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수필》 6월호 특집 무심수필문학회
무심수필문학회는
서원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교실에서
이방주 수필가, 문학평론가에게 수필창작을 공부한
수필가들의 모임으로 2018년 8월 24일 창립되어
동인지 ≪무심수필≫을 3호까지 발간한 문학 동인회로
한국 전통수필을 지향하며 현재 이승애 회장을 중심으로
회원 27명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비광 ∥ 강현자
자연약국 ∥ 강흥구
품어주다∥고미화
뜸 들이는 시간 ∥ 권명희
수數를 세다∥ 김정옥
본심∥ 서강석
작품 1호 ∥ 신금철
보탑사에서 새로운 경전을 읽다 ∥ 이승애
인연 ∥ 장은영
강을 건너다 ∥ 정지연
이음매에 꽃잔디 ∥ 최명임
외로움을 쓰다 ∥ 최아영
유산 ∥ 최운숙
비광
강현자
복이라곤 어디에도 붙어있을 것 같지 않다. 벚꽃 같은 화사함도 없다. 그렇다고 보름달만큼 풍성함이 있는 것도 아니요, 富를 꿈꿀 처지도 아니다. 光은 光이건만 빛이 없다.
오노도후라는 일본 서예가가 있었다. 그는 아무리 노력해도 경지에 이르지 못함을 비관하여 낙향하던 길에 비를 만난다. 버드나무 아래서 비를 긋던 중 빗물에 휩쓸리지 않도록 나뭇가지를 잡으려 안간힘을 쓰는 개구리를 발견한다. 오노도후는 되지도 않을 일에 힘을 쏟는 개구리가 자신과 처지가 같다며 불쌍히 여긴다. 순간 불어온 강풍에 나무가 휘청거리자 개구리는 가까스로 가지를 붙잡고 탈출한다. 이를 본 오노도후는 큰 깨달음을 얻는다. 비광에 그려진 그림 이야기다.
오노도후의 긴 도포자락은 어렴풋이 새색시의 우울한 한복으로 환유되곤 했다. 悲광인가 비(雨)광인가. 나는 비광의 음산한 기운을 아련한 기억 어디쯤에 묻어두고 있었다.
사람들이 우르르 고갯마루로 몰려갔다. 신부가 곧 당도한다는 소식에 나도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따라나섰다. 웅성거리는 어른들 바짓가랑이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새색시의 행장은 저 멀리 까마득했다. 먹구름은 눈썹까지 내려앉고 음습한 바람이 고개를 타고 넘었다.
그날로 할머니는 그 새색시를 작은엄마라고 부르라 내게 이르셨다. 할머니의 반복되는 옛날이야기는 점점 시들해지고 대신에 재미있는 볼거리가 늘어났다. 안 그래도 짓궂던 삼촌은 부엌이건 어디건 새색시만 졸졸 따라다녔다. 두 분이 꽁냥꽁냥하는 모습에 나도 덩달아 웃음꽃을 피우곤 했다.
네 살배기 꼬마는 자연스레 할머니 손보다 작은엄마의 예쁜 미소가 좋았다. 할머니 품을 밀치고 늘 작은엄마 언저리에서 무슨 얘기든 쫑알거리며 따라다녔다. 신바람 나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러길 얼마나 지났을까. 언제부턴가 작은엄마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할머니께서는 그 방에 얼씬도 하지 말라는 분부를 내리셨다. 나는 또다시 작대기를 벗 삼아 마당가를 맴도는 시무룩한 날들을 보내야 했다. 우연히 열린 방문 사이로 아기를 안고 있는 작은엄마가 보였다. 내가 아닌 아기를 들여다보는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멀찌감치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작은엄마는 계면쩍은 얼굴로 얼른 나를 품어주셨다. 내게 보란 듯이 공연히 아기에게 혼을 내는가 하면 먹을 것이 있으면 나를 먼저 찾으셨다. 똥꼬에서 지렁이가 나왔다고 소스라쳤을 때도, 마을 앞 샘에 퐁당 빠졌을 때도, 불장난을 하다가 집 뒤 밤나무 묘목을 홀랑 태웠을 때도 작은엄마는 늘 내게 수호천사였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려고 나는 청주 집으로 왔고 그 후 몇 년이 지나 작은집도 도시로 이사를 나왔다. 청주로 천안으로 시장통에서 리어카를 끌며 온갖 행상을 다 했지만 살림은 늘 녹록지 않았다. 작은엄마의 볼멘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한숨과 한탄으로 세월을 엮어가셨다. 사촌들이 다 클 때까지 작은엄마의 허리는 펴질 줄 몰랐다. 평생 행운의 여신은 단 한 번도 그녀를 돌아보지 않았다. 당신 말씀마따나 어쩌면 지지리 복도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세상을 탓하거나 낙심하지는 않으셨다. 무슨 일이든 닥치는 대로 살아내시는 데는 이골이 나신 것 같았다. 힘들다 힘들다 하면서도 궁핍한 살림은 지혜로 메우시며 웃음을 잃지 않으셨다.
세태를 거스르거나 분노할 법도 하건만 항상 낮은 자세로 받아들이는 당신 곁엔 늘 성경책이 들려있었다. 찌든 삶에도 옳은 길밖에 모르시는 당신의 품을 언제라도 내게 내어주셨다. 부모에게서 받는 사랑을 당연히 여기듯 나 역시 작은엄마의 사랑을 당연히 여기며 살아왔다. 아니, 그냥 잊고 지냈다.
얼마 전 작은아버지를 뵈러 병원에 함께 가던 길이었다. 만나자마자 작은엄마는 난감해하며 어쩔 줄 몰라 하신다. 나를 위해 일부러 봉지에 꼭꼭 싸서 냉장고에 넣어둔 요구르트를 깜빡 잊으셨단다. 그게 뭐 대수냐며 내가 응수하자
“아녀, 네가 배 곯으믄 안 되능 겨.”
순간 나는 네 살, 작은엄마는 새댁이 되었다. 눈이 마주쳤다. 깊은 두 눈에 엄마만이 내어줄 수 있는 애틋함이 가득했다.
“작은엄마는 진짜 천사야. 어떻게 시집오자마자 시댁 조카를 맡아 키울 수가 있었어? 부담스럽고 싫었을 텐데.”
“천사는 무슨? 아유~ 시집을 와 보니께 쬐끄만 꼬맹이가 꼬물꼬물 노는데 바라만 봐도 좋았구먼. 내가 오히려 너한테 고마웠지.”
“그런데 이상해. 나는 비광을 보면 왜 작은엄마 시집오던 날이 생각나지?”
“아이구, 말도 마라. 시집오던 그 날 택시를 타고 오는데 도중에 택시가 고장 나는 바람에 그 먼 길을 걸어서 왔잖어. 하늘은 시커머니 날은 또 왜 그렇게 스산하던지. 좌우지간 그때부터 이미 꼬인 인생이었어.”
여느 때처럼 하신 푸념은 달관이었다. 자신을 타박하며 타박타박 걸어오신 당신의 생을 늘 그렇게 弄으로 받아넘기셨다. 사람살이라는 것이 어디 내 뜻대로 되는 것이던가. 모진 삶을 주어진 대로 순응하면서도 긍정으로 승화시키는 작은엄마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조카를 무한 사랑으로 품어주신 또 하나의 내 어머니이시다.
비를 긋던 오노도후는 개구리에게서 깨달음을 얻었지만 음산하던 고개를 넘어 시집온 작은엄마는 그렇게 인생 고개를 넘는 동안 스스로 개구리가 되어 飛光이 되신 것을.
『한국수필』 등단(2019),
한국수필가협회, 한국수필작가회, 내륙문학회, 충북수필문학회 회원. 무심수필문학회 주간
자연 약국
강흥구
진료 예약이 있어 병원에 갔다. 의사선생님의 진료를 받고 처방전을 받아 약국으로 갔다. 진열대에 가득 정리된 약이 산과 들에 가득한 약초들로 보였다. 잠시 후 약사가 조제한 약을 들고 나와 복용법을 설명해 주었다. 약만 보아도 아픈 데가 다 나은 듯했다. 약을 너무 과신하고 의존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은 된다. 그래도 꼬박꼬박 지시대로 잊지 않고 복용한다.
식후 30분에 약사의 지시대로 약을 복용한다. 먹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 같아 꼬박꼬박 먹는다. 약에 의존하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오늘도 노력해 본다. 적당한 운동과 적당한 음식물 섭취, 수분 섭취, 적당한 수면…. 노력한 결과는 몸의 변화로 나타날 것이다. 오늘도 가방을 걸머메고 운동도 할 겸 자연 약국을 방문한다.
건강하게 살려고 열심이 운동한다. 지금은 백세시대 모두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 국가에서 건강검진을 철저하게 해주고 미리 병을 찾아내어 치료하기 때문이다. 몸에 조금만 이상이 있어도 바로 병원을 찾고 진료 받고 약을 복용하기 때문에 웬만한 병은 다 치료할 수 있다.
몸에 좋다고 소문나면 모두 구해서 먹는다. 노화방지, 암 예방, 항산화작용을 한다고 입소문나면 어떻게든 구해서 먹는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늙지 않는다. 나이를 분간하기가 어렵다. 젊어 보인다. 미리 건강 보조 식품들을 섭취하기 때문에 늙지도 않고 병에 쉽게 걸리지도 않는다. 무공해 먹거리만 찾고 유기농으로 재배한 과일과 채소만 고집하기에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다.
봄부터 가을까지 산과 들에 나가면 눈에 띄는 모든 식물이 약이다. 봄나물, 여름 과일, 가을 버섯 모두가 자연이 베풀어주는 선물이다. 약국 진열대에 잘 정리되어 있는 약들과 같이 종류별로 가지런히 정리되어 자란다. 하찮은 풀포기 하나까지 모두가 약이다. 꽃과 줄기 뿌리까지 허투루 버릴 것이 없다.
자연은 거대한 제약회사다. 각종 치료 성분과 신체에 유익한 성분을 갖춘 약초들을 대량으로 생산하고 배출한다. 면역력 증가제, 암세포 억제제, 염증 치료제, 혈압 당뇨 조절제 등 필요로 하는 모든 성분의 약들을 생산해내는 제약회사다. 필요한 사람에게 의사의 처방전 없이도 공급해주는 약국이다.
