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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호시은 원문보기 글쓴이: 조행종
카프카(1883-1924)
프란츠 카프카는 체코의 프라하에서 출생하여 그곳에서 생애를 마쳤으면서도 체코어도 히브라이어도 모르고, 독일어를 말하는 유태인으로 독일교육을 받았다. 독일인인 까닭에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체코인에게 배척되고 오지리인에 의해서는 보헤미아 사람으로 기피되고, 독일인에게서는 유태인으로 경멸되고, 자식으로 집안에서 소외되고, 유태인으로 기독교에서 단절되고, 무신론자로서 종교적 유태인에게서 외면당하고, 예술인으로 일반 대중에게 이해되지 못한 카프카는 독일어를 말하는 프라하 시민이다. 유태인으로 도처에 예속된 도착시민이면서도 아무 데도 속하지 못한 세계시민이다. 그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밀리고 밀리어 채찍에 맞아 돌고 도는 팽이 처럼, 쫓기어 돌아가는 이방인 방황자로서, 난해한 작품 <심판>, <성>, <아메리카>, <투쟁기>, <시골의 결혼 준비>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이들 작품의 대부분이 그의 친구인 맑스 브로트에 의해 그의 사후에 발표되면서 일약 세계적 대작가로 명성을 떨쳤다. 카프카는 체코 태생의 가난한 유태인으로 입지전에 오를 정도로 일약 거상이 된 독재적인 헤르만을 아버지로, 독일 부농의 유태인 튀기인 유리에를 어머니로 프라하에서 태어났다. 그곳의 카알대학에서 법학박사가 된후, 프라하의 노동자 상해 보험국에서 14년 간 근무하면서 밤마다 '종이에 끄적이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다가 1924년 페결핵으로 41세의 짧은 생애를 마쳤다. 요양차 베를린과 빈에 잠시 머문 것을 빼면 그는 출생지 체코 프라하를 떠난 일이 없다. 그러면서도 체코어로 작품활동을 한 것이 아니라 독일어로 글을 쓴 묘한 이율배반의 산 표본이었다.
내용의 개연성
카프카의 대표작인 <심판>의 첫 머리에 이런 말이 있다. "누군가가 틀림없이 요세프 카를 모략한 것같다. 나쁜 일을 한 일이 없는 데도 어느 날 아침에 체포 되었기 때문이다. " 그러나 이 소설을 읽는 독자는 좀 당황할 것이다. 작품 전체를 통해 요세프 카가 어떤 모략을 받았는지, 체포된 원인이 이 모략 때문이었는지 밝혀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 뿐만 아니라 정말 나쁜 일을 한 일이 없는지도 모르고 그것에 대해 해명되지 않는다. 체포되었으나 고소당한 일도 없고, 재판을 받으나 판결을 받은 일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세프 카는 31세의 생일 전 날 밤 아홉시경에 두 사람에 끌리어 어느 들판에서 한 사람이 그의 목을 비틀어 쥐는 동안 다른 사람의 칼에 가슴을 찔리어 '개처럼' 이그러진 눈을 하고 죽는다. 여기서 보건대 이 <심판>은 우리의 일상생활의 영역에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법정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요세프 카는 자기를 재판한 재판관을 본 일도 없고, 그 재판관이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 그 뿐만 아니라 한번도 들어가지 못한 높은 법원에 도달하고자 발버둥을 치지만 끝내 그 법원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주인공 요세프 카도, 이 책을 읽는 독자도, 심지어 이 책을 해명하고자 하는 문예사가도 미궁 속에서 돌다가 카프카 자신처럼 현기증을 일으킨다. 작품 전체가 어떤 심리학적인 것이든, 형이상학적이거나, 신학적이거나 혹은 사회비판적인 것이든 간에 고차적인 비유세계의 개연성에서 맴돈다. 천의 얼굴을 가졌으므로 이런 것같고 저런 것같아 각자의 판단에 맡기는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카의 죄
