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 시 지
Byun, Shi Ji
韓國性의 完成으로 世界的 스타덤에 오른
暴風의 老畵家
김남수 / 미술평론가
지금 우리들에게는 한국미술의 세계화라고 하는 중요한 과제가 우리 미술인들 앞에 가로 놓여있다. 한국미술의 개방은 미술을 통한 나라간의 장벽이나 경계가 무너졌음을 의미하며 어설픈 몸짓이나 서툰 제스츄어 가지고는 살아남기 힘든 세계질서의 미술환경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지난날 동서간의 소통이 어렵고 정보가 차단되었던 시대에 남의 것 흉내를 내거나 표절을 하는 등 문화적 아류가 기승을 부렸던 시대는 이제 종언을 한 것이다.
지금 한국미술은 국제경쟁력에서 살아남기 위한 도전과 시련을 동시에 맞고 있다. 한마디로 그들을 이길 수 있는 최후의 승부수는 그들과 공존할 수 있는 ‘한국성’이라고 하는 독보적인 예술양식의 완성 이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 서양화단에서 현역작가로 한국성을 추구하는 대표적인 화가로 원로화가 변시지 화백을 들 수 있다. 본란이 표지작가로 원로 서양화가 변시지 화백을 선정한 것은 이미 세계의 유명작가들과 함께 인터넷 망 등 사이버아트 갤러리 등에 널리 소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떠나가는 배 A leaving boat> 31.8 x 39.4 cm 1996
邊時志화백의 최근 핫 뉴스
한국산업은행(총재 유지창)은 지난 5월 13일부터 17일까지 제 37차 ADB(아시아개발은행) 연차총회를 제주국제컨벤션센터에서 가졌었다. 세계 70개국의 재무장관, 중앙은행총재, 국제금융 및 투자은행, UN산하 WTO(세계무역기구)와 ILO(국제노동기구) 관계자 등 3천500여명의 금융계 인사들이 참가하는 금융올림픽이라 불리는 이 세계적 행사에 주최측은 우리나라의 문화예술을 소개하는 일환으로 가장 동양적이고 가장 한국적인 화가의 작품화집 ‘BYUN SHI JI'를 1천권 제작을 하여 선물로 증정을 했다. 국제자유도시인 제주의 풍물을 소재로한 대표작들이 소개된 이 화집은 화가 ‘변시지’화백을 전세계에 홍보하는 절호의 기회가 되고 있다.
<거친 파도 A roaring> 39.4 x 53 cm 1984
<하염없는 걸음 Weary walk> 31.8 x 39.4 cm 1987
<고뇌 Deap agony> 50 x 60.6 cm 1983
<고향 Home> 33.4 x 24.2 cm 1985
이번 화집에는 일본에 유학시절 공모전 등에서 수상한 작품, 인물화와 풍경화, 60년대 서울 비원파(장리석, 손응성 등)로 활동했던 시절의 작품들이 소개되고 있다. 변시지화백은 1948년 일본의 가장 권위있는 공모전 단체의 하나인 제34회 광풍회(光風會)전에서 최연소 최고상을 수상하여 지금까지 56년 동안 정회원으로서 출품을 해오고 있다. 이번 화집에는 황토빛으로 물든 제주의 풍경 40여점이 수록되어 있다. 외국 손님들에게 선물로 전해진 이 화집은 갖고져 하는 희망자들이 많아 주최측은 제2판 추가제작을 하고 있다고 한다.
韓國의 元老畵家 邊時志,
세계의 畵聖 21명과함께 웹사이트에 登場
'나는 누구일까요, 나는 뭘 하는 사람일까요'라는 웹 사이버 퀴즈 설문요지를 미국 미시간 대학이 학생들의 문화지식 학습을 위해 내 놓았다. 학생들을 그룹으로 나누어 학급에서 배운 문화적 주제나 인물과 관련한 사항을 인터넷 사이버로 설문을 던져 예/아니오(yes/no)로 답변을 하는 게임이 화제가 되고 있다. 인물을 설정한 학생은 예, 또는 아니오,로 답변하고 이 때 다른 정보를 유출하면 아니 되고 남은 학생들이 설정한 인물의 정체를 알아내면 다른 학생이 다시 인물을 설정하고 질문을 받는다. 상대그룹이 설정한 인물을 모두 밝혀내는 팀이 이긴다. 미시간 대학의 쥴리엔 월터스씨가 제공해준 자료에 의하면 게임 당일 채팅 방을 개설한다(한 방에 학생 3~4명). 누가 먼저 인물을 설정할지 정한다. 채팅 방에 올라온 알파벳 순으로 해도 좋다. 남은 학생들은 인물에 대한 질문을 시작하고 설정한 인물은 예,/아니오,로만 답변한다.채팅 룰이 ‘스레드’일 경우 학생들은 순서를 기다릴 필요없이 질문하고 ‘논스레드’일 경우 순서를 기다려 질문을 하고, 대답을 들은 후 다음 질문을 보낸다. 대답은 예,/아니오,로 간단히 하되 질문에 상응하지 않는 대답을 하게 되는 경우 대화를 지속할 수 없다. 상대의 설정인물을 가장 빨리 맞추는 그룹이 승리를 하게 된다.학생들의 작업노트에는 인물에 대한 아래와 같은 정보를 적어 놓는다. 또한 좋은 정보를 찾을만한 웹사이트 목록도 적어두는 것이 좋다.
예를 들면 이름, 성별, 국적, 사망일, 직업, 장르, 주제, 내용, 이주, 주요약력, 그밖에 중요한 정보 등이 화가에 대한 설문요지다. 비록 인터넷의 채팅방법을 원용하고 있지만 문화와 관련한 학습효과가 크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예술가에 대한 월드 웹 정보로는 다음과 같은 주소가 있다. 인터넷 예술사(C화이트콤브), 보스턴대학 인터넷 관련 링크, 엔카르타 프랑스, 엔카르타 스페인 백과사전, 동 이타리아, 독일 등 그 수효가 많다. 인터넷 사용어로는 네덜란드어, 프랑스어, 일본어, 포루르칼어. 스페인어 등으로 소개되고 있다.
이번 사이버상에 설정된 인물의 프로필을 살펴보면 중세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름 그대로 세계의 화성들이 소개되고 있다. 레오나르드 단빈치, 미켈란젤로, 바크, 보쉬, 살바드로 달리, 알바트 뒤러, 엘 그레코, 칸딘스키, 프리다 칼로, 틀루즈 로트렉, 호앙 미로, 조지아 오키프, 파블로 피카소, 르느아르, 디에코 리베라, 로댕, 틴토레토, 한국의 변시지, 일본의 카츄시카 후쿠사이 등이 소개되고 있다.
<그리움 Yearning> 72.7 x 91 cm 1988
<기다림 Waiting> 45.5 x 60.6 cm 1992
<꿈 Dream> 24.3 x 33.4cm 1991
世界의 有名 인터넷 사이트에
100大作家와 함께 邊時志 화백 登場
지난 1997년 원로 서양화가 변시지 화백은 세계적인 유명화가들과 함께 외국의 유명 인터넷에 그의 작품이 전시되어 한국화단은 신선한 충격과 함께 큰 감동을 불러 이르켰다. 지금으로부터 7년전인 미국의 세계적인 인터넷 사이트인 '야후(YAHOO)'에 변시지 화백이 세계 100대 화가로 소개되면서 한국 미술계의 비상한 관심과 눈길을 끌었다. 또한 미국의 인터넷 라인인 ‘Best Art.Com'에 피카소, 반 고흐 등과 함께 소개됐으며, 그 후 프랑스의 유수한 인터넷 사이트인 ’www. ifrance.com'에 고흐, 모네, 밀레 등과 함께 소개됐으며, 세계 유명화가 17명의 ‘가을작품’을 소개하고 있는 이 아트 사이트는 그가 일본에서 귀국후 70년대 초 서울의 ‘비원파’시절 그린 비원의 <가을풍경>이 소개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미국의 인터넷 사이트인 www.inter-art.com에도 80년대의 작품 <콜로세움>이 소개되기도 했다. 이토록 변시지 화백의 작품세계가 7,8년 전부터 세계 각국의 인터넷 사이버 아트 창에 집중적으로 소개되고 있는 것은 비록 작가가 추구하고 있는 것이 유재 등 서양의 것을 사용하고 있지만 동양인으로서의 예술양식, 특히 한국인으로서의 한국성을 지향하는 극명한 정신주의와 주제가 세계예술의 질서와 맞아 떨어짐으로서 국제적 공감대를 얻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동안 한국미술은 아트페어나 파리 견본시장, 비엔날레 등을 통하여 간헐적으로 혹은 단발로 끝나는 몇 몇 작가들이 없지 않았지만 거게가 이벤트성으로 끝나버린 것이 아쉬운 점이었다.
