눈치 빠른 신하들은 엘리자베스 1세가 노쇠하면서
제임스 6세가 등극할 것에 대비했으니 잉글랜드 입장에서도 스코틀랜드는 종교개혁으로
개신교로 전향했고 청교도들이 바라는대로 개혁주의 신학에 따른 장로교가 주류였으니
영국 국교회 개혁파에서는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 왕이 되는걸 환영했습니다.
제임스 6세가 튜더 혈통을 이어받은 후손 중에 법적으로 가장 우선권이 있었기 때문에 반대명분도
없었으니 제임스 6세는 36살의 나이로 잉글랜드의 왕관을 얻어 제임스 1세로 등극해 스튜어트
왕조가 통치하게 되는데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를 다스리는 브리튼 제도 왕 이었습니다.
제임스 1세는 청교도와 가톨릭교도를 동시에 견제하여 잉글랜드 국교회만을 강요했는데 국교회 내부
에 가톨릭 전례와 전통을 주장하는 신도나 대륙의 칼뱅주의 개혁 신학으로 무장한 청교도나
모두 명목상으로는 잉글랜드 국교회 신자였기 때문에 정확히는 자신의 종교 정책을 강요한 것입니다.
잉글랜드의 가톨릭 교도들은 헨리 8세 시절 수장령과 반역법으로 완전히 몰락했으며 국교회
내부에 가톨릭에 온정적인 세력과 개혁 세력이 있었고 신자들은 종교면에서 열성적이지
않았으니 가톨릭 전례와 전통 보존파와 개혁세력인 청교도가 갈등했으며 정계
외부에 가톨릭 잔존 세력이 있었으나 당시에는 영향력을 상실하고 탄압받는 대상이었습니다.
제임스 1세는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칼뱅주의 교육을 받고 자랐는데 주교 - 사제 - 평신도
로 이루어지는 체계적인 교회 조직 자체를 가톨릭의 유산이자 적폐로 취급한
잉글랜드 청교도와 스코틀랜드 장로회,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 치세의 탄압에도 불구
하고 국교회 내부에 자리잡은 가톨릭 전통 용인 세력의 힘 역시 마냥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제임스 1세는 중세와 근세 군주들 중에서도 고등교육을 받았으며, 행정 실무에 밝고 지적
으로 충만한 문필가 왕에 가까웠으니 이전에 튜더 왕조의 잉글랜드의 군주들은 종교
문제에 관하여 본인들은 정치적인 판단만 내리고 실질적인 교리적, 학문적 종교 개혁
은 토마스 크랜머, 리처드 후커 등 왕실의 비호를 받는 신학자, 지식인들이 주도했습니다.
반면 제임스는 스코틀랜드의 칼뱅주의 교육을 받았으니 실제로 시시콜콜해 보이는 신학적
논쟁 또한 주도면밀하게 파악하고 있었는데 가톨릭 교도들은 왕을 암살하기 위해
상원의회 지하에 대량의 흑색화약을 매설하여 폭파시킨다는 계획을 실행 일보직전 까지
갔지만...... 밀고로 실패하여 가이 포크스 같은 실행범과 배후세력이 줄줄히 처형당합니다.
이후 제임스 1세는 의회의 경비를 강화하고 국왕이 의회에 참석할 때는 사전에 근위대를
의회 의사당에 파견해 내부를 수색하는 작업을 행하게 했으니 이 작업은 현대에도
잔존해서...... 영국 국왕이 의회 개회식을 위해 참석할 때 왕실 근위대가 의사당
지하실을 수색하는 행사를 행하는데 예복을 갖춰 입은 근위대의 의전 행사로 남았습니다.
제임스 1세는 독립적인 국가적 종교적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국교회의 근본적인
개혁을 추구했으니 현대 성공회의 모습인데, 신학적으로는 개신교의 것을 따르되
가톨릭 같은 교회조직은 유지하는 것이었으며 킹 제임스 성경의 발간등 정치적인
맥락이 뚜렷이 있었으며 제임스 1세의 치세만 하더라도 큰 반발을 사지는 않았습니다.
스튜어트 왕가의 종교적 삽질이 의회와 귀족들의 분노를 사게 되는건 제임스 1세의
아들 찰스 1세가 똑같은 국교회 개혁안을 이리저리 휘둘러댄 탓이었는데......
