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흔히 노숙인이라는 말로 한정 지어 시야의 폭을 좁히기도 하는 홈리스, 임상철. 일용직 노동으로 생계를 잇고 고시원, 쪽방, 길거리, 피시방 등을 전전하던 그는 더 이상 삶을 지탱하기 힘들다고 판단한 어느 날, 홈리스의 자활을 돕는 잡지 《빅이슈》를 찾아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재능기부로 만들어진 정가가 5,000원의 잡지 한 권을 판매하면 2,500원이 판매원의 수익으로 돌아가는 구조로, 합법적인 일자리를 통해 홈리스에게 자활의 계기를 제공하는 《빅이슈》 판매원이 된 그는 잡지를 팔며 그 뒷면에 자신의 이야기를 끼워 넣기 시작했다.
『오늘, 내일, 모레 정도의 삶』은 그런 그의 이야기에서 시작된 책이다. 어린 시절부터 18년여의 홈리스 생활까지, 그가 직접 써내려간 인생과 그가 목격한 동시대인의 삶의 다양성이 담겨 있다. 보고 듣고 말할 수 있으며, 그러한 시선을 누군가와 나누고자 하고, 자신과 같은 사람들을 자꾸만 가장자리로 몰아넣는 이 사회에서 절망하지 않고 머물 수 있는 자리와 방법을 찾아 고민하는 한 사람의 생동한 삶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런 그의 이야기는 사회적 의제로서의 홈리스, 장애인이 아니라 집이 없는 한 사람, 장애를 가진 한 사람의 서사로 그 의제를 뒤집어 보여 주며 편견을 깨고, ‘사람답게 산다’는 말의 의미를 곱씹어 고민하게 하고, 나의 이야기는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되돌아보게 한다.
저자 소개
저자 임상철
보육원에서 자란 어린 시절부터 만화가나 화가, 조각가를 꿈꾸었다. 중학교 졸업 후 사회로 나가 조형물 제작 공장에 다니며 실력을 키울 무렵 외환 위기가 닥쳤다. 그때부터 약 18년을 일용직 노동자이자 홈리스로 지냈다. 몸과 마음이 지쳐갈 즈음 〈빅이슈〉란 잡지를 알게 되어 판매원 생활을 시작했고, 1년이 안 되어 임대주택에 입주했다. 〈빅이슈〉 뒷면에 끼워 넣던 글과 그림을 모아 이 책을 출간했으며, 이제 다시 어린 시절 꿈꾸었던 시각 예술가로 돌아가려고 한다.
목차
추천의 글
_ 노명우(사회학자, 아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들어가며
차가운 겨울
정말로 살고 싶습니다
들개
상실
하룻밤이라도
민달팽이
오토바이 훼손범
양주와 랍스터
과자종합선물세트
멍
노숙인 무료 급식
짧은 동거
첫 판매
조소과
화이트 크리스마스
기적 같은 하루
저는 하루살이일 뿐입니다
우울한 설
사람이 사람을
가족 1
고양이와 동거 중
아버지의 집
‘세차원 모집 복지카드 소지자 우대’
이십오만 원
장례식장의 웃음소리
강아지
배 형
첫 번째 독자
흑과 백
추석
세 친구
고급 아파트
형편없는 삶
피시방 동거
1998년
거칠지만 따듯한
오백 원의 한 끼
아버지와의 짧은 재회
팔각정 빨래방
노숙인 쉼터
가족 2
구 빅판
주거침입
오산
팬
가족 3
르네상스 공방
구치소
럭키
빅판과의 동행
가방 속 그림
작은 행복, 또는 축복
감사의 말
이 책을 후원해주신 분들
출판사 서평
‘홈리스’ ‘장애인’이란 명명으로 뭉뚱그려지던 삶이
불현듯 ‘한 사람’의 목소리로 들려온다
일용직 노동으로 생계를 잇고 고시원, 쪽방, 길거리, 피시방 등을 전전하며 살았던 사람. 이 책의 저자 임상철은 우리가 흔히 ‘노숙인’이라는 말로 한정 지어 시야의 폭을 좁히기도 하는 홈리스다. 더 이상 삶을 지탱하기 힘들다고 판단한 어느 날, 그는 홈리스의 자활을 돕는 잡지 〈빅이슈〉를 찾아 사무실 문을 두드린다. 그렇게 빅이슈 판매원이 된 그는 잡지를 팔며 그 뒷면에 자신의 이야기를 끼워 넣기 시작한다. 그의 편지들에는 ‘홈리스’나 ‘장애인’이라는 명명으로 뭉뚱그릴 수 없는, ‘한 사람’의 인생이 그대로 담겨 있다. 또한 그가 목격한 동시대인의 삶의 다양성이 담겨 있다.