요세프 카의 심판은 죄를 지어 고소당하고 체포되어 변호사의 도움을 받으면서 심문을 받고, 판결로 사형이라는 벌을 받는 법 절차의 정상과정을 밟으나 체포와 법원의 심리와 형집행만이 어렴풋이 안개속에서 나타났다가 감추어질 뿐 다른 과정은 은폐되어 비치는 듯 하다 마는 기이한 양상을 띤다. "사물이 눈 앞에 나타나기 전의 상태를 포착하고자" 하는 카프카의 의도가 이러한 표상을 낳았다. 더욱이나 이 표상들이 움직이면서 흘러 가고 있으니 모호할 수밖에 없다. 요세프 카의 죄는 우리의 경험세계에 나타난 개체적인 죄와는 전혀 다르다. 간접으로 언급되지만 추상적인 모호한 범죄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도 감시인들이 주고 받는 대화에서 슬쩍 비춰질 뿐 죄에 대한 언급은 아무 곳에도 없다. "이 사람이 법을 모르고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군..." 바로 법을 모르는 것이 그의 일차적인 죄요, 인간으로 태어 나서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그의 이차적인 죄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어찌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는 원죄에 대한 명제가 이 소설의 뒷면에 깔려있다. 그러므로 사람으로 태어나 살아가는 세월이 죄를 짓는 과정이요, 동시에 법원의 심판을 받는 과정이기도 하다. 바로 인생자체가 재판이다. 이 재판을 요세프 카는 자력현상의 발동으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 불러 일으킨다. "우리 당국은 국민 속에서 일부러 범죄를 찾아 나서지 않습니다. 오히려 범죄에 끌려 가서 감시인을 보낼 뿐입니다."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그 자체가 죄가 되는 요세프 카의 이율배반적인 범죄는 자력현상을 일으켜 당국을 스스로 끌어 넣어 고소되도록 하고 체포를 자청한다. 그 뿐만 아니라 형의 집행도 스스로 끌어 들인다. 카는 재판을 받은 일이 없다. 판결을 받은 일은 더욱이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일 전날 밤에 검은 옷에 흰장갑을 끼고, 방문객이 온다고 통고 받은 일이 없으면서도 손님을 기다리는 몸가짐으로 문옆 안락의자에 앉아 누구를 기다린다. "늙은 하급 배우를 나에게 보냅니다. 싸구려로 나의 일을 끝낼 참입니다." 카는 혼자 중얼 거렸다. 사형언도를 받은 일이 없어도 카는 배우가 자기 연기 차례를 기다리듯이 사형 집행관을 기다리고 있다. 모두가 연기이다. 보이지도 않고 파악할 수도 없는 의지에 의하여 움직이는 허깨비다. 카는 30세의 생일날 아침 여덟시 좀 지나서 돌연히 체포되었다. (1장) 비록 체포되었다고는 하나, 은행의 업무주임이라는 직장인의 행동에는 이렇다 할 변화가 없었다. 그의 개인 시간인 일요일이 없어져 가고(2장), 대신 죄인으로 교외의 어느 곳에 가서 심문을 받는 것뿐이다. 따라서 일요일은 그의 소송사건에 몰두하는 날이 되었다. 이렇게 소송과 은행근무하는 이중생활이 그의 치밀했던 기계적인 사생활의 균형을 파괴하고 그를 일상행활에서 이탈시켰다. 이젠 그에게서 일요일이 (3,4장) 사라졌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퇴근 후이기는 하지만 평일에도(4장) 은행에서 심문받을 정도로 사태는 꾸준히 변했다. 결국 이 사건은 조금씩 조금씩 그의 규칙적인 일상생활을 침식하고 (5장), 그의 근무시간이 이 사건으로 인해서 오전 중에도(6장) 나중에는 오후에도(7,8장) 방해되어 갔다. 마침내는 근무에서 이탈하여 성당에서 일을 보려하나(8,9장)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고 허공을 맴돈다. 결국 요세프 카는 직장생활에서 그리고 자기 일상생활에서 완전히 소외되어 허공을 향해 고함이나 치는 고립체로 탈락하고 말았다. 사회유기체 내에서 함께 움직일 때는 생명체이나, 유기체에서 이탈한 개체는 생명이 없는 물건으로 귀찮은 존재로 버림받는다. 이제 요세프 카도 쓸모 없는 폐품으로 들판에 버려졌다.(10장) 바로 오늘날의 사회상이 개인 생활을 침범하여 인간을 무가치한 사물로 탈락시키는 카프카적인 비유상이다.
