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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시인 조운(曺雲) 평전 ③ / 조병무 | ||||||||||
(3) 구름 다리 위를 거닐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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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은 무척 활달하고 적극적인 성품으로 향리의 문화 활동과 계몽운동을 주도했음을 여러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의 작품은 월북 이후 당국에 의해 금서로 지정되어 읽을 수 없었고 연구 대상에서도 제외되었다. 그러나 1988년 그의 해금 소식이 알려지자 고향 영광에서는 여러 분야의 유지들이 조운 기념사업회를 조직하는 열의를 보였다. 고향 땅 영광은 조운이 고향을 위하여 헌신한 업적과 그의 매력적인 인품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많은 월북 문학인에 대하여 네 번에 걸쳐 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해금 조처가 있어서 해금 문학인에 대한 연구와 출판물 발간에 활력을 불어넣기도 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문인의 출신지 향리에서 대대적으로 기념사업을 벌이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았다. 따라서 1988년 7월 19일 그의 해금 소식과 함께 향리에서 1990년 조운에 대한 본격적인 사업이 시작된 것은 매우 특별했다고 할 수 있다. 그 첫 사업의 결실이 도서출판 남풍에서 출간한 《조운 문학전집》으로 모두 238쪽이었다. 이 책을 간행하게 된 내력을 〈광주매일〉 객원논설위원인 조운의 생질 위증(魏增)은 〈내 외삼촌 이야기〉(《향맥》제14집, 2001)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본격적인 해금이 단행된 것은 1988년 4월 1일이요 막상 외삼촌이 해금된 것은 그 석 달 후인 7월 19일이다. 맨 마지막으로 《임꺽정》의 저자인 홍명희와 함께 해금되었던 것이다. 그 며칠 후 나는 당시 광주박물관장이던 이을호 박사의 부름을 받았다. 그 자리에는 영광의 고(故) 이기태도 함께 있었다. 이 자리에서 우리는 조운 문학전집의 출판 준비를 하명 받았고 7월 28일에 발기 모임, 10월 7일에 간행위원회가 발족되었다. 그리고 그 책이 발행된 것은 1990년 9월 17일이었다. 문학의 해인 1996년에 조운의 시조 33편을 묶은 시조집을 발간하는 글에서 이을호는 “선생은 결코 천생의 시인일 뿐 아니라 오히려 우리와 함께 이 시대의 삶을 살아온 모든 사람의 마음을 울려 놓은 시인이기에 오늘에도 우리는 그를 잊지 못하고 다시금 찾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조운을 천생의 시인이요 사람들의 마음을 울려 놓은 시인으로 평가한다. 영광문화원장인 조남식은 “평소에는 짧은 머리형에 흰색 두루마기나 검정 두루마기 차림이었다. 새까만 눈썹과 초점이 분명한 눈매에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설득력 있게 조선건국위원회 조직 결성의 당위성을 연설할 때면 운집한 군중들의 박수소리가 끊이지 않았었다.”(《향맥》 제14집, 2001)라고 증언한다. 이것으로 보아 영광의 많은 사람이 조운의 지도력에 선망을 품고 살아온 것이 분명하다. 조운 연구가 한춘섭은 “20세 초반부터 전 국토를 두루 방랑한 조운은 심지어 만주 지방까지 떠돌아다닌 적이 있었으며, 왜소한 신체에서 풍기는 외모의 인상은 한마디로 신경이 예민한 사람이었다.”(《옥당문화》 제4집, 1989)라면서 그의 방랑벽과 예민한 성격을 지적하고 있다.
