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밤 /유금
저녁 먹자 초승달이 아까워
사립문 닫고 더위에 누웠네
하늘 맑으니 모기가 귓가를 지나고
별 흩어지니 거미가 처마로 내려오네
박꽃은 하얗게 피고
국화잎은 점점 커지네
이웃집 아이 달노래 부르는데
그 가락 어찌 그리 간드러진지
(유금: 조선의 실학자, 시인)
38도라니 이럴 수가 /이혜우
여보게 삼복더위 양반님
좀 참으면 안 되겠나
무슨 감정이 그리 서려 있어
복수심으로 그러는가
불쌍한 서민들만 고생하니
좀 연구를 해서
해당자들만 괴롭히지
산천초목 동식물 모두 괴롭히나
세상사 하 뒤숭숭하여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르겠네
이제까지 살아오는 동안
이렇게 이유 없이 혹독하지 않고 했다네
아무리 그래봤자 갈 때 되면 가는 것이니
좀 정신 차리시게 이런 찜통이 어디 있나
어차피 갈 것을 복수 당하지 않게 하시게나
너나 할 것 없이 말년이 좋아야지
그냥 좋은 것 /원태연
그냥 좋은 것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
어디가 좋고
무엇이 마음에 들면,
언제나 같을 수가 없는 사람
어느 순간 식상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냥 좋은 것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
특별히 끌리는 부분도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 때문에 그가 좋은 것이 아니라
그가 좋아 그 부분이 좋은 것입니다.
그냥 좋은 것이
그저 좋은 것입니다.
그냥 좋은 것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
마음의 우체통 /전병조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날마다 마음의 우체통을 열어 본다
오늘은 어떤 사연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날마다 무지개 편지를 쓴다
손 모아 기도를 드리듯
또박또박 순정의 잉크 방울로
마음의 편지지를 물들인다
발신인이 없어도
수취인이 없어도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말없이 말없이 편지를 주고받는다
그대 영혼을 울리는
그대 귓전을 맴도는
사랑한다는 그 말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날마다 편지를 쓰고
날마다 마음의 우체통을 열어 본다
어디로 갈 것인가?
정년 퇴임한 지 몇 개월 되지 않은 한 교수가 방송에 출연할 일이 생겨서 방송국에 갔다.
낯선 분위기에 눌려 두리번거리며 수위 아저씨에게 다가 갔더니, 말도 꺼내기 전에 "어디서 왔어요?"라고 묻더라는 것.
퇴직해서 소속이 없어진 그분은 당황한 나머지 "집에서 왔어요."라고 대답해 한바탕 웃은 적이 있는데.
다른 한 교수도 방송국에서 똑같은 경우를 당한 모양이다.
그러나 성격이 대찬 그분은 이렇게 호통을 쳤다고 한다.
"여보시오. '어디서 왔냐'고 묻지 마시고 '어디로 갈 것인지' 물어 보시오.
나 ○○프로에서 출연해 달라고 해서 왔소."
마침 그 프로그램 진행자인 제자가 멀리서 보고 달려와 모셨다.
그 제자는 "역시 우리 교수님 말씀은 다 철학이예요.
우리의 인생에서도 '어디서 왔냐?'보다는 '어디로 갈 것인가?'가 더 중요한 게 아니겠어요."라고 말했다.
경기도 파주에 있는 '반구정(伴鷗亭)'에는 황희 정승이 87세에 관직에서 물러나 돌아가시기 전까지 3년 동안 갈매기를 벗하며
여생을 보내셨다는 유적지가 있다. 그곳 기념관에는 황희 정승의 유명한 이야기가 소개돼 있는데, 그중에서도 김종서 장군과
관련된 일화가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왔다.
김종서 장군은 일찍부터 용맹을 떨친 호랑이 같은 장수여서 아무래도 좀 겸손함이 부족했는지 중신회의(重臣會議)에서
삐딱하게 앉아 있었던 모양이다.
그 자세가 눈에 거슬리었지만 누구 하나 아무말을 못하고 있는데 황희 정승이 아랫사람을 불러서 일렀다.
"장군께서 앉아 계신 모습이 삐딱한 걸 보니 의자가 삐뚤어진 모양이다. 빨리 가서 반듯하게 고쳐 오너라."
장군이 깜짝 놀라 자세를 고쳐 앉았음은 물론이다.
그런 식으로 가끔 장군의 잘못을 따끔하게 지적하자, 한 중신이 유독 장군에게 더 엄격한 이유를 물었다고 한다.
"장군은 앞으로 나라의 큰 일을 맡아서 하실 분이기 때문이오.
혹시라도 장군의 훌륭한 능력을 작은 결점 때문에 그르칠까 염려되어서 그러오."
황희 정승은 이미 어디로 갈 것인지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자신은 늙어 물러갈 것이고 다음 세대가 뒤를 이어갈 것이기에 미래를 내다본 것.
마치 지금의 자리가 영원하기라도 한 것처럼 어디로 갈 것인지는 모르고 어디서 온 것만 내세우면 미래가 없다.
우리도 때때로 자문해 봐야 한다.
'어디로 갈 것인가?'를...
* '나무 사이로 난 길'
이런 길 한번 걸어보실래요.(상단 음악표시 클릭, 음악 들으시면서)
http://www.geimian.com/wx/4478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