약에 너무 의존해서는 안 된다. 죽을 것같이 아프다가도 약을 먹으면 살아난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이다. 원인을 찾아 치료받고 처방해야 하는데 우선 코앞에 닥친 위기만 넘기려 한다. 병의 원인을 제거하려고 규칙적으로 운동하여 정신 건강부터 서서히 치료해야 한다. 병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정신력이다. 죽겠다죽겠다 하지 말고 나는 할 수 있다 하는 극복의지를 가지면 반듯이 병을 물리칠 수 있다.
음식물 섭취를 통하여 면역력을 길러야 한다. 항체를 키우고 긍정적 사고를 지니고 생활한다면 어떠한 병도 찾아오지 못할 것이다. 이미 병에 걸린 뒤 치료를 시작하면 그만큼 몸이 축나고 시간도 많이 걸린다. 미리미리 자연약국을 방문하여 몸에 좋다는 약재를 구해서 효소나 술을 담가 이용하여 효과를 배가시켜 건강을 유지하면 좋겠다. 몸이 허약해지기 전에 미리 건강식품으로 면역력을 키워야 하겠다.
아무리 좋다는 약도 너무 과하게 먹으면 안 된다. 내 몸에 맞는지 맞지 않는지 조금씩 먹어보고 양을 늘려나가야 한다. 몸이 흡수하여 소화 시킬 수 있는 적당량을 섭취해야 한다. 자신의 체질에 맞는 약재들을 선택하여 알맞게 섭취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몸에 좋은 것이라도 무조건 다 좋은 것만은 아니다. 알고 먹어야 하는 것이다. 지나치면 독이 된다.
자연약국에는 모든 약품이 다 진열되어 있다. 영양제, 소화제, 지혈제, 진통제, 치료제, 통증완화제 등 필요로 하는 모든 약들이 진열되어 있다. 약국과 식품점을 겸하고 있다. 언제 어느 때든 필요로 할 때 채취하여 직접 약으로 만들어 먹을 수 있다. 자연 약국은 이와 같이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에게 한없이 베풀어준다.
자연 약국의 약을 복용하려면 그만큼 책임이 따른다. 의사의 처방과 약사의 조제 없이 내가 스스로 조제하여 복용하기 때문에 그에 따른 책임을 부담해야 한다. 사전 지식을 얻고 터득하여 적당량을 복용한다면 문제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자연약국이 주는 긍정의 힘을 함께 복용하면 탈보다는 건강이 찾아올 것이다.
자연에서 온 우리는 자연의 섭리에 따리 살아가고 있다. 자연을 거스르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삶은 자연이 지배한다. 자연에 순응하고 자연과 함께 행동하면 건강을 유지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고마운 자연 주는 대로 받고 따르리라. 자연 약국은 연중무휴. 언제든 기다리고 있다가 나누어준다.
강흥구 kanghk6824@naver.com
『수필과비평』 등단(2015)
수필과비평작가회, 충북수필문학회 회원
수필집 : 『닭서리』 『산밭에 핀 도라지꽃』
품어주다
고미화
라디오 주파수를 즐겨 듣는 클래식 채널에 맞추고 서울을 향해 출발했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고속도로를 달리는 시간, 이른 봄 차창 밖 풍경이 편안함을 더해준다. 겨우내 앙상한 가지로 당당하게 서 있는 가로수들마저 평화로워 보인다. 간간이 새집을 안고 서 있는 나무들도 눈에 띈다.
때마침 흘러나오는 음악이 오래 전에 보았던 뮤지컬 한 작품을 떠올리게 한다. 몇 년 전이지만 이 무렵에 공연된 작품이라 오가는 길 비슷한 풍경이 기억의 불씨를 지피는데 일조를 한 까닭일까?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은 잘 알다시피 우리말 번역이 ‘불쌍한 사람들’, ‘비참한 사람들’이다. 한 권의 소설 속에 프랑스 역사와 당대의 민중의 삶을 역동적으로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는 작품이다. 뮤지컬 또한 그랬다. 공연을 보고 나올 때의 감동이 아직도 생생하다.
뮤지컬《레미제라블》은 장발장의 감옥 생활부터 시작했다. 프랑스의 시민 혁명이 일어나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쫓고 쫓기는 인물들은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을 좇아 행동한다. 그런데 ‘사랑과 용서’라는 가치를 지닌 자와 잃거나 깨닫지 못해서 끝내 받아들이지 않은 자의 최후는 극명하게 갈라졌다.
탈옥과 신분 세탁으로 점철된 장발장의 삶은 불합리한 사회 구조와 혼란, 극심한 경제적 빈곤이 낳은 것이나 다름없다. 미리엘 주교의 따뜻한 품이 없었다면 장발장 또한 ‘자애와 관용’이라는 열매를 지니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미리엘 주교의 지혜와 자비로 그의 영혼에 사랑이라는 씨앗이 움텄다. 은촛대를 훔친 장발장을 품어준 미리엘 주교의 박애주의는 잘 발아되어 장발장의 영혼에 아름드리나무가 된다. 비루한 삶으로 생을 마감한 여인 팡틴의 딸 코제트를 헌신적인 사랑으로 키운 장발장. 그는 집요하게 자신을 뒤쫓던 자베르 경감이 시민 혁명군에 붙잡히자, 그들을 속이고 자베르 경감을 풀어주기까지 한다.
사랑하는 마리우스를 위해 대신 총을 맞아 죽어가면서도 아가페적인 사랑을 보여주는 에포닌, 거리의 떠돌이 신세이면서도 오갈 곳 없는 아이들을 돌보는 어린 소년 가브로슈의 본능적인 사랑은, 어이없게 죽어간 어린 생명들의 소식을 접하며 살아가는 우리를 부끄럽게 만든다. 반면 사랑이 자리할 여지가 없는 인물들은 자신을 향한 타인의 관용마저 받아들이지 못한다. 자베르 경감이나 로베스피에르가 그들이다. 일생을 장발장을 뒤쫓으며 자신의 직무에 충실했던 자베르 경감은 장발장의 관용에 자신의 신념이 무너지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자살을 하고 만다.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많은 사람들을 처형했던 로베스피에르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한때 정직하고 정의로운 인권변호사로서 시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그의 도덕적 판단 기준에 생명 존중 사상이나 인간에 대한 사랑이 없었다. 자애와 관용이 결여된 신념이 얼마나 공허한지를 작품 속 인물들이 말해 주었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 빠진 신념과 가치관은 마치 영혼이 없는 생명과 다름없다는 생각을 하게 한 작품이었다. 아쉬움 없이 박수갈채를 보내고 공연장을 나왔던 기억이 새롭다. 한참 동안 내 영혼을 유영하던 카타르시스가 차가운 밤공기 속으로 흩어지던 느낌이 아직도 고스란하다.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는 가로수 중엔 서둘러 올라온 연둣빛 새순이 보이는 것도 있다. 가지 사이에 걸쳐진 잿빛 새 둥주리가 마치 남루한 옷을 두른 객처럼 보인다. 인색함을 모르는 나무는 곧 싱그러운 초록빛 사랑으로 품을 키울 것이다. 더욱 포근한 보금자리로 새들을 품어주리라.
고미화 lemonbam39@daum.net
『한국수필』 등단(2018)
한국수필가협회, 한국수필작가회, 충북수필문학회 회원
뜸 들이는 시간
권명희
전기가 나갔다. 집안 가득 어둠이 들어앉았다. 더듬거리며 라이터를 찾아 촛불을 켰다. 어슴푸레 물체가 하나둘 고개를 내민다. 플래시를 찾아 들고 차단기를 올리려고 보니 그대로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라 전기 기술자를 불렀다.
손녀가 온다기에 전기를 과하게 사용했나 보다. 옥탑방의 냉기를 없애려고 전기 패널을 모두 켰다. 밥솥에 밥을 안치고, 인덕션에 요리를 하고, 전자레인지를 돌렸다. 그 많은 요구를 받아들이기 어려워 어딘가 끊어진 것이리라.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저녁상을 차린다. 어린 시절, 희미한 초롱불빛 아래서 마법처럼 저녁상을 차려내던 엄마처럼 나도 손녀의 저녁상을 차렸다.
손녀가 좋아하는 생선구이는 야외용 가스레인지에서 구워내고, 멸치볶음을 스테인리스 나눔 그릇에 담았다. 맑은 감잣국도 뜨고 이제 밥만 푸면 된다. 압력밥솥에서 밥을 푸려고 하니 뜸이 덜 들었다. 뜸이 덜 들어 밥알이 푸석거린다. 윤기도 나지 않고 질척하게 남아 있는 물기는 밥알의 응결을 방해하며 서로를 밀어내고 있었다. 뜸이 덜 든 밥을 사랑하는 손녀에게 먹이려니 마음이 불편하다.
원고청탁을 제때 보지 못했다. 독촉을 받고서야 부랴부랴 글을 찾아보았지만 이미 늦은 상태라 퇴고 시간이 없었다. 출근해야 하니 마음만 닦달하다 보내고야 말았다. 퇴근하고 읽어보니 여기저기서 툭툭 어설픈 문장이 튀어나온다. 뜸을 들이지 않은 밥처럼 밋밋하고 싱겁다. 그런 글을 독자에게 읽게 하는 것은 뜸도 들이지 않은 밥을 손녀에게 먹게 하는 짓이다.
기어이 일이 나고야 말았다. 어느 곳에 보낸 글이 도마 위에 올랐다. 잘못된 글의 사례를 내 글에 줄을 그어놓고 비평하고 있었다. 주어가 빠져버린 문장이 맥없이 널브러져 있었다. 발가벗겨져 네거리에 서 있는 것처럼 처참한 꼴을 하고 있었다. 하필이면 내 글로 비평할 게 뭐람! 내 안의 아이가 밤새 잠 못 들고 부끄러움에 뒤척였다.
이른 아침부터 SNS에 메시지가 연이어 울린다. 문우의 글이 상을 받는다고 축하의 메시지가 줄을 잇는다. 잘된 글이라고 모두가 감탄한다. 그 축하 메시지를 보며 그나마 남아있던 결기가 모두 빠져나갔다. 허겁지겁 두 글을 비교해 보았다. 잘된 글과 잘못된 글의 차이가 무엇일까 읽어보고 또 읽어보았다.