“시청역과 광화문역 부근에서 수없이 마주쳤던 빅판을 기억하려 해도 빅판이 흔드는 〈빅이슈〉만 기억날 뿐 인간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그 사람을 인간이 아닌 빅판이라는 기능 범주로만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런 나에게 임상철은 ‘기능인’이 아니라 ‘인간’의 목소리로 자신의 삶을 말해준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통해 기능을 수행하는 소리가 아니라 한 인간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는 세상에 보내는 편지들로 타인에 의해 마음대로 대상화될 수 없는 자신의 삶을 표현한다.”
_ 노명우(사회학자, 아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추천의 글에서
오늘, 내일, 모레 정도의 삶에 골몰한 이가
거리에서 보낸 편지들
이른 아침부터 인력 사무소로 출근해 전화기를 붙든 사무소 소장의 입술을 바라보며 하루 잠자리를 가늠하는 일상. 그런 일상을 사는 이에게는 오늘, 내일, 모레 정도의 삶도 쉬이 예측할 수 없는 미래다.
빈곤, 아버지의 폭력, 돌에 맞아 실명한 오른쪽 눈,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 보육원에서의 성장… 중학교를 졸업하고 밀려나듯 사회로 나온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일용직 노동으로 생계를 잇고 고시원, 쪽방, 길거리, 피시방 등을 전전하는 생활 속에서 기어이 생존마저 여의치 않다고 느꼈을 때, 저자는 홈리스의 자활을 돕는 사회적기업 빅이슈의 문을 두드렸다.
잡지 〈빅이슈〉는 재능 기부로 만들어져 고시원, 쪽방, 거리 등에서 주거를 해결하는 주거취약계층에게만 판매 권한을 주어 비즈니스 모델을 통해 빈곤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다. 정가가 5,000원인 잡지 한 권을 판매하면 2,500원이 판매원의 수익으로 돌아가는 구조로, 합법적인 일자리를 통해 홈리스에게 자활의 계기를 제공한다.
〈빅이슈〉 판매원이 된 저자는 잡지를 판매하다가 이내 잡지만 파는 건 무언가 부족하다는 고민에 이른다. 〈빅이슈〉는 표지 모델만큼이나 이 잡지를 판매하는 ‘빅판’이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저자는 그 고민을 자신의 목소리로 해결하기로 마음먹고는 어린 시절부터 18년여의 홈리스 생활까지, 자신의 삶에 담긴 이야기를 적고 그려 잡지 뒷면에 끼워 넣었다. 이 책은 그 잡지 뒷면에서 출발했다.
‘홈리스’ ‘장애인’이란 명명으로 뭉뚱그려지던 삶이
불현듯 ‘한 사람’의 목소리로 들려온다
‘장애인’과 ‘홈리스’는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 약자’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모습이지만, 우리는 이들의 삶을 동정하거나 연민하며 쉽게 타자화하는 방식으로, 또는 굳이 그런 어둡고 우울한 삶까지 알고 싶지 않다는 뻔뻔한 당당함으로 환대하기를 거부하거나 포기하기도 한다. 그렇게 이름과 자리를 잃은 사람들은 한 개인이 아니라 ‘장애인’과 ‘홈리스’라는 집단으로 명명되어 뭉뚱그려진다. 이들의 삶은 ‘한 사람’의 삶이 아니라 ‘장애인’ 또는 ‘홈리스’의 삶으로, 추상적이고 거리가 먼 흐릿한 이미지로 납작해진다.
