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후기에 이르러 신흥 사대부들이 역사적 전환기를 맞아 새로운 이념과 정서를 표현하고자 하는 욕망이 강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현존하던 경기체가만으로는 표현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형태의 시를 만들고자 해서 창안해낸 시 형식이 바로 시조입니다. 원래는 단가(短歌)라고 불렀는데, 영조(英祖) 때 가객(歌客) 이세춘(李世春)이 시절가조(時節歌調) 즉 시조라 불러 오늘날까지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고려 말엽부터 시작해서 조선조 오 백년 동안 양반, 평민, 부녀자 할 것 없이 줄기차게 창작하고 불렀던 문학 형식입니다.
명칭
본래는 시조를 단가(短歌)라 불러, 장가(長歌 : 고려 가요·경기체가 등)에 비해 짧은 형식의 노래라는 뜻으로 호칭되던 것이 그 후 단가에 곡조를 맞추어 부르게 됨으로써, 이런 곡조를 영조(英祖) 때 가객(歌客) 이세춘(李世春)이 '시조(時調)'라 하였으나 그 뒤 가사(歌詞)까지를 합쳐 시조라 부르게 되었고, 이 후 곡조는 빼놓고 단순히 작품 내용만을 시조라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시조란 시절의 노래, 즉 시절가조(時節歌調)의 약칭으로서 시절가(時節歌)·신조(新調)·시조(詩調)라고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근래에는 그 호칭이 시조 하나로 굳어져 가는 경향이 있고, 또한 요즈음에는 시조라 하면 가락이나 곡조를 합친 의미로는 전혀 쓰이지 않고 오직 작품내용의 호칭으로만 쓰이고 있습니다.
한편 영조 이전에는 곡명이 아닌 작품내용의 호칭으로서 단가 외에 신번(新飜)·영언(永言)·장단가(長短歌)·시절단가(時節短歌)·가요(歌謠)·가곡(歌曲)·악장(樂章)·신성(新聲) 등의 명칭으로도 사용되었으나 역시 단가가 그 호칭의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발생
고려 중엽에 싹이 터서 말엽에 그 형태가 완성되었다는 것이 통설로 되어 있으나 일부 학자들은 16세기에 이르러서야 정착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 기원에 대한 학설도 구구하여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외래기원설
정래동 : "중국에서 온 것이 아닌가 의심한다. 調자가 중국 佛曲에서 나온 것이 사실인 것 같다. 한시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것이 아닌가 한다
안자산 : 한시의 단율, 즉 절구의 조자를 본받아 성형
고유문학 전래설 - 고려말 정착설
천태산인 : 정래동의 견해 반박, 시조는 한국 고유의 것. 향가에서 기원하며 그 형성은 별곡의 붕괴에서 생긴 단가에서 만들어진 형식
조윤제 : 오래전부터 한국 시가에 배태되어 막연히 사용, 형식의 가치가 인정되어 민요를 떠나 독립함
이택 : 향가의 3장 6구라는 형식과 시조의 형식이 유사함
정병욱 : 고려가요 붕괴 후 형성. 성리학의 이념을 담시에 적절한 형식을 갖고 있음
(만전춘 2, 5연은 3장 형태, 리듬의 템포, 호흡의 완급, 수사법이 유사함)
고유문학 전래설 - 조선 중엽설 - 시가 형태의 변천에 주목
이능우 : 조선 중엽. 시조가 귀족문학으로서 고려와 같은 불안시기에 산출될 수 없었다.
김수업 : 이능우 견해 동조. 고려말 정착설 반박의 근거로 단심가, 하여가 등은 모두 16세기 이후의 문헌에 등장한다고 함
무가기원설
이희승 : 무가에 의한 종교적인 神歌(노랫가락)의 脫化로 기원을 잡음
그 중 향가에서 기원하여 고려 가요의 형태상 특징이 허물어지고 단순화되어 새로운 문학 형식인 시조가 만들어졌다는 설이 현재로선 유력합니다.
