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11-6 자전거하이킹 만경강변 삼례 비비정 비비낙안 만경5경 5천보
자유인은 자전거로 송학사거리를 출발, 풍요의 강 만경강 삼례 전라선 철교부근 만경강 5경 비비낙안의 경치를 조망하며, 5천보 도보로 걷으면서 만경강 풍경을 감상하다.
만경강 만경5경 비비낙안은 비비정에서 만경강을 내려다보는 아름다운 풍경을 말한다.
오늘은 풍요의 강 만경8경중 비비낙안 만경5경 비비정에서 유유히 흐르는 만경천을 바라보며, 망중한의 세월을 낚고 즐거움을 느끼고자 집을 나서다.
흘러가는 시간이 아쉬운 나그네는 시간을 붙잡아두고 싶은 심정으로 변화무쌍하게 흐르는 세월의 여정속에 비비정에서 굽이쳐 흐르는 만경강을 조망하고, 춘포와 삼례 만경강변의 은빛으로 물든 억새의 장관을 구경하니 기분이 감개무량하였다.
두눈이 있어 비비정에서 만경강을 조망할수 있어 감사하고,
두발이 쓸만해 자전거하이킹을 할수 있어 감사하고, 집에 까지 무사히 귀로 할수 있었음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오늘하루가 흘러가다.
감사한 마음으로 세월을 낚으니 행복하였다.
그누가 속세를 가리켜 잠깐의 꿈속세상이라 했던가?
인생은 한조각 뜬구름 같은것이며 자연에 순응하며, 오직 한번의 인생 소중한 시간을 즐겁게 살자.
☛hiking시간 및 거리 : 08:00-11:00(3시간) 10.0km
왕복 20km
☛hiking코스 : 익산서부역송학사거리-목천포-만경강변-춘포나루-삼례비비정-만경강 비비낙안 5천보-귀로
삼례 비비정
-소재지 : 전북 완주군 삼례읍 후정리
삼례읍 후정리 자리한 민족의 애환이 서린 한내 언덕바지에 비비정은 그 아름다운 유래와 더불어 사람들에게 인상 깊었던 정자였는데, 비비정은 원래 1573년에 지어졌으나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허물어지고 1901년에 임실의 월계촌(桂月村)에 옮겨 지을 때 비비정이건기(飛飛亭移建記)를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헌종 7)~1922)가 지었다. 지금의 정자는 1998년에 복원한 것이다.
비비낙안(飛飛落雁)
만경5경 비비낙안은 비비정(飛飛亭)에서 만경강을 내려다보는 아름다운 풍경을 말한다.
낙안(落雁)은 떨어질 락(落), 기러기 안(雁)으로‘땅에 내려앉는 기러기’라는 뜻으로 때로는‘기러기 떼'라는 의미도 함께 갖고 있다.
비비낙안은 바로 한내천 백사장에 내려앉아 노는 기러기 떼가 아름다워서 붙여진 이름이며
옛날 선비들은 비비정에 올라 술을 마시고 시와 운문을 지으며 풍류를 즐겼으리라.
비비정은 전주천과 삼천천이 만나고 소양천과 고산천이 합류되는 만경강 한내를 바라보고 있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비비정 앞을 흐르는 한내천은 삼천과 추천, 전주천이 합수되어 다시 거듭 소양천과 고산천에 합수되어 만경강으로 흐른다.
