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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으로부터 "작은 거인"이라고 불리었던 덩샤오핑은 어느
면에서 보더라도 만만찮은 인물이었다. 그의 일생은 말그대로 칠전팔기의 "부도옹(不倒翁, 쓰러지지 않는 오뚜기)"으로
마오쩌둥 시절 두번이나 실각하고 몇번이나 죽음의 위기를 넘겼으며 마오쩌둥이 죽자말자 단숨에 중국 최고의 실력자로
떠올랐다. 또한 비록 군사교육을 받은 적은 없었지만 1930년대 중반 마오쩌둥과 대장정을 함께 하였고 팔로군 정치부
주임과 제129사단 정치위원, 국공내전 중에는 중원야전군(제2야전군)의 정치위원을 맡는 등 수많은 전투를 직접 경험하였다.
마오쩌둥 사후 덩샤오핑이 라이벌이었던 4인방과 화궈펑을 몰아내고
권력을 쥘 수 있었던 것은 정치와 군사 양면에서 쌓아올린 풍부한 경험과 당, 군을 휘어잡을 수 있는 뛰어난 정치적 수완이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거의 강박에 가까울 만큼 계급 투쟁에만 혈안이 되었던 마오쩌둥과 달리,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 검은 고양이건 흰 고양이이건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중국의 격언, 중요한 것은 결과이지 방법이나 이념에 경도되지
말라는 뜻)"이라는 유연한 사고방식을 갖춘 실용주의자이자 강한 결단력과 추진력을 갖춘 인물이기도 했다. 바로 이런 점이
홍콩 반환 문제를 놓고 "철의 여인"이라 불리던 대처 수상조차 무릎 꿇게 만들었으며, 철저하게 실패로 돌아간 고르바초프의
"페테스트로이카"나 마오쩌둥의 "대약진운동"과 달리 중국의 개혁개방을 성공적으로 끌어낸 이유였다.
중월전쟁을 놓고도 덩샤오핑은 무작정 침공을 밀어붙인 것이 아니라 사전에 치밀한 막후 공작을
하였다. 그는 국내외에 그동안 중국이 어려운 여건에서도 베트남을 위해 막대한 식량과 물자를 아낌없이 원조했으며 많은 피까지 흘린 덕분에 베트남이
승리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그럼에도 베트남 지도부가 소련을 결탁하여 "배은망덕"하게 행동한 점, 특히 중국의 동맹국인 캄보디아를 무력으로
점령했다는 사실을 들어서 베트남의 호전성과 패권적 야심을 적극적으로 선전하였다. 카터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과 서방, 동남아 국가들은 중국을 지지하고 베트남 침공을 암묵적으로 동의하였다. 1962년 중인전쟁 이래 서로
총부리를 겨누었던 인도 역시 중월전쟁 직전에 재무장관이 베이징을 방문하여 양국의 경제적인 협력을 강조하는 등 국제적인 분위기는 중국에게 전에
없이 유리하게 돌아갔다.
만약 덩샤오핑의
치밀한 사전 포석이 없었더라면 국제사회는 중국의 베트남 침공을 침략으로 보았을 것이며 그의 개혁개방 정책에도 심각한 악영향을 주었을 것이
틀림없다. 1962년의 중인전쟁 당시 마오쩌둥은 그런 노력을 게을리 하였고 전쟁에서는 승리하고도 외교적으로는
아무것도 얻어낼 수 없었다는 점에서 분명 덩샤오핑은 마오쩌둥보다도 한 수 위였다.
문제는 이런 정치, 외교적인 치밀한 포석과 달리 정작
군사적인 준비가 불충분했다는 점이다. 덩샤오핑은 중월전쟁 발발 직후 서방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중인전쟁과 마찬가지로 한달 정도면 끝날
것"이라고 하면서 "인도보다는 베트남이 더 강하니 조금 더 걸릴 것이다"라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였다. 하지만 상황은 결코 녹녹하지
않았다. 1962년에 있었던 중인전쟁 당시 인도군은 오합지졸에 불과했고 네루는 중국군이 반격하지 않으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베트남군은 지난
30년 동안 풍부한 전쟁 경험을 갖추고 있는 반면, 중국군은 문혁 시절의 타격을 회복하지
못한데다 장비도 형편없었다.