시조의 역사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는 고구려의 을파소(乙巴素), 백제의 성충(成忠), 고려 초기의 최충(崔忠) 등의 것이 있고, 고려 말기의 우탁(禹倬)·이조년(李兆年), 이방원(芳遠:太宗)의 《하여가(何如歌)》, 정몽주(鄭夢周)의 《단심가(丹心歌)》 등 10여 수가 남아 있습니다.
조선 시대로 접어들면서 날로 계승·발전되어 송강(松江) 정철(鄭澈),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 등의 대가를 배출하였습니다. 조선 중기에는 황진이(黃眞伊)를 배출하여 시조의 난숙, 절정기를 이루었습니다. 양반들에 의해 지어진 종래의 단형(短型)시조가 임진왜란을 계기로 드러나기 시작한 산문 정신에 힘입어 양반의 생활권을 넘어 평민 계급으로 파급되면서 그 형식은 평시조의 소재이던 자연에서 눈을 돌려 실생활에서 소재를 구해 장형(長型)로 분파되었습니다.
그러나 조선 중기를 넘어서 시조가 양적으로는 늘어났으나 질적인 저조를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영정조(英正祖)시대에는 구전되어 오던 시조의 일실(逸失)을 염려하여 편찬 사업이 성행하였습니다. 1728년(영조 4) 김천택(金天澤)의 《청구영언(靑丘永言)》을 효시로, 63년(영조 39)에는 김수장(金壽長)의 《해동가요(海東歌謠)》, 1876년(고종 13)에 박효관(朴孝寬)과 안민영(安玟英)의 《가곡원류(歌曲源流)》, 그 밖에 《고금가곡(古今歌曲)》, 《동가선(東歌選)》, 《남훈태평가(南薰太平歌)》, 《객악보(客樂譜)》 등의 시조집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조선 후기까지 시조 편수는 2,000여 수에 달하는 방대한 것으로 거기에 담긴 사상과 정서는 한국의 역사를 시간과 공간으로 그대로 꿰뚫어 모은 정신적 유산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형식면에서는
① 사설조로 길어지고,
② 가사투(歌辭套) 민요풍(民謠風)이 혼입(混入)하며
③ 대화(對話)가 많이 쓰이고,
④ 새로운 종장 문구를 개척하였다.
내용면에서는
① 구체적, 서민적인 소재와 비유가 도입되고,
② 강렬한 애정과 육욕(肉慾)이 표현되며,
③ 어휘(語彙), 재담(才談), 욕설이 삽입되고,
④ 거리낌 없는 자기 폭로, 사회 비판 등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낡은 형태를 파괴하는 구실은 충분히 하였으나, 새로운 문학적 가치를 창조하는 데는 미흡함이 있었다 할 수도 있습니다.
조선전기의 시조
조선초의 절의가는 단종의 퇴위에 관련된 사육신과 생육신이 그들의 절개를 읊은 작품들이다. 박팽년·성삼문·이개 등의 절의가와 함께, 15세기의 시조 작품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한가롭고 평화스러운 경치를 읊은 서경시이다. 새로이 건국된 조선 왕조가 비교적 안정되고 모든 기구가 정제됨에 따라 사대부들의 여유 있는 생활이 시조의 주된 소재를 이루었고, 시조는 그들의 정신적 자세를 표현하는 그릇이 되었던 것이다.
예컨대 맹사성의 <강호사시가>는 사계절에 따른 자연의 변화와 그 속에서 생활하는 즐거움을 노래하고 있는 작품인데, 이같이 평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는 근원은 어디까지나 군주의 은혜로써 비롯되었다는 뜻을 담은 종장이 반복되는 연시조로서, 그 뒤 수없이 쏟아져 나온 서경시의 한 전형이 되었다. 언뜻 보아 자연시(自然詩)처럼 보이는 이들 작품이 궁극적으로 표현하고자 하였던 것도 유교적인 충의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자연미를 완상(玩賞)하면서도 유교적인 충의를 노래하는 한가하고도 평화로운 서경시가 오늘날 전하고 있는 고시조의 태반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것은 15세기로부터 수립된 전통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16세기에 들어서면서 건국 당초의 공훈으로 권위를 유지하여 온 구세력에게 과감하게 육박하여 오는 신흥 세력의 역량이 축적되자 드디어 조선 왕조의 정치사를 지배하는 이른바 당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 당쟁으로 말미암은 유학도 사이의 심리적 갈등을 이 시조 시형은 또한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신흠(申欽)·이항복(李恒福) 등의 작품에 드러나고 있는 당쟁에 대한 경계, 당쟁으로 인하여 희생된 인재들에 대한 애석함 등이 그 예가 된다.
