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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욕(五慾)’이란°○
중생심을 가진 인간이면 누구나 갖고 있는 다섯 가지 기본적인 욕망을 말한다.
즉, 식(食)ㆍ성(性)ㆍ재(財)ㆍ수(壽)ㆍ권(權) 다섯 가지 욕심을 말한다.
이를 오묘욕(五妙慾)ㆍ묘색(妙色)ㆍ묘오욕(妙五慾)이라고도 한다.
➀ 식욕(食慾)은 좋은 음식을 먹고 싶은 욕구이고,
➁ 성욕(性慾)은 종족번식을 위한 이성에 대한 욕구이며(색욕/色慾),
➂ 재욕(財慾)은 재물, 재산과 돈을 많이 가지고 싶은 욕구이고(물욕/物慾),
➃ 장수욕(長壽慾)은 오래 살고 싶은 욕구로서, 자기 몸 가꾸는데, 골몰하는 것이며(혹은 수면욕/睡眠慾),
➄ 권력욕(權力慾)은 유명해 지고, 출세하고 싶은 욕구이다(명예욕/名譽慾).
그런데 보통 오욕(五慾) 칠정(七情) 이라 해서 오욕에 칠정(七情)을 더해 말한다.
칠정은 인간이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일곱 가지 감정을 말한다.
위의 오욕에다가 희ㆍ노ㆍ애ㆍ락ㆍ애ㆍ오ㆍ욕(喜怒哀樂愛惡慾)의 칠정을 더한 것을 말한다.
그런데 칠정을 기쁨(喜), 성냄(怒), 근심(憂), 두려움(懼), 사랑(愛), 미움(憎), 욕심(欲)이라고 하기도 한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내 자신이 편안하고, 집안이 편안하고, 사회가 편안하고, 국가가 편안하고, 세계가 편안하려면, 5가지 도적인 오적(五賊) 을 잘 다스려야 한다.
중국의 고전인 <황제음부경(黃帝陰符經)>엔 천유오적(天有五賊)이라 했다.
하늘엔 5가지 도적이 있는데,
오적재심(五賊在心)이라, 그 5가지 도적은 바로 자기 마음 안에 있다는 것이다.
선행이나 악행이나 모두 마음에 의해 표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오적은 바로 오근(五根)을 말한다.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 다섯이 오근이 곧 오적이라는 말이다.
①안(眼)=눈, 눈은 좋은 것, 아름다운 것, 마음에 드는 물건이나 이성을 찾아서 가지려고 혈안이 된다. → 성욕
②이(耳)=귀, 귀는 좋은 소리, 칭찬하는 소리, 아름다운 소리만 들으려 하고, 쓴 소리를 싫어한다. → 명예욕
③비(鼻)=코, 코는 향기로운 냄새, 익숙한 냄새만 좋아한다. 돈 냄새, 쿠린 것을 잘 맞는다. → 재욕(물욕)
④설(舌)=혀, 혀는 달콤하고 맛있는 음식만을 골라 탐한다. → 식욕
⑤신(身)=몸, 몸은 부드러운 촉감, 감미로운 촉감, 따스한 촉감을 좋아하고, 자기 몸 가꾸려고만 한다. → 수면욕 혹은 장수욕.
이는 인간에게 있어서 모든 욕망의 근원이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 오근이고,
이의 대상인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의 다섯 가지 경계(五境)에 따라 일어나는 다섯 가지 욕망을 오욕이라 하는데,
이를 다른 말로는 오진(五塵)이라고도 한다.
욕심은 일시적으로 괴로움을 피하고 즐겁고 기쁜 마음을 갖기 위한 것이다.
즐겁고 기쁜 마음은 상대적으로 괴롭고 슬픈 인과가 따르기 마련이다.
그에 따른 과보가 생겨서 다시 고통과 괴로움이 세계에 빠져들게 된다.
맹자는 '식색성야(食色性也)',
즉 식욕과 색욕은 인간이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고유한 본성이라 했다.
