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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을 읽으시는 중에 사랑의 예수님께서 형제 자매님의 지친 마음을 꼬~옥 안아 주실겁니다.
저는 1963년 경기도 파주에서 3대째 믿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의 2남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유, 청소년 시절 믿음의 가족과 주변 분들의 칭찬과 사랑을 듬뿍 받으며 아름답고 행복한 추억을 간직하며 성장하였습니다.
부모님은 믿음의 좋은 유산을 남겨주셨고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주셨습니다. 어려운 중에서도 믿음의 본보기가 되어 주셨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요리전문학교에서 요리공부를 하였고 사회의 첫발을 서비스 관광업에 내딛게 되었습니다.
직장 특성상, 전직원이 주일에도 근무를 하는 곳이었습니다. 주일 오전 1부 예배를 드린 후 직장으로 바로 출근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려서 부터 요리사로 생활을 하기전 까지 줄곧 주일이 되면 온가족이 예배와 찬양과 성도의 교제로 마치 잔치와 축제 같은 분위기 속에서 주님과 벗삼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직장생활과 주어진 현실은 전혀 다른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해야만 했습니다. 무척이나 힘들고 암담했지만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어려움을 헤쳐나갔습니다.
1987년 봄, 10년간을 같은 교회에서 친구로 지내왔던 지금의 아내로 부터 결혼 청혼을 받게되었습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주님의 뜻인지를 알기 위해서 일체의 만남과 연락을 끊고서 밤마다 100일 작정기도를 드렸습니다.
작정기도 마지막날에 하나님께서 확실한 응답을 주셔서 1987년 봄에 충현교회(김창인목사님)에서 축복된 결혼예식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아내는 밝고 명랑하며 적극적인 성격으로 입이 무겁고 지혜로우며 남편을 하나님 다음으로 받들어 섬기는 신실하고 경건한 기도의 여인입니다.
당시, 저의 유일한 낙이라곤 교회에서 주일1부예배 찬양대로 봉사하는 것 이었습니다. 당시 장년1000 여명 이 출석했던 중곡동 진성교회(정백원 목사님)에서 27세의 나이로 서리집사와 찬양대 지휘자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아내는 유치부, 유년부 교사와 찬양대원으로 새벽부터 저녁예배까지 종일토록 교회에서 제몫까지 열심으로 봉사하며 헌신하였습니다.
목사님께서는 넉넉한 사랑과 덕으로 성도들과 저희 부부를 격려해 주셨고 품어주셨습니다. 성덕순 전도사님 또한 특별한 사랑으로 저와 아내를 아들과 딸과 같이 대해주셨습니다.
특별히 전도사님께서는 저에게, 지금하고 있는 요리사 일은 주일을 지키기가 어려운 직업이라면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다른 직업을 찾아보라며 계속 충고를 해주셨습니다. 젊은 혈기와 요리사로 성공하고야 말겠다는 야망이 너무도 강했던 시기였기에, 전도사님의 사랑의 충고가 소귀에 경읽기로 들렸습니다. 아니, 오히려 야속하게 들리기까지 했습니다.
요리 기술을 힘들게 배운 만큼 경제수입도 점점 더 좋아져 가고 있었고 미래도 어느정도 예측이 가능해져 갔기에 새로운 직업으로 전환하는 것은 엄두가 나질않았습니다. 결국 직업을 바꾼 것이 아니라 남에 속도 모르는 전도사님이 부담스러워졌습니다. 정들었던 교회를 떠나게 되었고 이후로 한동안, 정해진 교회가 없는 떠돌이 교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직장생활은 힘들게 적응이 되어 갔습니다 일이 힘든 것보다 불신자가 대부분인 직장 분위기가 삭막하고 거칠게만 느껴졌습니다. 가랑비에 옷젖는 다는 속담처럼 신앙생활은 힘을 잃어갔고 점점 타성에 젖어 들어 갔습니다.