마음이라는 추상적 실체를 구상화하여 스스로의 이성으로도 제어할 수 없는 심리적 갈등을 객관적으로 표현하거나, 자기 수행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마련인 인간으로서의 자성(自省)을 표현하고 있는 서경덕·권호문·김구(金絿) 등의 작품도 이러한 당쟁의 와중에서 산출된 것들이다. 그러나 당쟁에 패배하고 먼 곳에서 귀양살이를 할 망정 이들 유학자들이 지니고 있는 군주에 대한 충성심은 변함이 없었다. 체념과 허무 속에서 오히려 자기를 잃지 않고 낙관적인 관조 속에서 진실을 발견하려는 유학도들의 긍정적인 태도를 지탱시켜준 것이 곧 그들의 충성심이었던 것이다. 비록 역사의 추이에 따라 소재는 변할지라도 군주에 대한 충의만은 변하지 않는 주제의 정착성, 이것이 유학도의 서정시인 시조 문학의 특징적인 성격이며, 시조 문학이 지닌 바 그 역사적인 기능이었다.
조선 전기의 시조가 지니고 있던 이러한 특징은 16세게 후반에 이르면서 세 갈래의 지향점을 발견하고, 그 세 방향에서 각기 우수한 작품을 산출하고 있다. 그 하나는 이황의 <도산십이곡>과 이이의 <고산구곡가> 등이 대표하는 것으로 정치적 이념과 태도를 선행시키고 있는 조선 전기의 자연에 대한 유학자들의 태도가 도달할 수 있는 고아한 품격과 자연에 투영된 인생관의 한 극치를 시조가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정철의 <훈민가>가 대표하는 것으로서 유교적인 윤리관을 주제로 하되 백성들을 계몽하기 위하여 쓰여진 토속적인 언어 기교를 시조가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황진이로 대표되는 기녀(妓女)들의 작품들로서 구체적이고 인간적인 애정의 형상화가 시조시형을 통하여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특히 유학자들과 가까운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시조의 작가로 등장하게 된 기녀들의 작품은 전대의 고려가요가 지녔던 발랄한 애정 표현을 시조시형을 통하여 재창조하였고, 시조 문학 내지는 조선시대의 모든 부면에서 억제되고 있었던 여심(女心)의 표현을 활발하게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같은 경로를 밟으면서 시조 문학은 새로운 가능성을 찾게 되었고, 관념적인 유교 이념을 형상화하는 데 부족함이 없을 뿐 아니라 구상적인 인간성을 서정적으로 형상화하는 데 있어서도 모자람이 없는 이원적인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한국사전연구사편, 국어국문학자료사전)
조선 후기 시조의 특징
♠ 우국(憂國)개세(慨世)의 충정(衷情)을 나타낸 주제가 많았다.
♠ 고산(孤山)의 등장으로 다음 시대의 새로운 문학(소설)이 꽃피기 전에 시조 문학을 대성. 결산하는 구실을 다했다.
♠ 평민 계급이 가단(歌壇)에 진출하게 되자, 국민 문학으로서 등장하였다.
♠ 사설 시조가 발생하게 되었다.
♠ 가사에 악곡을 붙여 가창(歌唱)이 발전하였다.
♠ 역대의 시조집을 편찬하는 풍조가 일어났다.
