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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작구 현충원 길(내부 순례길) 걷기
◇ 국립 서울 현충원(顯忠院) : 동작구 동작동 산 44번지 7호
- 1955년부터 순국한 호국영령들을 추앙하기 위해 국가에서 안치한 묘지
국립 서울 현충원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순국한 호국영령들을 국가에서 안치한 묘지를 관리하는 국방부 소속기관이다.
〈국립 현충원령〉은 그 첫 조항에서 ‘군인·군무원으로서 사망한 사람과 국가에 유공한 사람의 유골 또는 시체를 안장하고, 그 충의(忠義)와 위훈(偉勳)을 영구히 추앙하기 위하여 국방부 장관 소속하에 둔 묘지’라고 정의하고 있다.
〔연혁〕 국립서울현충원은 1955년 7월 15일, 동작구 동작동 관악산 줄기의 43만여 평(142만㎡)의 대지에 설립되었다. 1986년 현재 무명용사 11만여 위를 비롯하여 모두 16만여 위의 순국 영령들이 잠들어 있다.
민족적 비극인 6·25전쟁으로 전몰한 국군장병들이 이름 없는 넋이 되어 전국 곳곳에 있던 것을 한 곳에 안장하기 위하여 국군묘지가 설치되었다.
1954년에 육군 공병단에 의하여 착공되어 1955년 7월 15일에 국군묘지가 설치되었으나, 1957년에 준공되었다. 처음 이 국군묘지의 안치 대상은 전몰한 군인에 한하였으나, 1965년 3월 30일, 대통령령 제2092호 〈국립묘지령〉에 의하여 국립묘지로 그 격을 높이고, 안장 대상자 범위도 국가에 유공한 민간인에까지 확대하였다.
한편, 정부는 묘역 확대의 일환책으로 1985년 11월 13일 대전시 갑동 산 36번지에 국립묘지 대전분소를 설치하고, 1998년 2월 28일 국립 대전현충원으로 격상시켰다. 1977년 4월에 착공하여 8년 6개월 만에 준공된 이 분소는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의 갑절이 넘는 80만 4,000평이다. 현충문·현충관·현충탑 등의 시설은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과 똑같은 형태로 건설되었다. 1986년 이후의 영령들은 주로 이곳에서 영면하게 되었다.
1998년 2월 28일, 국립묘지 명칭을 국립 현충원으로 개칭하고, 이어서 이곳을 2006년에 국립 서울 현충원으로 명명하였다.
〔안장 대상자 범위〕 안장 대상자의 범위는 ① 현역군인, 소집 중의 군인이나 군무원으로서 사망한 자, ② 군 복무 중 전투에 참여하여 무공(군사상의 공적)이 뚜렷한 자, 장관급 장교 또는 20년 이상 군에 복무한 자 중 전역·퇴역 또는 면역된 뒤 사망한 자로서 국방부 장관이 지정한 자, ③ 국장 또는 국민장으로 장의(장례)된 자, ④ 국가 또는 사회에 공헌하여 공로가 뚜렷한 자 중 사망한 자로서 국방부 장관의 제청에 따라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 대통령이 지정한 자, ⑤ 전투에 참여하여 전사한 향토예비군 대원과 임무 수행 중 전사 또는 순직한 경찰관, ⑥ 대한민국에 공로가 뚜렷한 외국인 사망자 중 국방부 장관의 제청에 따라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 대통령이 지정한 자 등이다.
〔시설 및 특징〕 1970년 1월, 이 법령의 개정으로 이 일대를 성역으로 지정하여 한층 미화 단장하였고, 지형적으로는, 관(冠)을 쓴 듯 봉우리가 솟았다는 관악산과 붓끝과같이 뾰족한 형세라 하여 문필봉(文筆峰)이라 일컬어지는 산세로 감싸여 있다. 이들 산세 속의 펑퍼짐한 지형을 ‘동작 포란형(銅雀抱卵形)’이라 하여 동작이 알을 품고 있듯 상서로운 기맥(氣脈)이 흐른다고 하였다. 또한, 전면을 흐르는 한강 수가 용트림하듯 흐르고 있어 한층 미관을 더하고 있다.
국립 서울 현충원의 정면에 들어서면 충성 분수탑이 우뚝 서 있고, 금잔디가 깔린 광장을 지나면 현충문(顯忠門)과 현충탑(顯忠塔)이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이 현충탑 안에는 11만여 무명용사의 위패가 봉안된 위패실과 봉안당이 있으며, 이를 가호하고 있는 애국 투사 상이 좌측에, 호국영웅 상이 우측에 있다.