강직한 인상의 순결한 천재 시인
춘원은 이 글을 1936년 4월부터 6월에 《조광》지에 발표하였다. 조운에 대한 첫 인상기가 비교적 예리하고 깊은 애정에 차 있으며 조운을 소년으로 보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조운이 1900년생이고, 춘원은 1892년생이니 두 사람은 여덟 살의 나이 차이를 나타낸다. 춘원의 눈에 조운은 퍽 어리게 보였던 모양이다. 그리고 조운의 용모에서 순결한 사람으로 생각했다고 했는데, 비애의 빛도 보았다는 것은 조운의 앞길을 예측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러면서 춘원은 조운의 시적 천재성을 보았고 그래서 ‘천재시인’이라는 수식어를 서슴없이 사용함으로 조운에 대한 시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시고(詩稿)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고 난 후 조운의 모습에서 ‘잠시 망연할 뿐’이라는 춘원의 표현도 무척 인상적이다. 춘원의 이러한 글에서 그 무렵의 조운의 강한 인상과 초연한 태도는 물론 한 시인의 담대한 인품을 읽어낼 수 있다. 조운은 《조선문단》 1927년 2월호에 〈병인년의 시조〉라는 비평문을 발표하면서 ‘정주랑(靜州郞)’이라는 필명을 사용하고 있다. 정주랑은 같은 호 지면에 시조와 평문, 두 편의 작품을 발표하다 보니 임시로 사용한 필명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그가 작품 활동을 많이 한 문예지 《조선문단》에는 ‘문사들의 이 모양, 저 모양’ ‘문사 소식편편’ ‘문사들의 얼굴’ ‘글 쓰는 이의 주소’ ‘문단산화’ 등의 고정란에 그의 인물평이 짧지만 비교적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이 고정란을 쓴 사람의 필명이 ‘춘해(春海)’라고 되어 있는 걸 보면 당시 이 잡지의 편집을 맡고 있었던 소설가 방인근(方仁根)이 집필했음을 알 수 있다. 고정란의 인물평은 몇 호에 걸쳐 실려 있다.
옮긴이 註 : 법성포 시인으로 조선문단에 소개되었는지 모르지만 영광이 고향이고 '법성포 12경' 이란 시를 발표한 것에서 비롯된 오류인 것 같다. 영광읍 도동리 136번지에서 고을 아전(오위장) 창녕 조(曺)씨 희섭(喜燮)과 어머니 광산 김씨(기방 여인으로 소실)사이에 태어난 서자이다. 본명은 주현( 柱絃 )이며, 子는 중빈(重彬) 인데 1940년에 필명인 운(雲)으로 본명을 개명하였다ㅡ
■1925년 7월호(제10호) 조운―전남 영광에서 시조 창법 연구. 조운의 인상기에서도 비교적 자세하게 외모와 행동을 표현하고 있어서 그의 인품과 인간적 면모를 파악할 수 있는 단편적 자료가 될 수 있다. 특히 말하는 습관은 ‘엄청나게 말이 빠른’ 것을 알 수 있다. 키도 ‘조고만한’이란 표현에서 작은 체구였음을 짐작게 한다. 용모에 관해서도 ‘걀족’ ‘동고소롬’ ‘불쏙 톡 불거저나온 얼굴’ ‘큰 코’ ‘또렷한 눈’ 등의 표현을 통해 그의 생김새를 상상해 볼 수 있다. 좀 긴 얼굴에 큰 코와 윤곽이 뚜렷한 눈을 지닌 얼굴 모습이었을 것이다. ‘기타 문헌’이 많다는 점도 눈여겨볼 일이다. 소설가 박화성(朴花城)도 그에 대해서 “가난하게 보였던 그가 산더미같이 쌓인 서적 틈을 왕래하며 내게 필요한 책들을 고르고 있을 때 그가 완연한 천석꾼 부호로 내게 부각되어 오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중앙일보〉 1977년 12월 8일자 ‘남기고 싶은 이야기’)라고 평했다. 이 글을 통해 조운은 많은 책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운의 생질 위증은 외삼촌을 회고하는 글에서 “간혹 머리를 스치는 그의 모습은 조선영단(대한식량공사의 전신) 시절의 일본식 국민복 차림이거나 까만 두루마기의 까까머리 모습이다. 예외 없이 그 기억의 배경은 지금의 새집이 아니라 옛날의 외갓집이고 새까만 눈썹과 초점이 분명한 눈매와 카랑카랑한 목소리”(《향맥》 제14집, 2001) 등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한다.