이 책은 그 흐릿한 실루엣이 뼈와 살과 목소리를 가지고 무대 한가운데에 서서 말하고 소통한 기록 그 자체다. ‘홈리스’나 ‘장애인’이라 불리는 사람의 이러한 행위는 (당연하게도) 그가 보고 듣고 말할 수 있으며, 그러한 시선을 누군가와 나누고자 하고, 자신과 같은 사람들을 자꾸만 가장자리로 몰아넣는 이 사회에서 절망하지 않고 머물 수 있는 자리와 방법을 찾아 고민하는 ‘한 사람’의 생동한 삶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러므로 이 편지들은 임상철과 비슷한 조건을 가진 수많은 이들의 삶에 라벨을 붙여 단 하나의 이름으로 명명하곤, 개인이 아닌 라벨이 붙은 집단의 삶으로 아주 쉽게 구분 지었던 우리의 안이한 태도를 되돌아보게 한다. 임상철의 이야기는 사회적 의제로서의 ‘홈리스’ ‘장애인’이 아니라 집이 없는 ‘한 사람’, 장애를 가진 ‘한 사람’의 서사로 그 의제를 뒤집어 보여 주며 편견을 깨고, ‘사람답게 산다’는 말의 의미를 곱씹어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안녕하세요. 홍대입구역 3번 출구 빅이슈 판매원입니다.
잘 지내셨는지요?”
책에서는 반복을 피하기 위해 덜어냈으나, 그가 A4 용지 3~4장 분량으로 적어 〈빅이슈〉에 끼워 넣었던 편지는 늘 독자의 안부를 묻는 말로 시작한다. 임상철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마치 목소리를 가다듬듯 편지를 읽는 이의 안부를 먼저 물은 뒤, 오늘은 자신의 삶에서 어떤 장면이 무슨 이유로 떠올랐는지를 간단히 설명하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야기가 시작되면 우리는 순식간에 저자의 삶 속으로 들어간다. 저자는 마치 타임머신을 운전하듯 자신의 삶에서 특정 사건이 일어난 과거의 순간들로 옮겨 다닌다. 그가 운전하는 타임머신에 착석한, 저자의 삶에 무지할 수밖에 없는 우리는 그가 데려가는 곳들에서 수없이 생경한 장면들을 마주한다. 처음으로 무료 급식소를 찾았다가 모여든 인파에 놀라는 순간, 1998년의 서울역에서 술판에 끼어들었다가 싸움판까지 마주하고는 그것이 자신의 미래인 것만 같아 좌절하는 순간, 등짐으로 벽돌을 나르다 비계에서 추락하며 ‘이대로는 죽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기도하는 순간, 회사에서 만나 생애 처음으로 마음을 나눈 이가 뇌전증이라는 이유로 해고를 당한 뒤 마주앉은 호프집에서 속내를 터놓는 순간, 오랜만의 술자리에서 다투는 친구들에게 ‘우린 다들 형편없다’며 식당 안이 다 울리도록 큰소리를 내버린 순간 등을 목도하게 되는 것이다.
“잘 지내셨는지요?” 하고 묻는 그의 안부는 ‘나의 삶이 이토록 안녕하지 못했다’는 자기 연민의 촉발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의 편지에서는 자신을 연민하거나 동정의 대상으로 만들려는 어떤 의도도 읽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런 이야기들을 만들어왔다’는 담담한 고백이 담긴 편지가 묻는 안부는 ‘그동안 당신의 이야기는 어떻게 만들어졌느냐’는 질문에 가까울 것이다. 저자의 편지가 자꾸만 ‘나’를 돌아보게 하는 이유다.
‘생존’과 ‘생’ 사이에서 사는 우리는 같은 사람이다
인력 사무소에서 매일 다른 일을 받고, 하루 또는 한 달 노임으로 그날, 그달의 잠자리를 해결하며 18년여를 살아온 이의 일상은 언뜻 생각하기에 생존에 대한 고민만이 이어지리라 짐작하기 쉽다. 그러나 저자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이 또한 우리의 편견이란 사실을 금세 깨달을 수 있다. 임상철은 누구나 그렇듯 ‘생존(살아남음)’과 ‘생(사는 일)’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하며 살아왔다.