이 탑을 중심으로 동·서 묘역에 국가유공자 묘역, 애국지사 묘역, 장군 묘역, 장교 사병 묘역, 경찰관 묘역 등 신분별로 약 5만 위가 정연하게 잠들어 있다. 동작동 묘지 시설에는 안장식을 거행하는 현충관(顯忠館), 유품과 전리품을 전시하는 기념관이 있고, 국립 현충원장 아래 관리과 · 전례 · 현충 선양의 3과를 둔 사무소가 있다.
현재 국립 서울 현충원에는 초대·2대·3대 대통령을 역임한 이승만(李承晩)과 박정희와 영부인 육영수(陸英修), 2009년에 김대중 대통령, 2015년에 김영삼 대통령이 안장된 것을 비롯하여, 전 국무총리 이범석, 전 민의원 의장 등 각계 저명인사들이 묻혀 있다. 해마다 영령들의 충절을 기리는 참배객들이 늘어나 1980년대에 들어와서는 연평균 600만 명이 넘고 있다.
◇ 창빈안씨(昌嬪安氏) 묘소와 신도비: 동작구 동작동 44번지 7호 (서울시 유형문화유산 제54호)
- 중종의 후궁으로 덕흥대원군을 낳은 창빈안씨의 묘소
동작동 국립묘지 내의 이승만 대통령 묘소 위쪽 약 20미터에는 조선 초 중종의 후궁이자 선조(宣祖)의 친조모가 되는 창빈 안씨(昌嬪安氏 : 1499 ~1549)의 묘소와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이 묘소와 신도비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데 흔히 ‘동작릉(銅雀陵)’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북쪽을 바라보면 산기슭 중턱 발밑 아래에 한강이 휘어져 흐르고, 남산·북악을 너머 저 멀리에는 북한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묘소는 곡장(曲墻)이 둘리어 있고, 봉분 앞에는 묘갈·혼유석(魂遊石)·석등이 세워져 있다. 석상(石像) 2구가 있어서 조선 왕실 후궁의 묘제를 갖추고 있는데 다만 봉분 서쪽 10m 떨어진 곳에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져 있는 것은 보기 드문 형식이다. 이것은 그의 손자인 선조(宣祖) 이후로 360년 동안 그의 현손이 왕위를 계승하였던 그것과 관계가 있다고 본다.
원래 신도비는 죽은 사람의 생전의 한 일을 기록하여 묘소 앞에 세우는 비석으로서 5세기 초부터 중국의 천자와 제후의 묘소 앞에 세우기 시작하였다. 신도비는 묘소 동남쪽에 귀신이 다니는 길이라 하여 이곳에 세웠다.
국왕으로서는 조선 초의 태조와 세종의 신도비가 세워졌고, 신하로서는 2품(品) 이상의 고위 관리로서 공업(功業)과 학문이 뚜렷하여 후세의 사표(師表)가 될 때 신도비를 세워 이를 기리도록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많이 남아있다. 신도비는 대체로 돌거북 위에 비석을 세우고, 윗부분에는 이무기를 조각한, 이른바 이수 귀부(螭獸龜趺)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창빈 안씨의 신도비는 1683년(숙종 9)에 세워진 것으로 우리나라 몇 곳에서만 볼 수 있는 정사각형의 비신(碑身)을 하고 있다. 비신 위에는 사각지붕 모양의 개석(蓋石)이 올려져 있으며, 비신 아래에는 돌거북이 아닌 사각의 대석(臺石)으로 되어 있다. 신도비의 비문은 숙종 때 예조판서·한성판윤을 지낸 신정(申晸)이 짓고, 글씨는 한성판윤을 6번이나 지낸 이정영(李正英)이 썼다.
안탄대(安坦大)의 딸로 태어난 창빈 안씨는 1507년(중종 2) 9살 때 궁궐에 궁녀로 들어갔다. 생김새가 단정하고 행동이 정숙하여 20세에 중종의 총애를 받아 숙용(淑容)까지 오르고, 2남 1녀를 낳았다. 그의 차남 초(岧)는 후일 선조의 생부(生父)인 덕흥대원군으로 추존 되었다.
1544년에 중종이 세상을 떠나자, 창빈안씨는 관례대로 비구니가 되어 인수궁(仁壽宮)에 물러나려고 하였으나 명종의 모후 문정왕후가 특명으로 만류하여 궁궐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 있었다. 5년 뒤인 1549년에 친정집에 들렀다가 병에 걸려 51세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양주(楊州) 장흥에 예장하였으나 묘소 자리가 좋지 않다고 하여 다음 해에 이곳으로 이장(移葬)하였다.