飛飛亭記
飛飛亭在全州參禮驛之南 其主人崔後良
也 良嘗請記於余曰 亭之作在萬曆癸酉
作之者吾祖永吉也 吾祖永吉以弓馬拔身
官至昌洲僉使 吾父完成亦以弱冠 官羅暖
萬戶 至吾良 蓋三世也 余曰 武人苞苴輦載
奔走權門 以圖進用 老死而後止者 滔滔也
今昌洲獨能免此 而作亭於形勝之地 居處
遊息 導迎淸曠 能以壽終 斯已難矣 羅暖上
不以是賂諸貴勢 下不以是易其衣食 修葺
塗墍 樑棟如新 可謂孝矣 今君又愛文字 旣
揭扁額 又請記以示後人 其繼述之意又深
矣 因問名亭之義 則曰因地名而名之也 余
曰 君世世將種也 古者張翼德之信勇 岳武
穆之忠孝 皆名以飛 而曠世相感 豈非武臣
之所當勉慕者耶 安知君之後承不有張岳
之倫 而凡登斯者 皆以二子爲心 則其爲世
道之助也 豈淺鮮哉 良頓首曰 亭小而義大
人微而語高 受賜之厚 無以踰焉 請歸而刻
之楣間也
時崇禎上章涒灘九月日 華陽老叟記
비비정기(飛飛亭記)
비비정(飛飛亭)은 전주(全州) 삼례역(參禮驛) 남쪽에 있고 그 주인은 최후량(崔後良)이다. 후량이 일찍이 나에게 기문(記文)을 요청하면서 말하기를,
“정자를 지은 해는 만력(萬曆) 계유(癸酉)년이고 지은 사람은 우리 할아버지 영길(永吉)이십니다. 우리 할아버지 영길(永吉)께서는 궁마(弓馬)로써 발탁(拔擢)되어 관직이 창주첨사(昌洲僉使)에 이르렀고, 우리 아버지 완성(完成)께서도 또한 약관(弱冠)의 나이에 관직이 나난만호(羅暖萬戶)를 지내셨고 그리고 나 후량에 이르기까지 대개 3대를 거쳤습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무인(武人)은 포저(苞苴)를 수레에 싣고 권세 있는 가문(家門)을 분주히 오가면서 승진을 도모하다가 늙어서 죽은 뒤에야 끝나는 것을 도도히 하고 있다. 지금 할아버지 영길(永吉)께서는 창주첨사(昌洲僉使)로서 유독 이러한 폐단을 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정자를 경치 좋은 곳에 짓고 거처하면서 유람하기도 하고, 또 맑고 넓은 자연을 만끽하면서 능히 천수(天壽)를 누리다가 생을 마감할 수 있었으니 이렇게 하기는 이미 어려운 일이었다.
나난(羅暖)이라는 곳은 위로는 귀한 세력에게 뇌물을 받을 수 있는 곳이 아니고 아래로는 의복과 음식을 교역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러한 형편인데도 흙을 발라서 수리하고 들보와 기둥을 새 모습으로 꾸몄으니 효도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지금 그대는 또 문자(文字)를 좋아하여 이미 편액(扁額)을 내걸고 또 기문(記文)을 요청하여, 이로써 후인(後人)에게 보여주려고 하니 자기 선대를 계술(繼述)하려는 생각 또한 깊다고 하겠다.”
하였다. 인하여 정자 명(名)을 지은 의미를 물었더니, 말하기를,
“지명으로 지은 것입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대 집안은 대대로 장수(將帥)의 종자이다. 옛적 장익덕(張翼德)은 용맹으로 신임을 받았고, 악무목(岳武穆)은 충신이며 효자이니 두 사람 다 비(飛)로 이름을 지었다. 시대는 다르지만 느낌은 같은데 어찌 무신(武臣)을 마땅히 흠모하려고 힘쓰지 않겠는가. 또 어찌 알겠는가. 그대의 후손 중에 장익덕(張翼德)·악무목(岳武穆)의 무리 같은 사람이 있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무릇 이 정자에 올라와서 모든 사람들이 장익덕(張翼德)·악무목(岳武穆) 두 사람처럼 되겠노라 마음속으로 다짐했다면 그것도 세도(世道)에 일조를 한 것이 어찌 적었다고 하겠는가.”
라고 하니, 후량이 머리를 조아리고 말하기를,
“정자는 작지만 뜻은 크게 말씀해주시고 사람은 미미하지만 말씀은 고상하게 해주셨습니다. 후덕하게 해 주신 말씀을 준수하여 돌아가서 문미(門楣)에 새기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숭정(崇禎) 경신(庚申) 9월 화양노수(華陽老叟)는 기(記)하노라.
飛飛亭重建記
飛飛亭事實 旣載於我曾王考重修之記
余無容更言 而其後亭又毁圮 只有遺址
先王己亥 我先考按節湖南 克承先蹟 有
意未及而遞 雖捐廩百金 付倉付還 俾爲
拮据改建之計矣 至今五十年間 因循延拖
亭固未就 財則漸敷 至於數千金之多 今
上己丑 道內章甫 設置湖山影堂 而士論以
爲不可不更起此亭 欲以己亥留殖之財 圖
所以經紀之方 問議於道伯趙公寅永 院儒
黃斯文仁源 又千里跋涉來請於余 余於少
時 詳知此事 每以尙未改建 爲之歎愴 今聞
湖儒之言 樂而許之 蓋地之興廢有數存
焉 而先正命名之舊亭 吾家兩世之遺志
得以快成於今日 此非但爲一道士林之光
而已 余之與幸 興感容有其旣乎 若夫守
護葺理 使此亭與影堂 同其永久 則諸
生之責也 影堂諸儒謂余 不可無文字 故
槪言其更建事蹟 謹繼曾王考遺文而
記之如此云爾
上之三十一年辛卯 崇政大夫行禮曹判
書兼知經筵事同知成均館事弘文館
提學世孫右賓客奎章閣原任直閣
徐俊輔 記
비비정중건기(飛飛亭重建記)
비비정(飛飛亭)의 사실(事實)은 이미 우리 증왕고(曾王考)께서 적은 중수기(重修記)에 실려 있으니 내가 거듭 말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 이후에 정자가 또 무너지고 터만 남게 되었고, 선왕(先王) 기해(己亥)년 우리 선고(先考)께서 호남(湖南)을 안절(按節)할 때에 선대의 유적을 이어 계승하려는 뜻이 있었으나, 미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체직(遞職)했다.
