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매못 성지-갈인연 2
갈매못 성지 기도의 집(구성당) 전경
우리나라에서는 김대건 신부님께서 사제 서품 후, 처음 입국하셔서 고국에서의 첫 미사를 올렸던 표착지인 제주 용수 성지를 예외로 한다면 유일하게 바다에 위치한 성지로 잘 알려진 갈매못 성지는 아름다운 풍광을 지니고 있습니다. 바다, 들, 산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곳입니다. 성지에서 내려다보이는 성지 모퉁이 한켠에는 벼가 누렇게 익어, 가을의 풍요로움을 더해 줍니다.
성지 구내 식당 옆 휴게소와 논
그러나 이곳의 매력, 아름다움의 진수는 외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마치 햇살이 바다의 물결 위에 빛나듯 수많은 순교자들의 얼이 깃들여 빛나는 슬픔이 담긴 아름다움입니다.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의 순수했던 신앙의 아름다움이 오늘도 흰 새털구름이 되어 하늘을 수놓고 있습니다.
무명 순교자의 얼이 수 놓은 새털 구름과 새성당 지붕
‘배교합니다.’라는 한 마디만 하면 살 수 있었지만 끝내 침묵 속에서 믿음을 고백하고 형장의 이슬이 되어간 수많은 무명의 순교자들을 생각하면,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을 지닌 그들은 진정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진정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았던 사람들입니다.
무명 순교자들은 대개 천민이라고 보면 맞습니다. 양반들은 재판을 받고 기록을 남기지만 천민들은 아무런 재판 절차도 없이 그냥 끌어다 죽여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던 사람들입니다. 인간이면서 인간 대접을 받아보지 못하던 그들이 천주교를 알게 되면서 배운, 만인은 하느님 앞에 평등하다는 가르침은 그야말로 구원의 말씀이었습니다.
감히 쳐다보지 못하던 양반들과 한 상에서 밥을 먹고, 양반들이 그들에게 형제자매라고 불러준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이 그들에게 준 선물이었습니다. 처음으로 인간 대접을 받은 그들은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배교하고 다시 옛날, 인간 이전의 삶으로 구차하게 사느니, 차라리 신앙을 증거하고 인간의로서 죽는 것이 더 행복했던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아들, 딸로 죽는 것이 행복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참 행복을 알았던 사람들입니다.
갈매못은 대략 500 명으로 추산되는 무명의 순교자들이 있습니다마는 이름이 알려진 순교자는 불과 10 분입니다. 그 중에 특히 1866년 병인박해 때, 다블뤼 안토니오 안 주교, 오메트르 베드로 오 신부, 위앵 루카 민 신부, 황석두 루카, 장주기 요셉 회장 등 다섯 명의 성인이 3월 30일 예수 수남 성 금요일에 참수를 당하면서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된 곳으로 유명한 성지입니다.
세 분의 외국인 선교사, 7명의 양반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가 천민이었다고 봐도 그리 많이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민초들이었지요. 그들의 넋이 들꽃이 되어 바람에 흔들립니다. 이제는 진정 자유를 만끽하는 것이지요.
기도의 집과 답믈뤼 주교성상과 황석두 루카성상
다블뤼 안토니오 안 주교님. 참으로 놀라운 분입니다. 주교님은 프랑스 '아미앙'의 귀족 출신, 아주 명망 있는 명문가에서 태어나 최고의 대학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은 분입니다. 프랑스에서도 워낙 학문에 탁월했던 분입니다. 가히 천재라고 할 수 있는 분입니다. 여러 저서들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한불사전까지 편찬할 정도로 한국말을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던 천재였습니다. 위앵 민 신부님에게는 직접 한국말을 가르쳤지요.
다블뤼 주교성상
다블뤼 주교 성상은 오른손에 뭔가 흘리는 모습이라 교우들이 궁금해 하는데, 바로 물로 세례를 베푸는 모습이고, 왼손에는 소박한 나무 십자가를 들고 있습니다. 늘 세례를 베풀고 십자가의 길을 걸었던 당신의 삶을 표현한 것이지요.
유럽 명문가에서 세상적으로 최고의 삶을 살 수 있고 세상의 온갖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이 신부가 되어, 전혀 알려지지 않은 나라, 한 번 가면 다시 살아서 돌아올 수 없는 나라, 미지의 나라, 조선이라는 곳으로 자진해서 선교를 떠난 것입니다.
세상에 이런 바보가 어디 있습니까? 바라볼수록 보고 싶은 사람, 바보, 다블뤼 안 주교님. 그는 세상 사람들의 눈에 바보이지만 이 세상 그 무엇도 줄 수 없는 보물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가진 자가 모든 것을 가진 자다.”
이것이 바로 다블뤼 안 신부님의 좌우명입니다. 그는 그가 보내는 모든 편지의 서두에 이 말을 썼다고 합니다. 마치 우리가 ‘+ 그리스도의 평화’ 라고 쓰듯이 보내는 모든 편지에 “예수님을 가진 자가 모든 것을 가진 자다.”라고 썼던 것입니다. 그가 얼마나 예수님을 지닌 것에 대한 자부심, 행복감이 충만했었는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서울로 압송되어 심문을 당할 때, 배교하라는 관리에게 너무나 유창한 한국말로 심문에 반박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천주교의 교리를 가르치려고 하자, 화가 난 관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보다 훨씬 더 심한 고문을 가했습니다. 그러나 주교님은 아주 의연하게 고통을 감내하면서 자기가 지닌 모든 것, 바로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증거한 것입니다.