예배의 감격과 감동은 전혀 느끼지 못한채 몸만 왔다가는 무기력증 환자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교회 친구들과 믿음의 사람들과는 계속 멀어져만 갔습니다.
서서히, 믿음과 말씀과 기도는 뒤에 내려놓고 세상의 출세와 성공을 향하여 앞만 보고 무섭게 돌진하게 되었습니다. 때론 수단과 방법을 불사하며 "안되면 되게하라"는 집념으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 생활과 경제가 안정이 되면 그때가서 제대로 신앙생활을 해야지~" 라고 합리화를 시켰습니다.
불신자인 직장 선후배와 동료들이 가족이요, 말벗이 되어갔습니다. 본격적으로 30살이 넘으면서 부터는 예수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전혀 드러내질 않고 살아가게되었습니다. 점점 술과 세상의 유혹앞에 길들여져 갔습니다. 예배와 믿음 보다 돈과 명예가 우선순위가 되기 시작 했습니다.
악바리 근성과 일중독증이 맞물려서 로보트 같이 규칙적이고, 빈틈없이 빨리 돌아가는 기계적인 삶으로 숨가쁘게 살아갔습니다. 오직 출세와 성공을 향하여..
30대 초반에 초특급 호텔(특1급 호텔)인 신라, 프라자, 쉐라톤 워커힐 호텔을 거치면서 특1급 호텔의 주방장이 되었습니다. 청와대, 외국 국빈급 연회에서 요리를 담당하기도 했습니다. 동기들 가운데 늘 선두를 달리게 되었습니다. 직장동료들과 친구들, 형제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잠을 자다가 꿈에서도 요리를 하는 꿈, 쏘스를 개발하는 꿈을 꿀 정도였습니다. 쉬는 날이면 맛있는 집을 벤치마킹(답사)하였고, 전경련(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음식자문 조리장, 한국궁중요리 연구회 회장등, 한국음식의 레시피화(계량화)와 세계와에 앞장을 섰습니다. 자기계발을 위해서, 미국 코넬대의 호텔조리학 조리장 전문과정에 유학을 준비중에 있었습니다.
제 자신의 장래를 생각해봤을때 저는 노후 생활이 보장된 탄탄한 전문기술을 보유하고 있었고 자타가 인정하는 실력을 으시대고 있던터라 당시에 일류대를 나와서 직장생활을 하는 친구들이 오히려 불쌍하게만 보였습니다. 모든 것이 너무도 자신만만 했었습니다.
그토록 원했던 좋은 직책과 높은 연봉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무의식 가운데, " 내가 갈길이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가끔씩 스쳐 지나 가곤 하였습니다. 해를 거듭할 수록 통장에 꽤 많은 목돈이 모아져 갔습니다. 생활은 안정되어 갔습니다.
직책과 연봉이 오를 수록 마음은 더욱더 허전해지고 공허해졌습니다. 낮으론 최선을 다해서 일했지만, 밤만 되면 괴롭고 착찹한 마음을 술로 달래야만 했습니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날새는 줄도 모른다는 속담 처럼 죽음을 향한 죄악의 늪으로 계속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허망한 것에서 위로와 탈출구를 찾고 있었습니다. "이러면 안되는데~ " 하면서도 계속 죄를 즐기며 후회하기를 반복하였습니다.
30대 중반을 지나면서 부터는 이미, 영육이 휘청거리는 알콜중독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주량이 소주 7~8병에 이르렀습니다. 담배는 하루에 세갑이상.. 영적인 자정 능력 상실과 마음의 주인이 뒤바뀐 채로.. 결국 표류하는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일을 마친 후, 술에 취해서 새벽3시가 넘어 집에 들어오는 날이 허다했습니다. 그때마다 아내는 남편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눈물로 기도하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갈수록 귀가시간은 늦어져만 갔고 나중엔 술에 취한 채로 집 현관문 앞에 바로 쓰러져서 아침에 출근할때 아내의 흔들어 깨우는 소리에 간신히 일어나는 생활이 반복되었습니다.