비록 100 금(金) 정도의 금액을 출연(出捐)하여 창고(倉庫)에 부여하고 환자(還上)에 부여하여 개건(改建)할 수 있는 자본은 저축되었으나, 지금까지 50년 동안 피일차일 끌다가 정자는 건립도 못하고, 돈만 점점 더 불어나서 몇 천 금까지 많아졌다.
금상(今上) 기축(己丑)년 도내(道內)의 장보(章甫)들이 호산영당(湖山影堂)을 설치(設置)하였다. 그리고 사론(士論)이 ‘불가불 다시 정자를 건립하자.’고 하여서, ‘기해(己亥)년 유치(留置)하여 식리(殖利)해 두었던 재정(財政)으로 경영하는 방도를 도모하기 위하여 도백(道伯) 조공(趙公) 인영(寅永)에게 문의(問議)하였다. 그리고 원유(院儒) 황사문(黃斯文) 인원(仁源)도 천 리 길을 허겁지겁 와서 나에게 중건기(重建記)를 요청하였다.
나는 소싯적에 이 사안(事案)에 대해 상세히 알았으므로 늘 오히려 건립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했었는데, 지금 호유(湖儒)들의 말을 들으니, ‘흔쾌히 허락했다.’고 한다. 대개 땅[地]의 흥폐(興廢)에도 운수(運數)가 있어서일 것이다. 선정(先正)께서 명명(命名)하신 구정(舊亭)은 우리 집안 양세(兩世)의 유지(遺志)로써 지금 흔쾌하게 성취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는 비단 한 도(道)의 사림(士林)들에게 영광으로 그칠 뿐 아니라, 나도 다행히 참여하게 되었으니 감회(感懷)가 혹여 이미 있었던 것인가 생각된다.
저 수호(守護)하고 수리(修理)하여 이 정자와 영당(影堂)이 함께 영구(永久)토록 유지하게 하는 일은 제생(諸生)들의 책임이다. 영당(影堂)의 제유(諸儒)들이 내게 말하기를, ‘문자(文字)가 없어서는 불가(不可)하다.’고 하기에, 대략 중건하게 된 사적(事蹟)을 말하고, 삼가 증왕고(曾王考)의 유문(遺文)을 계술(繼述)하여 기록하기를 위와 같이 했을 뿐이다.
상(上) 31년 신묘(辛卯) 숭정대부 행예조판서 겸지경연사 동지성균관사 홍문관제학 세손우빈객 규장각원임직각(崇政大夫行禮曹判書兼知經筵事同知成均館事弘文館提學世孫右賓客奎章閣原任直閣) 서준보(徐俊輔)는 기(記)하노라.
비비정이건기(飛飛亭移建記)
비비정(飛飛亭)은 전주(全州) 삼례역(參禮驛) 남쪽에 있었는데 무너져서 임실(任實) 계월촌(桂月村)에 옮겨지었다. 대개 창건한 사람은 첨사(僉使) 최공(崔公) 휘(諱) 영길(永吉)이며, 옮겨 지은 사람은 그 후손이다. 최공(崔公)의 십세손(十世孫) 창렬(滄烈)이가 우암선생(尤庵先生)이 지은 원래의 기문(記文)과 직각(直閣) 서공(徐公) 준보(俊輔)가 지은 중건기(重建記)를 나에게 보여주면서 사실(事實)을 기록해줄 것을 요청했다.
내가 가만히 살펴보니 우옹(尤翁)은 장(張)·악(岳) 두 무신(武臣)을 의당 힘써 앙모해야할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 그 지남(指南)하는 것이 깊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지자(知者)와는 말할 수 있으나 속인(俗人)과는 말하기 곤란하다.