뒤집어 말하면 똑같은 일을 추진하면서도 제임스 1세는 자기 나름의 정치적인
수완과 리더십, 소통력이 있어서 큰 반발없이 일을 추진할 수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왕권신수설은 왕권은 신에게서 수여된 만큼 누구도 의문을 제기할수 없는 불가침 영역이며 신민
들에게 정치적 책임을 질수 없다는 이론을 내세웠는데 자신을 법보다 높은 존재로
여겼으나, 세속권력은 주님의 법 아래 있으며 합법성 안에서 제한된다는 의회 다수
젠트리와 청교도, 스코틀랜드의 하이랜드 클랜 대귀족과 장로교 지식인들의 주장과 대립합니다.
프랑스에서 앙리 4세가 진행 중이던 '국가 권력에 대한 종교의 종속화' 를 영국
에서도 재현하겠다는 것이니 의회는 파란을 일으켰으며, 제임스 1세가 재위한
22년간 4번밖에 열리지 않았고 또한, 열렸어도 심하게 대립했으며 형편이
곤란해지면 의회를 해산시키니 나중에 찰스 1세가 참수당한 간접적인 원인입니다.
의회도 보통선거제도의 선출자가 아니라 대지주 출신 젠트리가 대다수였기에 이 시기
의 왕을 "독재자"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무리가 있으며 엘리자베스 1세 이후
젠트리 세력이 더 성장했는데 외국 출신으로 기반이 약한 제임스가 출현하자
그동안 절대 왕정 치하의 무소불위 과세권에 반발하며 간섭하면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정복왕 윌리엄 시절부터 강력한 중앙집권을 추구했던 잉글랜드 왕실과 달리 스코틀랜드의
경우 제임스 6세가 200년 만에 처음으로 왕관이나 나라를 전쟁과 내란에서
상실하지 않고, 전투에서 전사하지도 않고 자기 침대에서 평화롭게 죽은 첫 번째 왕입니다.
특히 스코틀랜드는 제임스 본인의 치세에도 1596년 장로회 소속 청교도 매파의 기습적인 봉기로
수도의 통제권을 상실하고 제임스가 일시적으로 인근의 린리스고(Linlithgow) 로 피신
해야 할 만큼 잉글랜드에서 보다 스코틀랜드에서 왕으로 나라를 다스리는게 더 힘들었다고 봅니다.
제임스는 장로회 엘리트들과 사상과 국정 방향은 충돌하면서도 큰 문제 없이 다스릴 수
있었으니 어려서 부터 권력다툼으로 고생하면서 자랐기에 로우랜드의 개신교 성직자,
하이랜드의 클랜, 왕실 직할도시 자치정부 모두에 골고루 연줄이 있어서 한 세력이
왕권에 도전하면 다른 세력을 불러와 누르는 단호하면서도 유연한 통치술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아들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 입장에서 보면 아예 선왕 메리 여왕처럼 말만
스코틀랜드 출신이지 성장, 가치관, 성향 모두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국정을
실패하고 1638년 언약도 혁명으로 스코틀랜드에서 권력을 상실하였으며 또 누르
겠다고 대립하던 잉글랜드 의회와 싸움질하다 청교도 혁명까지 겹쳐 처형당합니다.
제임스 1세는 대외적으로는 적대해오던 스페인과 유대를 맺는 정책을 취했으니 30년
전쟁중 사위인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로 부터 원조요청을 받고도 에스파냐
때문에 소극적인 태도를 취해 친네덜란드 성향의 급진적으로 변하던 청교도
세력의 불만을 샀지만 의용병들이 팔츠 선제후를 도와서 참전한 것을 막지는 않았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 말기 벌리경등의 비호로 성장해 하원을 석권하고 있던 급진 청교도 세력
은 제임스 1세의 온건책에 격분했는데, 엘리자베스 1세때 스페인전쟁 자체는
성공적으로 이끌었음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 재정이 파탄나고 백성들이 엘리자베스
1세를 원망했던 걸 생각하면 국력이 약했던 잉글랜드 입장에서는 옳은 선택이라고 봅니다.
잉글랜드로 옮겨서 통치했으나 스코틀랜드를 결코 소홀하게 대하지 않고 여러번 방문 하였는데...
