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정시(안양 작가들의 시) 목록 | |||
번호 |
작 가 |
작 품 명 |
비 고 |
1 |
강백진 |
미안하고 미안하다 |
|
2 |
강영서 |
마음속 남한강 돌밭에서 | |
3 |
김경숙 |
갈라놓을 수 없는 노래 | |
4 |
김귀자 |
낙엽 | |
5 |
김기택 |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 |
6 |
김낙연 |
백자 | |
7 |
김대규 |
가을의 노래 | |
8 |
김말희 |
워킹데이 | |
9 |
김성녀 |
고향집 | |
10 |
김용원 |
삶의 수레바퀴 | |
11 |
김우현 |
보라카이 가는 길 | |
12 |
김재국 |
내 안에 울음소리 | |
13 |
노만옥 |
낙원의 포장도로 | |
14 |
노영수 |
새벽의 章 | |
15 |
류순희 |
비와 나 | |
16 |
박공수 |
창문 | |
17 |
박인옥 |
개땅쇠의 노래 1 | |
18 |
배준석 |
먼 바다 | |
19 |
송인식 |
낮 달 | |
20 |
신광순 |
가슴속 오두막 신전에는 | |
21 |
신규호 |
허무를 갖고 싶다 | |
22 |
신장련 |
앉은뱅이 은행나무 | |
23 |
신준희 |
비비추 이력서 | |
24 |
안성수 |
매화꽃 | |
25 |
안진호 |
그대는요 | |
26 |
원선화 |
목욕탕에서 | |
27 |
유수진 |
꽃밭 | |
28 |
유애선 |
꽃밥 | |
29 |
유재복 |
목련꽃 필 때 너는 뭐 했니 | |
30 |
윤종영 |
배꼽 | |
31 |
이남식 |
겨울 공원 벤치에서 | |
32 |
이덕원 |
숯막에서 | |
33 |
이세종 |
석탄이야기 | |
34 |
이숙희 |
여행자 | |
35 |
이여진 |
너도 꽃이었구나 | |
36 |
이재철 |
기도 | |
37 |
이재학 |
가을시 | |
38 |
이혜순 |
저수지 | |
39 |
이희복 |
가을 기도 | |
40 |
임덕원 |
가을 엽서 | |
41 |
장순금 |
그늘 이불 | |
42 |
장정욱 |
독고리 | |
43 |
장호수 |
가을 나는 법 | |
44 |
정동수 |
어머니 | |
45 |
정명순 |
네가 그리운 날 | |
46 |
정미소 |
나는 징이다 | |
47 |
정용채 |
머리하는 날 | |
48 |
정이진 |
사랑하나 키우고 싶습니다 | |
49 |
조은숙 |
풀먹이다 | |
50 |
최계식 |
목련 판타지아 | |
51 |
최영희 |
산나리 | |
52 |
최정희 |
바람이 사는 집 | |
53 |
허말임 |
벚나무 그늘아래 | |
54 |
허인혜 |
환상통 | |
55 |
홍경임 |
너에게 가는 길 |
지정시(안양작가들의 시) 작품
1.미안하고 미안하다 / 강백진
2.마음속 남한강 돌밭에서 / 강영서
3.갈라놓을 수 없는 노래 / 김경숙
4.낙엽 / 김귀자
5.어떻게 기억해냈을까 / 김기택
6.백자 / 김낙연
7.가을의 노래 / 김대규
8.워킹 데이 / 김말희
9.고향집 / 김성녀
10.삶의 수레바퀴 / 김용원
11.보라카이 가는 길 / 김우현
12.내 안에 울음소리 / 김재국
13.낙원의 포장도로 / 노만옥
14.새벽의 章 / 노영수
15.비와 나 / 류순희
16.창문 / 박공수
17.개땅쇠의 노래 1 / 박인옥
18.먼 바다 / 배준석
19.낮 달 / 송인식
20.가슴속 오두막 신전에는 / 신광순
21.허무를 갖고 싶다 / 신규호
22.앉은뱅이 은행나무 / 신장련
23.비비추 이력서 / 신준희
24.매화꽃 / 안성수
25.그대는요 / 안진호
26.목욕탕에서 / 원선화
27.꽃밭 / 유수진
28.꽃밥 / 유애선
29.목련꽃 필 때 너는 뭐 했니 / 유재복
30.배꼽 / 윤종영
31.겨울 공원 벤치에서 /이남식
32.숯막에서 / 이덕원
33.석탄이야기 / 이세종
34.여행자 / 이숙희
35.너도 꽃이었구나 / 이여진
36.기도 / 이재철
37.가을시 / 이재학
38.저수지 / 이혜순
39.가을 기도 / 이희복
40.가을 엽서 / 임덕원
41.그늘 이불 / 장순금
42.독고리 / 장정욱
43.가을 나는 법/ 장호수
44.어머니 / 정동수
45.네가 그리운 날 / 정명순
46.나는 징이다 / 정미소
47.머리하는 날 / 정용채
48.사랑하나 키우고 싶습니다 / 정이진
49.풀먹이다 / 조은숙
50.목련 판타지아 / 최계식
51.산나리 / 최영희
52.바람이 사는 집 / 최정희
53.벚나무 그늘아래 / 허말임
54.환상통 / 허인혜
55.너에게 가는 길 / 홍경임
1.미안하고 미안하다 / 강백진
미안하고 미안하다
강백진
아이들아!
시리고 차가운 바닷물에
그 얼마나 무섭고도 놀랐을까
무심한 파도는 물결 따라 쓸려가고
어른들 잘못은 가슴 속 풍랑이 되어 돌아오는구나
참담하고 애통하여라!
참지 못할 슬픔이구나...
살아 돌아오라고 외쳐도 보고
피를 토해 통곡해도
지나간 시간에게 하소연만 남아라
아~아
눈에 선한 너희를 안을 수 없으니
이보다 더한 고통은 없을 것 같고
어딘가에 흘러갔을 너의 영혼에게
몸서리쳐 달려가고 싶구나
우리의 아들아
우리의 딸들아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행복한 미소를 줄 수 없어서
따뜻한 사랑 전할 수 없어서
눈물로
비통함으로
너희를 떠나 보내는구나
아~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2.마음속 남한강 돌밭에서 / 강영서
마음속 남한강 돌밭에서
강영서
돌밭에 갑니다.
유수 같은 삶의 수레에
이삿짐처럼 실려가버린
평상심을 찾으려고...
남한강에 가면 돌이 아니라
잃어버린 내 마음을 만날 수 있습니다.
낯익은 돌밭이
어렸을 때 뛰놀던 골목인 양
여기저기서 추억이 뛰어 다닙니다.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키고
어수룩한 사람이 세상을 지키듯
못난 돌들이 돌밭을 지키고 있습니다.
깨지는 아픔을 이겨낸 돌들이
경전의 명구처럼
내 마음을 씻어 줍니다.
번뇌의 살점을 모두 베어내
강물에 떠나보냅니다.