순간묘사
시간의 흐름이 없는 것이 카프카의 장편소설에 나타난 특징이지만 <심판>에서도 독자는 사건의 추이를 알기 어렵다. 요세프 카가 생일날 아침에 체포되었다가 다음 해인 31세의 생일 전 날 밤에 죽었다는 것만은 뚜렷하나 그외의 시간의 흐름은 아리송하다. 시간의 흐름 뿐만 아니라, 소송이라는 사건의 전개도 없고 작품에 뚜렷한 줄거리도 없다. 다만 고립된 우발적인 묘사의 나열만이 전개 된다. 따라서 고전 작품을 대하던 전체의 문학관을 버리지 않는 한 이 작품은 이해될 수 없다. 순간 순간을 포착해서 묘사하는 그때 그때의 긴 서술만이 있다. 일순간에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되는 내외의 모든 것이 동시에 문장에 표현된다. 아무 것도 버려지지 않으며 인생의 전부가 동시에 묘사된다. 이에 맞게 언어 자체가 변한다. 너무 세밀하게, 너무 정확하게, 너무 구분지어 순간의 전부를 표현하려 하므로 현대 이성이 이해 할 수 없는 불투명하고 부조리하고 경험적 시간과 공간의 현상으로서 이해 할수 없는 '새로운 질서' 라는 무질서가 표출된다. 동시성과 순간묘사가 작품의 줄거리이면서, 사건의 전개를 삼켜버린 까닭이다.
이중성
세밀하게 전부를 묘사하려는 시도가 작품의 전개도 줄거리도 없애버리는 반대작용을 일으켰던 것과 같이 작품 속의 현실은 속임이라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생을 말하면 사가 등장하고 색정을 이야기하면 곱추가 등장한다. 묘한 카프카적인 독특한 아이러니의 현상이다. 따라서 나타나는 현상은 제각기 이중적인 뜻을 지닌다. 모든 것을 진실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되며 다만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요세프 카는 체포되고 체포되었으면 행동의 자유가 없어야 하나 직장생활에 변화가 없을 정도로 자유롭다. 막 심문을 받고 난 뷔스트너양의 집에서는 거의 동시에 하나의 색정이 시작된다. 엄숙한 재판소를 이야기하면 바로 에로틱의 유희장이 등장한다. 카가 만날 수도 볼 수도 없는 어마어마한 재판관은 옥좌에 앉은 위엄 있는 인물이 아니라, 부엌의자에나 앉는 존재로, 전속화가 한테서도 마구 욕을 들어먹고 뇌물이나 받는 법원의 청소부에게도 덤벼드는 색마이다. 오히려 법관의 노리개 역할을 하는 법원의 하녀나 법원의 전속화가가 더 권력이 있어 보인다. 따라서 그들을 통해 도달 할 수 없는 법원에 들어갈 수 있는 것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현실과 기만이 무수히 반복되며 교체된다. 화가 티토렐리는 일상생활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법관의 기능이나 의의를 예술로 보이게 하는 책임을 진다. 그러므로 그가 그린 그림도 실물이 아닌 기능을 표현한 속임에 지나지 않는다. 현실을 논하면 기만이 등장하고 거짓을 말하면 진실이 부각된다. 모든 현상이 이중적인 대조로 부각된다. 말하자면 전 재판이 이중적인 기능을 가진다.
카와 부조리
카프카의 일생을 보면 그는 아무데도 속하지 못하는 이방인으로 이방세계외에서의 자기 존재를 상실하고 있다. 이방인으로 그곳의 세계율법을 모르고 소속되어 정착하고자 하는 노력이 곧 위법이라는 것을 카는 모른다. 몰랐으므로 죄가 없다고 주장하며 세계의 율법에 접근하나 그것이 자기 죄를 찾아 구하는 길이라는 것을 이방인이 알 리가 없다. 따라서 세계율법을 모르고 세계내에 들어 가려는 노력이 이방인에게는 도달할 수 없는 소망이다. 이 소망이 클수록 이방인이 바라보는 세계의 율법은 더욱 부조리 하게만 보인다. 그러므로 이방인은 세계에서 자기 존재를 찾는 수단으로 이 부조리를 파헤치지만, 세계는 복잡하고 꿰뚫을 수 없는 기괴한 관청기구 뿐이다. 인생의 전부를 기록하고 관리하는 <심판>이나 <성>의 구조내에, 그리고 세계의 율법에 도달하고자 하는 소망은 요세프 카에게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소속없이 떠다니던 전 유태인의 소원이기도 했다. 아니 아우슈비트의 강제집단수용소에서 유태인이라는 것만으로 죄가 되어, 구체적인 죄도 없이 아무런 재판도 없이 요세프 카마냥 개처럼 죽어간 카프카 자신의 세 여동생의 소망이기도 했다. 이 도달할 수 없는 법원 당국은 이방인으로 낯설기만한 카프카 자신의 낯설기만 한 생활현실의 비유였다. 카프카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예술적으로 묘사하고자, 하나의 불가능을 시도한 금세기의 위대한 작가였다.
