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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보스톡”신문
선조의 땅으로의 귀환 (속편)
볼코브 뾰뜨르, “베” 특별호
첫째 편은 2월 5일자 “베”를 통해 기사화 함.
연해주는 국제적인 지역이다. 이곳에서 화목한 가족으로 살아가고 있고, 일하며, 여러 민족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공부하고 있다. 그 들 중에 물론 고려인도 포함된다. 지난해 그들은 본인들의 비극적 역사였던 ‘극동에서 중앙아시아로의 강제 이주 70 주년’을 기리는 행사를 했다.
알려진 바와 같이, 고려인들이 최초로 우리 지방에 온 것은 19세기의 60년대이다. 가난과 자신의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수 천 여명의 고려인들이 짧은 기간에 러시아영토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농사를 지며 살기 시작했다. 지방당국은 이주자들에게 관대했다. 이주 초기에 지방당국은 물질적인 원조와 세제혜택을 주었다. 1869-1871년 사이에 수이푼강 근처 고려인 개척자들에게 군저장품 중 35천 푸드<구 러시아 중량단위>의 식료품을 공급했다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러시아중앙지역에서 연해주로 온 다른 러시아 이주민에게 그랬던 것과 같이, 고려인들에게 20년 동안 인두세와 3년 동안 토지세를 면제하는 등의 세제혜택을 주었다. 이러한 복지혜택에 관한 이야기가 급속히 퍼지게 되고, 이소문은 새로운 대량의 피난민을 이주케 하는 원인이 되었다. 1910년 무렵 연해주에 50,000이상 사람이 살던 100여 개 이상의 고려인마을이 존재했다.
소련 집권 초기에 고려인들은 그들의 전통, 문화, 언어를 발전시키고, 모국어로 교육 받을 수 있었으며, 고려인들의 거주지가 밀집되어 있는 곳에선 자신의 행정기관을 설립할 수 있었다. 예를 들자면, 1924년에 이미 연해주 고려인 인구의 90%를 차지하고 있던 뽀씨예뜨 군의 43개의 농촌행정기관을 포함하여, 당시에 57개의 농촌 행정기관이 활동을 하고 있었다. 1926년 그들은 러시아공화국의 인민의원회의 <르꼬브> 회장에게 블라지보스톡 관구 내에 뽀씨예뜨 고려인민족군을 설립할 것을 제안을 했고, 이러한 제안은 받아들여 졌다. 1927년 8월 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의 간부회는 극동집행위원회에서 행하는 사무처리에 관한 서류를 모국어로 번역할 기회를 주었고, 고려인민족행정단위(농촌쏘비예뜨,지방집행위원회)를 분리 시킬 것을 제안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뽀씨예뜨고려인민족군이 구성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들은 고려인들에게 농사대출에 관한 특혜를 주었다.
다른 일 또한 성공적이었다. 1927년엔 블라디보스크관구 내에 129개의 고려인 학교가 활동했으며, 고려인국립교육대학이 설립되었다. 블라디보스톡에 있는 고려인극장에선 연극을 공연했고, 다양한 신문과 잡지를 한국어로 발행했으며, 도서관에선 모국어로 씌어진 책을 빌릴 수 있었다.
당시 고려인들은 스스로를 자신의 권리를 충분히 행사하는 시민으로 여겼고, 이러한 정부의 배려에 성실한 노동으로 답하였다. 연해주에 있던 많은 고려인 집단농장, 어업조합들은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들은 공업과 건설에서 있어서도 헌신적이었다. 모든 것이 순조로이 진행되어갔다. 그러나 1937년 모든 것이 급속히 바뀌기 시작했다. 자신의 새로운 조국의 발전을 위하여 성실히 일하던 고려인들은 그들에게 관대했던 소련 정부로부터 처벌을 받게 된다.
“간첩활동을 근절하기 위한 목적으로…”
“소련중앙아시아고려인”이라는 책을 쓴 헬신키대학의 고선무교수의 연구자료에 따르면, 1937년 가을 수 천명의 고려인가족들은 집단수송열차에 실린 채, 멀디 먼 서방으로 보내졌다. 기본적인 위생상태도 갖추어져 있지 않은 화물칸에서 생활 하며 한 달 동안 가야 했다. 가는 도중 많은 사람들, 특히 노인들과 아이들이 기근과 추위로 죽어갔다. 당시 사회주의 승리의 상징이었던 시베리아열차와 뚜르께스탄-시베리아 열차 역, 대피역들이 고려인들의 무덤으로 바뀌었다.
후에 밝혀진 바와 같이, 고려인과 수 천명의 다른 민족들의 강제 이주는 <수송에 관한 정부의 책임 과제>라는 공식적인 표현이 있었다.
새로운 땅에서
이주초기 몇 달 동안 연해주이주자들의 중앙아시아에의 삶은 결코 쉽지 않았다. 70,000명이상의 고려인들은 카라깔빠쯔스카야 공화국인 우즈베키스탄, 따쉬켄트, 사마르칸드등의 지역에 거처를 정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해야 해야만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굴속이나 갈대와 점토로 급히 만든 임시 거주처에서 살았다. 이질과 말라리아 만연했고, 아이들의 고통은 더 심했다. 많은 가족들이 이주 첫 겨울에 셀 수 없이 많은 아이들을 잃었다.
그러나 이 초 비극적인 극단의 상황에서 고려인들의 최고의 강점이라 할 수 있는 지구력, 인내력, 근면함, 지칠 줄 모르는 삶에 대한 애착이 발휘되었다. 이러한 모든 불행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삶의 희망을 놓지 않았고, 낙담하지 않았으며, 황무지를 삶의 공간으로 만들었다.