보병 화기만 하더라도, 중국군이 주로 사용하는 56식
반자동 보총은 2차대전이 끝난 직후 개발된 소련제 SKS 소총을 베이스로 한 것이기에 시대에 완전히 뒤떨어진 무기였다. 반면, 베트남군이
보유한 AK-47이나 M-16 돌격 소총은 과거의 경기관총에 준할 만큼 빠른 연사가 가능한데다 가벼운 무게는 베트남의
험준한 산악지형과 정글에서 훨씬 유리하였다. 물론 중국군 역시 AK-47 소총을 카피한 56식
자동보총이나 56식 반자동보총을 개량한 63식 자동보총이 있었으나, 문혁 시절 군수산업이 마비되면서 충분한 수량을 생산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장비 보급은 소련군과 인접한 북부전선군에 우선권이 있었기에 베트남 국경을 담당한 남부전선군은
상대적으로 구식 장비로 무장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중국군 수뇌부는 장거리 사격과 총검 돌격이라는 구태의연한 교리를
고수하였고, 연사 속도는 느리지만 화력이 강하고 명중률이 높으면서 총검 사용에 유리한 구식 소총을 더 선호하였다. 미군이 베트남의 정글에서
AK-47의 위력을 절감한 후 M-16의 보급에 열을 올렸던 교훈을 전혀 배우지 못한 결과였다.
중국-베트남 국경에 배치된 베트남군은 제3사단과 제316사단 등 정규군 2개사단(2만명)을
제외하고는 상대적으로 무장이 빈약한 2선급 부대와 지역 민병대였다. 하지만 베트남전 당시 소련과 중국에서 원조받은 무기와 남베트남군에게 획득한
미제 무기로 무장하였고 무기와 장비, 탄약이 풍부하였다. 이들은 AK-47 소총과 M-16 소총, 105mm M101 야포, 155mm M114
곡사포, M113 장갑차, M41 경전차, M48 중전차, UH-1 헬기 등을 대량으로 갖추어 화력과 기동성이 중국군을 압도하였다. 특히 소련제
RPG-7 대전차 로켓포는 중국군 기갑부대에 치명적인
위협이었다.
중국군 지휘관들의 역량 또한 매우 형편없어서 숫자만 믿고 인해전술로 밀어붙이는
식이었다.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들이 군사학교들을 장악하고 우수한 교관들을 쫓아내거나 감옥에 넣어버린 결과였다. 중국군 병사들은 일렬로 서서
무작정 베트남군 진지로 돌격하다가 엄청난 사상자를 내기 일쑤였다. 20여년 전 한국전쟁 당시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사방에서 무수한 중국군이 십여대의 전차와 함께 나팔소리를 신호로 일제히
우리 진지로 돌격하였다. 우리는 적 전차를 모두 격파하고 수많은 중국군을 죽였는데 몇인지 헤아릴 수도 없었다. 우리 앞은 적의 시체로 뒤덮였다.
중국군은 인해전술로 공격해 왔고 총도 쏘지 않고 달려들었다. 탄약만 충분하다면 우리는 그들이 몇명이건 죄다 죽였을 것이다." - 카오방 전투에
참여한 베트남군 병사의 증언
베트남군 지휘부는 중국군에 대하여 "숫자만 많을 뿐
기동력이 약하고 구식 무기와 장비를 보유한 시대에 뒤떨어진 군대이며 전쟁 경험도 없다"라고 신랄하게 비판하였고 중국군 수뇌부 역시 큰 충격을
받고 부랴부랴 군의 현대화를 서둘렀을 정도였다. 중인전쟁과 비교했을 때 베트남군은 인도군보다 훨씬 강력했고 중국군은 오히려 더
약화되었다.
하지만 가장 큰 실수는 베트남의 항전 의지를 과소평가한 것이었다. 호치민
이후 베트남의 지도자가 된 레 주언(Lê Duẩn), "붉은 나폴레옹"이라 불리던 베트남군 최고 사령관이자 국방장관이었던 보 응우옌 지압(Võ
Nguyên Giáp), 사이공 해방전을 지휘한 반 티엔 둥(Văn Tiến Dũng) 참모총장 등 베트남의 정치, 군사
지도자들은 결코 중국의 지도자들 못지 않은 강력한 의지와 리더쉽을 갖춘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어떤 댓가를 치루더라도 한치도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이것이 중국의 최대 오판이었고 덩샤오핑으로서는 일생일대의 호적수라 할 만하였다.