邊時志의 作品世界
그의 예술세계가 국내는 물론이요, 세계의 관심을 끌고 있는 이유는 지난 74년 중앙화단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인 제주로 금의환향, 제주대학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기 시작한지 불과 3년 만인 77년, 그의 작품세계는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그에게 항상 고향을 그리워하는 잠재력이 어딘가에 자리잡고 있었겠지만 지금까지 작업 해 온 그의 소재나 대상, 작품의 주제나 정신주의 등이 제주풍경으로 환치(換置)되는 등 극적인 변화의 순간을 맞게 된 것이다. 매너리즘이나 한 가지 패턴에 안주하고 있는 다른 대가들에 비교하면 가히 놀랄만한 것이었으며 유화의 세계에서도 작가 변시지화백처럼 극적인 변신이 가능함을 실증으로 보여준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신선한 충격이요, 아카데미즘이나 사실주의 기초수업이 튼튼한 바탕이 되어 오늘의 작가로 새롭게 태어나는 계기가 되었든 것이다
<나그네 A vagabond> 24.3 x 33.4 cm 1990
훌륭한 예술인의 탄생은 한 세기 동안에
한 두명이 배출된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적 경험을 통하여 알고 있다.
본란에서 표지작가로 선정된 변시지 화백도
훗날 미술사학자들이 올바른 평가를 하리라고
기대하지만 한국의 화단사에 변시지 화백 만큼
세계시장과 국제미술계가 세계적인 미술가로
평가했던 일은 일찍이 없었던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아열대성 남극의 정취가 물씬 밴 제주는 아스팔트문명의 산물인 공해와는 전혀 절연된 깨끗한 풍토적인 환경과 분위기, 그들만의 순결무구한 삶이 전개되고 있다. 제주가 고향이면서 바쁜 나날의 망각 속에 살아 온 작가 변시지화백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향수와 애정 때문에 새삼 발견한 것은 황토빛깔의 완만하게 굴곡이 진 밭이랑과 화산질로 된 구멍이 쑹쑹 뚫린 검은 바위돌, 나지막이 두른 돌각담, 완만한 해안선과 모래톱, 남태평양에서 불어오는 짜릿한 바다 바람, 제주 토종의 조랑말, 물질하는 해녀, 붉고 검은 부석돌이 쌓여 만들어진 곳자와 길, 한라산을 정점으로 밋밋하게 흘러내린 구릉지대, 이글이글 타오르는 남극의 태양, 멀리 수평선 위에 떠 있는 고깃배, 등 작가의 시계에 들어오는 자연환경은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는 작가의 소증한 소재요 피사체 였다. 사실 작가의 마음속에 비친 제주의 풍광은 그 이상 아름다울 수가 없었으리라. 격정적인 시정(詩情)과 시상(詩想)이 떠오른 시인(詩人)이 시를 읊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듯이 작가 변시지화백은 제주의 아름다운 풍광에 도취되어 그 풍물시를 회화로 조형화 한 것이다.
<해촌 A village by the sea> 50 x 65.1 cm 1980
특히 작가의 자화상을 메타포로 이미지화 한 가끔 허리를 구부리고 있는 노인의 모습, 단장을 짚고 외롭게 걷는 더벅머리 사내의 모습, 모래사장이나 해안가에 앉아 이젤을 세워 놓고 몰아경에 빠져 그림을 그리는 점중인물(點中人物), 낚시를 드리운 노옹의 태공망의 풍경은 그 모두가 작가의 자화상이자, 이미지로 체험한 상상의 세계였다. 이 작품 속에는 작가의 숭고한 염원과 최상의 기도가 농축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일련의 소재들이 작가의 심상으로 재구성되어 회화로 표출되고 있는 것은그 표현의 방법론과 양식에서 변시지화백만의 독보적인 경지요, 오리지날리티이며, 그 누구도 닮지 않은 그만의 자유의 미학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행여 그의 화폭 속에 불필요한 덧살이나 췌육이 딱지딱지 장황한 설명으로 가해진다면 그 작품의 순수성에 훼손이 갔을 것이다. YAHWOO 등 인터넷 사이버 갤러리에 변시지화백이 세계100대 화가로 등장을 한다던지, 파리나 유럽 등지의 웹아트 사이트 등에 그가 선택되어 소개되고 있는 점은 우리 한국미술의 쾌거요 국가적으로도 엄청난 기여를 하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정부의 차원에서 국가적으로 유능하고 국익에 크게 기여할 수 있는 가능성과 잠재력이 있는 원로화가들을 정책적으로 지원함으로서 해외진출을 통한 한국미술의 세계화등 재원상의 많은 투자 등 정부나 국가가 해야할 과제들이 화급을 요하고 있다. 즉 세계의 아트페어나 세계의 경매시장에 출품과 상장 등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으므로서 세계속의 한국미술은 21세기 외화가득의 전략적인 문화예술사업으로 자리매김을 해야하는 것이 당면한 초미의 과제가 아닌가 생각한다.
<Portrait of nemo> 110 x 80 cm 1951
<환상 An illusion> 24.2 x 40.9 cm 1991
<폭풍의 바다 Sea of the storm> 91 x 116.8 cm 1993
結 論
21세기 정보화시대는 IT산업 못지 않게 문화예술이 나라마다의 중요한 국가의 전략산업으로서 재충전의 기회를 다져가고 있다. 미래학의 석학들은 문화예술이 그나라의 부를 측정하는 패러다임으로 바뀌어가고 있음을 예고하고 있다. 우리는 비록 조상에게 물려받은 5000년의 역사를가지고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문화예술의 후진국으로서의 굴레를 벗지 못하고 있다.
훌륭한 예술인의 탄생은 한 세기 동안에 한 두명이 배출된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적 경험을 통하여 알고 있다. 본란에서 표지작가로 선정된 변시지 화백도 훗날 미술사학자들이 올바른 평가를 하리라고 기대하지만 한국의 화단사에 변시지 화백 만큼 세계시장과 국제미술계가 세계적인 미술가로 평가했던 일은 일찍이 없었던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비록 양화의 장르를 탐구하는 원로 화가지만 그의 작품의 주제나 정신주의는 한국성의 추구, 토속적이고 풍토적인 작가만의 사투리적인 예술양식을 천착함으로 성공한 예술인이 아닌가 생각한다.
作家의 行蹟
변시지화백은 1926년 제주도 서귀포시에서 출생했다. 선친과 함께 도일, 45년 오사까 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그 후 동경의 데라우찌만지로(寺內萬治朗) 문하에 들어가 수학했고 아테네 프랑세즈 불어과에 입학했다. 48년 23세의 최연소의 나이로 제34회 광풍회전에서 최고상을 수상하여 일본 미술사상 전무한 일로 NHK는 톱뉴스로 한 주간 특집방송을 내보냈다. 49년 도꾜 긴자 시세이도 화랑에서 제1회 개인전을 가졌고, 51년과 52년 광풍회전 심사위원을 지냈다. 56년까지 광풍회 정회원으로서 출품한 그는 57년 영구 귀국길에 올랐으나 2004년까지 광풍회전 정회원으로서의 작품을 출품해오고 있다. 60년 서라벌예대 미술과 과장으로 초빙되었고 이해 서울미대 동양화과 출신의 이학숙여사와 결혼했다. 75년 제주대학교 사범대학 미술과 전임, 86년 ‘화가 변시지’ 열화당 출간, 94년 서귀포시민상, 97년 서귀포기당미술관에 변시지상설전시실 개관, 동 명예관장 등을 역임했다.
그의 예술양식은 10년 내지 20년의 텀을 두고 변화를 해왔다. 가령 57년 귀국하기까지의 일본에서의 작품활동, 75년 고향인 제주도로 귀향하기 까지의 서울에서의 작품활동, 그리고 지금의 제주에서의 활동이 그것이다.