나름 잘 쓴 글이라 여겼던 글꼴이 밖에 내놓으니 시골에서 막 상경한 촌뜨기 몰골이다. 보따리 옆에 끼고 검정 고무신에 양장치마 입은 꼴이다. 내 자식은 다 예뻐 보이듯 선생님께서 잘 쓴다는 격려의 말에 제 주제를 진정 몰랐더란 말인가.
수필이라는 것이 조곤조곤 들려주는 이야기라고 그리도 들었건만 시장바닥에서 호객행위 하는 것처럼 내 목소리만 크게 질러대고 있는 꼴이지 않은가! 어지럽게 늘어놓은 물건처럼 정리되지 않고 그저 많이 보여주려는 욕심 덩어리가 가득하였다.
글 속에 삶의 철학이 있어야 하거늘 건들건들 거리며 불량기를 드러냈다. 천재라도 된 양, 복습도 모르고 예습도 멀리했다. 남들은 수십 번을 퇴고한다지만 몇 번 읽으면 싫증 느끼는 글을 지면에 겁도 없이 올리곤 했다. 뜸이 들지 않은 글을 염치없이 독자에게 들이밀고 있었다. 내 삶을 누군가 읽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욕심을 부린 것이리라. 그러나 그것이 욕심만으로 되는 건가.
선생님께서 수필 쓰기 전에 깊이 사유하라 하지 않았던가! 치곡(致曲)과 견색(見賾)을 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치곡이 대상의 곡절을 끝까지 궁구하는 것이고 견색이 모든 사람이 다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어서 나만 보는 것을 찾아내야 한다고 선생님께서 그리 이르지 않았던가! 그러나 받아들이는 것은 온전히 작가의 몫이다. 단어를 적절히 사용했는지, 문장끼리 호응은 잘 되었는지, 주제는 선명히 살아 있는지, 독자가 읽다가 멈추어 버리지는 않을지.
갈수록 멀게만 느껴지는 수필의 길에서 주저앉고만 싶다. 엄마 따라 나선 길에서 다리 아프다며 업어달라고 떼쓰던 아이처럼 주저앉아 울고만 싶다. 어떤 세상이건 고비가 있지 않을까! 어쩌면 지금이 고비를 맞은 것은 아닐까.
주저앉으려다 말고 일어서며 힘을 내본다. 다시 한발 한발 걸어봐야지. 선생님께서 글을 향한 뜨거운 마음을 안겨 주었으니 서서히 뜸을 들여야지. 나오지 않는 젖을 짜내야 하는 어미 마음처럼, 오아시스를 찾아 헤매는 나그네처럼, 설익은 글에 뜸을 들여 보자.
뜸이란, 시간이 필요하지 않은가! 서두르지 않고 절로 익도록 하는 시간 말이다. 뜸을 푹 들인 밥은 윤기가 흐르고 밥알 하나하나가 선명하게 살아 있으면서도 밥알들끼리 잘 어우러져 응결된 모습을 하고 있다. 쫀득쫀득 윤기 나는 글이 되는 그날을 기다리며 뜸을 들이리라. 외롭고 지루한 견딤의 시간을!
어디에 있을 플래시를 찾아 오늘도 더듬거려본다.
권명희 myonga33@hanmail.net
『수필과비평』 등단(2016).
충북수필문학회, 수필과비평작가회 회원. 무심수필문학회 부회장
수필집 : 『슬쩍 비켜서는 마음』외 1권
수數를 세다
김정옥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한 초저녁이다. 하나, 둘 보이던 별이 점점 늘어나니 헤아리기가 어렵다. 어릴 적 밤하늘을 바라보며 반짝이는 별을 세던 기억이 아슴푸레하다. 이제 문명의 빛 때문에 밤하늘의 별은 쉬이 보이지 않는다. 꼭꼭 숨어버린 별을 셀 수 없는 아쉬움 대신 나는 일상에서 수 세기를 하고 있다.
틈틈이 할 수 있는 운동으로 계단 오르기가 최고란다. 승강기를 타던 오랜 습관을 쉽게 버릴 수 있으려나.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당장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편한 길 놔두고 일부러 힘든 길로 돌아가려니 괜히 시작했나 하는 갈등이 인다. 숨이 턱까지 차더니 눈앞에 별이 두어 개 번쩍이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수를 세었다. 들숨과 날숨이 계단을 세는 것과 장단이 맞아 한결 숨이 편하다.
수필 강의를 듣는 문우들의 수를 세었다. ‘세 명이 빠졌네. 권 선생, 이 선생, 정 선생이 오늘은 왜 안 나왔지?’ 하릴없이 머릿수는 왜 세는지 모르겠지만 몇 명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오지랖이라고 할지 몰라도 나의 머릿수 세기는 문우에 대한 걱정이고 애정이다.
머릿수 세기는 아마 오랫동안 한 일에서 온 버릇이 아닐까 싶다. 초등학교 교사의 일과 시작은 학급 아이들 인원 체크부터이다. 아이들을 인솔해서 현장 학습을 갈 때면 아침 출발부터 돌아와 해산할 때까지 온종일 머릿수를 셌다. 아이들 하나하나에게 눈을 맞추면서 수가 하나씩 늘어간다. 교직 생활 40여 년 넘게 초롱초롱 빛나는 아기별들 수를 세었으니 수 세기와 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일인가 보다.
‘하나, 둘, 셋⤴’ 하며 탁자를 들어 옮긴다. 이건 단순한 숫자 세기가 아니다. 내 안에 있는 기운을 ‘셋’ 하는 순간 한 곳으로 모으려는 것이다. 남편과 힘을 합치기 위한 구령이다. 의미 없는 수 세기가 의미 있는 일이 되었다.
‘하나아, 두우울, 세엣.’ 어렸을 적 긴 줄넘기를 할 때는 친구들이 숫자에 음률을 넣었다. 이때 수 세기는 박자다. 그 박자에 일초라도 어긋나면 줄에 걸린다. 겁쟁이인 나는 걸려 넘어지는 것이 무서워 쉽사리 들어가지 못했다. 사람살이에 박자감과 리듬감은 괘종시계 추가 흔들흔들 움직이는 것만큼 중요하다. 나는 이 나이가 되었어도 낯선 자리에 선뜻 들어가지 못한다. 박자감이 서툴러 보이지 않는 줄에 걸려 넘어질까 두려운가 보다.
예전에는 결혼식, 약혼식, 회갑연, 졸업식 등 특별한 행사에 기념사진을 찍었다. “하나, 둘, 셋 하면 찍습니다.” 사진사의 주문이다. 이때 수 세기는 준비하라는 신호다. 미리 찍는 줄 알고 있었지만 번쩍하고 플래시가 터지면 나도 모르게 눈을 감는다. 마음의 준비가 덜 된 표를 낸다.
아, 그러고 보니 힘을 모을 때나 박자를 셀 때 하나, 둘, 셋에서 멈췄다. 이것은 석 三과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람들은 선후를 가리기가 애매할 때 가위, 바위, 보를 한다. 단 한 번으로 가리기는 허망하고 두 번에 그치자니 아쉽고 세 번은 해야 인정하고 마무리가 되었다. 결국 삼세번을 해야 끝이 난다. 삼세번은 ‘더도 덜도 없이 꼭 세 번’이라는 뜻이다. 여태 삼세번의 의미를 모르면서 ‘삼세번 하자.’ 외치고, 생각 없이 셋을 세었다. 알고 보니 3은 양수 1과 음수 2를 합한 완결의 숫자를 뜻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할 때 최소한 삼세번은 해보라고 한다. 인내와 끈기의 가르침이다. 삼고초려三顧草廬는 삼국지에서 유비가 제갈공명을 얻기 위해 그의 초가집으로 세 번 찾아갔다는 데서 유래한다. 인재를 맞아들이기 위해 참을성 있게 노력한다는 말이다. 적어도 세 번은 해봐야 후회가 없다는 뜻도 된다. 무릇 나는 무슨 일에 세 번까지 도전했는지 새삼 되돌아보게 된다.
예전에는 아기를 낳으면 삼칠일 동안 해에게도 달에게도 보이지 않았다. 산모와 함께 갓 태어난 아기를 오염된 바깥세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다. 삼신할미께 감사하며 세이레 동안 삿된 마음을 물리치고 조신하게 지내던 옛 풍습에서 생명 탄생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큰딸을 낳았을 때 친정어머니가 해산구완하시며 삼칠일 동안 매사에 조심하고 몸조리 잘해야 한다고 누누이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출산 후 부실한 딸이 하루빨리 회복되기를 비시며 묵주를 100번도 넘게 굴리셨지 싶다.
‘곰과 호랑이가 환웅을 찾아와 인간이 되게 해달라고 애원을 한다. 환웅은 쑥과 마늘 스무 쪽을 주면서 100일간 햇빛을 보지 않으면 소원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한다. 곰은 삼칠일 동안 몸을 삼가자 여자의 몸으로 인간이 됐지만, 호랑이는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동굴을 뛰쳐나갔다.’ 세상이 다 아는 단군신화 일부이다. 이렇게 단군신화 속에서 삼칠일을 세고 100일을 헤아리는 것을 보니 수를 세며 기다리는 의미가 줄탁동시啐琢同時 만큼 중요하게 다가온다. 어쩌면 수를 세는 것은 하늘이 열리는 창세기부터 시작된 것은 아닐까.
나는 최소한 삼세번까지 하는 것이 힘들다. 내 힘으로 어쩌지 못하는 삼재三災도 무섭다. 다섯 가지 괴로움에 인생살이가 아리다. 사람이 꼭 지켜야 할 세 가지 강령綱領과 다섯 가지 도리도 버겁다. 밖으로 뱉는 숫자는 열은 물론이고 백팔까지도 힘 안 들이고 셀 텐데, 편협한 자아自我로 수를 세는 것은 셋도 벅차다.
만만하게 생각하고 시도했던 아파트 계단 오르기는 작심삼일로 끝이 났다. 작심도 사흘을 넘겨야 굳은 결심으로 쳐 주는데 나는 삼 일도 못 셌으니 의지가 약하기로 허깨비 버금간다. 그럼에도 또다시 두 번째 작심을 해보리라.
이제부터 하루 삼세번 마음이나 바라보는 것은 어떨까. 설사 작심삼일이 될지라도 안 하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
『한국수필』 등단(20180, 한국수필가협회, 한국수필작가회, 내륙문학회, 충북수필문학회 회원, 무심수필문학회 감사, 제2회 한국수필독서문학상 수상.