2월 17일, 중국-베트남 국경 전 지역에서 걸쳐서 대대적인 포격과 함께 중국군의 대규모
공세가 시작되었다. 약 16만명에 달하는 중국군은 59식 중전차, 62식/63식 경전차 등 200여대의 전차를 앞세워 동쪽과 서쪽, 북쪽
3개 축선 24개의 노선을 따라서 진군하였다. 개전 첫날 중국군은 험준한 산길과 울창한 정글, 장애물로 온갖
고생을 하면서도 베트남 영내로 약 10km 정도를 진군하여 베트남군 최일선 진지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이틀째부터 전투는 더욱 치열해지기 시작했고 베트남군의
저항 또한 완강해졌다. 이날 오후 중국군은 베트남군과의 일진일퇴 끝에 랑썬과 까오방, 동당,
라오까이 등 주요 목표의 외곽 지대 일부를 무너뜨리는데 성공했지만 더 이상 밀고 들어갈 수 없었다. 또한 동당 공략을 맡은 제55군
제163사단은 베트남군의 반격으로 도리어 격퇴당하기도 했다. 베트남군의 전략은 국경에서 강력한 지연 전술을 펼치면서 중국군에게
가능한한 최대의 타격을 입힌 후 주력부대를 수도 하노이 주변에 집결시켜 결전을 벌이겠다는 것이었다.
베트남 정부의 선전 매체인 하노이 방송은 이틀 동안 중국군이 3,500명의 사상자를
내었으며 전차 40여대가 격파되었다고 발표하였다.
베트남군의 저항이 예상 외로 강력하자 중국군 총사령관인 쉬스여우는 급히 예비대를
투입하였다. 2월 19일 제14군 제40사단이 전차 40여대를 앞세워 라오까이 성의 성도인 라오까이(老街)를, 제41사단이 멍캉(孟康)을
점령하였다. 제55군 제163사단도 재차 공세에 나서서 동당(同登) 외곽의 고지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베트남군은 물러서지 않고 중국군이 점령한 마을 주변에서 게릴라전을 펼쳤고 길게 늘어선
중국군의 대열과 병참 부대를 습격하였다. 기동성이 결여된 중국군은 낡은 트럭과 말, 당나귀, 인력에 의존하여 물자와 장비를 실어날랐는데 좁은
산길에서 베트남군의 기습을 받을 경우 속수무책이었다. 또한 무덥고 습한 날씨와 수시로 스콜이 쏟아지는 기후도 중국군을 괴롭혔다.
중국군은 수많은 인부들을 동원하여 중국-베트남
국경 지대에 펼쳐진 밀림을 일일이 제거하면서 최일선으로 향하는 길을 뚫었다. 험준한 지형과 울창한 정글조차 중국의 거대한 인력과 인해전술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베트남군은 곳곳에 지뢰를 매설하고 박격포와 로켓포를 쏘아대면서 중국군을 교란시켰지만 중국군은 아랑곳하지 않고 끊임없이
공격을 반복하면서 베트남군을 뒤로 밀어내었다. "중국군 보병들은 마치 논의 벼처럼 무수히 밀집한 채 공격해 왔다" -
라오까이 전투에 참전한 베트남군 병사의 증언
2월 23일 맹렬한 포격을 앞세운
중국군 제55군에 의해 동당이 개전 6일만에 결국 함락되었다. 동당의 방어를 맡고 있었던 베트남군 제3사단 제12연대도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베트남군 제316사단이 동당 탈환에 나섰으나 중국군의 강력한 방어에 부딪치면서 실패하였다. 또한 25일에는 중국군
제42군이 까오방성의 성도인 까오방(高平)을 점령하고 베트남군 제346사단을 격파하였다. 중국군의 다음 목표는 동당 남쪽
14km 떨어진 란쏜(諒山)이었다. 인구 4만명의 도시인 란쏜은 중국과 베트남을 연결하는 철도와 국도가 관통하는 교통의 요충지이며 만약 이곳이
함락된다면 중국군은 단숨에 남하하여 수도 하노이를 위협할
참이었다.