살아 있기 위해서는 먹는 문제가 중요하고, 삶을 영속하기 위해서는 자손을 퍼뜨려야 한다는 뜻이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먼저 살아있어야 한다.
살아있다는 것은 자기보존 내지 종족보존을 뜻한다.
그리고 살아있기 위해서는 건강과 함께 생계수단이 든든해야 하고 자손이 많아야 한다.
맹자(孟子)는 '생계수단이 든든해야 마음도 든든해지지, 생계수단이 고단하면 마음이 불안해진다고 했다
[유항산 유항심(有恒産有恒心) 무항산 무항심(無恒産無恒心)].
따라서 백성들이 물질적으로 부족하지 않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함을 말한다.
그런데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 눈앞에 재물을 보면 가지고 싶어 하는 과욕의 마음이 생기고,
포난생음욕(飽暖生淫慾)라, 배부르게 먹고 따뜻이 입으면 자연히 음욕이 생긴다는 것이다.
따라서 저절로 재욕과 성욕이 생겨나니, 덩달아 권력욕과 장수욕이 생겨나서 사바세계를 연출하게 되므로 청심절욕(淸心節慾)이라,
맑은 마음으로 욕심을 억제해야 한다고 했다.
삼계(三界)란 불교의 세계관으로 우리 중생들이 윤회하는 세계 즉 욕계(欲界)ㆍ색계(色界)ㆍ무색계(無色界)를 말한다.
욕계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중생계로, 음욕(淫慾)과 식욕(食慾) 수면욕(睡眠慾) 등 오욕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욕망의 세계이다.
이 욕계를 다시 세분하면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으로 육도(六道) 세계라고도 한다.
따라서 삼계(三界)의 윤회는 음욕을 근본으로 하고 육도(六道)의 오고감은 사랑을 뿌리로 해서, 오욕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좋은 것에 집착하지 말라. 싫고 나쁜 것이 생겨난다. 그러므로 매사에 감정을 얹지 말라. 좋다 하는 감정을 내지 않아야 싫고 나쁜 감정의 업이 생겨나지 않는다. 그리하면 저절로 평안이 찾아온다.…
좋은 것이 생기면 싫은 것은 저절로 생긴다. 영원하지 않는 고락의 분별 속에서 중생은 ‘좋다 싫다’ 하며 고락을 윤회(輪廻)하게 된다.
다시 말해, 고(苦)가 낙(樂)이 되고 낙이 고가 되는 고락의 분별이 돌고 도는 삶을 살게 한다.
좋다는 것과 싫다는 것의 질량은 똑같다.
이를 업(業)이라고 한다.
오늘도 분별하지 않고 중도(中道)의 마음을 가지라는 말밖에 할 말이 없다.
그러기 위해선 기도와 참선, 보시와 정진도 함께 할 일이다.」― <만선동귀집 총송>
그런데 괴테(Goethe)는 이르기를
“꽃을 주는 것은 자연이고, 그 꽃을 엮어 화환을 만드는 것은 인간의 예술이다.”라고 했다.
우리 인간은 다섯 가지 욕심은 버리고 정(情)을 살갑게 나누며 아름답고 멋진 사랑의 화한을 만들어야 하겠다.
<능엄경>"에는 내가(佛) 손가락을 누르면 해인(海印)이 빛을 발하지만 그대가(중생) 마음을 움직이면 번뇌(煩惱)가 먼저 일어난다고 했다.
중생은 갖가지 은애(恩愛)와 탐욕(貪慾)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마음이 움직였다 하면 번뇌를 양산해 윤회하는 것이고, 모든 세계의 일체 종성(種姓)의 난생(卵生), 태생(胎生), 화생(化生), 습생(濕生)은 모두 음욕(淫慾)으로 인해 성명(性命)을 이루므로 윤회는 원초적인 사랑을 근본으로 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중생은 오욕락(五慾樂)을 탐하고, 그것을 즐기려 하는 것이다.
5욕을 즐기는 것을 오욕락(五慾樂) 이라고 한다.