남한강 돌밭에 오면
고향에 온 것 같아
저 세상 쪽으로는 가고 싶지 않습니다.
3.갈라놓을 수 없는 노래 / 김경숙
갈라놓을 수 없는 노래
김경숙
눈을 뜨면 그대에게
따스한 바람이 되어 안기리.
운명이라도 가를 수 없어
난 당신의 심장인 것을
부드러운 선율 타고,
난 그대를 위한 소리가 되어 노래하리라
피어나는 저 꽃보다 아름다운 그대
잠시라도 널 떠나고 싶지 않아
햇살처럼 눈부신 그대
슬픈 어둠은 싫어
행복한 그대 그대로 피어나라
피어나는 저 꽃보다 아름다운 그대
다시 태어나도 너를 위한 노래를 부르리라
아름다운 세상 온 누리에 가득할 때까지
널 사랑하리라
4.낙엽 / 김귀자
낙엽
김귀자
가을의 침실에
초록이 몸져누웠다.
펄펄펄 푸른 혈기로
뜨거운 언덕 넘어
가쁜 숨 고르던 숲길,
속 깊은 빗장 열어 짙푸른 물기 벗어놓고
저녁놀 스며든 잎 새
가지마다 걸린 모태의 탯줄흔적 바라보며
돌아눕는 눈동자 노랗게 흔들린다.
‘나이 들수록 고운색이 좋다’시던
어미의 어미, 또 그 어미의 어미처럼
황혼길 붉은 옷 갈아입고
흙침대 위에 누워 시름시름 잦아드는 생명줄
마른 등 들썩이며 흐느끼는 바람의 손잡고
바스락 바스락 바스러지는 여윈 몸으로
황토빛 유서를 남긴다.
내 주검 머문 그 자리에
새로 태어날 봄이에게 입혀줄
연둣빛 배냇저고리
겨울서랍장속에 꼭꼭 넣어 두었다고.
5.어떻게 기억해냈을까 / 김기택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김기택
방금 딴 사과들이 가득한 상자를 들고
사과들이 데굴데굴 굴러 나오는 커다란 웃음을 웃으며
그녀는 서류뭉치를 나르고 있었다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고층 빌딩 사무실 안에서
저 푸르면서도 발그레한 웃음의 빛깔을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그 많은 사과들을
사과 속에 핏줄처럼 뻗어있는 하늘과 물과 바람을
스스로 넘치고 무거워져서 떨어지는 웃음을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사과를 나르던 발걸음을
발걸음에서 튀어 오르는 공기를
공기에서 터져 나오는 햇빛을 햇빛 과즙 햇빛 향기를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지금 디딘 고층 빌딩이 땅이라는 것을
뿌리처럼 발바닥이 숨 쉬어 온 흙이라는 것을
흙이 공기처럼 밀어올린 풀이라는 것을
나 몰래 엿보았네 외로운 추수꾼의 웃음을
그녀의 내부에서 오랜 세월 홀로 자라다가
노래처럼 저절로 익어 흘러나온 웃음을
책상들 사이에서 잠깐 보았네 외로운 추수꾼의 걸음을
출렁거리며 하늘거리며 홀로 가는 걸음을
걷지 않아도 저절로 나아가는 걸음을
6.백자 / 김낙연
백자
김낙연
은하에서 날아온 어느 행성인가
신비한 빛과 색
우아한 자태로 앉아있다
눈부신 백옥모시차림
여인의 소심素心을 품었으니
그대 안에 감히 머물 데가 있을까
아담하게 부푼 몸매에 배여
넘칠 듯 차있는 은은한 오랜 비련
몰래 다가가 조금은 헤아려보고 싶어라
아무리 애를 쓰며 안으려 해도
보드라운 날개로
아스라한 하늘로 다시 날아갈 양 고요하다
물안개 속에 비상하는 백조처럼
돌아서면 잊혀질까 아쉬워
그냥 바라보며 간직해야만 하리라.
7.가을의 노래 / 김대규
가을의 노래
김대규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지면 가을이다.
떠나지는 않아도
황혼마다 돌아오면 가을이다.
사람이 보고 싶어지면 가을이다.
편지를 부치러 나갔다가
집에 돌아와 보니
주머니에 그대로 있으면 가을이다.
가을에는 마음이 거울처럼 맑아지고
그 맑은 마음결에
오직 한 사람의 이름을 떠나보낸다.
‘주여!’라고 하지 않아도
가을엔 생각이 깊어진다.
한 마리의 벌레 울음소리에
세상의 모든 귀가 열리고,
잊혀진 일들은
한 잎 낙엽에 더 깊이 잊혀진다.
누구나 지혜의 걸인이 되어
경험의 문을 두드리면
외로움이 얼굴을 내밀고
삶은 그렇게 아픈 거라 말한다.
그래서 가을이다.
산 자의 눈에
이윽고 들어서는 죽음
사자(死者)들의 말은 모두 시가 되고
멀리 있는 것들도
시간 속에 다시 제 자리를 잡는다.
가을이다,
가을은
가을이라는 말 속에 있다.
8.워킹 데이 / 김말희
워킹 데이
김말희
이제부터 시작하자 하나, 둘, 셋
낮은 휘파람이 꽃들을 깨운다
무작정 걸어본 날
밀물처럼 숨을 들이키자 신이 내게 속삭인다
참 오랜만이지?
문화회관 창문 틈으로 노인들의 느린 동작과 노랫가락들,
모두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변함없이 도로를 지키고 있는 저 나무들은
몇 해를 지나도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성이고,
생리대와 양말 몇 컬레, 스타킹, 난전에서 파는 속옷을 담은
검은 봉지가 어색하지 않다
사람들은 오래된 반지의 색을 복구시키는 방법을 묻는다
변한 것을 복구하는 일이란 여과의 과정을 거치는 것,
여과시켜야 할 무엇을 생각했다
나를 통과한 빛과 물과 음식들까지
지구 밖으로 뱉어내었던 수많은 지꺼기들은
여과된 물질의 잔재,
걷는다는 것은 그것들을 걷어내는 일,
해를 바라보며 피어나는 꽃들의 속도를 따라
하나, 둘, 셋 서성이던 나무들 속으로 경쾌하게 걸어든다.