저자가 ‘생존’을 위해 찾은 곳이 빅이슈라면, ‘생’을 위해 찾은 것은 미술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품어왔던 화가, 조각가라는 작은 불씨는 거리를 떠도는 삶으로 인해 스러질 뻔했으나 〈빅이슈〉를 팔며 임대주택에 입주하게 되면서 다시 살아났다.
이는 거리에서 맺은 인연들 덕분이기도 했다. 저자가 세상에 보내는 신호를 포착하고 기꺼이 응답한 사람들. 그들은 저마다의 우연으로 잡지를 구매했다가 팬이자 단골을 자처하거나, 팔순을 기념하는 개인적인 회고록의 표지 그림을 저자에게 부탁하거나, 일일 판매도우미로 나서 저자의 판매지에 활기를 부여하기도 하고, 28번째 생일을 맞아 친구들에게 선물하고 싶다며 한 번에 28권의 잡지를 구매해 가기도 했다.
바쁘게 돌아가는 도시에서 자신의 일상을 살아가면서도 불현듯 들려오는 한 사람의 목소리를 흘려듣지 않은 사람들. 그들이 거리에서 발견했던 것은 자신이 ‘도와야’ 할 누군가가 아니라 ‘들어야’ 할 한 사람의 목소리였을 것이다. 저자는 말한다. “사람들은 길거나 짧은 인생의 여정에서 누구나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면서 살아갑니다. 저도 저만의 이야기를 갖고 있고 지금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는 불운으로 얼룩진 자신의 이야기를 동정이나 연민이 아닌 환대의 권리를 주장하는 데 썼다. 우리가 타인의 삶을 앞에 두고 해야 할 일은 비평이 아니라 경청이다.
책 속으로
사람들은 길거나 짧은 인생의 여정에서 누구나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면서 살아갑니다. 저도 저만의 이야기를 갖고 있고 지금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순간의 사고로 한쪽 눈을 실명한 어린 시절, 원가를 부르며 지냈던 보육원, 조각가이자 조형물 제작자로 살고 싶었던 짧은 젊은 날과 외환 위기 이후 인력 사무소를 전전하며 근근이 버텨온 십팔 년여의 홈리스 생활, 현재의 빅이슈 판매원 생활, 그리고 앞으로 살고자 애를 쓰고 있는 미술가로서의 삶까지도….
추구하는 삶과 좌절하는 삶 사이에서 과거의 불행을 밑거름으로 삼지 못하고 망각해버리는 인생이 될까 두려워질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내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마음으로 삶을 살아나갈 생각입니다.
_ 들어가며, 10쪽
벽돌을 등에 지고 이곳저곳 던져놓으며 간이 계단을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덧 오전 열한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숨소리는 등에 진 벽돌들의 무게만큼이나 거칠어지고 다리는 근육들이 제각각의 형태로 벌써부터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또다시 벽돌을 지고 외벽 간이 계단 삼 층 정도 높이에 다다를 무렵, 순간 계단이 꺼지면서 온몸이 기우뚱했다. “어~ 어~” 하는 소리와 함께 슬로비디오처럼 벽돌들과 내 몸이 허공을 휘저었다.
건물 외벽을 지탱하던 아시바(비계)가 뒤틀리면서 지고 있던 벽돌들과 함께 중심을 잃고 추락을 하였던 것이다. 추락하는 것은 불길하다.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행복한 시간과 불행한 시간의 길이를 서로 다르게 만들어버리는 것은 뇌가 갖고 있는 특이하고 신비한 능력이다. 떨어지는 삼 초 정도의 시간이 하루처럼 느껴지며 살아온 생이 다큐멘터리 필름처럼 지나갔고 그 끝에서 나는 갈구하며 절로 기도하였다. 이대로는 죽고 싶지 않습니다. 정말로 살고 싶습니다, 라고.