다블뤼 주교님과 복사 황석두 화장의 집필 활동 모습
저는 주교님의 순교 정신뿐만 아니라 그의 학문적인 열정에 대해 감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는 예언자적인 식견도 지니고 있던 분입니다. 훗날 한국교회에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이 중요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전의 순교자들에 대한 자료 수집을 하여 비망록을 만든 것입니다. 그것이 유명한 [조선 순교자 비망기]입니다. 이 책은 병인박해 이전의 박해의 역사를 상세하게 기록한 한국교회사에서 아주 귀중한 자료입니다.
그는 풍토병이라고 할 수 있는 위장병과 신경통을 앓았지만 밤에는 공소들을 방문하여, 교우들을 만나고, 돌아다니기 위험한 낮에는 집필 등의 학문 연구에 매진한 열정을 지닌 사목자이며 학자였습니다.
탁월한 언어 감각과 언변을 지니고 있었던 다블뤼 주교님, 놀라운 열정으로 교리를 가르치고 신자들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던 그분을 만나는 모든 교우들은 탄복을 금치 못했습니다. 교우들과 어울리기 위해 기꺼이 보신탕을 함께 먹던 가장 한국적인 선교사로 알려진 다블뤼 주교님.
성지를 향해 축복의 손을 내미신 예수상
그는 단순히 예수님을 지닌 분이 아니라 또 하나의 작은 예수님이었습니다. 주교님보다 다섯 살이나 위였지만 주교님을 아버지로 모시던 황석두 루카 회장님의 주교님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주교님이 체포당하였을 때, 주교님과 함께 죽는 것이 소원이라고 불며 함께 죽게 해 달라고 울며 애원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당하실 때는 제자들이 도망쳤지만, 다블뤼 주교님이 체포당할 때는 황석두 루카 회장님은 함께 죽겠다고 매달린 것입니다.
여러분들, 상상해 보십시오. 누군가가 여러분과 함께 죽는 것이 소원이라며 울고 불며 매달리는 사람을 친구로 둘 수 있다면 여러분은 더 없이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다블뤼 주교님과 황 석두 회장님이 나눈 넓은 의미의 우정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황석두 회장님은 망나니가 주교님의 목을 반만 베고 관리와 흥정을 하려고 했을 때, 망나니에게 단칼에 베라고 호통을 칩니다. 자기가 죽는 그 상황에서도 자기보다는 주교님이 고통을 당하는 것이 더 마음 아팠던 것입니다. 그 호통에 놀란 망나니가 오메트로 오 신부님부터는 모두 단 칼에 벱니다.
다블뤼 주교님은 병인박해가 일어나서 많은 교우들이 잡혀서 죽음을 당하자, 당신도 자수할 결심을 하고, 동료 선교사들에게도 자수를 권하는 서한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서한은 궁극적으로 그렇게 될 것에 대한 예언자적 식견으로 보낸 서한이었습니다. 다블뤼 주교님은 당신이 체포당하기 불과 며칠 전에 멀지 않은 곳에서 사목하던 오매트르 오 신부님과 위앵 민 신부님을 불러오게 하여 서로 피신할 방도를 의논하고 헤어졌습니다. 하여 위앵 민 신부님은 피신하려고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는데, 풍랑이 심해서 결국 돌아오게 되었고, 체포하였습니다. 오매트르 오 신부님은 주교님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거더리에 들렀다가 체포되었습니다.
순교복자비와 순교성인비
갈매못은 순교의 현장입니다. 지금은 새 성당도 세워지고 이곳저곳 잘 가꾸어져 있지만 불과 10 년 전만 해도, 바닷가에 막대들이 서 있는 아주 소박한 곳으로 기억합니다. 사실 가장 중요한 장소는 바닷가 모래사장입니다. 바로 처형장은 바닷가 모래사장이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포장된 길이 모래사장을 가로막고 있어, 현장을 더 가까이서 체험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그래도 말없이 그날의 기억을 담고 있을 바다를 바라보며 그때의 장면들을 상상 안에서 그려봅니다. 이제 막 산에는 진달래꽃이 피기 시작하는 때, 꽃보다 붉은 선혈의 화환으로 만든 승리의 월계관을 쓴 그날을 떠올리며 제 가슴도 붉게 타오릅니다.
지금은 갈매못 성지가 새 성당을 짓게 되면서 미사 후에 제대의 뒷면에 색유리로 된 벽면이 열리면서 하늘과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는 장면이 많은 신자들에게 감명을 주고 인상적이라 더 유명해졌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기도의 집으로 쓰는 구성당도 아담하면서도 아름답습니다. 무엇보다 색유리가 마음에 듭니다. 그곳에 다섯 분의 성인들의 생전의 모습을 느낄 수 있는 그림이나 소품들이 있어, 꼭 들려야 하는 곳이고, 단지 그것들을 구경하는 곳이 아니라 기도하는 곳으로서 더 중요합니다.
기도의 집(구성당) 제대 전경
기도의 집 창문 색유리
구성당 좌우로 다블뤼 주교님과 황석두 회장님의 성상이 있습니다. 프랑스 아미앵교구 방한단이 2004년 4월 20일 열흘간 일정으로 방한하였을 때, 갈매못 성지측은 방한단 방문에 맞춰 이날 성 다블뤼 주교 성상 축복식을 거행하였다고 말씀드렸지요. 그때 방한단이 그곳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다블뤼 주교님의 유품인 중백의(수단 위에 입는 흰 웃옷)를 기증하였는데, 아래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이 구성당, 기도의 집에 있습니다.
다블뤼 주교 사제서품시 입었던 중백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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