9.고향집 / 김성녀
고향집
김성녀
푸른 산 저 너머로 멀리 보이는
새파란 고향하늘 그리운 하늘
언제나 고향집이 그리울 때면
저산너머 하늘만 바라봅니다
가을밤 기러기 떼 날아갈 때면
이마음도 고향 찾아 눈물집니다
부모님 형제자매 다들 잘 있는지
언제쯤 평화통일 우리 앞에 오려나
설날과 추석명절 모두들 다니는데
삼팔선 가로막힌 북녘 땅 갈 수 없어
꿈속에 찾아갈까 간절히 바라봐도
꿈조차 달아나니 애닳아 눈물짓네
10.삶의 수레바퀴 / 김용원
삶의 수레바퀴
김용원
오열하는 날은 칸칸이 부서져
어둠은 조용히 스며들고
공사장 저편에도
높이 솟은 아파트 단지 구석에도
조용히 뜨거웠던 하루를 고개 숙여 떠나간다
마지막 불씨 같던 저녁노을도 숯이 되어
나의 곁에서 떠나가고
숨 쉬고 있는 나만을 발견할 수 있을 뿐
매연과 소음으로 찌그러진 깡통 같은
살 좋은 흙 속의 굼벵이처럼 꿈틀거렸던 욕망이여
떨어진 어깨 아래로 잔잔히 미소 짓는 얼굴이여
뛰고 외쳐도 무능한 하루여
공장의 하루는 온통 매연과 소음으로 가득했어도
어둠만은 멈추지 않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11.보라카이 가는 길 / 김우현
보라카이 가는 길
김우현
남녘땅 바다 섬에 누가 사나 했더니
눈 맑은 작은 키가
천국간판 달았더라
왜 이리 사느냐고 물을 새도 없이
물 냄새 짜디짜게 소금버섯 만들더라
낯선 묵객 하나로 모으고서는
도마뱀붙이, 노란 고마멜라 꽃에
앉듯이 데려가더라
뫼시지 못한 이날의 먼 어머니
보고파질 때
혜량인지 경구인지
단 한 번에 용해되는 바다를 보이더라
나의 나는 허울만 용케도 입었더라
초겨울 여정이 이리도 벅찬 것은
불초로 얼룩진 자탄의 절망에서며
주변인을 만들어온 기만의 술책에서니
이녁을 읽지 못한 표리의 참회이라
파초의 이 밤, 야자수의 밤
물가에 달 든 안위를 위해
미수의 어머니 머리 흔들어 기도하실게다
한 올 한 올 풀어 엮인 당신의 끄나풀을
지독한 밤을 위해 감아올리실 게다
밤하늘 묵지 위에
만상의 얼굴들을 수놓으실 게다
아침이 밝을 때쯤에
눈 맑은 키 작은 사람들, 나에게
섬에는 왜 왔냐고 묻지는 않을게다.
12.내 안에 울음소리 / 김재국
내 안에 울음소리
김재국
그대가 날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등 뒤로 느끼면서
나는 공원 숲길로 난
작은 길을 따라서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이란 말은 없었지만
그대의 떨리는 듯한 목소리에서
오늘 난 이별을 보았습니다.
가로등 불빛이 흐릿했지만
그대의 흔들리는 눈빛 속에서
이 밤 난 이별을 보고야 말았습니다.
여기까지가 우리들의 여정은
끝이었음을
여기까지가 우리들의 만남은
끝이었다는 것을
우리들의 인연은
이렇게 비껴가고 말았습니다.
우리들의 사랑은
이렇게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떠날 때 이별은
아름다운 모습이어야 한다고 했습니까
떠날 때 이별은
아무런 조건이 없어야 아름답다고 했는지요
이별에도 예의가 있어야 한다는
평소 그대의 뜻을 존중했습니다.
나 이제 길을 나섭니다.
우리가 다정하게 손을 잡고 걸었던 그 길을 따라서
나 이제 길을 떠납니다.
우리가 밤새워 그렸던 그 숲 가득한 집으로
가다가, 가다가 서러움 밀려오면
노랗게 핀 매미꽃 꽃잎 위에 조금 덜어주고
가다가, 가다가 눈물이 나면
산등성이로 넘어가는 저녁노을이 말려주겠지만
흐느껴 우는 내 안에 울음소리는
어떻게 들어야 할지
소리죽여 우는 내 안에 울음소리는
어떻게 달래야 할지
어떻게, 어떻게 내 안에 울음소리를
달래야 할지
13.낙원의 포장도로 / 노만옥
낙원의 포장도로
노 만 옥
그래도 가끔은 정상
애가 끓을 거야
보고 싶어서
그리워서
자식
도무지 이해 못할
생각지도 못할 곳에서 어딜까
모두 낯선 사람들
부들부들 알 수 없는 떨림으로
잠을 설치고
잠 못 들고
아아 그렇게
가고 싶지 않았지만
가는 것이
가야하는 길인가 보다.
행복한 보금자리
무중력의 꿈속
무엇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날마다 달리나 그 자리
눈뜨고 못 볼 곳에서
눈을 감고 싶은
눈을 떠도 감은 듯
감아도 뜬 듯
부유한 시대, 삶의 뒷 편
애끓는 노을
어쩔 수 없는 바람에
알 수 없는 바람이 하늘을 본다
14.새벽의 章 / 노영수
새벽의 장(章)
노 영 수
달무리를 앞세우고 길을 가다 손을 들면
밀물처럼 우수의 선단이 내 가슴에
밀려와 조용히 닻을 내린다. 하얗게 빛바랜
수목과 호수의 호흡이 가늘게 들려오는.
금란(金欄)의 언덕에서 이별을 서러워하던
삼단 같은 머리를 한 소녀. 그 소녀의 눈물이
요정의 날개를 타고 날아와서 나뭇가지 마다
하얀 이를 돋보이면서 웃고 있다.
- 밤, 새로 일시. 베레모를 쓴 단원의
상륙이 시작된다. 푯말을 꽂고 해안을 돌아
산중턱에 봉화를 지르면 가슴마다
이글대는 태양이 안겨진다.
15.비와 나 / 류순희
비와 나
류순희
산가山家에 비 내리던 날
장작불 지핀 아궁이 앞
시인 몇 둘러 앉아 약술을 주고받네
시 꽃은 잠시 피었다 지고
온갖 세상이야기
오월의 밤을 활활 태우는데
생의 마지막
밭은기침하며 준비하는 시인의 친구
아내 손잡고서 슬며시 찾아오네
원치 않는 길 힘에 겨워
지나던 길 잠시 들렀을 뿐이라는데
머물고 간 빈자리에 긴 한숨만 깔리네
아픔의 눈물일까
오월의 단비는 서럽다 밤을 새워 울고
여명을 기다리는 나
애끓는 등 뒤척이며 하얗게 밤을 새네
16.창문 / 박공수
창문
박공수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의 벽을 허무는 게 아니라 그 벽에 창을 내는 일이려니
우리, 벽을 허물지는 말고
예쁜 창을 내도록 해요서로의 그리움이 통하다 보면
우리들 사랑도 싹 트겠지요
창으로 해서 벽은 더욱 신비해 지고
벽으로 하여 창은 더욱 빛이 나네
아름다운 창이 있어
당신의 벽도 존중합니다흔들림 없는 벽이 있기에
당신의 창문을 애타게 바라봅니다
17.개땅쇠의 노래 1 / 박인옥
개땅쇠의 노래 1
박인옥
둘러보면 푸른 심줄 일색인 산과 들녘과 바다
나의 고향은 유배지
토벌로 그슬린 초토
동진강 건너가며 노령을 넘어가며
벗은 몸, 황토등성이
핏빛 혹은 산빛으로 잔솔을 보듬었네
내피와 정신의 사분의 일을 물러준
할아버지,
낫자루와 개머리판이 맞붙었던 그 싸움터위로
녹두장군이 칼을 써야했던 피노리로 가는 이 길
팍팍하지는 않습니다
헤진 짚신과 무명토시가 어울린 굿판이 어른 거려
가슴이 울렁거려요.