에든버러의 홀리루드 궁전을 방문했을때, 스코틀랜드 대신들과 자연스럽게 격의없이 대화하며
"사람의 본성이란 연어와 같이 고향에 자꾸 돌아오게 되더라" 는 식으로 농담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대신들이 "왜 잉글랜드에만 박혀서 스코틀랜드는 자주 안 오시냐" 며 섭섭함을 표하자
제임스는 "나도 마음만 같아선 북적거리고 시끄러운 잉글랜드 일 다 때려치우고 고향에 돌아와
너희들이랑 옛날처럼 다정하게 대화하며 그렇게 살고싶다" 고 대답해 이들의 원성을 달랬다고 합니다.
이런 화기애애한 담화를 나누었던 스코틀랜드의 대신들은 사실 제임스 1세에겐 '친근한 고향
사람들' 이 아니라 웬수라고 할만한 자들이었으니 어머니 메리가 쫒겨나서 잉글랜드 감방
에 갇혀 있을 때 어린 제임스 본인을 정치 투쟁의 장기말로 써먹던 작자들이었기 때문 입니다.
제임스 1세의 추억은 허구헌날 귀족들 간에 파벌 싸움에 따라 납치와 협박, 감금을 당하던 어린 시절
의 악몽이라 할 시절이었으니 제임스가 어른이 된 뒤에 보복할 법도 한데... 오히려 옛날 추억으로
미화하며 장단을 맞춰서 좋은 분위기와 친분을 유지하는 걸 보면 인내력과 정치력만큼은 대단합니다!
심지어 장로교 매파들과 싸울 때도 에든버러의 한 서점 주인이 " 성공회식으로 예법과 교리
를 변경시키시면 안 된다." 라면서 사사건건 딴죽 걸며 제임스 1세가 도입한 전례법에
따라 예배 보는 걸 거부하니 왕이 직접 청문회에 불러서 "야 이 튀르크 놈들이나
유대인 보다도 악질인 자들아! 네놈 에든버러 시민들 처개기는 것도 질려서 못해먹겠다!“
“악마한테 몸도 영혼도 다 뜯겨 먹히고 지옥에서 썩을 인간들아, 니들하고 너희 구닥다리
장로교회 인간들 모두 엿이나 처먹어라!" 라고 욕짓거리를 허하게 퍼부었는데,
그 소리를 들은 스코틀랜드인들은 "역시 잉글랜드에 내려가셨어도 마음은
우리나라 임금님이시다! 이래야 폐하답지!" 라며 오히려 더 호응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임금이 동네 서점 주인이랑 싸웠다면 웃긴거 같지만, 인쇄술이 발명된지 100년 조금 넘었고 의무교육이
안돼 문맹률이 높았던 시절에 에든버러 같은 수도의 서점 주인이라면 지식인이고 서점은 출판업까지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현대라면 국왕이 일간지 사주등 언론, 출판계 거물급 인사와 논쟁을 벌인 것입니다.
행정적인 기록을 봐도 몸은 비록 잉글랜드로 가 있지만 대리 자문회(Privy Council)을 통해 지속적으로
스코틀랜드에 관심을 가지는 것 뿐만 아니라 정책 결정등 통치도 서면으로지만 적극적으로 했고,
현지상황도 전화도 이메일도 없었던 시대적 한계를 고려하면 비교적 주도면밀하게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제임스 1세 치세에는 의회 입김이 늘어났고 전국에 성공회를 강요하는등 마찰을 빚었으니
암살당하지 않았느냐는 의혹도 있다지만 엘리자베스 1세 시절과 달리 대외 전쟁에
시달리며 국고가 파탄나는 일만은 피했기 때문에 백성들에게는 사랑받았으며
세나라 통합 왕국을 다스리면서도 본인의 치세에는 큰 혼란없이 나라를 유지 하였습니다.
역사적으로 엘리자베스 1세 후광에 짓눌려 암군의 평가를 받았으나 최근에는 뛰어난 명군은 아니지만
무난하게 나라를 다스렸다는 재평가를 받고 있으며 스코틀랜드의 군주까지 겸임해야 했기 때문에
통치의 난이도도 높았던 제임스를 엘리자베스와 직접 비교하는 건 굉장히 억울할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그가 지시해 번역한 킹 제임스 성경은 현대 영어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으니 제임스 1세의 대표적인 업적
이며 파워 엘리트와는 충돌해도 충분히 무마할 개인적 매력과 소통력이 충분했지만 아들 찰스 1세는
철학만 물려받았지 매력과 능력, 수완, 연줄은 하나도 없이 독단적으로 일을 추진하다가 크게 망칩니다.
