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슈바이처’ 故 이종욱 WHO 사무총장 서거 1주기를 맞이하며
반기문 UN 사무총장 때문에 온 나라가 떠들썩하다.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되어 전 세계에서 구호물자를 받던 가난한 나라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 불과 반세기만에 가장 권위 있는 국제기구의 수장을 탄생시켰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까.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잊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2006년 5월 22일 타계한 한국인 최초의 UN 전문기구 수장인 이종욱 WHO(세계보건기구) 사무총장이다. 이종욱 박사는 1983년 WHO 서태평양 지역사무소의 한센병 자문관으로 국제기구 생활을 시작한 이후 20여 년간 스위스 제네바의 WHO 본부에서 활동해온 탓에 국내에는 이름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브룬트란트 노르웨이 수상이 UN 사무총장 자리를 마다하고 선택한 자리가 WHO 5대 사무총장이었다. 그만큼 기구의 중요성과 위상이 높고, 국제기구 서열로도 세 번째인 곳이 WHO인 것이다. 전 인류의 건강 증진과 질병 퇴치를 책임진 WHO에 처음으로 한국인이 6대 사무총장이 되었음에도 한국은 조용했고, ‘아시아의 슈바이처’ ‘백신의 황제’ ‘Man of Action' 등 이종욱 박사의 뛰어난 업적에 세계가 칭찬을 하고 있는 동안 역시 한국은 무덤덤했다. 더욱이 과로로 쓰러져 서거할 때조차도 전 세계가 애도의 물결로 눈물을 쏟고 있지만 한국은 월드컵의 열풍에 휩싸이고 말았다. ‘전 인류의 주치의’이자 ‘성자’와도 같은 이종욱 박사의 삶과 업적은 세인들의 기억 속에서 그렇게 잊혀 갔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인 권준욱 씨에 의하면, WHO에서는 ‘Dr. LEE jong-wook Award’를 제정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고 한다. 지난 3월 15일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 박종화 총재가 직접 제네바의 WHO 본부를 방문해 마거릿 찬 WHO 7대 사무총장과 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내년 총회를 통해 확정할 예정이다. 또한 오는 4월 7일부터 이틀간 서울에서 열릴 예정인 제1차 한·중·일 보건장관회의에 참석할 예정인 가오치앙(高强) 중국 위생부 부장이 그 전일인 4월 6일 대전 국립묘지를 방문해 이종욱 박사의 묘소를 참배할 예정이다. 우리나라 국회에서는 장복심 의원 등 여야 의원 46명이 2006년 12월 27일 故 이종욱 WHO 사무총장과 같이 인류의 건강 증진과 질병 퇴치에 크게 공헌한 사람에 대한 기념사업을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에서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법 일부 개정 법률안’을 국회에 공동 발의한 상태이다.
책 곳곳에서 발견되는 국제기구의 생활상들도 재미난 읽을거리
늘 공부하고, 또 공부해야 한다. - WHO에서는 일정 직급 이상 올라가면 기구 내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사안들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 한다. 더 나아가 거기에 대해 자신만의 깊이 있는 의견을 내놓을 수 있어야만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곳에서 생존할 수도 없고, 리더가 될 수도 없다. - WHO에서 생활하면서 말없이 앉아 있는 것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 WHO에서는 끊임없이 회의나 토론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시험 당하게 된다. - 결핵국장인 마리오 박사는 미국 하버드 의대 출신이자 미국 의학 교과서의 결핵 분야 저자이다. 