한편, 명종이 후계 없이 돌아가자, 덕흥대원군의 3남 하성군(河城君)이 조선의 14대 왕 선조(宣祖)로 추대되어 즉위하였다. 이에 따라 1577년(선조 10)에 창빈 안씨는 조모로써 창빈(昌嬪)으로 추존되었다. 따라서 이곳 묘소도 일명 동작릉으로 불리게 되고, 숙종 9년에는 파격적으로 신도비가 세워지게 되었다.
창빈 안씨의 부친 안탄대는 집안이 미천하였으나 타고난 성품이 점잖고 근신하여 남과 겨루는 일이 없었다. 창빈이 궁중에 궁녀로 들어간 뒤에 더욱 근신하였는데 창빈이 왕자와 옹주를 낳은 뒤로는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다. 이는 사람들이 왕자의 외조부라고 할까 보아 두려워서였다.
하성군이 왕위에 올라 대통을 계승한 뒤에는 신분이 존귀해졌지만, 몸에 비단옷을 걸치지 않았는데 만년에는 눈이 멀었다. 선조가 외증조부인 안탄대에게 담비 갖옷[貂皮裝]을 내리려고 사람을 시켜 그 뜻을 묻게 하니 안탄대는 “나는 미천한 사람이요. 초피옷을 입는 것은 죽을죄가 되오. 그런데 임금의 명을 어긴다는 것은 역시 죽을죄요. 하지만 죽기 일반이라면 차라리 제 분수대로 지키다가 죽을까 하오”라고 하였다.
선조는 안탄대의 뜻을 꺾지 못할 것을 알고 사람을 시켜서 강아지 가죽이라고 하사하였다. 안탄대가 손으로 만져보며 “궁중의 개는 특별한 종자인가 보다. 어찌 부드럽고 곱기가 이렇단 말이냐?” 하였다는 일화가 남아있다. 그 후 안탄대는 우의정에 추증(追贈)되었다.
◇ 국가원수 묘소 : 동작구 동작동 280번지
[이승만 대통령 묘소]
이승만 대통령은 1875년 3월 26일 황해도 평산 출생으로 독립협회에 참가하여 독립사상을 전파하고 민족 계몽에 앞장섰다.
1919년 3·1운동 이후에 상해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을 역임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항일투쟁 외교활동을 펼치던 중 광복이 되자 귀국하였다. 1948년 제헌국회의장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을 거치면서 광복 직후의 혼돈을 극복하고 자유민주 국가로서의 대한민국의 기틀을 다졌다.
6·25전쟁의 국난을 극복하고 인도적 차원에서 반공 포로를 석방하였으며,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한미동맹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4·19 민주혁명으로 대통령직에서 하야한 뒤 하와이에서 생활하다가 1965년 7월 19일 서거하였다. 동년 7월 27일 가족장으로 영결식을 거행하고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으며, 국립묘지에 최초로 안장된 국가원수이다.
[영부인 프란체스카 도나 리 여사]
1900년 6월 15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출생한 이승만 대통령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는 1933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 회의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로 참석한 이승만 박사를 만나 1934년 10월 8일에 뉴욕시에서 결혼하고, 1948년에 영부인이 되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1992년 3월 19일 이화장에서 향년 93세로 서거하여 3월 23일 가족장으로 이곳에 합장되었다.
[박정희 대통령 묘소]
박정희 대통령은 1917년 11월 14일 경북 선산에서 출생했다. 1963년 대한민국 5대 대통령에 취임해 연이어 9대 대통령까지 역임하는 동안 수차례에 걸친 5개년 경제개발계획을 성공적으로 추진하여 산업 입국을 다졌다. 근면·자조·협동을 기본 정신으로 한 새마을운동을 범국민적으로 전개하여 가난을 극복하고 ‘하면 된다’라는 국민적 자신감을 일깨워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룩하여 대한민국 선진화의 기반을 구축했다.
또한 오늘날 우리 국군의 현대화를 위한 율곡 계획을 집념 있게 추진하여 국방력 증강 및 자주국방의 기틀을 다지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1979년 10월 26일 서거하여 11월 3일 국장으로 국립 서울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영부인 육영수 여사]
1925년 11월 29일 충북 옥천에서 출생한 육영수 여사는 박정희 대통령 부인이 된 후 각종 사회사업과 육영사업에 앞장섰다.
1974년 8월 15일, 국립극장에서 광복절 기념식 중 북한의 사주를 받은 문세광(文世光)의 저격으로 서거하여 8월 19일 국민장으로 이 곳에 안장되었다.