<거친 바다 Rough sea> 162.2 x 130.3 cm 1983
서울에서 작업했던 경향들은 이른바 비원파, 혹은 고궁파로 불리워지는 자연의 실상을 리얼하게 묘사했던 아카데미즘의 화풍이었다. ‘경회루’와 ‘애련정’, ‘향온정’, ‘반도지(半島池)’, ‘미용정’등의 고궁을 극사실, 극세필, 극채색으로 집중적인 묘사를 했다. 이 시기에 동료작가로서는 손응성, 장리석, 등 훗날 한국 화단을 빛낸 구상계열의 엘리트들이었다.인물화 가운데서도 특히 좌상을 연작으로 발표했던 그는 47년작 <여인>, 48년에 완성한 <베레모의 여인> <바이올린을 가진 남자> <상> 그리고 중반에 그린 <네모의 상> <여인> <여인과 연인> <남자> <K씨의 상> 등이 있었다. 당시 그의 귀국전을 보고 쓴 평문에서 시인 조병화氏는 ‘소박하면서 단조로운 통일 가운데 고요히 가라앉은 윤택한 시심과 탁하지 않은 맑은 빛과 색이 러프한 화면의 굴곡을 타고 흐르는 깊은 뉘앙스의 폭은 먼 거리를 타고 비쳐 오르는 아름다움을 우리들 앞에 보여주고 있다’ 라고 평한 것은 문인의 눈에 비친 그의 예술의 특징과 세련미를 압축해서 설명하고 있다.
<폭풍의 바다 Sea of the storm> 162.2 x 130.3 cm 1988
<Memory of the sea> 50 x 125 cm 1995
<Portrait of Shi Guan> 110 x 83 cm 1949
<한라산 Mt. Halla> 39.4 x 27.4 cm 1996
<폭풍의 바다 Sea of the storm> 92 x 116.8 cm 1988
<지루한 사간 Dull time> 91 x 116.8 cm 1991
<소년과 조랑말 A pony and a boy> 116.8 x 91 cm 1992
<Road in Autumn> 60.6 x 53.5 cm 1970
<이어도 - 죽은 어부의 노래 A song of dead fisherman> 17 x 29.5 cm 198
<오름 Hill(parasitic vdcano)> 31.8 x 40.9 cm 1989
<어둠속의 폭풍 Storm in the dark> 45.5 x 53 cm 1991
<서귀포 풍경 The scenery of Seagwipo> 162.2 x 130.3cm 1988
<생각 A thought> 45.5 x 53 cm 1980
변 시 지
Byun, Shi Jee
世界의 有名 인터넷 사이트에서 公認받고 있는
暴風의 畵家 邊時志
김남수 / 미술평론가
원로 서양화가 우성(宇城) 邊時志의 작품세계가 세계적인 유명작가들과 함께 외국의 유명 인터넷에 그의 작품세계가 전시되어 한국화단에 화제를 모으며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 그의 예술세계는 4년 전 미국의 세계적인 인터넷 사이트인 '야후(YAHOO)'에 세계 100대 화가로 소개되면서 한국미술계의 비상한 관심과 눈길을 끌기 시작했다. 이어 미국의 인터넷 라인인 'Best Price Art. com'에 피카소, 빈센트 반 고흐 등과 함께 소개 됐으며, 최근에는 프랑스의 유수한 인터넷 사이트인 'www.ifrance.com' 에 역시 고흐, 모네, 밀레 등과 함께 소개되고 있다. 세계의 유명화가 17명의 가을 작품을 소개하고 있는 이 아트 사이트는 그가 70년대 초 일본에서 귀국한 후 서울에서 일명 '비원파'에 속해 작품활동을 하고 있었던 당시 그린 '비원'의 가을풍경이 소개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변시지는 최근 미국의 인터넷 사이트인 'www.inter-art.com에도 80년대의 작품 <콜로세움>이 소개되고 있다.
<폭풍의 바다 13> 112.1 x 162.2cm 캔버스에 유채1990
이토록 변시지의 작품세계가 4년 전부터 세계의 각 인터넷 사이버 아트 창에 집중적으로 소개되고 있는 것은 비록 양화이기는 하지마는 동양인으로서의 예술양식, 특히 한국인으로서의 향토성이 물씬 농축된 독창적인 조형세계가 세계의 예술양식과 공존할 수 있고 접목이 가능한 우수성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동안 국제교류전, 혹은 아트페어나 해외 견본시장 등에서 한국미술이 가끔 소개되어 일부의 원로나 중진작가들이 각광을 받은 사실이 있었지만 세계의 인터넷망을 통하여 한국의 화가가 세계의 인터넷 사이트에 집중적으로 소개되고 있는 것은 변시지가 처음이 아닌가 싶다.
일명 폭풍의 화가로 알리어진 한국화단의 원로 변시지의 작업경륜은 반세기가 훨씬 넘는다. 그의 예술양식은 10년 내지 20년의 텀을 두고 변화를 해왔다. 가령 57년 귀국하기까지의 일본에서의 작품활동, 해방후 서울에서의 극사실주의를 추구했던 비원파의 동인들과의 활동, 75년 교향인 제주도로 귀항하기까지의 작품활동, 그리고 지금의 제주에서의 활동이 그것이다.
<폭풍의 바다 8> 112.1 x 162.2cm 캔버스에 유채 1990
<폭풍의 바다 6> 80.3 x 116.8cm 캔버스에 유채 1991
<폭풍의 바다 5> 80.3 x 116.8cm 캔버스에 유채 1991
서울에서 작업했던 경향들은 이른바 비원파, 혹은 고궁파로 불리워지는 자연의 실상을 리얼하게 묘사했던 아카데미즘의 화풍이 그것이다. .<경회루> <향온정> <반도지> <애련정> <부용정> 등의 고궁을 극사실, 극세필, 극채색으로 집중적인 묘사를 했던 시기에 동료작가로서는 손응성, 장리석 등 훗날 한국화단을 빛낸 구상계열의 엘리트들이었다. 인물화 가운데서도 특히 좌상(坐像)을 연작으로 발표했던 그는 47년작 <여인>, 48년에 완성한 <베레모의 여인> <바이올린을 가진 남자> <상>, 그리고 51년 중반에 그린 <네모의 상> <여인> <등잔과 여인> <K씨의 상> <남자> 등이 그것을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일본 유학시절 인물을 소재로한 집중적인 탐구가 변시지 예술의 초석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1948년 작가 변시지에게는 기적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 일본의 권위 있는 공모전인 제34회 '광풍회전'에서 응모작 <베레모의 여인> <만돌린을 가진 여자> <조춘> <가을풍경> 등 넉 점이 입상, 최 연소자의 나이로 최고상을 수상했다. 당시 일본화단은 변시지의 수상으로 센세이션날한 화제와 충격으로 일파만파 미술계를 크게 흔들고, 놀라게 했다. 문제는 수상자가 일본인이 아니고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그들은 충격과 경악을 동시에 맛 본 것이다.
77년 이후 그의 작품세계는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마치 지금 까지 작업해 온 그의 소재나 대상들이 제주풍경으로 환치되는 극적인 순간을 목격하는 돌연변이라고나 할까. 얼핏 생각하면 유화의 세계가 어떻게 하면 이렇게 극적인 변화가 가능한 것일까 싶을 만큼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 아열대성 남국의 정취가 물씬 나는 제주는 아스팔트 문명이 가져온, 공해로 뒤덮인 뭍(육지)과는 전혀 다른 풍토 적인 환경과 분위기와 그들만의 순결무구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제주가 고향이면서 바쁜 나날을 망각 속에 살아온 그가 고향을 그리워하는 애정 때문에 금의환향하면서 새삼 발견한 것은 황토빛깔 의 밭이랑과 화산질로 구멍이 쑹쑹 뚫린 검은 바위돌과 낮으막히 두른돌각담, 완만하게 굴곡이 진 해안선과 모래톱, 남태평양에서 불어 오는 짜릿한 바닷바람, 제주 토종의 조랑말, 물질하는 해녀, 붉고 검은 부석돌이 쌓여 만들어진 곳자와길, 한라산을 정점으로 하여 멀리서 수평선 위에 떠있는 고깃배 등 작가의 시계에 들어온 것은 일상 우리가 보아왔던 이러한 소재들이 전부였다. 그러나 작가의 마음에 비친 제주의 풍광은 그 이상 아름다울 수가 없었으리라. 격정적인 시정(詩情), 시상(詩想)이 떠오른 시인이 시(詩)를 읊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듯이, 작가 변시지는 제주의 아름다운 풍광에 도취되어 그 풍물시를 회화로 읊조리고 승화시킨 것이다. 가끔 허리를 구부리고 서 있는 노인의 모습, 단장을 짚고 걷는 더벅머리 사내의 모습, 그리고 모래사장이나 해안선 가에 앉아 이젤을 세워 놓고 몰아경에 빠져 그림을 그리는 점중인물(點中人物), 낚시를 드리운 노옹 태공망은 그 모두가 자화상이요, 작가의 숭고한 염원과 최상의 기도가 농축된 작품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소재들이 작가의 심상으로 재구성되어 화폭에 표출되는 양식과 표현의 방법론은 작가 특유의 독보적 경지를 구축하고 있으며, 그 누구도 닮지 않은 자유의 미학을 누리고 있다는데 우리의 공감을 얻고 있다. 가령 제주토양의 상징인 황갈색의 모노톤한 색조가 마티엘 효과까지 상승시키면서 화면전체를 메꾸고 그 위에 지극히 단순화시킨 정제돤 먹선으로 작가가 그리고자 하는 형상을 이미지화 한다든지 등 가시적인 외연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작가 특유의 어법으로 작품을 완성사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작가의 내면세계에서 여과되어 재창조된 결과는 항상 제주의 리얼한 실상과는 또 다른 풍물시(風物詩)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예술이 동양적 사유에 바탕한 농밀한 한국성을 보여 주고 있는 것도 속기와 불필요한 덧살을 떨쳐 버린 간결한 추상성, 사의성, 심의성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이중섭의 우직하고 투지력이 강한 황소, 봄나물의 광주리를 머리에 인 아낙네와 연두빛 들과 산과 하늘 등 단색조로 그린 박수근의 작품 등 모두가 변시지의 예술과 함께 한국성으로 평가 받고 있는 것도 그 속에 담긴 진솔한 한국의 정서와 정신 때문이다.