카프카는 그의 소설 "성", "변신" 등을 통해 현대 부조리 문학의 선구자 중 한 명으로 일컬어집니다.
한국에서 이순신, 하면 영웅이고 박정희, 하면 근대화 뭐 이런 것처럼, 카프카란 이름도 그 부조리성을 대표하고 있는 것이죠.
카프카는 체코어로 <까마귀> 라는 뜻이다.
카프카라는 말 자체가 부조리라는 어원을 담고있지는 않고.
카프카가 쓴 소설이 부조리의 대명사처럼 되다보니_
카프카라고 하면 <부조리!>라는 말을 떠올리는 것이다..
'변신'에 대하여
갈래 : 중편 소설, 실존주의 소설
경향 : 실존주의적
성격 : 객관적, 사실적, 실존적, 내적 독백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그러나 그레고르가 자신의 상황에 몰입해 버린 나머지 치
1인칭 내부 시점과 같은 결과를 보인다. 그레고르의 의식의 내면이 독백의 형식으로 서술되며 어떤 화자도 끼어들지 않고 그레고르의 생각들이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 이 작품은 인물 서술 시점에 의해 씌어진 소설이다. 여기서 말하는 인물 서술 시점이란 작품 속의 화자가 작중 인물이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적게 말하는 시점으로서, 화자에 의한 객관적이고 해설적인 서술이 거의 없는 것이 특징이다. 다시 말해, 서술자가 이야기 속에 참견하는 것을 절제하고 소설의 인물들 뒤로 물러남으로써 독자 자신이 사건의 무대 위에 올라가 있는 듯한 환상을 갖게 하거나, 독자가 한 작중 인물의 눈을 통하여 작품 속의 세계를 관찰하고 있는 듯한 환영을 갖게 하는 시점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에서도 화자의 해설보다는 작중 인물인 그레고르 잠자 자신의 독백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레고르의 내면이 독자에게 훨씬 효과적으로 전달되고 있다. 물론 화자가 전혀 개입하지 않으므로 그레고르의 생각과 행동에 대한 판단은 독자 자신이 내려야 한다.
배경 : 시간(현대). 공간(독일 소시민 가정)
구성 : 왜 주인공이 벌레로 변신했는가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고 처음부터 이를 기정 사실로 다루고 있다. 놀라움이 없는 각성의 순간부터 이야기가 진행되며 그레고르가 죽고 가족이 평온을 되찾는 것으로 이야기는 귀결된다.
문체 : 보고(報告)조의 문체
제재 : 고독한 인간의 존재, 벌레로 변한 인간
주제 :고독한 인간 존재의 허무, 소외된 인간의 고독, 인간 실존의 허무
줄거리 :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는 어떤 평화스러운 꿈에서 깨어났을 때 침대 위에서 자신이 한 마리의 흉측한 벌레로 변신해 있음을 깨닫는다. 그레고르는 상과대학을 나와서 군대까지 마치고, 현재는 세일즈맨으로 살고 있다. 5년 전 아버지가 파산한 이후, 부모와 17살의 여동생 그레테를 부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급작스러운 불행으로 인해 그레고르는 분노와 절망감에 휩싸인다. 출근 시간의 기차 소리는 들려오는데, 자신의 몸은 거대한 벌레가 되어 수많은 다리들을 꼼지락거리고 있다. 출근시간이 지나도 기척이 없자 가족들은 문을 두드리고 회사의 지배인은 왜 그레고르가 출근하지 않는지 알아보려고 찾아온다. 불쾌해진 그는 그레고르의 수상쩍은 행동을 회사문제와 연관시켜 의심하고는 해고하겠다고 위협한다. 그레고르는 안으로 잠긴 문을 통해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려고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다. 얼마 후 힘들여 문을 열고 나간 그레고르의 모습을 본 지배인은 기절할 듯 도망치고 부모는 충격을 받고 당황해 한다. 아버지는 위협적인 동작으로 벌레를 다시 방으로 들여보내는데, 이때 그레고르는 큰 충격으로 상처를 받고 피를 흘린다. 이 일이 생긴 후에 하녀는 휴가를 내고 나가버리고, 아버지와 여동생은 취직을 하게 되며, 어머니는 바느질 일감을 구해와 밤을 새며 일을 한다. 여동생은 더 좋은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밤에는 속기와 불어도 배우러 다닌다. 