제임스 1세는 고소공포증, 독살공포증, 도검공포증 등 온갖 미신적 두려움에 둘러싸여 편집증적인 삶을
살았지만 심리적 공포증을 극복하고 신하들과 소통하고 친구들을 많이 만들었으며, 일반 대중과도
잦은 행차와 행사를 통해 친근함을 과시하려고 했던 인간적인 매력과 인망이 풍부했던 왕이었습니다.
욕지거리 에피소드 만으로도 친근함은 확실히 인증되는데 제임스 1세 본인도 이런 성품을
정치적 자산으로 삼았으니 아들 찰스 1세가 즉위 초기 부터 이념적, 종교적 차이를 넘어
인간적인레벨에서 항상 '냉정하고 차가운 사람' 이란 평가를 받으며 가신들과 측근
들을 냉담하게 대하고, '자기 사람'을 별로 만들지 못했던 모습을 보인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제임스 1세는 법적으로 별개 국가였던 브리튼섬 여러 나라들의 다른 정치적 이해 집단들
과의 관계에 걸쳐 놓여진 자신의 권력 현실을 영민하게 인지하고, 정치적으로
스코틀랜드인들의 소외감을 방지하며 현명한 통치를 했으며 종교적인 문제로 타협
이 불가능한 매파 장로교는 나머지 귀족과 대중 전반에게서 성공적으로 분리해 버립니다.
이것만으로도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는 굉장히 유능하고 성공적인 군주였다고
할수 있는데 제임스 1세의 유능함은 그가 어린 시절 직접 깨지고 부숴지는 경험
을 통해 배운 밀당 능력이 없었던 아들 찰스 1세가 왕이 되자, 장로교 매파가
귀족과 도시민들 사이에서 영향력을 재빠르게 회복한 것만 봐도 알수가 있습니다.
1625년 제임스 1세의 장남이 왕위를 이으니 찰스 1세로 신앙심이 깊었지만 왕권신수설
사상을 고수한 전제적인 통치 방식 때문에 의회와 마찰을 빚었고 그와 의회 사이의
정치적 갈등은 심화되어 국가 분열의 내전 상황을 초래했으니 결국 찰스 1세는 1649년
단두대에서 처형당했으며 1660년 왕정복고로 망명중이던 장남이 찰스 2세로 즉위합니다.
찰스 1세는 제임스 1세와 앤 왕비의 차남으로 태어났는데 갓난아이 때부터 병약했으니
성년이 되었을때 키가 160cm 단신이었지만 용모 자체는 섬세하고 부드러운 인상
이었으니 소심하고 수줍음이 많은데다가 어투까지 느릿느릿했으니
내성적인 찰스는 평생 의식하며 살았고 토론과 설득이 필요해도 잘대처하지 못했습니다.
부친 제임스 1세는 엄하고 절도있는 왕실 교육을 원한 반면 앤 왕비는 결혼 전 자유롭고
화기애애한 덴마크 왕가에서 성장했던 터라 둘은 자녀들의 양육문제로 자주
부딪쳤지만 엄격한 신앙교육 덕에 형제들 모두 신앙이 깊었고 형제는 큰형
헨리와 누이 엘리자베스 찰스 셋 뿐이었고...... 찰스는 형과 누이에게 많이 의존합니다.
장남 헨리 왕세자는 외모나 재능, 성품에서 두각을 드러냈고 왕세자에 걸맞게 훌륭히 성장했지만 18살에
티푸스로 급사하자 왕실은 망연자실했으며 특히 형을 많이 따랐던 12살의 찰스는 큰 상실감 속에서
왕세자 지위를 물려받게 되는데 통치자 보다는 신학 연구자나 섬세한 예술가에 어울렸을 인물이었습니다.
찰스가 23살 되던 1623년에 제임스 1세는 스페인 왕녀와 혼인을 추진했으니소위 ‘스페인-가톨릭 커넥션’
을 반 영국적 태도로 받아들이던 영국 내 분위기에서 찰스의 혼인 협상은 우려와 비판을 불렀고 체면만
구긴채 백지화됐지만 찰스는 왕위에 오른후 가톨릭 프랑스 부르봉왕가 공주 앙리에타 마리와 혼인합니다.
국내 여론과 의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진행된 두차례의 혼인 협상은 초대 버킹엄공작 조지 빌리어스가
주도했으니 그는 부왕때 부터 국왕 측근으로 권력을 독식했고 대중의 지탄을 받아왔지만 찰스
1세에 이르기까지 권세를 이어갔고 제임스 1세 마지막 몇년은 이 둘이 국사의 대부분을 처리했습니다.
