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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봉 성황제에서 산신거리를 하는 고현희 당주 © 최영숙
천년의 전통을 가진 군자봉성황제가 지난 11월 5일(음력 10월 3일) 오전 11시에 군자봉 정상에서 열렸다. 기록하는 사람은 그날의 일정을 순서대로 사진에 담았다.
군자봉은 행정구역상 시흥시 군자동과 장현동·능곡동 사이에 위치한 높이 199m의 산을 말한다.
군자봉이란 이름은 조선조 제6대 임금인 단종(端宗)이 안산 능안(陵內, 당시 안산시 목내동)에 있는 생모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묘소에 참배하러 가는 길에 봉오리가 연꽃처럼 생겨 군자의 모습과 같다고 한 것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 산에서 성황제를 재냈다는 것은 조선 전기에 편찬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이미 나와 있고 조선 후기에 편찬된 『여지도서(與地圖書)』를 통해서도 확인 할 수 있다. 따라서 군자성황제는 조선 초기 국가의 공식 기록물에 존재가 언급된 정도로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언어학자들은 '굿'봉에서 유래하였다고 주장한다. 이 산 정상에 있었던 성황사(城隍祠)에서 굿을 했었던 사실에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무속 신앙에서는 영험이 있는 영산(靈山)으로 불리며 산 정상에는 수백 년 수령의 느티나무가 있다.
군자봉 성황제는 군자봉 인근의 구지정 마을 주민들이 군자봉 성황제를 지낸다. 구지정 마을의 이름은 아홉 개의 우물에서 비롯됐다. 군자봉 정상 성황당을 지어 경순대왕을 모셔놓고 매년 섣달(음력12월)에 당주와 마을주민들이 올라가 제를 지낸 후 경순대왕을 마을로 모시고 내려와 집집마다 유가를 돌고 삼월삼짇날 (음력3월3일)이 되면 다시 군자봉 성황당에 모신 의례로 그해에 농사의 추수가 끝난 매년 음력 10월 3일에 풍작과 마을 안녕의 편안함을 감사드리고 매년 편안하길 기원하는 마을대동제로 이어졌다.
서낭대를 모시고 군자봉으로 출발하다 © 최영숙
2013년 11월 5일 오전 9시 30분 고현희 당주의 집에서 군자봉성황제 보존회 회원들이 군자봉성황제를 지내기 위해 대왕님장대기를 모셔 내렸다. 마을을 지나 군자봉으로 향했다. 군자봉성황제 보존회는 한정현 회장과 이도수, 황정학 부회장, 표용환, 당행복, 김은태, 표창환, 이상선, 강재모, 이상목, 이상걸, 이흥렬, 이상화, 이영열 등으로 구성되었다.
서낭대를 모시고 군자봉을 오르다 다 © 최영숙
황정학 부회장을 비롯한 군자봉성황대 보존회 회원들이 서낭대를 잡고 군자봉으로 올랐다. 서낭대 뒤에서는 북을 치며 흥을 돋우었다. 맨몸으로 오르는 것도 힘든데 서낭대를 들고 오르는 보존회 회원분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군자봉 정상에 대왕님이 모셔졌다.
한정현 군자봉성황제보존회장이 인사를 하다 © 최영숙
정원철 시흥문화원장은 “군자봉성황제는 군자성황사지에서 서낭신을 맞이하는 의례로 우리 시흥지역의 사람들이 오랜 옛날부터 마을 주민의 단합과 발전을 위하고 넓게는 시흥시와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였습니다. 이렇듯 군자봉성황제는 우리 시흥시에 전해오는 유서 깊은 민속행사입니다. 군자봉성황제는 1993년 제 8회 경기도민속경연대회에 출전하여 ‘발굴상’을 받는 등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시흥시민속예술로 지정받기 위한 발판을 다져나가고 있습니다. 고려시대 이래 천년의 전총이 있는 군자봉성황제는 백성들의 소박한 기원풍습이 담겨 있는 우리 시흥시의 소중한 역사, 문화적 자산입니다. 많은 관계자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군자봉성황제가 하루 빨리 문화재로 지정되기를 바랍니다.”고 했다.
한정현 군자봉성황제보존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예전부터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 때부터 해온 군자봉성황제는 일제강점기 때 그 탄압과 압박 속에서 동네 어르신들의 하나 된 마음과 당주의 노격과 주민들의 단합 속에 지금까지 어렵게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전국을 둘러보면 전통문화유산을 보존하고 유지하여 행해지는 곳이 많지 않습니다. 또한 시민들도 어디에 무엇이 있고 지역에 어떤 유래의 민속행사가 있는지 잘 모르는 게 현재 실정입니다. 앞으로도 군자성황제가 우리의 전통예술문화로서 모든 내빈과 시민여러분께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또한 저희 군자봉성황제가 시흥시를 대표하는 문화재가 될 수 있도록 많은 성원과 뜨거운 격려를 부탁드리겠습니다.”고 했다.