<3인의 나부> 83 x 110cm 캔버스에 유채 1951
<폭풍의 바다 1> 83 x 110cm 캔버스에 유채 1993
그가 한국성에 보다 큰 애착을 갖게된 것은 1981년 유럽 순방 길에 올랐던 때 느낀 감정과 결심 때문이다. 이태리의 로마와 피렌체, 베네치아, 폼페이, 나포리 등을 비롯하여 파리와 런던을 둘러보면서 느낀 충동이 컸기 때문이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현지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선후배나 일부 동료작가들이 몇 백년 앞서 있는 그들을 흉내 내면서 닮고 있다는데 실망스러웠고 이러다간 우리 민족성의 말살과 개성마저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회의와 갈등 때문에 이국만리 타국에 있으면서 깨친 것이 바로 한국적인 유화가 없을까 라는데 착안을 했다고 한다. 이른바 유화적인 매재를 쓰면서 우리의 것을 그려야겠다는 결심이 오늘의 예술양식을 굳히게된 모티브가 됐다고 당시를 회고한다.
1927년 제주도 서귀포에서 출생하여 올해로 76세의 원숙한 경지에 도달한 그는 불과 6세때 선친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 그곳에서 일본의 오사까 (대판 )미술학교를 졸업한 후 동경으로 진출하여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52년 귀국하기까지 20여년간을 일본인 작가들과 경쟁을 하면서 화가로서 자질을 길렀으며, 각급 공모전에서 수상을 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민족적 차별이 심한 일본인 사회에서 보다 큰 공분을 느끼면서 반드시 우리 민족의 미술을 찾겠다는 결심을 몇 번이고 다심을 하면서 작업을 해온 그는 주위 환경의 여건과 자극이 그로 하여금 우리 그림을 하게된 직접적인 동기가 됐다고 술회하고 있다.
고집스럽게 화가로서의 운명적인 외길을 걸어온 작가 변시지는 분명 우리 시대가 낳은 진실한 예술인으로서의 숭고한 생애를 살아온 인물이다. 요즘의 세태와는 전혀 인연을 맺지 못하고 천성적으로 정직과 진실만을 간직하고 살아온 그는 아직도 동심의 꿈을 버리지 못하면서 예술행위를 신앙처럼 여기고 작업에 심취하고 있는 오염되지 않은 숭고한 화가다.
고향인 서귀포에 <기당미술관>을 건립, 후예들을 위하여 시에 기증하는 등 참으로 이 노 화가는 조용히 인생을 관조하면서 깨끗하고 숭고한 생예를 살아가고 있다. 필자로서 이 화가에 거는 기대는 자못 크며 바라건데 선진국처럼 주무부처인 예술당국이 창작기금의 지원 등 많은 배려를 할 때 한국에서의 세계적인 예술가는 탄생되는 것이라고 보아진다.
1951년 시세이도 화랑에서 열린 제2회 개인전 당시
제3회 개인전 팜프렛 표지
<귀로> 80.3 x 116.8cm 캔버스에 유채 1991
<기다림> 27.3 x 40.9cm 캔버스에 유채 1995
<기다림> 45.5 x 33.4cm 캔버스에 유채 1984
<폭풍의 바다> 162.2 x 112.1cm 캔버스에 유채 1993
<나그네> 25 x 39cm 캔버스에 유채 1995
<말과 까마귀> 39.4 x 31.8cm 캔버스에 유채 1990
미술화제
변시지 - 작품을 주제로 한 음악회
濟州의 風光 한 幅의 그림이 되고,
한 曲의 音樂이 되어....
2006. 7. 7 제주시 노형동 한라대학교 內 한라아트홀
‘2006 제주 방문의 해'와 ‘제주 특별 자치도 출범'을 기념하기 위해 제주출신의 원로 서양화가 변시지의 작품을 모티브로 한 음악회가 지난 7월 7일 저녁 제주시에 위치한 한라대학교 내 한라아트홀에서 열렸다. KBS교향악단(지휘자 오트마 마가)의 초연으로 발표한 연주회는 30여 년간 고향 제주의 풍광을 화폭에 담아온 변시지 화백 그림을 소재로 한 것이 처음이어서 더욱 눈길을 끌었다.
연주 도중 무대 정면에 제주의 자연 풍경화 변화백의 작품을 담은 영상과 함께 연주된 작곡가 최영섭의 창작곡인 ‘고요한 아침의 나라'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등이 발표되어 많은 관객에게 새로운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공연이 끝난 뒤 변 화백은 "음악을 들으며 그림을 보니 색다른 느낌"이라며 "국내 최고의 오케스트라인 KBS 교향악단이 내 작품을 소재로 한 음악을 연주해 줘서 기쁘다"라고 술회하기도 했다.
공연 이튿날 아침 개관 20년째를 맞는 서귀포시 기당미술관을 찾은 음악전문기자 이장직(중앙일보)은 「그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니 파도 소리, 바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화가에게 제주 바다는 어릴 적 추억이자 제주의 역사, 풍속이다. 제주 바다와 바람, 까마귀, 말이 그려진 그의 그림은 고독, 불안, 기다림, 한(恨)의 이미지로 점철돼 있다. 일본에서 귀국한 뒤 60~70년대 이중간첩으로 오인 받아 안기부의 미행을 받아온 그에게 폭풍은 곧 독재를 의미한다.
난무 102.2 x 130.3cm 1997
그는 안기부 탓에, 현실에 대한 불만이 있었기에 계속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고 말한다. 변 화백은 23세 때 일본 광풍회전(光風會展) 최고상을 수상해 현재 광풍회원으로는 최고참이다. 가족과 떨어져 30년째 서귀포의 한 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있다. 그래도 매년 광풍회전에 출품할 100호짜리 작품 하나씩은 거뜬히 그려내고있는 열정적인 화가이다」 라고 얘기한다.
아울러 지난 7월 12일부터 서울 인사동 '미술관 가는 길'에서 열리는 개관기념 초대전(변시지 삶과 예술)에는 <한라산> <폭풍의 바다> <폭풍> <대화> <깊은고뇌> <폭풍의 귀로> <섬이야기> <낙조> 등 40여점이 전시되고 있다. - 편집부 -
황혼 33.4 x 24.2cm 2002
절망 40.9 x 31.8cm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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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시지(邊時志, 1926년 5월 29일~2013년 6월 8일[1])는 대한민국의 서양화가, 대학 교수이다. 본관은 원주이다.