즉 의학 교과서의 해당 분야를 쓸 수 있을 정도의 전문가여야만 WHO의 국장을 지낼 수 있다는 의미이다(물론 우리나라 여느 조직처럼 아랫사람들이 예우로 윗사람들의 논문을 써주거나 하는 경우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 우리로 치면 과장급에는 런던 대학 교수 출신도 있고, 매년 주요 저널에 논문을 싣는 전 세계 어느 곳에 내어놓아도 실력으로 뒤지지 않을 사람들이 있다. 사생활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 2004년 쓰나미(津波. tsunami)가 발생했을 때, 저녁 7시 HAC(Health Action Crisis, 위기대응국) 상황실에는 근무자가 아무도 없었다. 사생활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유럽인들의 입장에서는 근무시간이 끝난 후에는 퇴근하는 것이 정상적인 일이었다. - WHO의 규정대로라면, 오후 5시부터 퇴근을 시작해서 6시에는 거의 전 직원들이 퇴근을 한다. 그 이후까지 남아 있는 직원들은 역설적이지만 평직원들이 아니다. 직급과 근무시간이 비례한다고나 할까? 높은 직급이나 직위일수록 퇴근시간이 늦다. 사무총장은 국가원수 예우를 받지만, 사무총장의 업무는 사무총장이 한다. - WHO 사무총장은 국빈 방문으로 국가원수 예우를 받는다. - 한국에서는 장관이나 차관의 언론 인터뷰의 경우, 미리 기자들에게 질문지를 받아서 답안을 담당자들이 작성하고 정작 인터뷰 시간에는 이를 확인하는 식으로 진행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WHO에는 총장용으로 마련한 모범답안이 전혀 없다. 사무총장의 인터뷰는 그의 업무의 한 영역이기 때문에 총장 자신이 준비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 사무총장도 항상 평직원들과 나란히 줄을 서고 차례를 기다려서 식판에 음식을 담아 계산한다. 또 자신의 사무실에서 커피 한 잔 시켜 마실 수 없는 곳이 WHO이다. 마시고 싶으면 자신이 직접 커피를 타거나 카페 등에서 사야 한다. - 2004년도 WHO 총회를 치를 때, 대한민국 대표단을 공항 내 출입국 수속 전 장소까지 들어가서 맞았다. 그것이 우리 사회에서 당연한 일처럼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에 비해 WHO에서는 참으로 소박하게도 짐을 찾는 장소에서 사무총장을 기사가 맞이하는 것이 고작이다. 그것도 사무총장이 바쁘기 때문에 거기서 만나야 바로 본관으로 직행해서 일을 할 수 있다는 현실적인 이유였다. 2005년 10월, 코피 아난 UN 사무총장이 WHO 제네바 본부를 방문했다. 당시 제네바 정가에서는 차기 UN 사무총장으로 이종욱 박사를 거론했다. 국제기구의 삶은 정글의 그것과 같다. - WHO를 불어로는 OMS(Organisation Mondiale de la Sante)라고 부른다. 그러나 농담으로 직원들은 OMS를 이혼기구라는 뜻의 ‘Organization of Marital Separation’이라 하는데, 워낙 해외 출장이 많고 업무 부담이 큰 WHO 생활을 풍자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즉 가족을 해체할 만큼 일이 많은 조직이라는 것이다. - 국제기구에서도 견제와 시기, 질투와 모함을 넘어 고단수의 모략도 실재한다. WHO는 평등이 지배하는 곳이 아니며 알게 모르게 인종적 우월성, 본국의 국력 그리고 언어의 장벽을 이용한 태생적인 배타성도 엄연히 존재한다. 마치 자신이 제안한 의견인 것처럼 보고하면서 실적을 가로채기도 하고, 사석에서 나눈 대화를 왜곡해서 전달하기도 한다. - WHO에서는 사무총장이 발표나 발언을 한다고 해서 질문이 없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책임이 큰 자리이기에 직원들은 더욱 가차 없이 실무적인 질문을 사무총장에게 던진다. 심지어 동지중해 지역사무소장이 ‘말로만 지원, 지원 하지 말고 실제로 돈을 현장으로 보내 달라.’는 말까지 했다. 한국에서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 일들이지만 WHO에서는 이런 일을 당연시 했다.
이종욱 박사는 특히 국제기구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 젊은이들에게 자주 이렇게 말했다. “화려한 외교관을 상상하지 마라. 그리고 편협한 인종주의와 속 좁은 애국심 같은 것으로는 국제기구에서 견디기 힘들다. 더군다나 열정 없이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죄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