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씨에게
며칠 전
한국민속촌 예술감독인 정인삼 선생님을 조사 대상자로
용인에 있는 한국민속촌 농악단 연습실에서 열린
이동안 선생류 ‘진쇠춤’과 ‘신칼대신무’의
경기도 무형문화재 종목지정 및 예능보유자 심사를 다녀왔습니다.
올해로 이동안 선생이 타계하신지 꼭 15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선생이 타계할 당시만해도
이동안 선생은 무용계에서 그리 주목을 받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고(故) 이동안 선생은 우리 춤의 명인임에도 불구하고
춤으로 중요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다 되지 못하시고
비인기 종목인 발탈로 예능보유자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고(故) 이동안 선생은
1906년 12월 생으로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송곡리에서
재인집단인 화성재인청의 우두머리인 도대방을 2대째 지낸
세습광대 후예 이재학의 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세습광대의 집안으로서
그의 할아버지(이화실)는 단가와 피리의 명인이었고,
작은할아버지(이창실)는 줄타기의 명수였습니다.
이런 광대의 가문으로 맥을 이어온 그의 집안이었지만
그의 아버지는 그가 어렸을 때부터
사물(꽹과리, 북, 징, 장고)이나 젓대(대금), 피리를 배우게 하는 대신
그를 서당(書堂)에 보내 글공부를 시켰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시키는 글공부를 하기는 했으나
실상은 공부보다도
할아버지가 부는 피리나 젓대를 몰래 가지고 놀거나
어름타기(줄타기) 흉내를 내며 노는 것에
더 재미가 팔려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가 열 두 살 되던 해에
남사당패가 마을에 들어왔습니다.
이동안 선생은 글방에 간다고 해 놓고
집에서 메고 온 책보를 뒷산 소나무에 걸어놓고
부모들과 아무런 상의도 하지 않은 채
13세 때 남사당패의 김석철 광대를 따라서
가출을 강행한 것이 인연이 되어
일생을 춤과 발탈로 한 생애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는 남사당패를 따라 황해도 황주 까지 갔습니다.
그가 남사당패에 들어 간 지 일년쯤 되었을 때
어느 날 황주 장터에 그의 아버지가 나타나
아버지 이재학에 이끌려 화성에 있는 집으로 끌려왔으며
14세의 어린나이로 두 살 위인 최연화라는 처녀와 결혼을 하였으나
소리와 줄 타고 땅재주 넘는 모습만 눈앞에 어른거려
3일 만에 집을 다시 뛰쳐나와 버렸던 것입니다.
그는 무작정 서울로 올라가
1921년에는 춤선생 김인호(일명 복돌)로부터
전통무용의 장단(젓대, 해금, 꽹과리, 북)과 춤을 익혔으며,
1922년(17세) 현재 을지로 5가에 있었던
국극전용극장인 광무대에 취직을 하게 됐으며
같은 해에 경기 잡가와 발탈의 명인 박춘재를 만나
발탈의 연희를 전수받게 되었으며
1924년에는 김관보로부터
'앞으로 가기', '장단줄', '허궁잽이', '화장사위' 등
17가지에 달하는 본격적인 어름타기를 배웠으며
장단에 맞춰 줄 위에서 살판(공중회전)을 하는 법도 배웠다.
그의 스승들은 당대의 명인 명창 명무로써
이동안 선생의 춤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가 전수 받은 예능 중 가장 으뜸은 줄타기와 재담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해금 대금 가야금 태평소 잡가 등
당대 대가들로부터 예능을 두루 사사하여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다져갔습니다.
그가 김인호로 부터 전수받은 춤이
'태평무', '승무', '진쇠춤', '검무', '살풀이',
'엇중모리 신칼대신무', '한량무', '승전무',
'정진무', '학무', '화랑무', '신노심불노', '무녀도',
'극우', '장고무', '기본무', '노장춤', '신선춤' 등 수 십종에 이르릅니다.
당대 명고수인 한성준도 그의 기예를 인정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이동안 선생은 한성준이 운영하는 ‘조선음악무용연구소’에서
춤과 춤 장단을 가르쳤습니다.
특히 최승희에게 재인청류의 춤을 가르쳤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1930년대 이후 순업(巡業)이라 해서
국극단이나 신파유랑극단 등과 함께
전국은 물론 중국 만주 등의 공연을 다녔으며
줄타기・춤・발탈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로써 그는 춤장단의 잽이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한때는 수원과 인천 등의 권번을 오가며
춤과 장단을 가르치기도 했고
해방이후 무용학원을 비롯하여
국극단, 여성농악단, 국악예술단 등을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1983(78세)년 그가 보유하고 있는 예능 가운데
‘발탈’이 중요무형문화재 제79호로 지정을 받으면서
그의 활동 무대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발탈의 제자로는 박정임, 최병기, 홍경희, 조연숙 등이 있었습니다.
이동안 선생의 춤은
지금도 활동을 하고 있는 내노라하는
무용인들에게 전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이동안 선생이 ‘발탈’로 지정을 받게 되자
많은 춤꾼들은 이동안 선생의 춤을
본격적으로 무대에 올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의 춤을 이어가는 제자로는 연구소의 조교를 맡았던 이승희를 비롯하여
정경파, 박경숙, 윤미라, 안효순 등으로
이들에게 기본무를 비롯하여
'승무', '살풀이춤', '태평무', '진쇠춤', '희극무', '신노심불로',
'신선무', '하인무', '춘앵무', '화선무', '오방산무' 등
35종류의 춤들을 그들에게 전수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내노라하는 무용가들이
이동안 선생의 주옥같은 춤사위를 열망하여
제자로 자청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 후 시작된 떠돌이 생활은
90세의 노구를 의탁할 곳조차 없는 피폐한 생활을 초래했으며
1995년(90세) 그의 생을 마감하였다.
이동안 선생의 사후에도 이동안 선생의 춤은
그의 직계 제자들뿐만 아니라
많은 무용인들의 의하여 전승되고 있습니다.
이들 중 정인삼 선생은
1998년부터 본격적으로
이동안 선생의 춤 전승을 위하여
발표공연 등 활발한 전승활동을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