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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당신께서 지게를 지고 돌아오던 그 들녘입니다.
비탈길을 걸어오는 당신의 어깨에는 언제고 어둠이 얹혀 있었습니다. 어린 제 눈에는 그 어둠이 볏짐보다 더 무거워보였습니다.
당신께선 “후딱 한번 더 댕겨올 테니 먼저 들어가거라” 하시며 지게 작대기를 제 손에 쥐어주었죠. 어둠을 짚고 오는 어린 발길은 미처
몰랐습니다. 작대기도 없이 그 무거운 볏짐을 지고 오실 당신의 걸음이 얼마나 힘들지를.
그래도 아버지는 되레 제 걸음의 안부를 궁금해 하시며 혼자 외걸음으로 어둔 길을 더듬어 오셨죠.
그 해 가을도 곳간은 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벼 수매를 마치고도 경운기를 사지 못했습니다. 추수를 끝낸 밭은 알몸으로 겨울을 맞아야 했죠.
황량하기 그지 없는 저 그림 속의 들녘은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지게를 지고 오던 풍경 그대로 입니다.
아버지, 기억하시겠습니까. 저만치 산비탈에 바람처럼 기대앉은 마을이 당신의 고향임실군 오수면 군평리 평당마을입니다.
마을 앞에는 큰 냇물이 흘렀죠. 그렇지만 아무리 보를 막아도 그 냇물을 비탈밭까지 끌어올릴 수는 없었습니다. 따라서 비탈밭에는 매년
산도나 고구마, 수수를 심을 수밖에요. 종동들이나 내 건너 봉산들에
비하면 척박한 땅이었습니다.
아버지, 이제는 과수원으로 변해버린 저 풍경을 떠올릴 때마다 저는
당신의 추위를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의 겨울은 왜 그리 추웠는지 모르겠어요. 하기야 땅 갈고, 씨 뿌리고, 거름주고, 김 매고, 농약 치고, 새 쫓고, 낫질해서 거둬들여봐도 곳간은 늘 차지 않았으니 빈 자리가 차가울 수밖에요. 당신은 그 시린 자리에 계셨습니다.
영농금이 나와야 형 등록금을 낸다며 이장네 집 몇 번 찾아 다니는
동안에도 아버지의 추위는 낡은 솜바지 사이를 숭숭 들랑거렸죠.
봉천역을 지나는 완행열차의 입김이 따뜻해 보일 때쯤이면 마을앞 냇가에도 아지랑이가 피어 올랐습니다.
BR>이 곳에 봄이면 복숭아꽃이 피기 시작한 것이 15년 전쯤인가요. 마을
사람들이하나 둘 복숭아나무를 심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이 일대가 복숭아밭으로 변했죠. 아버지도 이 땅에 희망을 심으셨습니다.
우리는 갑자기 과수원집 아들이 되고, 복숭아집 딸이 되었습니다. 봉천초등학교는평당마을 말고도 오촌, 봉산, 냉천, 종동마을 어린이들이 모여서 공부하던 곳이지요. 한 학년이 한 학급씩 밖에 없었으니 전체 학생이 200여명남짓한 아주 조그만 학교였습니다.
학교는 봉산마을에 있었기 때문에 종동이나 평당마을 아이들은 내를
건너서 학교에 가야 했습니다. 긴 나무다리가 하나 있었는데 여름철이면 자주 떠내려가는 바람에 걸핏하면 10리 길을 돌아다녀야 했죠.
6년간을 반 한번 바꾸지 않고 생활해야 하는 동기생들은 자연히 형제자매처럼 정답게 지냈습니다. 우리가 우정을 깨는 날은 일년 중 딱 하루가 있었는데 그날이 정월 대보름 날입니다.
종동이나 평당마을 애들이 내를 건너 냉천이나 봉산마을로 쳐들어간
날은 마을앞 도로가 횃불로 휘청거렸습니다. 횃불싸움은 언제나 쥐불놀이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내를 따라 길게 늘어선 언덕은 끝없는
불길로 오후 내내 달아올랐죠. 당연히 쏘시개 감이 될만한 나무 등걸은 동네에 남아 나지 않았습니다. 깡통도 지금처럼 흔하지 않던 시기였으니까요.
횃불싸움이 있는 다음날 학교에서 다시만난 친구들은 얘기거리 하나
갖게 된 것에 행복해 했을 뿐 언제 싸웠느냐는 듯이 잘도 지냈습니다.
물이 불어 다리가 떠내려간 날은 아버지 등에 업혀 냇물을 건너기도
했습니다. 그때 물살에 흔들리는 아버지 장딴지를 본 적이 있습니다.
힘이 푹푹 패여 나간 자리에 쓸쓸함이 감돌았습니다. 겨우내 과수원의 언 땅을 가느라 고생한 탓이겠지요.
아버지, 이제 제가 당신을 업어서 건네드리고 싶은데 튼튼한 다리가
놓였으니 어떡합니까. 학교도 7~8년 전에 없어졌다지요. 50호가 넘던 평당마을도 이제는 20여호 밖에 남지 않았다니 얼마나 쓸쓸하겠어요.
그러나 올 겨울에도 아버지는 과수원으로 나가겠죠. 거칠어진 아버지
팔뚝처럼 어느새 나이를 먹어버린 까칠한 복숭아나무 살결을 만져보겠지요.
그리고는 복숭아 꽃에 취해서 무작정 도시로 떠나버린 자식들을 위해
추위도 잊고 경운기 통통거리며 거름을 내겠지요. 오로지 자식 잘 되기만을, 자식한테 좋은 일 있기 만을 바라면서 묵묵히 언 과수원에 시린 발자국을 찍겠지요.
아버지는 진정한 농사꾼입니다. 당신께선 무슨 일이든 농사짓듯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이제 그렇게 하겠습니다. 부지런하고, 정직하게 그리고 욕심부리지 않고 순리대로 살아가겠습니다.
아버지, 이 아들은 당신의 가장 아름다운 가을걷이를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그림/ 김학곤화백
글/ 이란우
이난우는 내 친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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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자식에게 부끄럼없는 아버지가 되기를,,,나도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 ~ 친구 글이었구나 네가 웬 임실에... 의아해 했는데 말야. 우리 모두의 얘기네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