다람쥐 쳇바퀴 처럼 돌아가는 고단하고 피곤한 삶이 싫어져갔습니다.
이무렵.. 육신의 질병이 서서히 찾아오기 시작 했습니다. 중증허리디스크 , 악성피부병, 축농증, 결막염,녹내장으로 인한 실명위기, 이명증,관 절염, 대상포진, 자살충동증, 불면증, 무기력증,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심한 두통 등 각종 질병들이 연쇄적으로 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한달 월급의 80%이상을 저축할 정도로 알뜰하게 살았습니다. 재테크와 부동산 투자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노후에 안락한 생활을 위해 나름대로 여러개의 통장을 갖고
저의 능력을 과신한 아내는 더 많은 고액 연봉을 원했고 저는 건강의 적신호가 나타나고 있는 상황에서 혼자 깊은 한숨을 쉬며 날로 말술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너무 지치고 힘들어서 아내에게
" 월급을 적게 받더라도 스트레스를 덜받고 인간답게 살 수있는 직장으로 새로 옮겨야겠다" 고 말을 꺼내면 그때마다 아내는 저에게
" 능력이 있는 당신이 왜 그렇게 자신이 없는 말을 하냐" 면서 " 지금 보다 월급을 더 받는 직장이 있으면 옮기고 그렇치 않으면 지금의 직장을 계속 더 다니라" 며 되려 야단을 치는 것 이었습니다. 마음속의 고민과 생각을 아내에게 얘기해 봐야 도움이 되질 않는다고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다 하나님께 기도도 하지 않고 술에 취해서 산만하고 흐트러진 생활이 계속 되다보니 서서히 고립되어 자멸하게 하는 마귀의 전략에 철저히 이용당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어렵사리 저축한 목돈을 불치의 병으로 서서히 날리게 되었습니다. 회사측에서 많은 배려를 해주어서 병원생활 중에도 월급을 오랬동안 지급해 주었는데 병이 호전될 기미가 보이질 않자 제 스스로 직장에 사직서를 쓸 수 밖에 없었습니다.
병원비와 생활비를 쓸 정도가 되다보니, 생활 경제는 바닥으로 곤두박질 쳤습니다. 전세에서 월세로, 월세에서 깔세(보증금 없고 월세만 내는 집)로, 깔세에서 남의집 더불살이 신세로 까지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아내와 아들이 제각기 뿔뿔이 흩어져서 살아야 할 상황 직전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육신의 질병은 나을 기미가 전혀 보이질 않았습니다. 건강했던 몸이 그것도 불과 몇년 사이에 폐인 수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막다른 길 앞에서 분노했습니다. 처절한 내모습과 막막한 현실앞에서 이미 그때는 믿음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친 상태였습니다.
"생각이 말을 지배하고 말이 행동을 지배하고 행동이 삶을 지배하고 삶이 인생을 지배한다"는 말이 꼭맞는 말이라는 것을 제 삶이 스스로 증명을 해주었습니다.
반대로 " 믿음의 말과 믿음의 생각은 기적을 낳는다" 는 것도 후에 깨닫게 되었습니다.
낮에는 잠을 자고 어두워지면 술친구를 찾아 불나비 처럼 돌아 다녔습니다. 때론 살아 보려는 발버둥도 쳐봤지만 결국 현실앞에 절망과 자포자기 밖에는 선택할 것이 없었습니다.
허랑 방탕했던 탕자가 병든 몸과 빈털터리가 되어 결국 아버지의 품을 사모 하며 돌아 오듯, 저도 그런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때, 제 심령 깊은 곳에서 한가닥 애절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 생명을 거둬가시 옵소서~ 주님 저를 도와 주시옵소서~ 이 수렁에서 저를 건져 주시옵소서~ 저의 앞길을 열어 주시옵소서~ "
남아 있는 처자식을 생각하니 불쌍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이 와중에서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젖먹던 힘까지 다 짜내어 , 가족의 생계와 치료비를 위해 무엇을 해서라도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한참을 궁리 끝에 전공을 살려서, 중고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야식 배달 장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김밥 행상이었습니다.