중국군은 인해전술로 베트남군을 밀어붙이며 26개소에 달하는 거점 촌락들을 점령하는 등
공세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으나 피로 피를 씻는 등 손실은 막심하였다. 17일부터 25일까지 약 일주일 동안 국경에서 겨우
16km를 진격했을 뿐이며 베트남군의 사상자는 3천여명에 불과한 반면, 중국군의 손실은 1만명이 넘었다. 베트남군은 중국군의 대부대가 나타나면
결전을 회피하고 정글과 지하갱도, 험준한 산속으로 재빨리 숨었다. 중국군 입장에서는 이들을 추격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또한 대규모 병력을 한곳에 집중하기 어려운 베트남의 지형상 중국군의 대오는 쉽게
흩어졌고 밤이 되면 3~5명씩 짝지은 베트남군의 기습에 끝없이 시달렸다. 이에 대응하여 중국군 역시 매복해 있다가 이들이
나타나면 반격하고 베트남군이 숨어 있는 동굴을 겹겹히 포위한 후 공격하는 식으로 대응했지만 진격은 지지부진할 수 밖에
없었다. 손실이 예상 외로 늘어나자 경악한 중국 지도부는 쉬스여우를 경질하고 서부전선을 맡고 있었던 부사령관 양더즈로 교체하였다. 양더즈는 다른
전선에 대한 공격을 중지하고 모든 전력을 랑쏜에 집중시켰다.
2월 27일 새벽 6시
중국군 제42군과 제50군, 제55군 등 6개 사단에 달하는 대병력이 랑쏜 외곽을 포위하고 베트남군 진지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또한 랑쏜으로
들어가는 주요 도로를 장악하고 베트남군의 구원부대가 랑쏜으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차단하였다. 하지만 이틀에 걸친 치열한
전투 끝에 베트남군 제3사단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중국군의 일차 공격은 실패로 끝났다. 중국군은 3월 1일 오전 9시, 19개 포병연대
306문에 달하는 대규모 포병부대를 집결시켰다. 그리고 30분 동안 1만발에 달하는 포탄을 쏟아부었다. 랑쏜 시가지와 베트남군의 진지가 완전히
초토화되었고 모든 통신 선로가 두절되었다.
한편, 소련은 중국을 압박하기 위하여 16,500톤급 스베르도로브(sverdlov)
순양함을 비롯한 13척으로 편성된 기동 함대를 남중국해로 출동시켰다. 또한 하노이에 소련 군사고문단이 파견되었고 중국군의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했다. 소련의 개입이 가시화되자 미국 역시 태평양함대를 출동시키고 남중국해에 정찰기를 파견하여 소련 함대의 동태를 살피는 등
상황은 점점 일촉즉발이 되고 있었다.
중국군은 랑쏜에 대한 포위를 강화하는 한편,
랑썬 주변의 베트남군 거점을 차례로 제압해 나갔다. 베트남군은 랑쏜 외곽의 여러 고지에서 격렬하게 저항하면서 중국군의 진격을
저지했지만 압도적인 숫자에 점점 밀려났다. 3월 3일 랑쏜 시가지가 내려다 보이는 303고지가 중국군의 손에 넘어가면서 랑쏜 함락은 시간 문제가
되었다. 베트남군 지도부는 수비대에게 랑쏜을 포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3월 5일 중국군 제54군 제127사단과 제129사단이 랑쏜 시내에
진입하였다. 하지만 랑쏜은 마치 유령 도시마냥 텅 비어 있었다. 이미 베트남군과 주민들이 모두 철수한 것이다.
베트남군의 손실은 컸지만 잔여 병력은 주변 산악지대로 물러난
뒤 재정비하여 다시 싸울 준비를 하였다. 또한 동당을 비롯한 중국군이 점령한 지역에서도 베트남군의 반격에 직면하면서 중국군은 급히 증원 부대를
투입해야 했다. 심지어 정글을 뚫고 베트남군의 소부대가 중국 국경 영내로 침투하여 일부 촌락을 점령하는 등 중국군의 후방은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
랑쏜 전투는 중월전쟁 중 최대의 격전으로 2월 27일부터 3월
5일까지 8일 동안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중국군은 증원부대까지 합하여 4개 군 12개 사단이 투입되었고 베트남군 역시 제3사단을 비롯한
4개 사단, 1개 포병 연대 및 민병대가 투입되었다. 베트남측은 중국군의 손실이 2만명에 달한다고 발표하였고 중국 역시
베트남군의 손실이 1만명이 넘는다고 주장하였다. 서로 어느 정도 과장되기는 했으나 그야말로 격전이었던
셈이다.