부친 제임스 1세뿐 아니라 찰스 1세도 왕의 통치권은 신이 부여한 불가침의 절대 권위
라고 확신했는데 신앙이 두터웠던 찰스 1세는 부친 보다 더 완강하게 왕권신수사상
을 신봉했으니 왕권을 견제하는 의회의 존재를 부당한 것이라 생각했고 개혁적
이고 논쟁적인 청교도들의 하원은 왕권에 도전하고 트집이나 일삼는다고 여겼습니다.
찰스 1세는 즉위 2달 만에 프랑스 공주와 성혼하자 가톨릭은 감싸주고 청교도는 적대시
한다는 우려와 불만이 터져나왔으며, 하원은 전쟁 비용을 포함한 재정문제로
갈등의 골이 깊어졌으니 찰스 1세가 치른 전쟁은 제임스 1세의 외교 정책을 이어
받은 결과였지만 스코틀랜드 출신 스튜어트 왕가는 영국내 정치적 기반이 미약했습니다.
찰스 1세도 제임스 1세 처럼 소수 측근을 중심으로 국정을 이끌었는데, 선왕 시절 최고
실세였던 버킹엄 공작의 무리한 외교 정책들이 찰스 1세까지 이어졌으니
선왕 때부터 이어진 스페인과의 전쟁은 소위 ‘버킹엄 공작이 치른 전쟁’이었는데....
전쟁 초반에는 왕실이 나설만했고 의회도 승인할 만큼 확실히 명분있는 전쟁이었습니다.
당시 유럽 각국이 개신교 국가와 가톨릭 국가로 나뉘어 맞붙은 30년 전쟁이 터졌는데
영국 왕실의 사위인 팔츠의 선제후 프리드리히가 개신교 쪽에 서게 되었으니
때마침 가톨릭 수호국 스페인이 프리드리히의 팔츠를 공격하자 영국
내에는 개신교 편에 서서 스페인과 맞서자는 반(反) 스페인 여론이 확대되었습니다.
이 전쟁은 제임스 1세 후반기에 일단락되는가 싶더니 재개되어 찰스 1세 시기까지 이어지는데 막대한
전비만 잡아먹을 뿐 실패한 전쟁임이 분명한데도 찰스 1세는 전쟁을 둘러싼 의문들이 불거졌을때
설득력 있게, 성실히 대처하지 않았고 의회와 협상이 난항에 부딪치자 찰스는 의회를 해산해 버립니다.
네덜란드와 치른 전쟁, 프랑스 개신교도 위그노의 반란을 지원하는 원정등 버킹엄 공작이 추진한 외교
정책들은 하나같이 실패를 거듭했으니 찰스 1세는 버킹엄 공작을 보호하기 위해 의회의 요청을
무시하고 해산시켜버리거나 행정 조처에 저항하는 인사들을 투옥시키는 등의 무리수를 두었습니다.
심지어 “왕 멋대로 국정을 좌지우지하고, 버킹엄 멋대로 국왕을 좌지우지하고, 악마
멋대로 버킹엄을 좌지우지 한다” 는 벽보가 런던 시내에 나붙을 정도였으니 1628년
소집된 의회는 시민권을 보호하고 왕권을 견제하는 4개 항의 권리청원서를 제출합니다.
바닥난 재정을 지원받기 위해서 찰스는 마지못해 서명해야 했고 찰스 1세의 비호를 받던 버킹엄 공작
은 1629년에 암살당했는데 이 소식을 들은 런던 시민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춤을 추며 기뻐했다고
하니 버킹엄 공작뿐만 아니라..... 국왕의 주변 인사에 대한 국민의 불만이 어떠했는지 짐작할만 합니다.
찰스 1세와 의회는 종교적 의례나 과세 정책에서도 의견차이를 좁히지 못했으니 1629년 3월 찰스 1세는
휴회를 결정했고, 하원도 이에 맞서 왕의 태도를 비난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켜 버렸으니 찰스 1세는
의회의 태도를 왕권에 정면 도전하는 용납할수 없는 행위로 여겨 11년 동안 의회를 소집하지 않습니다.