고현희 당주는 “일제강점기에도 자신의 목숨을 개의치 않고 군자봉성황제를 지켜온 저의 외증조할머니(곽명월)과 뒤를 이어 외할머니(김부전) 뒤를 이어 저의 어머니(김순덕) 그리고 저(고현희)가 왤 전통과 여러분들의 뜻을 이어받아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국자봉성황제는 그간 경기도민속예술경연대외 출전과 『군자봉성황제』를 발간하면서 꾸준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나 아직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지 못하고 있어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천년 전통을 가진 문화적 자산으로 계속 전승되어 향토전통예술의 가치를 인정받고 문화재로 지정되기까지 여러 주민들과 관계된 모든 분들의 관심과 아낌없는 성원을 부탁드립니다.”고 했다.
고현희 당주와 무녀들이 대왕님모시기(서낭 거리)를 하다 © 최영숙
고현희 당주와 무녀들이 대왕님모시기(서낭 거리)를 했다. 서낭거리란 대왕님 장대기를 들고 성황당에 마을풍물패와 무녀들이 굿하기 전 풍악을 울리며 대왕님을 모셔 들이는 것으로 굿의 시작을 알린다.
김윤식 시흥시장은 “올해 시흥이 100년을 맞이하면서 이런 전통문화행사가 더욱 새로운 모습으로 발전하기를 바라며 시에서도 더욱 관심을 가지고 전통문화발전을 위해 노력해 나가겠습니다. 아무쪼록, 이번 군자봉성황제를 통해 소중한 전통문화유산의 의미를 되새기고, 시민여러분께서도 이러한 정승사업이 더욱 활성화 될 수 있도록 참여해 주시기 바라며 정성을 다해 준비해주신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고 했다.
이귀훈 시흥시의회장은 “군자봉성황제를 통하여 마을 주민의 단합과 발전을 위하고 주민 모두가 함께 자리하여 즐겁게 이웃과 화합하고 넉넉한 인정을 나누며 가족의 건강, 이웃의 기쁨 등을 함께 공유하며 군자봉성황제가 조상의 얼을 잇는 지속적인 축제로 거듭나길 바라면서 시의회에서도 아낌없는 지원을 약속드립니다.”고 했다.
부정거리를 하는 김순종 무녀 © 최영숙
김순중 무녀가 부정한 것을 소멸시키는 부정거리를 했다.
산불사거리를 하는 조광현 중요무형문화재 98호 보존회장 © 최영숙
조광현 중요무형문화재 98호 보존 회장이 산불사거리를 했다. 산불사거리는 산불사님, 산칠석님, 산제석님을 청배하여 시흥지역 주민들의 수명장수 무사고를 기원하는 것이다. 시흥시장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잔을 올렸다.
산신거리를 하는 고현희 당주 © 최영숙
고현희 당주가 산신거리를 했다. 산신거리는 군자봉성황의 본향님과 그 부근의 도당님. 팔도의 산신령님을 청배하여 나라의 안녕과 번영, 만백성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거리이다.
승경숙 무녀가 별상거리를 하다 © 최영숙
승경숙 무녀의 별상거리는 나라별상님들을 청배하여 나쁜 질병이나 재해사고 등을 막아 달라 기원하며 가져온 제물을 삼지창에 세워 올리는 것을 말한다.
신장거리를 하는 승경숙 무녀 © 최영숙
승경숙 무녀가 신장거리를 했다. 다섯 색깔의 기를 펴서 오방신장님을 청배하여 동,서,남,북,중앙에 드는 액운을 막고, 성황제에 온 손님들에게 기를 뽑게 해 길흉화복을 점쳐 주는 것이다.
대감거리를 하는 승경숙 무녀 © 최영숙
다음으로 승경숙 무녀가 대감거리를 했다. 산을 조정으로 대감님들을 청배하여 사람들에게 재물번성은 돕고 손재는 막아 풍요를 기원하는 거리이다.
창부거리를 하는 고현희 당주 © 최영숙
고현희 당주가 12가지 흉액과 1년의 액운을 막아주는 창부거리를 했다.
뒷전거리를 하는 고현희 당주 © 최영숙
마지막으로 고현희 당주가 뒷전거리를 했다. 굿이 끝난 뒤 나쁜 기운이 침범하는 우환이 없도록 내쫓기 위한 마지막 거리였다.