그러나 수행을 통해 오욕을 멀리하면 할수록 법락(法樂)을 즐길 수가 있다.
우리는 깨달음의 법락을 미처 맛보지 못해서 그러는데, 사실은 욕계를 떠나면 떠날수록 인간의 참다운 법락은 더욱더 증가되며, 그 법락은 한도 끝도 없다고 한다.
부처님께서
“비구들이여! 너희들이 이미 내가 제정한 계율(戒律)을 잘 지키고 있다면, 이제 마땅히 너희들의 눈과 귀, 코, 혀, 몸을 잘 다스려 오욕락(五欲樂)에 빠져 방탕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계를 어기는 것은 욕심을 채우려 하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소를 기르는 목동이 막대기를 들고서 소들이 제멋대로 흩어져 인간들이 가꾸어 놓은 논, 밭에 들어가 곡식을 먹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것과 같이 너희들의 감각기관을 잘 다스려야 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만약 오관의 감각기관이 원하는 대로 그냥 내버려두면 오욕락에 빠져들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걷잡을 수 없는 욕망의 늪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욕망은 다스려야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야생마와 같이 거세게 날뛰기 때문에 반드시 재갈을 물리어 잘 훈련시켜 놓지 않으면 결국에는 주인을 끌고 가서 낭떠러지에 떨어지게 하고 말 것이다.
칼을 든 도적에게 겁탈을 당하면 그 슬픔의 고통이 한 평생으로 끝나게 되지만 욕망의 도적으로부터 피해를 입으면 그 재앙이 누대(累代)로 이어가게 된다.
그 해악이 이렇게 심하고 깊으니 단연코 삼가야 할 것이다.
다섯 가지 감각기관 즉, 눈, 코, 귀, 혀, 몸의 감촉 기능은 수억겁 전부터 지금까지 줄기차게 죄업(罪業)으로 진화돼오고 또 발달돼왔다.
눈은 좋고 예쁜 것에, 귀는 좋은 소리, 칭찬하고 아부하는 말에, 코는 좋은 냄새, 향기로운 냄새에, 혀는 좋은 음식, 좋은 술에, 그리고 몸은 부드럽고 매끄러운 촉감을 찾아서… 인간은 전생에도 동분서주 했고, 현재에도 그렇게 하고 있으며, 미래에도 분명히 그렇게 하게 될 것이다.
오래지 않아 썩어 없어질 이 다섯 가지 감각 기관을 충족시키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이리저리 바쁘게 허둥대며 쫓아다녀왔다.
이 육신이야말로 허망하고 무상(無常)하다.
평생을 다듬고, 보호해주어도 떠나갈 때가 언제인지도 모르고 허둥대다가 어느 날 갑자기 배신하듯 죽게 된다.
그래서 죽어가는 사람이 두 눈을 부릅뜨고 분통을 터뜨리는 것이다.
한평생 이 육신의 감각 기관을 흡족 시키기 위해 온갖 궂은일을 마다 않으면서 그 수많은 죄업을 무섭게 지으며 받들어 왔는데, 이제 그 몸뚱이는 떠나가고 불쌍한 영혼만이 쓸쓸히 남아 그 모든 죄업의 대가를 염라대왕 앞에서 치러야 한다.
이런 서글픈 중생들의 모습을 보셨던 부처님은 중생들의 그 허망한 삶을 바르게 살아갈 방향을 가르쳐 주셨던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의 첫 번 쩨는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육신은 명장(名將)을 따르는 병졸(兵卒)들처럼 청정한 마음을 따라 움직이게 된다고 하시면서 평소 마음부터 잘 다스려야 한다고 하셨다.
오욕락은 다섯 가지의 기본 욕망으로 얻어지는 순간의 즐거움을 말한다.
중생들이 재물을 긁어모으는 것은 육신의 안락을 위해서이다.
이성을 가까이 하는 것도 육신의 쾌락을 위해서다.
음식은 육신을 움직이고, 혀끝을 즐기기 위해 맛있는 음식을 탐하는 것이다.