본심
서강석
담장 아래 양지바른 곳을 살피고 또 살핀다. 감감무소식이다. 며칠 전 아내와 튤립 구근을 심었다. ‘물을 많이 줬나? 너무 깊이 심었나…’하고 아내가 조바심을 낸다. 저편 영산홍은 꽃망울이 싱그럽다. 봄은 기지개를 켜고 겨우내 움츠리던 만물이 꿈틀대고 있다. 농부들은 여기저기 밭을 갈고 퇴비를 준다. 기어코 튤립도 수줍은 듯 빼꼼히 싹을 내민다. 봄이다. 치열하지만 담담하고 잔잔하다. 순수하다.
긴 새끼줄을 둘러 기차 흉내를 내면서 기차놀이를 하던 어린 시절, 엄마 무릎을 베고 누워 ‘나는 착한 사람이 될래!’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던 그 어린 시절 나는 순수했다. 교복을 입은 꼬맹이 시절도 나름 치열했지만 평온하고 순수했다. 영산홍 꽃망울처럼, 동화 속 아이처럼….
어른이 된 우리 모두에게 아직도 어릴 적 순수함과 따듯한 정이 있다. 봉사와 나눔의 꿈이 있다. 마음속에 분명히 있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어린 시절에 비해 여러모로 많이 성장한 어른이 더 외롭고 더 각박하고 더 아파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아프다.
“내가 먹고 살기 위한 일, 나 자신만을 위한 그런 일 말고 이 세상에 와서 이 세상을 위한 가치 있는 일을 한 가지는 하고 가고 싶다. 삶을 돌아보며 ‘잘했어 이제 웃으며 죽어도 돼!’라고 스스로에게 칭찬하며 씨익 웃으며 눈을 감을 수 있으면 좋겠다.” 술좌석에서 어느 친구가 한 말이다. 다른 친구들이 “웬 철없는 소리냐?” “아직도 17세 어린애냐?”라며 핀잔이다. 순간, 그가 잊지 않고 간직한 꿈이 방향을 잃는다. 슬그머니 차갑고 냉정한 현실이 어깨를 들이민다.
오래전 내가 아는 흥부는 양심을 잃지 않는 선한 인물이었고 놀부는 인륜도 아랑곳 않는 물질에 집요한 악질적 인물로 평가되었었다. 하지만 요즘은 흥부가 염치없고 게으르고 모자라는 인물로, 놀부는 계산에 밝고 단호하고 판단력이 있는 유능한 인물로 대비되어 평가되는 분위기이다. 따듯한 정과 나눔의 가치가 슬프다.
어느 해 토지에 영양분을 많게 해서 수확을 많이 하려고 밭과 화단에 퇴비와 비료를 아주 많이 주고 영양분이 없어질세라 바로 꽃씨와 농작물을 심었다. 결과는 참담했다. 초보자의 욕심이 화를 부른 것이다. 뒤 돌아보면, 이렇듯 조금 더 잘 되려는 작은 욕심이 쌓이고 쌓여 조금씩 더 각박하고 더 외로워지는 삶을 가까이 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싶다. 수십 년 전 서울에서, 지나가는 과객이 청하는 밥상을 스스럼없이 차려주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이제는 거의 볼 수 없는 그런 소소한 행복이다. 그립다.
요즈음 지자체장 보궐선거 선거운동 기간이다. 매스컴이 시끄럽다. 지자체장 또는 국회의원 나아가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한 사람은 덕행으로 화합을 이루어 단체를 이끌며 매사에 모범을 보여야 한다. 그들은 지도자로서 사리사욕이 목표가 아닌 국가와 민족 또는 지자체를 위하여 봉사함을 사명으로 받들어야 한다. 사견이지만, 이번 선거에 출마한 후보들은 지도자는 아닌 듯하다. 상대의 약점을 캐고 서로 헤집어 물어뜯고 비방하면서도 떳떳하니 말이다.
이런 선도계층 때문에 일반 국민인 우리는 세상을 더 각박하고 춥고 아프게 체감한다. 부모가 서로 물어뜯고 비방하며 싸우는 가정에서 자란 자녀의 아픔과 같다. 하물며 자신의 이익이나 그가 속한 정당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모습을 온갖 매체가 실시간 중계까지 한다. 국민들은 그들을 보며 어떻게 행복 나눔을 배우며 무엇으로 우리 스스로 행복해 할 수 있겠는가. 암담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따듯한 정으로 사랑과 행복을 나누며 봉사를 실현하는 겸손하고 알찬 국민들이 곳곳이 많다. 오히려 그런 겸손한 국민이 지도자이다.
하지만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선도계층도 알찬 일반 국민도 아름답다.
사람들은 스치는 봄바람에 설레고 들에 핀 봄꽃의 미소에 행복해 한다. 마음 깊은 곳에 어릴 적 순수함과 따듯한 정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살다 보면 그를 잊고 산다. 어른이 되어가며 어린 시절 품었던 꿈을 점점 잊고 산다. 세상을 각박하게 사는 사람도 명예 권력에 눈이 어두워진 사람도 모두 순수하고 아름답다. 다만, 깜빡 어릴 적 본심을 잊었을 뿐이다.
봄이다. 나는 영산홍 꽃망울에서 봄을 찾았다. 꽃망울은 덤으로 어릴 적 본심도 찾아 주었다.
약력
『한국수필』 등단(2018)
한국수필가협회, 내륙문학회, 충북수필문학회 회원, 무심수필문학회 감사
충청매일 칼럼 <서강석의 회전의자> 집필 중
작품 1호
신금철
조바심이 났다. 20분을 기다리는 동안 줄곧 노랑머리 아들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아들이 대학교 일학년 때였다. 갑자기 머리 염색을 하고 싶다며 염색약을 사왔다. 아들이 머리에 염색약을 바르고 있는 동안 나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성에 눈뜰 나이에 멋지게 보이려는 아들의 호기심을 이해하기보다는 노랗게 물든 머리 색깔 때문에 행여 불량 청소년으로 보일까 봐 은근히 걱정되었다. 장발을 단속하던 시대를 살아온 나에게 지나친 색깔의 염색을 한 청년들이 평범하게 보이지 않던 때였다. 지금은 개성시대이니 머리칼의 색깔로 인격을 평가하는 건 편협한 생각일 게다.
아들은 매사에 성실하다. 말썽 없이 반듯하게 성장했고 마흔이 된 지금도 제 아내가 집에서 머리를 깎아주고 옷도 인터넷에서 저렴한 옷을 사 입는 알뜰꾼이다. 그런 아들이 무슨 용기로 염색을 하겠다고 했던지 모르겠다.
아들은 20분을 채 기다리지 못한 엄마의 걱정 때문에 시간도 안 됐는데 머리를 감았다. 내심 우려하던 내 마음과 달리 아들의 머리칼은 기존의 머리칼 색깔과 별 변화가 없었다. 엄마의 기우로 인해 용기 내어 준비한 아들의 염색은 실패작이었다. 그런데도 아들은 엄마를 원망하지 않고 웃음으로 넘겼다. 미안한 생각에 염색약을 사오면 다시 해주겠다고 했지만, 아들은 괜찮다고 했다. 그 후로 아들은 한 번도 염색을 하지 않았고 부모가 물려준 자연스러운 머리칼을 유지하고 있다. 지금까지도 옹졸했던 어미의 후회가 남아 슬그머니 미안해진다.
나는 소심하고 겁이 많다. 염색약을 사면서 부작용은 없는지 몇 번을 확인했는데도 걱정이 앞섰다. 염색약을 사놓고 며칠을 망설였다. 코로나 이후엔 사람이 많이 모인 곳을 피하느라 단골로 다니던 미용실을 끊고 아파트 앞 미용실을 이용했다. 그것도 머리가 하얀 숲을 이루고 파마가 다 풀려 초라해 보일 때가 되어야 마지못해 들르곤 했다. 길어진 머리를 묶을까 생각도 했으나 내게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집에서 염색해보려고 염색약을 사다 놓고는 망설이고 있었다.
날씨마저 잠포록하던 어느 날, 마음까지 우울했다. 책을 읽는 것도, 온종일 텔레비전을 보는 것도 지루했다. 무언가 상큼한 일이 일어나야 마음이 개운할 것 같았다. 곁에서 함께 텔레비전을 보던 남편이 나를 쳐다보더니 염색을 할 때가 되었다고 했다. 염색약을 사놓고도 망설이고 있다 하니 선뜻 자기가 해주겠노라고 했다. 그 말에 용기를 내어 허름한 옷을 입고 보자기를 몸에 둘렀다.
처음으로 집에서 염색을 하는지라 걱정이 되었다. 남편은 양손에 비닐장갑을 끼고 설명서대로 약을 섞은 후 봉지에 들어 있는 염색약을 말려놓은 우유팩에 넣고 붓으로 섞었다. 나는 욕실 바닥에 의자를 놓고 거울 앞에 앉았다. 남편은 염색약을 빗에 묻혀 머리카락에 머리를 빗듯 발랐다. 꼼꼼히 머리칼을 제치며 하얗게 변해버린 부분에 물을 들이느라 손이 더뎠다.
초조했다. 아들이 염색하던 날, 시간을 넘겨 머리칼의 색깔이 노랗게 변할까 걱정하던 때의 마음이었다. 차마 재촉은 못하고 시계 초침이 움직일 때마다 긴장이 되었다. 행여 시간이 오래 걸리면 머리카락 색이 이상해지는 건 아닐까?, 눈에라도 들어가면 어쩌나? 혹시 머리칼이 상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머릿속을 꽉 채웠다.
과연 어떤 작품이 나올까? 염색이 끝나고 기다려야 할 시간 1분 전, 좀 더 기다려보라는 남편의 말을 귓등으로 수돗물을 틀었다. 여러 번 샴푸를 하고 거울 앞에서 헤어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며 눈을 부릅뜨고 거울을 보았다. 희끗희끗하던 내 머리칼은 짙은 갈색으로 빛났다.
신기했다.최소의 경비, 시간 절약, 정성과 사랑의 손길이 닿았던 내 머리칼은 제 색깔을 찾아 환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미용실을 드나들며 염색으로 변한 머리칼을 이처럼 신기하게 여기던 때가 있었던가! 누군가에게는 신기할 것도 없을 일이 내게 이처럼 느껴진 건 모험에서 얻은 호기심의 결과요, 내 마음까지 물들여준 남편의 고마움 때문이리라.