주문전화도 없는데 고객을 찾아서 곁으로 다가가는 이동식 김밥집.. 맛에서 만큼은 자신있었기에 " 일단 한번 해보자 "는 마음으로 보무도 당당히 출발을 하였습니다. 가까운 동네 어느 PC방으로 김밥을 팔러 들어 갔습니다.
" 자~, 출출 ~할 때 , 입맛 없을 때, 끝내 주는 김밥이 왔습니다."
자~ 잡숴들 보세요~! 기운이 솟습니다~ ! 입맛이 회복 됩니다~! 웃음이 절로 납니다~!
남자들, 정력에도 좋고 여자들, 피부미용에도 좋은 맛있는 김밥이 왔습니다. 맛 없으면 돈을 안 받습니다.
자~ 시식용 맛뵈기 김밥을 갖고 왔는데요, 드셔 보시고 맛에 감동이 오시는 분들은 손을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김밥 한줄에 천오백원 되겠습니다.
김밥 맛을 본 사람들이, " 야~맛있다 ~" 하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Pc방에서 게임을 하고 있던 손님들이 여기 저기서 " 아저씨, 여기 깁밥 두줄 주세요~ , 아저씨, 여기는 세줄 주세요~ , 아저씨 저 먼저 주시라니까요~! " 서로들 먼저 달라고 아우성 이었습니다.
갑자기 남대문 돗데기 시장이 되버렸습니다. 삽시간에 김밥 20줄 이상이 팔려 나갔습니다. 죽어가던 환자가 김밥 팔리는 재미에 그때 만큼은 환자가 아니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속으로 웃음이 막 나오는 것을 참느라 혼났습니다.
* 야간에 어느 업소를 들어갈찌라도 기어코 김밥을 팔고 나왔습니다. 업소 분위기와 고객의 유형에 따라 순간 멘트와 제스쳐가 상황에 맞게 알아서 자동으로 나왔습니다. 살아 보려고 독한 마음을 먹고 한걸음씩 내딛다 보니 길이 열리는 것 같았습니다.
인생 최고 밑바닥에서 눈물의 애환도 많이 겪게 되었습니다. 김밥 장사를 하는 기간 동안에 때론, 동물원 원숭이 또는 미친 사람 쳐다보듯 하는 사람이 있었고, 먹고 배탈났다고 다음날 항의 하는 사람도 있었고, 남의 영업집에서 장사한다고 나가라며 화를 내시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저 아닌 또 다른 이동 김밥장사가 나타나서 제가 매일 도는 코스를 미리 파악한후에 선수를 치는 바람에 허탕을 치고 가슴을 쳤던 적도 있었고 비오는 날, 눈 내리는 날은 오토바이로 이동하며 판매하는데 애로사항도 많았습니다. 참으로 스트레스와 예기치 않은 일들이 매일 벌어졌습니다.
김밥 단일품목 이었기 때문에 자본비도 별로 안들어가고 외상없는 현찰장사로 열심히만 하면 되는 걸로 알고 간단하게만 생각 했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서울 중랑구의 번화한 골목들이 주 활동 무대였는데 점점 활동 반경이 넓어져서 1년이 지나면서 부터는 광진구, 동대문구, 노원구 까지 4개구를 넘나들며 오토바이 폭주족 이상으로 정신없이 속도를 내며 김밥 파는데만 열중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가는 곳이 다 제 구역이 되었습니다.
병원비와 생활비를 마련해야 한다는 집념 하나로 이를 악물고 계속 김밥을 팔아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응을 해나가는 저의 모습을 보며 저도 놀랐습니다.
신들린 사람 처럼 김밥을 팔러 돌아 다녔습니다. 낮에는 저를 알아보는 사람이 많을것 같아서 밤에만 김밥장사를 했습니다.
