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 11월 4일 이태준이 태어났다. 이태준은 다섯 살과 여덟 살 때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었다. 그랬으니 학교를 제대로 다녔을 리 없다. 요즘의 초등학교를 마친 뒤 고학으로 휘문고보에 진학했지만 중퇴했고, 일본 유학도 겨우 1년 만에 포기했다.
이태준은 뛰어난 소설작품과 글쓰기 이론서 ‘문장 강화’로 유명하지만 이상을 세기의 시인으로 부상시킨 일로도 문학사에 이름을 남겼다. 그는 귀국 후 ‘개벽’ 등 잡지사에서 일하다가 여운형이 사장으로 있는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으로 근무했다. 그러던 중 이상의 천재성을 알아보았다.
그는 여운형에게 건의해 이상의 ‘오감도’가 지면에 연재될 수 있게 만들었다. 독자들의 거친 항의로 ‘오감도’는 절반만 실리고 중단되어 버렸지만 이태준의 노력에 힘입어 한국문학사는 이상이라는 거목을 품었다.
이태준은 뛰어난 작가를 현창하는 일도 문학 발달에 크게 이바지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백기만도 유사한 공로를 쌓았다. 이상화와 이장희가 시집 한 권 못 내고 일찍 타계한 뒤 백기만이 두 벗의 유고를 모아 ‘상화와 고월’을 발간했다. 백기만의 마음씀씀이가 없었으면 이상화와 이장희가 한국문학사에 이름을 아로새기는 데에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물론 출중한 작가를 세상에 드러나게 한 문단사적 업적이 아니라 자신의 사회적 활동을 통해 ‘최고선’의 향기를 꽃답게 발산한 이들도 있다. 열일곱 번이나 투옥된 독립운동가 이육사, 일장기 말소 의거를 일으킨 현진건 등이 바로 그런 면모를 보여준 불세출의 작가들이다.
이육사와 현진건이 지식인의 올바른 풍모를 보여준 ‘참 작가’로 숭앙받는 것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까닭이다. 친일 문인이 누구누구인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으므로 거명은 생략하려 한다. 요임금의 고위 관직 제안에 더러운 말을 들었다며 귀를 씻은 허유를 생각하면, 좋지 못한 이야기를 거듭 주고받을 까닭도 없을 터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의 이성적 기능이 탁월하게 작용할 때 지적인 덕이 쌓이고, 덕이 쌓이고 쌓여 최고선의 행복에 도달한다.”면서 “참된 앎을 가지면 덕을 쌓게 되고, 덕이 있는 사람에게는 행복이 찾아온다.”라고 했다. 인간다운 삶을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늘 생각하며 살아갈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