그레고르는 바이올린을 좋아하는 여동생에게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고,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음악학교에 보내주겠다는 얘기를 하려고 했는데, 이런 당황스러운 일이 발생한 것이다. 주인공은 문틈으로 가족들을 관찰한다. 그의 모습에 질린 누이동생은 공포를 느끼며 그에게 음식을 갖다 주지만 그는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2주일 후 어머니가 그의 방을 찾아왔을 때, 그녀는 벌레의 형상에 놀라 실신하고 만다. 한번은 그레고르가 방에서 나가자 아버지는 분노한 나머지 벌레에게 사과를 던져 심한 상처를 입힌다. 게다가 살림에 보태기 위해 세 명의 하숙생을 한 방에 받게 되면서 그레고르의 방은 창고처럼 변해버린다. 어느 날 저녁 누이동생이 저녁식사 후에 하숙인들을 위해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을 때 음악에 이끌린 주인공은 거실로 기어 들어간다. 하숙인들은 벌레의 출현에 깜짝 놀라며 하숙을 해약하겠다고 위협을 한다. 누이동생은 벌레를 더 이상 오빠로 간주할 수 없다며 벌레를 없앨 모든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고 부모를 설득한다. 그레고르는 힘없이 자기 방으로 돌아와 시름거리다 결국 뻣뻣해진 모습으로 발견된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 이로서 하느님께 감사드려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하녀는 벌레의 시체를 치우고, 한결 가벼워진 가족은 행복한 기분으로 전차를 타고 산책을 간다.
의의 : 현대 문명 속에서 자기 존재의 의의를 잃고 살아가는 소외된 인간 모습을 형상화한 표현주의적 소설이며, 실존의 문제성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실존주의 소설로 간주되기도 한다.
특징 : 어느 날 아침 갑자기 거대한 갑충으로 변한 그레고르 잠자의 이야기를 통하여 돈 버는 기계가 아닌 새로운 '사적'(私的) 존재로서의 출발이 완전한 고립과 죽음으로 귀착됨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카프카는 일상에 당연한 것으로 침투해 있는 비합리성을 그 특유의 그로테스크하고 몽상적인 형상들과 간명한 언어로 폭로하고 있다
[이해와 감상]
카프카는 이 작품에서 돌연한 사태를 제시하여 인간 조건을 돌아보게 한다.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한 것은 작가의 자의적 설정이지만 그 사태 때문에 일상 생활에서는 눈여겨보지 않는 사람들의 관계를 독자는 새롭게 바라볼 수 있다. 이 작품은 동물을 소재로 취하고 있지만, 의인화된 동물을 등장시켜 사회를 풍자하는 전통적인 우화(寓話)와는 성격을 달리한다. 벌레라는 실체를 통하여 인간 상호간의 소통과 이해가 단절된 소외 상황을 암시한다. 그레고르가 생활비를 버는 동안 가족들은 그에게 감사한다. 하지만 그것이 습관이 되고 타성이 되면서 감사의 마음은 없다. 그러나 그가 벌레가 되어 버리자 존재가 문제시되고 그의 사회적 가정적 역할이 무엇이었는가가 재인식된다. 그러나 그의 빈자리는 곧 채워지고 만다. 아버지가 돈을 벌고 누이동생은 하숙생들과 음악을 연주하며 즐거운 생활을 보낸다. 이것은 그레고르가 죽었을 때 가족들이 교외로 놀러 가는 데서 단적으로 증명된다. 즉 그레고르의 실존의 자리는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감상2
가족을 위해 성실하게 일해 오던 선량한 세일즈맨 그레고르는 잠자는 어느 날 갑자기 한 마리의 거대한 벌레로 변신하게 된다. 벌레가 된 그는 모든 인간적 생활 관습으로부터 철저히 차단되고 소외된 상태에서 몇 달 동안 고생을 거듭하다가 스스로 비참한 죽음에 이른다. 이 작품은 동물을 소재로 취하고 있지만, 의인화된 동물을 등장시켜 사회를 풍자하는 전통적인 우화(寓話)와는 성격을 달리한다. 벌레라는 실체를 통하여 인간 상호간의 소통과 이해가 단절된 소외 상황을 암시한다.
