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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5년 2월 19일 수요일
[(녹) 연중 제6주간 수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노아가 번제물을 바치자,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눈먼 이를 고쳐 주시고 집으로 보내시면서,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노아가 내다보니 과연 땅바닥이 말라 있었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8,6-13.20-22
6 사십 일이 지난 뒤에 노아는 자기가 만든 방주의 창을 열고 7 까마귀를 내보냈다.
까마귀는 밖으로 나가 땅에 물이 마를 때까지 왔다 갔다 하였다.
8 그는 또 물이 땅에서 빠졌는지 보려고 비둘기를 내보냈다.
9 그러나 비둘기는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노아에게 돌아왔다.
온 땅에 아직도 물이 있었던 것이다.
노아는 손을 내밀어 그것을 잡아 방주 안으로 들여놓았다.
10 그는 이레를 더 기다리다가 다시 그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보냈다.
11 저녁때가 되어 비둘기가 그에게 돌아왔는데,
싱싱한 올리브 잎을 부리에 물고 있었다.
그래서 노아는 땅에서 물이 빠진 것을 알게 되었다.
12 노아는 이레를 더 기다려 그 비둘기를 내보냈다.
그러자 비둘기는 그에게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13 노아가 육백한 살이 되던 해, 첫째 달 초하룻날에 땅의 물이 말랐다.
노아가 방주 뚜껑을 열고 내다보니 과연 땅바닥이 말라 있었다.
20 노아는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들 가운데에서
번제물을 골라 그 제단 위에서 바쳤다.
21 주님께서 그 향내를 맡으시고 마음속으로 생각하셨다.
‘사람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악한 뜻을 품기 마련
내가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
이번에 한 것처럼 다시는 어떤 생물도 파멸시키지 않으리라.
22 땅이 있는 한, 씨뿌리기와 거두기,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않으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눈먼 이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되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22-26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22 벳사이다로 갔다.
그런데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는
그에게 손을 대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23 그분께서는 그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 하고 물으셨다.
24 그는 앞을 쳐다보며,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5 그분께서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시니 그가 똑똑히 보게 되었다.
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된 것이다.
26 예수님께서는 그를 집으로 보내시면서 말씀하셨다.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벳사이다, 복음서의 서두부터 우리에게 익숙한 지명입니다. 바로 처음 부르심을 받은 사도들,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의 고향입니다. ‘어부의 집’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이 마을에서 사도들은 사람 낚는 어부로 세상에 파견됩니다. 그런데 이 사도들의 마을에 눈먼 이가 있습니다. 예로니모 성인은 사도들의 고향을 눈멂이 다스리고 있다고, “눈먼 이”(마르 8,22)는 사도들의 마을에 살고 있던 유다 백성이라고 풀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고쳐 주시기 전에 먼저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눈멂이 지배하는 마을에서 그를 떼 내시는 것입니다.
그가 똑똑히 보게 된 뒤에 그를 집으로 보내시면서도 마을로는 들어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집이 마을 안에 있는데도 말입니다. 이는 우리가 새롭게 태어나려면 그때까지 몸담고 있던 어둠의 세계를 떠나야 하고, 다시는 그 어둠의 세계로 돌아가지 말아야 함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기적과 치유 방식은 대상과 상황에 따라 다양합니다. 직접 만나시지도 않고 먼 곳에서 말씀 한마디로 간청하는 이의 신앙을 시험하신 뒤, 본인이 아닌 주변 사람들의 요청에 따라, 또는 나인의 과부에게 하신 것처럼 요청 없이 기적을 행하십니다. 대부분의 기적은 한 번에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치유가 단계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회개와 새롭게 태어남도 바오로 사도처럼 한순간의 강력한 체험으로 이루어지는가 하면 더 많은 경우에는 단계적으로 계속해서 이루어집니다. 점차 어둠에서 멀어져 빛으로 다가가는 여정인 것입니다.(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하느님은 우리를 구조해주시는 분이 아니라 구원해주시는 분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다가오는 사순시기, 예수님께서 몸소 겪으셨던 수난과 십자가 죽음의 신비에 대한 깊이 있는 묵상으로 우리를 안내할 따끈따끈한 영적 독서책이 막 도착했습니다. 제목이 특별합니다. ‘나를 구하시지 않는 하느님’(로널드 롤 하이저 著, 생활성서)입니다.