찰스 1세는 11년 동안 의회의 지원 없이 나라살림을 꾸려나가야 했으니 그는 재정을 감당하기 위해
폐지되었던 세금을 부활했고 또 선박세처럼 기존 조세법을 새롭게 적용해서 세수입을 늘려갔으니
찰스의 조세정책을 놓고 지방 젠트리 계층과 도시의 거대상공인등 부유층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우여곡절의 과도기를 거치면서 찰스는 정상적으로 세수입을 확보할수 있었으니 선박세 시행을 놓고
지방 젠트리 계층의 반발이 심했지만 거둬들인 세원 일부를 해군력을 증강하는 데 투자해 해상
에서 영국의 위세가 강해지기 시작했으며 부유층에 비해 서민에게는 부담을 크게 주지 않았습니다.
찰스 1세는 ‘서민을 돌보는 자애로운 군주’를 국왕의 이상적인 덕목으로 삼았던 터라
늘어난 세수입으로 구빈, 구호, 실업 정책을 보강해 사회도 안정을 찾아나갔으니
1640년 혁명의 소용돌이를 몰고 온 발단은 경제적이고 계급적인 요구라기보다 권위
주의와 자유주의의 충돌로, 전제 왕권과 의회 권력의 맞대결로 종교가 핵심이었습니다.
찰스 1세는 국교회 신봉자로 품위와 예의를 존중하는 가톨릭 전통에 가까운 ‘고교회파’
쪽이었는데, 버킹엄 공작이 살해된 이후 궁정의 자문을 비롯해서 종교 및 국정의
중책이 고교회파 인사들로 채워지기 시작했으니 독실한 찰스 1세는 ‘국교회로
하나된 대영국’ 을 실현하는 것이었으니 청교도가 장악한 하원과 마찰을 빚습니다.
1640년 찰스 1세는 11년 만에 의회를 소집했으니... 스코틀랜드와의 전쟁 비용을
승인받기 위해서였는데, 이 전쟁 상황 자체는 찰스 1세의 종교적 패착에서
나왔으니 영국 국교회의 기도서를, 그것도 가톨릭 전례에 가까워 영국 내
에서 조차 반발이 많았던 기도서를 스코틀랜드 교회에 강제로 보급하려 했습니다.
스코틀랜드는 장로교 전통이 확고하게 뿌리를 내린데다가 전통적으로 절대군주 보다 귀족
가문과 토호 세력이 막강한 곳이었으니 제임스 1세는 런던에 입성하기 까지 스코틀랜드
에서 성장했기에 스코틀랜드의 지역적 특성에 익숙했던 터라 통합 왕으로 즉위한
후에도 스코틀랜드의 종교적 정서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유화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반면에 찰스 1세는 자신의 신앙심에 사로잡혀 이 점을 간과했던 것이니... 스코틀랜드에서
찰스 1세의 기도서 보급안에 대해 교회연합 중심으로 대대적인 저항 움직임이 일었고,
결국 이 저항은 잉글랜드의 동북 경계선을 밀고 내려오는 전쟁의 양상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찰스 1세의 뿌리는 스코틀랜드였지만 재위한지 9년이나 지나서야 스코틀랜드를 처음 방문했으면서도
한다는 말이 스코틀랜드가 얼마나 촌동네인지 불평불만만 하며.... 주변에는 잉글랜드 출신 측근들
만 끌고 다니는등 종교 문제를 떠나서 인간적으로 스코틀랜드인들의 원성을 들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찰스는 스코틀랜드에 대해 관심조차 없다가 처음 개입한게 막강한 귀족 가문중 하나인
클랜 캠벨이 마음에 안든다고 캠벨 가와 같이 하이랜드를 양분하며 아일랜드에서도
영향력이 강했고 무엇보다 가톨릭이었던 클랜 맥도널드더러 " 캠벨가 저 놈들
마음에 안드니 니들이 아일랜드에서 사병 좀 끌고 와 길좀 들일래?" 하며 개입합니다?
역사적으로 스코틀랜드 왕실의 권력이 거의 미치지 않는 지대였던 하이랜드에서 그나마 왕실의 앞잡이를
자처하며 세력을 키우다가 갑자기 뒤통수를 맞은 캠벨가는 이러한 찰스 1세의 행보에 대해, 장로교 매파
반란이 일어나자 말자 가문의 모든 세력을 규합해 언약파에 가맹하여 왕권에 대항하는 것으로 맞섭니다!