재기발랄한 언행과 원만한 성품
인물평에 나타난 ‘의지의 남자’ ‘재기가 도는 것’ ‘쌀쌀하게도 보이고’ ‘다정하게도 보이고’ 등의 표현을 통해서 그는 성격이 퍽 강직하면서도 정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가정에서나 일가친척의 모임에서도 재치 넘치는 말로 좌중을 웃기기도 하고 위기를 모면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는 순간적인 재치가 퍽 뛰어났던 인물이라는 인상을 주었던 모양이다. 조운의 가정에서는 가끔 집안사람들이 모여 ‘상추쌈대회’ ‘호박죽대회’ ‘팥죽대회’ 등을 하였다고 한다. 주로 어머니와 형제들이 모여 이루어진 이 행사는 아마도 조운의 기발한 착상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생질 위증은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우리 특유의 쌈을 ‘한 입’과 ‘희뜩’거리는 ‘눈’과 ‘나비’의 ‘울 너머’라는 조화를 이룬 상추쌈에 대한 발상의 묘미가 기발하다. 조운은 모든 사람과의 교우 관계는 물론 인간관계와 함께 일상을 긍정적이고 솔직한 삶의 언저리에서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은 기지와 재치가 넘치는 말솜씨와 숨김없는 행동과 가족사에 대한 진솔한 대응 등에 놀라워할 때가 많았다고 한다. 그러면 조운의 측근들을 통해 그들이 들었거나 알고 있는 조운의 재기 있는 언어와 행동의 일면들을 들어 보자. 그의 판단과 재치와 유머러스한 언사가 얼마나 감각적이며, 또한 그가 지녔던 인간적인 인품이 어떠했나를 알 수 있다. (2) 어머니가 서단(번영회장)으로부터 들었다는 이야기 : 해방 전 어느 날 밤, 서단의 고종사촌이며 3·1운동에 앞장 선 투사의 한 분인 서은(徐隱)과 ML당으로 옥고를 치른 조용남(趙龍楠)과 운 씨가 밭 가운데 집(서은 씨 댁)에 모여 회식을 했다. 밥상이 들어오기가 바쁘게 조(趙) 씨가 심술궂게도 지글거리고 있는 조기찌개에다 퉤퉤하고 침을 내뱉고 “아예, 먹을 생각들 말라!”고 했다. 이 때문에 크게 놀라고 어찌할 바를 모른 분은 이 댁의 주부였는데, 이때 운 씨가 느닷없이 “침 묻은 아들 놈 음식은 먹어도 좋은 거야!” 하며, 성큼 숟가락을 가져가니 두 조씨(曺와 趙)는 동갑내기임에도 졸지에 부자간이 되고 말았다. 덕분에 안주인은 자리를 떠도 좋게 되었으며, 두 사람은 조운의 임기응변에 혀를 차며 웃어댔다.(〈기정 조운의 시조세계와 그 인간〉 동남풍, 1995) (3) 어느 해 어느 날에 영광에 사는 조씨(曺氏) 문중의 종친회가 거무산에서 열렸다. 기타 사항으로 들어가 질문이 있으면 말하라는 사회자를 향해, 운 씨가 거수 기립하더니 “우리 같은 서출의 경우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라고 또렷한 어조로 아무렇지 않게 묻고 나오니, 장내가 갑자기 숙연해지면서 군데군데서 놀랐다는 감탄사가 튀어나왔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내가 직접 종제 태능(泰能)으로부터 들었는데 그의 부친 곧 나의 백부님이 이 광경을 방청하고 나서 “주현이란 놈! 똑똑하더라.”라고 하셨더란다.(〈기정 조운의 시조세계와 그 인간〉 동남풍, 1995) (2) 외삼촌은 특히 우리 어머니를 놀려대곤 했다. 