_ 정말로 살고 싶습니다, 22~23쪽
우리가 할 일은 조를 짜서 호텔 하수구를 청소하고 음식물 찌꺼기를 아침까지 깨끗이 비워내는 일이었는데, 시간도 빠듯하고 많은 양의 음식물 찌꺼기와 하수구에서 올라오는 냄새가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신입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 어느 날 갑자기 그만둬버리면 다른 동료가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하루는 한참 음식물 찌꺼기와 싸우고 있을 때 동료 중 한 명이 뚜껑만 딴 듯 먹다 남은 양주를 갖고 와선 크게 웃으면서 하나 건졌다며 자랑했다. 그것은 우리가 위 속으로 처리해야 할 것이었다. 동료는 “우리도 양주에 제대로 안주 한번 해 먹어보자고” 하면서 수족관에 노닐고 있던 랍스터 한 마리를 건져내어 순식간에 오븐에 넣어버렸다. 그 모습에 깜짝 놀라서 “직원들이 랍스터 숫자 알고 있지 않을까요?” 하니 “뭐 알겠어? 수족관서 탈출한 줄 알겠지” 하기에 나는 조금 웃고 말았다. 우리 조 세 명은 청소하다 말고 양주와 랍스터 안주를 먹으며 그 순간만은 하얏트 호텔에서 부유하고 여유로운 자들이 됐다.
_ 양주와 랍스터, 47~48쪽
‘생애 처음으로 나에게 마음을 주는 여자가 병이 있다니.’
마음이 어두워졌고 곧 다른 말이 귓가에 들려왔다.
‘너도 장애가 있어. 남들이 모른 척 내색을 안 할 뿐이라고.’
‘난 장애인이지만 정상인과 다를 바 없어. 그리고 이 회사에서 중요한 일인 원형 제작을 하는 사람이라고.’
다음 날, 사장이 나를 불렀다.
“임 대리, 자네가 ○○ 씨와 친한 것 같아 미리 이야기해주는데, ○○ 씨 일 못할 것 같네.”
그 이후 그녀는 회사에서 보이지 않았다.
며칠이 지난 월급날, 그녀가 찾아왔다. 나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고 그녀는 나를 보면서 “대리님이 남동생 주라며 그려준 로봇 그림, 동생이 좋아해요. 우리 집에 한번 같이 갈래요?” 하고 말했다.
그녀를 따라 버스를 타고 몇 정거장을 달려 빛바랜 사진 같은 낡은 기와집에 도착했다. 초등학교 4~5학년 정도의 소년이 “누나” 하며 그녀를 반겼다. 소년은 나를 보더니 “형, 그림 또 그려줘” 하면서 친근하게 다가왔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과자세트를 건네주며 어색해했다. 잠시 후 그녀와 나는 집 근처 호프집으로 들어갔다.
“대리님, 내 병이 어떤 병인지 알아요?”
“대충은 아는데.”
“난 대리님을 처음 보고 나와 같은 멍을 발견했어요. 그래서 당신이 짓궂게 해도 별로 싫지가 않더라고.”
우리는 맥주를 마시고 나서 무덤덤하게 헤어졌다. 회사를 그만둔 동료와 우연히 만나 맥주 한잔한 것처럼.
_ 멍, 55~56쪽
판매한 지 한 시간이 지난 후 “한 권 주세요” 하며 모나리자의 미소보다 더 아름다운 미소를 짓는 한 분의 독자가 바닥에만 눈길을 준 채 엉거주춤 서 있는 내게 다가와 말했다. 잡지를 건네주는 순간 무언가 울컥하며 가슴으로 올라왔다. 이 잡지를 구매하는 이유가 동정이든 필요이든 상관없이, 그냥 주체할 수 없이 복받쳐오는 감정이었다. 첫 판매 후 용기가 생겨 말문이 열린다.
“홈리스 자립 잡지 〈빅이슈〉가 왔습니다!”