찰스 1세는 1640년 4월 의회를 소집했지만 성급한 요구와 11년 만에 개회한 의회측의 입장 차이로 1달
만에 해산되었고, 11월에 재차 개회했는데 이때부터 의회는 찰스 1세 멋대로 행사하는 권력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찰스 1세의 무리한 정책들과 측근 인사들의 그릇된 행태를 탄핵해 나갑니다.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 문제를 해결하는게 급선무였기에 타협해 의회의 요구들을 수용했으니 심지어 최고
측근이자 정책 참모였던 토머스 웬트워스가 반역죄로 참수당하는 사태까지 묵과해야 했는데 1641년
가을 때마침 아일랜드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났고 그 파장은 결국 사태를 내전의 파국으로 치닫게 만듭니다.
아일랜드의 봉기 역시 해묵은 종교 갈등이 곪아터진 경우였으니 잉글랜드는 12세기 후반에
아일랜드섬을 정복했지만 방만하게 관리하다가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 여왕 시절에
군사정벌을 수차례 단행해 식민 지배권을 강화했으니 잉글랜드 국교회를 아일랜드에
강압적으로 이식시켰고 토착민 토지를 강제로 빼앗아 이주시킨 국교회 신자에게 주었습니다.
아일랜드는 인종과 언어가 영국과 다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5세기 이후 가톨릭 신앙이
확고하게 뿌리박힌 곳이었으니..... 잉글랜드의 무력 정벌과 이어지는 일련의 억압적
인 식민 정책으로 대다수 아일랜드인은 뼛속까지 반 잉글랜드 저항 의식을 쌓아갔습니다.
1641년 영국은 국왕 찰스 1세와 의회가 심각하게 갈등중이고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에
군사력이 집중된 상황이었으니 아일랜드에서는 이를 기회 삼아 대규모 민중 저항이
폭발했는데 얼스터 지방(아일랜드 북동지역)에 이주했던 국교도 수천명이 살해
당했고 이 소식은 괴담처럼 부풀려져 본토에 전해져 나라 전체가 분노에 휩싸입니다.
청교도파 의회와 찰스 1세가 팽팽한 줄다리기를 벌이던 런던에서는 아일랜드의
가톨릭 민중봉기에 대한 공포가 최고조에 달했으니 밤이면 군중들이 들고
일어나 가톨릭에 너그러운 찰스 1세와 보수적인 주교들을 규탄하는 거리 시위가
열렸는데 의회는 온건한 개혁을 원하는 온건파와 다수의 강경 의회파로 분열됐습니다.
총체적 난국을 타계하기 위해 11월 의회는 찰스 1세의 실정을 낱낱이 고발하는 ‘대간언’
을 제출했고 근소한 표 차이로 통과시켰으니 가톨릭을 감싸주면 반역자 취급
당하는 상황이었는데 찰스 1세의 왕실은 가톨릭에 우호적이었고 장본인은
앙리에타 왕비였으니 왕실이 무사하지 못하고 왕비마저 탄핵당할 것으로 판단합니다.
이듬해 1642년 1월 가톨릭 수호국의 지원을 타진하기 위해 앙리에타 왕비는 도버 해협을
건너 대륙으로 향했고 8월 22일 찰스 1세는 노팅엄에서 상비군을 조직함으로써 공식
적인 내전 정국에 들어서는데 초기에 대다수 국민들은 미온적으로 반응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영국 전역은 왕당파-기사당과 의회파-원두당으로 쪼개져 내전으로 들어갑니다.
1648년 국왕군 제임스 해밀턴 경의 9천명과 의회군 올리버 크롬웰 8,600명이 맞붙은 프레스턴 전투에서
왕당파가 결정적으로 패함으로써 7년에 걸친 내전은 의회파의 승리로 종지부를 찍었으며 이후 1660년
왕정복고가 있기까지 영국은 군주정과 국교회를 폐지하고 영국 역사상 최초로 공화국을 수립하게 됩니다.
찰스 1세는 1647년 의회파에 체포되었고 한번 탈출하기도 했지만 다시 체포되어 1648년
12월 윈저성으로 이송되었으니 1649년 1월‘대영국에 대한 반역죄’혐의로 웨스트
민스터에서 열린 특별법정에 회부되었는데 특별법정은 의화의 온건한 개혁파와
찰스 1세가 결탁할지 모른다는 우려로 크롬웰 군부가 일부 의원의 참여를 가로막았습니다.