급기야 가슴앓이는 이명의 의문부호를 그리고
자꾸 겁이 납니다
글자 몇 개 담고 있는 풋콩깍지가
익어 터질 날 있을까요
내 이웃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는 있겠는지요
사내다운 사내가 되고 싶어요
할아버지처럼
그 누가 알아주지 않던 붉은 마음이 썩어
여린 호롱불로나마 가물거리듯
다섯 자 남짓한 이 몸뚱이도 썩어
황토로 눕고 싶어요
18.먼 바다 / 배준석
먼 바다
배준석
시골 초등학교 동창 한 놈이 시인이 된 줄 몰랐다
안양시내 변두리 양지말 떡산 아래
날카로운 칼끝으로 생선이나 저미며 산다기에
콧물 찔찔 흘리던 촌놈이 무슨 회를 뜨냐며 웃었다
그 놈이 장사한다는 횟집을 지나는 길에 들렀다
긴 칼을 들고 여린 생선 속살을 발리는 놈
날 선 칼날을 자유자재로 놀리는 놈
자를 것 자르고 버릴 것 미련 없이 버리고
이리 빠지고 저리 미끄러지는 푸른 바닷물을
잡아채며 정갈하게 여며놓고 씩 웃는 놈
파도소리 시원스레 한 점씩 맛보며
그 정도면 됐다는 듯 소주 한잔으로 간을 맞췄다
나오다 보니 간판에 시 한 구절이 그때서야 보인다
먼 바다 ㅡ
이제 보니 이놈이 시인이구나
시인이라고 떠들고 다니면 신통치도 않다는데
펜도 없이 칼날 하나로 시를 써대는 무서운 놈
긴 말 필요 없는 한 접시 분량의 깔끔한 시
19.낮 달 / 송인식
낮 달
송인식
바람 빨아들인 문풍지에
겨울이 매달려
울고 있는 날
깊이도 넓이도 모르는 강이
내 앞에 흐르고
검고 검어 차라리
하얗게 빛나는 형상들이
제각기 모양을 다듬으며
쓸려 가고 있다
별빛 달빛 치장하고 발돋움하고
시공을 한손에 움켜쥐고
소리 지르던 그가
떠난 자리
햇살 몰고 와
새벽을 여는
아침 이슬이 보석 같은데
허무가 낮 달 되어
빈 하늘에 가득하다.
20.가슴속 오두막 신전에는 / 신광순
가슴속 오두막 신전에는
신광순
신神을 생각하다가
우주를 생각하다가
가만히 내 손바닥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내 다섯 손가락을 굽혀보고 있습니다.
무언가 창조의 비밀이 내 손 안에 숨어 있을 것 같습니다.
『신은 나 자신보다도 나와 친밀한 힘』이라구요?
『신은 다른 사람의 깊은 마음속』찾으라구요?
신은 존재 그 자체이고 선 그 자체라구요?
사랑이 있는 곳에 신도 있다구요?
어머니!
신을 생각하다가 어머니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작은 가슴에 오두막집을 짓고 군불을 지피며
어머니가 누우실 아랫목을 뎁히고 있습니다.
아마 이것이 신전이고
거기에 신도 어머니도 같이 계실겁니다.
어머니!
제 가슴속 작은 오두막집 신전에는
항시 어머니가 계십니다.
21.허무를 갖고 싶다 / 신규호
허무를 갖고 싶다
신규호
그대를 갖고 싶다
절망 끝에 죄스러운, 꽃잎 같은
허무의 입술을 갖고 싶다
부드러운 혀, 혀가 감춘 목구멍도
내 것으로 갖고 싶다
목구멍 너머 깊숙한
어둠과 고뇌도 갖고 싶다
보아라,
소용돌이치는 위험한 몸짓을
빈 공허를 탐내는
한 덩이 불꽃의 몸무림을
(어찌하여 백치는 아름다우며
순수는 끝없이 유혹하느냐)
태우고 싶다
윤리와 과학과 문명의 정점인
그대, 허무여
검은 악마여
매혹의 입술, 그 너머 목구멍 속
깊숙한 곳에 숨은 허무여
마침내 나는 타버린 나를 갖고 싶다
22.앉은뱅이 은행나무 / 신장련
앉은뱅이 은행나무
신장련
투명해진 은행알이
황금빛 포행을 나서는 이 가을
등걸만 남아
이름표 드러내듯
철 늦게 촉수를 밀어 올린
두셋 은행잎
푸른 투혼이 발목을 잡는다
어느 봄 길에
무수히 떨어진 은행꽃을 보았지
사막의 모래처럼 흐르던
불멸의 입자들
비빌 언덕만 있으면
높새바람 등에 앉아서라도
한 줄의 나이테
또렷이 그리고 싶다 하던
그 은행나무
오늘도
스물여섯 앳된 청춘이
체색하던
영혼의 집을 허물고 갔다
밑둥만이 퉁그러져도
싹을 내는
앉은뱅이 은행나무를 보았더라면
죽을 힘을 더해
고이 고이 살았으리라.
23.비비추 이력서 / 신준희
비비추 이력서
신준희
햇귀의 푸른 피톨 깊은 정적 깨트린다
파릇한 어린잎이 날숨을 가다듬는
비비추, 네 몸을 열면
소용돌이 치는 물살
맑은 피가 꿈이 되는 비바람에 흔들리다
불현듯 손등에 젖어 웅크린 눈물방울
차갑게 그린 괄호엔
오돌진 꽃대궁 하나
의자에서 밀려나와 아직껏 집을 못 찾고
인적 뜸한 밤거리, 길모퉁이 주저앉아
무두정無頭釘 별빛을 안고
입을 다문 친구여
언제쯤 끝이 보일까 수백 통 써낸 이력서
아물기를 마다하며 부르튼 맨발의 길
비비추, 하늘 모서리
주줄이 꽃등 환히 단다
24.매화꽃 / 안성수
매화꽃
안성수
섬진강 푸른 바람으로
뼛속을 파고드는 추운겨울
냉가슴 부여잡고
맨살로 시린 겨울을
견디고서 피어나는 너는
가지마다
실핏줄 톡톡 불거지고
피멍울이 맺히는
그리움의 혼불
하얀 울음으로 피어나고
백설 면사포를 쓴 너는
아픈 생의 비밀을 안고서
겨울 강을 건너와
눈물 한 방울 떨어뜨리며
첫사랑 같은 매화꽃이 핀다.