[김영삼 대통령 묘소]
9선 국회의원으로 박정희·전두환 군사정권에 맞서 한평생을 조국의 민주화에 몸 바친 김영삼 대통령은 1993년 제14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최초의 ‘문민정부’를 출범시켰다. 공직자 재산 공개법, 금융실명제 등 강력한 개혁 정책을 바탕으로 대한민국의 정치·경제 민주화를 실현하였으나 집권 말기에 IMF(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으면서 임기를 마감했다.
2015년 11월 22일에 서거하여 11월 26일, 사상 초유의 국가장(國家葬)으로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김대중 대통령 묘소]
김대중 대통령은 1924년 1월 6일 전남 신안 하의도에서 출생하여 1961년 민의원, 1963년 제6대 국회의원을 시작으로 7, 8, 13, 14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세 번의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를 딛고,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어 1998년 2월 25일 대한민국제 15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오랜 기간의 정치적 역경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와 자유, 평화를 이 땅에 정착시킨다는 일념으로 헌신했다.
취임 후 1997년부터 시작된 IMF 외환위기의 극복을 위해 금융, 기업, 공공, 노동 4대 분야 개혁을 단행하고, 정보화 정책을 적극 추진하여 단기간에 위기를 극복하였다.
또한 국민 기초생활보장과 자율적 문화정책을 통해 우리나라의 복지, 문화국가의 초석을 놓았다. 2000년 6월에는 분단 55년 만에 처음으로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여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켰다.
그해 12월에는 민주주의, 인권, 평화에 헌신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2009년 8월 18일 서거하여 8월 23일 국장(國葬)으로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 호국지장사(護國地藏寺) : 동작구 동작동 280번지(국립묘지 내, 철불좌상 등 서울시 유형문화유산 8점)
- 덕흥대원군의 생모 안씨를 창빈(昌嬪)으로 추존하고, 원찰(願刹)인 화장사로 승격시킨 절
국립묘지 경내 순환도로를 따라가다가 사슴장 위쪽의 경찰 탑과 박정희 대통령 묘소 중간 지점에 호국지장사(護國地藏寺)가 있다. 이 절은 일명 화장사(華藏寺)로 1,100여 년 전 신라 말기에 도선대사가 창건하여 갈궁사(葛宮寺)라고 하였다고 전한다.
그 후 폐허가 되었다가 고려말 1352년(공민왕 2)에 보인대사가 다시 중건하여 화장암(華藏庵)이라 하였다.
그 뒤 조선 중기 1577년(선조 10)에 국왕이 공작봉에 모신 조모 안씨의 묘소를 창빈(昌嬪)으로 추존하고, 화장암을 이 묘소의 원찰(願刹)로 승격시켜 화장사로 고쳤다. 이 절은 현종, 철종, 고종 때와 1920년, 1936년에 각각 중수(重修)하였다.
6·25전쟁 후 국립묘지가 이곳에 들어서면서 이승만 대통령이 호국영령(護國英靈)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사찰로 지정하였고, 1983년 7월 7일에는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의 인가를 얻어 절의 명칭을 호국지장사로 바꾸었다.
이 절 내의 능인보전(能仁寶殿)에는 서울시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철불(鐵佛)이 있다. 이 부처는 지장사 철불좌상(鐵佛坐像)으로 앉은키가 4척에 무게가 100여 관이 되는 고려 초기의 철불(鐵佛)로 최근에 표면에 금빛 칠을 하였으므로 금동불상처럼 보인다.
이 부처는 지금부터 100여 년 전에 국립묘지 앞 강변에 살던 어부가 꿈에 어떤 부처가 빛을 보게 해달라는 호소를 세 차례나 꾸고 나서 꿈에 본 그곳을 가보니 쇠로 만든 녹슨 부처가 있었다고 전한다. 어부는 이를 기이하게 여겨 자기 집에 모셨는데 어찌 된 일인지 집안에 재난이 끊이지 않고 고기도 잡히지 않았으므로 부처를 가까운 화장사로 옮겼다.
그런 뒤에 이 부처에게 불공을 드리면 병이 낫는다는 소문이 퍼져서 한때 신도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그리고 선조 때 명신이었던 백사 이항복(李恒福)과 한음 이덕형(李德馨)이 어릴 때 이 절에서 공부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이 절에는 최근에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지장사 괘불(掛佛 :서울시 유형문화유산 제113호)을 비롯하여 지장사 대웅전 아미타 회상도(會上圖) · 지장사 대웅전 극락구품도(極樂九品圖) · 지장사 대웅전 감로왕도(甘露王圖) · 지장사 대웅전 지장 시왕도(地藏十王圖) · 지장사 대웅전 신중도(神衆圖) · 지장사 대웅전 현왕도(現王圖) · 지장사 대웅전 팔상도(八相圖) · 지장사 산신도 · 지장사 약사여래상 등 10점의 서울시 문화유산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