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의 세도정치
9반 전명수
본래 세도정치(世道政治)라 함은 조광조가 도학의 원리를 정치사상으로 심화시킨 데서 주창된 사림(士林)들이 표방하였던 통치원리이다. 그것은 천리를 밝히고 인심을 바르게 하며 정학을 북돋우는 일 등을 뜻하는 말이다. 이러한 세도정치가 성립되기 위하여 공정한 언론과 인재의 등용, 그리고 군주의 신임이 있어야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말기의 정치행태는 각 계파 간에 시비와 분열이 일어나고 사화와 당쟁으로 비화된 변태적인 세도정치를 낳고 말았다. 척신이 권력을 장악하는 정치를 세도정치라 하였는데 이때의 세도는 사림정치가 지향하였던 본래의 세도(世道)가 아닌 독재정치였기 때문에 세도(勢道)라 표기하였다.
1800년 정조가 죽고 순조가 11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영조의 계비이며 김귀주의 누이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김조순의 딸을 순조의 비로 들이는데 성공하게 되었다. 1804년 김대비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1805년 세상을 뜨게 되자 이때부터 안동김씨가 세도정치를 시작하게 되었다. 김조순은 정조의 신임을 받던 시파(時派)이지만 벽파(辟派)정권에 협조하면서 겉으로는 전혀 당색을 드러내지 않고 모난 행동을 하지 않았다. 정순왕후가 죽자 벽파일당의 세조정치가 끝이 나고 순조의 외척인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힘을 얻게 되었다.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가 풍양조씨 집안의 규수를 세자빈으로 삼았으나 세자가 일찍 죽었고 그의 아들 헌종이 8세의 어린나이로 등극하자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아래 김조순의 아들 김좌근이 정권을 잡아 안동김씨의 독재정치가 지속하게 되었다. 또 김조근의 딸이 헌종의 비로 간택됨에 따라 이들의 세도는 그대로 이어졌다. 그 이후 순원왕후의 손자인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조대비의 척족인 풍양조씨가 왕위를 세울 것을 염려하여 재빨리 손을 쓰게 되었다. 헌종의 6촌 이내의 왕족은 아무도 없었고 7촌 이상의 왕족은 몇 명 있었다. 그래서 안동김씨 척족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함과 동시에 세도정치의 기반을 확실히 다지고자 헌종의 7촌 아저씨뻘 되는 강화도의 농사꾼 원범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였다. 그러고는 김문근의 딸을 철종(원범)의 비로 간택하여 고종이 즉위하여 흥선대원군이 섭정하기 까지 60년 동안 안동김씨가 정국을 휘어잡았다.
안동김씨의 세도가 얼마나 드세었던지 남자를 여자로 만드는 일 이외는 못하는 일이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1851년 철종의 장인이 된 김문근은 철종을 보살핀다는 핑계로 거의 모든 정국으로 장악하고 말았다. 조카 김병학을 대제학에, 김병국이 훈련대장, 김병기가 좌찬성을 맡아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렇게 왕권을 배제시킨 세도정권은 견제세력이 없는 상태에서 삼정문란으로 수탈정책이 극을 향해 치달렸고 모든 법도가 안동김씨 일파에 의하여 좌우되었다. 뇌물의 성행은 물론 매관매직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 돈을 주고 관직을 산 수령은 백성들을 착취하여 그것을 벌충하였으며 이와 같은 수령의 부정에 편승한 아전들의 횡포도 백성들의 고혈을 짜는 것이었다. 도학을 논의해야할 서원이 세도정치의 소굴이 되었으며 불법적인 수세권을 발동하여 백성들을 괴롭히고 왕권을 침해하는가 하면 관령(官令)보다 그 위세가 당당한 묵패로 향촌민에 대한 착취를 서슴지 아니하였다. 또한 무관의 자제들이 활 한 번 쏘아보지도 않고 오로지 가문의 덕을 입어 벼슬길에 오르기도 하였다. 반세기를 넘도록 안동김씨 시파계 일문의 독재는 세도정치의 온갖 병폐를 전형적으로 드러내어 전국적으로 삼정의 문란이 극심해졌고 잦은 민란이 발생하였다. 그것이 곧 세도정치를 발전시키고 붕괴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삼정문란 중에 전정(田政)을 보면 본래 토지의 전세보다 부가세가 더 많았으며 총부가세의 종류만 43종이나 되었고 토지세는 소유지인 지주가 물어야 함에도 땅을 빌려 농사를 짓는 농민들이 물고 있었다. 그리고 지방 아전들의 농간으로 빚어지는 허복, 방결, 도결 등이 겹쳐져 전정의 문란이 고질화 되었다. 군정(軍政)은 양반의 중가와 군역 부담에서 벗어난 양민의 증가로 가나한 농민들에게 그 부담이 집중되었다. 정부에서는 각 고을의 형세에 따라 군포를 차등 부과하였는데 지방관은 그 목표량을 채우기 위하여 죽은 사람에게 군포를 부과하는 백골징포, 어린아이에게 부과하는 황구청정 등을 감행 하였다. 환곡(還穀)은 본래 관청에서 양민에게 이자 없이 빌려주는 곡식이었는데 비싼 이자를 붙이거나 환곡의 양을 속여서 가을에 거두어들일 때 골탕을 먹이는 등의 수법을 사용하여 농민들의 생활을 파탄으로 몰아넣는 관리들이 비일비재하였다.
이와 같은 현상은 세도정권이 공공연하게 매관매직을 통한 관가의 문란과 더불어 세도정권을 배후로 삼은 지방토호세력의 횡포아래에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삼정문란이 겹쳐져 급기야 민란이 발발하게 되었는데 철종 대에 전국에서 37차례나 민란이 발생하였으며 그 대표적인 민란이 진주민란이었다. 경상 우병사 백낙신의 탐학과 착취에 있었다. 그가 몇 년간 착취한 돈이 5만양에 달하였고 쌀로 환산하면 1만5천석이나 되는 엄청난 양이었다. 진주목의 관리들이 불법적으로 축낸 공전이나 군포를 보충하기 위하여 모두 결세에 부가시켜 해결하려 하였는데 그 양이 2만8천석, 축이 난 환곡이 2만4천석이나 되어 농민의 부담이 급격히 가중되었다. 이에 진주일대의 농민들이 스스로 초군이라 부르며 머리에 흰 띠를 두르고 진주성으로 쳐들어갔는데 그 수가 수만 명에 이르렀다. 이와 비슷한 민란이 전국적으로 일어난 근본 원인은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로 매관매직과 부정부패에 기인한 것이었다.
첫댓글 천리를 밝히고 인심을 바르게 하고자했던 좋은도학의 원리도 권력에 눈이 어두운자들이 세도정치를하면 농민들의 생활이야 이루말할 수가 없을 정도로 참혹하였겠지요. 우리나라뿐 아니고 세계의 역사서를 읽어보면 그런자들의 말로는 비참하였지요. 좋은 역사를 배우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건강하세요
권력을 휘두르며 세도 정권을 장악한 안동김씨의 횡포는 극치에 달하엿으며 그로인해 선량한 농민들이 착취를 당하는 참혹한 일이 수없이 많았겟지요 예나 지금이나 권력의 말로는
비참한 현실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지금 정치하는 사람들이 알앗으면 하네요 좋응 역사 잘배우고 지나갑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 하십시요.
안동김씨는 세도정치(世道政治)을 하지 않고, 세도정치(勢道政治)를 하였네요. 세도정치(勢道政治)의 피해가 극심하였네요. 잘 읽고 나갑니다. 행복하세요, 송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