로널드 롤 하이저 신부님은 오블라티 선교 수도회 소속이시며 헨리 나우웬 신부님 이후 대표적인 가톨릭 영성 작가로 손꼽히고 있는 영성가이십니다.
고통과 십자가에 대한 저자의 성숙하고도 친절한 안내가 돋보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고통을 면제하시지 않은 것처럼, 예수님도 우리의 고통을 면제해주시지 않는답니다. 너무나 신박한 표현들 앞에 개인적으로 깜짝 놀랐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구조해주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굴욕과 고통, 죽음에서 우리를 구해 주시려 개입하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일이 벌어진 후에 굴욕, 고통, 죽음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병에 대한 면역을 만들어 주시고 죽음을 피하게 해주신다고 약속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의롭게 하시며 고통을 감내할 힘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일은 우리 삶의 마지막에 일어날 일들입니다. 우리는 삶의 여정에서 다른 모든 이가 겪는 굴욕과 고통, 그리고 죽음을 똑같이 겪을 것입니다. 십자가와 예수님의 부활은 구조하시는 하느님 아니라 구원하시는 하느님을 보여줍니다.”
부끄럽게도 우리 한국 교회 안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예수님 인류 구원 사업의 정점인 골고타 언덕으로 올라가는 고통스런 여정은 생략하고 싶습니다. 그저 현세의 지속적인 축복과 끝도 없는 치유, 나와 내 가족만의 안녕만을 갈구하는 미성숙한 신앙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가슴 아픈 사회 현실은 외면한 채 고상함과 경건함, 신비함과 달콤함만을 추구하는 ‘값싼 신앙’의 천박한 그림자가 남아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고통과 십자가는 외면하고, 승승장구와 만수무강만 추구하는 싸구려 신앙을 거부해야겠습니다. 고통과 십자가 없는 구원은 기대조차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 가톨릭 교회의 분위기나 가르침은 조금 밋밋해보입니다. 가톨릭 교리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통상적이어서 그렇습니다. 이성적이고 평범한 것이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실 보편적이고 인간적인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모릅니다.
우리 가톨릭교회에서는 고통스럽고 부당한 현실, 단박에 뒤집힐 것이라고 외치지 않습니다. 우리 눈앞에 신천지가 나타날 것이라고 사기 치지 않습니다. 지금 겪고 있는 이 끔찍한 병고 즉시 치유시켜 주겠노라고 과장하지 않습니다. 목돈을 갖고 오라고 협박하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 가톨릭교회는 고통스럽고 부당한 현실 앞에서도 너그러운 마음을 지니자고 초대합니다. 기도 속에 주님의 뜻을 찾아보자고 안내합니다. 호의적이지 않은 이 현실,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이자고 가르칩니다. 천천히 가자고, 인간의 때가 아니라 하느님의 때를 기다리자고 권고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눈먼 이를 치유하십니다. 그 과정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를 군중 사이에서 따로 불러내십니다. 세상 다정하게 그의 손을 잡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그리고 이런저런 접촉과 함께 그의 장애를 풀어주십니다.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손을 얹으십니다. 그의 머리 위에 손을 펼쳐 안수를 해주십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등 자상하게 이것저것 물어봐 주십니다.
치유받은 사람입장에서 묵상해보니 얼마나 은혜롭고 축복된 순간이었는지. 놀랍게도 주님께서 나를 선택하셨습니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으셔도 될 일인데, 그분께서 내 손을 잡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가십니다. 가는 길에 이것 저것 물어봐 주십니다. 이름이 뭐냐? 어디 사는가?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는지? 그간 살아오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예수님의 따뜻함과 자상함에 그의 눈에서는 쉼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예수님과 손을 잡고 마을 밖으로 걸어가는 그 짧은 순간, 이미 그는 모든 것을 다 얻었습니다. 깨달았고, 치유 받았습니다. 구원받았고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육체의 치유는 사실 덤이었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설날에 반가운 메일을 받았습니다. 잠시 메일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찬미 예수님! 안녕하세요. 신부님. 