이동식 김밥집 이었습니다. 하루의 순수입이 재료비를 빼고도, 12만원 정도, 주말에는 15~20만원 정도, 월평균 순수입이 400만원 이상이 되었습니다. 시간당 3만원 정도의 고부가 가치의 아르바이트 였습니다.
#감사한 것은 이때 전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 (신자,불신자,믿다가 낙심한자 )과의 만남과 접촉이, 훗날 전도의 동기부여가 되었고 담력 훈련과 눈높이 전도법을 터득 하는데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짧은 시간(4~5시간)에 비하여 수입이 매우 좋았지만 이상하게도 통장에는 돈이 전혀 모아지질 않았습니다. 다음날이면 꼭 지갑이 빈털털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 오히려 항상 마이너스 였습니다. 몸의 통증과 비참함을 잊기위해서 일이 끝난 아침 부터 깡술을 마셔댔습니다. 여러가지 질병으로 고액의 병원비 지출이 컸습니다. 쌀과 몇가지 부식을 사고나면 더더욱 돈에 허덕여야만 했습니다. 빈곤과 질병,그리고 몸의 고통은 계속 악순환 되었습니다.
아픈몸을 이끌고 살아볼려고 이렇게 까지 발버둥을 쳤지만 도무지 보이질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날은 유달리 김밥도 팔리질 않아서 남은 김밥을 다 버리게 될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런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제게 있어서 인생의 터닝포인트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비는 부슬부슬 내리고 더이상 걸을 힘 조차 없을 정도로 지친 상태가 되었습니다. 병들고 지친 몸으로 어느 시장 모퉁이, 상가 입구 앞에 주저 앉고 말았습니다. 무념의 상태로 줄담배를 피우고 있었습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롬8 : 5~6)
찬송소리 였습니다. 그 찬송소리에 이끌려 지하 개척교회를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교회 현관문 앞의 거울에 비친 저의 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어둠으로 가득찬 마귀의 얼굴 이었습니다.
조용히 기도를 하고 계셨습니다.
문 여는 소리에 놀란 사모님께서 " 새벽 부터 웬 거지가 구걸을 하러 왔나..." 하는 난감한 표정으로 저를 쳐다 보며 어찌 해야 할지를 몰랐습니다.
겁에 질린 목소리로 강단에서 기도 하시던 목사님을 부르셨습니다. 제가 제 모습을 봐도 놀랬을 정도 였으니 사모님께서 놀라신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예배당 맨 뒷자리에 맥없이 앉아 앞 장의자에 팔을 포갠채로 엎드렸습니다. 감정이 복받치기 시작했습니다. 뜨거운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눈물이 앞을 가려서 눈을 뜰 수가 없었습니다. 그동안 쌓였던 한숨과 절망과 억울함과 인간의 무력함이 맞물려서 봇물 터지 듯이 계속 흐르는 눈물을 주체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일평생 이렇게 오랫동안 울어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두손들어 완전히 항복하는 시간 이었습니다. 부서지는 순간 이었습니다.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는 순간 이었습니다.
수돗물을 틀어 놓은 것 처럼 계속 주체 할 수 없을 정도로 흘러 내렸습니다.
이제 모든 힘을 잃었습니다.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주님 도와 주시옵소서.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내 마음대로 내 의지대로 살았던 것을 고백하며 회개합니다. 용서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책임져 주시옵소서~!!! " 너무도 오랜만에 드리는 기도였습니다.
지친 마음위에 은혜의 단비를 내려주셨습니다. 버림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비관과 자학을 하며 지냈었는데, 사랑의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첫사랑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날 저녁, 은성교회의 금요 철야기도회에 참석을 해서 교회 등록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에서 깜짝 놀랄 분을 만나게 됩니다. 비트라인 PC방 사장님 이신 박정관 집사님 이십니다.