아아, 지금시대로써 우옹(尤翁)의 시대와 비교해본다면 어떠한가. 자식으로서 그 아비를 뒤로하는 사람과, 신하로서 그 임금을 뒤로하는 사람은 우선 논할 것 없거니와, 문을 열고 원수에게 읍(揖)을 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원수를 섬기는 사람도 또한 있으니 때때로 한번 생각해보면 사람으로 하여금 두발(頭髮)이 치솟고 눈초리가 찢어지게 하는 일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최공(崔公)은 후예(後裔)이면서 또 먼 세대의 맏아들이다. 그래서 반드시 장후(張候)를 의(義)로써 토적(討賊)하고 악왕(岳王)을 맹세코 죽여 설치(雪恥)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이후에, 비로소 선대를 잘 계술(繼述)했다고 말할 수 있다. 창열(滄烈)이 또한 유학(儒學)을 공부한 사람이다. 나는 그가 장차 족인(族人)과 성현(聖賢)의 학문을 강론하고 예악(禮樂)의 가르침을 준수하여 크게 세도(世道)에 대해 도움을 끼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야 우옹(尤翁)도 최씨(崔氏)에게 바라는 바를 기필하게 될 것이니 어찌 서로 힘쓰지 않겠는가.
창열(滄烈)이가 대답하기를 ‘선생께서 하신말씀은 원대(遠大)하십니다. 무릇 우리 할아버지의 후손으로서 누군들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마침내 그 말을 글로 써서 돌아가 그 벽(壁)에 새기도록 했다. 저 정자 이름은 처음부터 지명(地名)으로 지었고, 지금은 최공(崔公)의 자손이 거주하는 곳으로 옮겨서 이건(移建)한 것이다.
■…■ 중추(仲秋) 전우(田愚)는 기(記)하노라.
춘포 익산천 우물쉼터에 쉬어가다.
자전거 하이킹을 즐기는 자유인 나그네는 삼례 비비낙안을 향해 페달을 밟아 익산천 우물쉼터 지나는 중 우물쉼터 정자에 쉬어가다.
우물쉼터는 만경강과 익산천이 만나는 곳으로 새들과 다양한 생물들이 많이 드나드는 풍광이 아름다운 곳입니다.
과거에는 취수정으로 사용되었던 곳으로 옛 취수정의 흔적이 남아있고 아름다운 순례길인 느바기길이 지나는 곳이기도 합니다.
달팽이처럼 느리게 세월을 낚는 나그네는 느리게 느바기길이 지나가는곳 순례길에 세워진 우물쉼터에서 아름다움 만경강 풍광을 조망하고 은빛 억새군락을 바라보며 망중한을 즐기는 기분은 아주 좋았지.
'느바기길'의 의미란 "느리게 걷고, 바르게 걷고, 기쁘게 걸으라를 의미를 담고 있다" 한다.
➡느바기(느리게-바르게-기쁘게의 합성어로서 느바기를 나타내는 것은 달팽이이다.)
인생나그네 '느바기'의 의미처럼 "느리게 걷고, 바르게 걷고, 기쁘게 1만보 2만보 걸으며 감사하며 느리게 살아가자.
느리게 걷는다는 의미를 닮아 달팽이 모양을 상징화한 우물쉼터에 잠시 쉬어가며 옛 전통놀이도 즐길수 있습니다.
깨끗하고 아름다운 만경강 푸른물결이 만나는 우물쉼터에서 잠시 머물러 쉬어가다.
☛자유인 조동화 오늘의 행복이야기
인생의 삶의 행복이 무엇인가?
자유인의 신조는 “평범한 일상속에서 행복을 느끼자”입니다.
오늘 해야 할일이 있다면 바로 시행하고, 평범한 일상이 나에게 가장 소중한 행복의 자원임을 꼭 기억하며 사리라.
과거는 지나갔고 내일은 나의 날이 아닐수도 있기 때문이다.
인생의 삶이 도대체 무엇인가, 사실 인생의 삶이란 생노병사의 주기를 반복하는 허무한 존재라고,,,,,,,,,,,,,,표현하면 틀린말은 아닐걸,,,,,,,,,한세상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자.
쉼없이 흘러가는 세월속에 지나온날들이 아쉬움만 가득하지만 흘러보낸 세월은 다시오지 않기에 지나간 시간들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무상한 삶의 여정을 자연에 순응하며, 오직 한번의 인생 소중한 시간을 즐겁게 살기 위하여 나날이 최선을 다하자.