무녀들 내려오다 © 최영숙
군자봉성황제가 끝나고 무녀들이 내려왔다.
서낭대 내려오다 © 최영숙
군자봉성황제가 끝났다. 군자봉성황제보존회원들이 서낭대를 들고 마을로 내려왔다.
군자봉성황제보존회원 황정학(69) 씨는 "19살 때부터 서낭대를 잡았다. 다리가 아파도 서낭대를 메면 겅중겅중해요. 끼가 있고 신이 있어야 한다. 서낭대를 잡으면 마음이 편안하다. 예전에는 군자봉 성황제가 열리고 서낭대가 내려갈 때면 마을 주민들이 한 번이라도 더 보려고 모두 모였다. 기를 들고 내려가면 마을사람들이 고개를 숙여 깊은 인사를 드렸다"고 회고했다. 또 “예전에는 어른들이 엄했다. 정월 그믐날 내려모셔 옷 입혀드리고 당시에는 서낭대를 세워서 군자봉까지 오르고 내렸다. 지금은 전봇대 들고 있고 해서 뉘어서 모신다. 예전에는 유가행렬이 대단했다. 정월 초사흗날부터 유가를 돌면 마을에서 마을로 초청해서 서울까지 이어졌다. 대우가 좋았다. 밤새 마을에서 놀고 다음 마을로 갔다.”고 회고했다. 그는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들이 모두 없어졌다"고 아쉬워하며 “군자봉 꼭대기에 있던 당집은 40여 년 전에 군대에 갔다 오니 무너져 있었다. 밤에 누군가 와서 당집의 벽돌 아래를 무너트렸다는 말을 들었다"고 전했다.
시흥시 안현동 장낙골 주민 최경옥(76) 씨의 기억에는 “군자동에서 시집온 사람 집에는 매년 군자봉성황제를 하는 유가행렬이 왔다. 친정동네에서 와서 집안의 안녕을 빌어주는 것이었다.”고 했다.
고현희 당주집에 서낭대 모시다 © 최영숙
서낭대가 고현희 당주 집에 도착했다. 천존항아리에 물을 담고 서낭대를 모시는 의식을 했다.
군자봉성황제를 지내는 고현희 당주의 집 대문에 서낭대를 세웠다.
고현희 당주집에서 굿을 하다 © 최영숙
성황제가 끝난 뒤 고현희 당주의 집에서는 어머니 때부터 다니는 오랫동안 인연을 맺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다시 굿이 벌어졌다.
당주는 치마폭에 복을 몰아 단골들에게 주었다. 보통 1년에 3번 정도 온다는 단골들에게 공수하는 모습이 마치 오랜 가족을 대하는 느낌이었다.
자손을 위해 기원하는 어머니 © 최영숙
도일시장에서 오신 정은예(82) 씨는 “ 군자농협에서 놀러 가는 데 안가고 이곳에 왔다. 시어머니가 다닐 때부터 왔다. 칠석날과 대동치성(10월3일), 정월에 홍수매기 온다. 오면 마음이 편안하다.”고 했다.
황성천(73) 씨는 “돌아가신 당주(김순덕) 시영아들이다. 서낭대 옷을 입혀드렸다. 옛날에는 42벌을 입혀드렸는데 어제는 28벌 입혔다. 예전에는 서낭대가 더 높았다. 또 상쇠, 꾕가리, 징, 회적(피리 부는 사람)도 동네사람들이 쌍으로 했다. 온 마을이 들썩했다.”고 회고했다.
세월이 흘러 군자봉 성황제도 모습을 달리하고 있다. 예전에는 시흥, 수원, 안산에서 서울까지 유가를 돌았다. 그러나 현재는 구준물 마을만 돈다. 이는 시대변천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현재는 주민들만의 자체적인 힘이 아닌 시흥문화원, 군자봉성황제보존회, 시흥시, 시흥시의회의 도움으로 치러진다.
시대에 따라서 그 위상을 달리하는 군자봉 성황제가 현대는 가족의 건강과, 승진, 합격 등을 적은 희망풍선을 날리고 마을주민들의 잔치이며 동시에 시흥시의 축제 분위기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장거리를 하는 승경숙 무녀 © 최영숙
기록하면서 안타까웠던 것은 군자봉성황제를 문화재지정으로 만들려던 사업에 차질을 빚은 일이었다. 현재 재추진중이라고 했다.
천년을 이어온 군자봉 성황제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우리의 소중한 전통문화유산이 좀 더 안정적으로 지속 발전하기를 기원했다.
첫댓글 꼭 한 번 보고 싶었는데 올해도 못 봤네요. 사진으로나마 달래 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