창평으로 시집을 갔대서 ‘창평누님’이라 불렀는데 어려서 우리 어머니는 마마를 앓으셨기 때문에 살짝곰보셨다. 그래서 외삼촌은 이를 두고 노래를 지어 불렀다. “차앙평 누우님은 곰보오딱지/ 그래도 나만 보면 싱그을 벙글”이라는 노랫말이다.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와 외삼촌은 가장 많이 다투었고 또 가장 죽이 맞았다고 한다. 서로 붙은 터울이었기 때문이다. 1남 6녀 중 어머니가 터를 팔아 외삼촌을 보았다는데 두 분이 다 발끈하는 성미이면서도 가족 모임에서나 매사에 분위기를 이루는 데 있어서는 서로 불가분의 상대역이었다.(〈내 외삼촌 이야기〉 2000년 7월 3일자 〈영광신문〉) 여러 가지 사소한 개인사나 가정생활에서 나타난 재치와 기지 못지않게 영광에서의 사회적 활동에서도 중요하고 어려운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는 기지를 능숙하게 발휘한 경우도 허다하였다. 영광문화원장 조남식은 해방공간에 있었던 한 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조운의 재치와 감각은 그의 시조 작품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어떠한 사물이나 자연환경을 대하더라도 이를 자신의 내면으로 끌어들이는 완숙미가 작품의 요소요소에 알알이 배어 있다. 자연이나 꽃은 물론이고 어떠한 대상, 심지어는 사람까지도 그의 심중으로 끌려 들어와서 하나의 다른 형태의 작품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가 남긴 작품이 백 수 미만에 불과하지만 훌륭한 평가를 받고 있으며, 월북이라는 멍에를 안은 데다가 오랫동안 잊혔던 시조시인이 아직도 많은 사람에게 회자될 수 있다는 것은 그의 시적 역량이 절대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조운은 어쩌면 시조라는 거대한 배에 몸을 실은 엄격한 선장이었는지 모른다. 영광 3·1운동과 조운
조운이 영광 땅에서 살아온 세월은 당시의 젊은이들에게 울분과 분노가 노도처럼 밀려오는 절망의 시대였다. 인생의 황금기인 20세의 왕성한 청춘 시절, 민족성에 대한 감정을 서서히 인식하던 젊은이들에게 식민지하의 백성이라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수치였다. 전국적으로 일어난 기미독립운동은 식을 줄 모르고 불같은 기세로 계속 번져갔다. 영광에서도 우국 인사들과 학생들 농민들이 가세하여 총궐기하였다. 영광의 3·1운동은 해인 위계후(海人 魏啓厚)와 고경진(高暻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위계후는 어린 시절부터 교분이 있던 송진우에게 연락하여, 서울에서 유학 중인 조철현(曺喆鉉)으로 하여금 독립선언서를 영광으로 가지고 내려오게 했다. 그러고 나서 함께 귀향한 유학생과 청년회장 정인영, 농민회장 김은환, 보통학교 훈도 박태엽, 이병영 등과 회합을 하여 거사를 의논했다. 향토사 연구가 이기태의 〈개화기의 영광문학〉(《향맥》 제6호, 1993)이란 글에는 “그때에 영광에서는 문학애국 청년을 중심으로 1919년 기미 만세사건을 주도, 전남에서는 제일 먼저 3월에 대규모 시위를 하게 되는데 배경은 이렇다. 