생애
변시지 화백은 1926년 제주 서귀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일본으로 건너가 서양화 기법을 익혔다. 그는 일본의 최고 권위를 자랑하던 광풍회에서 20대 중반의 나이에 역대 최연소 대상을 거머쥐며 화려하게 등단했다. 이는 그가 전통적인 아카데미즘 화풍에 통달한 천재성을 지녔음을 의미한다. 이후 귀국하여 서울에서 활동했으나, 나이 50이 되던 1970년대 중반에 모든 것을 뒤로하고 홀로 고향인 제주로 내려와 45년간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이러한 귀환은 단순한 거주지 이동이 아니었다. 이는 기존의 성공과 명성을 뒤로하고, 진정한 '자기만의 화풍'을 찾기 위한 일생일대 예술가로서의 도전이었다. 그는 자신의 뿌리인 제주에서 새로운 화풍을 만들어내기 위해 깊이 고뇌했고, 그 과정에서 그가 평생 떼어놓을 수 없었다고 고백한 '고독'이라는 정서가 예술의 근원적 동기가 되었다. 그의 작품이 지닌 '외로움'과 '고독'은 단순히 제주 풍경의 묘사에 그치지 않고, 기성 예술 세계와 결별하고 정체성을 찾아 고뇌했던 작가 내면의 투쟁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1975년 제주에 정착한 변시지 화백은 제주의 거친 자연과 역사를 상징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그는 화려한 색을 버리고, 척박한 제주의 풍토와 정서를 담아낼 황토색(황갈색)과 검은 필선이라는 극단적인 색채 조합에 도달했다. 이 독특한 색채의 선택은 단순한 미적 취향이 아니라, 깊은 철학적 의미를 담고 있다.
그는 황토색을 '무한한 공간과 이야기, 꿈을 상상할 수 있는 여백'으로 정의했다. 이는 제주의 역사와 척박한 땅, 그리고 그 속에서 거친 바람과 파도에 맞서 싸우는 인간의 의지와 '한(恨)'을 담아내는 그릇이다. 반면, 검은색은 제주의 현무암 뿐만 아니라 동양인의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처럼 '가장 동양적이고 편안한 색'이라는 동양 철학을 담고 있다. 이러한 화풍은 서양 문화가 자연을 '이용'하는 방식과는 달리, '자연과 순응'하는 동양미를 계승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그림은 수묵화를 연상시키는 검은 필선을 통해 동양적인 조형미를 보여주며, 서양화 기법에 기반하되 동양적 정신을 담아낸 독창적인 화풍을 창조했다.
1. 예술적 정체성을 찾아 떠난 여정: 귀환과 고뇌의 시간
변시지 화백의 삶은 단순히 한 화가의 연대기를 넘어, 자신의 예술적 정체성을 찾아 고뇌하고 투쟁했던 한 인간의 치열한 자아실현 과정이었다. 그의 예술적 여정은 크게 일본 유학기, 서울 화단 시기, 그리고 제주 귀향 시기로 구분되며, 각 시기마다 겪었던 방황과 갈등은 그의 독자적인 화풍을 형성하는 결정적인 토대가 되었다.
1.1. 완벽한 모방에서 이질적 균열로: 일본 유학기 (1931-1957)
변시지 화백은 1926년 제주도 서귀포에서 태어나 6세가 되던 1931년 가족과 함께 일본 오사카로 이민을 떠났다. 어린 시절의 경험은 훗날 그의 예술 세계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일본 유학기 동안 그는 서양 근대 미술을 체계적으로 학습하며 데라우치 만지로(寺内萬治郎)에게 사사받아 사실주의와 인상주의적 기법을 숙련했다. 1948년 스물두 살의 나이에 그는 일본 최고의 권위 있는 공모전인 제34회 '광풍회(光風會)전'에서 '베레모의 여인'을 비롯한 4점의 작품으로 역대 최연소 최고상을 수상하는 파격적인 기록을 세웠다. 당시 그의 천재적인 재능은 일본 화단에 큰 충격을 주었고, NHK에서 특집 방송을 할 정도로 주목받았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대중적으로도 인기가 많아, 서울의 고궁 풍경을 그린 작품들은 일본으로 팔려나가기도 했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 성공의 가도를 달리던 이 시기에도 그의 내면에는 채워지지 않는 '이질감'과 '허전함'이 존재했다. 일본 평론가들조차 "일본인의 기질과는 다른 그 무엇인가가 꿈틀거리고 있다"고 평했을 만큼, 그의 예술은 단순한 기술적 숙련을 넘어 무의식적으로 발현되는 한국인의 민족적 정서를 담고 있었다. 이러한 내면의 갈등은 그가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예술의 근원을 찾아야 하는 동력이 되었다. 그는 결국 "내 조국의 풍속이나 문화에 젖으면 새로운 화풍이 생기지 않겠는가!"라는 각오로 일본 생활을 청산하고 1957년 영구 귀국을 결심했다. 이는 대중적 성공이 그의 예술적 정체성 탐색을 멈추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성공의 공허함이 더 본질적인 예술적 질문을 던지게 한 필연적 과정이었다.
1.2. 비원파(秘苑派) 시절의 한국성 탐색과 서울 화단의 외면 (1957-1975)
귀국 후 변시지는 서울대학교 교수직에 초빙되었으나, 당시 한국 미술계는 일본에서 서양 근대미술의 기법을 체계적으로 습득하고 국제적 명성을 얻은 그를 '위험인물'로 여기며 노골적인 질시와 따돌림을 가했다. 그에게 강의마저 주지 않아 결국 그는 1년도 채 되지 않아 대학을 떠나야 했다. 이 시기 그는 창덕궁 후원(비원)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비원파'로 불렸고, 인물화에서 풍경화로 장르를 전환하여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탐색했다. '가을 부용정' 같은 그의 작품들은 기왓장의 수를 실제와 동일하게 그릴 만큼 치밀하고 섬세한 사실주의 화풍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작품들은 아직 일본에서 배운 화풍의 잔재가 남아 있었으며 , 그에게는 진정한 의미의 '한국성'을 내재적으로 구현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는 "일본에서 수학하고 작업했던 모든 서양 현대미술의 기법 대신에 오히려 해보지 않은 고전적인 기법을 가지고 새롭게 그리는 작업을 했으며 이후 제주 시절에서는 이마저 버리고 자신만의 언어를 찾아가게 된다"고 언급했다. 이처럼 서울 시기는 그의 예술적 정체성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과도기였다. 서울 화단과의 갈등과 이로 인한 깊은 실존적 방황은 그가 외부의 평가와 관계없이 오직 자기 내면의 예술을 향해 나아가도록 이끈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3. '폭풍의 화가'가 되기까지의 실존적 방황 (1975-2013)
결국 1975년, 변시지는 가족을 서울에 남겨둔 채 '쫓겨나듯' 고향 제주로 돌아갔다. 그의 제주 귀환은 단순한 퇴행이나 도피가 아니라, "영원 회귀"의 운명적인 시작이었다. 하지만 곧바로 예술적 성취를 이룬 것은 아니었다. 그는 "수없는 불면의 밤과 깡소주, 별도봉 자살바위 근처를 배회"할 만큼 깊은 고뇌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이 고통의 시간은 그의 예술적 전환을 위한 자양분이 되었다. 그는 고향이라는 원형적 공간에서 '예술의 모태는 풍토'라는 자신의 철학을 확고히 정립하게 된다. 서울에서의 외면과 제주에서의 고독은 그를 예술의 본질인 '인간 존재의 근원적 고독과 불안'에 대한 철학적 성찰로 이끌었다. 이로써 그는 개인의 삶과 고통을 보편적인 예술 언어로 승화시킬 수 있는 길을 찾았으며 , '폭풍의 화가' 변시지가 탄생했다.
2. '풍토'의 재해석: 황토빛 제주의 탄생과 독자적 예술 언어
제주 귀향 이후 변시지 화백은 외부의 형식과 기술을 버리고, 제주의 자연과 자신의 내면이 하나가 된 독자적인 예술 언어를 창조했다. 이 시기 그의 작품은 단순히 풍경을 재현하는 것을 넘어, 제주의 '풍토'를 매개로 시대의 아픔과 인간 실존의 문제를 탐구하는 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2.1. 황토색과 검은색: 제주에서 발견한 '천지현황(天地玄璜)'의 미학
변시지 화백의 예술적 전환점은 제주로 향하는 비행기에서였다. 그는 "제주 공항을 내리는 순간 세상은 온통 아열대의 태양 아래 노랗게 보였다"고 회고하며 , 석양에 물든 제주의 바다와 대지가 '온통 황금빛으로 승화'되는 첫 경험을 하게 된다. 이 경험을 통해 그는 황토색(황갈색, 노란색)을 자신의 고유색으로 삼고, 이 황토빛 바탕 위에 검은색 선묘로 대상을 표현하는 독자적인 색채 체계를 확립했다.