회색의 반곱슬인 그의 머리칼은 중후한 멋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좀 더 젊게 보이게 하고 싶어 염색을 권해도 남편은 정작 본인은 하지 않는 자연주의자다. 그럼에도 아내의 머리 염색을 손수 해준 건 주름살 깊어가는 아내의 하얀 머리칼이 애처로워서일 게다.
나이 많은 부부는 달콤한 사랑보다는 은근한 정情으로 산다. 쉽게 성내지 않고 참을 줄 안다. 오래 가며 부드럽다. 상대를 배려하고 애처로워 할 줄도 안다. 남편은 권위를 줄였다. 농담도 자주 하고 청소도 세탁도 도맡아 한다. 나는 그를 위해 식단에 신경을 쓰고 그의 말에 귀 기울이고 뜻에 따르려고 노력한다. 남편도 나도 아름다운 노년을 보내려 노력하고 있다.
남편이 하얗게 바랜 내 머리칼을 물들여주듯 나는 그의 노년이 어둡지 않도록 그의 머리칼 대신에 마음에 꽃물을 들여 주어야겠다. 이제 염색을 해줄 남편이 있으니 정수리에 흰 머리가 뾰족이 내밀어도 걱정이 없다. 아들을 위한 나의 염색 작품은 실패였으나, 붓질이 덜 간 부분이 더러 있는 남편의 염색 ‘작품 1호’는 대체로 성공작成功作이었다.
신금철 sin3201@hanmail.net
『한국문인』등단(2000)
한국수필가협회, 청주문인협회, 충북수필문학회, 내륙문학회 회원
충북수필문학회 부회장, 무심수필문학회 회장 역임, 청주문인협회 부회장,
충북수필문학상, 청양문학상, 상사화축전 수필 공모 금상, 인산기행수필문학상 외 다수
수필집 《꽃수繡를 놓다》 외 4권
충청타임즈 칼럼 집필, 청주시 1인 1책 펴내기 강사
보탑사에서 새로운 경전을 읽다
이승애
산사가 가까워질수록 길은 조붓해지고 계곡물 소리가 청량하다. 마지막 모퉁이를 휘돌아 언덕을 오르자 커다란 느티나무가 올망졸망한 마을과 산사를 수호하고 있다. 그 모습이 어질고 순하다. 발걸음을 멈추고 노거수가 내려준 그늘 한 자락을 깔고 앉아 본다. 노목의 생이 파도처럼 밀려와 마음 벽에 부딪힌다.
일주문 없이 바로 천왕문이다. 위협적인 사천왕상이 섬뜩하다. 불순한 생각이라도 하였던가? 달음질치듯 문을 나서려는데 비파를 연주하며 활짝 웃는 지국천왕이 발길을 붙잡는다. 백성을 고루 살피는 안민의 천왕이라더니 그 웃음에 잔뜩 쫄렸던 마음이 느슨해진다.
목탑으로 향하는 계단이 가파르다. 한 칸 한 칸 오를 때마다 숨이 가빠온다. 들숨과 날숨을 통해 세속의 탁한 기운을 정화하라는 뜻인가 보다. 나름대로 의미를 두고 오르다 보니 범종각과 법고각이 마주하고 방문객을 맞이한다. 범종 소리는 부처님의 음성과 같아 중생들의 번뇌를 잊게 하고 지혜를 준다는데 그 소리가 참 궁금하다. 호기심을 누르고 돌아서는데 꽃들이 여기저기서 미소를 짓는다.
보련산 품에 폭 안긴 산사가 평화롭다. 여스님들의 도량으로 키워낸 갖가지 생명체의 숨결이 느긋하고 안온하다. 경내 심장부에 우뚝 솟은 3층 목탑은 기품이 넘치고 다부지다. 완만한 곡률로 이어지다 비상(飛上)하듯 날렵하게 올라간 추녀가 상승의 의미를 더해 준다. 시원한 바람이 한 줄금 불자 풍경의 고운 선율이 울려 퍼진다. 그 소리는 크지도 작지도 길지도 짧지도 높지도 낮지도 않아 더 깊고 그윽하다.
꽃 보살의 안내를 받으며 대웅전 안으로 들어가니 보통 사찰과는 달리 사방불이 모셔져 있다. 선뜩 들어가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 있는데 스님이 들어오라고 손짓을 한다. 종교가 다르면 부처님께 절을 올리지 않아도 된다며 앉기를 권한다. 그래도 예는 갖추어야 할 것 같아 무릎을 꿇고 부처님께 인사를 올린다. 한쪽에선 몇몇 신도들이 백팔배를 하는지 쉬지 않고 절을 하며 참회에 들었다. 그들은 이미 세속의 번뇌와 업장을 떨쳐버린 듯 마음이 평안해 보인다. 덩달아 내 마음에도 등불이 환하게 켜진다.
2층 법보전으로 올라가려는데 보살 한 분이 재빠르게 따라나선다. 그녀의 발걸음이 조심스럽다. 쿵쾅대던 우리의 발걸음도 조신해진다. 법보전은 또 다른 세계를 펼쳐 보인다. 중심부엔 팔만대장경 번역본이 안치되어 있다는 윤장대가 설치되어 있다. 기운이 예사롭지 않다. 윤장대를 빙빙 돌며 살펴보자 보살님은 합장을 하고 왼쪽으로 세 바퀴를 돌면 경전의 가르침을 깨달을 수 있다며 함께 돌기를 권한다. 호기심 반 진심 반으로 윤장대를 돌고 나니 신기하게도 불심 없는 나에게도 부처님의 가르침이 전해졌는지 그 무엇이 울컥울컥 올라온다.
또 하나의 계단을 오른다. 미륵전이다. 보살님 말씀으론 스님들이 미륵불이 현세로 출현하실 때 이곳이 거점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곳을 미륵전으로 하였단다. 보살님이 난간 쪽으로 다가가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별천지에 온 듯 황홀하다. 봉긋봉긋 솟아오른 보련산 자락이 아늑하다. 우리는 빼어난 절경에 감탄사를 연발하며 난간 쪽으로 우 몰려갔다. 그러자 보살님이 당황한 듯 우리를 막아섰다. 우선 미륵부처님께 인사를 올리란다. 머쓱해진 우리는 미륵삼존불 앞에 다소곳이 둘러섰다. 종교가 다르니 불심에 젖어 들기 쉽지 않다. 그래도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고 삼존불께 나도 성덕의 삶을 살게 해달라고 청해 본다.
목탑을 둘러보고 나와 불유각에서 감로수로 목을 축이니 근심 한 조각 씻겨 나간 듯 가뿐하다. 산신각을 둘러보고 오백 명의 나한이 모셔져 있다는 영산전으로 향하는데 오색 연등이 찬연하다. 불심으로 가득 찬 그들의 발원이 꼭 이루어지길 빌어 본다. 설법하시는 부처님께 시선이 가야 하는데 스님들께 먼저 눈길이 간다. 부처님의 말씀을 듣는 스님들의 표정이 시시만큼 다르다. 딴 곳을 보는 스님, 웃고 있는 스님, 입을 꾹 다물고 경청하는 스님, 발을 만지고 있는 스님 등 딴전을 피우는 스님들이 우리 속인과 닮았다는 생각에 슬며시 웃음이 난다. 한 곳을 바라보며 정진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나도 한때 나를 버리고 온전히 주님의 종으로 살겠다고 서약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러저러한 이유로 그 서약을 깨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안다. 인간의 결심은 한낱 바람과 같아서 끊임없이 나를 비우지 않으면 이중적인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새로운 경전에 심취해 있다 보니 어느새 뉘엿 해가 기운다. 아직 절반도 읽지 못한 경전이 아쉬워 미적대는 나를 위해 친구들은 열반하실 때의 부처님만은 꼭 뵙고 가자며 적조전으로 나를 이끈다. 열반에 드신 부처님의 모습이 잠자는 듯 편안해 보인다. 내가 있으되 내가 없는 공사상(空思想) 주인답다. 고락(苦樂)과 유무(有無)를 떠난 중도(中道)의 길을 걷다 가신 부처님의 삶과 내 삶이 오버랩 된다. 내 삶은 늘 중심을 잡지 못하는 자전거처럼 비틀거리고 치우치기 일쑤였다. 왜 그리 헛가지는 많은지 남과 비교하고, 집착하고, 욕심을 부렸다. 비우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움켜쥐고 내려놓지 못했던 마음이 부끄럽다.
부처님 대전에서 꽁꽁 처맸던 마음 풀어내니 한결 가벼워진다. 세파에 시달리다 산사의 서정이 사무치게 그리워지면 또다시 찾아가 훌훌 벗어버리고 오리라.
『한국수필』 등단(2014)
한국수필가협회, 한국수필작가회, 한국문인협회, 충북수필문학회 회원, 무심수필문학회장
수필집 : 《아버지의 손》《신호등》
인연
장은영
자존심도 수치심도 챙길 필요가 없다. 이리 잘리고 저리 찢긴 상처라도 부끄럽지 않다. 치렛거리도 필요치 않다. 눈이 오든, 비가 오든, 햇살이 곱든 상관없이 햇볕 쏟아지는 언덕배기에서 문득 만난 풀꽃처럼 늘 새롭고 정겹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와 나 사이가 별스럽게 유난한 건 아니다. 맘껏 자랑해도 비난이나 부러움 없이 찬양해 주어 좋고, 감추고 싶은 일을 거리낌 없이 털어놓아도 파잡지 않아서 좋을 뿐이다. 몰강스럽지도, 반지빠르지도 못한, 그렇다고 애교가 있거나 더분더분하지도 못하다. 당당해 뵈는 외양과는 달리 겁 많고 소심한, 앞자리보다는 구석 자리가 편한 사람이다. 이런 모습이 그녀와 나의 공통점이고, 그래서 죽이 맞았는지 모르지만, 어쨌든지 우리 인연은 44년을 한올지다.