조운의 매형 위계후 선생이 고하 송진우, 인촌 김성수 등과는 담양 청평학숙의 동숙생인 데다 특히 고하와는 진외척 간으로 모두 지기지우의 처지였다. 영광의 만세사건이 유독 규모가 크고 빨랐던 것도 당시 고하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라고 되어 있다. 이 글에서 보듯이 좁은 영광 땅의 인물들은 서로가 가까운 지기 사이로 의사소통이 밀접하게 유지되는 관계였음을 입증하고 있다. 영광군에서 발행한 《옥당골의 전통문화(1983년, P132)》의 〈3·1운동과 영광〉 항목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전라남도―조선총독부. 대정(大正) 8년 소요 사건에 관한 복명서 전라남도는 3월 3일 목포, 구례, 순천, 여수, 광양에서 3월4일에 목포에서 선언서가 일반에게 배부되고 그 후 곧 전 도내 각지에 전파되어 운동 기운이 휩쓸렸고 3월 10일에 광주숭일학교, 수피아(須彼亞)여학교, 광주농업학교 학생과 일반 군중이 만세 시위를 벌려 운동이 본격화하였다. 그 후 전개된 도내시위운동은 그 중요 운동지만 들더라도 영광(3월 14일, 동 15일, 동 27일) 담양(3월 18일) 법성포(4월 1일)―중략 ― 등지를 들 수 있고 일제 측 기록에 의한 운동 주동자의 수만 3,685명에 이르고 있다.(p.312)
■기미 3월17일 금일 시장에서 호만세(呼萬歲) 함평, 영광, 광양군. 함평군에서는 4월8일과 4월12일에 각기 월야면과 읍내에서 당지 서당학생 및 보통학교학생이 중심이 되어 시위가 있었다. 다음 영광에서는 읍내에서 3월12일과 14일의 양일간 보통학교 학생이 주동이 되어 시위를 벌였는바 14일에는 일반이 500명 이상 이에 가담하였다.(p.317) 조운 역시 이 지방 유지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주도한다. 조운의 운동 기록은 전라남도사 편찬위원회에서 간행한 《전라남도사》(1956년 8월 15일) 837페이지에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영광독립운동 기미년 3월 26일에 조희태(曺喜兌) 소년을 선두로 독립운동 시위 행렬이 움직이다가 왜경과 충돌되어 다수 부상자를 내고 최선을 다하지 못하였으나 광주에 다음 가는 큰 운동이었고 지도 인물로 김은환(金?煥), 정인영(鄭仁瑛), 위계후(魏啓厚), 조용(趙龍), 정진삼(鄭軫三), 조운(曺雲), 조희충(曺喜忠), 서은(徐隱), 유일(柳一) 등이었고 조희열 외 다수가 체포되었으나 정확한 기록을 얻지 못하였다.
만주 도피
3월 14일과 15일 양일간 대대적인 독립운동이 일어나고 26일과 27일에도 더욱 거세게 독립운동이 가열되자 조운은 일경의 추적을 피해 영광을 떠난다. 《영광군지(1994년)》 상권 267페이지의 노준(魯駿)에 대한 심문조서에서 “고경진, 위계후, 조주현(조운), 김형모 등이 모두 해외로 나가기 위해 서울에 와 있다는 것을 들었다.”라는 기록과 위계후의 증인조서 중 “시위운동에 참가한 혐의로 쫓겨 정처 없이 방랑하던 끝에 국경 밖으로 탈출하여 자유의 몸이 되고자 생각하고 있던 차 ―중략― 그 무렵 나의 처남 조주현(조운)도 유경근의 소개로 신의주로 가기로 하였으나 전일과 같이 경계가 엄중하였다.”