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혼식
국군의 날에 반듯한 군인들의 행진과 선보이는 어마어마한 현무 미사일을 보고 놀랐다. 올해는 추석 연휴로 미리 엿새나 앞당겼다. 몇 해 못 보다가 추적추적 비 오는 날 행사 모습을 봤다. 팔월이면 바닷물도 바뀌어서 서늘해지는데 무슨 일로 구월이 다 가도록 이리 무덥나. 시도 때도 없이 내려 텃밭의 채소가 여러 번 짓물렀다.
낙동강 물이 차오르고 바다의 사리가 겹쳐 가물 때 물주는 그릇과 농기구가 어디론가 다 떠내려가 어설프기만 하다. 그래도 간신히 반쯤 살아난 푸성귀가 너풀너풀 오동잎처럼 넓적해져 간다. 추석 대목장에 배추와 무, 상추, 대파가 엄청 비싸다. 궂은 날씨 속에도 미나리와 돌나물, 참나물이 도랑 가에 잘 자란다. 둑엔 박과 호박, 오이가 줄줄이 뻗어나가며 동그랗고 길쭉한 열매가 주렁주렁 달리니 좀 으쓱해진다.
내일이 10월 1일 50년 전 아내를 만나던 날이다. 이곳 낯선 경남 고성을 찾아왔다. 아들딸이 챙겨주었다. 여기 뭣이 있나 했는데 대단하다. 박물관에 들렀는데 선조들의 돌칼과 문드러진 쇠칼, 반짝이는 금귀걸이, 반지가 보인다. 가까운 함안의 아라가야와 함께 소가야의 발자취다. 뒤편으로 여러 능을 돌아보고 앞 코스모스 정원을 밟았다.
빗방울이 떨어지더니 점차 개이며 화창하다.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어서 드넓은 왕릉 잔디밭을 거닐거나 꽃밭을 지날 때 좋은 나들이라고 설레어 사진을 찍어댔다. ‘오두산 치유 숲’ 넓은 단칸방에서 추어탕 저녁을 들고 윷을 쳤다. 부자와 모녀로 편이 되었다 명절이나 생일이면 모여 어김없이 던지는데 올핸 금혼이어서 모처럼 바깥 시골 펜션에서다. 좋은 곳에서 밤늦도록 부대꼈다.
이길 거라 두 동이나 석 동을 묶어 가면서 뒤뚱거리게 된다. 뒤따라온 말에 그만 잡히면 뒤로 벌렁 넘어져 바닥을 치고 ‘안 돼-’하는 모습이 재밌다. 장모 산소에서 곧은 나무를 베어 만든 윷가락이다. 이게 골고루 잘 나오고 비슷하게 이기고 지는 것을 거듭해서 가족을 하나로 똘똘 오순도순 묶어준다. 어쩌다 이어서 이길 때가 있는데 아내와 딸의 눈빛이 달라지며 뿌루퉁한 게 웃음을 자아낸다.
아침상에서 “아빤 다시 태어나면 엄마와 결혼해요?” “그럼 나는 만나고 싶다.” 느닷없는 딸의 물음에 얼른 말했다. 오늘이 주일이다. 읍내로 가려다가 가까운 그레이스 정원 ‘숲속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기로 했다. 할머니 한 분이 정성껏 만든 수만 평의 깊은 산 중턱 공원이다. 입구에서 입장료를 받아 얼마나 좋은 곳일까 했다.
긴 십여 년 한 여인의 몸으로 이 산 계곡을 아름답게 꽃밭 숲으로 가꿨나. 나지막한 돌담이 이리저리 길을 안내한다. 높다란 그늘나무가 골짝을 가득가득 메우고 길섶 수국과 풀꽃이 가지런하게 자랐다. 우물 같은 그늘 못에 금붕어가 바글바글 모여 논다. 큰 단지를 눕혔는데 들어가 쉬는 곳이다.
인공폭포를 만들어 흐르게 하는가 하면 간이도서관도 있다. 마당에 눕는 편한 의자를 여러 개 놓았다. 앉아서 ‘천부여 의지 없어서’ 찬송가를 늘어지게 불렀다. 지나는 사람들이 쳐다보면서 사진을 잇달아 찍는다. 하모니카 소리가 산속에 가늘게 퍼지니 낭랑했는가 보다. 요즘 누가 예전 악기를 부는가이다.
높이 솟은 팔작지붕의 ‘숲속교회’가 나타났다. 퇴임 목사가 예배를 드렸다. 오늘은 이웃교회 장로와 친구가 찾아와 앞에 나가 찬양을 올렸다. 우리 가족도 함께 앉았다. 참석이 고맙고 반가운가. 권사가 찬송과 주보를 갖다주며 편한 가운데 자리를 안내했다. 목사 혼자서 찬양 인도와 기도, 설교, 광고까지 했다.