사설 시조의 미의식
사설 시조는 우아한 기품과 균형을 강조하는 평시조와 달리 거칠면서도 활기찬 삶의 역동성을 담고 있습니다. 사설 시조를 지배하는 원리는 웃음의 미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실의 모순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 중세적 고정 관념을 거리낌없이 추락시키는 풍자, 고달픈 생활에 대한 해학 등이 그 주요 내용을 이룹니다. 아울러, 남녀 간의 애정과 기다림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며, 대개는 직설적인 언어를 통해 강렬하게 표현된다는 점도 큰 특징입니다. 종래의 관습화된 미의식을 넘어서서 인간의 세속적 모습과 갈등을 시의 세계 안에 끌어들임으로써 사설 시조는 문학의 관심 영역을 넓히는 데에도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이런 미의식은 조선 후기의 변모된 세계관과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이뤄진 것으로, 이후 우리 근대 문학의 바탕을 이루기도 하는 것입니다.
창법
시조창을 하면서 말 한 마디를 길게 빼던 데에다 다른 여러 마디 말을 더 촘촘히 집어넣은 것이 사설시조입니다. 말을 집어넣는다는 뜻에서 엮음시조 또는 농락(弄樂), 농시조(弄時調)라고도 합니다.
특징
형식
♠ 일반적 형식은 3장 6구, 45자 내외가 기본형입니다.
♠ 음수율은 3·4조 또는 4·4조가 기본으로 되어 있으나 한두 음절의 많고 적음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 4음보의 율격을 이루고 있으며, 시조에 있어 가장 엄격한 제약이 따르는 것은 종장의 첫 음보(3음절)이고, 다음이 종장의 둘째 음보(5음절)입니다.
내용
♠ 유교적 충의 사상을 노래한 시조들이 많습니다. 여말선초(고려말·조선초) 고려의 유신들이 지은 회고가나 사육신들의 절의가 등이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 자연 속의 한가롭고 평화로운 삶을 노래한 작품들도 많습니다. 이러한 작품들 역시 순수한 자연을 노래한 것이라기보다는 양반으로 태어나서 잘 먹고 잘살게 되었으니 이러한 특권을 주신 임금께 무조건 충성하자는 사상과 결합되어 있는 것이 많습니다.
♠ 기녀들의 작품에는 그들의 애정 생활이 진하고도 솔직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 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님 오신 날 밤이거든 구비구비 펴리라. (그 유명한 황진이)
동기로 세 몸 되어 한 몸같이 지내다가 두 아운 어디 가서 돌아올 줄 모르는고 날마다 석양 문 외에 한숨겨워 하노라.
엇시조 : 평시조의 초장, 중장, 종장 중 어느 한 구가 길어진 시조입니다. 영, 정조 시대에 많이 발달하였는데요, 중형시조(中形時調)라고도 합니다.
천 세를 누리소서, 만 세를 누리소서 무쇠 기둥에 꽃 피어 열음 열어 따들이도록 누리소서. 그 밖에 억만 세 외에 또 만 세를 누리소서.
사설시조 : 임, 병 양 난을 겪으면서 조선 사화는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됩니다. 실학 사상이 새로운 지도 이념으로 부상하고, 문학에 있어서는 산문 중심의 문학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졌으며, 피지배 계층이 작자층에 가세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변화 속에서 사설시조가 등장합니다. 대체로 17세기에 이르러 등장하였으며 크게 성행한 것은 18세기였으며, 주도했던 사람들은 평민 가객들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대두(擡頭)하던 평민 문학의 일환으로서, 산문 정신과 서민 의식을 배경으로 한 사설 시조는 시조에 큰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사설 시조는 시조가 지닌 3장체의 형태적 특성을 살리면서도 낡은 허울을 깨뜨리며 새롭게 재탄생하였던 것입니다. 지난날의 영탄이나 서경의 경지를 완전히 탈피하여, 폭로적인 묘사와 상징적인 암유(暗喩)로써 그 표현 기교를 바꾸어서 애정·거래(去來)·수탈·패륜(悖倫)·육감 등 다채로운 주제를 다루면서 지난 시대의 충의에 집착된 주제를 뛰어넘었습니다.