박집사님 가게인 PC방을 들러서, 매일 밤마다 PC방 손님들에게 2년여 동안,김밥을 팔게 되었었는데, 그때마다 박집사님은 전혀 모르는 저를 항상 반갑게 맞아주셨고 좀 쉬었다 가라는 말을 하루도 잊질 않으셨습니다.
항상, 저를 볼때마다 저의 과거와 미래를 다 아시는 것 처럼, 이런 일(떠돌이 김밥장사)을 하실 분이 아니라면서 들릴때마다, 꼭 음료수(여름엔 시원한 것, 겨울엔 따끈한 것 으로)를 대접하셨습니다. 이어서, 내가 만난 하나님을 간증 하셨고, 목사님 자랑을 하셨습니다. 또, 지난주 설교 말씀에 은혜 받은 대목을 입이 달토록 리얼하게 재연 하시는 것 이었습니다.
그것도 하루 이틀도 아니고 2년 여 가까이를, 매일 30분에서 1시간 가량 꾸준하게.. 항상 상쾌한 표정과 말투로 저에게 신선한 자극을 매일 주었습니다. 어떤때는 Pc방 사업 보다도 저를 예수 믿게 하려고 늦은 시간(보통 새벽2~3시)까지 일부러 기다리고 있는 것 처럼 보였습니다.
당시, 저를 전혀 예수 믿지 않는 사람으로 대하시는 것 같아서 속으로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몰랐습니다. 이런 계기로 인하여 알게된 박 집사님과는 지금까지도 서로의 안부를 묻고 중보기도해 주는 믿음의 형제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서로의 교회가 다르지만 오늘날 제가 있기까지 박정관, 김은순 집사님 부부의 눈물 어린 기도와 사랑이 한생명을 살리는데 큰 밑거름이 되었음을 고백합니다. 이 두분은 전도에 관한한 저에 귀한 스승 이십니다.
많은 시간을 내주셔서 답답한 문제를 차분하고 지혜롭게 상담해 주셨습니다. 맛있는 음식으로 몸보신을 해 주셨고 거액을 들여 , 깜짝 이벤트 (인제군 내림천 계곡에서 , 래프팅)로 지친 삶을 활기차게 해 주셨습니다. 제 아들과 저에게 새로운 용기와 도전의식을 심어 주셨습니다.
믿음으로 홀로서기 할때까지, 변함없는 사랑과 관심으로 저를 돕는 천사 역활을 하셨습니다. 자기의 몸을 태워 주위를 환하게 밝히는 촛불 처럼 박 집사님 내외는 삶이 곧 전도요 기쁨 이었습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야생마 처럼 날뛰며 혈기 방자하고 교만했던 이종을 예수님의 따뜻하고 넓은 사랑으로, 차분히 기다려 주었고, 밝은 미소와 유머로 늘 신선한 분위기를 조성 하셨습니다. 타인에게서 육신의 부모형제 이상의 사랑을 느껴 보기는 이 분들이 처음 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철저한 주일성수와 예배에 목숨을 거는 믿음생활로 삶의 우선순위가 서서히 바뀌게 되었습니다.
즉각 순종하여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정~말 간절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모두가 저에게 하시는 말씀 이었습니다. 찬송 중에 계속 회개의 눈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인간의 마지막이 하나님의 시작임을 이때 만큼 절실하게 깨달은 적이 없었습니다. 레마의 말씀이 병든 심령 깊은 곳에 꽂혔습니다.
회개하며 결단하며 순종하는 마음으로 아멘으로 말씀을 붙잡았습니다.
성령의 불로 병고침과 기름부으심의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시간이 지나도 몸의 통증과 피곤은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죄악으로 더러워진 영과 육이 예수님의 보혈로 치유되고 회복되었습니다.
그 역사적인 순간에, 곁에서 감사와 감격의 눈물을 함께 흘리셨던 분이 계셨는데 은성교회 담임 목사님과 사모님이십니다. 한달간의 기도훈련 도중에 허리의 통증이 너무 심해서 투덜거리기도 많이 했지만 죽어 있던 신앙을 회복 시키기 위해 스파르타식 훈련을 강하게 해 주신 분 들입니다.