가족들은 그레고르가 모든 힘을 다해 돈을 벌어 올 때는 감사하게 대한다. 그러나 그것도 습관화되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짐에 따라 고마운 마음은 줄어들고, 마침내 일상적인 것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벌레가 되어 쓸모 없는 존재가 되자 냉대하고 없어지기를 바란다. 이는 사회나 가정에서의 모든 인간 관계가 허위와 위선을 바탕을 두고 있음을 말한다. 인간의 순수한 본성이나 사랑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단절된 사회 속에서 개인은 소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감상3
카프카가 지은 중편 소설이다. 이 소설은 하나의 상상적인 현실 속에서의 사건으로부터 시작된다. 세일즈맨인 청년 그레고르는 어느 날 아침, 한 마리의 커다란 독충의 모습으로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처음에는 동정적이던 가족들도 점차로 그를 혐오하게 되고, 결국 그레고르는 죽음에 이르게 된다.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의 실존적 상황은 우리가 직면할 수 있는 현실적 상황이다. 이 소설은 이러한 인간의 가상적인 현실 상황 속에서 철저하게 고립되고 소외당한 현대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가족과 사회에서 소외당한 채 비극적인 종말을 맞게 되는 그레고르의 모습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상징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카프카는 제 1 차 세계 대전 이후의 중산층의 몰락과 대중 사회의 비인간화를 배경으로 하여 고독한 인간의 존재의 허무를 이 소설에서 보여 주고 있다. (출처 : 김태준 외 3인저 민문고 문학교과서)
감상4
이 작품은 카프카 생전에 간행된 소수의 작품 중의 하나이며, 변형 기담에 특유한 유머와 이상한 사건을 예사로운 일처럼 묘사하는 작자의 냉정하고 사실적인 문체는 독자로 하여금 실존(實存)의 차원과 부조리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박력을 지니고 있다. 언제 어느 상황에 처하게 될지 모르는 절망적인 세계 속에 유폐된 현대인의 소시민적 생활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카프카 문학 중에서 대표적인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실존주의 문학(實存主義文學)
1940∼50년대 프랑스에서 전개된 문학 경향의 하나. 존재의 부조리성에 대한 의식(존재에 대한 불안)에서 출발하여 자기의 본질을 완성시키기 위해 인생을 선택하고 책임있는 행동을 하며, <상황(situation)> 속에서 역사나 사회에 <참가(engagement)>하면서 그 상황을 인식, 극복하여 진정한 자유를 획득하려는 인간을 묘사하려고 하는 문학이다. 실존의식을 바탕으로하는 문학은 이전부터 있었으나(C.P.보들레르·G.모파상·F.M.도스토예프스키·F.카프카 등의 작품), 인간의 한 새로운 생활방식으로서 실존의 문제를 제기한 것은 제2차세계대전 뒤의 J.P.사르트르·A.카뮈·S.보부아르 등의 문학이었다.
이와 같은 문학의 발생 계기가 된 것은 20세기 전반에 거듭되었던 전쟁과 동란이었다. 특히 제2차세계대전에 의해 인간은 자기의 개성과 본질 및 그것들이 형성하는 자유가 역사·사회 및 현실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가를 깨달았다. 그래서 신이 본질을 만든다고 하는 종래의 사고방식을 거부하고 본질에 선행하는 <존재(存在)>, 즉 <즉자(卽自, ensoi;단순히 존재함)>에서 <대자(對自, poursoi;존재함에 대한 의식)>로 이행하는 <존재>를 중심명제로 한 무신론적 실존주의가 각광을 받게 되었다.
카프카의 실존주의 문학
카프카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현대인을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의해 일체의 관계를 박탈당한 채 고독한 상태에 빠져 있는 것으로 묘사하였다. 그리고 기계 문명에 의한 인간의 자기 소외와 공동 사회에 대한 개인의 대립 속에서 인간 실존의 자각을 모색하였다. 즉, 그의 문학은 '인간은 어떻게 존재하고 있으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가장 근본적인 주제를 다루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카프카의 문학 세계는,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부조리로 규정하면서 그 부조리로부터 벗어나 인간의 참된 존재인 실존을 회복하려 했던 실존주의와 거의 일치하고 있다.