25.그대는요 / 안진호
그대는요
안진호
그대는요, 파란하늘을 나는 새입니다
어떤 가을 날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었습니다
먼 산들이 성큼성큼 다가와 서고
모든 숲들이 소리 없이 아우성치면서
그대를 손짓해 부를 때 그대는
조용히 도화지 같은 푸른 하늘을
날고 있었습니다
그대가 날아가는 날갯짓에 그어진
하얀 산에는 세상을 함빡 감쌀 것 같은
웃음이 깃들어 있고 웃음 속에는
온 세상을 포용할 모정 같은 사랑이
함께 있었습니다
온통 세상이 환해지면서
그대는요, 가만히 웃고만 있었고
땅 위에 모든 새들이 한꺼번에 날아올라
그대를 에워싸며 하늘을 덮을 때
모든 산들은 팔을 벌리고
모든 나무들은 쑥쑥 자라 하늘까지 닿으며
새들의 둥지를 만들었답니다
그리하여 창세기 같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그대는요, 풀잎 같은 푸른 마음을 갖고
파란 하늘을 나는 새입니다
26.목욕탕에서 / 원선화
목욕탕에서
원선화
멍이 든 여인
걸을 수 없는 늙은 여인
연신 실실거리며 웃는 여인
늘어진 뱃살을 저주하듯 꼬집는 여인
발그레 달뜬 여인
여인
여인들
벌거벗은 여인들
성한 이가 성치 못한 이를 닦는다
제 몸 인양 구석구석 닦는다
천정에 달린 수증기처럼
이마에도 방울이 열린다
허물처럼 탈의를 하고
부끄러움으로 옷을 입는다
물 먹은 손으로 거울 속 나를 닦는다
벌거벗은 당당한 몸뚱이들
그 중, 나만 부끄럽다.
구석구석 나를 닦는다
몸뚱이를 덮은 비늘 같은 때가
지우개 똥처럼 바닥에 뒹군다
벗겨진 비늘만큼
켜켜이 쌓이는 부끄러움
더러운 속내 수증기에 달뜬 듯 감추어본다
온전히 나를 닦아 본적이 있었던가?
오늘도 맘 한 번 닦지 못하고
허물만 벗기고 간다
27.꽃밭 / 유수진
꽃밭
유 수 진
마당엔 소나기 같은 짠 내
동네 어귀의 그 집, 살짝만 밀었는데 삐걱거리며 열리는 대문
틈 사이로 몸을 밀어 넣으면 빈틈없이 뭔가를 심어놓은 마당
대문과 가까운 쪽 기둥에
햇볕에 바랜 신문지 같이 붙어 있는 글씨
담배
계셔요,
계셔요,
계셔요,
마루에 걸터앉은 어둠보다 더 컴컴한 걸음
구부러진 등을 업고 방안으로 기다시피 들어가던
담뱃집 할머니
하늘 군데군데 피어있던 꽃구름
하나 둘 떼다가 곰방대에 쑤셔 넣고 불을 붙인다
깊게 몇 번을 들이마셔 빨아야 빠작빠작 타오르던 불꽃
구겨지고 펴기를 반복하느라
상추 한 포기 심을 자리도 남아있지 않을 만큼 꽉꽉 들어찬 검버섯
누구도 들어서지 않던 그 꽃밭
28.꽃밥 / 유애선
꽃밥
유애선
마당에 있는 싸리꽃이
가마솥에 쌀밥처럼 뜸이 들던 날
탱자나무 울타리에 다닥다닥 붙어있던 참새들은
하루 종일 쪼르륵 거리다 갔고요
초승달은 저녁 늦도록
댓돌 위에 있는 우둘두툴한 절구를
쓰다듬고 있었지요
자정이 되어서야 학교에서 돌아오는 언니
배불리 먹어 본 적은 언제였을까요
뒷동산 청솔가지를
아궁이에 쑤셔 넣고 싶었어요
이런 밤,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던 싸리꽃은
눈물이였겠지요
방안을 훔쳐보던 바람은
어디서 온 걸까요
이웃들은 모두 대문을 걸어 잠갔고
가마솥을 올려다보는 언니의 속이
시커멓게 타고 있었는데요
새벽이 올 때까지 마당에선
김이 모락모락 나는 꽃밥 냄새가
진동을 하였죠
29.목련꽃 필 때 너는 뭐 했니 / 유재복
목련꽃 필 때 너는 뭐 했니
유재복
목련꽃 피었다
가진 것 없는 살림에
뿌리 근처 덜 녹은 얼음 조각, 오후의 햇살 조금,
겨울바람에 목 감겨 잡혀간 어린 봄바람,
겨우내 말라비틀어진 개똥 한 덩이,
얼어붙어 땅에 박힌 낙엽 몇 장,
무수히 서성이던 뒷집 노인의 덜 지워진 발자국 몇 개
없는 살림에 장만한 집이 어쩜 이리 크고 환할까?
얼어붙어 으깨진 씨앗 몇 개
납작해져 알아볼 수도 없게 된 메모
어느새 목련꽃 피었다
비어 있던 마음에 안개만 가득찼다
30.배꼽 / 윤종영
배꼽
윤종영
보드라운 껍질 속 따뜻한 바다에 떠 있는
너를 향해 생명줄 던지던 날
부둣가에는 밤새도록 태풍이 불어
바위는 하얀 거품 토해냈지
단단하던 몸에 중심선이 생기면서
보름달이 떠올랐고
출렁이던 물결은
숨죽이며 잔잔하게 일렁였지
어두운 바다 한가운데
부표처럼 떠 있다가 내게로 온
너의
온몸에 묻어 있던 빛
너로 인하여
나는
울타리가 되어
또 다른 이름으로 살게 되었지
파도에 시달리다 바닷물 게워 내고
곤히 잠든
너의 몽돌 같은 배 한가운데
보이는 빨간 등대
보이지 않는 끈이 자라는 자리의 둘레
불빛 따라 오른쪽으로 돌며
더듬어 보는 손끝
쉼 없이 흐르는 투명한 사랑
아가야,
네가 언제나 자유롭게 유영游泳할 수 있도록
영원히 식지 않는 둥근 바다가 되어줄게
깨어지지 않는 작은 바위가 되어 너를 지켜줄게
31.겨울 공원 벤치에서 /이남식
겨울 공원 벤치에서
이남식
쌓인 눈 녹으며
더 수척해진 그대
먼 봄 그리움은
흐린 망막 속
불빛으로 아스라한데
눈구름 또
몰려오네.
시린 햇살
급하게 자리 뜨며
몇 줌
흘리고 간
마른 온기 그러모아
내 꽁꽁 언
생각의 끝
깊은 주름을 펴네.
어둠에 익숙한
냉기 몰래
가난한 풀씨 하나
싹 트는 소리
가만 듣겠네.