보혈의 축복의 말씀을 받는 방법과 성령안에서 충만해 지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무릎 꿇어 응답 받는, 끝장 내는 기도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목사님 내외분께 이자리를 빌어 머리 숙여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없는 양식을 채워 주셨고 전도 잘하라고 비싼 고급양복을 선물해 주시며 용기를 주셨습니다. 또한 믿음의 멘토가 되어 주셨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참된 기쁨과 감사가 넘쳐나기 시작했습니다. 영혼의 평안과 몸의 활력이 샘솟았습니다.
소주 7병 이상을 마시던 알콜중독자요, 담배 3갑 이상을 피워댔던 골초가 세상의 유혹과 헛된 욕심을 다버리고 주님만으로 만족하며 살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죄악의 길로 유혹했던 친구들의 전화번호 목록 까지도 과감히 삭제하였습니다.
믿음의 말, 사랑의 말, 용서의 말, 축복의 말, 감사의 말만 하려고 노력 하였습니다. 하루 하루 성령안에서 변화되어 가는 모습에 주변사람과 제자신도 놀라게 되었습니다.
말씀으로 저의 사명이 무엇인지 확실한 응답을 받게 되었습니다.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심에 순종의 믿음과 결단의 용기를 주셨습니다.
"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가라사대 내양을 치라 하시고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양을 먹이라." (요21:16~17)
"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노니 너는 내 것이라." (사43:1)
이때 예배를 드리며 기도하던 중에 성령님께서 잊혀져 가던 중요한 기억 한가지를 기억나게 해주셨습니다.
고3 마지막 겨울방학때 경기도 광주, 충현기도원에서 일평생 나의 갈길과 앞날의 비전을 놓고 15일간 금식기도를 드렸던 적이 있었는데 이때, 남은 인생을 주님을 위해 헌신 하겠다고 서원기도 드렸던 오래 전의 기도를 기억나게해 주신 것입니다. 나에게 해로울찌라도 서원기도를 바로 이행하지 않으면 죽을 고생을 하게 된다는 것을 훗날 몸소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자욱한 안개로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절벽 앞에서 한 발 한 발을 어디로 옮겨야 할지 막막한 상황 가운데, 불확실한 소명에 대한 의심과 불안의 정체가 사라졌습니다. 감사와 확신과 평안이 넘쳐났습니다.
*방황하던 2, 30대 시절, '사명자의 길을 가야 한다'는 주변분들의 말을 간혹 들었는데 그때마다 남의 사정도 모르고 경솔한 발언을 함부로 하는 것 같아서 그때마다 왠지 분노가 치밀곤 하였습니다. 주변 환경과 여건을 탓하며 주저 주저하며 결단을 못내리고 그저 환경에 끌려만 다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생사화복의 주관자 되시는 주님만 바라보며 담대히 나아갑니다. 뒤늦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알콜 중독자가 변하여 전도왕이 되었고 주의 종으로 세워져 가고 있습니다.
영성 깊은 신학교에서 훌륭하신 총장님과 교수님들을 만나게 해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제자들 모두 참된 주의 종으로 키우시려고 열정과 헌신으로 남다른 최선을 다하시는 총장님 이하 모든 교수님들께 머리 숙여 충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교수님들과 학우들 간에 너무도 정이 많이 들었고 많은 사랑과 은혜를 입었습니다. 특히 학부와 신대원 주간A반에서 앞, 뒤 , 옆에서 함께 공부했던 전도사님 강도사님들, 말없이 도시락과 점심값을, 때론 책값과 용돈을 주시며 격려해 주셨던 고마운 분들이 계셨습니다. 받은 사랑과 은혜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새벽마다 중보기도로 사랑의 빚을 대신 갚고 있습니다.