<카프카의 문학세계>
카프카의 많은 우화들은 정상적인 것과 환상적인 것이 종잡을 수 없이 불가해하게 뒤섞인 혼합물이다. 그러나 때때로 기묘함은 문학적 또는 표현장치의 소산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를테면 병리상태의 기만성에 현실의 지위가 부여되거나, 일상적인 발언의 은유가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지기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판결〉에서는 아들이 추호의 의심도 없이 늙은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자살하며, 〈변신〉에서는 잠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기괴하고 흉칙한 벌레로 변해 있음을 발견한 아들이 가족의 수치감과 무시뿐만 아니라 자책 어린 절망감으로 인해 서서히 죽어간다. 더욱 불가해한 이야기들도 많다. 〈유형지에서〉라는 작품에 등장하는 장교는 자신의 의무에 헌신적임을 과시하려고 스스로를 고문도구로 무시무시하게 절단하는(분석적으로 묘사됨) 조처를 받아들인다. 맡은 임무의 모호한 가치와 그 임무에의 기괴한 헌신이라는 이 주제들은 카프카가 항상 열중하여 다루는 문제들 가운데 하나로, 〈굶주린 예술가〉에서 다시 등장한다. 나중에 〈심판〉에 삽입된 이야기 〈법 앞에서 Vor dem Gesetz〉(1914)는 접근하기 어려운 의미(법)와 그것에 대한 인간의 끈질긴 열망을 보여준다. 카프카의 생애 마지막 시기인 1923~24년에 씌어진 글들은 모두 이해와 평정을 얻기 위한 개인의 허영심, 그러나 굽히지 않는 투지에 집중되어 있다.
단편소설에 나타난 많은 주제들은 장편소설에서도 등장한다. 예를 들어 〈아메리카〉의 주인공인 소년 카를 로스만은 가족에 의해 미국으로 보내지는데, 거기서 아버지와 같은 유형의 많은 인물들과 은신처를 찾고자 애쓰지만 그의 순진성과 단순성으로 인해 어디서나 이용당하며, 마지막 장의 묘사에 따르면 꿈의 세계인 '오클라호마의 자연극장'에서 일자리를 얻게 된다. 카프카는 로스만이 궁극적으로 파멸하게 되리라고 말한 적이 있다. 〈심판〉에 나오는 능력 있고 양심적인 은행원이자 독신자인 요제프 K.는 그를 체포하러 온 사람에 의해 잠이 깬다. 치안판사의 법정에서 행해지는 심문은 환멸스러운 어릿광대극으로 바뀌고 그가 체포된 혐의는 결코 설명되지 않는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법정은 더이상의 발의권을 갖지 못하지만, 요제프 K.는 스스로 접근할 수 없는 법정을 찾아 그가 알지도 못하는 죄로부터 무죄 석방을 받기 위해 전념한다. 그는 중재자들에게 호소해보지만 그들의 충고와 설명은 오히려 새로운 혼란을 가중시킬 뿐이다. 터무니없는 책략을 써보기도 하지만 더럽고 어둡고 음탕한 결과만을 초래했다. 한 성당에서 쉬고 있을 때, 어떤 신부가 나타나 결백성을 주장한 것 자체가 죄의 표지이며 그가 억지로 찾아나서게 된 정의의 문은 영원히 열리지 않으리라고 말한다. 결국 그가 여전히 주위에 도움을 청하면서 최후까지 저항하지만 결국 형이 집행되는 것으로 이 소설은 마감된다. 카프카의 가장 암울한 작품으로, 악은 도처에 있으며 무죄 석방이나 구제는 얻을 수 없는 것이고 광란의 노력은 다만 인간의 현실적인 무능을 가리킬 뿐임을 보여준다.