중국군의 손실은 매우 컸지만 랑쏜의 함락으로 베트남의 최일선 방어선은
무너졌다. 랑쏜 35km 떨어진 곳에 있었던 베트남 제1군구 사령부가 후방으로 철수하였고 수도 하노이도 혼란에 빠졌다. 또한 베트남 지도부는
전국에 총동원령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중국군은 더 이상 진격하지 않았다. 중국 지도부는 "충분히 응징하였다"라면서
일방적으로 종전을 선언하고 현지 부대에 철수 명령을 내렸다. 또한 베트남 정부에 협상을 제안하였다. 베트남군의 저항이
예상 외로 강력한데다 본격적으로 반격으로 나올 조짐이 보이자 더 이상 수렁에 깊숙이 빠지기 전에 발을 빼기로 결심한 것이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중국군이 철수를 시작하자 베트남도 3월 8일 "중공군이 더
이상 전쟁범죄행위를 계속하지 않는다면 평화 열망의 표시로 중공군의 안전철수를 보장한다. 추격전을 하지 않겠다."라고 발표하였다. 확전을 원치
않았던 것은 베트남도 마찬가지였고 중국군이 알아서 물러난다면 그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고 여긴 것이다.
이로서 전쟁은 끝났다. 중국군은 3월 16일까지 베트남 영내에서 완전히 철수하였고 베트남군도
약속대로 추격하지 않았다. 하지만 중국군은 결코 그냥 물러난 것은 아니었다. 점령지역에 있는 철도와 도로, 베트남군의
진지, 주요 산업 시설을 풀 한포기 남기지 않겠다는 식으로 철저하게 파괴하였다.
2월 17일부터 3월 5일까지 17일 동안 벌어진 중월전쟁에서 중국군은 30만명
이상을 투입하였고 40km를 진격하여 라오까이와 까오방, 랑쏜 등 3개 성도와 17개 현을
점령하였다. 또한 중국측은 2만명의 사상자를 내고 베트남군 5만명 이상을 사살하거나 부상을 입혔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베트남측은 중국이
2만6천명이 죽고 3만7천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300여대의 전차를 격파했다고 주장하였다. 자신들의 손실은 2만명 정도로 발표하였다. 물론 이것은
서로 선전을 목적으로 전과를 과장한 것이므로 신뢰성은 없다. 서방 학자들은 쌍방 모두 각각 2만
5천명 이상의 전사자를 포함하여 6만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었다고 본다. 중국은 고작 보름 남짓한 전쟁에서 이전에 미국이 베트남전쟁에서 10년
동안 낸 전사자의 거의 절반에 맞먹는 피해를 입은 셈이었다.
하지만
중국 지도부는 대외적으로 전쟁 내내 주도권은 자신들에게 있었다는 점을 들어서 사상자 수와 상관없이 자신들이 승리하였다고 선전하였다. 중월전쟁이
끝난 직후 베이징을 방문한 헨리 키신저가 덩샤오핑에게 "더 깊숙이 진격하는 것이 훨씬 좋지 않았겠느냐"라고 묻자 덩샤오핑은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하노이를 점령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대꾸하였다. 명목상 중국의 지도자였던 화궈펑은 자신들의 목적은 베트남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소련을 시험하려는 것이었다며 "우리는 호랑이(소련)의 엉덩이(베트남)을 만졌다"라고 표현하였다. 중국의 허장성세와
마찬가지로 "이겼다"라고 외친 것은 베트남도 마찬가지였다. 중국군이 물러난 것은 막대한 손실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고 자신들은 침략자들이 떠나기 좋도록 레드 카펫을 깔아주었을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엄밀히 말하면 어느 쪽도 이겼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원래 중국의 목적은
중국-베트남 국경의 마을 몇개를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베트남군을 캄보디아에서 철수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쟁 과정에서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막대한 손실을 입자 베트남군의 반격을 우려한 나머지 목적을 달성하기도 전에 스스로 물러나야 했다. 자신들의 군사적
역량으로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베트남을 굴복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한 것이다. 실제로 베트남군은 캄보디아에서
단 한명의 병사도 철수하지 않았고 중국군의 침공 당시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을 방문 중이던 베트남 수상 팜 반 동을 비롯한 베트남 지도부
역시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일정을 그대로 수행하였다. 30만명이 넘는 정규군을 동원한 중국군을 상대로 베트남군은 일부
부대를 제외하고는 2선급의 지방군과 현지 민병만으로 막아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선전한 셈이었고 덩샤오핑으로서는 전에 없는 오점을 남겼다.
바로 이 점이 중월전쟁과 똑같은 제한전쟁이지만 영국이 아르헨티나를 굴복시키는데 성공한 포클랜드 전쟁과의
차이점이다.