육군 장교로서의 직업군인 생활을 정리하고 2018년 신학교에 입학한 게 엊그제 같은데 제가 다음 주 2025년 2월 6일 목요일 오후 2시, 명동성당에서 부제 서품을 받게 되었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입학하기 전 성소에 대한 고민을 지니고 있을 때, 성소 국장 신부님께서 성소국 홈페이지에 올려주는 오늘의 묵상 말씀이 직업군인으로서의 군 복무 생활을 그리스도인으로서 기쁘게 생활하는데 큰 도움이 되곤 하였습니다. 성소국 홈페이지에 상담 글을 남기면 답변도 주시며 휴가 내어 종종 성소국에 방문하면 차 한 잔 주시면서 상담해 주시던 국장 신부님, 그리고 예비신학교에서도 함께 용기에 불어 넣어 주시던 가브리엘 신부님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제 인생에서 그리스도를 전해주심과 동시에 거룩한 부르심에 대한 내비게이션의 역할을 해주셨던 신부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이제 곧 부제 서품을 받게 되면 성직자가 되는데 더욱 기쁜 마음으로 직무에 충실하고, 사제직을 향해 더욱 기쁘게 나아가겠습니다. 신부님께서 지금 미국 댈러스 한인 성당에서 사목하시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먼 곳에서 늘 건강과 기쁨, 은총 가득해지시길 기도드리며 저도 더욱 기쁘게 정진하고 있겠습니다. 한국은 설날이네요! 2025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부족한 제가 젊은 군인에게는 ‘마른 땅’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을 닮은 사람을 창조하셔서 이 세상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컴퓨터에 바이러스가 들어오면 작동이 잘되지 않듯이 하느님을 닮은 사람에게도 ‘사탄’이라는 바이러스가 들어왔습니다. 그 바이러스는 하느님을 닮은 사람의 마음을 병들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고, 전쟁과 폭력으로 하느님이 창조한 세상을 파괴하고, 타락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물의 심판’으로 병든 세상을, 타락한 세상을 다시 회복시키려 하셨습니다.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도록 하셨고 물의 심판이 끝난 후에 하느님께서는 노아에게 새로운 세상을 맡겨 주셨습니다. 40일 동안 방주에 있던 노아는 넓은 세상이 그리웠습니다. 40일이 지난 후에 노아는 방주의 뚜껑을 열고 까마귀를 날려 보냈습니다. 까마귀는 물밖에 없는 곳을 한참이나 날다가 돌아왔습니다. 노아는 이번에는 비둘기를 날려 보냈습니다. 비둘기는 올리브 잎을 하나 가지고 왔습니다. 노아는 이제 물이 빠지고 땅이 조금씩 드러난 것을 알았습니다. 노아는 다시 비둘기를 날려 보냈고, 비둘기는 이제 마른 땅에 머물며 배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비둘기에게 마른 땅은 새로운 삶의 보금자리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심판하는 방법을 포기하셨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박탈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대신에 하느님께서는 새로운 방법을 찾으셨습니다. 그것은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는 것입니다. 외아들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거룩함과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세상을 말씀하셨습니다. 전쟁, 폭력, 정복으로 이루어지는 평화가 아닌 나눔, 희생,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참된 평화를 말씀하셨습니다. 성공, 명예, 권력으로 이루어지는 행복이 아닌 자비, 인내, 희생으로 이루어지는 행복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의 나라를 체험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인간의 죄와 인간의 잘못 때문에 세상을 심판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가라지를 뽑으려다가 밀을 뽑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밀과 가라지는 품종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가라지의 모습일지라도 뉘우치고 회개하면 밀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은 밀의 모습일지라도 악의 유혹에 빠지면 가라지가 될 수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옹기장이와 진흙’의 비유를 이야기합니다. 옹기장이 손에 있는 진흙은 무엇이 될지 모릅니다. 다만 옹기장이의 뜻에 따라서 화병도 되고, 그릇도 됩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화병이든, 그릇이든 쓰임새에 맞게 사용되면 됩니다. 주어진 나의 삶에 감사한다면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 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셨고, 소경은 이제 새로운 세상을 보았습니다. 욕망과 교만으로 닫혀있는 우리의 눈을 순명과 겸손으로 새롭게 뜰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네.”