카프카의 후기작품 가운데 하나인 〈성〉의 무대는 어떤 성의 지배를 받는 조그마한 촌락이다. 이곳의 겨울 풍경 속에서 시간은 흡사 정지해버린 것 같고 거의 모든 장면은 어둠 속에서 벌어진다. K.는 성 당국이 임명한 측량기사라고 주장하며 마을에 도착하지만, 마을 관리들은 그의 주장을 물리친다. 이 소설은 K.가 성으로부터 다시 인정받으려고 노력하는 과정을 그린 것이다. 성에 있는 사람, 그럴 권한이 있는 사람은 요제프 K.(〈심판〉의 주인공)의 법정만큼이나 접근하기 어렵다. 그러나 K.는 희생자가 아니라 공격자로서, 하찮고 거만한 관리들과 그들의 권위를 받아들이는 마을사람들 모두에게 도전한다. 그렇지만 그의 책략은 모두 실패한다. 요제프 K.처럼 그 역시 하녀와 사랑을 나눈다. 그러나 술집 여급 프리다는 그가 그녀를 단순히 이용하는 것뿐임을 알게 되자 그를 떠난다. 브로트의 말에 따르면 카프카는 K.가 온갖 노력 끝에 탈진하게 되지만 임종의 자리에서 그 마을에 머물러도 좋다는 허락의 통지를 받게 할 의향이었다고 한다. 이 소설에서는 새로운 요소들이 보인다. 이 작품은 비극적이지만 황량하지는 않고, 대부분 카프카의 인물들이 역할자에 불과하지만 프리다는 확고한 개성을 지니며 냉정하고 사실적인 성격으로 나타난다. 프리다를 통해 K.는 해결의 실마리를 조금이나마 통찰하게 되며, 그가 애정을 갖고 그녀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고독감을 뚫고 나갈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카프카의 작품은 단편이건 장편이건 모두 풍부한 해석을 야기시켰다. 브로트와 카프카의 영어 번역자인 뮤어 부부(윌라와 에드윈)는 카프카의 소설들을 성총의 상징으로 보았고, 실존주의자들은 카프카의 죄와 절망의 세계를 진정한 실존을 건설할 토대로 간주했으며, 어떤 사람들은 노이로제 증세를 보일 정도로 아버지에게 얽혀 있는 상황을 그의 작품의 핵심으로 보았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사회적 비판, 권력자와 그 대리인의 비인간성, 정상적인 일상 밑에 웅크리고 숨어 있는 폭력과 야만성을 강조했다. 〈심판〉에 등장하는 정체불명의 마구잡이 관료주의에 대한 공포를 통해 카프카가 풍부한 상상력으로 전체주의를 예견했음을 발견해낸 사람들도 있고, 초현실주의자들은 부조리의 끊임없는 침투를 보며 기뻐하기도 했다. 이런 각각의 해석들의 타당한 증거를 작품이나 일기에서 찾아낼 수는 있으나, 카프카의 작품 전체는 이 모든 것을 넘어선다. 어떤 비평가가 그의 작품들이 '열린 비유'로서 결코 그 최종적 의미를 매듭지을 수 없다고 평한 것은 이 점을 가장 정확히 표현한 말일 것이다. 그러나 카프카의 작품에도 한계는 있다. 각 작품마다 절망적으로, 그러나 항상 내면에서 의미와 안정, 자기 가치와 목적 의미를 추구하면서 정신과 육체 양쪽으로 고통받는 인간이 등장한다. 카프카 자신은 글쓰기와 그것이 뜻하는 창작활동을 '구제'의 수단으로, '기도의 형식'으로 생각했고, 이를 통해 세상과 화해할 수 있거나 세상에 대한 부정적 경험을 넘어설 수 있으리라 여겼다. 투명하게 묘사되었지만 불가해하게 어두운 그의 작품들은 카프카 자신의 개인적 노력이 허사였음을 폭로한다. 무력한 인물들과 그들에게 닥치는 기이한 사건들을 통해 작가는 20세기 세상 속의 불안과 소외를 폭넓게 암시하는 매혹적인 상징주의를 이룩했다.
죽을 무렵 카프카가 사귄 문학인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카프카는 막스 브로트에게 출판되지 않은 원고는 전부 없애고 이미 인쇄되어 나온 작품은 재판 발행을 중지해달라고 유언했는데, 브로트가 그의 유언대로 했더라면 카프카의 이름과 작품은 살아남지 않았을 것이다. 브로트는 유언과는 반대의 길을 밟았고, 그로 인해 카프카의 이름과 작품이 사후에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게 된 것이다. 그의 명성은 처음 히틀러 점령시 프랑스와 영어 사용국에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카프카의 세 누이동생이 강제수용소에 유배되어 살해된 것이 바로 그때였다. 그가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재발견되어 독일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것은 1945년 이후였고, 1960년대에는 공산 체코슬로바키아의 지식인·문학계·정치계까지 영향력이 확대되었다.(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그레고르'의 가족관
세일즈 맨 그레고르는 열심히 일을 하여 가족의 생계를 꾸려 나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희생이 가족들에게 행복과 만족을 가져다 주는 것으로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생각은 착각이었다. 왜냐 하면, 가족들은 그가 벌레로 변했을 때 그를 냉대하고 죽어 버렸으면 하고 바라기까지 한다. 뿐만 아니라 가족들은 그가 죽었을 때 활기찬 모습까지 보였었다. 그러므르 그레고르의 희생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이렇게 보면 사랑을 베풀지 않음으로써 그레고르를 죽게 만든 가족들은 모두가 사랑보다는 물질적 이익을 더 중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