라는 심문 기록이 나타나 있다. 3월 15일 거사 이후 왜경이 경계를 엄중히 하면서 독립만세 운동에 참여한 애국지사들을 색출하여 검거하게 되자 조주현(조운), 유선기, 김형모 등은 일시적으로 몸을 피하여 만주 등지로 떠나 버린 것이다. 향리에서 일경의 추적과 심한 검문에 안주하고 있을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대부분의 독립운동 가담자들이 만주로 피할 수밖에 없는 사정은 조운으로 하여금 심한 인간적 고뇌에 빠지게 하였으리라. 이런 정황으로 볼 때 조운의 독립운동 참여는 국민적 숙원인 독립을 이루려는 염원과 국가의 존망을 보고만 있을 수 없는 민족 감정이 발로된 행동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만주로 몸을 피한 조운은 그의 운명을 가름하는 서해 최학송(曙海 崔鶴松)과 만나게 된다. 패기 넘치던 20세의 재기 발랄한 젊은이가 독립운동이 좌절되고 일경의 추적에 쫓기는 처지에서 갖게 된 최학송과의 만남은 문학 활동의 중요한 변화를 가져다준다. 문학이라는 욕망과 조국의 험난한 운명에 대한 고뇌 속에서 만난 두 사람은 서로 가까워지고 의기가 투합된다. 또 이때의 조우로 인하여 서해는 나중에 조운의 매부가 된다. 서해의 도움으로 문예지 《조선문단》에 관여하게 된 조운은 이 잡지에 많은 양의 시조 작품을 발표한다. 그 후 조운과 서해는 함께 만주와 시베리아로 방황의 길을 떠나고 금강산과 황해도, 해주, 개성 등지를 답사도 하며 고뇌를 서로 나눈다. 서해와 함께 만주와 시베리아 금강산 등을 주유하면서 그가 겪은 일종의 방황은 견문을 넓히는 계기가 될 수 있었고 문학에 대한 강한 집념을 놓을 수 없던 그에게 더욱 문학적 향수에 더욱 젖어들게 하였다. 영광학원 교사 시절의 문학 운동
긴 시간의 방황을 접은 조운은 21세에 귀향하여 23세에 중등 과정인 사립 영광학원 국어교사로 취임하게 된다. 이 영광학원은 조운의 손위 매부인 위계후(魏啓厚)를 중심으로 영광의 지도자들이 설립한 학교로서 이 고장의 민족의식 고취와 계몽운동의 거점이었다. 또한 5년제 영광중학교 설립 추진 및 전국적인 대일 교육항쟁으로 발전했던 영광 교육운동의 모체가 된 학교이다. 일제 식민지라는 시대적 아픔이 분출하는 욕구를 억제하기 어려웠던 데다 무언가 성취하고픈 욕구에 넘치던 젊은 혈기의 조운에게는 하나의 기회였다. 조운은 여기에서 새로운 모색의 길을 찾게 된다. 1919년의 3.1운동의 좌절로 말미암아 황폐화된 영광 땅의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영광의 기질을 살리자. 외세의 부당한 억압에서 저항하여온 고장의 전통성을 살리자. 그리고 옥당골 영광의 높은 문화적 맥박을 더 높이자. 정신적 용솟음이 조운의 온몸을 감싸며 뜨겁게 다가왔을 터였다. 일제 치하의 식민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 이에 대응하여 영광 사람들에게 어떤 자긍심과 긍지를 살리고 문화적 계몽의 타당성을 인식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게 된다. 만주에서 교우를 돈독히 한 서해 최학송과의 만남에서 문학 정신과 우리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더욱 굳어진 조운은 영광 문화 발전에 대한 여러 방안을 탐색하고 실천 방법을 찾게 된다. 조운은 이미 1921년에 〈동아일보〉에 시 〈불살러주오〉를 발표한 바 있었다.