연시조 : 같은 주제를 지닌 여러 편의 시조가 한 제목을 달고 하나의 작품으로 연결된 경우를 말합니다. 맹사성의「강호사시가」, 이현보의「어부가」, 퇴계 이황의「도산십이곡」, 송강 정철의「훈민가」, 윤선도의「어부사시사」, 율곡 이이 선생의「고산구곡가」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양장시조(兩章時調) : 현대시조에서 초장과 종장만으로 된 시조입니다. 이은상이 시도했으나 요즈음에는 이런 시형으로 짓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뵈오려 안 뵈는 님 눈 감으니 보이시네
감아야 보이신다면 소경 되어지이다. (이은상, 소경되어지이다)
단장시조(單章時調) : 현대시조 중에서 평시조를 더욱 압축하여 초·중장을 없애고 종장만으로 시조의 맛을 내게 하려는 새로운 형식의 시조인데, 이것은 단순히 실험적인 것으로 이렇게 지은 예가 거의 없습니다. 아마 일본의 1행으로 이루어지는 시형인 하이꾸(排句)의 영향을 받아 그렇게 해보면 어떨까해서 시도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동시조(童時調) : 어린이의 생각이나 느낌, 또는 기호에 맞는 내용으로 된 시조. 근래에 와서 시도되고 있으며 점차 짓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시조가 실린 문헌
청구영언
가객 김천택은 원래 숙종 때 포교였던 사람입니다. 그 재미없는 노릇을 그만두고 자신의 특기적성을 살려 가객으로 나서서 나중에 온 나라에 이름을 떨쳤던 것입니다. <해동가요>, <가곡원류>와 함께 3대 가집으로 일컬어지는 것으로, 김천택이 시조를 수집, 영조 4년(1728)에 편찬한 것입니다. 또한 가사 10여수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수록된 시조의 총 수는 이본(異本)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진본 청구영언'은 580수의 시조가 수록되어 있으며, 곡조에 따라 분류, 배열하였습니다.
해동가요 : 영조 39년에 김수장이 작가별로 분류하여 엮은 시조집으로, 시조 883수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가곡원류 : 고종 13년에 박효관, 안민영이 곡조별로 분류하여 엮은 시조집입니다. 시조 800수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또 부록으로 여창유취(女唱類聚) 170수가 실려 있습니다. 곡조에 따라 남창(男唱)과 여창(女唱)으로 나누었고, '해동악장(海東樂章)' 또는 청구악장(靑丘樂章)이라고도 합니다.
병와가곡집 :연대는 정확하지 않고 아마 정조 때로 추정되는데, 이형상이라는 분이 곡조별로 분류하여 엮은 시조집입니다. 시조 1109수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고금가곡 :영조 40년에 송계연월옹이 주제별로 분류하여 엮은 시조집입니다. 시조 194수와 가사 11수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해동악부(海東樂府)
광해군 때 심광세(1600-1655)가 지은 악부시집. 신라-고려 초까지의 역사적 사실 중 자녀 교육에 가치가 있는 고사를 실은 책.
화원악보(花源樂譜)
필사본 시조집. 편자와 연대는 미상. 19세기 말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총650수의 시조가 수록되어 있는데, 221수는 그 작자를 작품 끝에 밝히고 있으며(작자 수 120여명), 나머지 429수에 대해서는 작자를 밝히지 않았습니다. 고구려 을파소가 지었다는 것으로부터 조선시대 말기의 안민영, 박효관의 작품까지 수록되어 있습니다.
동가선(東歌選)
순조(純祖) 때 백경현(白景炫)이 엮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235수를 작자·내용별로 분류 수록하였습니다.