그리고 명성을 얻으려는 욕심, 출세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욕심, 영전하기 위해, 승진하기 위해 온갖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욕심을 부리지만 그것도 한 순간의 일로 그친다.
늙고 병들면 한심한 과거가 후회스럽기만 한다.
수면도 마찬가지이다.
수면은 곧 편안하게 쉬고 싶은, 멋지게 놀고 싶은 욕심이다.
좋은 집, 편안한 가구, 멋진 자동차, 그리고 해와 여행, 그런 것들이 수면의 연장선상에 있는 즐길 거리이다.
그러나 그것도 한때, 늙고 병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차가운 땅속에 들어갈 때까지 그 포근함을 구하려 하는 욕망은 끝나지 않는다.
그러나 머지않아 그 좋은 집 놔두고 요양원 환자가 돼, 허망한 신세가 되고 만다.
인간이 추구하는 다섯 가지 욕망은 전혀 항구성(恒久性)이 없다.
법구(法救, Dharmatrata)가 찬한 <출요경(出曜經)>에서
“이 하루가 지나면 수명도 그 만큼 줄어들어 말라가는 웅덩이속의 물고기와 같아지거늘 무슨 즐거움이 그 속에 있으랴?”고 했지만
그래도 인간들은 이 오욕락(五欲樂)을 순간적으로 나마 마음껏 즐기기 위해 끊임없이 오늘도 죄를 짓고 있다.
※<출요경(出曜經)>---<법구경(法句經)>에 나오는 게송(偈頌)을 중심으로 부처님의 본생담 또는 부처님의 일대기, 혹은 그 제자들의 이야기 등 가장 중요한 내용을 뽑아서 대중교화를 목적으로 한, 갖가지 교훈을 담은 경이다. 경 전반에 걸쳐서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서 은유적으로 불교의 교리를 표현하고 있다. 이 경이 현재의 모습으로 성립된 것을 추정해 보면 그 내용으로 보아 4아함(阿含)이 성립한 직후의 것으로 보인다. 그 까닭은 이 경 가운데에는 자주 <잡아함경>이 인용되고 있고, 또 <4아함(阿含)>이란 말도 보이기 때문이다. 편찬자는 법구(法救, Dharmatrata)로 전한다.
<법구경(法句經)>에는 지붕을 허술하지 않게 잘 이으면 비가와도 물이 새지 않는 것처럼 마음을 바르게 잘 유지해 수행하면 오욕락이 파고들지 않는다고 하면서 오욕락에 꺼들리면 죽음의 끈을 잡고 있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리고 <열반경(涅槃經)>에서는 한시도 가만히 있지도 못하고 경망하게 움직이는 것이어서 붙잡거나 제어하기 어렵다고 했다.
마치 날뛰며 도망치는 크고 사나운 코끼리와 같으며, 시시각각 빨리 움직여서 저 번갯불과도 같고, 까불어 가만히 있지 않아서 원숭이와도 같이 방정맞다고 하며, 우리의 감각기관을 통해 온갖 악(惡)을 짓고 있다고 했다.
이처럼 마음이 통제능력을 잃어 다섯 가지 감각기관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면 파멸의 길에 들어선다.
그러므로 언제나 눈을 부릅뜨고 자기 마음을 잘 지켜야 한다.
항상 깨어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욕망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지 않는다.
언제든지 치솟는 욕망들은 끝이 없는 것이기에 반드시 도적을 잡아 가두듯 잘 억제해야 할 것이며, 제멋대로 방종하게끔 내버려 두어서는 스스로 파멸을 자초하게 된다.
「세상이 아무리 복잡하고 시끄럽다 해도 인연과 연기에 따라 완벽하게 인과로 움직이고 있다.
내가 그렇게 보고 듣지 않고, 좋다 싫다 하며 분별하지 않으면 그대로 정토(淨土)이다.
보고 듣고 움직이는 것마다 묘용이 아닐 수 없다.」
― <만선동귀집 총송>
-송영민-