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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병자호란 때 인조는 남한산성에 피신했다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항복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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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서점에 나온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이 베스트셀러에 오르면서 경기도 광주(廣州)의 남한산성은 또 다시 관심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험한 세상 살아가는 사람치고 사연 없는 사람 없듯이 이 땅에 사연 없는 유적도 드물다. 하지만 남한산성처럼 기구한 운명을 지닌 유적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 역사를 짚어보자.
조선시대에 한양을 지키는 4대 요새는 동쪽의 광주, 서쪽의 강화, 남쪽의 수원, 북쪽의 개성이다. 이중 동쪽의 광주에 있는 남한산성은 한남정맥에서 갈라져 나온 ‘검단지맥’의 검단산 둘레에 쌓은 성벽이다. 산성 둘레는 약 8km, 면적은 528,459.47㎡에 이른다.
남한산성 주변엔 백제 전기의 유적이 많이 있어 이곳은 예부터 백제 온조왕 때의 성으로도 알려져 왔다. ‘백제 온조왕 13년에 산성을 쌓고 남한산성이라 부른 것이 처음’이라는 기사가 고려사와 세종실록 지리지 등에 나온다. 전문가들은 673년(신라 문무왕 13) 한산주에 쌓았다는 주장성(晝長城·일명 일장성)도 지금의 남한산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와 선조와 광해군 때 몇 차례 고쳐 쌓았으나 남한산성이 지금처럼 천험의 요새로서 틀이 잡힌 것은 인조 때 들어서다.
인조 때 남한산성을 대대적으로 쌓은 까닭은 당시 국제적으로는 후금의 위협이 고조되는 상황이었고, 국내적으로는 1624년(인조 2) 2월에 이괄의 난을 겪은 인조가 한성을 빼앗기고 충남 공주의 공산성으로 피하는 수모를 겪었기 때문이다.
남한산성은 1624년부터 축성공사가 시작되어 2년만인 1626년(인조 4)에 완공되었다. 당시 옹성 3개, 성문 4개, 암문 16개를 만들었고, 성안에 우물 80개, 샘 45개를 조성했다. 또 유사시 임금이 거처할 행궁이 73칸, 하궐(下闕)이 154칸이나 되었다. 이 정도면 제법 모양새를 갖췄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축성한 지 10년만인 1636년(인조 14)엔 유사시를 대비해 수어사(守禦使) 이시백이 처음으로 12,700명을 동원하여 기동훈련을 실시하기도 했다.
기동훈련이 있던 바로 그해 봄, 청나라 사신 용골대(龍骨大)는 청의 수도인 선양(瀋陽)에서 홍타이지(皇太極)가 황제로 즉위한다는 소식을 알리기 위해 조선을 찾았다. 조선 조정에서는 논쟁이 벌어졌다. 척화파(斥和派)는 오랑캐 추장에게 황제 칭호는 가당치도 않다며 정묘년(1627년)에 맺은 맹약을 파기하고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국서를 가져온 청나라 사신 용골대의 목을 치라고 요구했다. 반면 주화파(主和派)는 청의 세력이 강해진 현실을 인정하여 그들의 요구에 적당히 타협하자고 맞섰다. 인조는 두 의견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척화를 선택한다.
곧이어 조정은 ‘청과 맺은 맹약을 파기하니 청의 침략에 대비하라’는 내용의 극비문서를 평안감사에게 보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했다. 이 극비문서를 가져가던 금군(禁軍)이 청으로 돌아가던 용골대 일행에게 극비문서를 빼앗긴 것이다. 조선의 영토 안에서 외국 사신에게 국왕의 극비문서를 빼앗기다니. 이렇듯 척화파와 주화파의 주장은 무성했으나 정작 중앙과 지방을 이어주는 정보 전달 체계는 무척 허술했던 것이다. 이런 조직적인 부실은 결국 나중에 큰 환란을 부르게 된다. 그해 12월6일, 청군은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질풍같이 한양을 향해 내달렸다. 선봉장은 사신으로 왔던 용골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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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남한산성은 광주 시민은 물론 서울을 비롯한 하남·성남 시민들에게 인기 있는 산책 코스다. [아래]남한산성 4개의 장대 중 하나인 수어장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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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전략전술은 이번에도 최악이었다. 조선군은 청군의 침입 사실을 제때에 알지 못했다. 조선은 모든 병력을 대로(大路) 외곽에 위치한 산성으로 집결시켰으나 청군은 조선군과의 접전을 피해 곧장 서울로 진격하는 속전속결 전략을 취했기 때문이다. 당시 임진강 이북의 방어를 책임진 도원수 김자점은 청군이 침입했다는 최초의 보고를 묵살하고 조정에 제때에 알리지도 않았다. 뿐만 아니라 적이 다가오자 전투를 회피하여 적의 급속한 남진을 방관하였다.
청군의 기마부대는 눈보라를 일으키며 개성을 지났다. 12월14일, 청군이 양철평(良鐵坪·지금의 은평구 녹번동)에 이르러서야 조정에선 청군이 개성을 지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했다. 원래 강화도로 건너가려 했으나 청군이 이미 김포에서 강화로 이어지는 길을 차단해 버린 뒤라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미처 아무런 준비도 못하고 들어왔던 남한산성의 상황은 처참했다. 인조의 행렬을 뒤따른 청군은 얼어붙은 한강을 건너 남한산성을 포위했고, 삼남으로 이어지는 모든 도로도 차단해버렸다. 그해 겨울 혹독한 추위 속에서 많지 않은 군량이 점점 바닥을 드러냈다. 군사들은 모진 추위와 배고픔에 점점 사기를 잃어갔다. 청군은 이따금 서양식 최신 대포인 홍이포(紅夷砲)를 쏘아대면서 시위했다. 조선 조정이 목이 빠져라 고대하던 지원군은 청군에게 막혀 접근조차 못했다. 기대하던 명군도 날씨를 핑계로 출전을 지연했다.
1월22일, 강화도가 함락되었다. 강화도 함락 역시 경계 소홀이 부른 패전이었다. 청군은 바다에 익숙하지 못하여 수전(水戰)에 약하다며 수비를 소홀히 하는 틈에 육지 문수산성에서 호시탐탐 노리던 청군이 조선에서 노획한 선박에 홍이포까지 싣고 강화도 상륙작전을 벌였던 것이다. 조선군은 저항도 제대로 못한 채 강화도를 내주고 말았다. 세자와 중신들은 모두 포로가 되었다.
결국 인조는 남한산성에 들어온 지 45일만인 1월30일, 서문을 열고나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 태종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남한산성은 막대한 비용과 노력을 들여서 쌓은 성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정작 필요할 때 제구실을 못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