남훈태평가(南薰太平歌)
정확한 연대와 편자는 미상이나 철종 때로 짐작되며, 시조 224수, 잡가 3편, 가사 4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가집(歌集) 중에서 유일한 판본(板本)이며 순한글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특기할 것은 시조의 종장 끝구가 생략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여류시조의 특성
조선조 시대는 전반적으로 여성의 지위가 낮았으므로, 여류 문학도 그다지 발달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기녀(妓女)들의 시조 작품 가운데는 빼어난 것들이 있다. 그들의 노래는 유생들의 시조에 비하여 인간성이 짙다. 비록 천대를 받은 기녀들이지만 그들의 교양과 재질은 유생들에 비하여 조금도 손색이 없다. 선비들의 시조가 흔히 관념적 사고의 표출임에 대하여, 그들의 시조는 숨김 없는 구체적 서정인 점에서 우리의 흥미를 끌게 한다. 그것은 대개 임에 대한 그리움인데, 수절(守節)로 인해 생기는 그리움이기 때문에 더욱 간절하다. 또한 자유분방한 성정(性情)의 세계 속에서 참다운 인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수에 있어서는 아주 적지만, 개방된 인간성과 진솔한 생활 감정을 노래하고 있어, 모두 구슬과 같이 아름다운 작품으로서 부드럽고 매끈한 운치가 넘쳐흐른다.
현대 시조
신구문학(新舊文學)의 분수령인 갑오개혁을 맞아 시조는 고시조의 탈을 벗고 서서히 새 모습으로 이행하기 시작하였다. 그 향도역(嚮導役)을 맡은 이가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이다. 1926년에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대립하여 국민 문학론이 대두되면서 시조 부흥 운동이 전개되었고, 최초의 현대 시조집인 육당의 《백팔번뇌(百八煩惱)》가 그 해에 발간되었으며, 최남선,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자산(自山) 안확(安廓) 등의 작품은 아직도 옛스런 면이 있기는 하나 고시조와 현대시조의 교량적 구실을 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갑오개혁 이후의 시조를 모조리 현대 시조로 다루기보다는 이상 열거된 이들의 시조를 신시조(新時調)로 다루고 그 이후부터의 시조, 곧 가람(嘉藍) 이병기(李秉岐),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 이후의 작품을 현대 시조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시조를 본격적으로 현대화시키는 데 이바지한 사람은 이병기·이은상 등이며, 31년에는 《노산시조집》이, 47년에 《가람시조집》, 48년에 《담원(園) 시조집》(정인보 저) 등이 발간되어 허술한 시조 시단에 활기를 불어 넣었다. 주요한(朱耀翰)·양주동(梁柱東)을 비롯하여 기타 많은 문사들이 시조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일석(一石) 이희승(李熙昇)은 계속 시조다. 1938∼39년에 《문장(文章)》 《동아일보》 등을 통해 등단한 이호우(李鎬雨)·김상옥(金相沃) 등에 의해 시조는 심화되기 시작했으며, 특히 이호우는 현대 시조에서 내면 세계를 다루는 데 성공하여 현대 시조의 격을 높인 공이 크다. 조종현(趙宗玄)·김오남(金午男) 등의 활약에 이어 이영도(李永道)·정훈(丁薰) 등은 제나름의 특유한 영토를 마련하였다. 월하(月河) 이태극(李泰極)은 시조 전문지인 《시조문학》(1960년 창간)을 34집까지 이끌어온 공이 크다. 시조 중흥에 크게 기여한 정부 주최의 ‘개천 경축 백일장(1957년부터 3년간)에서는 정소파(鄭韶坡)·장순하(張諄河)·유성규(柳聖圭) 등이 배출되었고, 60년대 초에 신춘 문예를 통하여 정완영(鄭梡永)·이우종(李祐鍾)·박경용(朴敬用)·이근배(李根培) 등에 뒤이은 역량 있는 작가들이 속출하여 오늘의 시조 신단은 현역작가 수만도 약 200여 명에 달한다. 58년에는 《현대시조선총(現代時調選叢)》이 나왔으며, 64년에는 한국시조작가협회가 결성되었고 그 뒤 한국문인협회에는 시조분과가 마련되었다.
시조전문지로는 《시조문학》과 《현대시조》가 있으며, 시조시인에게만 주어지는 문학상으로는 노산 문학상·가람 문학상·정운 문학상 등이 있다. 이은상은 양장(兩章) 시조를 시도한 바 있으며, 단장(單章) 시조·동시조(童時調) 등을 시도한 이도 있다. 최근 신예작가들의 발랄·참신한 작품이 현대 시조의 앞날을 밝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