<밖으로 나오시게나>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분께서는 그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다.”(마르 8,23ㄱ)
“예수님께서는 그를 집으로 보내시면서 말씀하셨다.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마르 8,26)
있지 못함이
오히려 있음인 사람아
참으로 있고 싶거든
지금 있는 것
밖으로 나오시게나
보지 못함이
오히려 봄인 사람아
참으로 보고 싶거든
지금 보는 것
밖으로 나오시게나
듣지 못함이
오히려 들음인 사람아
참으로 듣고 싶거든
지금 듣는 것
밖으로 나오시게나
말하지 못함이
오히려 말함인 사람아
참으로 말하고 싶거든
지금 말하는 것
밖으로 나오시게나
느끼지 못함이
오히려 느낌인 사람아
참으로 느끼고 싶거든
지금 느끼는 것
밖으로 나오시게나
알지 못함이
오히려 앎인 사람아
참으로 알고 싶거든
지금 아는 것
밖으로 나오시게나
믿지 못함이
오히려 믿음인 사람아
참으로 믿고 싶거든
지금 믿는 것
밖으로 나오시게나
희망하지 못함이
오히려 희망인 사람아
참으로 희망하고 싶거든
지금 희망하는 것
밖으로 나오시게나
사랑하지 못함이
오히려 사랑인 사람아
참으로 사랑하고 싶거든
지금 사랑하는 것
밖으로 나오시게나
살지 못함이
오히려 삶인 사람아
참으로 살고 싶거든
지금 사는 것
밖으로 나오시게나
오늘의 성인
성 콘라도(Conrad)
신분 : 자선가, 3회원
활동지역 : 피아첸차(Piacenza)
활동연도 : 1290-1354년경
같은이름 : 콘라두스, 콘라드, 콘래드
성 콘라두스(Conradus, 또는 콘라도)는 이탈리아 귀족 가문 출신의 기혼자였다. 어느 날 그는 사냥을 나갔다가 관목에 불을 지르는 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강풍이 휘몰아쳐서 옥수수 밭을 비롯하여 인근 마을까지 불태우는 불상사로 번졌다. 일이 이렇게 되자 그는 어느 가련한 사람이 방화한 것으로 거짓 증언을 하여 그에게 사형까지 언도되었다. 그러나 그 때 그 사람이 모든 사실을 폭로하여 콘라두스는 치명적인 명예 손상과 재산을 잃게 되었다. 이 사실을 심각하게 또 정직하게 반성하게 된 그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섭리임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그는 수하 사람들을 해방시켰음은 물론 아내도 클라라회에 입회하도록 주선했고 또 자신은 작은 형제회 재속 3회원이 되어 은수자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시칠리아(Sicilia)를 지나 노토(Noto) 계곡에 당도하여 30여 년 동안 살았다. 만년에 그의 영성은 높은 경지에 도달하였고, 피초니(Pizzoni)에서 그가 원하던 대로 보다 고적한 생활을 하였다.
성 콘라두스 자신은 숨은 생활에 원했지만 그의 성덕이 워낙 뛰어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도움과 지도를 받기 위해 몰려들었다. 임종하기 얼마 전에 그는 주교를 방문하여 고해성사를 본 후 다시 노토 계곡으로 돌아와서 새들과 야생동물들을 벗 삼아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그의 장례식은 성 니콜라우스(Nicolaus) 성당에서 거행되었고, 그의 무덤은 순례의 중심지가 되었다.
성 메스로프 (Mesrop)
신분 : 주교
활동지역 : 아르메니아(Armenia)
활동연도 : +441년경
같은이름 : 메쓰로프
아르메니아의 타론(Taron)에서 태어난 성 메스로프 마쇼츠(Mesrop Mashtots)는 장성한 후 아르메니아의 정부 관리가 되었으나 마음을 바꾸어 은수자가 되었다.
그는 성 대 나르세스(Narses, 11월 19일)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선교활동의 일환으로 그리스어, 시리아어 그리고 페르시아어를 공부하는데 전념하여 그 분야의 권위자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성 대 이사악(Isaac, 9월 9일)과 합류하여 아르메니아 선교활동의 선봉장이 되었음은 물론 아르메니아어의 알파벳 구성에 크게 기여하였고, 신약성서와 잠언서를 아르메니아어로 번역하였다.
또한 그는 아르메니아와 그루지야(Georgia)에 학교를 세웠으며, 그루지야 알파벳을 창제하였고, 죽을 때까지 발라르샤파트(Valarshapat)에서 설교하였다.
그는 80세를 넘기고 선종하였는데 '선생님'이 그의 별명이었다.
이는 그의 탁월한 교육 활동 때문이었다.
주교였던 것으로 전해지는 그는 때때로 메스로브(Mesrob)로도 불린다.
그의 예전 축일은 11월 25일이었다.
성 만수에토 (Mansuetus)
신분 : 주교
활동지역 : 밀라노(Milano)
활동연도 : +690년
로마에서 태어난 성 만수에투스(또는 만수에토)는 672년경 이탈리아 밀라노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열성과 지혜로써 교구를 사목했으며, 그리스도 단의론(Monotheletism)에 대항하는 논문을 작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