32.숯막에서 / 이덕원
숯막에서
이덕원
용두리에셔 호젓하게
서원면으로 가는 강원도 초입
빠끔히 열린 하늘아래
이정표도 없는 그리운
개울가 숯막에 가면
메마르고 척박한 이 땅에서
빨아올린 수액의 양만큼
우리들의 키는 하늘을 향하고
살을 도리는 세한을 견뎌
봄눈은 황금빛 꽃으로 손을
흔들며 힘든 세상 참으로
참어라 참어 얼마나 노래했을까
자양분을 위해 살을 썩히고
온갖 짐승 혹은 비바람에 할퀸
셀 수 없는 기억의 편린이
서슬퍼런 톱날에 외자로 잘려
어둠속에 부딪히며 흩어지고
우리들은 땡볕아래 사열하는
병사가 되어 도열했지
몸에서 나온 매운 안개는 몸을
휘감고 뽀얀 속살이
섭씨 천도의 흙가마 속에서
알루미늄 막대처럼 단단해져
다음 세상에 우리들의 영혼이
얇고 명징한 쇳소리로
태어나길 기다리며
참으로 참고 참아야 했지
단단해지기 위해 우리들이
흘린 수액은 별이 되어 흐르고
오늘도 시커먼 얼굴로
해맑게 웃는 이들이 있다.
33.석탄이야기 / 이세종
석탄이야기
이세종
탈출구를 잃어버린 지열
언어를 묵살한 노후怒吼
그것은 차라리 엄청난 질서다.
정복자는 공허하고
반란자는 실망하고
협력자는 불안하고
썩어 묻혔던거야
은밀한 지하에
태양을 등진 그 무덤 능선에
꽃은 피고
개울은 계곡을 돌아 흘렀어
내밀한 사연이야 누가 알어?
누적된 역사를 말할 것 없이
어차피 성장은 내란 인 걸
어둡게 굳어진 돌덩어리
부서져 흩어지는 사념의 반란
축적된 시간의 분말인 걸
패배자는 신음하고
낙오자는 불안하고
약한 자는 투쟁한다.
불이 타는 거야
밀폐된 철벽 빙하의 방 속에서
탈출을 외면한 대열은 난로주위에서
사활을 논쟁하고
균열하는 자신을 회진하는
그것은 신앙인 게야
34.여행자 / 이숙희
여행자
이숙희
마음에 담고 있던 한 다리 앞에
나는 서 있네
꿈으로 달뜬
가슴을 가만히 감싸 안으며
부드러운 호기심으로
긴장한 두 다리를 쓰다듬네
내가 원하는 것은
단단한 목적이 아니라
꿈 곁으로 향하는
이 묵묵한 발걸음의
지속임을 아네
비로소 사납지 않은 아름다움에
다다르는 것
또 다시 건널 다리 앞에
서는 것
몇 개의 닳아버린
두툼한 신발과
누구에게나 관대한 햇빛은
그 길을 비추리
35.너도 꽃이었구나 / 이여진
너도 꽃이었구나
이여진
나비도 지나치는
꽃잎에
선 듯 다가서지 못하고
스치는 바람이 되어
잠시 머물다
네 향을 음미하는 꿈길에서 조차
꽃이기를 거부했던 몸짓
네게도
아름다운 꽃으로 피워내는
옹아림의 산고가 있었고
암술과 수술의 감미로운 사랑을
갈망하던 고뇌의 날이 있었구나
아! 몰랐다
작은 꽃으로 피어 사랑의 몸살을 앓다
그렇게 지고 마는
너도 꽃이었구나.
36.기도 / 이재철
기도
이재철
밤 깊어 고요할 때 숲을 지키는 풀벌레
그 영혼으로 깨어있게 하십시요.
촛불 사르고 그 앞에 무릎을 놓고
당신의 말씀을 더듬어 읽게 하십시요.
한 줄 읽을 때에 살아있는 기쁨, 강해지는 사랑
또 한 줄 읽을 때에 깊어지는 평화를
나즉이 외우게 하십시요.
한번 가슴에 모셨던 당신은 빠져드는 사랑의 늪입니다.
도망칠수록 조여 오는 사랑의 올가미 매듭입니다.
내 삶 짧은 날 야생화로 키우셔도
오늘 아가서 한 줄로 오시는 당신.
당신을 섬기기에 넓어지는 세상
그 영원한 생명으로 늘 깨어있게 하십시요
37.가을시 / 이재학
가을 시
이재학
알맞게 익은 사랑의 열매가 구속당한다.
삼백 예순 날을 안에 갇혀
섭섭해 하던 그 열정 덩어리가
문 밖을 향한 그리움.
알거라. 계절의 한 모서리를 배회하던 바람도
이제 해질녘 사뭇침이다.
두근거림도 사라진지 오래다.
적당한 시절의 안온한 향기,
너의 바람도 퇴색되어 가던 그 하루의 충만 속에서
숨김없이 난타 당하던 번뇌의 깊은 골짜기.
정성껏 퇴적되길 원하던 갈잎의 휘파람 소리.
어떤 형벌도 주저하지 않는다.
담담히 흐르는 그 약속 같은 바람.
해질녘의 고요.
초저녁 이른 불빛으로 모여 격정을 함께하는
옛 집의 등불이다
그래서 알리라
가장 소담한 한 방울의 꿈처럼
날려가고픈 가을의 한 단편 같은 언어
38.저수지 / 이혜순
저수지
이혜순
불빛에 갇혀버린 저수지
잠들지 않는 그곳엔
마른 목을 축이러 내려오던 고라니도
틈만 나면 뛰어들던 하늘도
오래 전 발길을 끊어버렸다
멋모르고 찾아들었던 오리 몇 마리가
서둘러 떠나버린 뒤
계속되는 불면에 지친 갈대들만
저수지를 지키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불빛들
쉘부르 마론 올리 허브
저마다 낯선 까페 이름들을 이마에 달고
사람들 발길을 불러 모은다
모여든 사람들은 저수지의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리고
지친 하루를 풀어 놓는다
수면 깊숙이 몸을 숨긴 물고기들은
사람들이 쏟아내는 소음을 받아먹고 산다
형형색색의 불빛에 취해
늘 몽롱한 눈빛으로 흔들리는 저수지
사람들 노래 소리가 갈대 잎을 흔드는 밤이면
녹슨 별을 닦으러 하늘로 올라간다
39.가을 기도 / 이희복
가을 기도
이희복
종탑에 걸린 노을이
은빛 찬양처럼 몸을 떠는 시간
가슴 한켠에
촛불을 켭니다
주여!
이 가을에
아직 사계가 끝나지 않음을 감사하고
저녁나절
아직도 남은 햇볕을
감사할 줄 앎을 감사합니다.
열한시* 삶의 기도처럼
가을엔 누구나
마지막 남은 사랑을 사랑할 줄 아는 법
가슴에 촛물 흥건히 고이도록
노을에 흡입되던 두 손
하늘 품에 안깁니다
이윽고 하나가 됩니다
* 열한시 : 일과 종료 1시간 전인 오후5시(유대시간 11시)에 고용되어 하루를 잃은 품꾼들에게 시간의 가치를 일깨워 준 성경적 시간을 의미함.