그나마 아프가니스탄에서 발이 묶인 채 무려 10년이나 무자헤딘과 싸우다
결국 체제가 몰락했던 소련과 달리, 상황이 생각했던대로 돌아가지 않자 신속하게 발을 뺐다는 점에서 더 큰 망신을 피할 수
있었다. 만약 덩샤오핑이 자신의 체면에만 매달려 베트남의 수렁에 빠졌다면 패전은 물론이고 그의 개혁개방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을 것이다.
양쪽 지도자들은 서로 의기양양하게 자신들의 승리를 강조하면서 상대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행동했지만 실제로는 모두 상처를
입었다.
중국은 베트남 침공으로 인한 막대한 전비 부담은 물론, 소련과
베트남을 남북으로 상대해야 하는 상황은 피폐한 국가 재정을 심각하게 압박하였고 개혁개방을
지연시켰다. 베트남 역시 손실이 결코 작다고 말할 수 없었다. 중국군에게 일시적으로 점령된 국경지대는 완전히 초토화되는
등 많은 피해를 입었다. 또한 국제 사회에서 완전히 고립된데다 그나마 믿었던 소련도 끝까지 개입을 주저하였다. 이후에도
중국의 재침입에 대비하여 베트남은 1980년대 내내 막대한 재정을 군사비에 투입해야 했다. 이로 인하여 경제 재건과 군의
현대화가 지연될 수 밖에 없었다. 전쟁의 발단이었던 캄보디아에 대해서도 미국의 압력과 재정 부담에 못 이겨 결국 1989년 모든
군대를 철수시켰다. 일부 학자들은 장기적으로 본다면 결국 중국이 목적을 달성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결과론적인 얘기라고 해야 할 것이다.
어쨌거나 중국은 베트남을 굴복시키지 못했고 그들이 지원하던 폴 포트의 크메르 루즈는 결국 백기를 들었다.
중월전쟁은 단순히 대국이 소국을 침략한 것이 아니라 중국의 大패권주의와 베트남의
小패권주의가 충돌한 것이었다. 두 나라는 여러모로 닮은 꼴이었다. 외세에 대한 거의 편집광적인 경계심과 지역 패권주의 등. 어쨌거나
베트남은 프랑스와 미국에 이어서 중국의 공격을 막아냄으로서 국민들의 결속력을 더욱 강화하고 외세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다.
이후에도 양국의 국경지대에서는 대규모 포격과 무력 충돌이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1984년 4월에는 중국군 2개 사단(제40사단, 제49사단)이
베트남 영내 2.5km를 침입하여 베트남 북부의 국경 마을 비쑤옌(Vị Xuyên)을 놓고 베트남군 제313사단과 격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중국군의 손실은 1천여명에 불과한 반면, 베트남군의 손실은 5천여명이 넘을 만큼 완패했다. 중국은 중월전쟁 이후 본격적으로
군의 현대화에 착수한 반면, 베트남은 과도한 군비 지출과 캄보디아 주둔으로 재정난에 시달리면서 군의 현대화가 지연되었기
때문이었다.
냉전이 종식되면서 베트남과 중국의 적대 관계도 어느 정도 회복되기
시작했다. 1991년 11월에는 베트남 수상 보 반 끼엣과 당 서기장 도 므어이가 베이징을 방문하여 중국의 지도자인 장쩌민과 정상 회담을
가졌다. 이후 중국의 경제 성장에 따라 베트남 역시 경제적으로는 중국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지만
지금까지도 누구도 무시하지 못하는 인도차이나의 패권국가로 남아있다. 최근에는 시사 군도를 비롯한 남중국해의 영유권 분쟁을
놓고 중국이 압박 수위를 높이자 베트남은 미 해군의 베트남 주둔을 용인하겠다면서 맞섰다. 동남아 국가들을 우습게 여기는 중국조차 베트남만큼은
가벼이 보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중월전쟁 당시 베트남의 희생이 결코 헛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1939년 소련과 핀란드 사이에 있었던 "겨울전쟁"과 마찬가지로, 중월전쟁 역시
약소국이 강대국을 상대로 주권을 지키려면 반드시 그만한 댓가가 뒤따르는 법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냉엄한 국제 질서의 현실에서 어떤 것도 공짜로
얻어지는 것은 없다. 베트남의 독자 노선은 아무런 대책없이 강대국에 의존하여 경제적으로는 중국에게, 정치 안보적으로는 미국에게 예속된 채 어느
줄을 타야할지 딜레마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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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中越戰爭) 영문판, 중문판, 일문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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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등은 구글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