특별법정은 1월 29일 찰스 1세에 대해 ‘선량한 백성을 억압하고 살생한 대역죄’ 를 선고했고
찰스 1세는 사형 판결을 받았는데 찰스는 자신이 신앙에 따라 백성들을 이끌었고
결국 무참히 희생당하지만 오로지 신만이 자신의 과오를 심판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국왕으로서의 품위를 지키며 의연하게 마지막 시간을 받아들였으니 치욕스러운 생의 마지막 순간
에 찰스가 보여준 당당함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국왕의 처형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찰스 1세
는 1649년 1월 30일 화이트홀의 연회장에서 참수 처형되었으며 1주일후 시신은 윈저 성에 묻혔습니다.
1625년 즉위한 25살의 찰스 1세는 15살의 어린 프랑스 공주 앙리에타와 켄터베리의 성 어거스틴 교회
에서 성혼식을 거행했으니 영국 국교회 의식에 따라 가톨릭 신자인 앙리에타는 왕비의 관을 쓸수
없었으니 앙리에타측은 가톨릭 주교를 통해 왕비의 관을 얹어주기를 요청했지만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찰스 1세의 자녀들은 부친의 뜻에 따라 공식적으로는 국교회 신앙을 갖게 되었지만 앙리에타
왕비의 영향으로 왕실 내에는 가톨릭을 용인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으니 향후
찰스 2세와 제임스 2세가 될 왕자들도 모두 가톨릭 신앙에 거부감이 없었으며
찰스는 앙리에타 왕비에게 친절했고 ‘메리’ 보다는 부인이 원하는 ‘마리’ 로 불러주었습니다.
찰스 1세는 예술에 조예가 깊었고 미술품에 대한 애호가 남달랐으며 앙리에타 왕비도 그림을 좋아해서
찰스 1세는 유명 화가들의 그림을 수집하거나 따로 작품을 의뢰하기도 했으니 1632년에는
네덜란드의 뛰어난 초상화가 반 다이크를 영국으로 초청해 궁정화가 작위와 기사 작위를 부여했습니다.
이후 반 다이크는 영국 왕실에 머물면서 찰스 1세를 비롯해 왕실의 인물화를 다수 남겼는데
찰스 1세의 경건한 신앙심 덕에 궁정이 마냥 호사스럽지는 않았지만 예술가들도 즐겨
초대되었고 정기적으로 가면극도 공연되는 등 예술을 장려하는 자유로운 분위기였습니다.
앙리에타는 찰스 1세가 의회 없이 재정을 꾸리던 1630년대 남편을 돕기위해 유럽의 가톨릭 세력에 원조를
구했고 1642년 내전에 돌입하기 직전에도 유럽으로 건너가 여러나라를 돌며 자금 및 군사원조를 요청
하기도 했는데 1644년 7월 프랑스로 피신해 있던 중에.... 1649년에는 찰스 1세의 처형 소식을 들었습니다.
추 가 : 이 제임스 1세 글을 "중세" 에 올릴지 "근세" 에 올릴지 고민하다가 영국에서 튜더 왕조가 끝나고
스코틀랜드인 제임스 6세가 제임스 1세로 영국왕이 되어 스튜어트왕조로 바뀐지라 근세에 올렸는데...
조금 전에 TV n 의 "벌거벗은 세계사" 에서 임승휘 교수가 진행한 "마녀사냥" 프로그램에 마녀재판은
중세시대 가톨릭국가의 성당에서 시작됐지만 개신교 국가 스코틀랜드 제임스 6세도 3천명을 죽였다니
그럼 제임스 6세 이야기는 중세시대에 넣어야 되는데 근세에 넣은건 잘못인가 싶어 자료를 찾아 봅니다.
마녀재판은 중세시대 시작됐지만 극성을 부린건 1618년부터 1648년까지 독일에서 종교전쟁이 벌어지면서
독일이 가장 심했으니 뷔르츠부르크 주교 율리우스는 300명을 화형시키는등 근세에 기승을 부렸고 영국
청교도들이 미국으로 이민가니 매사츠세츠주 세일럼에서는 1692년까지도 기승을 부렸는데 루이 14세가
1683년에 중지시켰으며, 12세기 이전에는 게르만 살리카법이라 "피해자가 있어야 고소" 하니 재판이 적었고
그후 가톨릭법이 적용되면서 피해자가 없어도 의심만으로 고소해 고문을 통한 재판과 화형이 많았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