등록금이 부족했다. 결혼과 동시에 남편이 대학원 공부를 시작한데다가 성급하게 집을 장만하면서 무리가 되었다. 이런 사정을 푸념했을 뿐인데, 뜻밖에도 “내가 줄게” 하는 게 아닌가. 차용증은 물론 이자도, 상환 기간도 없었다. 그녀의 삶은 넉넉했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쉽지는 않은 일이다. 무엇보다 겨우 풋낯을 면한 사이인데 덥석 내준다는 게 고마우면서도 이해되지 않았다. 이렇듯 우리 인연의 시작은 돈이었다. 아니, 그건 돈이 아니라 그녀의 인생 무대 위로 나를 초대하는 손짓이고, 내 인생 무대 위로 그녀가 올라서는 몸짓이었다. 돈이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우리 인연을 여는 서곡이 된 셈이다.
나는 늘 받기만 했다. 넉넉히 갖춘 그녀에게 내 도움이란 필요하지 않았다. 그녀 삶의 뒤안길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고, 신명나게 공감해주고, 고마움을 잊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데 인생의 고갯길은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인가 보다. 내 얘기가 아닌 것을 두고 여기서 미주알고주알 한다는 건 그녀에 대한 예의가 아닌지라 풀썩 쏟아놓을 수는 없지만, 내가 그녀의 고갯길에서 손잡아 줄 수 있다는 게 고마웠다. 인생은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기 마련이라는 삶의 이치가 감사했다.
그런데 나는, 그녀가 나의 필요를 채워 준 것은 우연이라기보다는 의도적인 관심이었을 거라 믿고 있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 어쩌면 이런 의도된 관심과 연출이 그녀와 내가 좋은 관계를 유지해 온 비결이지는 않았을까. 부부의 인연이든, 친구의 인연이든, 세상을 살면서 맺어진 인연을 평생의 좋은 관계로 뿌리내리려면 가끔은 다분히 관심에서 비롯된 의도적인 연출이 필요한 것이리라.
‘마지막 송금했습니다.’ 청년의 메일을 읽으면서 가슴이 아렸다. 그의 모진 삶이 떠올라 코끝이 찡했다. 얼른 답장을 보냈다. ‘고마워요.’ 다시 문자가 왔다. ‘베푼 은혜 생전 잊지 않을게요.’ 미리 고백하건대, 내가 손해 본 건 하나도 없다. 그러니 은혜라 할 것도 없다. 생전 잊지 않을 거라는 그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건 치졸한 짓이다. 나는 그저 청년을 믿고 잠시 기다려주었을 뿐이다.
그는 우리 집에 세 들어 있었다. 1년이 지나면서 세가 밀리더니 보증금을 바닥냈고, 그는 탈진 지경이었다. 나는 자신의 처지를 감추지 않는 그의 솔직함이 마음에 들었다. 일단 그를 믿어보기로 했다. 훗날 언제든 형편이 나아지면 받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나는 건물을 팔게 되었고, 계약을 마치고 나서야 청년 생각이 났다. 어쩌나. 갈 곳이 없는데…. 보증금은커녕 월세도 어려운 그가 몸을 뉠 곳은 없었다. 고심 끝에 보증금을 대줄 테니 형편대로 조금씩 갚으라고 제안했다. 나는 어느새 청년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며칠 후, 나는 청년의 과거 속으로 들어가 같이 울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이혼에서 비롯된 고통 속에서도 반듯하게 성장한 그가 대견했다. 가난이 힘든 것은 생존을 위한 육체적 고통 때문만이 아니라 맥없이 사그라드는 자신감과 자존심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청년의 자존심을 지켜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 돈을 잃어버린 돈이라 여기기로 마음먹었다. 만약 청년이 돈을 갚지 못한다면 그건 그가 츱츱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처지일 거라 여기기로 작정했다. 그런데 그 후 그는 다달이 형편에 따라 송금해왔고, 때론 건너뛰기도 하더니 드디어 마지막 송금을 한 것이다.
그런데 이상했다. 청년의 메일을 받고 나니 문득, 그녀에게 진 빚을 이제 다 갚았다는 생각이 들면서 홀가분했다. 물론 돈은 이내 갚았고, 갚아야 할 빚이 남아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내가 그녀에게서 받은 그대로 청년에게 베풀고 나서야 비로소 묵은 빚을 청산했다는 마음이 된 것이다. 지금 청년은 내 곁을 떠났다. 나는 그녀와 나의 인연이 나와 청년의 인연으로 이어진 것처럼 또다시 다른 누군가와의 인연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리라 믿고 있다. 소소한 것에서 물꼬가 트여 강을 이루듯, 작은 불씨에 불과한 우리 인연도 천지사방 어디에선가 하나, 둘 떠오르면 어느덧 별무리 물결을 이루고 주변이 화사해지지 않을까.
인연은 관계다. 나에겐 스쳐 지나치는 인연이 상대에게는 인생을 만나는 인연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흑백 가려내듯 선연과 악연을 구분해 인연을 맺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맺어진 인연이 좋은 관계로 뿌리내리도록 가꾸어 갈 뿐이다. 어차피 언젠가는 떠날 생명이다. 기왕에 그리될 생명이라면 내가 세상에 살다 갔다는 흔적 하나쯤은 남기고 싶다. 작을지라도 남의 마음속에 고마움으로 남아있는, 그런 인연으로 말이다. 인연의 끈은 세월 따라 가뭇없이 묻힐지라도 남에게 베푼 선행은 사라지지 않고 고마움으로 남기 마련이다. 그것이면 내가 살다 간 흔적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누구에게든 선한 흔적으로 남게 살아볼 일이다.
그녀와의 인연은 고마움으로 남았다. 청년과의 인연을 떠올리면 괜스레 행복하다. 그들과의 인연은 복이 되어 내게로 돌아왔다. 까치둥지 같은, 작고 소박하기 짝이 없는 인연으로 오늘도 나는 행복하다.
장은영 / 52jey@hanmail.net
『한국수필』 등단(2020). 한국수필가협회 회원
강을 건너다
정지연
하얀 햇살이 눈부시다. 구름 사이를 들락거리던 해가 드디어 빛을 토해내기 시작한다. 따가워지는 햇빛 사이로 멀리 강줄기의 푸른빛이 보이기 시작한다. 차창 밑으로 가다란 바람이 스며든다. 일행과 떨어져 객실 밖 통로로 나왔다. 굵어진 바람이 머리카락을 사이를 파고든다. 강을 거슬러 앞으로 달리던 기차가 휘어지는 앞머리를 따라 기다란 몸의 옆구리를 휜다. ‘철커덩.’ 기차가 철교 위로 발을 올린다. 발밑으로 시퍼런 강물이 감길 듯이 따라온다. 아래서부터 올라오는 강바람에 대피용 빨간 난간들이 휙 스쳐 지나간다. 숨 조이던 그날, 시커먼 석탄 연기 섞인 그 바람 대신 시원한 물 냄새가 파랗게 올라온다. ‘철커덕, 철거덕.’ 교각 이음새를 넘는 소리가 철다리 위에 몇 십 년 켜켜로 묻혀 있는 아찔한 기억을 깨우며 강물 위로 떨어진다.
‘빠앙~.’ 멀리 강 건너 산모롱이 뒤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기차가 소리를 지르며 자기의 존재를 알린다. 저만치 앞서 걷던 사람들이 철길에서 나와 대피용 난간으로 올라선다. 엄마도 둥글게 철책을 둘러친 빨간색 난간 위로 올라서며 ‘빨리!’ 다급하게 손을 내민다. 엄마 옆에 꼭 붙어 서 있어도 좁은 공간 그곳은 철길보다 더 무섭다. 반을 조금 넘어선 강 한가운데다. 허공에 떠있는 난간 밑 저 아래서 시퍼런 강물이 하얗게 용트림을 해대며 흐른다.
‘빵, 빠-앙—.’ 산모롱이를 도는가 싶던 기차가 금세 철교 위로 들어섰다. 주홍색에 검은색 띠를 두른 머리 위로 연기를 내뿜으며. 시커먼 긴 몸뚱이를 끌고 괴물처럼 커다란 얼굴로 무섭게 덤벼들고 있다. 엄청난 세기의 바람을 뿜어내며 드디어 레일 위로 바퀴들이 부딪치며 ‘덜컹덜컹, 치익치익!’ 커다란 비명을 지르며 지나간다. ‘악!….’ 겁먹은 울음을 삼키며 두 손으로 철책을 꼭 움켜쥔다. 눈을 꼭 감고 머리카락을 잡아 뽑을 듯이 쏟아지는 바람을 맞는다. 가슴이 터질 것 같다. 소리가 잦아들며 매캐한 석탄 냄새 풍기던 바람이 부드러워진다. 죽을 것 같던 지옥에서 벗어난다.
물색을 띠며 날아오르는 강바람을 가르고 기차는 긴 몸을 죽 펴고 강 가운데를 지나고 있다. 열두 살짜리 어린 딸을 데리고 이 아찔한 다리를 건너야 할 만큼 다급했던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강 건너 그곳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어릴 적 고향이 있었다. 시오리를 더 걸어 삼촌과 이모네가 살았고, 아버지의 산소가 있다. 한두 번 오가는 결행이 잦은 버스, 역이 너무 먼 기차 대신 특히 오늘 같은 날은 이 철교로 강을 건너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버스 결행으로 목행다리부터 철길을 걸어온 내 다리는 철교 앞에서 땅에 딱 들어붙었다. 그냥 버려두고 간다는 말에 까마득히 긴 이 철교로 강을 건너야만 했다. ‘괜찮아, 밑을 보지 말고 앞만 보고 가라.’고 말하는 엄마가 너무 미웠다. 다행히 누군가가 침목 위에 두 줄로 깔아놓은 송판을 밟는다. 자꾸만 저 아래 강물이 발을 잡는다. ‘떨어지면 죽는다.’ ‘이제 스무 개만 더 건너면 돼.’ 엄마의 말에 속도를 낸다. ‘하나, 둘, 셋….’ 한껏 데워진 햇빛에 눅눅해진 콜타르 냄새나는 까만 침목을 큰소리로 세며 기차를 만났던 무서움을 떨쳐낸다. 다시 또 스무 개. ‘스무 개’의 수가 자꾸 불어나며 빨개진 이마에도, 등에도 땀이 흐른다. ‘엄마는 진짜 거짓말쟁이!’
껑충 자갈 깔린 철길로 뛰어내린다. ‘살았다! 엄마, 나 잘했지?’ 빨개진 얼굴로 크게 소리친다. ‘잘했다, 잘했어!’ 엄마가 와락 나를 끌어안고 숨을 크게 내쉰다. 내 걱정에 엄마가 훨씬 힘들었던 걸 알았다. 무언가가 가슴부터 왈칵 올라온다.