그의 색채 선택은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깊은 사유의 결과물이었다. 그는 "천지현황(天地玄璜), 검은 현(玄)은 하늘의 색이요, 누를 황(璜)은 땅의 색이다"라고 언급하며, 하늘과 땅의 근원적 관계를 자신의 색채론에 투영했다. 이는 서양화의 다채로운 색채에서 벗어나 수묵화의 간결함과 동양적 미학을 결합한 혁신적인 시도였다. 평론가들은 그의 황금빛 세계를 니체의 '우상의 황혼'에 비유하며, 모든 사물이 하나의 색으로 통합되는 "무차별의 세계", 즉 "평등원(平等園)"이 연출된다고 분석했다. 이는 그가 단순한 풍경 묘사를 넘어,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얻은 존재론적 깨달음을 시각화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2.2. 바람의 심상(心象): 시대의 풍파와 인간 본연의 고독을 형상화하다
변시지 화백에게 제주는 빛과 함께 '바람의 섬'이었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바람은 단순한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 그가 직접 "고독, 인내, 불안, 한(恨), 그리고 기다림"을 상징한다고 설명한 인간 본연의 심상(心象)이었다. 특히, '제주 4·3이라는 비극의 광풍'이 휩쓸고 간 섬이라는 역사적 맥락은 그의 바람 그림에 깊은 서사를 부여한다. 그의 그림 속에서 바람에 휘청이는 초가집, 돌담, 구부러진 소나무는 시련을 견뎌내는 한국인의 인고의 삶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처럼 변시지는 제주의 '바람'이라는 지역적 특수성을 통해 인간 실존의 보편적 문제인 고독과 불안을 형상화했다. 그의 작품은 시대를 향한 비판적 시선과 예술가로서의 책임감과 사명감을 담고 있다. 그의 예술은 지역의 풍토를 단순한 배경이 아닌, 내면의 정신과 시대적 현실을 담아내는 그릇으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2.3. 수평선 너머의 이상향: '이어도'와 침몰하지 않는 희망의 돛단배
변시지 화백의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수평선은 '이상과 현실, 삶과 죽음, 고통과 위안'을 잇는 경계를 의미한다. 그 수평선 위에는 언제나 '작지만 침몰하지 않는' 돛단배가 존재하며, 이는 고독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이상'을 상징한다. 그는 제주인들의 오랜 이상향인 '이어도'를 자신의 예술 세계에 끌어들여, 고달픈 삶 속에서 꿈꾸는 희망과 그리움의 정서를 표현했다.
그의 작품에서 외로운 사내(그의 분신으로 알려진)가 지팡이를 짚고 수평선 너머를 바라보는 모습은 인간의 존재론적 고독이 곧 이상향을 향한 그리움으로 연결되는 변증법적 구조를 이룬다. 이러한 고독과 희망의 대비는 그의 예술이 많은 이들에게 깊은 '위안'을 주는 근원이다. 그는 "진정으로 내가 꿈꾸고 추구하는 것은 '제주도'라는 형식을 벗어난 곳에 있다"고 말하며 , 그의 작품이 지리적 한계를 넘어 모든 인간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정서를 담고자 했음을 분명히 했다. 그의 예술적 집착은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단순화하고 '본질'만을 남기려는 시도였다.
2.4. 변시지 작품 속 주요 상징과 의미
| 상징물 | 작품 속 표현 | 상징적 의미 |
| 황토색 | 캔버스 전체를 채우는 황갈색, 노란색 | 제주의 강렬한 빛, 존재의 본질, '천지현황'의 동양적 미학, 인간의 근원적 감정 |
| 바람 | 거칠고 역동적인 필치로 표현된 광풍 | 제주의 물리적 풍파, 시대의 고통(제주 4·3), 인간의 고독과 인내, 한(恨) |
| 지팡이 짚은 사내 | 뒷모습이거나, 캔버스 속 고독한 존재 | 작가 자신의 분신, 고통과 삶의 무게를 견디는 인간 존재의 실존적 모습 |
| 돛단배 | 수평선 위에 홀로 떠 있는 작은 배 | 고통 속에서도 침몰하지 않는 희망, 미지의 이상향을 향한 그리움 |
| 수평선 | 하늘과 땅, 바다가 잇닿은 경계 | 이상과 현실, 삶과 죽음의 경계, 인간의 꿈과 사유가 펼쳐지는 공간 |
| 까마귀 | 화면 속에 홀로 또는 떼 지어 나는 존재 | 길조(吉鳥), 고향의 추억, 불안과 외로움의 상징 |
3. 근현대미술사에 남긴 변시지의 유산과 정신적 가치
변시지 화백이 한국 근현대 회화의 '정신적 지주'로 평가받는 궁극적인 이유는 그의 예술이 단순한 시각적 표현을 넘어, 시대적, 철학적 의미를 담아내고 동서양의 미학을 창조적으로 융합하여 한국 미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3.1. 동서양의 창조적 융합: 한국적 미의 원형을 완성하다
변시지는 일본 유학을 통해 서양의 사실주의 기법을 완벽하게 습득한 후, 귀국하여 한국적 정체성을 끊임없이 탐구했다. 그의 제주 시기 화풍은 서양의 유화 재료를 사용하면서도 수묵화와 같은 간결한 선과 정신성을 담아냈다. 이는 동양의 문인화 정신을 서양화에 반영하여 '추상과 구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유연한 조형 언어'를 구축한 결과이다. 그의 작품은 서양의 기술과 동양의 정신을 독창적으로 결합하여 한국적 미의 원형을 완성했다는 점에서 미술사적 의의를 갖는다.
그의 예술은 같은 시대를 살았던 다른 한국 화가들의 예술과 비교될 때 그 독자성이 더욱 두드러진다. 박수근(朴壽根)이 서민의 삶을 화강암과 같은 거친 질감으로 표현하며 '향토성'을 담아냈고 , 이중섭(李仲燮)이 전쟁의 고뇌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담뱃갑 은지화(銀紙畵)라는 독특한 방식으로 승화시켰다면 , 변시지는 '예술의 모태는 풍토'라는 철학적 관점을 통해 제주의 지역적 특수성을 보편적인 인간의 실존적 문제로 확장시켰다. 그의 예술은 특정 지역의 정서에만 국한되지 않고, 모든 인간이 공감할 수 있는 존재의 연민과 위안을 담아냄으로써 보편성을 획득했다.
3.2. '미술'을 넘어 '예술'로: 시대를 초월하는 존재의 연민과 위안
변시지 화백은 "미술은 시각적인 것이고, 예술은 정신적인 것이다. 미술은 눈으로 보고, 예술은 마음으로 느낀다"고 강조하며, 자신의 예술이 단순한 기술적 완성을 넘어선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고 있음을 명확히 했다. 그의 작품은 제주의 풍경의 표면적 아름다움을 넘어, 그 내면에 담긴 깊은 '정서와 정신'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그의 작품 주제는 '자연과의 교감'과 '실존적 탐구'로 요약된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인간 존재의 근원적 고독과 불안에 대한 성찰'을 이끌어내고, '삶과 죽음, 존재와 무(無)'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제공함으로써 감상자에게 '위안'을 주고자 했다. 이러한 예술적 목표는 그가 근현대 회화사에서 드물게 정신적 가치를 최우선으로 두었다는 것을 보여주며, 그의 예술이 시대와 국경을 초월하는 힘을 갖게 된 이유가 된다.
3.3. '지역성'을 '보편성'으로 승화시킨 예술가: 세계 미술계의 평가와 의의
변시지 화백의 예술은 국내를 넘어 국제 무대에서도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2007년부터 10년간 그의 작품 2점은 미국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상설 전시되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는 그의 예술이 '지역적 특성에서 영감을 받았지만 지역에만 국한되지 않은' 보편적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공인받은 사건이다. 또한 그는 피카소, 반 고흐, 모네 등 세계적인 거장들과 함께 '세계 100대 작가'로 여러 국제 웹아트 사이트에 소개되기도 했다.
이러한 국제적인 평가는 그의 예술이 국경과 문화를 초월하여 공명하고 있다는 강력한 증거이다. 그의 황토색 화풍은 서구적 맥락에서도 새롭게 해석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그가 한국 근현대 회화의 발전에 기여한 지대한 공헌을 입증하며, '한국적'이라는 형식을 넘어 '인간적'이라는 보편성을 획득한 예술가로서의 위상을 확고히 한다.