이것은 한 편의 절규이다. 서해와 함께 만주 등지를 방랑하다 귀향한 후 첫 번째 작품이다. 당시 조운의 심경을 단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만주에서의 귀향길에 이 시를 읊으며 영과 육이 교차하는 아픔을 느꼈을 것이고 그 아픔을 감싸 안을 수 있는 애인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은 간절한 소망에 몰두한다. 사랑하는 애인에게 호소하는 듯한 이 작품은 결국 그 애인의 안위가 바로 조국을 은유하고 있다. 영광학원은 그러한 의미에서 후학들에 대한 교육을 통해 묵시적인 대일 항쟁의 기틀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이 영광학원에 후일 소설가로 명성을 얻는 박화성과 같이 근무하게 된다. 박화성은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중앙일보〉 1977)에서 이렇게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회상한다. 교사로 초빙된 연희전문, 숭실전문, 수원고농 졸업생들과 심상 과목과 일어 과목 그리고 창가까지 맡은 박화성, 전 학년의 국어와 국사, 미술을 담당한 조운 등 교사들은 모두 겸손하고 솔직하여 교무실은 언제나 화기가 가득했다고 한다. 초대 교장은 조병모(曺秉模)였고, 2대 교장은 조운의 매부 위계후가 맡았다. 영광학원에 모인 교사들은 대부분 문학에 뜻을 둔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영광 출신 교사들은 시와 시조에 조예가 깊고, 거의가 20대에서 30대에 이르는 나이들인지라 의기가 투합하고 모든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조운은 몇몇 교사와 의논하여 향토문예지를 발간할 것을 제의하고 박화성, 김형모 등과 함께 《자유예원(自由藝園)》이라는 이름으로 향토문예지를 발간한다. 이러한 일은 특히 말살되고 파묻혀 버린 민족정신의 고취를 위해서는 절대적이라 여겼으며 영광의 문화 향상을 위하는 지름길이라 생각한 것이다. 영광의 문학열은 차츰 높아가고 열성적인 참여자들도 늘어났다. 박화성은 “영광의 문학열은 대단하여 금시에 많은 글이 모였는데 원고지를 이용한 사람은 썩 드물고 공책이나 인철지나 두루마리 장지나 하다못해 편전지 같은 종이에라도 정성껏 쓴 것들을 내놓았다.”(〈중앙일보〉 1977년 12월 8일자)고 회상했다. 조운은 모인 원고를 학생들과 함께 큰 문짝들에 압정으로 박아 주르르 세워 놓고 서로 읽으면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발표 방법을 활용했다. 몇몇 학생들과 함께 글의 장단을 헤아려 칸 수를 맞추어서 다시 떼어낼 수 있게 하기 위해서 풀을 이용하지 않고 압정을 사용하여 한 장 한 장씩 붙이는 일을 매주 조운 혼자서 다 해내곤 했다. 원고를 제출한 사람이나 문학 동호인들이 먼 곳에서 찾아와 이렇게 문짝에 붙여 놓은 작품을 열심히 읽는 진풍경이 매주 벌어졌다. 이 중에서 장원으로 뽑힌 작품은 조운의 주선으로 서울에서 발행되는 잡지인 《개벽(開闢)》 《부인(婦人)》 등의 월간지에 보내져서 활자화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무명이었던 박화성도 이때 장원으로 뽑힌 작품이 조운의 주선으로 《부인》에 게재되는 행운을 얻게 된다. 이러한 《자유예원》 운동은 지방 문예부흥 운동의 선구이며 효시로서 영광의 문예부흥을 가져왔으며, 영광이 예향(藝鄕)으로 발전하는 큰 전기를 마련한다. 이에는 조운의 노력뿐 아니라 박화성을 비롯한 향토 문학 동호인들의 절대적 호응과 영광학원을 끌어가는 지도급 유지들의 한결같은 협조의 힘이 컸다. 추인회(秋蚓會) 창립