걷는것과 맛있는 음식과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는것들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고, 평범한 일상이 행복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살자.
오늘하루의 소중함, 헛되이 지나간 시간들, 오늘을 아끼고 사랑하자. 어제에 집착하지 말고, 내일을 걱정하지 말며, 오늘의 삶이 가장 소중하다는 진리를 믿으며 살자.
어떻게 살아야 아름답고 가치 있는 인생일까?
최선을 다해 사는 것 이라고 말하겠다. 무수히 많은 인생의 정답중에 최선을 다하는 것보다 더 좋고 명쾌한 정답은 없다.
최선을 다하며 살자.
나의 초년인생 경험담
1970년 鐵道에 入門하여 40여년을 철도에 젊음을 불사르고, 무엇하나 만족스럽게 이룩 한 것 하나 없이 흘러간 歲月!
1970년2월20일 목포기관차사무소 기관조사 초임발령으로 사회 초년생이 되어 목포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당시 철도는 증기기관차(영국의 조지스티븐슨 1829년발명)의 운행에서 디젤전기기관차로 동력이 바뀌어가는 과정에 있었으며, 목포-광주간을 운행하는 몇 개열차는 증기기관차사업이 있었으므로 신규발령된 기관조사에게는 증기기관차승무로 지정되어 기관사1인 본무기관조사1인 보조기관조사1인 3명이서 하는 근무형태로 기관사는 운전만담당하고 기관조사는 교대하여 석탄을 투척하여 증기를 가열시켜 증기기관차가 움직이므로 석탄을 투척하는 작업이 기술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힘을 쓰는 작업이었기에 어려운 작업이었다.
칙칙폭폭, 철컹철컹 한밤의 정적을 깨며 기적소리를 직접울리면서 달렸던 추억어린 시절이 있었음을 추억삼아 이야기 해보았습니다.
시골의 어른들은 기차소리에 깨어 많은 자손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허구한 이야기는 아닐것이요, 그래도 인정있고 살기가 좋았던 시기는 그때 그옛날이 좋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순천철도국 목포기관차사무소 기관조사의 사회초년생은 2년6개월의 반복되는 임무후 1972.8.29. 군에 입대, 전주 35사단에서 6주간 훈련을 마치고 후방기 교육을 춘천에서 2주간의 훈련후 강원도 인제 현리 공병부대 의무실 위생병으로 자대 배치되었다.
군생활중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35사단 훈련병때 모악산KBS송신소 건설 작업시 모악산아래에서 세멘 한포대씩 등에 메고 정상까지 오르던일이 가장 내인생에서 힘들었던 일이었답니다.
자유인 趙東和는 黃金萬能主義의 核家族 개인주의 세상에서 옛시절의 인정은 찾아볼수 없고 하루면 수도없는 갖가지 사건사고 홍수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속에 나자신도 예외가 될수 없듯 바쁜일상으로 어영부영 하루가 흘러간다.
자유인 조동화 그는 누구인가?
전쟁의 포성이 한창인 6.25 시대에 태어나, 인생의 삶이 무엇인가 고뢰하며 즐거운 인생을 꿈꾸고자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쉼없이 흘러가는 세월속에 지나온날들이 아쉬움만 가득하지만 흘러보낸 세월은 다시오지 않기에 지나간 시간들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무상한 삶의 여정을 자연에 순응하며, 오직 한번의 인생 소중한 시간을 즐겁게 살기 위하여 나날이 최선을 다하자.
인간의 삶이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 세상에 왔으니 삶에 이유가 없고, 그냥 태어났으니 사는것이다.
인간의 삶이란 정답이 없는 것이 정답인 것 같다.
정답없는 인생, 내가 하고자 하는것 하면서 행복 느끼며 살면 그것이 행복아닐까 생각해본다.
조동화의 벗님들!
자유인 조동화의 신조는 삶의 여로에서 이세상 살아가는 것이 모두가 “부질없다” 하면서 그냥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다.
그누가 속세를 가리켜 잠깐의 꿈속세상이라 했던가?
인생은 한조각 뜬구름 같은것이며 자연에 순응하며, 오직 한번의 인생 소중한 시간을 즐겁게 살자.
오늘 해야 할일이 있다면 바로 시행하고, 평범한 일상이 나에게 가장 소중한 행복의 자원임을 꼭 기억하며 사리라.
과거는 지나갔고 내일은 나의 날이 아닐수도 있기 때문이다.
행복이 뭐 별거 있습니까? 그냥 내가 하고 싶을거 하면 그게 행복입디다.
고맙고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