신학공부를 하는 기간동안 물질을 내려 놓는 훈련이 있었고 모난 부분들이 다듬어져 갔고 먼저 인간이 되어져 갔습니다. 한국을 빛내고 세계를 움직이는 능력의 주의종들이 이곳을 통하여 많이 배출되기를 기도합니다.
계속해서 교회의 부흥과 선교 한국을 위해 열심히 전도에 앞장 섰습니다.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적극적인 사람 , 긍적적인 사람, 소극적인 사람, 부정적인 사람, 비판적인 사람, 의욕이 없는 사람, 기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영혼의 치유와 회복으로 교회에 정착하는 영혼들이 늘어만 갔습니다.
치과의사, 대학교수, 사장,개인택시 기사, 식당 파출부, 회사원, 세일즈맨, 건축 일용직, 폭력전과11범의 터프가이 아저씨, 정신병자, 노숙자, 실업자, 기타 등등 다양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였고 만나게 해주었습니다. 모두 제가 출석하는 교회로 등록하여 말씀으로 잘 양육되어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 모습을 볼때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몇년째 50명에 머물렀던 교회가 전도로, 불과 1년 만에 120명으로 부흥이 되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새신자들이 교회에 정착을 해나갔고 삶이 변화 되어갔습니다. 제가 가는 교회마다 감사하게도 폭발적인 부흥의 불길이 일어 났습니다.
좋은 조건(많은 사례비와 사택, 학비전액 지원, 전도활동비)으로 청빙하는 교회들이 나타났을 때, 밀린 등록금과 장막문제로 순간 망설여 지기도 했지만, 정중히 사양을 하였습니다.
개척교회에서 자원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사역을 하는 것이 제겐 더욱 더 큰 보람과 기쁨이 있었습니다.
전혀 부흥이 될 것 같지 않았던 교회, 목회자가 의욕을 상실 했던 교회가 전도의 불이 붙기 시작하자, 활기차고 생기 넘치는 교회로 확~바뀌어 갔습니다. 제가 전도한 사람이 다른 불신자를 전도 했고, 그사람이 다른 사람을 또.. 동시 다발적으로 전도의 불이 계속 이어져 갔습니다.
그동안 크고 작은 일반 목회와 특수목회의 현장에서 다양한 임상 목회실습과 영성훈련을 하게 된 것 또한 너무도 감사합니다.
천하 보다 귀한 한 영혼이 주님 앞으로 돌아 오는데 해산의 수고와 눈물의 기도가 뿌려졌습니다. 전도의 현장에서 느낀점이, 전도는 훈련이요 습관이요 농사와 똑같았습니다.
약간의 무리가 있더라도 저들이 나중에 딴말을 못하도록 구원의 복음을 접하지 못한 사람 , 믿다가 시험에 든 사람에게 더욱 더 전도에 힘을 내고 있습니다. 믿는 우리의 의무요 주님의 지상명령 입니다.
절체절명의 위기의식을 갖고 보다 더 강력하고 뜨겁게 전도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음을 절실하게 깨닫습니다. 지나는 길에 어깨를 스쳐가는 한사람 한사람 모두가 전도의 대상자이고 앞집 뒷집 윗층 아랫층이 바로 전도 태신자 였습니다. 웃는 얼굴로 자신있게, 그리고 보다 더 당당하게, 하지만 접근은 뱀 처럼 지혜롭게 할 필요를 있음을 느낍니다.
바라기는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당하고 짓눌린 자들의 친구가 되어
처음과 지금이 늘 한결 같은 종, 주님의 은혜에 늘 감사하여 그 은혜에 보답하는 종, 다윗과 같이 인생의 마지막이 아름답게 빛나는 신실한 종이 되기를 원합니다.
끝으로 결혼 20년 동안 힘든 와중에도 곁에서 변함 없이 눈물의 기도와 헌신으로, 힘과 용기를 준 사랑하는 아내에게 고맙고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긴글 읽으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권필기 올림.
말씀.간증.전도집회 문의 HP: 010-8294-80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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