인정하자. 나는 멘트대로 홈리스다. 그리고 잡지를 판매하는 판매원이며 내가 원하는 자립을 위해 일하는 중이다. 또한 “홈리스 자립 잡지 〈빅이슈〉”라는 말은 마음속으로는 화가이며 조각가이자 수필가의 길을 가려고 한다고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_ 첫 판매, 70쪽
병원에 도착해 응급실로 가니 오랜만에 보는 형은 위세척을 끝내고 침대에 누워 자고 있는 모습이었다. 경찰관에게 보호자 확인을 끝마치고 늦은 밤 형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거리에는 이름 모를 가로수의 꽃향기가 퍼져 있어 피곤한 몸에 졸음이 쏟아지게 하고 있었다. 오늘의 삶도 이제 과거로 흘러갔다.
다음 날, 야근으로 늦게 마치고 휴식처인 지하 단칸방에 들어서니 형은 벽을 보고 누워 있었다. 자는 건 아닌 듯했다. 갑자기 형에 대해, 부모에 대해, 그리고 가족에 대해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왜, 왜 그러냐고. 살아가는 것이 나보다 힘들어? 우리도 제발 남들처럼 평범해보자고. 서로가 불쌍하지도 않아?”
형은 몸을 뒤로 돌려 나를 보면서 뜻 모를 웃음을 지었다. 우리는 침묵하였다.
_ 가족 1, 99~100쪽
“너하고 ○○이는 지금 어떻게 지내니? 한번 봐야 하는데.”
“○○이는 결혼해서 직업인으로 잘 살고 있습니다. 저는 쭉 혼자 살고 있고 일반적인 직업이 아닙니다. 딱 집어 뭐라 말할 수 없기도 하고….”
나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설명하고 싶지 않아 숨기려고 하다가 진짜 내 모습을 보여 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 “형님, 인터넷에서 ‘빅이슈’라고 검색하면 저에 대해 나올 겁니다. 한번 검색해보세요. 그러고 나서 전화나 문자 주세요” 하며 전화를 마쳤다.
그러나 그 후 아무런 회신이 없었다. 며칠이 지나 친구에게 이 일을 전하니 “아이고, 너 괜히 하는 일 알려준 거 아니냐? 그 형도 여러모로 형편이 안 좋은 듯한데 동생들까지도 삶이 어려우니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냐” 하며 경솔히 말했다는 듯한 타박이 돌아왔다. 총천연색으로 변화가 많은 세상에서 홀로 흑과 백의 세계에 사는 듯 느껴진다.
_ 흑과 백, 138쪽
“임 형, 홈리스 잡지 판매 일을 본다면, 내가 보기엔 결국은 동정을 필요로 해야 팔릴 듯한데 부끄럽지 않나?”
친구는 이미 쪼그라들어버린 내 심장을 끄집어내어 보여 주는 것처럼 말하였다. 여러 갈등 속에 잡지 판매 일을 놓아버리고 싶은 많은 날을 지내왔지만, 그래도 이 일이 최선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기에 친구의 말을 “쓸데없는 말 하고 있어. 너 취하는구나” 하며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다.
그런데 옆에 있던 다른 친구가 불쑥 화를 냈다.
“야, 그게 친구에게 할 소리니. 우리가 서로의 일을 뭐라고 하며 따질 필요가 있어?”
둘은 점점 큰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주위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불편하다는 시선으로 우릴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그 순간, 슬프게도 <빅이슈> 잡지 팔며 살아가는 내가 한심스럽고 친구들이 살아가는 모습도 창피하게 느껴져 “서로 왜 다투는 거냐? 우린 다들 형편없어. 자, 세 명이 하는 일을 보자고. 나는 길에서 <빅이슈> 잡지 팔며, 한 명은 노가다 일하고, 또 한 명은 사우나서 남의 등짝이나 밀어주고 있어. 이게 우리가 늙어가면서도 최선으로 결정한 현실의 일이다. 그렇다고 돈이라도 많이들 벌어봤어” 하면서 식당 안에 다 들리도록 큰소리로 말해버렸다. 그러자 서로 얼굴을 붉히던 친구들은 놀라며 잠시 조용해졌다가 한 친구가 “그래, 맞는 말이네. 우리 일어나자” 하는 말에 자리를 정리했다. 셋은 작아진 가슴으로 우울하게 식당을 나섰다.
_ 세 친구, 145~14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