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롱 면허증
송 희 제
내게는 밖에 나와 온갖 세상 구경을 하지 못하고 잠만 자는 장롱 면허가 있다. 어렵게 따놓은 운전 면허증 활용을 못하고 무용지물로 두어 때론 좀 미안하고 안타까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자녀들이 초등 고학년에 들어설 ㅁ누렵에 면허증을 땄다. 당시에는 아파트 담 너머에 학교가 있어 애들 등하교에는 도보면 충분했다. 중학교에 입학하며 때론 차가 필요했으나 남편 직장 출근길이 자녀 학교를 거쳐 가면 되었다. 엄마가 굳이 바쁜 아침 챙기며 부산을 떨지 않아도 되는 행운 주부였다.
어느 날 오후 나는 한적한 시간을 내어 우선 남편의 도움으로 운전 연수를 시도해봤다. 거기가 지금의 계룡시가 도로만 내어있고 신호등과 도로 표시가 미설치된 때였다. 옆에서 남편이 앉아 운전에 대한 동작과 설명을 해줬다. 면허를 딴 바로 후도 아니고 몇 년 만에 핸들을 잡으니 그대로 왕초보였다. 아무도 없는 빈 도로. 그 도로를 조금 달리다가 나는 그만 사고를 냈다. 도로가 아닌 인도 쪽으로 핸들을 돌려 차가 인도 중간에 걸치게 되었다. 그래서 그 옆 가로수가 넘어졌다. 아뿔싸! 순간이었다. 평소에 목소리가 크지 않은 남편이 놀라 불호령을 질렀다. 날 보고 넘어진 가로수 위에 올라가 체중을 실어 발을 그루라고 했다. 아무리 힘을 주어 발 구르기를 해도 운전하는 차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인적도 없이 우리 둘이 사고를 수습하려고 전전긍긍할 때다. 우리보다 연상인 어느 부부가 지나다가 가까이 다가왔다. 같이 도와주겠다고 남자분이 나섰다. 남편은 평소에 남의 신세를 질 안 지려는 성격이라 괜찮다고 사양을 했다. 그러자 그분들은 그냥 갔다. 아니 간 줄로만 알았다.
남편은 주위서 뭘 주워다 쓰러진 나무 위에 놓고 그거와 같이 또 발구르기만 하랬다. 날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 당시는 허허벌판 인적이 없는 외지 도로서 우리만 남아 무서운 생각도 들기 시작했다.
그때 그 중년 부부가 어디에 있었는지 다시 나타났다. 우리가 사양하니 마음이 안 놓여 멀리서 지켜보았다고 했다. 어디선가 지렛대 같은 것을 주워왔다. 그거로 남자 둘이 시도하여 자동차가 도로로 내려오게 되었다. 늦도록 멀리서 지켜보다 귀가를 늦추며 도움을 준 그분들께 우린 고마워 어쩔 줄 몰라 했다. 그 근처 산소에 다녀가는 중이라 했다. 고맙단 인사를 하며 차후 인사를 드리겠다니 사양하다 서로 명함을 교환했다. 알고 보니 그분은 중소기업 사장이셨다. 그 후 인연으로 서로 지인이 되어 지금까지 아직도 좋은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그 후 남편은 나에게 운전 금지령이 내렸다. 길눈도 어둡고 겁도 많고 순발력도 둔하여 운전하면 큰일 나겠다고 하였다. 운전 연수 중 더러 작은 사고를 겪기도 하지만, 난 너무 문제점이 많다고 했다. 전혀 운전할 기질이 아니라 핸들을 맡기면 본인이 걱정되고 불안해서 하지 말라고 했다. 내가 움직일 때 기동력이 급하면 본인이 최대한 동원해 주겠다고 했다. 그 후부터 난 우리 차 조수석에만 앉게 되었다. 성당에 가거나 모임 등에 갈 때 미리 알려주면 직장에서 일 시작을 10시 이후로 조정을 하였다. 그때부터 남편은 거의 내 운전, 기사로 자처해왔다.
남편 직장도 퇴직한지 여러 해가 된 지금에선 아예 나의 전용 운전기사다. 노인성 난청에다 건강까지 큰 병의 투병을 안은 터라 운전이나 큰 마트 장보기조차 남편 몫으로 넘어갔다. 일부러 엄마이자 주부의 역할을 회피는 아니다. 노년 들어 이런 상황이다 보니 장롱 면허로 잠자는 운전면허는 예견된 일이었나 싶기도 하다.
젊은 시절 운전 연수 중에 낸 나의 첫 사고 때 긴 시간 도와준 그 부부를 지금도 생각하면 참 고마운 분이다. 나의 남편도 아무리 부부라도 나의 두 발 바퀴와 난청 통역까지 불평 없이 늘 그림자처럼 곁에 함께 해줌에 감사와 미안함이 깊어만 간다. 나의 가슴을 벅차오르게 하는 감사가 어디 그뿐이랴! 내 주변에는 나를 이만큼 지탱케 하는 고마운 분들이 참으로 많다. 나 또한 그 갚음을 꼭 그 상대에게 하지 못할 때도 있다. 살면서 더 급박하고 딱한 주위 이웃들에게도 고개를 돌려 돕고 베풀어가며 사는 방법도 갚음의 길이 아닐까?
첫댓글 송희제 수필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