처음 내 힘으로 건넌 이 강, 세상에서 가장 길고 무서웠던 기억 속의 이 철다리…. 몇 십 년이 지나서야 아찔한 두려움을 묻어둔 침목을 한 간씩 거둬들이며 다시 이 강을 건너고 있다. ‘철커덕철커덕’ 강 건너 언덕이 크게 다가오며 세상에서 가장 길었던 그 다리가 점점 짧아지며 바람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갑자기 우리네 인생길과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멈출 수도 되돌아 갈 수도 없는 길. 오늘이 어제가 되고 내일이 오늘이 되어 하나씩 침목처럼 이어지며 내게 주어진 세월의 강을 건너는…. 내가 살아낸 삶의 흔적들이 ‘오늘’로 쌓이며 강을 건너고 있다. 돌아보니 그 속엔 당당함보다 ‘진즉에 알았더라면….’ 이란 지워버리고 싶은 후회의 시간들이 더 많이 들어있다. 어느새 머리가 하얗게 굵어진 나이테. 나는 어디쯤에 와 있는 걸까? 후회 없는 ‘오늘’로 잘 건너가고 있는 걸까?
사라져가는 강줄기를 본다. 강을 건넌 기차는 덜컹거리는 울림소리 대신 조용히 아카시아 꽃 하얀 숲길을 지난다. 방금 전 무서움은 홀딱 까먹고 엄마 뒤에서 아카시아 꽃 송아리를 들고 하나씩 꽃을 따서 입에 넣는다. 꽃향기가 입속에서 같이 버무려지는 들척지근함에 폴짝폴짝 뛴다. 또 먼 산길을 걷는다, 몇 십 년 늙어버린 여린 향기가 입 속에 괸다. 흘러간 일들은 아름다운 그리움이다. 강을 건넌 나의 어린 기억도 빙그레 그리움이 되어 손을 흔든다.
정지연 jjy7365@hanmail.net
『한국수필』 등단 (2018)
한국수필가협회, 한국수필작가회, 충북수필문학회 회원
이음매에 꽃잔디
최명임
바위옹두라지가 걸리적거린다. 오래 제 자리로 굳히고 있었을 텐데 야산을 개간하며 내게 불편한 존재가 돼버렸다. 이란성 쌍둥이인지 머리가 둘이다. 캐 보니 처음부터 둘로 생긴 것이 아니라 환경이 갈라놓았다. 습한 땅속에 얼마나 오래 갇혀 있었는지 살점이 조각조각 부서진다. 바위도 환경의 지배를 받으니 견딜 수가 없나 보다. 고달픈 모습이다. 하나로 봉합하려면 바늘과 실이 될 무엇이 단단히 필요하겠다. 이음매에 흔적이 남겠지만, 그조차 아름다울 때가 있다. 둘로 갈라진 아픔이 만만치 않았을 거다.
둘째가 요즘 부쩍 우울해한다. 몇 년째 주말 부부로 산 탓도 있겠다. 젊은 어미들이 코로나19로 공황장애니, 우울증이니 못 살겠다고 맘카페에 넋두리가 분분하다. 손자 손녀 여섯 놈이 집에 갇혀서 어미들 속을 발칵 뒤집는다. 애물단지라고 비명을 지르는데 저들의 과거사는 잊었나 보다.
딸애가 발목 골절상을 입은 뒤 수술을 세 차례나 받았다. 그 탓인지 미숙아로 태어난 유하를 끌어안고 진을 빼고 나니 코로나19가 닥쳤다. 사위도 한 달째 외국 출장 중이다. 심장이 벌렁거리고 숨을 쉴 수가 없다고 가슴을 치며 헛숨만 내리 쉰다. 한의사는 산후 우울증이라 하고 집 앞 병원에서는 공황장애라고 처방을 내렸다.
딸애 마음을 단단히 붙들고 있던 매듭 하나가 툭 끊어져 버렸다. 딸애 일상이 흔들린다. 안타까워 누여놓고 막힌 가슴을 툭툭 치며 화기를 뱉어보라고 했다. 어설픈 재주로 혈 자리를 누르고 온몸을 쓸어내렸다. 비손하는 마음이 통했는지 스르르 잠이 든다. 여섯 살 어린것이 어미를 누여놓고 가슴을 톡톡 치며 ‘아~’해 보라고, 두 살 유하가 어미 가슴을 토닥토닥하더니 제가 ‘아~’ 하더라고 무척 감동한 눈치다. “자식이란 그런 것이여!” 애물愛物이고 애물단지이기도 하다.
딸애 나이 무렵 나도 육아 우울증에 시달렸다. 마음앓이를 하니 그 통증이 몸으로 왔다. 우리 어매는 조카자식까지 일곱을 키웠다고, 장모님도 여덟을 키우지 않았느냐며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울 어매 깨밭 매는데 가서 한 달만 있다가 오겠느냐고 했는데 내 고충은 녹녹히 보인 게다. 무정한 것이 아니라 무지했다. 어머니는 깨 씨를 뿌려놓고 잎이 나오면 쓸 만한 것은 두고 가차 없이 뽑았다. 어머니 옆에서 무자비하게 올라오는 잡초까지 호미로 북북 매고 있으면 우울감 따위는 사라졌을 거다. 깨닫는 것이 있을 테니 가보라는 언질은 아니었다.
내 편 하나만 있으면 견딜만하다. 친정어머니가 오시면 한 달을 계셨다. 엄니 살냄새만 맡아도 나은 것 같은데 속내를 털어놓으면 뜨거운 것이 쑥 빠져나갔다. 어머니는 평생 자식들의 아픈 곳을 꿰매느라 바늘 끝이 닳아 버렸다.
나는 여름부터 찬바람 불 때까지 새벽마다 도시락을 쌌다. 딸애와 두 집 손자 손녀 넷을 데리고 집을 나섰다. 물소리 들리고 초록 바람 부는 어디라도 가보자고 나서는데 안 계신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갈라진 바위를 볼 때마다 마음이 불편했다. 틈새를 메우면 하나가 될 텐데…. 바위 본질은 흙이 아닌가, 서너 줌 흙이면 하나가 되려나. 수백 년은 더 기다려야 하겠다. 그 사이 비바람이 덧없이 날려버릴 텐데.
틈은 내려갈수록 좁아지더니 심장을 꿰뚫지 못했다. 심장도 둘로 갈라진 줄 알았는데 다행이다. 틈은 종이 한 장 차이다. 마음을 다잡으면 부서질 허상이다.
틈새에 흙을 채우고 꽃잔디를 심었다. 이음매에 꽃이 피면 참 곱기도 하겠다. 그 근성이면 무리는 없겠으나 걱정이다. 삼복염천에 바위도 불덩이가 될 텐데 타죽거나, 얼어 죽거나, 오가는 비에 명맥을 유지한다 해도 얼마나 버티려나.
갈라진 바위틈에 봄이 왔다. 분홍색 꽃잔디로 와 주었다. 희생과 온화가 꽃말이라더니 필경 뿌리가 심장에 박여버린 것이다. 얼마나 애를 썼을까. 수 가닥 초록 색실로 꿰매 놓고 누가 알까, 분홍 꽃잎으로 덮어놓았다. ‘이음매에 꽃잔디라!’ 왈칵 감동이 밀려왔다. 상충인 줄 알았는데 상합이다. 바위는 당당히 자릴 잡고 앉아 나에게 묻는다.
갈라진 채로 존재하는 것이 어디 한 둘이랴. 헝클어진 채 시시때때로 반목을 일삼는데, 해서 세상은 이리도 시끄럽지 않은가.
나는 내 안에 못난 또 하나 나를 감추고 다닌다. 어떤 틈새에도 허세로 뭉친 장미는 위선임을 알았다. 꽃잔디의 근성이면 무리는 없겠다. 분합分合을 반복하는 두 마음이 하나가 되겠지. 나는 바위와 달라서 삿된 것일랑 버리고 나만 오롯했으면 좋겠다. 상합이 변덕을 부리면 또 분열을 조장할 테니.
딸을 힘들게 하는 두 마음 그 틈새에 꽃잔디를 심어야겠다. 아니 내가 꽃잔디가 돼 주어야겠다. 어머니도 자식의 풀린 매듭을 단단히 묶어주는 바늘과 실이었으니까. 딸의 내일이 명개 같이 정리될 터이다. 저도 어미이매 자식과 어미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에게 꽃잔디 임을 알게 되리라.
최명임 cmi3057@naver.com.
『문학저널』 등단(2014)
충북수필문학회, 내륙문학회, 충북문학저널, 한국문인협회, 한국산문 회원
수필집 『빈 둥지에 부는 바람』, 『언어를 줍다』
외로움을 쓰다
최아영
"저기요 사장님…."
돌아서는 나를 불러 세웠다. 맴도는 그녀의 언어가 왠지 슬플 것 같다. 도수 높은 안경을 낀 삼십대쯤으로 보이는 여성의 모기목소리다.
"타로점 하신다고 들었는데…."
처음부터 타로점을 할 생각으로 카페를 창업한 것은 아니었다. 호기심에 배우게 되었고 마침 카페를 열게 된시기와 딱 맞아 떨어졌던 것이다. 카페를 운영하면서 알음알음으로 시작한 타로 상담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만 두었다.
재미 삼아 할 일이 아니었다. 쉽게 피로해지는 병력을 가진나로서는 역시 무리였다. 하긴 건강상의 이유야 어쩌면 핑계일 수도 있겠다. 기실 가볍게 즐기는 ‘타로점’이라 할지라도 카드에 새겨진 숫자와 그림을 매개체로 사람의 일을 운운한다는 것이 온당하게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내가 타로에 자긍심을 가질 수 없었던 탓이 더 컸음을 고백한다.
그간의 소문으로 타로점보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으나 나는 정중하게 거절을 하였고 대신 찻잔을 마주하며 사람 사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늘 카페를 찾은 그녀 역시 다르지 않았다. 한 시간 남짓 함께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녀의 표정은 처음보다 다소 안정되어 보였다. 다행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이즘에도 신점神占 혹은 타고난 사주팔자를 맹신하거나 의지하는 젊은 주부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나는 어떤 ‘맘 카페’에 올라오는 사연을 보고 알게 되었다. 그들이 궁금했던 것은 정녕 무엇이었을까.