3.4. 변시지 화백의 생애와 예술적 변천사
| 시기 | 연대 | 주요 사건 | 예술적 특징 (화풍, 색채, 주제) |
| 일본 유학기 | 1931-1957 | 광풍회전 최연소 최고상 수상, 일본 화단에서 천재성 인정 | 사실주의/인상주의적 인물화, 서양 근대미술 기법 탐구 |
| 서울 화단 시기 | 1957-1975 | 한국 귀국, 서울대 교수직 사임, 비원파 활동 | 고궁 풍경 중심의 치밀한 사실주의 풍경화, 한국적 정서 탐색 |
| 제주 귀향 시기 | 1975-2013 | 제주 정착, 제주대학교 교수 역임 | 황토색과 검은색 중심의 독자적 화풍, 단순화된 형태, '풍토성'과 '실존적 고독' 표현 |
결론: 고독과 풍파를 넘어, 영원한 위안을 주는 예술
변시지 화백은 자신의 삶의 궤적을 하나의 거대한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킨 독보적인 예술가였다. 그는 '천재성'에 안주하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현실에 머무르지 않았으며, '고통'을 겪었으나 절망을 노래하지 않았다. 그는 '풍토'라는 지역적 공간에서 '바람'이라는 시대적 현상을 읽어내고, 이를 '고독'과 '희망'이라는 보편적 인간의 감정으로 승화시켰다. 그의 예술은 "미술은 시각적인 것이고, 예술은 정신적인 것이다"라는 그의 신념처럼, 단순한 기술적 완성을 넘어선 정신적 깊이를 추구했다.
변시지 화백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예술가가 마주해야 했던 정체성 혼란과 시대적 고뇌를 가장 치열하게 경험하고, 이를 자신만의 예술 언어로 극복한 선구자였다. 그의 예술은 삶의 풍파를 겪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위안을 선사하며, "인간 정신의 불굴함과 예술을 통한 자아 실현의 여정"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로 남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변시지 화백은 단순히 한 시대의 뛰어난 화가를 넘어, 시대를 초월하여 영감을 주는 한국 근현대 회화의 '정신적 지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풍경의 표면과 내면
변시지의 예술세계에서 '풍경’은 단순한 자연의 재현을 넘어서, 삶과 존재의 본질을 탐색하는 매개체로 기능한다. 그의 그림 속 풍경은 제주의 황톳빛 흙과 거친 바람, 휘몰아치는 바다와 하늘을 배경으로, 외다리 까마귀, 비루먹은 조랑말과 같은 생명체들이 서정적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요소들은 제주의 자연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동시에, 관찰자로 하여금 자연과 인간의 내면세계를 성찰하게 만든다.
변시지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풍경의 ‘표면’—즉, 시각적으로 인식되는 형태와 색채—을 넘어서, 그 ‘내면’—즉, 풍경이 지닌 의미와 가치, 그리고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감정과 영감—에 주목한다. 그는 "미술은 시각적인 것이고, 예술은 정신적인 것"이라고 말하며, 미술과 예술의 차이를 강조했다. 이러한 관점은 그의 작품에서 풍경이 단순한 자연의 재현을 넘어서, 인간의 내면과 정체성을 탐구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제주의 자연은 변시지에게 무한한 영감의 원천이었으며, 그는 이를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창조했다. 그의 그림은 제주의 풍토와 정신을 담아내며, 때로는 폭풍처럼 격렬하고, 때로는 고요한 바람처럼 섬세한 감정의 물결을 전달한다. 이는 변시지가 제주에서 보낸 38년 동안 예술적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이었으며, 그의 화폭에는 인간 존재의 소박함과 자연에 대한 경외가 황톳빛으로 상징되고 승화되어 있다.
변시지의 작품은 단순히 풍경을 그린 것이 아니라, 그 풍경을 통해 현대인이 잃어버린 고향과 실존을 애잔하고 비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의 그림 속에서는 제주도의 특유한 돌팍과 빈핍한 흙의 건기가 검은 선획으로 표현되어, 관람자로 하여금 제주의 거친 자연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느끼게 한다.
결국, 변시지의 예술은 풍경의 표면을 넘어서 내면으로의 여행을 제안한다. 그의 그림은 우리에게 자연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것을 넘어, 우리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삶의 근원적인 질문들에 대해 성찰할 기회를 제공한다. 변시지의 예술은 시각적인 표현을 넘어서 정신적인 깊이와 의미를 탐구하는 여정이며, 이는 우리가 예술을 통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깊은 가치 중 하나이다.
스승 데라우치만지로(1890~1964)
테라우치 만지로는 일본의 서양화가로 고전적인 사실주의와 인상파적 빛과 색채를 가르쳤으며 ‘누드를 그리는 성자’라고 불리었다. 변시지는 데라우치의 지도를 받았지만, 표현주의 경향을 추가하여 자신만의 개성적인 작품을 창조했다. 테라우치 만지로는 변시지 화가에게 미술 기술과 예술에 대한 철학을 전수했으며, 테라우치 만지로의 영향은 변시지 화가의 초기 작품에서 잘 나타나며, 그의 지도는 변시지가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개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데라우치의는 일본 서양화 발전에 기여한 것 외에도, 그의 제자들이 자신의 예술적 정체성을 찾고 개성적인 작품을 만들어내는 데 도움을 준 것을 들 수 있다. 그의 평가에 대해서는, 그가 제자들에게 미친 긍정적인 영향과 그들이 독립적인 예술가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한 교육 방식이 높이 평가되고 있다.
변시지는 자신의 예술적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스승의 가르침과 자신의 내면적 감각 사이에서 균형을 모색했다. 그는 한 번에 두 장의 그림을 그렸는데, 하나는 스승 데라우치 만지로의 지도를 따라 전통적인 기법과 형식에 충실했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내적인 느낌과 직관에 따라 자유롭게 표현했습니다1. 이러한 방식은 변시지가 예술적 자유와 창조적 독립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단계였다.
스승의 가르침에 따른 작품은 기술적 완성도와 형식적 규율을 강조했으며, 이는 변시지가 미술의 기본을 탄탄히 다지는 데 도움을 주었다. 반면, 자신의 느낌에 따라 그린 작품은 변시지의 개인적 감정과 생각이 반영된, 보다 실험적이고 혁신적인 작품으로 이어졌다. 이 두 가지 접근 방식은 그의 작품에 다양성을 부여하고, 나아가 한국 현대미술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변시지의 이러한 작업 방식은 예술이 단순히 형태와 색채를 넘어서 의미와 가치를 표현하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그는 "미술은 시각적인 것이고, 예술은 정신적인 것"이라고 말하며, 미술과 예술의 차이를 강조했다. 이는 그의 작품이 단순한 자연의 재현이 아니라, 감정과 영감을 통해 관람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예술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의미한다.
변시지의 예술적 탐구는 제주도의 풍경과 자연을 통해 더욱 깊어졌다. 그는 제주의 황톳빛 흙과 거친 바람, 휘몰아치는 바다를 그림에 담았고, 이러한 요소들은 그의 작품에 생동감과 에너지를 불어넣었다. 그의 작품은 제주도의 자연을 통해 인간의 내면세계와 정서를 탐구하는 창으로 기능했다.
결국, 변시지의 예술은 두 가지 경로를 통해 발전했습니다: 하나는 스승의 엄격한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내면적 직관에 따라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이었다. 이 두 경로는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이었으며, 변시지의 작품 속에서 조화롭게 융합되었다. 그의 작품은 이러한 두 가지 접근 방식의 결합을 통해, 보는 이로 하여금 미술과 예술의 본질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다. 변시지의 예술은 그의 스승의 가르침과 자신의 느낌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한국 미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젖힌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서귀포 시절(1926~1931)
변시지 화백의 어린 시절은 그의 예술적 감성과 작품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제주도의 원시적인 자연과 서당에서의 붓질은 그의 예술적 기반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작품 속에 자주 등장하는 까마귀와 조랑말, 나무들은 제주도의 순수한 아름다움과 그가 어린 시절 경험한 동심의 세계를 반영한다. 변시지 화백이 후에 제주로 귀향했을 때, 그는 어린 시절의 순수한 동심세계로 돌아가는 듯한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감동적이고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그의 작품은 제주의 풍경과 정서를 담아내며, 한국 미술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제주도의 아름다운 푸른 바다와 울창한 숲, 그리고 탁 트인 하늘은 변시지 화백의 어린 시절을 채웠다. 그는 이러한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뛰어놀며 상상력을 키웠고, 이는 그의 작품에 생동감과 에너지를 부여했다. 서당에서의 붓질은 그에게 섬세함과 정교함을 가르쳤으며, 이는 그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섬세한 선과 강렬한 색채의 조화로 이어졌다.