40.가을 엽서 / 임덕원
가을 엽서
임덕원
잃어버린 것들을 마저 잊기로
가을 속을 간다,
묵은 엽서의 색 바랜
사연 속을 간다.
어두운 밭두렁 길
쌓여진 시래기 더미에서
찾아 듣는 귀뚜리의 울음
잠긴 목청에 허연 입김뿐인,
오늘 내 쓸쓸한 머리칼이
가을과 있다.
누군가 그리운 이는
기다림에 젖은 물기를 털고
진정 그만의 위안을 위하여
버려야 하는 것들을 추스른다,
오오래 서성이다가
해거름에 떠나는 걸음인 것을.
가을 들판은
잊는 것들로 하여 가득하다.
41.그늘 이불 / 장순금
그늘 이불
장순금
저녁이 쓰고 남은 손바닥 만 한 온기에
그늘이 집을 지었다
한 번도 홀로 햇빛 속에 서 보지 못한 담벼락과 골목과 구석이 함축된
더듬더듬 어눌한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막다른 길 앞에 납작 엎드린
한 번도 젖어보지 못한
속내 안까지 샅샅이 비춘 햇살의 낯 뜨거운 흰 뼈들이
백야의 긴 밤을 오가도 등 뒤의 새벽은 보지 못해
지평은
밤을 나와 달빛 속 외딴방을 지나
홀로 노숙하는 저녁에 몸을 기댔다
지상에 지분 없는 남루한 발들이
평화 한 평 그늘로 들어가 이불을 덮을 때
뜬구름을 덮고 자던 허공이
온기로 데워진 그늘을 한 겹씩 끌어당겨
제 발등을 덮고 있었다
42.독고리 / 장정욱
독고리
장정욱
옷 벗을 때면 훌쩍 뒤집히곤 했던 그 속
보풀이 몰려들어 길은 어두워지고
흙길엔 비린 별들이 축축했다
종아리에 튀어오르는 별의 비늘을 안고
어린 풀들은 까실까실한 어둠을 목까지 끌어올려 입고 있었다
헐은 숨결을 지나
길 끝 언덕에 다다르면 그곳엔 출렁이는 바다의 벼랑
아버지의 아버지로부터 물려온
질긴 물살의 올이 검푸르게 풀어지는
위태로운 밥 한 숟가락
바람에 덮이는 책갈피
나는 독고리를 벗으며 아직도 그 터널을 지나지 않았다
43.가을 나는 법/ 장호수
가을 나는 법
장호수
낡은 시집 같이 구겨진 오후
천변의 갈대들은
노을을 쓸고 있다
돌망 사이로
목련 구름이 흐르고
젖은 바람은 갑골문자의 부스러기
희뜩희뜩 물비늘로 부유한다
과거로 떠내려간
묵혀둔 상처들이
더러는 내 발에 밟혀
바스러져 날리는 가을
가슴 한 귀퉁이에 쌓여가는 숲의 기억들
빛바랜 나의 사진첩은
19세기 유에스비
어머니는 나에게
가을 나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으셨다
44.어머니 / 정동수
어머니
정동수
어머니,
서녘 땅 그곳엔
호미로라도 일굴
손바닥만한 땅이라도 있는지요
갈퀴처럼 굽은 당신의 손
허리를 끌며 밭을 매시던 어머니
그 거친 손이
어느 명의의 손보다도
신통 했습니다
어머니
작대기 하나 달고
첫 휴가 온 아들을
손을 이마에 대고 기다리던 당신
신열에 들뜬
어린 아들의 이마에 짚어보기만 해도
열은 내리고
달콤한 꿈속으로 들곤 했지요
그곳에서 그 거친 손으로
어느 영혼을 잠재우고 계신지요.
45.네가 그리운 날 / 정명순
네가 그리운 날
정명순
산수유가
그리운 이야기를 노랗게
터뜨리는 봄날
햇살의 잔물결에
떠밀려오는
너의 모습으로
나는 몹시 아프다
어긋난 시간의 관절을
고이 꿰맞춘다면
따뜻한 온기로
다시 올 수는 있는 건지
눈부신 오후를 풀어
쓰고 또 써 보다가
봄바람에 부치는
애틋한 봄 편지 한 통
46.나는 징이다 / 정미소
나는 징이다
정미소
바람이 와서 툭툭 칠 때마다 펄펄끓던 불가마가 생각난다
도가니 속 온몸이 쇳물로 녹여지고, 옹고집이 바데기, 바데기로 뭉쳐지면 쇠
망치로 펑펑 매질을 당했다
한 뜸 한 뜸 불 담금질을 견디며 내안의 울음을 깨야했다 가슴 저 밑바닥에
서 옹이로 박힌 울음주머니가 부어올라 더는 견딜 수 없는 날, 징 징 징
쇠 울음소리로 울었다
가슴이 돋움질치는 소리와 소리의 메아리가 한데 어울리도록 온몸을 내던
지며 울다보니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큰 울림통이 되었다
산다는 건 불가마속이어도 견디고 볼 일이다
가파른 벼랑에도 꽃은 피고, 절망의 그늘에도 온기로 다가오는 햇살 오늘,
녹청꽃 피어도 좋은 내 몸에게 고마워, 고맙다고 말한다
나는 징이다
47.머리하는 날 / 정용채
머리하는 날
정 용 채
늙어가는 여자가
아치형 거울 앞에 앉았다.
반쯤 젊은 남자가 예리한 가위로
그녀의 꼬랑지를 자른다.
두 번의 문상과 한 번의 결혼식
그리고
한 번의 돌잔치를 자른다.
시간은
처마 끝에 굼벵이처럼 발밑으로 굴러
익숙한 문자들을 만들어낸다.
서너 달
마트, 세탁소, 시장, 백화점, 삼겹살. 돼지갈비
콩나물과 된장찌개가 뒤섞인다.
또 한 번
돌돌 말리는 객쩍은 기도
귀퉁이 심비디움 각질하나 떨군다.
사내가
여자의 안쓰러운 기도를 쓴다.
플라스틱 빗자루에 쓸려
늙어 가는 여자가 솔잎처럼 눕는다.
48.사랑하나 키우고 싶습니다 / 정이진
사랑하나 키우고 싶습니다
정이진
머리는 언제나 현실에 머물고
가슴은 욕망을 향해가는
마음은 외로운 무덤 같아
지구와 태양처럼 여전히 주위를 맴돌고
이미 뜨겁게 달아오른 나의 이마엔
초롱한 별들만 박힙니다
어둠속에서 찍히는 별들의 발자국은
아침이면 하얗게 지워지고
날이 갈수록 차오르는 한계는
젊은 날의 속 태움이 그랬듯이
입안 가득 고인 침처럼
삼켜도 삼켜도 자꾸 할 말이 생겨
뒤돌아 보게 됩니다
무시로 찾아와 질기게 따라 붙어
과녁 잃은 가슴에 활을 꽂고 사라지는
이 가을날
떨어진 잎새 속에 묻은 세월처럼
변치 않는 사랑하나 키우고 싶습니다.