사십대 즈음에 아주 잠시 사주풀이에 입문한 적이 있었다. 게다가 예기치 않게 서울 근교의 어느 철학관에서 사무를 보게도 되었다. 모든 상담자들이 다 그랬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자신의 정체성에 관해 궁금해 하거나 가족 또는 소속된 곳에서의 갈등관계가 의외로 많았다. 그들은 한 결 같이 자신이 당면한 문제에 관해 심도 깊이 의논할만한 마땅한 대상이 없었던 것 같았다. 설령 있었다 하더라도 만족한 답을 얻지 못하여 종래에는 점집이나 철학관을 찾아드는가 싶다. 아마도 중대한 결정을 앞두었을 때 확신에 찬 조언이나 희망적인 메시지가 필요했으리라. 나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
주제넘게 들릴 수도 있겠으나 자영업을 오랫동안 해온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상대의 마음을 읽어내는 능력이 조금씩 키워져 왔음을 시인한다. 그것을 ‘눈치코치’라 해도 좋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사람들은 내게 별다른 경계심 없이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임에도 잘 풀어놓았다. 심지어 초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언을 구하는 경우도 종종 있어 왔다. 그렇다고 해서 나에게 특별한 능력이나 별다른 재주가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그들에게 내가 해 준 말도 해 줄 말도 딱히 없었다. 기껏해야 나의 경험담이나 제 삼자의 동일하거나 비슷한 사례를 말해주는 정도였다. 다만 잊지 않았던 것은 ‘아, 그렇겠구나.’ 하며 눈을 맞추어 고개를 끄덕이고 맞장구를 쳐주는 일이 고작이었다. 이런 나는 대체 어떤 사람이었던 걸까. 나는 누구에게 내 속을 내 놓을 수 있었으며 위로받을 수 있었던 것일까.
소녀 시절이었다. 성당근처에 살았는데 검은 옷에 흰 띠가 둘러진 베일을 쓴 수녀님이 걸어가는 모습만 보면걸음을 멈추고 한없이 바라다보았다. 나도 모르게 수녀님의 뒤를 따라가면서도 입가를 맴도는 구애의 음절을단 한마디도 꺼내놓지 못하였다. 마른 침만 꼴딱꼴딱 삼키곤 했다. 급기야 수녀님은 시야에서 저만치 멀어져 가 있고 나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서있어야 했다. 입안에서만 맴도는 옹알이는 수녀님의 살랑거리는 치마폭을 따라가고 있었지만 베일의 눈부신 일렁임과 함께 그만 스쳐지나가는 바람이 되고 말았다.
‘수녀님, 나는 왜 이럴까요. 왜 이렇게 삶이 힘들게 여겨질까요? 나만 그런가요? 지구별에 잘못 떨어진 건가요. 외톨이인 나를, 나를 제발 좀 어떻게 해 주세요’
생각하면 겨우 중학생이 무슨 번민이 그리도 많았을까 싶다. 당시 내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가 절실히 필요했지만 그 누구도 없었다. 간혹 앙드레지드나 니체 같은 서양 작가 몇몇과 라이너마리아릴케 시인의 알쏭달쏭한 시구詩句외에는….
2019년, 오늘도 나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지구의 어디로든 관념과 인식의 탈출구를 찾지 못해 우왕좌왕이다.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수많은 관계와 관계 속에 살고 있어도 여전히 외롭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 맺음’과 사람과 사람의 간격으로 인한 ‘고독감’이 마치 서로 비례관계라도 되는 것처럼. 애초 인간의 외로움은 운명이었을 것이다. 들숨과 날숨 속에 사정없이 들러붙어 떨쳐버린다고 될 그 무엇도 아닌, 그것은 차라리 숙명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외로움은 떨쳐버리는 것이 아니라 품는 것이었다. 외로움은 견디는 것이 아니라 아예 풍덩 뛰어들어 즐기는 것이었다. 이쯤 되면 고독이란 인간이어서 누릴 수 있는,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특혜쯤 되는가도 싶다.
우화羽化처럼 또 다른 한 生을 날아오르듯 고독한 영혼의 실오라기 하나 펜 끝에 모아 높고 푸르른 창공으로 ‘휘― 후―’ 날려 보련다. 가끔 오겠다며 돌아서는 그녀의 귓불을 향해 알 듯 말 듯 새어나오는 소리, 쓰자, 그리고 또 쓰자, 외롭지 않을 때 까지.
나를 향한 절규였다.
『대한 문학세계』 시 등단 (2018년) 『수필과비평』 수필 등단(2019)
진천 문인협회 회원
수필집 『울지마요, 첼로』
유산
최운숙
기암절벽에 묘기를 부리듯 아슬아슬하게 걸터앉은 사성암에 올랐다. 굽이치며 흐르는 섬진강과 탁 뜨인 구례 들녘이 잘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이다. 뒤로는 웅장하게 솟은 지리산의 운무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큰 법당의 처마는 바위에 닿을 듯 말 듯 한데 너른 암반의 장독대에서 구례평야를 굽어보는 항아리 몇 개를 보니 불현듯 엄마의 장독대가 떠오른다.
엄마의 장독대는 단출했다. 간장이 담긴 큰 항아리를 포함 예닐곱 개가 전부였지만 늘 북적거렸다. 봄이면 풀치와 디포리 젓갈을 담은 비릿한 냄새가 언제나 장독대를 에워쌌고, 여름이면 뒤란의 울창한 대나무 소리가 달려와 독을 타고 놀았다. 삼복더위를 지나 젓갈이 맛있게 익어갈 무렵이면 냄새가 온 동네에 진동했다.
오래 묵은 간장 항아리를 비워내면 정육면체의 결정체가 나왔다. 그 알갱이를 여러 번 씻어 종이 위에 말린 후, 절구에 빻은 가루소금은 한동안 수돗가 옆에 자리 잡고 치약을 대신해주곤 하였다. 겨울이면 우물가에 늘어선 동백이 마치, 하얀 도화지 위에 꽃을 그려내듯 했고, 땅에서 다시 피운 붉을 꽃을 밟고 뛰어다니는 작은 내 발자국도 꽃이 되었다.
밥할 때 엄마는 한 움큼 쌀을 아궁이 옆 목항아리에 부었다. 주둥이가 넓고 목이 긴 항아리는 쌀을 넣어주면 한 톨도 흘리지 않고 싹 먹어 치웠다. 그렇게 한 줌, 한 숟갈씩 나누는 쌀을 ‘성미쌀’이라 했고 쌀을 담는 단지를 ‘좀도리 항아리’라 불렀다. 배가 불룩 차오르면 예배당으로 가져가 어려운 이웃에게 나눌 수 있게 하였다. 다들 배고픈 시절이었지만 나눔은 복 짓는 일이라 생각했고 목항아리는 그런 일에 일조했다.
식초 항아리도 부뚜막에 있었다. 위아래가 둥글고 가운데는 잘록한 호리병 모양의 옹기에는 뭉글뭉글한 종자 초가 있어 막걸리와 소주를 부어 주면 시큼 새큼한 초를 만들어냈다. 부뚜막의 따뜻한 온기로 초는 알맞게 익어서 일 년 내내 맛있는 초장을 만들어 먹을 수 있었다. 아버지가 낚시에서 돌아오는 날이면 초는 들썩들썩 새콤한 냄새를 피우며 좋아했다. 싱싱한 생선에 초장에 넣어 먹으면 몸도 마음도 몽글몽글해졌다. 초병의 마개로는 솔잎을 사용하였는데 초는 솔잎 사이를 들락날락하며 오래도록 씨알을 만들어 냈다. 좀도리 항아리와 초병은 엄마가 성주신처럼 받들며 비손하는 대상이었다.
엄마가 떠나자 장독대도 이사했다. 장맛의 일등 공신이었던 옹기는 큰 장독대를 가진 관순이네와 옆집 순복이네로 따라나섰다. 장독대에 쏟아버린 오래 묵은 씨간장은 쉬 떠나지 못하고 한참 동안 냄새를 피웠다. 성한 것들은 떠나고 금가고 쓸모없는 옹기 몇 개가 동백나무 밑에 나동그라져 있다. 버려진 옹기 두 개를 거두어 깨끗이 씻어 햇살 좋은 고층 아파트 베란다에 나란히 놓았다. 철사로 동여맨 볼품없는 장독은 더는 늙을 것 같지 않지만, 여전히 시간은 흐르고 홀연히 떠난 엄마는 점점 멀어져 간다.
날아갈 듯 절벽에 자리한 사성암은 무시로 변하는 사람의 마음을 품어 안아 간절히 기도하면 소망 하나는 이뤄진단다. 아마도 소망을 이룬 뒤에는 반드시 성찰하라는 스님의 기도가 서려 있는 것은 아닐까. 절집의 장독대는 작다. 스님의 발원처럼 비우는 중인지도 모른다. 담백하고 깔끔함으로 명성을 얻은 종가의 장독대는 그곳을 찾는 사람을 위해 요긴하게 쓰이지만, 사찰의 작은 장독대는 기도를 위해 쓰일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마음이 약해 자주 흔들이는 사람은 늘 기도로 살기 때문이다. 기도는 나약한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의지하고 믿는 마지막 보루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물려받은 유산 하나쯤 가지고 산다. 그것은 평생을 함께하며 길이 되기도 빛이 되기도 한다. 한 숟갈의 나눔도, 종자 초의 역할도 못 하는 나는 오래된 항아리보다 나을 것 없이 살지만, 가끔은 옹기를 어루만지며 독 안에 스며있는 엄마의 간절한 기도가 내 안에 들어오길 소망한다.
작지만 가장 큰 기도가 엄마의 항아리에 성미쌀처럼 쌓인다.
최운숙 ws1568@naver.com
월간 『수필과비평』 등단(2018)
수필과비평작가회, 충북수필문학회 회원, 무심수필문학회 사무국장
첫댓글 평화로운 일요일에 선생님들의 수필을 읽어 내려가다보니 마음이 평안해지고 고요한 아름다움이 느껴집니다. 생이, 사람이 모두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감사합니다~
이호윤선생님 관심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호윤 선생님도 이제 곧 단에 올라서시게 될 겁니다.
무심수필회원님들의 뜨거운 열정은 아무도 따라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
후덜덜
작품이 좋아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