믿음은 예수의 말씀을 좇아 따르는 것이다. 몇 번이나 힘주어 말했다. 귀에 쏙쏙 들어왔다. 마치고 내려오면서 맷돌로 수놓은 골목길로 들어갔다가 나오는데 옆에서 회장님으로 부르는 권사가 선물을 안겨준다. 이 그레이스 정원을 만든 할머니다. 수국 대여섯 포기가 든 어여쁜 화분이다. 태종대와 가덕도 외양포 언덕의 수국은 초여름에 피곤 시드는데 여긴 아직도 남아있다. 그러잖아도 텃밭 언덕에 심었으면 하고 찾았는데 잘 됐다.
예배 때마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들어오길 기다렸다. 가끔 오다가다 한둘이 들리지만 지나친다. 이곳 낙원을 이룬 회장 할머니와 반주하는 딸 서넛이 고작이다. 오늘은 가득한 느낌이었는가 꽤 기분이 좋은 권사이다. 높은 구두도 신고 붉은 입술에 고운 화장이 젊어 보인다는 딸의 말에 팔순이고 일할 땐 차림이 형편없다는 말을 서슴없이 한다.
다음에 또 오리라 맘먹고 뒤돌아보며 내려왔다. 이럭저럭 맥없이 살다가 깜짝 놀란다. 내 나이에-. 아직 젊은 줄 알았는데 언제 이렇게 됐나. 어제가 예순이었는데 눈 껌벅하니 팔십 고개다. 그동안 살붙이를 위한다고 했지만 어리석고 무디게 산 걸 되살펴 본다. 어쩌든지 집안 어른인 아버지는 식솔을 위해 부드럽고 느긋하며 너그러운 말을 일삼아야 한다.
더더욱 아들딸이 어머니에게 잘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존댓말을 쓰도록 이른다. 복종 아니 순종하는 마음을 갖게 한다. 딸은 그렇게 하는 것 같다. 아들도 벗어나다가 따르기를 애쓰는 게 보인다. 그러자니 나부터 빙그레 웃음을 머금고 좋다는 말과 잘한다는 얘기를 달고 살아야 힘을 낸다. 혹 일그러진 말을 들으면 괜찮다 그럴 수 있다. 해 저물도록 두지 말고 잊어버리기다.
반세기가 얼마나 긴 세월인가 시부모와 남편, 자녀를 밤낮으로 위하고 믿음으로 이끌며 집안을 잘 건사한 아내다. 하루 세끼 차려 내고 빨래며 빗자루 들고 설치는 일이 예삿일이 아니다. 뒤늦게서야 그걸 알아차리는구나. 아침 들고 후딱 나돌아다녀야 한다. 여자는 남정네가 방문 닫고 질척하게 들앉아 있는 걸 싫어한다.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긴다. 기도하며 행복에 잠기는 고요를 여태 모르고 지났다. 아옹다옹 북적거리는 집안에 시달리다가 늙어지면 그렇게 되는가 보다. 오순도순 더불어 사는 건 젊었을 때이다. 맨날 팔다리가 저리고 허리가 시큰거리도록 일했다. 남편과 아들딸 잘되라 한평생 내 몸 던져 살았다. 이게 뭔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주글주글 골 깊어지고 여기저기 쑤셔대며 아파도 세상 어머니는 다 그러려니 한다.
팔불출이래도 좋다. 황혼 아니 금혼에 철이 드는가. 사냥꾼이 가까이 와도 모르는 들꿩처럼 너무 늦어서 뭘 어쩔까. 다음 세상은 무슨. 지금 금붙이 선물을 살펴보자꾸나.
첫댓글 금혼식 축하드립니다~~!!
아드님 따님 같이 오붓한시간 보내셨네요.
오십년세월이 결코 짧지않은 세월이거늘,지혜롭게 지내오신두분....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쌤!!
여름이 바로 겨울로 바뀌는 느낌입니다..
요 몇 해 봄 가을은 없어요.
태양이 해마다 뜨거워지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 축하합니다
고생하신 사모님 은근하게
칭찬하시는 표현이 존경스럽습니다
회혼식 때까지 멋지고 건강하게 생을 보내세요
저도 내년이 50 주년 이예요
글 감명 깊고 수고 하셨습니다
홍시와 대추가 맛있습니다.
내년 봄에 살구 사러 가겠습니다.
선생님! 금혼식 축하드립니다.
참 아름다운 동반자로 사신 모습이 느껴지네요. 부럽습니다.
건강 잘 챙기십시오.^^
밥하고 빨래하며 집안일 하는 여자들이 얼마나 고마운 가를 늦게 알았습니다.
남자가 일하는 게 커다란 것인가 했는데 그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허리 휘도록 집안 일하는 여자 만큼은 턱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