어린 시절의 경험은 변시지 화백이 성장하여 일본 오사카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나아가 세계적인 화가로 성장하는 데 있어 토대가 되었다. 그의 작품 속에서는 제주도의 자연과 서당에서의 학습이 어우러져, 동서양의 조화를 이루는 독특한 예술 세계를 창조해냈다. 제주로의 귀향은 그에게 또 다른 예술적 전환점을 마련해주었고, 그는 제주의 자연을 담은 작품들을 통해 자신만의 색깔을 더욱 뚜렷하게 했다.
변시지 화백의 작품은 그가 어린 시절 느꼈던 제주도의 원시적인 자연과 순수한 동심의 세계를 담아내며, 보는 이로 하여금 감동과 회상을 불러일으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의 작품을 통해 우리는 제주도의 아름다움과 함께, 변시지 화백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그의 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그의 예술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우리 모두에게 영감을 주는 소중한 자산이다.
오사카 시절 (1931~1945)
변시지의 삶은 오사카에서의 경험과 그가 겪은 시련들을 통해 깊이 있게 형성되었다. 1931년, 어린 나이에 가족과 함께 제주도에서 오사카로 이주한 변시지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그의 초기 생활은 쉽지 않았으며, 그는 조선인으로서 겪는 차별과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했다.
1933년, 소학교 씨름대회에서 상급생과의 경기 중 다리를 다치는 불행한 사고를 겪었다. 이 사고는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고, 그림 속에 지팡이를 짚은 인물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유가 되었다. 이러한 신체적 장애에도 불구하고, 어린이 그림 그리기 대회에서 오사카 시장상을 수상하며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변시지는 회색의 오사카에서의 삶을 통해 조선인으로서의 승부욕과 예술에 대한 열정을 키웠다. 그는 오사카미술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화단의 거장 데라우치 만지로의 문하생이 되어 서양 근대미술 기법을 배우며 자신만의 화풍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는 동경에서의 시기와 더블어 그의 예술적 정체성과 사회적, 철학적 인식이 고양되는 중요한 시기였다. 그의 작품 속에는 그 시기의 감정과 경험이 깊이 새겨져 있다. 변시지의 오사카에서의 생활은 그의 예술적 여정에 있어서 결정적인 시기였으며, 그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예술을 통한 인간 정신의 승리와 삶의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도쿄 시절(1945~1957)
1945년 오사카 미술학교를 졸업한 후, 변시지는 도쿄로 이주하여 일본 화단의 대가 데라우치 만지로에게 사사하며 자신의 예술적 기반을 다졌다. 이 시기에 그는 일전 공모전에서 한국인 최초로 입선하고, 이어 최연소로 최고상을 수상하며 일본 중앙화단에서 인정받는 화가로 자리매김했다. 동경시절은 그가 화가로서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때였으며, 일본 최고의 중앙화단인 광풍회에서의 입선과 최연소 최고(광풍)상 수상, 그리고 최연소 정회원과 최연소 심사위원이 되는 등의 눈부신 성취를 이루었습니다
스승 데라우치 만지로의 지도 아래, 변시지는 자신의 기술을 연마하고 예술적 정체성을 확립했다. 그의 스승과의 관계는 그가 예술적으로 성장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는 그의 작품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일전에서 조선인 최초로 입선한 것과 일본 최초의 화랑인 시세이도(자생당)화랑에서의 두 번의 개인전은 단순한 개인적 성취를 넘어, 당시 사회적, 문화적 장벽을 극복한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광풍회에서의 입선과 최고상 수상은 변시지가 당대 최고의 화가 중 한 명으로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최연소 정회원, 최연소 최고상 수상자, 그리고 최연소 심사위원으로서의 역할은 그가 얼마나 탁월한 재능을 가졌는지를 증명하는 것이었다.
변시지의 이러한 성과는 그가 겪어야 했던 이중적 삶의 어려움, 즉 조선인이자 장애인으로서의 삶을 극복하려는 노력의 결실이었다. 그의 노력과 헌신은 그를 근대화가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성과를 남긴 예술가로 만들었다. 그의 이야기는 단순히 성공담을 넘어, 인간 정신의 불굴함과 예술을 통한 자아 실현의 여정을 보여준다.
서울 시절(1957~1975)
변시지의 서울 시절은 매우 독특한 경로를 따랐다. 프랑스로 떠날 계획이었던 그는 프랑스어를 5년간 배웠지만, 서울대학교 윤일선 총장의 초청을 받고 서울로 향했다. 이는 그가 일본에서 이미 성공한 화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정체성과 한국의 정체성을 탐구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1958년 5월, 그의 귀국 회고전이 화신백화점에서 열렸고, 하루에 5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의 작품을 관람했다. 그의 작품 중 "짐꾼"은 이데올로기가 있다는 오해를 받았고, 이로 인해 변시지는 서울대학을 떠나 마포고등학교에서 미술 교사로 재직하게 되었다. 이 첫 귀국전은 그의 예술가로서의 운명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서울에서의 생활은 쉽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였고, 많은 예술가들이 해외로 떠나고 있었다. 그럼에도 변시지는 서울에 머물며, 비원을 드나들고 '비원파’라 불리우며 한국의 정체성을 찾는 작업을 계속했으며 그의 성공을 뒤로 한 귀국에 의심을 품은 경찰과 정보부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
1970년대 한국 미술계는 서양미술의 급진적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대전환의 시기였다. 당시 한국 주류의 화가들은 인상파, 야수파, 표현주의와 엥포르멜 등 추상 미술의 기법을 추구하던 시대였으나, 귀국 후 변시지는 이미 습득한 현대적 기법을 버리고 오히려 한국미의식의 뿌리를 찾아 사실주의적인 기법으로 고궁의 풍경을 그리는 일에 몰두했다. 일본에서 수학하고 작업했던 모든 서양 현대미술의 기법 대신에 오히려 그는 해보지 않은 고전적인 기법을 가지고 새롭게 그리는 작업을 했으며 이후 제주 시절에서는 이마져 버리고 자신만의 언어를 찾아가게 된다.
제주 시절(1975~2013)
제주로 돌아간 그의 시절은 그의 예술적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이었다. 변시지 화백은 제주의 자연과 삶을 담백하고 솔직한 시선으로 포착했으며, 그의 작품은 제주의 풍경과 사람들의 삶을 반영하며 독특한 정서를 형상화했다. 그는 황토색과 검은 선을 사용하여 제주의 원형을 추구했고, 그 과정에서 자신만의 화풍을 정립했다.
변시지 화백의 제주 시절 작품은 그의 삶과 예술이 융합된 결과물로, 서양의 기법에서 출발하여 동양의 정신과 기법을 수용한 독창적인 작품들인다. 그의 화풍은 단순한 풍경화를 넘어서, 동양의 문인화 정신을 반영한 한 편의 시와 같다. 바람, 소나무, 초가집, 조랑말 등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그의 작품은 제주의 풍토가 창조해낸 세계를 보여주며, 그만큼 순수하고 자생적인 예술성을 지니고 있다. 2017년부터 10년간 스미소니언 미국립박물관에 생존한 동양인 최초로 그의 작품 2점이 전시된 바 있다.
변시지 화백의 제주 시절은 그의 예술적 정체성을 찾아가는 도정이었으며, 그의 화폭에는 인간 존재의 소소함과 자연에 대한 경외감이 황톳빛으로 상징되고 승화되어 있다. 그의 작품은 현대문명에 밀려 사라져가는 제주의 원형을 찾아 헤매는 과정에서 탄생했으며, 그의 작품은 단순한 풍경화를 넘어서, 제주도의 색과 빛, 그리고 그곳 사람들의 삶과 정서를 형상화했다. 변시지는 현대문명에 밀려 사라져가는 제주의 원형을 찾아 헤매였으며 그의 그림에는 단순한 표현을 넘어서, 한 시대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인간의 내면을 담아내는 시적인 언어로 전해진다.
변시지는 2013년 6월 사망하였으며 그의 장례는 서귀포시 사회장으로 치루었졌고 그의 추모공원이 고향인 서귀포시 서홍동에 세워졌다.
그의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며, 그의 예술적 유산은 시간을 초월하여 계속해서 존경받고 있다.
변시지는 미술과 예술의 구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미술은 시각적인 것이고, 예술은 정신적인 것이다. 미술은 눈으로 보고, 예술은 마음으로 느낀다. 미술은 형태와 색깔로, 예술은 의미와 가치로 표현된다. 미술은 기술의 완성도로, 예술은 영감의 깊이로 평가된다. "
수상
수상 경력은 다음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