물론 당국과 그 지역 주민들의 도움은 당시 고려인 이주자들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 지방 주민들은 함께 마지막 빵을 나누고, 친절히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들을 도와주도록 노력했다. 이주한 지 2년째 되는 해에는 농축산과 다른 분야에서 큰 성공을 이렀다.
현재 독립국가 연합에 속한 나라 중 고려인이 가장 많은 나라는 우즈베키스탄이고, 그 수는 중국,미국,일본을 이어 세계 4위를 점하고 있다. 공화국의 고려인문화센터협회의 자료에 따르면 우즈베키스탄에 거주하고 있는 고려인의 수는 170,000명에 달한다. 따쉬켄트에서만 살고 있는 고려인도 70,000이상이나 된다. 그 중 85% 이상이 강제 이주 이후에 태어났고 우즈베키스탄을 자신의 모국으로 생각하고 있다.
독립국가연합 내에 거주하고 있는 고려인 가족들이 공화국에서의 낮은 생활 수준, 자녀들의 미래와 교육에 대한 불확신, 취업의 어려움과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고, 이러한 문제들은 (특히 러시아로) 이주의 원인이 되고 있다. 수많은 고려인들이 볼고그라드스카야, 오를로브스카야, 크라스노야르스키 주, 북카프카즈, 모스크바, 산끄뜨뻬쩨르부르그에 이주했다.
극동에서 중앙아시아로의 강제이주을 공식적으로 성명한 고르바쵸브의 뻬레스뜨로이카 <재건>시대에 고려인들이 우즈베키스탄을 떠나기 시작했고, 어떤 이들은 소련공화국의 마지막 시기에 발생했던 베르간지역에서의 폭동들 때문에 이주를 선택했다.
귀향
연해주의 젊은 고려인 세대들 :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는 얀 부부. 베체슬라프 – 블라디보스톡 무역항의 운전사.
따찌아나 – 가정주부.
많은 고려인기족들이 강제이주 전 그들의 아버지와 선조가 살았던 연해주로 이주했다. 연해주연방이민국은 이미 16,000명 이상의 고려인이 중앙아시아로부터 이곳으로 이주해 왔다고 보고했다. 그들의 대부분은 70년 전에 강제이주 된 이들의 자녀와 손자들이다.
이주 초기에 아버지의 땅인 연해주로 돌아온 이주자 중 노동원로인 이 니콜라이,이 안피사부부와 그의 3명의 아들이 있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그들은 양파농사를 짓는 부농이였다. 연해주에서도 마찬가지로 여러 해 동안 농사를 짓다가 요즘은 다른 사람들이 많이 하고 있는 사업을 하고 있다.
90년대에 아르쬼시에 김 예브게니와 예까쪠리나부부가 이사해 왔고, 후에 그의 아들 유리와 그의 아내, 딸 라리사와 나따샤가 이사해 왔다. 김 예브게니와 예까쩨리나부부는 만성병으로 인해 모국에서 오래 살지 못 했지만, 그들의 자식들은 부모님의 염원을 잊지 않고 성실히 일하고 고려인의 전통을 지켜가며 살아가고 있다. 아들 유리는 전기파트건축소장이다. 그는 모든 일에 있어서 만능이다. 연해주로의 이주를 후회하지 않는다. 그의 아이들도 자신에 원하던 직업을 찾았다. 딸 스베틀라나는 그 지역에서 가장 좋은 미용실의 총 책임자로 일하고 있고, 아들 알렉산드르도 보석공으로 일하고 있다. 개인 사업을 하는 유리의 여동생인 김 라리사도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
우즈베키스탄의 과거세대의 고려인들 중에 강제이주의 고통뿐만 아니라 수용소생활을 경험한 사람도 적지 않다. 그 사람들 중
그는 어린 나이에 부모님이 잃고, 블라디보스톡에서 어부로 일하며 생활하였다. 1935년에 예비학교를 우등생으로 졸업한 후, 고려인국립교육대학으로 입학한다.
1937년 그 대학은 모든 학생들과 함께 카자흐스탄 크즐로르다시로 “이전” 된다. 학교의 이전과 학생들의 이동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 이루어졌다. 1938년엔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일본을 위한 간첩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우수한 학생들이 체포되고, 그들은 수용소로 보내진다. 벌목작업장에서의 8년의 생활로 인해 그들의 건강은 악화되었고, 그로 인해 생의 마지막 날까지 두통으로 고생을 해야만 했다. 1990년이 되어서야
새해 직전에 안디잔시에 살던 릴리야라는 여동생도 연해주로 이주해 왔다. 그녀는 전에 살던 곳에서의 명성과 높은 보수도 마다하고 자신의 조국에 가까이 위치해 있는 연해주에서의 삶을 원했다고 한다.
릴리야 운체로브나는 연해주의 삶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고 말한다. 특히 연해주 물가는 상당히 높다. 예를 들면 따쉬켄트 시내에 방 세 개 딸린 아파트를 판 돈으로는 연해주 내에 있는 방 한 개짜리 아파트도 못 사는 실정이다. 채소를 포함한 식료품가격 또한 상당히 비싼 편이긴 하지만 생선의 선택의 폭은 넓다. 그러나 그녀는 이 곳의 따뜻한 아파트, 아름다운 자연과 친절하고 호의적이고 근면한 사람들… 이 모든 것을 마음에 들어 한다. 그녀는 말한다. 연해주에는 밝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 부모님들의 땅이 우리의 사랑스런 조국이 되길 희망한다. 머지않아 카자흐스탄 침켄트시에 사는 류드밀라언니도 가족과 함께 이곳에 정착하기 위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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