조운은 향토문예지 《자유예원》의 활발한 발간과 함께 새로운 민족사상의 규합을 위한 운동의 하나로 시조 보급을 목적으로 새로운 일을 모색하게 된다. 그것이 시조동호회인 ‘추인회(秋蚓會)’의 발족이다. 추인회는 1922년 10월에 창립한 단체로서 회원 30여 명으로 구성되어 월 1회 창작시조를 발표하고 등사판으로 시조집을 발간하는 등 활동이 활발하였다. 영광군에서 발간한 《옥당골의 전통문화》(1983년)에는 추인회의 활동과 그 운영 관련 사항을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추인회는)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이 지하운동으로 그 양상과 방법이 바뀌어, 민족의 백년지대계를 위해 문맹퇴치, 물산 장려, 왜화 배척 운동이 전개되자 전국 각지에서는 청년회관과 학관이 건립되고 야학, 강연 등 계몽운동이 치열하던 무렵인 1922년 10월에 창립한 단체로서, 주된 목적은 민족사상의 고취와 문맹퇴치의 일환으로 한글 보급에 주력하고 조상 전래의 시조 창법을 보급시킴으로써 숭고한 민족의 얼을 되새겨주는 데 있었다. 당시 왜경들은 사상감시와 집회의 감시에 혈안이 되어 있던 때라 겉으로는 시조만 읊는 한인한상(閑人閑想)의 교우라 인식시키며 안으로는 민족정신의 함양과 민족단합을 열심히 전개해 나갔다. 당시의 추인회는 30여 명의 회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시조창은 신명희가 주동이 되고 문예 활동은 조주현(조운)이 주관했는데 여기서 한국 최초로 신재효(申在孝)의 여섯 바탕 판소리 소개와 법성 12경을 《개벽》에 발표하였으며, 에스페란토의 보급을 위해 서울에서 신봉조(申鳳祚), 최경식(崔京植) 선생을 초빙하여 강습회를 갖는가 하면, 회원들은 각자의 창작시조를 매월 1회씩 의무적으로 발표해야 했다. 추인회에서 보급한 시조론을 보면 퍽 이채롭다. 시조에는 경째(京制)와 영째(嶺制), 완째(完制)가 있으며 장단은 3·5박 장단법을 활용하고 있다. 스스로 규례(規例)를 만들어 어단성장(魚短聲長)하며 장단(長短)에 맞고 강약(强弱)을 겸하여 청탁(淸濁)에 유의하며 상성(上聲), 중성(中聲), 하성(下聲) 즉 으, 아, 이, 음을 조화시켜 부르면 된다고 하여 이를 적극적으로 보급하고 실행하였다. 이들은 매월 1회씩 의무적으로 창작시조를 발표하게 하고 등사판으로 소품집을 2회에 걸쳐 발행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다고 한다. 조운의 주도로 이 회를 운영하면서 “자수적(字數的) 시는 아무리 훌륭하여도 신시로서의 명작은 될지언정 시조라고 할 수는 없다.”라는 그들대로의 시조에 대한 정의를 만들어 놓고 작시를 하였다. 특히 가람 이병기를 초청하여 시조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청강했다. 그러나 왜경들의 끈질긴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어느 초여름 조운, 이병기, 신명희, 조희충 네 사람이 마지막으로 전라북도 부안의 변상 대교목에 있는 매창(梅窓)의 고총을 성묘하고 추인회의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추인회에 참여했던 인사들은 회장 조운을 비롯하여 총무 신명희와 회원으로 조희충, 조규현, 조륭현, 조용남, 서순채, 남궁현, 김철주, 김우길, 이대우, 허 정, 조성하, 조종민, 김길성 등 15명이었다.
조병무 | 문학평론가, 시인. 《현대문학》 문학평론 추천(1963-1965)으로 등단.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장, 동덕여대 교수 역임. 울산대학교 〈평리문고〉 개설. 저서로 문학평론집 《가설의 옹호》 《새로운 명제》 《존재와 소유의 문학》 《시짜기와 시쓰기》 《문학작품의 사고와 표현》 《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 등과, 시집으로 《꿈 사설》 《떠나가는 시간》 《머문 자리 그대로》, 수필집 《기호가 말을 한다》 《내 마음 속의 숲》 《한국소설묘사사전(전6권)》 등 다수. 현대문학상, 윤동주문학상본상, 시문학상, 조연현문학상, 동국문학상 수상. 현재 문학의 집·서울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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