49.풀먹이다 / 조은숙
풀먹이다
조은숙
서향집은 노루 꼬리만큼 짧은 해가 흠이다
지루한 장마 문을 박차고 용케 말간 하늘이 나와
눅눅한 이부자리 내다널고 세탁기를 돌리고
삼베홑청에 풀을 먹였다
노모는 풀 먹인 이부자리를 좋아한다
깨끗한 보에 싼 홑청 자근자근 밟아 다듬질하는데
거실 한 귀퉁이 기능 잃은 다듬이돌
백발 노모처럼 뽀얀 먼지만 이고 있다
쪼글쪼글 오이지에 파 마늘 송송 썰어 무치고
얼음 동동 띄운 냉국으로 늦은 점심을 차렸다
오이지냉국에 보리밥 훌훌 말아 드신 노모
소파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다
저물어가는 노을 같은 노모 한숨 자고 일어나면
볕에 널어 가슬가슬해진 이부자리처럼
빳빳한 기운 되찾을 수 있을까
서향으로 앉힌 소파에 오후 4시 해가 길게 들어앉았다
50.목련 판타지아 / 최계식
목련 판타지아
최계식
어쩌면 저토록 모진 그리움으로
온 누리 뒤덮어
하늘 끝까지 자지러지는 눈발 속에 웃는가.
오랜 세월 그대 뒷모습
애틋이 꿈꾸어 새기지 않은 태깔 없건만
하얀 속옷 첫 단장으로
뒤돌아보는 빛 부신 삼월
내 이제야 그대 환영에서 깨어 눈 뜨나니.
완연히 문을 열고
밤마다 그을린 별빛들 이슬로 삭히면서
한 장단 다섯 박자로
못 잊어 총총히 써 내린 곡조
산지사방 꽃 문을 열고
새벽에서부터 저녁에 이르는 바람결에
반백의 머리칼 날리며
분명 잎 그늘로 짙어 오는 그대 몸짓.
처음 망울졌던 가지에
유난히 헤살대는 한겨울 햇살을 보라.
또 한해 물오른 그 아픔으로
허구한 낙엽들 겹겹이 되살아 푸르리니,
그대 슬프도록 찬란한 오월의
이울지 못할 모정 달래어
달빛 동심원 보얗게 내리던 그
홍자꽃 흐드러진 길섶에도 환영은 짙어라.
51.산나리 / 최영희
산나리
최영희
산에서 피는 꽃이라면 될 것을
혼자 피었다가
혼자서 지는 산꽃이면 될 것을
본 듯 만 듯
산 속에 두고 온
아껴서 두고 온
산나리
산에서 피는 꽃이라면 될 것을
기다림은 왜이며
안타까움은 왜일까
제자리에 피는 꽃
산에서 피는 꽃이라면 될 것을.
52.바람이 사는 집 / 최정희
바람이 사는 집
최정희
강가 억새밭엔 바람 잘 날 없다.
바람은 수시로 억새밭 드나들며 그녀를 흔들고
그럴 때마다 바람이 흔드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리지만
쓰러졌다가도 그대로 눕는 법이 없다
그녀가 노래 부르면 금세 순해지는 바람
약한 것은 그녀가 아니라 바람이다.
강한 바람엔 잠시 누워야만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걸
바람으로부터 터득하였기에, 바람이 사는 집엔
바람 따라 함께 흔들리는 억센 여인이 있다.
그렇게 흔들리며 자신을 키워 왔기에
늪에 빠져도 그녀의 뿌리는 좀처럼 썩지 않는다
바람이 후려쳐도 그녀의 몸은 좀처럼 꺾이지 않는다
술잔에 보름달이라도 뜨는 밤이면
바람은 그녀에게 쥐불을 놓기 일쑤라서
뿌리엔 항상 물을 머금고 있다.
제 몸 다 타버린 빈 먹지 위에서도 꿈틀꿈틀
올봄엔 어떤 사랑을 다시 할까.
53.벚나무 그늘아래 / 허말임
벚나무 그늘아래
허말임
봄날 화사하던 시절 떠나보낸 벚나무가
푸른 그늘을 만들고 있다
꽃 진 자리 송송 맺혔던 버찌도
어느새 떨어져 발길에 짓이겨졌는데
그 그늘 속으로 들어온 것은
노점상 트럭 한 대
사람들 오고가는 사거리 길목에서
그는 과일을 팔고 있다
체리 망고 바나나 바다 건너온 과일들
햇볕아래 팔리지 않고
자꾸만 익어가면 어쩌냐고
바다 건너 시집 온 그의 아내도
곁에서 마음만 종종 걸음이다
서툰 말씨에 몸만 달아올라
버찌처럼 송송 맺힌 그녀의 땀방울을
잎 속에 숨어 있던 체리보다 작은 버찌가
눈동자처럼 내려 보고 있다
그녀의 먼 그리움 같은 버찌도
한 알 깨물면 입안에
붉은 즙이 고일 것 같은 한낮
그늘은 점점 둥그러지고
그늘 아래서 익어가는
부부의 눈빛이 잠시 숨고르기 한다
54.환상통 / 허인혜
환상통
허인혜
찬이슬 축축한 지게 겉옷으로 걸치고
바수거리 가득 지고 나간 새벽별
묵정밭, 해종일 꾹꾹 파종 했지
이랑마다 수북수북 쌓아 올린 희망봉에
수수모종 깃발을 꽂았지
풀 섶에 벗어둔 고무신에 젖은 흙발을 꿰면
고여 있던 달빛이
그루밭고랑으로 출렁 넘쳐
촘촘히 새겨진 지문들을 덮었지
그 땅엔 흙냄새는 없고
진한 땀 냄새만 큼큼했지
육필로 낸 땅문서
개천에서 용 났다는 소문이 돌던 해
제물로 바쳐졌지
손맛이 다름을 알았는지 시름시름 앓던 텃밭
반신불수 된 아버지 따라
뚝 잘려나가 길이 되었다
안타까운 서로의 반쪽이 문신된 자식들
한 쪽이 늘 저리고 아프단다
유전이다
가족력이다
비가 오려나?
55.너에게 가는 길 / 홍경임
너에게 가는 길
홍경임
너에게 가는 길은
허무로 물든 길
어둠만이 깃든 고샅길
소나기 퍼분 후
하늘에 걸린 일곱 빛깔
무지개를 그리며 대숲 길을 달려가도
가슴을 열어 전율하며 가는
너에게 가는 길엔
보라색 절망의 열매 달린
너도밤나무 줄지어 서 있고
미래를 향해 날개 달고
갈대숲이 우거진 미로를 지나
바람 소리와 어둠과 공허만이
친구하는 회색 길
엉겅퀴 우거진 숲 속
은빛 사시나무 광풍에 떨고 있는
진눈개비 내리는 길 너에게 가는 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