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 루카 복음 17,20-25
우주 시대를 열기 위해 세계 열강들이 많은 경쟁과 자본들을 투입합니다. 특히 우주 탐사 시대를 처음 열었던 60년대에 미국과 소련은 경쟁이 아주 치열했습니다. 그 당시 먼저 우주를 탐사한다는 것은 민주주의를 대표하는 미국과 공산주의를 대표하는 소련의 냉전 체제 하에 있는 두 강대국의 우열의 문제이자 자존심 문제이기도 했기 때문이지요. 어느 날 한 소련 우주 비행사가 달나라를 다녀와서는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하늘에 올라가 보니 하느님은 안 계시더라.”
그런데 후에 미국인 우주 비행사는 우주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벅찬 감동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주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나는 다시 한 번 창조주의 전능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똑같은 하늘을 보고도 소련 우주 비행사는 무신론자였기에 종교를 비판하느라고 그렇게 이야기했고, 미국의
우주 비행사는 유신론자였기에 어느 곳에서나 하느님의 자취를 느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차이는 여기에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어떠한 곳에서도 하느님을 느끼지 못하고 자기의 업적만을 살피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어떠한 경우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찾아낼 줄 알고 감사와 찬미를 드릴 줄 압니다. 같은 장면을 보고도 보는 관점에 따라 이렇게 대조적인 느낌이 놀라울 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도대체 하느님 나라는 언제 옵니까?”
실제로 유다인들은 어느 날 하느님께서 하늘의 군대를 보내어 로마인들을 쳐부수어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세우고, 자기 민족들은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바람을 담아서 예수님께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올 것인지를 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유다인들의 마음과는 사뭇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17,20-21)
하느님 나라는 이미 현존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어디에 있다는 말씀일까요?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 나라는 먼 하늘 위나 혹은 죽은 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실현되는 곳에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기적을 행하시면서 마귀들이 쫓겨나고 수십 년 동안 절망과 자기 인생을 비관했던 사람이 한 순간 희망과 감사를 올리는 그 곳에서 하느님 나라가 확인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느님의 말씀을 실현하는 그 곳에 하느님 나라가 있다는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지금 이 곳에는 하느님의 나라가 어떻게 임하게 되는 것일까요?
배고파 떠는 사람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을 대접하고 보람을 느끼는 곳에 하느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불쌍한 노인들을 위하여 쌀을 나누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가면서도 행복한 마음을 가지는 그 곳에
하느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지요. 나에게 큰 피해를 준 사람 때문에 마음이 상하여 쳐다보고 싶지도 않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성체를 모시며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는 속에 하느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같은 신자이면서도 누구에 대한 미움과 보복으로 가슴이 응어리져 있다면 그 곳에는 하느님 나라가 아닌 지옥이 들어섭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와 지옥은 하느님의 뜻을 받드느냐, 나의 욕망을 따르느냐를 중심으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복음을 실천하는 곳 어디에나 하느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지내는 가정 안에서, 이웃 안에서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복음을 실천하는 곳은 그 어디나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오늘도 만나는 사람들 안에서, 만나는 장소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하느님 나라의 현존을 함께 사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 서울 위례 성모승천 성당 - 편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